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 찬미 - 2
讚美.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나 위대한 것 따위를 기리어 칭송함.
일찍 잠자리에 든 온유를 깨운 건 갈증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긴장하거나 마음이 편치 않을 때면 목이 타는 증상을 겪었기에, 온유는 익숙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을 집이 아닌 타인으로 가득한 낯선 장소에 머물렀으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가람네의 호의가 감사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온유는 혼자가 편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늘 그랬던 건 아니었다. 물 주전자와 잔이 비치된 부엌을 찾아 별채를 나와 어둑한 바깥을 걸어가며 온유는 모처럼 향수에 잠겼다. 단란한 가족, 오라버니들과 같이 살던 애틋한 시절의 기억이 깊이 묻어둔 잔재 속에서 비집고 올라왔다. 이제 그들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추억이 그려낸 흐릿한 형상을 되짚던 온유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쓸데없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일부러 소리 내 말한 것은 눈치 없이 남아있는 그리움을 쫓아내려는 의도였다. 제가 가족의 온기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그래서 가람의 집에 머무는데 시기심으로 인한 마음의 불편함 또한 있었음을 온유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잊으면 편할 텐데. 수백 번 생각하면서도 온유는 과거의 원한을 버리지 못했다. 땅을 적시던 아버지와 큰 오라버니의 검붉은 피, 군사들에게 끌려가던 어머니와 작은 오라버니의 비명, 평생 살아온 집을 삼킨 매캐한 연기는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눈만 감으면 선명하게 오감을 자극했다.
그 가시밭길을 되짚어가다 보면 기억은 늘 같은 사람에게로 돌아왔다. 독한 연기를 들이마시면서도 기침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마루 밑에 웅크려 숨어있던 어린 자신을 꺼내준 스승에게로. 그리고 끝내 아무런 말 없이 배신감만을 안겨준 채 떠나버린 이에게로.
가람에게서 스승님이 돌아가셨다는 전언을 듣고 무명마을로 돌아온 건 스승에 대한 예의 때문이기도 했지만, 온유는 그가 변명이든 해명이든 무언가 남겨두었기를 기대했었다. 그래야 근 이 년간 자신을 옭아매던 찝찝한 양가감정과 부채감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먼 길을 온 온유를 맞이한 건 뜻 모를 부탁이 담긴 유언뿐이었다. 갈증은 이제 숫제 바늘로 찌르듯 목구멍을 괴롭혀 와서 온유는 생각을 뒤로 하고 부엌으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방으로 돌아가려던 온유는 풀벌레 우는 소리에 사람 목소리가 섞여 들자 길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다. 첫 방문에, 그것도 어둠 속에서 별채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 게 얼마나 어려울지 간과한 탓이었다. 부엌으로 돌아가서 길을 다시 찾아볼지, 아니면 무례를 무릅쓰고 사람을 찾아 물어볼지 고민하던 온유는 이윽고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잘못 돌아다니다가 발각되면 도둑으로 몰릴 수도 있다는 우려가 든 까닭이었다.
다행히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안채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닥종이로 덧댄 창문 너머 세 사람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다. 대화가 끊길 기미가 보이지 않아 온유는 잠시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부러 대화가 잘 들리지 않게 문에서 한 발짝 떨어져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온유는 언성이 높아지자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네가 꼭 가야 하는 이유가 있느냐고.”
“스승님의 유언인데, 맏제자였던 제가 가는 게 당연한 도리 아니겠어요?”
“소 선생이 너희를 해산시킨 지가 언제인데, 장례를 치러드리는 것만으로도 도리는 했다고 생각한다.”
익숙한 가람의 목소리에 온유는 저도 모르게 불이 꺼진 창으로 바싹 붙었다. 엿들으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이상하게 발이 떼어지지 않아 그저 숨을 죽이고 어둠 속에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바깥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창 안쪽에서 들려오는 말다툼 같은 대화는 막힘없이 이어졌다.
“무려 한 달이나 걸리는 여정이야. 약방을 물려받겠다는 사람이 그렇게나 오래 자리를 비워서 되겠니? 하물며 홍악산맥이라니. 아직도 마물이 출몰한다는 그런 위험한 곳에 나는 너 못 보낸다.”
