조각된 꿈의 단편선

판도라는 태양을 꿈꾼다

꿈 기반 단편선 (#221224)

“네가 최초로 기억하는 꿈은 무엇이지?”

태양 신전의 성도가 되기 위한 마지막 면접시험. 시험관의 질문에 나는 눈을 감았다. 막막하게 느껴져서는 아니었다. 되려 성도 시험을 통틀어 받은 제일 쉬운 질문이었다. 정답이리라는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어떤 충동이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내 입술에서 말을 이끌었다.

“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어둠 속에 있어요.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어도 전혀 보이지 않는 그런 까마득한 암흑이요. 그 어디로도 발을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아 가만히 서 있어요. 그런데 갑자기 위에서 빛이 보여요.”

나는 눈을 뜨고 면접실의 천장을 올려다봤다. 전구가 네모난 방을 노랗게 비추고 있었다. 건물 밖, 돔의 천장에선 오늘도 위대한 인공 태양이 신자들을 내리쬐고 있겠지. 벅차오르는 경외심에 나는 두 손을 위를 향하게 들었다.

“눈부신 하얀색 빛이에요. 마치 제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환한 빛이요. 그 빛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어둠을 몰아내요.”

그리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수 소리가 들렸다. 시종일관 엄격한 무표정이던 시험관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책상에서 일어서서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올해도 태양의 은총을 받은 이가 한 명도 없을까 우려가 컸는데, 걱정을 덜게 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새로운 태양의 성도시여. 언제나 위대한 태양이 당신의 앞길을 비추기를.”

시험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한 건 그의 손을 잡고 얼떨결에 악수를 한 뒤였다. 꿈을 꾸는 것처럼 머릿속이 붕 떠서 나는 답을 끝맺는 걸 잊어버렸다. 입 모양으로만 뻐끔뻐끔 ‘제가요?’를 반복하고 있자니 시험관이 인자하게 나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예. 수습 성도 판도라. 앞으로 성하를 잘 보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때 내가 감격에 무릎을 꿇었었나? 시험관의 손에 입을 맞췄던가? 벅찬 감정이 섬세한 기억을 덮어버렸지만, 내 오랜 소망이 이뤄졌다는 뜨거운 기쁨 자체는 화인처럼 선명하게 가슴에 남았다.

*

신전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집에 계신 부모님도, 학교의 친구들도 가끔은 그리웠지만, 향수병에 잠길 시간은 많지 않았다. 수습 성도로서 해야 하는 공부도 산더미 같았고 자잘한 심부름도 많았지만, 다들 내게 친절하게 대해줘서 적응은 빨랐다.

인공 태양이 점등하기 전에 기상해서 기도를 올린 후, 대기도실의 제단을 깨끗하게 닦는 것이 내 하루의 첫 일과였다. 식사 준비며 신전 청소는 따로 고용된 이들의 몫이었지만, 제단은 신성한 곳이라 반드시 성도의 손을 거쳐야 했다. 오전 수업, 정오 기도 후 점심 식사, 오후 수업까지 마친 후에는 저녁 식사 전까지 매일 다른 일을 했다. 어떤 때는 서적 정리, 어떤 때는 창고 분류, 어떤 때는 악기 관리.

나 이전의 수습 성도였던, 이제는 정식 성도가 된 아레테는 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으면 자연스럽게 소속이 정해질 거라고 얘기해주었다. 목소리가 아름다운 그는 수습 기간이 끝나고 찬양대로 소속되었다. 첫 한 주는 아레테가 내 옆에 붙어 신전의 건물 구조와 규칙, 제단을 닦는 방법 등 여러 가지를 가르쳐주었고, 질문이 생기면 부담 없이 찾아오라고 당부했다.

아무도 절 부르지 않으면 뭘 해야 할까요? 신전에 들어오고 열흘이 지났을까, 다들 각자 일로 바빠서 나를 가르칠 여유가 없었는지 빈 시간이 생겨버렸다. 아레테 역시 나를 데리고 다니기 곤란했는지 얼굴이 잠깐 고민으로 물들었다.

“자유 시간이라고 생각해. 신전 밖으로 나가지만 않는다면 산책해도 좋고, 어려운 공부가 있으면 혼자 복습해도 좋고. 규율을 어기거나 다른 이들에게 방해만 되지 않으면 무얼 해도 괜찮아.”

그래서 나는 고민 끝에 정원으로 나갔다. 하얀 대리석으로 깔린 신전 광장 뒤편에는 해바라기가 인공 태양을 올려다보게끔 심겨 있었다. 그 정갈한 광경이 마치 태양을 향해 경배를 올리는 신자들의 모습처럼 보여 내 가슴에 경외심을 싹틔우곤 했다. 나도 저렇게 되어야지. 해바라기 같은, 태양의 충실한 성도가 되어야지.

행사 기간이 아닐 때는 신전 광장에 사람이 많지 않았고, 해바라기 정원에는 더더욱 적었다. 정원을 관리하는 성도도 일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고요함이 싫지는 않았으나, 홀로 정원에 서 있자니 조금은 외로운 기분이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친절하진 않은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본 것도 한순간,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닫자마자 나는 급하게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았음에도 하얀 신을 신은 발치까지 곧게 떨어지는 대신관의 화려한 금색 머리카락이 보였기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수습 성도 판도라, 성하를 뵙습니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말을 더듬지는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대신관은 한참 말이 없어 나는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인사가 잘못되었나? 기본적인 예의범절은 배웠다지만, 이렇게 이르게 대신관을 만나게 될 줄 몰라 인사말이 틀렸을 수도 있다. 아니면 정원에 나온 게 실수였나? 나오면 안 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빠르게 인사만 하고 방해되지 않게 자리를 비켜드려야 했나? 이럴 줄 알았으면 방에서 공부나 할 걸.

복잡하게 돌아가는 걱정 속에서 나는 고개를 들 때를 놓쳐서 어정쩡하게 허리를 구부린 채로 일어서지 못했다. 대신관도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내게 자비를 내려주었다.

“고개 들어도 돼.”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나는 허리를 폈지만, 다른 고위 신관을 대면할 때처럼 머리는 살짝 숙인 채로 두었다. 그러나 호기심이 고개를 드는 건 어쩔 수 없어서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슬쩍 앞을 올려다보았다.

또래보다 내가 키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대신관의 눈높이는 나보다 훌쩍 높아서 눈을 생각보다 높이 들어야 했다. 찬송가에 나오는 태양을 닮은 금색 머리카락, 수백 년이 넘도록 변함없었다는 아름다운 얼굴, 때 타지 않은 정결한 하얗고 눈부신 신관복, 섬세하게 조각된 금장식들보다 내 시선을 빼앗은 건 그의 두 눈이었다. 열기와 차가움이 공존하는 빛나는 금색 눈동자. 내 가장 깊은 마음조차 꿰뚫어 보는듯한 시선에 나는 숨을 멈췄다.

감히 수습 성도 주제에 대신관과 눈을 마주치다니, 이거 불경죄겠지? 세세한 죄목은 짚을 수 없었지만, 내가 실수했다는 감은 명백했다. 무릎 꿇고 죄송하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질문했다.

“수습 성도라고 했나?”

“네! 신전에 들어온 지 열흘 되었습니다.”

이번엔 용서를 빌 시기를 놓쳐 얼떨떨하게 대답하자 대신관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몇 살이지?”

“15살입니다.”

일말의 자랑스러움이 내 목소리에 깃들었다. 15살 최연소 수습 성도. 여태 무엇 하나에 뛰어난 두각을 보이지 않던 내 최초의 업적이었다.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 1년 뒤에 16살로 최연소 태양의 성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도 품었었다. 그 하잘것없는 욕심이 대신관의 날카로운 눈빛 아래서 낱낱이 까발려지는 기분이라 나는 문득 부끄러워졌다.

“황송하게도 태양의 은총을 받아 어린 나이에도 신전에서 받아주셨습니다. 성하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너는 그게 기쁜가?”

그의 얼굴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 새겨진 건 어리숙한 나도 알아볼 수 있는 분노여서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번에도 무언가를 잘못 말했나? 하지만 모시게 되어 영광인 건 당연한데도?

용서를 빌어야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용서를 빌어야지. 그러나 긴장으로 떨리는 입술을 열기도 전에 대신관은 내게 등을 돌렸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 뒷모습이 신전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

나는 아레테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울먹이며 찾아온 나를 친언니처럼 달래주던 아레테도 정확히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는 듯했다.

“네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죄를 지었다고 보기엔 어려운데…. 혹시 더 기억나는 건 없고?”

“네, 그게 정말 다예요. 태양에 맹세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안 믿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울음은 뚝 그치고.”

내게 얼굴을 닦을 천을 건네주며 아레테는 곰곰이 고민에 잠겼다. 나는 먹이를 물고 돌아오는 어미를 기다리는 새끼 새처럼 그의 입에서 해결책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성하의 눈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걸 보고, 그분의 마음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것까지 헤아리지. 태양의 은총을 받은 우리여도 그분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야. 화내시는 것처럼 보였다지만, 네게 징계가 내려온 건 아니니 생각보다 큰일은 아닐 수도 있고.”

다정한 위로였으나 내가 원하던 해답은 아니었다. 아레테도 그걸 알았는지 머쓱하게 미소 짓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정식 성도가 된 기간이 짧아서 네게 많은 도움이 되지 않네. 너무 걱정하지 마, 판도라. 신관님들은 잘못은 대충 넘어가시지 않아. 아직 아무런 말이 없는 걸 보면 큰 문제는 아닐 거야.”

어느 정도 진정하기도 했고, 최선을 다해 위로해 준 아레테의 시간을 더 뺏기도 미안해서 방으로 돌아가려던 내게 아레테는 친절하게 마지막 조언을 남겨주었다. 그래도 마음에 걸린다면, 다음에 성하를 뵐 기회가 오면 직접 용서를 빌도록 해. 타당한 조언이어서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기회는 제대로 마음의 준비를 하기 전에 찾아왔다. 새벽과 함께 일어나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제단을 닦으러 종종걸음치던 발에 추가 달린 듯 멈췄다. 제단 앞에는 점차 밝아오는 인공 태양보다 몇 배는 찬란하게 눈부신 이가 서 있었다. 금색 머리카락과 하얀 신관복이 어우러져 빛의 현신 같은 대신관이었다.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돌아보았다. 나는 냅다 고개를 숙였고 그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는지 이름을 또 묻지는 않았다.

“제단을 청소할 시간이 되었나 보군. 비켜주지.”

“자, 잠시만요, 성하!”

잠에서 덜 깬 모양이었는지 급하게 말을 꺼내려다가 혀를 씹을 뻔했으나, 어설픈 요청에도 대신관은 멈추어 서주었다. 시간이 더 지체되기 전,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돌바닥의 한기가 얇은 천을 뚫고 피부에 스며들었다.

“저번에는 죄송했습니다! 제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는 게 없어서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감히 성하의 너그러운 용서를 요청합니다.”

되었다. 마음의 준비는 되지 않았지만, 아레테의 조언을 받고 나서부터 연습해 온 사죄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대신관이 자비를 베풀어줄지는 몰랐지만, 최선을 다했으니 나는 잠자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몇 시간 같은 몇 분이 지나고 머리 위에서 긴 한숨이 들렸다.

“수습 성도 판도라, 일어서라.”

아직 용서받지 못했는데 일어나도 되는지 걱정되었으나 대신관을 거역할 수도 없었기에 나는 우물쭈물 일어섰다. 들지 못한 머리 위로 그림자가 져서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걸 알았다.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네게 화를 낸 건 아니다. 잘못한 것 없으니 내 앞에서 무릎 꿇지 마.”

내리깐 눈보다 귀가 먼저 번쩍 뜨였다. 용서해 주시는 건가? 화내신 건 아니라고 하셨으니 괜찮은 것 맞겠지? 이제 고개를 들어도 될지 고민하던 차에 가벼운 무게가 느껴졌다. 대신관이 내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나는 황송함에 굳어버려 그가 대기도실을 떠날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제단 앞에 홀로 남겨진 나는 조심스레 손을 들어서 내 머리에 얹었다. 태양의 온기는 남아있지 않았지만, 밀색에 가까운 내 옅은 노란색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환해 보이는 것 같았다. 고된 하루의 일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잊고 나는 활짝 웃었다.

*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아주 오래된 꿈, 친한 친구처럼 자주 찾아오던 꿈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어둠 속. 어둠이 두려운 건 아니었지만, 보이는 게 없어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 몰라 늘 그렇듯 가만히 있었다. 위에서 빛이 나타나길 기다리며.

“난 이제 여기를 떠날 거야.”

처음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얼굴을 더듬거리며 내가 모르는 사이 입을 열었나 살폈지만, 내가 낸 소리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목소리는 맑았지만 단단했다. 내가 평생 내본 적 없는 당당한 음성이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달라 간청하는 것은….”

“소용없겠지. 알잖아.”

목소리는 혼자가 아닌 둘이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들려오는 말에 집중하려고 눈을 감았다. 심장이 쿵쾅대며 뛰었다. 평소와 달라진 꿈은 약간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지만, 누를 수 없는 호기심에도 불을 지폈다. 당신들은 누구인가요? 나는 묻고 싶었으나 목소리는 물먹은 것처럼 소리가 없었다.

“정말 이렇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는 거야?”

두 번째 목소리는 첫 번째 목소리보다 낮았다. 그의 얼굴도 보이지 않고, 마음도 알지 못했으나 착각할 수 없는 짙은 회한이 깔린 음성이 내 귓가를 맴돌았다. 낯설지만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는 아니라고 나는 어쩐지 확신했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첫 번째 목소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하얀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빛은 가느다란 줄처럼 뻗어나가 조금씩 문의 윤곽을 만들었다.

“내가 남길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내게 주어진 건 이름 하나 빼고 전부 빼앗겨버렸는데.”

문장의 끝에 다다라 목소리는 점차 희미해지더니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하얀빛으로 만들어진 문의 윤곽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렸지만, 그 누구의 목소리도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문 앞에 서서 나는 어둠을 몰아내는 빛을 바라보았다. 문고리는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있었다. 손끝이 꿈틀거렸다.

기억할 수 있는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이 문의 너머엔 무엇이 있을지, 나는 늘 궁금해했다. 그러나 그 문을 여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거라는 직감이 언제나 나를 붙들었다. 정확히 무엇이 벌어질지는 알지 못했으나, 호기심으로 손을 움직이기엔 용기가 부족했다.

