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 찬미 - 1
讚美.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나 위대한 것 따위를 기리어 칭송함.
삼은고개는 작은 산 세 개가 가까이 붙어있다고 하여 이름이 지어진 마을이었다. 귀한 약초가 많이 자라는 산으로도 유명해서 종종 약초마을이라 대신 불리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삼은고개 근방 마을에는 약초꾼으로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약방도 여느 마을보다 자주 볼 수 있었다.
가람네 가족이 운영하는 약방도 그중 하나였다. 도가약방이라는 간판을 단 커다란 약방은 늦은 시간에도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마차에서 제일 먼저 내린 가람이 당장 가서 도와야 하나 싶은 눈빛으로 약방을 힐끔거리자, 고동색 머리카락을 길게 땋아 내린 열댓 살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일행을 맞이하러 뛰어나왔다.
“가람 언니! 일찍 도착했네. 큰아빠가 언니는 저녁이 훌쩍 지난 다음에야 올 것 같다고 그랬는데.”
“날씨가 좋고 길이 잘 닦여있어서 빨리 올 수 있었어. 그동안 별일 없었지?”
“그냥 늘 바쁘지, 뭐. 아, 어서 오세요. 가람 언니의 동문 분들이시군요. 저는 언니의 사촌 동생인 도주희라고 해요.”
가람을 매우 닮은 여자아이가 꾸벅 인사하자 설아와 온유도 어색하게나마 맞인사했다. 방글방글 웃는 낯의 소명이 친화력을 십분 발휘하여 주희에게 다가왔다.
“초대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태소명이라고 해요. 상단 일을 도우며 여러 약방을 가봤지만, 직접 보게 되니 도가약방이 단언컨대 그중에서 최고인 것 같네요.”
아직은 어린 소녀에게 격찬의 효과는 탁월해서 소명은 주희의 호감을 금방 얻어낼 수 있었다. 언니가 그 태천상단의 일원이라고요? 저보다 나이가 엄청 많아 보이진 않은데, 대단하다! 눈을 반짝이는 선망 가득한 얼굴의 사촌 동생을 보며 가람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쟤가 저렇게 사람을 좋아하는 애가 아니었는데. 막내 제자의 수완에 다시금 감탄하며 가람이 목을 가다듬자 주희가 손뼉을 쳤다.
“아이참, 내 정신 좀 봐. 오늘 하루 묵으실 방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괜찮아, 내가 할게. 손님방으로 데려가면 되지? 주희, 넌 가서 약방 마감을 도와. 일이 밀려서 늦어지고 있던 것 같은데.”
“네, 언니. 저녁 식사는 아직이죠? 네 명분 더 준비해야 할 것 같다고 알릴까요?”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낯가리는 설아나 온유가 조금 염려되긴 했으나, 어차피 부모님에게 인사 올리는 것이 예의니, 한번은 얼굴을 봐야 했다. 대가족이라 이래저래 시끌벅적할 테니 온 관심이 둘에게 쏠리지도 않을 테고, 만약의 경우엔 소명과 자신이 나서서 주의를 돌리면 되니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설아와 온유도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반대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면 데리러 오겠다고 하며 주희는 약방을 향해 총총걸음으로 떠나갔다. 가람이 다른 제자들에게 손짓했다.
“손님방에 짐을 풀어두고 쉬고 있어. 난 잠깐 부모님 먼저 뵙고 올게.”
“전 편지 보낼 게 있어서 잠시 나갔다 올게요.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식사 전엔 돌아올 거예요.”
소명의 말에 가람이 남은 두 사람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마차 안에서는 큰 다툼이 없었다지만, 설아와 온유를 손님방에 둘만 두기엔 마음이 썩 편치 않았다. 당사자인 온유도 마찬가지였는지, 가람이 뭐라 제안하기도 전에 약방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괜찮다면 약방을 한번 보고 싶은데. 마침 상비해 둔 약이 떨어져 가는 중이거든요. 마감 시간 전까지 둘러봐도 괜찮을까요?”