“어머니, 저도 이제 스물다섯이고, 아이가 아니에요. 제 결정은 스스로 내릴 수 있어요. 어머니가 걱정하시는 것 전부 생각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고요. 약방 일은 죄송하지만, 제가 없는 동안에도 동생들이 충분히 거들 수 있고, 돌아와선 온전히 일에 집중할 거예요. 재미로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라, 이 년간 못 끝낸 일을 매듭지으러 가는 거예요.”
“영웅 놀이는 이제 그만둘 나이가 되지 않았니.”
“어머니.”
가람은 소리 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조에 차가운 단단함이 서려 표정을 보지 못하는 온유도 가람이 대화를 일방적으로 끝내려고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랫동안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온유가 그냥 혼자 별채를 찾아볼지 고뇌하던 와중 남성의 중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타당한 이유로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것을 우리가 막을 길은 없지. 네 말대로 행동 하나하나에 제약을 둘 나이도 아니고. 다만 네 약속은 기억하거라. 앞으로 약방을 소홀히 하면 우리도 너를 후계 자리에서 내릴 수밖에 없다. 그게 네가 정말 바라는 것이라면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아니에요, 아버지. 명심하겠습니다.”
안채에서 누군가 일어서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환한 등잔 불빛이 바깥으로 쏟아져나오자, 온유가 그림자 속에 더 깊숙이 몸을 묻었다. 가람이 신을 신으며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남기고 안채에서 조금 멀어졌을 때 온유가 속삭이듯 그를 불러세웠다.
“가람 언니.”
작은 소리를 민감하게 잡아낸 가람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고동색 눈이 잠시 찡그려졌다가 다가오는 온유를 발견하고 둥그레졌다. 가람이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안채에 빠르게 눈길을 주고 온유의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왜 나와 있어?”
“물 마시러 부엌에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돌아가려다가 길을 잃었어요.”
물 주전자를 별채에 따로 둘 걸 그랬다며 가람이 중얼거리고 온유의 팔을 놓고 손짓했다. 손님 별채로 다시 데려다주겠다는 뜻이었다. 온유는 잠자코 반 발짝 뒤에서 가람의 거침없는 걸음을 따랐다. 가람은 성큼성큼 걷다가 안채의 불빛이 희미해지자 멈춰 섰다.
“혹시 들었어?”
무엇을 들었는지 묻느냐는 바보 같은 역질문을 하는 대신 온유는 긍정했다. 사과의 의미를 담아 온유 역시 발을 멈추고 머리를 살짝 숙였다.
“일부러 들으려는 건 아니었고,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서 길을 물으려고 기다리던 것뿐이었어요.”
“책망하려는 건 아니었고.”
가람이 뒤통수를 매만졌다. 잘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날개뼈를 스치게 풀어 내린 고동색 머리카락이 밤에 물들어 검게 보였다. 목덜미에 스치는 게 거추장스러웠는지 가람은 연신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신경 쓰게 하고 싶진 않았거든. 내 문제기도 하고, 대충 해결은 잘 됐으니까. 다른 애들한텐 굳이 얘기하지 말아줘.”
“그럴 생각 없어요. 남의 가족사에 끼어드는 건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요.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요?”
“홍악산맥으로 가는 거? 걱정하지 마. 오염지대로 악명 높던 옛날도 아니고, 마물 한두 마리쯤 나온다고 해도 내 앞가림은 할 수 있어.”
그것 말고요. 정식 검사로 벌어 먹고사는 이들만큼은 아니더라도, 가람의 출중한 검술 실력을 아는 온유가 고개를 저었다. 고양이 눈매의 검은 눈동자가 지나온 길을 힐끗 바라보았다. 안채는 이제 불이 꺼졌는지 주변이 온통 어두컴컴했다.
“스승님이 누구에게도 유언에 관한 내용은 발설하지 말라 하셨잖아요.”
“아, 그거.”