나는 오늘 밤도 그 문을 열지 않았다.

*

신전에 들어온 후 나는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태양을 모시는 성도는 속세를 멀리하고 오롯이 대신관을 보필하는 데만 집중해야 했기에 신관 급의 허가 없이는 신전을 벗어날 수 없었고, 허가받아도 오래 자리를 비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습 성도라고 크게 다르진 않았다.

아직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나를 배려해서 내 일과는 신전 봉사보단 공부로 많이 채워졌다. 오전에는 학교에서 배워야 했을 언어, 수학, 역사 등을 배웠고, 오후에는 신전의 교리와 역사, 성도의 의무를 익혔다.

솔직히 말해 나는 공부에 재능이 없었다. 학교에 다닐 때도 성적이 상위권에 들 만큼 똑똑하지 않았고, 벌어진 등수를 메꿀 만큼 노력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밉보이고 싶지 않아서 조금 더 열심히 공부하긴 했으나, 선생님의 눈에 큰 차이가 보일 리 만무했다.

그러나 역사 선생님만큼은 나를 예뻐해 주셨다. 내가 가장 좋아한 과목이어서 열정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태초의 태양 신화부터 시작해서 태양의 조각을 심장 삼아 태어난 최초 인류의 역사, 그들이 일구었던 삶과 문명, 태양의 교리를 잊고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켜 땅을 황폐하게 만든 인간들과 그에 분노한 태양신이 징벌을 내려 남은 땅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는 현대 역사까지, 나는 졸음 한 점 없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집중해서 들었다.

오늘은 전쟁과 징벌 이후 인류의 마지막 피난처로 만들어진 돔과 인공 태양에 관해 배울 차례였다. 선생님은 단상에 서 계셨고,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교과서를 펼쳤다. 얇은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넘어가고 돔과 바깥벽의 그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350년 전, 최악의 전쟁이 끝나고 노한 태양신이 땅을 불태웠다고 배운 건 기억하고 있지? 하지만 태양신은 인류를 멸하는 대신 자비를 베풀어 피난처가 될 땅을 남겨주셨단다. 그곳에서 참회하고 태양신을 섬기며 살면 언젠가는 우리를 용서하고 다시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으로 복구해 주겠다고 하셨지. 전쟁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태양신의 자비에 감사하며 신전을 세우고 그 중심으로 집을 지었어.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돔의 시작이었단다.”

돔의 시작에 관해선 어린이용 그림책으로도 여러 번 본 적 있었기에 익숙한 내용이었다. 태양의 신자들은 타지 않은 땅에 신전을 세우고, 그 주변에 집을 짓고, 분노를 거두지 않은 태양을 피하려고 돔을 세웠다. 자비로운 태양신은 돔에 사는 신자들에게 인공 태양을 허락해 주었다. 인공 태양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켜지고 꺼지며 돔에 필요한 모든 에너지의 원천이 되었고, 사람들은 인공 태양을 찬양하며 태양신의 약속이 임할 날을 기다렸다. 언젠가 태양신이 분노를 거두고 진짜 태양을 허락할 약속의 날을.

“그럼, 바깥에 나가면 진짜 태양을 볼 수 있는 건가요?”

선생님은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이 작은 창문을 흘끔 바라보았고, 내 시선도 자연스레 같은 방향을 향했다. 정오를 향해 달려가는 시각, 인공 태양의 금색 빛이 유리를 통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내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이끌었다.

“볼 수는 있겠지. 하지만 아직은 허락되지 않은 축복이어서 태양을 보는 순간 우리는 불타오를 거란다. 바깥까지 무사히 나갈 수 있다면 말이지. 기억나지? 태양신의 마지막 자비까지 거부한 야만적인 불신자들에게서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바깥벽이 세워졌다는 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돔의 역사와 인공 태양에 관해 배우기도 전에 어른들은 호기심 많은 아이들에게 바깥벽의 중요성부터 가르치곤 했다. 절대 벽 바깥으로 나가선 안 된다. 벽 근처에도 얼씬하지 말아라. 벽 밖에 사는 괴물 같은 불신자들이 너희를 납치해서 잡아먹을 거란다.

머리가 좀 크고부터는 아이들은 괴담처럼 내려오는 불신자들의 이야기를 전부 믿지는 않았지만, 위험한 호기심의 충족보다는 안락한 삶을 선호하게 되어 굳이 바깥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고, 같은 방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내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벽 밖으로 나가겠다는 꿈을 아직 품고 있는 건 아니었으나, 다른 아이들처럼 호기심의 불씨가 완전히 사그라들지는 않았다. 그 불씨는 질문이 되었고, 선생님들의 곤란이 되었다. 바깥에 관해, 진짜 태양에 관해 질문할 때마다 선생님들은 빠르게 주제를 돌리려 했고, 신전 선생님도 다르지 않았다.

“돔과 바깥벽은 태양의 신자들을 350년 동안 보호해 왔지. 우리, 성도와 신관들은 이곳 신전에서 태양신이 약속의 증표로 보내주신 대리인, 대신관 성하를 보필하며 오늘까지 참회하고 있고. 성하를 뵌 적 있니?”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세세한 상황까진 묻지 않았고, 나도 두 번 대신관을 뵈었던 때를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그에 관해서 더 자세히 배우게 된다면 그날 왜 그런 반응을 보여주셨는지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내 안에서 싹텄다.

그 기대를 짓밟은 건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탁상시계의 자명종 소리였다. 선생님이 시간을 확인하고 책을 정리해서 품에 안아 들었다. 그리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를 보며 웃어주었다.

“오늘도 참 열심이구나, 판도라. 학생으로서 아주 좋은 태도지. 다음 수업까지 기다리기 어렵다면 신전 도서관에 한번 가보렴. 신전의 역사에 관한 서적은 많고, 그중 성하와 관련된 내용의 책들도 있을 테니까.”

신전 도서관. 솔깃해진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도서관으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정오 기도 시간이 임박해 있었고, 그 후에는 오후 수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나를 찾는 성도가 없기를 빌었으나 언제나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인 수기 기록부에서 손을 빌려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나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서야 도서관을 찾아갈 수 있었다.

불을 하나둘 끄기 시작하는 도서관은 한적했다. 도서관의 사서를 맡고 있는 성도가 나를 보고 물었다. 30분 후에 소등할 텐데 괜찮겠니? 나는 들고 온 작은 손등을 보여주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신전 역사에 관한 서적이 어디 있는지만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그는 흔쾌히 들어주었다.

동일한 간격을 두고 넓은 방을 채운 책꽂이는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 사서 성도가 알려주신 곳을 끝까지 걸으며 살피던 내 눈이 색이 다른 책장을 발견했다. 검은색 나무로 만들어진 책장은 꽂힌 책이 보이는 구조가 아니었다. 여닫는 책장인가? 자물쇠나 손잡이가 보이지 않아 슬쩍 나무를 쓸어보던 손이 거친 나무가 아닌 매끄럽고 차가운 금속에 닿았다. 나는 책장에 등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검은 나무에 새겨진 금색 태양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수습 성도. 그곳에 보관된 서적을 볼 권한이 없을 거라 생각하는데.”

깜짝 놀란 나는 등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리고 뒤돌아서 내게 말을 건 이를 확인한 후에 진짜로 떨어뜨렸다. 다행히 유리 재질이 아니라 깨지진 않았지만, 바닥을 굴러다니는 등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무릎을 꿇으려는 나를 대신관은 가벼운 손짓으로 제지하고 검은색 책장에 눈길을 주었다가 다시 나를 응시했다.

“저곳에는 왜 관심을 가지는 거지?”

후다닥 손등부터 주워 든 나는 어떤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눈만 좌우로 굴렸다. 몇 초 지나고 나서야 질문을 받았는데도 말없이 침묵하는 게 더욱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태양 문양이 그려져 있는 걸 봤습니다. 태양과 관련된 서적이라고 생각해서 궁금했어요.”

“태양과 관련된 책이라면 네 수업 시간에도 충분히 볼 텐데.”

“인공 태양이 아니라… 진짜 태양이요.”

이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걸 경험으로 숙지하고 있었으나, 나는 숨죽여 고백하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것 같은 금색 머리카락에 홀려서였을까, 아니면 금빛 눈동자가 거짓을 전부 꿰뚫어 볼 것 같다는 위압감 때문이었을까.

대신관은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그랬듯 곤란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대신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태양엔 왜 관심을 두는데?”

“모든 성도라면 무릇 태양과 태양신을, 그리고 성하를 경외하니까요.”

“경외와 호기심은 다르지.”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내 마음을 채운 건 경외뿐이라고 당당히 주장하기엔 명백한 거짓임을 나도 알고 대신관도 알 터였다. 하지만 이번엔 곧이곧대로 털어놓지 못하는 이유가 있어서 나는 대신관의 눈치만 봤다. 그도 한참 나를 바라보다가 툭 내뱉듯이 면죄부를 주었다.

“이곳에서 오간 말에 관한 책임은 묻지 않을 테니 말해봐라.”

고결한 대신관이 내게 거짓된 약속을 할 리가 없었다. 난생처음 일시적일지라도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는 고양감이 나를 채워, 막아뒀던 단어들이 입에서 우르르 굴러 나왔다.

“제 부모님은 보존서고 관리인이세요. 그래서 어렸을 적엔 학교가 끝나고 서고에서 부모님이 퇴근하길 기다렸어요. 숙제가 일찍 끝나면 가끔 책을 꺼내서 보기도 했고요. 허락은 받았어요. 대부분은요.”

진술한 내용에 관해 벌하지 않겠다고 약조하셨지만, 그래도 한때의 잘못을 고백하기엔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꼼지락거리는 두 손을 등 뒤로 감췄다.

“한번은 급한 일이 있어서 두 분 다 자리를 비우셨어요. 정말 급했는지 늘 들고 다니는 열쇠를 책상 위에 두고 가셨더라고요. 잠겨있는, 문에 태양 문양이 그려진 서고의 열쇠를요.”

당시를 회상하자면 호기심이 나중에 혼날 거란 두려움을 이기는 나이라서 겁 없이 열쇠를 집어 들고 서고에 몰래 들어갔던 것 같았다. 그러나 번쩍이는 태양 같은 대단한 보물이 숨겨져 있으리란 어린 기대와 달리 서고에는 먼지 쌓인, 오래된 책들밖에 없었다. 그냥 나가기엔 아쉬워서 나는 아무 책이나 골라 펼쳐봤었다.

“그 책에는 선명한 그림들이 있었어요. 태양을 그려둔 그림이요. 아마 돔을 짓기 전에 만들어진 책이었겠죠? 진짜 태양을 본 적 없으면 그릴 수 없을 것 같은 그림이었으니까요.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는 풍경들로 가득했어요. 새파란 하늘, 수영장보다 몇백 배는 커 보이는 끝없이 펼쳐진 물, 초록색이 가득한 벌판, 하얀색으로 칠해진 산… 그리고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요.”

누군가에게 처음 털어놓는 이야기는 나를 어린 꿈속으로 다시 이끌었다. 그때 느꼈던 설렘과 두근거림이 언제 잠들었었냐는 듯 되살아났다. 그 기억은 호기심의 장작이, 꺼질 수 없는 불씨가 되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고를 도로 잠그고 열쇠를 책상 위에 돌려놓은 후에도 나는 그 책을 펼쳐보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때부터 쭉 진짜 태양을 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어왔습니다. 그래서 태양에 가장 가까운 성하를 곁에서 보필하는 성도가 되고 싶었어요. 그 꿈을 이루게 된 것이 저는 정말 기뻐요.”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네?”

꿈결에 젖어있던 나는 차가운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대신관의 날카로운 눈이 내게 잠시 머물렀다가 검은 책장으로 향했다. 내 어깨가 자연스레 움츠러들었다. 역시, 약조를 지킬 수 없을 만큼 큰 죄를 지었던 걸까. 나는 이제 신전에서 쫓겨나는 걸까. 자기반성과 두려움에 짓눌려 고뇌하던 나는 나무가 삐걱거리며 마찰하는 소리에 머리를 들었다.

대신관이 검은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꺼내고 있었다. 어떻게 열었는지 보지는 못했으나 그걸 궁금해할 틈도 없이 그가 내게 책을 안겨주었다. 어리벙벙하게 내 품에 있는 책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그가 짧게 한숨 쉬듯 일러주었다.

“책등을 저 문양에 대면 책장이 열릴 거다. 들키지 않게 보고 돌려놓는 건 알아서 해라.”

5분 뒤에 도서관 문을 잠근다는 사서 성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신관은 내 인사를 기다리지 않고 발을 돌려 떠나갔다.

*

“난 이제 여기를 떠날 거야.”

주인 모를 목소리는 친숙한 꿈에 본래 있었던 것처럼 자리 잡았다. 얼마나 자주 들었는지 현실에서 듣게 된다면 누구인지 바로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나는 확신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달라 간청하는 것은….”

“소용없겠지. 알잖아.”

“정말 이렇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는 거야?”

두 번째 목소리 역시 이제 낯설지 않았다. 첫 번째 목소리와 달리 분명 아는 목소리 같아서 기억을 더듬던 찰나, 하얀빛이 문의 윤곽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남길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내게 주어진 건 이름 하나 빼고 전부 빼앗겨버렸는데.”

곧 빛이 어둠을 집어삼키고 꿈이 끝나리라는 것을 알아 나는 목소리들의 정체를 알아내는 걸 포기하고 의식이 현실로 부상하기를 기다렸다. 환한 적막 속에서 나는 빛나는 문고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낯설지 않은 목소리. 들어본 적 있는 말. 머릿속을 스치는 깨달음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대신관의 목소리였다. 차분한 회한이 깔린 간청과 낮고 차가운 일침은 어조는 확연히 달라도 둘 다 그의 음성을 띠고 있었다.

왜 여태까지 알아채지 못했을까? 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사방에 하얀빛과 문의 윤곽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내가 시도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빛에 닿을락 말락 망설이다가 이윽고 문고리에 닿았다.

불에 덴 것처럼 뜨거운 통증이 손을 스쳤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꿈에서 깨어났다. 하얀빛이 사라지고 익숙한 침실의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화끈거리는 손을 가슴에 대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주변에 같은 침실을 쓰는 성도들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아 다행히 아무도 깨지 않은 듯했다.

아직 인공 태양이 점등하지 않아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잘 보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눈앞에 손을 가져와 자세히 살폈다. 화상은 없었지만, 문고리에 닿았던 손바닥은 여전히 뜨거웠다.