타인 앞에서 심하게 낯가리는 설아를 내보내기보단 자신이 나가는 게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가람은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셋을 손님방으로 이끌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책임지고 분위기를 살필 걸 생각하니, 응당 편하게 느껴져야 할 집에 돌아왔음에도 가람은 골이 조금 아팠다.
도씨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인 저녁상은 늘 그랬듯이 명랑하고 떠들썩했다. 도가약방의 주인인 가람의 아버지와 어머니, 가람의 남동생과 여동생, 작은 아버지 부부 내외와 다섯 명의 사촌 동생들까지, 도합 열두 명의 도씨 가족과 손님 세 명까지 앉으니 거대한 식탁이 좁아 보일 지경이었다. 설아와 온유는 가람의 양쪽으로 조용히 앉아 있었고 소명은 설아의 오른쪽에 앉아 주희와 친근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음식이 입맛에 맞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껏 먹어요. 다시 여행길에 오른다는데 든든히 먹어야지.”
가람의 작은어머니가 겸손하게 웃어 보였다. 그 앞에는 각종 나물 반찬과 맛깔나게 양념 된 꿩고기,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흰쌀밥, 김이 피어오르는 고깃국까지 탁상 다리가 부러질 만큼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온유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만큼 좋은 음식을 먹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는걸요. 성대한 대접에 감사드립니다.”
설아도 말없이 머리를 숙여 보였다. 낯을 심하게 가린다고 가람이 미리 언질을 준 터라 다행히 침묵을 무례로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되레 어른들은 웃어주며 아이들이 설아의 이국적인 외모를 신기해하며 힐끔거리는 걸 티 나지 않게 자제시켰다. 그럼에도 호기심 가득한 질문이 오가는 건 막지 못했다.
“언니들도 가람 언니처럼 주술사님의 제자라고 들었는데, 어려운 주술 같은 것도 쓸 수 있어요?”
“가람 누나는 잘 못 써요! 작은 모닥불만 성냥 없이 피울 줄 알아요!”
“이 녀석들이 정말. 손님 앞에서 내 체면을 세워주진 못할망정.”
가람이 가벼운 분위기를 이어 재잘대는 동생들을 과장되게 노려보자 아이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가람의 남동생이 피식피식 웃으면서도 누나의 편을 들어주었다.
“누나 검술 실력이 좋은 건 부정 못 하지. 약초 캐러 갈 때 누나가 있는 것하고 없는 건 심정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니까. 그저께도 나 혼자 산에 올라가려니까 얼마나 긴장되던지.”
“맞아, 검술도 스승님에게서 배웠다고 했지, 언니? 그럼 다른 분들도 언니와 마찬가지로 검술도 배우셨겠네요?”
주희가 부드럽게 대화를 받자 소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에서 가까운 마을이라 구할 수 있는 귀한 나물을 야무지게 앞접시로 옮겨오면서도 소명은 바지런히 소세하의 맏제자 칭찬에 나섰다.
“저희 다 기본기는 배우긴 했어요. 그렇지만 가람 언니가 검술에 제일 뛰어났었죠. 저만해도 언니가 쓰는 검은 무거워서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종목을 바꿔서 단검술이나 좀 배웠죠. 저도 주술엔 큰 재능이 없었거든요.”
쏟아지는 칭찬에 가람의 귓가가 슬쩍 달아올랐다. 별소리를 다 한다는 기분 좋은 투덜거림에 다른 사촌 동생이 맞장구치며 끼어들었다.
“언니는 늘 주술과 검술에 관심 있어 했으니까! 옛날에는 영웅 비연처럼 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걸. 고국 최초이자 최고의 마검사!”
