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 찬미 - 3
讚美.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나 위대한 것 따위를 기리어 칭송함.
가람이 산에서 곰을 만난 건 열두 살 아이였을 때였다.
삼은고개를 이루는 산은 너무 깊숙이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맹수를 마주칠 일이 없었으나, 멧돼지나 곰이 산 아래턱까지 출몰하는 경우는 드물게 있었다. 보통 약초꾼들이 그 흔적을 먼저 발견해 마을 전체에 경고령을 내렸고, 사냥꾼들이 지대 전체를 수색하고 안전하다는 판단을 내릴 때까지 마을 주민들은 산 출입을 삼갔다.
그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귀한 약초를 채집하려고 산을 오르려던 약초꾼이 곰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대로 뒤돌아서 내려와 마을에 알렸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단속하고 사냥꾼을 찾았다. 다만 조금 떨어진 마을에서도 맹수가 출현해서 공교롭게도 손비는 사냥꾼이 남아 있지 않았다. 사냥꾼들이 언제 돌아오는지, 사냥꾼은 아니더라도 마을에 머무르고 있는 주술사 선생에게 도움을 구해야 할지 마을 어른들이 고민하는 새 닷새가 훌쩍 흘렀다. 산으로 생계를 잇는 이들이 초조해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약초꾼들은 몰래 산 초입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주민들은 규율을 어기는 이들을 향해 혀를 차면서도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못했다. 산에 들어가지 않으면 배를 곯게 되는데 어쩌겠는가. 어차피 발자국 이후로 다른 흔적은 찾지 못해 이제는 안전하지 않겠냐는 소리가 슬슬 나올 무렵이었다.
산에 출입하지 못해 약초 수급에 곤란을 겪는 건 도가약방도 마찬가지였다. 도가약방의 주 약초꾼으로 일하는 가람의 아버지는 마을 규율은 지켜야 한다며 못 박았고, 일정이 차일피일 미뤄지자 이번에 처음으로 아버지와 약초 채집을 나가기로 한 가람은 애가 탔다.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많이 공부하고 배웠는지 보여줄 기회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던 와중 임신한 작은어머니의 건강이 안 좋아지자, 집안 분위기도 살얼음판 같아졌다. 차마 언제쯤 산에 갈 수 있느냐고 묻지는 못하고 주변을 기웃거리던 가람이 어른들의 대화를 엿들은 게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당귀라는 약초가 임산부에게 도움이 된다고 했다. 지금이 채집하기에 적당한 시기라고도 했다. 마침 어머니를 따라 그저께 장을 나갔을 때 사람들이 전부 곰이 이미 깊은 산속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얘기하고 있지 않았는가? 물론 아버지에게 설득은 통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작은어머니가 아픈데 마냥 발만 구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약방의 장녀 가람은 약초 주머니와 곡괭이, 그리고 단검을 들고 산으로 몰래 들어갔다. 깊은 산속까지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가람 역시 산의 위험에 대해선 잘 알고 있다 자부했고, 약초만 발견하면 바로 캐서 마을로 내려갈 예정이었다. 운 좋게 멀리 들어가기 전에 약초가 눈에 띄었고, 가람은 들뜬 마음으로 자리에 주저앉아 곡괭이로 주변의 흙을 살살 긁었다. 최대한 약초가 상하지 않게 파내야 했다.
곡괭이질에 너무 집중했던 탓인지 가람은 멀리서 덤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열심히 파낸 당귀를 약초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 고작 열댓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 목에 반달 무늬의 하얀 털이 난 검은 곰이 서 있었다.
놀라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게 첫 번째로 가람의 목숨을 살렸다. 산에서 곰을 마주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배운 적 있으나, 머릿속이 하얘진 가람은 그것까지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다행히 곰은 바닥에 쭈그려 앉은 가람을 아직 보지 못한듯했다.
가람이 단검을 꺼내 손에 쥐었다. 썩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차가운 손잡이의 감촉 덕분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가람이 곰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조심스럽게 뒤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덤불 속이든 나무 뒤든, 숨어서 곰이 지나가길 기다릴 생각이었다. 곰이 시야에서 사라지기만 하면 마을로 뛰어 내려가서 혼날 걸 감수하고 어른들에게 알려야 했다.
또각. 무릎 밑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감촉보다 소리를 먼저 자각했다. 가람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곰의 머리가 천천히 돌아갔다. 새까만 구슬 같은 눈과 아이의 공포로 확장된 눈이 마주쳤다.
가람이 알 수 없는 울음소리를 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소리에 자극받았는지 곰도 커다란 울음과 함께 가람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가람이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 숙여.”
뒤통수가 후끈해졌다. 눈을 뜨자 눈앞에 불길이 춤추고 있었다. 가람은 조금 늦게 불꽃이 뜨겁기는 했으나, 주변 풀숲을 태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주술로 불러낸 위협용 불꽃이었다.
“겁도 없구나. 머리 숙이라고 했을 텐데.”
목소리가 낯선 남성의 것이라는 걸 알아챌 정도로 정신이 돌아온 가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키 큰 남자가 서 있었다. 한 손에는 날카로운 검을 들었고, 다른 손끝에는 가람과 곰 사이를 막고 있는 불꽃의 잔재가 서려 있었다. 가람의 눈이 검에서 불꽃을 휘감은 손으로, 남자의 긴 머리카락으로, 미간을 살짝 찌푸린 수려한 얼굴로, 그리고 저를 응시하는 보라색 섞인 고동색 눈동자로 옮겨 갔다.
