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덤에 수국을 꺾어 헌정하라

고사一. 화장

火葬. 시체를 불에 살라 장사 지냄.

붉은 산자락에 세워진 영웅비는 성인 남성의 키를 훌쩍 넘을 만큼 거대했다. 새카만 돌에 빼곡하게 새겨진 하얀 글씨는 영웅 비연의 일생과 업적을 치하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랬을 터다. 자양화는 왕실에서 파견한 문인들이 밤새워가며 고민한 내용을 한 글자도 읽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영웅비 앞 제단에 눕혀진 시신에 못 박혀있었다.

하얀 천 위에 눈 감고 있는 스물한 살의 여자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자양화는 말간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술식을 그려나가는 손짓은 능숙했지만, 거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자양화 뒤에 선 수많은 이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오염지대 주민 일부, 길라잡이들, 토벌대, 그들을 이끄는 고씨 왕실의 일왕자까지도.

여자의 시신에 보라색 불길이 붙었다. 늘 묶어 올리던 검은색 머리카락이 끝에서부터 재로 타들어 가기 시작하자 자양화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주술사 비연의 스승, 자양화. 내 제자의 명복을 빈다.”

시신은 재로, 재는 바람을 타고 하늘로 돌아갔다. 화장의 술이 끝나자 하얀 천 위엔 미처 날아가지 않은 재와 작은 보라색 구슬만이 남아있었다. 자양화는 가까이 다가가서 제자의 영옥을 주워 드는 대신 눈을 감았다. 누군가 그를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자양화가 눈을 뜨자 손바닥에 햇빛을 머금은 영옥을 올린 도천왕자 고준이 보였다.

“고국이 뛰어난 실력과 성품을 지닌 영웅을 잃은 것에 탄식을 금할 바가 없다. 목숨을 바쳐 사람들을 마물과 오염으로부터 지킨 영웅의 시신은 고성에서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주고 싶었지만… 그의 스승인 자양화의 뜻을 존중해 영웅 비연의 고향인 이곳 홍악산맥에서 장례 예식을 치르고 영웅비를 세우기로 했다.”

적선하듯 건네진 고준의 찬사에 자양화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를 탐색하듯 주시하던 고준이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모인 사람들에게 비연의 영옥을 내보였다.

“대신 그의 영옥을 고성으로 모셔가 국보로 보존하기로 했다. 우리는 내일 이른 아침 수도로 떠난다. 다들 미리 준비해 두도록.”

수도 고성으로 내려가 왕실이 내리는 보상을 받을 생각에 토벌대에 속한 주술사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고준을 비롯한 왕실 일행이 마을로 내려가는 산길을 밟자, 사람들이 우르르 그 뒤를 따랐다. 몇 명씩 영웅비 앞에서 잠시 묵례하고 떠남을 반복하자 오래 지나지 않아 공터가 비워졌다.

아직 영웅비 앞에 서 있는 자양화 옆에 누군가 다가와 침묵으로 묵례했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길라잡이 여해운이었다. 토벌대에 합류했을 때부터 자양화와 비연과 함께한 그의 얼굴은 침통했다.

“제자의 죽음은 유감입니다. 한데 비연 님의 영옥을 정말 왕실에 넘기셔도 괜찮은 겁니까?”

“영옥은 그저 돌멩이에 지나지 않아. 유품이라 하기에도 초라한 흔적이지.”

그러니까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자양화는 여해운을 돌아보지 않았다. 여해운은 그 얼굴을 티 나지 않게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자양화를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오만하고 독선적인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장례 예식을 끝마친 서른두 살 남자의 어깨는 상실의 무게로 짓눌려있었다. 그럼에도 끝내 무너지지 않는 그를 보며 여해운이 물었다.

“그렇다면 홍악산맥의 심장은….”

자양화가 검지를 들어 제 입술에 댔다. 여해운이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영웅비가 세워진 공터에 남은 사람은 둘밖에 없었지만, 자양화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훑고 나서야 다시 말을 꺼냈다.

“목숨이 아깝거든, 그것에 관해선 잊어버려. 그것을 손에 넣어간 사람에 관해서도.”

“하지만 비연 님이 이 땅을 정화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증거를….”

“네 목숨까지 얹기 싫으면 잊으라고.”

형형한 보라색 눈동자가 여해운을 향했다. 나이는 여해운이 네 살 많았지만, 주술사가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위압감 아래 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참 침묵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미동 없는 자양화에게 그가 낮게 질문했다.

“이곳에 남으시렵니까?”

“아니.”

비단 영웅비 앞이 아닌, 홍악마을에도 머물지 않을 거라는 뜻을 알아들은 여해운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머리를 숙였다.

“그렇다면 왕자 저하를 따라 고성으로 가시겠군요.”

“내가 미쳤냐?”

즉각 나온 거친 반응에 여해운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면 어디로 가시렵니까? 당황이 밴 물음에 자양화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영웅비를 등졌다. 낮게 묶은 새카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알아서 무엇 하려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간다.”

“자양화가 그리 쉽게 잊힐 이름이 아닐 텐데요.”

스물의 나이에 주술사로 이름을 알리고, 서른이 되기 전에 고국 최고의 주술사 호칭을 받은 그였다. 하물며 이제는 오염지대 토벌대의 핵심 인물이자, 영웅 비연의 스승이었다는 업적까지 더해져 그를 찾는 사람이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자양화는 잠적하겠다는 의사를 철회하지 않았다. 그의 입이 비웃음으로 뒤틀렸다.

“어차피 진짜 이름도 아니었던 것, 그냥 버리려고.”

여해운은 산길을 따라 사라지는 자양화를 붙잡지 못했다. 그 후로 고국에서 주술사 자양화를 목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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