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덤에 수국을 꺾어 헌정하라

일장. 장례 - 4

葬禮. 장사를 지내는 일. 또는 그런 예식.

소세하가 남긴 집과 물건을 전부 정리하는 덴 이틀이 걸렸다.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던 네 제자는 만장일치로 가람이 사는 삼은고개까지 마차를 하나 빌려서 가기로 동의했다. 제대로 된 이름도 없이 무명마을이라 불리는 이 외진 곳까지 마차가 오려나 우려하던 가람에게 소명은 이미 마차를 구해놓았다고 귀띔했다. 정오가 되기 전에는 도착할 거라며 소명이 자랑스럽게 어깨를 쭉 폈다.

“지난달에 새로 거래처를 뚫었는데, 일이 있어서 이 근방으로 내려온다고 했었거든요. 혹시나 해서 어제 서신을 보냈더니 지나가는 길이니 싸게 태워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저 있으니까 좋죠? 무언갈 기대하는 눈빛에 가람이 웃으며 소명이 원하는 대로 칭찬을 해주었다. 그래, 우리 막내가 최고다. 통통한 볼에 보조개가 파이도록 활짝 웃는 소명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인 가람이 몸을 숙여 저보다 키 작은 동생과 어깨동무했다.

“그리고 넌 가는 길에 네 낭군님 얘기나 좀 해봐라. 선을 본다는 말도 없었는데 갑자기 결혼이라니. 심지어 다 합의된 이야기도 아니라며?”

“에이, 언니. 원래 인생이란 그런 거죠. 언니가 궁금하다면 당연히 얘기해줄 거예요. 그런데 마차 안에선 말고요. 거래처를 통해 쓸데없는 소문이 퍼지는 건 사양이거든요.”

마차가 오기까지 한 시진도 안 남은 것 같은데, 준비는 다 된 거죠? 소명이 묻자 가람이 고개를 돌려 둘이 서 있던 마당을 두리번거렸다. 초가집은 마을 이장이 처분해 주기로 했고, 안에 있던 물건도 태울 건 태우고, 둘 건 두었다. 온유는 툇마루에 앉아 서책을 보고 있었다. 설아는 보이지 않았다.

얘가 어딜 간 거냐며 중얼거리던 가람이 설아를 찾아오겠다며 초가집 안으로 들어섰다. 혼자 남겨진 소명은 잠시 발로 흙장난을 하다가 툇마루로 다가와서 온유 옆에 걸터앉았다. 온유는 흘끗 소명을 쳐다보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명이 평소와 다름없이 먼저 말을 붙였다.

“혹시 설아 언니와 한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게 불편한가요?”

“며칠 한집에서도 같이 지냈는데, 딱히.”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어제부터 서로를 유독 더 피해 다니는 것 같길래요.”

제 착각일 수 있지만. 소명이 가볍게 덧붙였다.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콕 집어 말하진 않았어도, 온유 역시 자신이 설아를 일방적으로 피해 다니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편한 건 사실이어도, 온유는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아이처럼 떼를 써서 다른 이들에게 폐를 끼칠 생각은 없었다. 소명이 천연덕스럽게 ‘마차를 두 대 빌릴 걸 그랬나’ 혼잣말하자 온유가 한숨을 쉬고 책을 덮었다.

“별일 없다면 저녁쯤 가람 언니 집에 도착할 텐데, 돈 아깝게. 알면서도 떠보는 버릇은 고쳐라.”

“미안해요. 직업병이라.”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온유가 끄트머리가 해진 서책 귀퉁이를 만지작거리다가 소명에게 조용히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스승님이 남긴 유언에 관해서.”

소명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고 어깨를 으쓱였다. 남기신 말 그대로 받아들였는데요, 내용 자체는 직관적이었으니까요. 다만 처음부터 이상하게 생각했던 점이 있다며 소명이 가람이 있을 초가집 안쪽을 슬쩍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근래 스승님의 건강이 안 좋아졌다고 듣긴 했지만요. 진짜 죽음을 앞둔 상태였고 유언을 남기고 싶었으면 가람 언니든 설아 언니든 누군가를 부르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우리에게도 늦지 않게 연락이 왔을 테고요. 굳이 전언의 술을 통해 유언을 남길 필요가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혹시 유언이 가짜일 가능성은 생각해 봤어?”

“안 해본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언의 술이 가짜였으면 설아 언니가 알아챘을 거예요. 스승님의 주술을 언니가 못 알아볼 리 없으니까요.”

온유도 그를 부정하진 않았다. 다만 다른 가능성 또한 제시했다.

“만약 설아가 우리에게 거짓을 말하고 있다면?”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설아 언니의 방식이 아니기도 하고.”