*

대신관이 내게 검은 책장을 여는 방법을 알려준 이후 나는 신전 도서관의 단골이 되었다. 그가 꺼내준 책을 몰래 숨어 닷새 만에 완독한 나는 적당한 틈을 타서 그가 알려준 대로 책장을 열고 책을 돌려놓았다. 그러나 문을 닫으려던 순간 그 안에 빼곡히 채워진 책들을 본 나는 망설였다. 고뇌는 짧았고, 책장 문을 닫은 내 손엔 새로운 책이 들려있었다.

신전의 규율을 어기고 있다는 죄의식은 있었다. 하지만 대신관이 내 죄를 묵인해 주었다는 사실이 억누르지 못한 호기심에 면죄부를 주었다. 몇 주나 지났을까, 내가 검은 책장에서 꺼내 읽은 책의 수가 한 손을 넘어갈 때였다.

“호기심은 미덕이 아니라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나?”

처음 그의 목소리를 등 뒤에서 들었을 때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나는 방금 책장에서 새롭게 꺼낸 책을 품에 안고 뒤돌아 허리를 깍듯이 숙여 인사했다.

“수습 성도 판도라, 성하를 뵙습니다.”

대신관은 인사에 답하는 대신 내 손에 들린 책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조금 위축되긴 했으나 그가 나를 혼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아 나는 조그만 목소리로 자신을 변호했다.

“성하께서 제게 책을 먼저 꺼내주셨잖아요.”

“한 달 내내 계속 책을 꺼내보고 있을 줄은 몰랐지.”

어이없다는 듯 꾸중하면서도 그는 내게 책을 돌려놓으란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게 무언의 허락처럼 들려 나는 책으로 입을 가리고 활짝 웃었다. 오늘도 밝게 빛나는 금색 눈동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가늘어졌다.

“참 이상하지. 닮은 점이 없는데 닮았어.”

낮은 중얼거림은 내게 건네는 말보다는 혼잣말 같아 나는 누구와 닮았다는 건지 물을 수 없었다.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가 저번처럼 훌쩍 떠나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나는 용기 내 다시 말을 걸었다.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하는 것은 죄일까요?”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던 대신관의 눈에 또렷하게 초점이 돌아왔다. 그의 시선이 태양 문양이 새겨진 검은 책장으로 향했고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서는 그럴 수 있지.”

이곳이 신전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사는 돔 전체를 뜻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았으나 면죄부를 뺏긴 것 같아서 나는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치기 어린 이유만으로 여태 호기심을 키워온 건 아니어서 나는 다시 자기변명을 시도했다.

“하지만 벽 너머 불신자들에게서 돔을 지키려면 많은 걸 아는 게 좋지 않을까요?”

대신관의 얼굴에 비소가 걸렸다. 내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자,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또 누가 네게 세뇌한 믿음이지? 다소 과격한 단어 선택에 나는 당황했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레테가 그랬었지, 대신관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린다고. 그가 하는 말에는 다 이유가 있을 터였다. 내가 알지 못할 뿐.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밖에 없었다.

“누구라고 하기보다는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 선생님, 그리고 이제는 신관님들께서 내리는 가르침인걸요.”

“무엇을 위한 가르침인데?”

“우리를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한 가르침 아닐까요?”

“바깥에 위험이 있다는 걸 직접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지?”

“그야….”

내 목소리가 점차 사그라들었다. 바깥에 위험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지? 어른들이 그리 가르쳐주었으니까. 그럼, 어른들은 그걸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내가 아는 한 부모님은 한 번도 벽 밖으로 나가본 적 없었다. 그렇다면 부모님도 그들의 부모님에게서 배운 걸까? 부모님의 부모님은?

한번 시작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갔다. 성도 시험도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대신관은 내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결국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편적인 대답에 기대야 했다.

“다들 그렇게 말하니까요. 최근에도 불신자 무리가 서쪽 벽을 습격해서 돔의 군인들이 막아냈다고 하는걸요. 그중 막무가내로 돔에 침입하려던 이들이 죄수로 붙잡혔다고 들었어요.”

무려 돔의 의회원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였기에 거짓일 리가 없었다. 며칠 전, 성도 면접시험에서 내 시험관이었던 의회원이 나를 찾아왔었다. 수습 성도가 잘 적응하고 있는지, 혹시 신전 생활에 부적합하진 않은지 확인하는 간단한 의례였다. 성도로서의 생활이 어떠냐고 묻는 말에 나는 공손하게 답했었다.

“배울 게 많지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의회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성실한 성도가 되어서 성하를 빈틈없이 보필하겠습니다.”

성하의 말씀대로 전 아직 아무것도 모르지만…. 더 노력하겠다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의회원의 얼굴이 바뀌어서 입이 얼어붙었다. 성하께서 무얼 말해주셨습니까? 마치 내가 불신자라도 되는 듯한 적대적인 눈빛과 싸늘한 목소리는 지금도 쉽게 잊히지 않았다. 그때 내가 간신히 더듬거리며 할 말을 찾았던 심경도 선명히 기억났다.

“아, 아무것도요. 제가 많이 부족한 탓이었겠죠.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내가 움츠러든 게 보였는지 의회원은 바로 얼굴을 풀고 면접이 끝났을 때처럼 인자하게 웃어주었다. 그래요,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어제 불신자 무리의 습격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던 모양이에요. 몰랐던 소식에 내가 겁먹은 표정이라도 지었는지, 의회원은 떠나기 전에 내게 위로의 말을 남겼었다. 성하가 우리 곁에 있고, 신전이 건재하고, 인공 태양의 빛이 꺼지지 않는 이상 돔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대신관은 내 앞에 계셨고, 신전의 평온한 일상은 오늘도 흘러갔고, 인공 태양은 여전히 우리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매일 눈을 떠도 변함없는 그 평화가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믿음을 주었다. 이곳은 안전하다고. 분노한 태양이 바깥 땅을 불태우고 불신자들이 우리의 평온을 깨려 해도, 벽이 있는 이상 우리는 안전할 거라고.

하지만 대신관이 나를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그 믿음에 의문이라는 균열이 갔다. 내가 자신만만하게 안다고 자부하는 모든 것이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떨궜다.

“이것저것 배우고 들은 건 있지만… 성하의 말씀대로 아직 수습 성도밖에 되지 않으니, 전 아무것도 모르겠죠. 그래서 더욱 알고 싶은 거고요.”

품에 끌어안은 책에 내 온기가 옮아 뜨뜻미지근하게 느껴졌다. 대신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불편함을 견디지 못해 슬쩍 머리를 든 나는 무표정한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정말 알고 싶어?”

꿈속 문 앞에 선 것 같았다. 정말 이 문을 열고 싶어? 두꺼운 책의 모서리가 손을 묵직하게 찔렀다. 너는 네 호기심에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나? 묻지 않은 질문이 가슴을 두드렸다. 나는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대신관을 올려다보았다.

“네, 알고 싶습니다.”

대신관은 두 번 묻지 않았다.

*

이틀 뒤, 정오 기도가 끝나고 바로 대신관의 방을 찾아가라고 일러준 건 아레테였다. 대신관의 방으로 가는 길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그의 눈엔 선명한 부러움이 깃들어있었다.

“벌써 성하의 눈에 들어 수행자로 선택받다니, 정말 부럽다. 네 신앙이 무척 신실했나 봐.”

차마 긍정하지 못한 나는 애매하게 웃고 고맙다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대신관의 마음에 들었는지는 몰랐으나, 그가 내게 보여주려는 게 있다는 것은 명확했다.

“이틀 후, 나를 수행하러 오거라. 신관들에게는 내가 말해둘 테니 네가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둘 소등하는 도서관의 불빛 속에서 그는 떠나기 전 내게 나직하게 말했었다. 거부할 수도 없었고, 설령 선택지가 주어졌어도 아마 거부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가 내리는 것이 포상이었든지, 징벌이었든지. 나는 직접 미지의 상자를 열어서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대신관은 나를 데리고 신전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나는 질문해도 되는지 몰라 조용히 뒤따랐다. 오랜만에 신전을 벗어난다는 사실에 조금 들떠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정신이 팔린 것도 사실이었다. 신전 정문이 아닌 뒷문으로 나가서 숲길을 걷다 보니 신전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신전 건물이 작지는 않았지만, 빽빽하게 심어진 나무들은 내가 평생 본 그 어떤 나무보다 컸다. 조경된 숲이 아주 드문 돔 안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곤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신탁 죄수에 관해 배운 적 있나?”

한참을 침묵 속에 걷던 대신관이 갑자기 내게 질문을 던졌다. 높게 솟은 나무들을 관찰하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오후에 받던 교리 수업을 떠올렸다. 마침 지난주에 배운 내용이었던 터라 나는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3년마다 올리는 태양 기도식에서 축복을 입는 사람입니다. 태양신과 인공 태양의 연결을 유지하고 빛이 꺼지지 않게 하도록 신전은 태양신의 신탁을 받은 이를 선별해요. 신전의 성도 중에서 선별될 수도 있고, 가끔은 벽 밖에서 진짜 태양 아래 살아가는 불신자들에게서도 발견된다고 합니다. 전자가 신탁 성도, 후자가 신탁 죄수라고 불리고요.”

속사포처럼 아는 지식을 내뱉은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대신관은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탁 성도, 또는 신탁 죄수는 기도식에서 성하의 축복을 받고, 하루 동안 소등한 인공 태양 안에 들어가 기도하며 태양신에게서 받은 빛을 인공 태양에 전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렇게 태양의 축복을 입고 귀한 이가 되어서 신전에서 평생을 보장받는다고 했어요. 신전의 가장 고귀한 곳에 있어서 아무나 만날 수 없다고도 했고요.”

“선별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고?”

“잘은 모르지만… 성하께서 직접 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대신관이 고개를 힐끗 돌려 신전을 떠나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나도 그 시선을 따라 잠시 돌아보았지만, 시야에 보이는 건 울창한 숲뿐이었다. 다시 머리를 돌린 나는 서늘하게 빛나는 대신관의 금빛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래, 내가 직접 선별하지. 신탁받은 자를 찾아내기 위해 내가 존재하는 거나 마찬가지거든.”

역시 대단하시다느니 하는 찬양을 그가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다른 할 말을 찾아 헤맸다. 그러고 보니 올해 기도식이 열리겠구나. 해가 가장 짧은 날에 열리는 기도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나는 어느새 거리가 조금 벌어진 대신관을 향해 종종걸음쳤다. 내 목소리에 억누르지 못한 두근거림이 묻어나왔다.

“아직 신탁 성도나 신탁 죄수가 선별되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 혹시 며칠 전 붙잡혔다는 불신자 중 신탁 죄수가 있는지 확인하러 가는 건가요?”

“눈치는 빠르군.”

신탁 죄수를 선별하는 과정을 내가 직접 보게 된다니! 정식 성도도 되지 못했는데! 영광스러운 마음에 내 얼굴이 급격히 밝아졌음을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대신관은 그런 내 얼굴을 보고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곧 목표지에 도착한다는 말과 함께 그가 내게 경고했다.

“이제 여기부터는 내 허락 없이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말고 옆에 조용히 있거라. 누군가 네게 말을 걸어도 침묵을 지키고, 눈을 마주치지 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즉시 눈을 내리깔았다. 나를 앞서가는 대신관의 긴 금색 머리카락이 고르지 않은 우툴두툴한 숲길 바닥을 비단처럼 쓸고 갔다. 빛에 홀린 나방처럼 나는 그를 따라갔다.

곧 사방을 둘러싼 나무가 사라지고 나는 작은 공터에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인기척이 있는 걸 보아 나와 대신관 둘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거칠지만 예의 바른 목소리가 우리를 반겼다.

“성하를 뵙습니다. 찾아오신다는 언질은 받았습니다. 뒤의 아이는….”

“나를 수행하는 아이다. 나와 함께 들어갈 거다.”

자물쇠가 풀리고 철문이 열리는 날카롭고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대신관이 내게 짧게 말했다. 따라오거라. 나는 침묵으로 대답하고 그가 가는 길을 따라 밟았다. 갑자기 머리 위가 어두워지고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지만, 나는 돌아보지 못했다.

바닥이 흙에서 딱딱한 돌로 변했다. 우리가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는 걸 추측할 수 있었지만, 전구 빛이 어두워 그 외에는 파악하기 힘들었다. 한 발짝 나아갈수록 점차 어두워져 없던 폐소공포증까지 생기는 기분에 들떴던 마음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대신관은 이곳에 익숙한 듯 걸음이 거침없었다. 오래가지 않아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에 다다랐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공기가 눅눅하고 갑갑해져서 나는 티 나지 않게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다가 흠칫했다. 평소 맡아본 적 없는 불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시큼하고, 진득하고, 물에 젖은 철 같기도 한….

점점 숨을 들이쉬는 게 곤란해져서 코 대신 입을 자그맣게 열고 숨을 쉬는 데 집중하다 보니 계단이 끝난 걸 눈치채지 못해 발을 헛디딜뻔했다. 대신관이 나를 힐끗 돌아보고 벽을 밀었다. 예상외로 벽이 손쉽게 밀려서 놀란 것도 한순간, 대신관이 벽 사이에 생긴 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틈이 닫히기 전에 나도 빠르게 발을 옮겼다.

벽 사이 틈을 지나자마자 나온 둥그런 공간은 철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감옥이었다. 감옥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착각할 수 없었다. 대신관의 경고를 머리에 새기고 있었음에도 숨이 턱 막히는 소리가 내 입술 사이를 빠져나갔다.

어둡고, 퀴퀴하고, 냄새나고, 지저분했다. 그곳에서 대신관은 홀로 깨끗하고 빛나는 이질적인 존재처럼 방의 입구에 서 있었다. 낮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나는 철창 안에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불신자를 직접 보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하지만 방이 너무 어둡고, 그들은 움직임이 없어 눈을 가늘게 떠도 윤곽만 보일락 말락 했다.

대신관이 움직였다. 시계방향으로 둥그런 방의 철창을 따라 한 걸음씩 발을 옮기는 그를 보고 나는 잠깐 망설였다. 그를 수행하러 온 거니, 나도 따라야겠지? 이런 곳에서 혼자 떨어지고 싶지 않기도 했다. 아무리 철창 안에 갇혀있더라도, 만에 하나 불신자가 탈출한다면 어떡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시계의 초침처럼 우리는 방을 천천히 돌았다. 선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몰랐으나, 대신관은 느리게 움직일지언정 한 번도 멈춰 서지 않았다. 그가 가까이 지나가면 불신자들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방을 거의 다 돌았을 때 처음으로 가느다란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제발 도와주세요.”