가람이 짧게 감탄사를 흘리고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홍악산맥으로 간다는 이야기는 했지만, 영옥에 관한 말은 안 꺼냈어. 그 부근에 사는 스승님의 지인에게 직접 부고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식으로 둘러댔거든. 정화 작업이 한창이던 시기에 다녀간 주술사가 한둘이 아니니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온유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타인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변함없었으나, 아까 과거의 향수에 잠겼던 탓인지 나지막한 경고가 절로 입술 틈으로 흘러나왔다.
“언니보다 언니네 가족에게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내 가족에게?”
가람은 의아해 보였다. 온유가 눈을 감았다. 귓가에 들려오는 폭력적인 환청이 잠시 거세졌다. 자신도 따라 비명 지르고 싶은 욕구를 애써 참아내고 온유는 차분하게 설명하려 애썼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뜻은, 알려진다면 위험해진다는 뜻일 테니까요. 아무리 스승님이 무명의 주술사라 하셨더라도, 주술사의 영옥을 탐내는 이들은 많아요. 유언을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설아의 말에 비추어 보았을 때 비밀을 지킬 걸 강조하셨다는 건 누군가 영옥을 탐내리라는 걸 확신하셨다는 거겠죠. 그걸 원치 않아서 저희에게 파괴해달라고 부탁하신 걸 테고요.”
“누가?”
“그건 저도 모르죠. 하지만 높은 사람이 얽히게 되면 집안 하나 풍비박산 내는 건 일도 아니에요. 양반 집안도 그러한데, 평민 집안은 더 쉽겠죠.”
평소의 냉정한 어조를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울컥하는 감정이 온유의 목소리에 깃든 걸 모를 만큼 가람은 무르지 않았다. 온유가 십 년 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멸문당한 자씨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은 오래전 눈치챘었지만, 그가 과거에 관해 간접적으로나마 입 밖으로 꺼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갈증이 또 찾아온 듯 목을 매만지는 온유를 바라보다가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언 고마워. 기억해 둘게.”
“가지 않겠다는 말은 안 하시네요.”
온유가 허탈한 듯 헛기침하자, 가람이 가던 길의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이왕 나온 김에 물 주전자를 가지고 별채로 돌아가자며 가람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조용히 뒤를 따라오는 온유에게 가람이 변명하듯 말했다.
“어머니는 내가 아직도 영웅 비연을 동경해서 옛 오염지대였던 곳을 가보고 싶어 하는 거라 생각하시는 것 같지만, 난 정말 스승님의 유언을 들어드리고 싶어서 가기로 한 거거든. 오랜 시간 스승님 아래에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아무것도 돌려드리지 못하고 해산했으니까.”
“그건 스승님의 결정이었으니 언니가 부채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꼭 단칼에 자를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부엌에 들어서서 주전자에 남은 물의 양을 가늠하고 집어 든 가람의 말에 온유는 동의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어떤 위험을 동반할지도 모르는데, 그걸 감수할 만큼 스승님에게 빚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소명이를 제외한 우리 다 그렇지 않니?”
온유가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이제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가지런히 정리된 부엌 살림살이를 희미하게 집어낼 수 있었다. 일부러 그것들을 관찰하는 척 눈을 마주치지 않고 나온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저나 설아에게는 목숨의 은인이니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나도 스승님에게 목숨을 빚진 적이 있거든.”
“네?”
처음 듣는 이야기에 온유가 고개를 돌렸다. 주전자를 도로 내려놓은 가람이 웃으면서 아궁이 옆 튀어나온 부분에 앉았다. 밤이 늦었음에도 이야기하다 보니 졸음이 달아났는지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딱히 비밀은 아닌데. 내가 제일 먼저 제자로 들어왔으니, 너희들은 내가 스승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잘 모를 수도 있겠구나. 궁금하면 들어볼래? 피곤하다면 바로 돌아가도 괜찮고.”
온유는 잠시 망설였다. 피곤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고 내일 길을 떠날 걸 생각하면 잠자리에 다시 드는 게 맞았으나, 제자로 함께 생활하던 시절 가람에게 도움받은 적이 많았기에 얘기를 들어주는 게 도리인 것 같았다.
온유가 옆에 앉자, 긴 이야기는 아니니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며 가람이 서두를 뗐다. 불 꺼진 부엌에서 십일 년이 지난 과거의 추억이 점차 형태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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