의문을 제기하긴 했지만, 설아가 거짓을 고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니어서 온유는 더 따지고 들지 않았다. 소명의 말이 끝나자마자 가람이 다급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나온 탓에 그럴 틈도 없었다.

“설아가 안 보이는데. 혹시 어디로 간다고 얘기 들은 것 있어?”

온유와 소명이 고개를 저었다. 가람이 신발을 신으며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오래 있지 않아 마차가 올 거라고 했는데 대체 어딜 간 거람. 초조하게 중얼거리는 가람에게 소명이 운을 띄웠다.

“잠깐 마을로 내려갔을 수도 있지 않나요?”

“없진 않지만, 이미 떠날 준비가 다 된 마당에 마을로 내려갈 이유는 없단 말이지.”

“하지만 그 외엔 갈 곳이 없잖아요. 먼저 떠났을 리도 없고.”

열렬한 토론 끝에도 나오는 답은 없었다. 가람과 소명이 머리를 싸매자,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온유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하고 싶은 게 있었나 보죠. 확인하고 싶은 일이라든가, 마무리가 덜 된 일이라든가. 마차 시간엔 맞춰서 올 거예요. 스승님의 유언을 따르자고 그렇게 저희를 설득했는데, 다른 이도 아닌 설아가 자진해서 이탈하는 일은 없겠죠.”

“…유언?”

한 장소가 번개처럼 가람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차가 올 때까지 반 시진은 남았겠지? 질문에 소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가람이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소명이는 마을에 한 번 내려갔다 와줘. 거기 없을 것 같긴 한데, 확인은 해야지. 온유는 여기 남아서 마차를 기다리고, 혹시라도 우리가 늦으면 양해를 구해줘.”

“언니는 어디로 가보게요?”

마당을 나서 언덕을 내려가려는 가람에게 소명이 소리쳤다. 가람은 뒤돌지 않고 외쳤다.

“호숫가!”

곧은 등, 그 위로 흘러내리는 새치 섞인 긴 검은 머리카락. 스승님이라 부르면 힐끗 돌아봐 주는, 주름이 지기 시작한 고집 센 얼굴. 무심하지만 저를 피하지는 않는 보라색 띤 고동색 눈동자. 그게 설아가 기억하는 스승 소세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고국 사람들은 대부분 어두운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지녀, 멀리서 보면 소세하의 다른 제자들은 얼핏 그와 가족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설아는 그게 못내 부러웠다. 연갈색을 띠는 제 머리카락을 하루 종일 만지작거리다가 설아는 소세하에게 물었었다.

“주술로 머리카락 색을 바꿀 수도 있나요?”

“변장의 술이라는 게 있긴 하지. 굉장히 복잡한 주술이고, 유지하는 데만 기력이 만만찮게 들어서 지금 너로서는 불가능해.”

소세하는 이유도 묻지 않고 칼같이 대답했다. 빈말로도 따듯하다고는 못할 어조에 어린 설아가 시무룩해지자, 그는 한숨을 푹 쉬고 시선을 맞춰 무릎을 굽혀주었다.

“남들과 다른 게 싫으냐?”

“저도 언니들처럼… 스승님을 닮고 싶었어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 그 애들과 내가 닮은 점이 어디 있다고? 떨떠름하게 대꾸하며 소세하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설아가 그 동작을 따라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대신 너는 이 보라색을 닮았잖느냐. 내 쪽은 너만큼 선명하게 보이진 않을 테지만.”

주술사가 갖고 태어나는 보라색 눈동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희미하게 보라색을 띠는 고동색부터 멀리서 봐도 착각할 수 없는 선명한 보라색까지, 그 색이 선명할수록 주술사의 잠재성이 뛰어나다고 여겨졌다. 물론 노력을 통해 타고난 재능이 적더라도 경험과 실력으로 메꾸는 주술사들도 있었으나, 일반인들에게 보라색 눈이란 주술사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소세하의 첫 제자로 들어온 가람의 눈동자는 고동색이었고, 얼마 전에 셋째 제자가 된 온유의 눈동자는 그보다 짙은 검은색이었다. 둘 다 주술사를 상징하는 보라색은 티끌만치도 없었다. 설아는 제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연한 푸른색에 섞여 든 보라색이 처음으로 기쁘게 느껴졌다. 그 눈이 가족도 없이 타지에서 내버려진 설아에게 자신을 구해준 이와 첫 연결고리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설아는 소세하가 제자들을 해산하고 나서도 망설임 없이 주술사의 길을 가기로 선택했다.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기보단, 그 연결고리가 흐려지게 두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컸다.