멈춰 선 건 인간적인 본능이었다. 자신보다 약한 자가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가 들리면 누구든 한 번쯤은 돌아보지 않겠는가? 혹시라도 실수로 돔의 시민이 불신자들 사이에 섞여 들어왔다면? 나는 방금 지나치려던 옆 철창을 힐끔거렸다.

작은 아이가 철창을 붙들고 주저앉아 있었다. 창살을 움켜쥔 손가락은 너무나도 가늘었다. 그다음 눈에 띈 건 갈색으로 탄 피부였다. 감옥이 어두워서 나타난 착시현상인가 싶었지만, 그들이 돔이라는 보호 없이 진짜 태양 빛을 받고 살아와서 돔 시민과 피부색이 다르다는 걸 곧 깨달았다. 이 아이는 잘못 섞여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바깥에서 온 불신자였다.

“제 엄마 좀 찾아주세요. 엄마 좀 보게 해주세요.”

울음으로 잔뜩 쉬었지만, 나보다 앳된 목소리였다. 그 음성에 담긴 적나라한 공포와 처절함이 나를 뒤흔들었다. 야만적이고, 돔을 파괴할 생각만 가득하다던 불신자도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나? 아이의 울부짖음에 대답할 용기는 없었다. 대신 나는 머리를 살짝 돌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내려다보았다.

눈물로 젖은, 선명한 갈색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부족한 빛 속에서도 나와 비슷한 눈 색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피부색을 제외하면 아이는 나와 다를 바 없었다. 두 눈도, 코도, 입술도. 그것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표현도. 살고 싶다고 간청하는 목소리도. 같이 철창에 갇힌 불신자들이 소리에 이끌려 하나둘 나와 아이가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들과 눈을 마주쳤다.

사람들. 나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쳤다.

벽이 바닥을 긁는 소름 끼치는 소음이 들렸다. 대신관이 내게 다가와 가까이 섰다. 나한테 간신히 들릴 정도로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기억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절대 고개 들지 마.”

나는 순순히 머리를 숙였다. 너무 혼란스러워서 지시에 의문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내가 알던 것, 배워온 것, 그리고 깨달은 것들이 충돌하며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새로운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누군가 벽 틈을 건너와서 우리 앞에 섰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나는 일러준 대로 가만히 서서 그가 대신관과 대화하는 것을 들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성하. 뒤의 아이는….”

“나를 수행하는 아이이니 신경 쓰지 마라.”

“아, 예. 무례하게 질문해서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그 일 이후로 불신자들을 다루는 건 예민한 사항이 되어서요. 죄수들은 전부 둘러보셨습니까?”

“그래.”

“이중 신탁을 받은 이는….”

“없다.”

큰 한숨이 들렸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지 않아도 음성에 난감함이 진하게 배어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구둣발이 초조하게 바닥에 부딪히며 딱딱거리는 소리를 냈다.

“의회에서 이제 기도식까지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고, 긴급히 신탁받은 이를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성하에게 책임이 있다는 뜻은 아니고… 전 일개 대리인이자 전달자에 불과하니까 노여워 마십시오.”

대신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수긍, 또는 용서라고 받아들였는지 의회의 대리인이라고 밝힌 이의 목소리에서 저자세의 태도가 사라졌다. 방을 치워도 괜찮겠느냐는 듯한 일상적이고 평온한 어조로 그가 물었다.

“신탁 죄수가 없다고 하시니 나머지는 빠르게 절차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성하도 바쁘실 테고, 저도 의회에 소식을 전달해야 하니까요.”

그가 어떤 신호를 주었는지, 곧 수많은 무거운 발걸음이 방을 가득 채웠다. 철창이 철컹거리며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거친 목소리와 힘없는 울먹임이 죄수들이 어딘가에서 대기하던 군인들에게 끌려가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아까 내게 도움을 요청했던 아이도 끌려가고 있을까? 머리를 들지 못해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손을 올려 귀를 막을 수도 없어서 나는 눈만 질끈 감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인생에서 가장 끔찍했던 몇 분이 지났다. 사방이 적막으로 채워진 후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선이 느껴져서 숙였던 고개를 들자 나를 무표정으로 응시하는 대신관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일이 끝났으니 신전으로 돌아간다.”

“…성하.”

간신히 꺼낸 짧은 단어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대신관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를 버리고 가지도 않았다. 설령 그가 듣고 있지 않았더라도 나는 어지럽게 쏟아지는 말을 멈출 수 없었을 터다.

“이들이 정말 불신자가 맞나요?”

“돔과 신전의 법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냐고 묻는다면, 맞지.”

하지만 그들 역시 사람이었다. 벌받은 자들, 저주받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 괴리가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들은 이제 어디로 가게 되나요?”

“교리에 따라 불신의 죄를 씻는다는 구실로 돔의 지하에서 강제 노역에 처하겠지. 굶주림이나 과로로 죽을 때까지.”

불신자들은 짐승이다. 불신자들도 사람이다. 타협할 수 없는 세상의 이치가 뒤엉켰다. 나를 바라보던 아이의 순진한 눈동자가 낙인처럼 뇌리에 새겨져 있었다.

“그 아이도요?”

“신전의 법에 예외는 없어.”

“신탁을 받았더라면… 신탁 죄수가 되었더라면, 살 수 있었을까요?”

대신관이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엔 꿈에서 숱하게 들어온 회한이 묻어있었다.

“신전에게 불신자란 그저 불신자지. 신탁 죄수라고 다를 거라고 생각하나?”

그 말뜻까지 헤아릴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난 이제 여기를 떠날 거야.”

내가 알던 세상이 뒤집혔음에도, 이 꿈만큼은 여전했다. 꿈속에서도 울 수 있다는 걸 나는 처음 알게 되었다.

말하고 싶었다. 저 목소리의 주인에게 들리지 않을지라도 말하고 싶었다.

나 역시 이 낯설고 잔혹한 세상에서 떠나고 싶어졌다고.

*

나는 열흘 만에 신전으로 돌아왔다. 신탁 죄수 선별에 다녀온 직후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대신관은 명령 같은 외출 허가를 내줬었다.

“한동안 신전에서 떠나 있거라. 오늘 있었던 일에 관해 깊이 생각하지 말고.”

얼마나 얼굴이 나빠 보였으면 신관 급도 받기 어렵다는 열흘 외출 허가를 내줬을지, 그때는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긴 외출이 내 안색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몰랐다. 나를 마중 나온 아레테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살폈다.

“신전으로 돌아온 걸 환영해, 판도라. 아직 얼굴이 좀 창백해 보이네.”

“마중 나와줘서 고마워요, 아레테. 정말 괜찮아요. 열심히 기도하다 보면 좋아질 거예요.”

생각하지 않아도 평생 교육받은 순종의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아레테가 빙긋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오늘은 정오 기도와 일몰 감사 기도를 제외하곤 자유 시간이야. 일은 내일 새벽 제단 관리부터 시작해도 돼. 그전에 짐부터 내려놓고 개인 기도실로 가고. 성하께서 네가 도착하는 대로 찾아오라고 말씀하셨어.”

대신관이 내게 어떤 말을 하려는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보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조차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일상이 의심으로 물들자, 모든 것이 고뇌가 되었다. 내가 들이마시는 게 공기가 맞는가? 내 머리 위를 비추는 게 빛이 맞는가? 내가 사는 이 돔은 벽 밖으로 나가는 날까지 참회하며 기다리는 성전이 맞는가?

개인 기도실에 도착했을 때 대신관 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복도 전체가 고요한 것을 보아 성도며 신관까지 전부 물렸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고, 그는 말없이 나를 데리고 기도실로 들어갔다.

기도실 역시 텅 비어있었다. 천장에 나 있는 작은 창문으로 인공 태양 빛이 새어 들어와 바닥에 금빛 그림자를 만들었다. 빛 아래로 들어가기 직전 대신관이 멈추어 섰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미안하다.”

빛 그림자만 멍하니 쳐다보던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대신관이 돌아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늘 차갑게 보였던 금빛 눈동자에 후회가 섞여 있었다. 나를 나직하게 타이르는 목소리는 미묘하게 친절했다.

“그날 본 건 잊어버려. 기억에서 지우고 네 일상으로 돌아가. 어차피 바뀌는 건 없으니까.”

그는 내게 불가능을 요구했다.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서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눈을 뜨면 내게 거짓을 주입한 이들이 나를 보며 웃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나는 반박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럴 힘조차 없어서 고해성사하듯 신전을 떠나 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부모님에게 말했어요. 신탁 죄수 선별에서 봤던 모든 것을요. 비밀이라는 걸 알아요, 잘못했어요. 하지만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견딜 수가 없었어요.”

대신관은 나를 질책하지 않았다. 침묵은 더는 위로가 되지 않았지만, 계속 얘기하라는 허락으로 이해하고 나는 숨김없이 내 마음 바닥까지 꺼내 보였다.

“말한다면, 분명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짚어주시리라고 생각했어요. 두 분 다 똑똑하고, 도덕적이고, 성도는 되지 못했지만, 태양신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신실한 신자시니까요.”

내가 악몽을 꾸었다거나, 진짜 대신관이 아닌 가짜에 속았다거나, 아니면 불신자의 삿된 마술에 홀려 착각한 거라거나. 어느 위로를 바랐는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어른이니까 명쾌한 해답을 내주리라고 믿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큰 영광을 받았다고 했어요. 신전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성하의 신임을 얻어 선별 수행까지 돕게 된다니, 내가 정말 자랑스럽다고요.”

빛 그림자가 흐려졌다. 돔 안에 구름이 생길 리 없으니, 젖어서 뿌예지는 내 시야 탓이었을 터다. 나는 필사적으로 울음을 삼켰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죄수들, 그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몇 번을 했는데 이해를 못 하셨어요. 아예 안 들리는 것 같았어요. 그들은 그럴만한 짐승이라고, 오히려 죽기 전에 성하를 뵙는 영광을 누렸으니, 분에 넘치는 축복을 받은 거라고만 반복하셨어요.”

나는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대신관의 금빛 머리카락과 눈동자, 아름다운 얼굴 뒤에 인공 태양의 후광이 비췄다. 구원의 손길을 바라는 신자처럼 나는 절박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상해요. 모두가, 모든 것이 이상해요. 이건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에요. 이렇게 이상한데 왜 아무도 모르는 걸까요. 제가 이상한 걸까요?”

“…모두가 이상하지 않다고 여기는 세상에 살면서 그걸 이상하다고 여긴다면, 네가 이상한 거나 마찬가지지.”

대신관의 눈빛엔 연민이 깃들어 있었으나, 그의 조언은 냉정했다. 편하게 살고 싶으면 눈을 감고, 귀를 닫아. 아무것도 알려 하지 말고, 여느 신자처럼 조용히 순종하며 살아. 나는 수긍하는 대신 물었다. 성하의 힘으로 제 기억을 지워주실 수 있나요? 그가 고개를 저으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잠시 머리를 떨궜다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일어섰다.

“신탁 죄수도 다를 것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대신관이 나를 날카롭게 응시했지만,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물러서지 않는 숨 막히는 대치가 오랜 시간 이어졌다. 먼저 침묵을 깬 건 대신관이었다. 그가 긴 한숨과 함께 나를 책망했다.

“아무것도 알려 하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결국 검은 책장에서 책을 꺼내주었던 때처럼, 대신관은 내 호기심에 면죄부를 주었다. 아니, 잠긴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주었다.

“기도식 예식에 관해선 얼마나 배웠지?”

“돔의 모든 사람이 성도처럼 새벽에 일어나서 인공 태양 점등 시간에 맞춰 신전 부근에 자리 잡고 새벽 기도를 함께해요. 성하를 제외한 가장 높은 지위의 신관이 태양신에게 경배드리고, 찬양대의 찬송이 끝나면 성하가 신탁받은 자를 위해 광장 한가운데서 기도를 올리고요. 그다음엔 빛 전달 의식을 위해 인공 태양을 24시간 동안 소등하고, 신탁 성도 또는 신탁 죄수가 인공 태양 안으로 들어가요. 이후 성하께서 한 시간 참회 기도를 올리고 나면 모두 집으로, 또는 신전으로 돌아가서 인공 태양이 다시 켜질 때까지 단식하고 참회하며 기다리죠.”

예식 당일 신전 광장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다. 신전의 신관, 성도들, 돔의 의회원들, 그 외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이었다. 나 역시 한 번도 예식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인공 태양의 소등은 신전 부지 밖에서 여러 번 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올해는 가까이서 예식을 볼 수 있겠다며 들떠있었는데, 이제는 먼 옛날이야기 같았다.

배운 대로 얘기하면서도, 나는 이제 내가 말하는 것이 진실일 거라 믿지 않았다. 대신관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질문이 내 입에서 튀어 나갔다.

“신탁 죄수가 인공 태양에 들어가서 빛 전달식을 마치고 평생을 신전에서 살게 된다는 건 거짓말인가요?”

“그래.”

“신탁 죄수들은 모두 전달식을 마치고 살해당했나요?”

“신탁 죄수뿐만 아니라, 신탁 성도도 인공 태양에서 살아나온 적 없어.”

아연실색할 만한 정보였지만, 처음 불신자들을 사람이라고 인식했을 때만큼 충격받지는 않았다.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빛 전달식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요?”

대신관이 고개를 위로 꺾어 기도실의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부시지도 않는지 이마 한번 찡그리지 않고 그는 흘러들어오는 빛을 눈에 담았다.

“인공 태양의 빛은 영원하지 않아. 그 빛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곳에서 힘을 충당해야 하지. 아주 먼 옛날, 인공 태양의 수명이 다할 위기에 처했을 때 돔을 이끄는 의회는 많은 실험을 했어. 그 내용은 얘기하지 않겠다. 나도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환한 빛 아래에서도 얼굴이 그리 어두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그의 목소리가 점차 낮아졌다.

“그들은 실험을 통해 소수의 사람이 특별한 피를 지닌 걸 발견했다. 그게 태양신의 신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피로 인공 태양을 적시면 한시적으로 빛이 되살아난다는 걸 알게 되었지. 첫 희생자는 모든 것을 알고도 기꺼이 돔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어. 그 희생의 결과가 오래가진 않았고.”

기도식의 주기가 어떻게 되지? 대신관의 질문에 나는 쉽게 대답했다. 3년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작 3년. 3년마다 인공 태양이 피로 물들었음을 그가 내게 고했다.