주술과 검술을 능숙하게 다루며 오염지대를 정화한 영웅 비연에게 주어진 칭호를 입에 담으며 그가 가람의 변치 않는 우상이었다는 이야기로 화제가 틀어지자, 가람의 귀가 새빨갛게 변했다. 사촌 동생의 입을 막고 싶어 하는 눈치가 역력했지만, 식탁 반대편에 있는 동생에게 가람의 손이 닿을 리 없었다. 놀림 받는 도씨 장녀가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곤 밥 먹는 것도 잊고 조잘조잘 떠드는 동생을 타박하는 것뿐이었다.
“얘는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니? 밥이나 먹어라. 고기만 집어 먹지 말고. 채소도 먹어야 쑥쑥 크지. 네 동생이 너보다 빨리 크겠다.”
“누나, 그러면 이제 영웅 비연은 좋아하지 않는 거야?”
가람의 어린 시절에 관해 떠들던 사촌 동생이 입을 삐죽이며 조용해지자 그 옆에 있던 동생이 물었다. 가람이 한숨을 푹 내쉬며 두 손을 들었다.
“고국 천지에 영웅 비연을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니. 그냥 어린 꿈은 꿈으로 두고, 내게 더 맞는 일에 집중하겠다는 거지.”
“그래도 이번에 홍악산맥으로 간다면서? 비연 님의 영웅비는 보고 올 수 있겠네.”
별생각 없이 툭 뱉은 말에 아이들의 시선이 가람의 여동생에게 쏠렸다. 가람 언니, 홍악산맥으로 가? 왜? 다시 봇물 터지듯 밀려오는 질문에 여동생이 가람의 눈치를 봤다. 혹시 비밀이었어? 부모님과 대화 나누는 걸 우연히 들었다는 여동생의 변명에 가람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머리를 흔들었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자, 가람이 그들을 조용히 시키곤 깔끔하게 질문에 대한 답을 매듭지었다.
“다 정리되면 말하려고 했어. 별세하신 스승님께서 부탁하신 일이 있어서 잠깐 방문하는 거야. 영웅비는… 아마 보고 올 수 있겠지.”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의 내용을 기억한 가람이 뒤늦게 얼버무렸다. 다행히 아이들의 관심사는 소세하가 부탁한 일보다는 갑작스러운 여행에 쏠려 있었다. 주희가 소명을 돌아보며 물었다.
“스승님의 부탁이었다면 언니들도 가람 언니와 다 같이 가는 거겠죠?”
“일정을 맞춰보려고 상의하고 있어요.”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 완전한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을 솜씨 있게 끌어낸 소명이 다른 제자들에게 눈웃음쳤다. 설아도 온유도 소명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설아는 그저 고개를 숙여 보였고, 예의 바른 미소를 유지하던 온유의 시선은 아이들 틈을 방황하다가 가람의 부모님에게 닿았다. 가람의 아버지가 진중한 표정으로 머리를 주억거렸다.
“소 선생은 좋은 분이셨지. 이 마을엔 잠깐만 머무르셨지만, 우리를 포함해서 그때 그분에게 도움받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가람에게도 훌륭한 스승이었고. 들어드릴 수 있는 부탁이라면, 마땅히 들어드리는 게 맞지.”
동의하진 않아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온유의 눈이 가람의 어머니에게 머물렀다. 찰나였지만 명백히 언짢은 기색이 부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며 온유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저녁 식사 전에 가람은 제자들에게 설아를 따라 홍악산맥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었으나, 부모님의 설득 과정에서 갈등이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었다. 온유는 옆에 앉은 가람을 힐끔 쳐다보았다. 가람은 다시 시끄럽게 떠드는 사촌 동생들을 관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직접 물어보기엔 시기도, 장소도 맞지 않았다.
하기야, 어차피 제가 갈 생각도 없는데 굳이 남 걱정까지 해줄 이유는 없다는 생각에 온유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숟가락에 올린 쌀밥과 나물을 입에 넣고 씹자 고소하고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으나, 끝맛이 미묘하게 써서 입맛은 끝까지 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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