사실은 스승님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본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설아에게 소세하는 기억 속의 첫 고향이었다. 온유처럼 냉정하게 관계를 끊어낼 수 있는 성정도 아니었고, 가람과 소명처럼 돌아갈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해산 후에도 멀리 떠나지 않고 설아는 가끔 소세하를 찾아왔다.

“이제 그만 오거라.”

살아있는 스승을 마지막으로 본 한 달 전, 소세하는 설아에게 단호하게 일렀다. 그 말을 처음 들은 건 아니었지만, 설아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면 네 마음대로 하라며 져주곤 했던 때와 달랐다. 설아를 쳐다보지 않는 옆얼굴이 그늘지고 차가웠다.

“이만하면 충분히 어리광을 받아준 것 같다. 나도 해야 할 일이 있고, 더는 위험하니 흘려듣지 말고 네 갈 길 가거라.”

무엇을 하려 하냐는, 무엇이 위험하냐는 질문에 소세하는 답하지 않았다. 설아가 한참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자,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더욱 매섭게 변했다.

“지키고 싶은 게 많겠지. 품고 싶은 것도. 그 나이엔 다들 자신은 죽을 일 없다고 생각하고. 세상을 우습게 보지 말아라. 기억해, 죽으면 다 부질없어. 손에 쥔 게 무엇이든 버려서라도 살아남아.”

소세하가 설아를 바라보았다. 보라색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설아는 순간 숨을 삼켰다. 스승의 눈이 저런 선명한 보라색이었었나? 하지만 찰나의 색은 곧 고동색으로 변했고, 소세하는 고개를 돌렸다. 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삼 주가 지나 설아는 소세하의 부고를 받게 되었다.

“……설아! 설아야!”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설아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바위 동굴 근처에 앉아 멍하니 호수의 잔잔한 물결을 응시하던 청보라색 눈을 옆으로 돌리자 헐레벌떡 달려오는 가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지났던가 싶어 설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앞에 도달해서 숨을 몰아쉬던 가람이 팔짱을 끼고 설아를 올려다보았다. 키는 반 뼘 가까이 작았지만, 맏제자다운 위엄이 엄한 눈빛에서 드러났다.

“마차가 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갑자기 사라질 거면 어디로 가는지 얘기라도 해야지.”

“미안해.”

설아가 선선히 사과하자 가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서 가자는 재촉에 설아가 바위 동굴에 길게 눈길을 주었다가 가람을 따라나섰다. 호숫가를 떠나 하산하는 산길을 밟으며 가람이 물었다.

“여기는 왜 온 거야? 주술의 술은 한번 들으면 사라지니까 또 와봤자 남아있는 건 없을 텐데.”

“…있어.”

질문했지만 딱히 알맹이 있는 답을 기대했던 건 아니라 대충 흘려듣던 가람이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뭐가? 설아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내가 풀지 못한 전언의 술이 하나 남아있어.”

“뭐? 여태 그런 말 하지 않았잖아?”

“아무리 노력해도 풀 수 없었으니까.”

몇 시간을 쏟아부어도 술식을 해제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며 설아가 고백했다. 사실 유언을 따르면 그 술식을 푸는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해서 열심히 다른 이들을 설득했다는 것도. 소세하의 술식에 제일 익숙한 본인이 두 번째 전언의 술을 풀지 못했으니, 당연히 나머지 제자들도 못 풀 거라 생각해서 굳이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까지 듣고 가람이 이마를 짚었다.

“그래도 다 같은 스승님의 제자인데 소통은 제대로 해야 할 것 아니니….”

“내가 생각이 짧았어. 미안해. 지금이라도 내려가서 얘기할까?”

가람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멈췄던 발을 다시 움직여 산길을 내려가는 그의 걸음엔 미련이 없었다.

“반 시진도 안 있어 떠나는데, 괜히 얘기해 봐야 혼란이나 더하겠지. 우선 스승님의 유언을 마무리하는 데 집중하고, 다른 애들에겐 나중에 기회 봐서 얘기하자.”

몇 발짝 뒤에 따라가며 설아는 침묵으로 동의했다. 간신히 설득이 진전을 보이고 있는데, 괜한 분란을 만들면 홍악산맥으로 떠나기도 전에 일이 흐지부지될 수 있었다. 설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승이 남긴 전언을 모두 제 눈과 귀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야 소세하가 자신의 목숨을 등한시하고 제자들을 버리면서까지 하려 했던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억해, 죽으면 다 부질없어. 손에 쥔 게 무엇이든 버려서라도 살아남아. 소세하의 고요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설아는 품 안에 넣은 영옥을 꾹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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