“고결한 희생은 변질되기 쉬워. 의회는 희생하려는 이들이 숨어버릴까 두려워했고, 기도식의 실체를 비밀에 부치기로 했지. 그런데도 한번은 돔 내에서 신탁받은 자가 나오지 않아 전전긍긍하던 차에, 벽 밖에서 그 피를 지닌 사람을 발견해서 납치했지. 그게 신탁 성도와 신탁 죄수의 시작이었다.”

“…하나만 더 묻고 싶어요.”

잠긴 목소리로 꺼낸 요청에 대신관은 고개를 숙였다. 말해보거라. 나는 기도실을 둘러보았다. 대기도실에 비해 화려하진 않지만, 개인 기도실의 벽에는 태양신의 기도문이 유려한 필체로 새겨져 있어 고풍스러운 멋을 내고 있었다. 마치 벽을 타고 신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아서 나는 이곳을 좋아했었다.

하지만 그런 피로 물든 기도식을 용인하고 방관하는, 어쩌면 장려하는 신이라면, 이곳에 적힌 교리의 성스러운 구절은 정녕 진실한 신의 음성일까? 나는 내 앞에 선 신의 대리인에게 답을 구했다.

“성하는 태양신의 대리인이시잖아요. 정말 신의 교리가 우리에게 이런 잔혹한 짓을 하라고 시키나요?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거라면, 다른 방법이 있다면, 성하께서 가르쳐 주시면 되는 것 아닌가요?”

“내가 정말 신의 대리인이라고 생각해?”

대신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의 손이 예고 없이 내 손을 잡았다. 깜짝 놀라서 뿌리치기도 전에 내 손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그가 남은 손을 내 입술에 대고 속삭였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느껴봐. 내가 무엇인지.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적막 속에 내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다.

오직, 내 심장만이 뛰고 있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입꼬리만 올라간 미소가 여전히 그의 얼굴에 걸려있었다.

“나는 신의 대리인도 아니고, 하물며 인간도 아니야. 태양의 신탁을 받은 피를 선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형에 불과하지. 주제에 자아를 가진 인공 태양 부품일 뿐이야.”

그가 내 손을 놓았다. 내 손이 힘없이 몸 옆으로 떨어졌다. 그의 표정이 진한 비소로 변했다.

“넌 인공 태양 안에 들어가 본 적 없겠지. 인공 태양은 밖에선 금빛으로 보이지만, 그 안은 늘 검붉게 물들어 있어. 수백 년에 걸쳐 흐른 피는 지워지지 않거든.”

아직 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된 걸 후회하지 않나? 대신관은 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잃은 나를 부드럽게 돌려세웠다. 눈앞에 기도실 문이 들어왔다. 나는 이 대화가 끝났다는 걸 깨달았다. 어깨에서 손을 떼기 전, 그는 내게 마지막 자비를 베풀었다.

“원한다면 성도 부적합 판정을 내려줄 테니, 신전에서 떠나거라. 필요한 만큼 고민해도 된다. 내 문은 네겐 언제나 열려있을 테니.”

*

잠은 내게 안식처가 아닌 또 다른 고뇌의 시간이었다. 정말 이렇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는 거야? 낯설게 들리는 대신관의 목소리가 하얀빛의 문만 존재하는 공간에서 메아리쳤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비난은 이제 들리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질문이 나를 재판대에 세웠다.

아직 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된 걸 후회하지 않나?

나는 눈을 감았다. 꿈속에서도 잊히지 않는 아이의 눈빛이 두려움을 죄책감으로, 그리고 용기로 변화시켰다. 나는 눈을 뜨고 힘주어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아니요. 여태 이 문을 열어보지 않은 게 후회돼요.”

나는 빛나는 문고리를 잡고 밀었다. 달궈진 쇠처럼 뜨거운 감각이 내 손바닥을 감쌌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깜짝 놀랄만한 아픔도 잠시였다.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하얀빛이 온 공간을 감쌌다. 기껏 용기 내 문을 열었는데 이대로 깨는 건가 싶어서 나는 아쉬움에 다시 눈을 감았다.

“그거 알아? 진짜 태양은 금색이 아닌 하얀색으로 빛난다는 걸?”

내 눈이 번쩍 뜨였다. 환한 빛 때문에 눈물이 났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두리번거렸다. 꿈속에서 늘 들려오던 첫 번째 목소리가 다른 이야기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쩐지 이번에는 그 주인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빛이 점차 사그라들고 주변의 윤곽이 어슴푸레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보는 건 어렵진 않았다. 익숙한 신전의 도서관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내 앞에 서 있었다.

감옥에서 본 아이처럼 갈색 피부를 가진 여자였다. 눈 색도 아이와, 그리고 나와 비슷한 갈색이었다. 머리카락은 금빛을 띠고 있었지만, 워낙 밝아서 하얀색에 가깝게 보였다. 나이는 나보다 많은 것 같았지만, 큰 차이는 안 났을 터다. 돔의 시민이었다면 성인식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겠지. 그의 개구진 미소가 어쩌면 더 어려 보이는 분위기를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직접 묻지 않고서야 내가 알 길은 없었다.

묻고 싶은 건 많았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왜 제 꿈에 나타나나요? 성하와 아는 사이인가요? 혹시 벽 밖에서 온 사람인가요? 하지만 내 목소리는 다시 사라져 그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보고 들을 수밖에 없었다.

“돔 안에선 하늘도 볼 수 없지? 네 책에 나오는 것처럼 파란색은 아니고 흙먼지로 뒤덮인 갈색이지만, 그래도 태양은 그걸 뚫을 정도로 강렬하다?”

여자가 나를 보며 웃었다. 주변이 하얀빛으로 일렁이더니 풍경이 바뀌었다. 나는 숨을 삼켰다. 이제는 신탁 죄수 선별을 위해 방문했던 둥그런 감옥 안이었다. 여자가 창살 너머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끔찍한 기억이 이곳에서 달아나라고 나를 종용했지만, 여자가 으르렁거리듯 비난을 내뱉는 게 더 빨랐다.

“넌 여전히 몰라. 네 손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익숙한 비난이어서 나는 도망가려던 발을 멈췄다. 여자가 창살을 흔들었다. 철창은 꿈쩍하지 않았지만, 날카롭게 꽂히는 말들은 내 마음을 흔들기엔 충분했다.

“저 인공 태양이 계속 빛나기 위해 어떤 희생이 치러지는지 알아? 기도식을 위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냐고! 그들이 맞이한 비참한 말로를 네가 정말 이해할 수 있어?!”

나는 머리를 떨구었다. 차마 안다고 할 수 없었다. 내가 알게 되었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 아이가 어디로 끌려갔는지, 아직도 살아있는지조차 모르는 내가 할 수 있는 변명 따위란 없었다.

돌바닥이 하얀빛으로 물들었다. 곧이어 하얀 대리석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 나는 꿈이 우리를 신전 광장으로 이끌었음을 알아챘다. 여자의 책망 어린 눈빛을 마주하기 무서워 나는 낯익은 말이 들려올 때까지 머리를 들지 못했다.

“난 이제 여기를 떠날 거야.”

조금은 후련한, 그보단 단단한 목소리였다. 눈을 들고 여자를 쳐다보자, 여자가 입꼬리만 올려 미소 지었다. 며칠 전, 기도실에서 대신관이 내게 보여준 것과 굉장히 비슷한 미소였다. 내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달라 간청하는 것은….”

“소용없겠지. 알잖아.”

수십 번 들어온 장면이어서 나는 놀라지 않았다. 몸을 돌리자 대신관이 여자를 보며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보이는 표정 자체에 큰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눈빛에 서린 것은 분명하고 짙은 감정이었다.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말 이렇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는 거야?”

여자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고개를 뒤로 젖혀 인공 태양이 떠 있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남길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내게 주어진 건 이름 하나 빼고 전부 빼앗겨버렸는데.”

여자가 뒤돌아섰다. 눈을 찡그리니 저 멀리서 다가오는 누군가의 윤곽이 보였다. 이제야 주변을 둘러보니 얼굴을 알 수 없는 그림자들이 대화가 들리지 않을 거리에서 광장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이 광경이 어느 날의 꿈인지 깨달았다.

태양의 기도식. 여자는 신탁 죄수로서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곧 인공 태양 속으로 끌려가서 살해당할 것이었다.

가지 말라고 말리고 싶었다. 여자에게 위험을 알리고 도망치라고 하고 싶었지만, 내 말은 아직 봉인되어 있었다. 침묵을 채운 건 대신관의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네 이름이라도 남겨주면 안 될까?”

아이 같은 막무가내의 간청이 그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라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자가 멀어지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흐릿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그래. 솔라라는 이름, 네가 가져. 대신 내 부탁 꼭 기억해.”

나도 대신관도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붙잡지 못했다. 인공 태양 빛을 받은 그의 머리카락이 더욱 하얗게 빛났다. 그 빛이 점차 밝아져 주변을 전부 삼켰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침대에 누워서 울고 있었다.

인공 태양이 켜지지 않은 어두운 새벽. 나는 신발을 신을 정신도 없이 신전 광장으로 달려 나왔다. 광장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서늘하게 느껴지는 대리석을 맨발로 느끼며 나는 있는 힘껏 돔의 천장을 향해 까치발을 세웠다.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내 눈엔 암흑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

*

기도실에서 대신관과 대화를 나눈 지 닷새 만에 나는 그의 개인 서재를 찾았다. 예의 바르게 노크하고 들어와 그가 주변 사람을 모두 물릴 때까지 나는 조용히 서 있었다. 그가 돌아와 나를 마주 보고 입을 열었다.

“결심이 섰나?”

“네.”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이고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펜을 집어 들며 그가 나를 어르듯 말했다.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달라고 하겠지만, 아마 일주일은 더 이곳에 있어야 할 테다. 그래도 부적합 판정을 내리면 신전의 일은 하지 않아도 될 터니….”

“성하, 전 여기 남기로 결심했어요.”

감히 대신관의 말을 자르는 게 무례함을 넘어서 불경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그것에 관해 나를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펜을 내려놓고 나를 빤히 바라보며 팔짱을 끼었다. 낮은 음성에 타이르는 어조가 스며들었다.

“성급하게 결정하지 마. 평생을 거짓에 둘러싸인 신전에서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아직 어려서 네가 모르는 거야. 알량한 죄책감에 휘둘려 남은 인생을 내버리진 마라.”

“신전 바깥이라고 다를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대신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줄곧 바닥을 내려다보던 나는 머리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인공 태양을 닮은 금색 눈동자가 내 심중을 샅샅이 뜯어보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 시선이 더는 두렵지 않았다.

“연극에서 홀로 깬 기분이에요. 연극이라고 인지하지 못했을 때 자연스럽게 여겨졌던 모든 것이 이제는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져요. 다들 아직 연극 속에서 서로를 축복하며 행복하게 웃고 있는데, 이게 연극이라는 걸 알게 된 저는 전처럼 그 축복과 미소를 돌려줄 수 없어요.”

나는 거짓말에 재능이 없었다. 솔직함이 미덕이라고 어렸을 적부터 배웠는데, 갑자기 거짓된 태도를 연기하기 쉬울 리 없었다. 노력은 했었다. 나는 평소처럼 제단을 닦고, 수업을 듣고, 신전의 일을 해냈지만, 갈수록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성도와 신관들이 늘어났다. 나와 가장 가깝게 지내던 아레테도 몇 번씩이나 어디 아픈 것 아니냐고 물어올 정도였다.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신전 밖이라고 다를까? 거짓은 죄라고 가르쳐 온 세상의 모순은 세상이 전부 거짓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었다. 집으로, 학교로,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봤자 그들의 거짓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으라는 강요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이미 균열은 만들어졌어요, 성하. 저는 연극 속으로 돌아갈 수 없고, 연극 속에 사는 사람들은 저를 보며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거예요. 도망갈 수 없다면 남겠어요. 그것이 제 알량한 속죄예요.”

기도실에서 하지 못한 고해성사를 마치고 나는 침묵했다. 내 말을 끊지 않고 들은 대신관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나를 나무라지 않았지만, 대신 뼈아픈 현실을 들이밀었다.

“그래서 이곳에 남아 무얼 할 건데? 네가 남는다고 달라지는 게 있다고 생각하나?”

“모르겠어요. 그래도 남겠어요.”

“네 의사와 상관없이 부적합 판정을 내려서 너를 억지로 내보낸다면?”

“그럼, 바깥에서라도 제가 속죄할 길을 찾겠어요.”

대신관이 헛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틀어 내게서 시선을 돌린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정말 이상하게 닮았어.”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누구와 닮았다는 이야기인지 물어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얗게 빛나던 머리카락을 가졌던 꿈속의 여자를 떠올리며 나는 불쑥 물었다. 솔라와요? 대신관이 머리를 홱 돌렸다. 그의 눈에 그를 처음 봤을 때와 같은 매서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 이름을 네가 어떻게 알지?”

나를 자주 찾아오는 꿈을 그에게 숨길 필요는 없었다. 내 이야기를 전부 들은 그가 다시 길게 숨을 뱉었다. 그의 눈이 닫힌 문을 잠깐 바라보고 나를 향했다. 지금 네게 하는 말은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된다, 엄중한 경고가 먼저 나왔다.

“신탁받은 이들은 꿈을 꾸곤 하지.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하얀빛이 범람하는 꿈을. 빛이 진실로 인도하는 꿈을.”

그 뜻을 이해하는 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입을 살짝 벌리고 소리 없이 물었다. 제가요? 대신관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는 걸 보고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태양의 기도식에서 축복을 입는 신탁 성도. 그리고 인공 태양의 빛을 유지하기 위해 살해당하는 희생양. 그 자리가 내 앞으로 성큼 들이밀어졌다.

내 얼굴이 어떻게 보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대신관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가 나를 안심시키듯 조용히 말했다. 아직은 너와 나를 제외하곤 아무도 몰라. 계속 그럴 거고. 절대 입을 열지 말거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느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에요, 아는 사람이 있어요. 성도 면접시험에서 시험관님이 꿈에 관해 물었을 때, 저는 그 꿈을 꾼다고 말했었어요.”

대신관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 뒤로 시험관과 꿈에 관해 이야기한 적 있나? 나는 부정했고 그가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어. 진짜 신탁받은 자는 꿈을 지속해서 꾸거든. 누가 묻거든 그 이후로 꿈을 꾼 적 없다고 말해. 나 역시 너를 신탁 성도로 지목할 생각은 없으니까.”

“…솔라는, 신탁 죄수로 지목하셨었나요?”

“그것도 꿈속에서 보았나?”

나는 머리를 숙였고, 그는 긍정의 뜻을 문제없이 알아들었다. 그가 입술을 굳게 닫았다가 속삭이듯 말했다. 지목했지. 나는 숨을 깊게 마시고 두 손을 꾹 마주 잡았다. 금지된 책장에서 하나 남은 책을 꺼내 든 기분이었다. 이것이 내가 알아야 할 마지막 조각이었다.

“솔라에 대해 말해주세요.”

대신관은 내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

내가 솔라를 처음 본 건 신전 정원에서였다. 나는 잠을 잘 필요가 없으니 다들 잠든 시간에 밖에 나와 있는 시간이 많았지. 어둠 속에 가만히 서 있는데 날래게 움직이는 그림자가 보였어. 음식을 훔치고 있었는지 볼록한 작은 자루를 어깨에 메고 있었지. 망토를 머리끝까지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돔 안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음식을 훔쳤으면 바로 돔 밖으로 도망가야 하는데, 왜 돔 한가운데 있는 신전을 찾아왔을까? 이해할 수 없어서 나는 그 뒤를 밟았다. 나는 그를 도서관에서 찾았어. 그는 검은 책장 앞에 있었지. 어떤 책장을 말하는지 너도 알고 있겠지?

그에게 처음 건넨 말도 비슷했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곳에 들어올 권한은 없을 텐데.”

그가 순식간에 작은 단검을 꺼내 내 심장을 겨눴어. 두렵지는 않았지. 내 가슴을 찔러봐야 그곳엔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그대로 말해주었다.

나는 그가 내 말을 믿지 않고 단검을 박아 넣거나, 무릎 꿇고 못 본 척해달라고 빌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그는 내 예상을 비껴갔지. 그는 눈을 반짝이며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어.

“고대 인형! 전쟁 시대 전의 유물이 돔에 남아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는데, 뜬소문이 아니었구나. 자아도 있고, 말도 하고… 경이롭다.”

고대 인형. 나는 그때까지 내가 인간의 외형을 닮았으나 인간은 아니라는 것과 신탁받은 자를 선별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밖에 모르고 있었다. 까마득한 시간을 살아오면서 나에 대한 것은 궁금해하지 않았으니까.

“넌 이곳에서 뭘 하고 있어?”

“나는 이곳의 대신관이다.”

“되게 높은 사람… 아니, 인형? 아무튼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구나. 그렇다면 혹시 이 책장을 열어줄 수 있을까? 한 시간 정도 책만 보고 갈게. 그대로 돌려놓고 갈 거야.”

내가 그를 감옥에 던져넣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걸까? 침입자를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관한 절차는 내 머릿속에 들어있었다. 내 눈이 책장 옆에 걸려있는 종을 향했어. 그 시선을 눈치채고 그가 곤란한 기색을 보였지.

“날 잡아넣으려고? 그냥 내버려둬 주면 안 될까? 피해를 끼칠 생각은 없어.”

“이미 돔의 식량을 훔쳐 가는 것으로 보인다만.”

아, 이거. 그가 자루를 가볍게 흔들었다. 별로 반성하는 눈치는 아니었지.

“너흰 이 정도 음식이 사라진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진 않잖아. 우리는 이게 없으면 달이 바뀌기 전에 아사한다고.”

“우리?”

“내 마을 사람들. 이번에 가뭄이 유독 심해서 간신히 키운 작물이 다 죽었거든. 정말 안될까?”

그는 책장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어. 그쯤 되니 나도 궁금해졌지.

“왜 여기에 있는 책들을 보고 싶어 하는 거지? 네 생존과 직결된 문제는 아닐 텐데.”

“아니긴 한데, 돔 안에 숨겨진 고대 서적들이 있을 거라고 할머니가 옛날에 이야기해 주셨거든. 할머니는 전대 마을 지도자셨어. 지금은 아버지가 지도자시고. 다음 지도자는 아마 내가 될 테니까 아는 게 많을수록 좋겠지.”

그가 눈을 반짝이며 책장을 돌아보았어. 사실 핑계고, 그냥 궁금하잖아.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 어떤 곳이었는지. 그가 나를 돌아보며 제안했어.

“책장 열어주고 날 못 본척해 주면 나도 알게 되는 걸 네게 말해줄게. 너도 궁금하지 않아? 네가 만들어진 시대에 관해서, 그리고 네가 어떤 존재인지에 관해서.”

거절해야 했지. 그때 종을 울려서 침입자에 대해 알려야 했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 첫 번째 이유로는 어쩐지 그가 도망가는 데 성공할 것 같았고, 두 번째 이유는… 그가 빛나고 있었거든. 신탁의 빛이 그 안에 잠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그걸 얘기해주진 않았지만, 내 의무가 그를 놓치도록 두지 않았지. 거래가 확정되고 그는 나를 보며 활짝 웃었어.

“내 이름은 솔라야. 잘 부탁해.”

그 이후로 솔라는 매주 특정 날에 찾아왔다. 언제나 모두가 잠든 새벽에 도서관으로 슬그머니 기어들어 오곤 했지. 그가 어떻게 돔의 경비를 뚫고 몰래 들락거렸는지 나는 묻지 않았고, 그도 말하지 않았어. 어차피 그 외에 나눌 이야기는 많았으니까.

“그거 알아? 진짜 태양은 금색이 아닌 하얀색으로 빛난다는 걸?”

나는 솔라의 이야기를 통해 돔 밖의 세상에 관해 알게 되었다. 돔 바깥에도 사람이 산다는 걸 배웠지. 신전의 선전처럼 야만적인 불신자가 아닌, 돔의 시민들과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이.

“전쟁이 끝나고 환경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을 때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이 모여서 돔을 만들었다고 했어. 전쟁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이들을 전부 수용할 만큼 크게 짓지는 못했지.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 돔에 살도록 허락받았대. 물론 남은 사람들은 항의했지만, 돔의 지도자들은 귀를 닫고 벽을 높게 지어서 바깥사람들이 들어오는 걸 막았어. 내 선조들은 그렇게 타오르는 태양 아래 버려졌다고 해.”

나와 있을 때 솔라는 망토 아래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갈색으로 짙게 그을린 피부, 거짓 없는 갈색 눈동자, 인공 태양보다 밝은 금빛이 도는 하얀색 머리카락. 신전에서 보기엔 이질적인 외모였지만, 그가 내게 해주는 말만큼 이질적이진 않았지. 그 이야기들은 내게 주입된 모든 지식과 어긋났으니까.

“네가 하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믿지?”

“내가 너한테 거짓말해서 뭐 하게?”

솔라는 내 추궁에 코웃음 치고 책을 넘겨보는 데 집중하곤 했지. 가끔은 바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도 했어.

“돔이 만들어지기 전의 기억은 없다며? 그러면 바깥이 어떨지도 모를 거 아니야? 정말 의심된다면 나가서 직접 보고 확인해.”

내가 그럴 수 없으리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지. 설령 돔 밖으로 나가는 게 허락됐어도 진짜 나갔을지는 모르겠다. 내게 주어진 의무와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네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네가 돔의 사람들을 좋아할 이유가 없는데.”

“당연하지. 선조의 죄를 후손에게 묻는 게 공평하진 않다곤 해도, 그들이 선택한 무지를 보면 신물이 나.”

“그러면 왜 이곳엔 계속 찾아오는 거지? 음식만 훔쳐 가면 될 것을.”

“책은 죄가 없으니까.”

“그럼 올 때마다 나를 찾는 이유는? 책장을 여는 방법은 알려주었으니 내가 더는 필요 없을 텐데. 나도 네가 싫어하는 돔의 사람에 해당하지 않나?”

추궁 끝에 솔라는 드디어 책에서 눈을 떼고 팔짱을 꼈어. 내 질문이 타당했는지 조금 고민하는 기색이었지.

“글쎄… 인간이 아니어서 그런가, 그렇게 싫다는 생각은 들지 않네. 아무것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지만…. 뭐, 그래도 넌 배울 의지가 있어 보이고, 날 도와주기도 했잖아? 그럼 특별 대우를 해줘도 괜찮겠지.”

“특별 대우라면?”

솔라는 웃을 때 눈가를 잔뜩 찡그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것이 그를 말썽꾸러기 아이처럼 보이게끔 했어.

“친구라고 하자. 친구한테는 예외를 둘 수 있잖아.”

나는 긍정하지 않았지만, 그는 상관없다는 듯 다시 책에 집중했지.

도서관에서의 만남이 시작된 지 석 달쯤 지났을까, 솔라가 찾아오는 빈도가 줄어들었어.

“요즘 돔의 군인들이 사람들을 잡아가고 있어. 아직 내 마을에 피해는 없는데, 근방 마을에 실종자가 많다고 하더라고.”

혹시 뭔가 아는 거 없어? 솔라는 물었고 나는 답을 확신하진 못해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어. 기도식이 다가오고 있었고 신전 내에서 신탁 성도가 나오지 않았으니 급한 마음에 밖으로 시선을 돌렸을 테지. 이렇게 기도식이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신탁받은 자를 찾지 못한 건 처음이었으니까.

나는 여전히 신전에 신탁 죄수 적합자를 찾았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어. 하지만 솔라에겐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말해주었다. 기도식에 관해, 신탁 죄수에 관해, 그 모든 절차에 관해. 솔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어. 그때까지도 내가 한 말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지. 사실 지금도 온전히 이해한다고 자신하진 않아. 감정이나 공감력은 내게 필요한 기질이 아니어서 학습받지 못했으니까.

그땐 그저 솔라가 본인과 마을 사람들의 안위를 걱정한다고만 생각했지. 원한다면 솔라의 마을은 건드리지 말라고 지시하겠다고 했어. 당연히 솔라가 신탁 죄수라는 것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 솔라는 처음으로 내게 화를 냈어.

“우리 마을만 무사하면 다야? 다른 마을 사람들은, 이미 잡혀간 사람들은 죽어도 된다는 거야?”

한 사람의 목숨으로 돔의 모든 사람이 3년은 안온한 생활을 보장받는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 같아서 짚어주었지만, 그의 화는 되려 커지기만 했지.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 희생이 정당한지를 논해? 과거에도 도움을 요청한 사람들을 버린 이 돔이 무슨 자격으로 또 희생을 강요하는데? 나는 왜 예외고? 나도 그들과 똑같은 인간이야!”

“친구에는 예외를 둘 수 있으니까.”

솔라의 얼굴이 굳었어. 친구라는 단어는 그럴 때 쓰는 게 아니야. 그가 속삭이고 내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어.

“말해봐, 너는 이게 정말 옳다고 생각해?”

당시의 나는 틀린 선택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솔라를 더 분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침묵했어. 그러나 침묵은 비겁한 긍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모르고 있었지. 솔라는 차가운 얼굴로 책을 돌려주고 일어섰어.

“너를 친구로 생각했던 과거가 후회스러워.”

그게 내가 처음 느껴본 상실이었다. 불행히도 마지막은 아니었지.

그 이후로 솔라는 도서관을 찾아오지 않았다. 새벽마다 나와 신전을 돌아보았지만, 그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지. 어느 한 사람의 부재가 그렇게 크게 느껴지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어. 신전 밖으로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지.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솔라는 거의 한 달 만에, 기도식이 2주도 남지 않은 시점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어. 내게 등을 보이고 검은 책장을 바라보며 서 있었지. 내게 심장은 없지만, 사람들이 표현으로 쓰곤 하는 심장이 뛴다는 기분이 이런 걸까 싶었어. 아직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과할 의향은 있었지. 그를 잃기는 싫었으니까. 내가 다가갔을 때 먼저 말을 꺼낸 건 솔라였어.

“전부 죽었어. 나 빼고 전부 죽었어.”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어. 솔라가 몸을 돌려 나를 응시했지. 어두운 그림자가 진 얼굴에서 눈만 기이하게 반짝이고 있었어.

“끌고 가려 했지만, 저항했던 것 같아. 아버지의 지시로 다른 마을을 살펴보러 갔다 왔더니 다 죽어있었어. 시신을 전부 찾지는 못했지만, 돔으로 잡혀갔을 테지. 경황이 없어서 다 못 찾은 걸 수도 있고.”

솔라는 눈을 부릅떴지만 끝내 울지 않았어. 피가 나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주먹을 꾹 쥐었을 뿐. 나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어. 그도 텅 빈 위로나 사과를 기대하진 않았겠지.

“저 인공 태양이 저주스러워. 이 돔도, 이곳에 사는 모든 사람도. 그 악마들이 내 가족처럼 끔찍하게 죽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까? 그렇다고 바뀌는 건 없는데.”

“…떠나겠구나.”

미안하다는 말은 아무짝에 쓸모없을 걸 알아서, 대신 공허한 현실을 뱉었어. 솔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 내게 자격이 없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를 붙잡으려고 했어.

“남아준다면, 남아줄 의향이 있다면.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이든 들어줄게. 어려울지라도….”

“난 인공 태양을 파괴할 거야.”

또렷한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말을 잃었어. 솔라는 내게 거짓을 말한 적 없었지. 분명 이번에도 진심이었을 터. 그 선언이 얼마나 허황하고 불가능해 보였을지라도, 이미 하겠다고 나를 만나기 전부터 마음을 굳혔겠지. 듣지 않을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래도 말렸어.

“그건 불가능해.”

솔라는 입꼬리만 올려서 웃었지.

“가능해. 비록 내가 직접적인 폭발을 일으킬 순 없어도, 균열만 만들 수 있다면 나 다음에 올 누군가의 방아쇠는 되어주겠지.”

솔라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어. 그 눈빛은 내게 우정의 값을 치르라고 종용하고 있었지.

“버려진 수많은 목숨이 헛되지 않게 할 거야. 이 부조리한 세상을 바꿀 거야. 네가 한때나마 나를 정말 친구라고 여겼다면 나를 도와줘. 피로 젖은 이 돔의 한가운데 있는 너도 무고하지 않아. 책임을 져.”

솔라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 겨눴던 단검을 꺼내 내밀었어. 칼날은 본인을 향해 있었지. 나는 솔라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어.

그다음 날, 솔라는 벽 밖에서 붙잡혔다. 일부러 붙잡혀줬다는 건 그와 나만 아는 사실이었어. 그는 지하 감옥으로 끌려왔고, 나는 철창을 사이에 두고 망설였어. 솔라는 나를 밀어붙였지. 희생자들이 맞이한 비참한 말로를 내가 이해할 수 있냐고.

그들의 기분이 어땠을지는 지금도 상상하지 못해. 하지만 내 손으로 솔라를 죽음으로 내모는 참담함이 조금이나마 비슷했다면, 나는 돔의 무게 이상을 짊어진 죄인이겠지.

내겐 눈물샘이 없어. 그래서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못하고 솔라를 신탁 죄수로 지목했지. 그가 원했던 대로.

*

“솔라는 기도식 날 인공 태양 안으로 들어가서 사살당했다. 24시간이 지난 후 태양이 점등하고 그가 실패한 줄 알았지. 그런데 안내자로 같이 들어갔던 신관이 신관 회의에서 말하더군. 인공 태양 내부에 금이 갔다고.”

그렇게 이야기는 현재로 돌아왔다. 대신관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참을 서 있었지만, 나는 다리가 아픈 줄도 몰랐다. 오히려 내 눈을 가리고 있던 베일을 집어 던진 기분이어서 모든 게 더 또렷해졌다.

“성하에게 이름을 주는 대신, 솔라가 남긴 부탁은 무엇이었나요?”

그것까지 보았나? 대신관이 허탈하게 웃으며 책상에 몸을 기댔다.

“자신이 인공 태양을 파괴하지 못하면,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 올 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달라고 했지. 인공 태양이 떠 있는 이상 희생은 계속될 거고, 자신과 같은 결심을 한 이 또한 있을 거라고. 균열은 실패가 아닌 시작이 될 거라고 그랬지.”

그 원대했던 꿈을 마주하고 나는 숨을 죽였다. 회피할 생각, 그다음에는 그저 이 자리에 머무를 생각밖에 하지 못했던 내가 너무나도 작아 보였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대신관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특별한 사람이었지. 내가 인형이 아니라 진짜 사람이었다고 해도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그의 이름을 억지로 받아놓고도 그 이름에 걸맞은 행동은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제가 신탁 성도의 자격을 가졌다는 사실을 숨겨주시는 건가요?”

목소리를 한껏 낮췄음에도 대신관은 조심하라는 듯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는 대답했다.

“그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어쩌면 내가 신탁받은 자를 찾지 못한 척하면, 기도식을 치르지 못해 인공 태양이 자멸할 수도 있으니까.”

“그게 정말인가요?”

“…아니.”

대신관의 입매가 굳었다. 나를 지나쳐 닫혀있는 문을 응시하는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그 정도로 물러날 자들이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그가 책상에서 몸을 일으키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녁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지 인공 태양의 진한 금빛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기도식은 그대로 진행되겠지. 그러지 않으면 돔의 사람들이 공황에 빠질 테니까. 급한 대로 아무나 선별해서 기도식을 진행하고 다음 적합자를 찾아 몰래 인공 태양 속에 던져넣거나, 몇백 년 전 실행했던 잔혹한 실험을 재개하겠지. 어떻게든 인공 태양의 수명을 늘릴 방법을 찾을 때까지.”

희망은 짓밟히고, 비극은 반복될 거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엔 체념이 가득했다. 그러니 성도로 남아 애먼 일에 휘말리기 전에 신전을 나가라는 조언이 뒤따랐다. 분명한 도움의 손길이었다. 하지만 내겐 다른 방향의 손길이 보였다. 솔라가 부탁한 가능성으로 가는 길이.

“저를 선별하세요.”

“뭐?”

대신관이 기가 막히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죽으러 가겠다는 말과 다름없이 들렸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단어 하나하나가 이어질수록 내 안에 확신이 차올랐다. 이 일을 하기 위해 내가 남았다는 것을. 평생 꾸어온 꿈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저를 신탁 성도로 지목하세요. 제가 기도식 날 인공 태양 안으로 들어가서 솔라가 끝마치지 못한 일을 하겠어요.”

“미친 생각 하지 마라.”

대신관은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내 말을 잘랐다. 그가 내게 나가보라는 듯 손짓했지만, 나는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서서 그를 응시했다.

“솔라와 약속하셨잖아요. 그리고 저는 제일 큰 가능성이고요. 성하가 말씀하셨듯 인공 태양이 자멸하길 기다리는 것은 더 큰 희생으로 이어질 거예요. 제가 할게요.”

“자살이나 다름없어. 솔라가 균열을 만들었으니 이번 기도식부터는 감시가 더욱 심해질 거야. 인공 태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손쓸 새도 없이 살해될 수 있어.”

“해보지 않으면 모르잖아요. 제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끌려들어 갈 테고요.”

“왜 굳이 네가 하겠다고 나서는 거지? 죽는 게 무섭지도 않나?”

무섭지 않을 리 없었다. 대신관에게 치열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와중에도 내 손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모른 척 다시 가식이 가득한 연극 속을 부유해야 한다는 막막함에 비하면 차라리 두려움이 견딜만했다. 대신관을 제외하면 이 돔 안에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그보다 괴로운 게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요.”

대신관은 한참을 침묵했다. 이윽고 나온 그의 가라앉은 음성은 메마르고 고요했다.

“네 행동으로 인해 네가 살아온 세상이 처참하게 무너질 수도 있어.”

나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지속되어도 괜찮은 세상이 맞나요?”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돌리려고 했다.

“너도 솔라처럼 실패할 수 있어. 나는 네게 그 어떤 약속도 하지 못해. 인공 태양을 파괴할 수 있다는 약속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약속도.”

“하지만 의미 없는 일은 아니잖아요.”

나는 견고했다. 두려움은 차곡차곡 쌓여 내가 밟고 나아갈 발판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무모함일까, 아니면 평생 버리지 못한 호기심의 연장선일까? 나는 눈을 떴다. 세상이 그 어느 때보다 환해 보였다.

“제가 실패해도 솔라가 만들어놓은 균열을 조금은 더 벌려놓을 수 있겠죠. 성하는 부탁을 들어줄 다음 사람을 찾을 수 있을 테고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사람들은 진짜 태양 아래 서게 되겠죠. 그러니 하겠어요.”

대신관이 솔라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처럼, 내 부탁 역시 끝에는 들어주리라는 것을 알았다. 난 그를 향해 눈을 휘며 웃어주었다.

*

인공 태양의 빛이 희끄무레하게 켜진 새벽. 새벽 기도가 끝나고 대신관은 태양의 축사를 올리는 대신 대기도실에 모인 이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성도들은 물론 신관들마저 숨을 참고 고개를 반쯤 숙인 채로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나 또한 기다렸다. 그가 약속을 이행해 주기를.

“듣거라. 태양의 신탁이 내려왔나니, 태양신의 축복 있으라.”

정적은 잠깐이었다. 놀란 숨소리와 들뜬 웅성거림이 기도실을 채웠다. 내 옆에 앉은 아레테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나도 놀란 연기를 할 필요가 있었기에 손을 가슴에 얹었다. 심장은 연기할 필요 없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 뛰고 있었다.

대신관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금빛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수습 성도 판도라. 신탁 성도로서 신의 부름을 받거라.”

기도실의 모든 눈이 내게로 돌아왔다. 그 무게감에 짓눌려 나는 의자에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다른 이들에겐 상상치도 못한 영광을 업고 감격한 사람처럼 보였을 터다. 적어도 그렇게 보이기를 바랐다. 정작 운명의 순간이 다가오니 나는 앞으로 가는 발을 떼지 못했다.

나를 마비에서 깨워준 건 아레테였다. 아레테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손에 닿는 온기에 흠칫 놀라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어서 올라가, 판도라. 성하가 기다리고 계셔.”

그 뒤로 조그만 미소와 축하한단 말이 내 머리 위에 찬물을 쏟아부었다. 이 신탁의 의미를 상기하고 나니 떨리던 다리에 힘이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수많은 시선이 내 움직임을 따라왔다. 하지만 나는 더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차분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의자 사이 중앙 복도를 걸어 제단을 오르는 계단 앞에서 멈추어 서자 대신관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더 이상 그 금빛 눈동자가 차갑다고 느끼지 않았다. 대신관이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태양신의 빛 영광되어 네게 생명을 선사하는 축복을 내려주었노라.”

나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잡았다.

“신의 신탁을 받드나이다.”

*

“부모님을 뵙고 왔나?”

“네.”

기도식까지 남은 시간은 사흘. 나는 이틀의 외출 허가를 받아 집에 다녀왔다. 대외적으로는 기도식을 마치고 평생을 신전의 가장 귀한 곳에서 살아갈 거라고 알려져 있으니,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고 오라는 배려였다. 부모님을 뵈러 간다는 건 또 다른 연극을 해야 한다는 뜻이어서 나는 망설였으나, 대신관은 내게 다녀오라 단호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견뎌야 하는 절차라고. 나는 그에 수긍했다.

“많이 기뻐하셨어요. 제가 엄청난 영광을 얻었다면서. 조금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만약 제가 신탁 성도로서 죽는다는 걸 아셨어도 똑같이 기뻐하셨을지를요. 영광스러운 건 맞잖아요. 저 하나 희생해서 인공 태양의 빛을 일시적으로 살린다는 것이요.”

각오는 충분히 했고, 웃으며 인사하는 연기도 이 악물고 해냈으나 상처받지 않을 리 없었다. 평생 부모님의 사랑을 의심해 본 적 없던 나는 그 안온한 거짓에서 힘들게 헤어 나와야 했다.

조금은 말하고 싶었다. 전부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해해 줄 리 없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서러움이 뒤늦게 돔의 유일한 이해자 앞에서 흘러나왔다.

“이래서 가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철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생략된 주어가 기도식이라는 것을 알아듣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물러서고 싶다는 뜻은 아니에요. 대신관의 서재로 인공 태양의 빛이 새어 들어왔다. 방이 금빛으로 물드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질문했다.

“기도식 날, 성하가 기도를 끝내면 인공 태양을 소등하고 저는 그 안으로 들어가겠죠? 그게 몇 시일까요?”

“오전 8시 정각이다.”

“그렇다면, 돔 밖에서는 해가 떠 있는 시간이겠네요?”

나는 힘주어 눈매를 접고 입꼬리를 올렸다. 운이 좋다면, 제가 성공한다면 밖으로 나가서 진짜 태양을 볼 수도 있다는 뜻이겠네요. 놀랍게도 그 생각은 내게 위안이 되었다. 대신관이 미간을 모았다.

“너는 왜 그렇게 태양에 집착하는 거지? 단지 책 한 권을 훔쳐봤었다는 이유로?”

진심으로 의아하단 어투였다. 나 또한 내 갈망을 명확하게 설명할 단어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고 말을 골라낸 후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렸을 적부터 꾸던 꿈은 늘 하얀빛으로 가득했어요. 솔라가 말하더라고요. 진짜 태양은 금색이 아닌 하얀색으로 빛난다고요. 어쩌면 저는 꿈속에서 진짜 태양 빛을 보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강렬하고 아름다운 빛을, 꿈속에서 말고 제 눈으로 직접 담고 싶었어요.”

나는 서재의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아무리 올려다봐도 돔의 희뿌연 천장 막 너머는 보이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세상이 나를 부르는 느낌이었다.

“성하는 돔이 지어지기 전의 기억이 없다고 하셨죠?”

“그래. 하지만 솔라가 나를 전쟁 시대 전에 존재했던 유물이라고 불렀으니, 돔이 생기기 전에 만들어진 건 확실해. 그때의 내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면 기억엔 없더라도 성하는 진짜 태양을 본 적 있으시겠네요.”

다시 보고 싶다는 열망 같은 건 남지 않았나요? 내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무모한 갈망은 인간 중에서도 아주 소수에게 주어지는 기질이지. 미덕은 아니라며 그가 열 없이 웃었다.

“어쩌면 신탁받은 이들의 특성일지도 모르겠군. 솔라도 그 호기심을 죽이지 못해 결국 나를 만나게 되었으니까.”

“솔라도 저와 비슷한 꿈을 꾸었겠죠?”

“그렇지. 모든 신탁 적합자가 그리하듯이.”

“성하는 꿈을 꾸시나요?”

대신관은 인간이 아니므로 잠을 자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물었다. 그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것은 인간의 전유물이지. 나는 조금 아쉬워졌다. 꿈이라는 불완전한 연결을 통해서라도 그가 태양의 하얀빛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진짜 태양에 관한 머나먼 기억을 떠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문을 열어본 걸 후회해?”

꿈에서 본 문을 가리키는 질문이라는 걸 이해하는 데 걸린 시간은 찰나였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두려움과 막막함, 두근거림과 결의가 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그 감정이 전부 가라앉은 자리엔 단 하나의 대답이 놓여있었다.

“아니요.”

*

기도식 전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아주 오래되고, 친한 친구처럼 자주 찾아오던 꿈이었다.

이제 문은 닫혀있지 않았다. 하얗게 빛나는 문으로 들어가자 내 발밑에 대리석이 깔린 신전 광장이 펼쳐졌다. 솔라가 내게 등을 보이고 어느 신관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신전 안으로, 대기도실로, 제단 뒤에 숨겨진 문으로, 그리고 지하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자 어둡고 긴 통로가 나타났다. 등불을 든 신관, 수갑이 채워진 솔라, 수갑에 달린 사슬을 쥐고 총을 든 군인과 나로 이루어진 말 없는 행렬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어느덧 우리는 다시 올라가는 계단에 다다랐고, 내 앞에 선 이들은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그 뒤를 따르다가 나는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단단한 벽에 손을 댔다.

돔 안에선 이렇게 길게 위로 이어지는 통로는 보지 못했으니, 이 계단은 벽 바깥에 만들어졌겠지? 나와 바깥세상 사이에 벽 하나만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철컥거리는 사슬 소리가 멀어지자 나는 재빠르게 발을 옮겨 일행을 뒤따랐다. 꿈이어서 그런지 힘들지는 않았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계단의 끝에는 닫힌 문이 있었다. 금색으로 빛나는 문에는 태양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신관이 군인에게 손짓하자 그가 수갑에 채워져 있던 사슬을 끊어내고 물러섰다. 신관은 문을 열고 솔라에게 손짓했고, 솔라는 여전히 수갑을 찬 상태로 문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기 전 나도 급하게 안으로 뛰어들었다.

꿈인데도 불구하고 짙은 쇳내가 코를 가득 채웠다. 둥그런 세상이 온통 검붉었다. 바닥에는 똑같은 색깔의 가루가 가득했다. 몰려드는 본능적인 공포에 나는 비명을 삼키며 탈출구를 찾듯 고개를 홱홱 돌렸다.

솔라가 보였다. 그의 뒤로 신관이 단검을 빼 들고 다가가고 있었다.

소리를 질러 경고하고 싶었으나 나는 아직도 목소리 없는 방관자였다. 다행히 솔라가 날렵하게 몸을 틀어 검은 그의 목을 비켜 나갔다. 나는 멍하니 솔라가 신관의 손을 비틀어 단검을 빼앗는 것을 바라보았다. 솔라는 신관을 공격하는 대신 공간의 중앙을 향해 달렸다. 신관이 밖에 남겨진 군인에게 소리 지르는 것 같았다. 솔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장과 바닥을 잇는 검붉은 기둥을 붙잡았다.

저게 인공 태양의 핵이구나. 깨달음과 동시에 솔라가 기둥에 단검을 세게 박아 넣었다.

커다란 진동이 공간을 울렸다. 발밑이 흔들렸다. 신관이 비명을 지르고 솔라가 단검을 든 팔을 다시 치켜들었다. 갑자기 총성이 울리고 솔라의 몸이 고꾸라졌다. 활짝 열린 금색 문밖에서 군인이 솔라에게 김이 피어오르는 총을 겨누고 있었다.

나는 솔라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찢어진 옷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나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안 돼. 소리 없이 읊조리며 나는 솔라의 손 위로 내 손을 얹었다. 꿈이었으니 내 손의 감촉이 느껴질 리 없었으나, 솔라는 고개를 들었다.

솔라의 눈이 내 눈을 마주 보았다. 갈색으로 그을린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균열은 언젠가 붕괴로 이어질 거고, 그 붕괴는 자유가 될 거야.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 그 믿음만은 잃지 마.”

총성이 다시 한번 울렸다. 솔라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그리고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

나는 새벽이 밝기 전에 기상해서 기도식 예식 준비에 들어갔다. 찬물로 목욕재계하고 나오니 내 치장을 도와주기 위해 성도 두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레테는 아니었다. 오늘 기도식 찬송을 올려야 하니 나보다 일찍 일어나서 연습하고 있었을 터다. 신전에 들어올 때부터 나를 친근하게 보살펴 준 그의 눈을 보며 진심을 담아 기쁘게 인사를 나눌 순 없었을 테니 다행이었다.

성도들은 내게 부드럽고 두꺼운 금색 천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히고 내 머리카락에 금실을 엮어 땋았다. 다른 장신구는 없었다. 개인 소지품은 당연히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고 나는 이미 신체 수색을 한 차례 마친 터였다.

내가 솔라처럼 신관에게서 단검을 뺏어서 균열에 박아 넣을 수 있을까? 가느다란 팔을 내려다보며 나는 심각한 고민에 잠겼다.

“다 되었습니다, 신탁 성도 판도라.”

이제 성도들은 내게 깍듯한 예의를 갖춰 말을 건넸다. 그 거리감이 되레 편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고 성도 한 명이 나를 방 밖으로 안내했다.

문밖에는 대신관이 있었다. 성도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고 나는 고개만 깊숙이 숙였다. 대신관이 내 치장에 눈길을 주고 허리를 숙인 성도와 뒷정리를 마치고 나온 성도에게 간결히 지시했다.

“여기부터 신탁 성도는 내가 데려간다. 너희는 가서 기도식 준비를 하거라.”

성도들은 의심 없이 나를 대신관의 손에 맡기고 떠나갔다. 그들이 복도를 돌아 사라지는 것까지 지켜본 대신관이 내게 손짓했다. 가자. 나는 반항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신전 광장으로 나가는 복도가 길게 느껴졌다. 나는 계속 머릿속으로 인공 태양에 들어간 후의 상상을 반복했다. 나는 죄수가 아니니 아마 수갑을 채워서 데려가진 않을 테다. 하지만 수갑 없이도 내가 무기를 뺏을 수 있을까? 주먹으로 기둥을 치는 건 소용 없겠지? 굴러다니는 돌멩이라도 없을까? 깊은 생각에 잠긴 나는 대신관이 내 이름을 세 번째 부르고서야 머리를 들었다.

“받아라.”

대신관이 내게 가까이 다가서서 작은 단검이 담긴 검집을 쥐여주었다. 누가 보기 전에 숨기거라. 나는 화들짝 놀라 허리춤에 겹겹이 천을 모아 묶은 곳 아래에 검집을 감추었다. 다행히 천이 두껍고 단검이 작아서 티가 나지 않았다.

“솔라의 단검이다. 이게 내가 줄 수 있는 마지막 도움이야. 너는 신탁 성도이니 안내하는 신관도 방심하고 있을 거다. 그래도 균열 때문에 경계가 올라갔을 테니 조심해.”

솔라의 유품. 그의 의지가 나와 함께하는 것 같아 긴장으로 요동치던 마음이 조금 차분해졌다. 대신관이 나를 조용히 응시하다가 물었다. 예식 절차는 전부 기억하고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가 길게 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그러나 발을 옮기는 대신 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나는 기다렸다.

대신관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판도라. 네 선택으로 연 세상이 나쁘지만은 않기를 바란다.”

대신관은 내게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복도를 빠르게 걸어 나갔고 나도 숨겨둔 단검이 흐트러지지 않게 주의하며 그가 가는 길을 따랐다.

신전 광장으로 나왔을 때 돔의 천장은 아직 어두웠다. 인공 태양이 점등하기 전이었다. 광장엔 성도와 신관들이 각자 자리에 모여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나오자 시선이 잠깐 몰려들었다. 나는 대기도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굳지 않았다.

대신관과 내 자리는 신전 광장의 중앙이었다. 대신관 바로 아래 직급의 고위 신관 양옆으로 서자 그가 천장을 향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새벽 기도를 시작하겠습니다. 기도식 날에만 켜지는 방송 장치가 치지직 소음을 내며 신전 밖에 모인 신자들에게도 신관의 말을 전했다.

인공 태양이 서서히 밝아졌다. 매일 올리는 새벽 기도가 오늘은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우리의 죄를 참회하고 태양신께 우리가 가진 전부를 바치나니, 오늘도 하루를 찬란한 빛으로 굽어살피소서. 나는 소리 없이 따라 읊조렸다. 찬란한 빛으로 굽어살피소서. 그 찬란한 빛을 제 눈으로 담을 수 있게 허락해 주소서.

경배와 찬송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찬양대 속에서 아레테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찬송가의 마지막 음절이 새벽 속으로 흩어지자, 고위 신관이 광장 중앙에서 물러섰다. 대신관이 신탁 성도인 나를 위해 올리는 기도는 조금 더 길게 느껴졌지만, 그 내용이 머릿속에 머물지는 않았다. 태양신의 광채 영원하소서. 기도문의 마지막만이 내 귓가에 닿았다.

잠시 켜졌던 인공 태양의 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나는 숨을 삼켰다. 빛 전달 의식을 위한 소등. 내 역할을 이행할 시간이 코앞에 닥쳐왔다.

나를 인공 태양의 내부로 안내할 신관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솔라를 안내했던 신관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그러나 안내원이 누구였든지 내게 상관은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이미 한번 밟아본 길이었다.

신관은 꿈속에서 보았던 길 그대로 나를 이끌었다. 하나 다른 점은 내 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지 않았다. 내 뒤로 군인 한 명이 따라왔다. 대외적으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우리를 보호한다는 이유일 터였다. 꿈에서 보지 않았다면, 대신관의 입을 통해 기도식의 실체에 관해 듣지 않았다면 나도 똑같이 생각했겠지.

사색에 빠진 채로 걷다 보니 지하실에서 올라가는 계단에 도착해있었다. 등불을 든 신관이 앞서 계단을 올랐다. 나는 티 나지 않게 단검이 잘 숨겨져 있는지 손끝으로 확인하고 힘 있게 계단을 밟았다. 오래 이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서두르지 않았다.

한참을 오르자 숨이 차기 시작했다.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신관이 가끔 뒤를 돌아보았지만, 괜찮냐고 묻지는 않았다. 나도 불평 없이 아파져 오는 다리를 최소한의 동작으로 움직였다. 인공 태양 내부에 들어서서 빠르게 움직이려면 힘을 비축해야 했다.

계단은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다. 어쩌면 두려움 때문에 영원히 이어지길 바랐던 내 마음이 일으킨 착각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윽고 내 눈앞에 태양이 새겨진 금색 문이 들어왔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손이 식은땀으로 축축했지만, 혹시라도 검집이 흐트러질까 봐 옷에 닦지도 못했다. 신관이 문에 다가가서 손을 올렸다. 나는 의식적으로 숨을 고르게 내쉬려고 노력했다. 음산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신관이 내게 따라오라는 듯 손짓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뒤에 미동 없이 선 군인을 힐끔거리고 천천히 문지방을 넘었다.

먼저 오른발을. 두 주먹을 꾹 쥐었다. 세상이 검붉게 물들었다. 그다음엔 왼발을. 다시 핀 오른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나는 인공 태양 중앙에 수직으로 뻗은 기둥을 향해 내달렸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뛰면서 허리춤에 숨겨둔 단검을 빼 들고 검집을 던졌다. 내 뒤에서 나를 안내한 신관이 뭐라 외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솔라와 달리 신관과 몸싸움하게 된다면 이길 자신이 없었으니 방심한 틈을 타 빠르게 균열을 벌리는 것이 내 목표였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기둥에 다다라 손을 짚고 몸을 바로 세웠다. 숨돌릴 틈은 없었다. 균열. 솔라가 만들어낸 균열은 어디 있지? 불쾌하게 끈적거리는 기둥을 마구 더듬다가 유독 거친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이곳이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있는 힘껏 단검을 기둥에 박아 넣었다.

우르릉거리는 커다란 소리와 바닥이 세차게 흔들렸다. 나는 순간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기둥은 부서지지 않았다. 다시 단검으로 찌를 준비를 하던 찰나, 묵직한 무게가 나를 덮쳤다.

내게 몸을 날린 신관과 함께 나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단검이 쨍그랑하고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내 목을 비틀려는 손을 떨쳐내려 애쓰며 일어서려 했다. 나를 악착같이 놓지 않는 손아귀 때문에 시야 끄트머리가 검은색으로 일렁였다.

절박하게 버둥거리던 내 손에 딱딱한 물건이 닿았다.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나는 팔을 휘둘러 나를 잡은 신관의 얼굴을 쳤다. 그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내게서 떨어졌다. 내 손에 들린 게 단검의 검집이라는 게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필사적으로 바닥을 짚어가며 단검을 찾았다. 날카로운 통증이 왼쪽 손을 스치고 나서야 나는 검붉은 가루가 잔뜩 묻은 단검을 찾아낼 수 있었다. 피가 흐르는 손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나는 단검을 쥐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무시하고 일어서 기둥을 무너지듯 짚었다. 기둥은 마치 불에 달궈진 것처럼 뜨거웠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군인의 놀란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한 번만 더. 균열을 찾아 손으로 더듬으려다 나는 멈칫했다. 기둥 한 부분에서 하얀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솔라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균열은 언젠가 붕괴로 이어질 거고,

나는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 붕괴는 자유가 될 거야.

그리고 하얀빛을 향해 단검을 내려 찔렀다.

*

대신관은 신전 광장에서 참회 기도를 올렸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용서의 태양 빛으로 인하여 우리를 축복되게 하소서. 대신관의 금빛 눈동자가 돔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인공 태양의 빛이 없어 한밤중처럼 어두웠다. 우리가 어두운 밤을 걸을지라도 태양신께서 우리와 함께하나니, 새벽의 빛 우리를 비추소서.

진실의 빛 우리를 비추소서.

반짝. 머리 위에서 하얀빛이 점멸했다. 24시간의 소등 동안 천장에서 내리쬐는 빛은 아무것도 없어야 했기에 몇몇 신관과 성도가 의아함을 담아 잠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대신관의 기도가 멈추지 않자, 착각이었겠거니 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반짝. 이번에는 더 환하게 빛이 발광했다. 이제 불안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대신관은 기도를 계속했다. 점멸의 속도가 빨라지고 웅성거림이 커지는 광장 속에서 고요한 기도는 초연하고 이질적이었다.

진리와 진실을 저버렸던 죄인들이 무릎 꿇고 참회합니다. 고난의 피와 눈물로 마음을 정결케 하며 세상 가장 밝은 빛을 경배하나니, 용서의 그날 오게 하소서.

비명이 들렸다. 누군가 천장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아무도 불경죄를 논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인공 태양에 하얗게 금이 가고 있었다.

하나의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돔 전체로 울려 퍼졌다. 인공 태양의 중심에서 시작된 가느다란 줄은 거미줄처럼 서서히 번졌다. 그 금은 돔의 정점에 닿았고 곧이어 천장 전체에 퍼졌다.

여전히 검게 물든 인공 태양 대신 균열에서 하얀빛이 새어 나왔다. 그 빛이 인공 태양에 닿자, 인공 태양이 부스러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러 비명이 뒤섞였다. 공포에 휩싸여 신전으로 뛰어 들어가는 사람, 바닥에 바짝 엎드려 우는 사람, 모두가 갑작스러운 변화 앞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리고 아수라장 속에서 대신관은 기도를 끝맺었다.

약속의 날, 태양의 빛 임하소서.

대신관이 고개를 들었다. 천장을,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네 말이 맞았어, 솔라. 태양 빛은 눈 부신 하얀색이구나. 속삭이면서도 그는 마음 한구석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 빛을 보는 게 처음이 아니라는 확신이 그를 가득 채웠다. 녹슬었던 톱니바퀴가 돌아가고 비로소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얀빛이 세상을 물들였다. 시야가 하얀색으로 점령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관의 마음속에서 뒤엉키는 감정 중 두려움은 없었다. 들을 수 있으려나, 대신관이 중얼거리고 눈을 감았다.

“너는 이 닫힌 세상을 떠나, 진실된 태양 아래 설 거야.”

그렇게 그는 마지막으로 대신관으로서 용감한 한 소녀에게 축복을 전했다.

얼마나 그 자리에, 하얀빛 아래 서 있었을까. 누군가 그의 손을 잡아 왔다. 불에 덴 것처럼 뜨거운 온기였다. 돌아왔구나. 그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속삭임은 꿈을 꾸듯 고요하고 다정했다.

“판도라, 저 위를 봐. 네가 꿈꾸던 태양이 이곳에 있어.”


Written 24-09-13

53432자 (40130)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Non-CP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