보라색 눈동자. 주술사. 가람이 입을 헤 벌린 순간 불꽃을 휘젓던 곰이 요란하게 울부짖었다. 가람이 움츠러들자, 남자가 검을 고쳐 잡고 가람의 앞을 막아섰다. 무서우면 눈 감아. 남자는 한 마디를 남기고 검을 휘둘렀다. 검의 궤적이 정확하게 곰이 휘두르던 앞발과 만났다. 곰의 고함이 산을 가득 메우자 가람이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러나 눈은 감지 않았다. 되려 가람은 눈을 크게 뜨고 남자가 불꽃을 키워서 곰을 산 깊숙이 쫓아버리는 모습을 전부 눈에 담았다. 곰이 사라진 후에도 한참 그 방향을 경계하며 바라보던 남자가 이윽고 가람을 돌아보았다.
“말 하나는 참 안 듣는 아이구나. 이걸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고집 있다고 해야 할지.”
그게 소세하라는 이름의 주술사와의 첫 만남이었다.
남자는 곧바로 가람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왔다. 가람은 약방 앞에서 발을 구르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부모님을 보고서 제가 사라진 걸 눈치챈 어른들이 마을에 머무르던 주술사에게 자신을 찾아달라고 의뢰한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연신 남자에게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고, 아버지는 가람을 끌고 가서 눈물이 쏙 빠지게 혼냈다.
가람이 남자와 이야기할 기회를 얻은 건 이틀 후였다. 멋대로 산에 혼자 들어간 벌로 집에서 이레간 나오지 말라는 벌을 받았지만,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감사 인사는 해야 한다는 이유로 딱 한 번 보호자를 대동한 외출을 허가받았다.
남자, 소세하는 제게 허리를 꾸벅 숙이고 인사하는 가람을 보고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가람의 아버지가 그에게 추가로 사례하고 싶다고 꺼낸 얘기도 거절당했지만, 은인을 이대로 보내지 못한다며 막무가내로 가져온 약초를 방바닥에 늘어놓았다.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 둘이 벌인 설전은 아버지의 승리로 돌아갔다. 의기양양해진 그는 미처 가져오지 못한 귀한 약초가 조금 있으니 잠시 집에 갔다 오겠다며 가람을 향해 손짓했다. 가람은 머뭇거리며 소세하를 바라보았다.
“주술사님과 좀 더 얘기하고 싶은데…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면 안 될까요? 다른 데로 가지 않을게요.”
“도가람, 소 선생님 귀찮게 하지 말고.”
아버지가 가볍게 손을 잡아당겼지만, 가람은 쉽게 포기하지 않고 발에 힘을 주었다. 실랑이가 오가는 걸 지켜보던 소세하가 툭 말을 뱉었다.
“그럴 사이에 그냥 다녀오는 게 빠를 것처럼 보이는데. 아이는 두고 가도 괜찮소. 설마하니 똑같은 사고를 두 번 치지는 않겠지.”
이번의 승자는 가람이었다. 가람의 아버지는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세 번이나 신신당부한 후에야 빠르게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가람이 눈을 반짝이며 소세하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런 가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머무는 집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람이 그를 뒤따르며 호기심 가득한 질문을 쏟아냈다.
“주술사님, 그때 저를 구해주셨을 때 쓴 주술은 불의 술이지요? 어떻게 산을 태우지 않는 불을 불러내셨어요?”
“실제 불이 아니라 불의 환영이었으니까.”
“아! 그래서 열기는 느껴졌지만, 실제로 무언갈 태우지는 않았던 거군요? 산불이라도 나면 큰일이었을 테니까요.”
“그전에 너부터 화상을 입었겠지. 애를 찾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내가 널 태워버리면 그만큼 우스운 일도 없을 테니까.”
무뚝뚝한 대답에 가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침묵을 지켜도 가람을 떨쳐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는지, 소세하는 귀찮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단답형으로나마 답해주었다. 한참 주술에 관해 꼬치꼬치 캐묻던 가람이 소세하가 바닥에 끌러놓은 검을 가리켰다.
“주술사님은 검도 잘 쓰시던데, 주술과 같이 배운 거예요?”
“어렸을 적 기본기는 익혔지. 나머지는 실전으로 터득했고.”
“멋있다. 마치 마검사 비연 님 같아요.”
소세하가 티 나게 움찔했고 가람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소세하는 입술을 가늘게 물었다가 주제를 돌렸다. 네 아버지가 곧 돌아올 것 같다. 가람은 더 캐묻는 대신 바르게 허리를 세워 고쳐 앉았다. 그러나 아이의 두 눈은 검과 그 주인인 주술사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조심스러운 질문이 소리를 찾았다.
“주술사님은 언제까지 이곳에 계실 건가요?”
“글쎄. 받은 의뢰를 다 마칠 때까진 있겠지.”
“그 후엔 어디로 가세요?”
소세하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유쾌함 없는 답은 짧았다.
“네가 알아 무엇 하려고? 다음 의뢰를 찾아 떠나겠지.”
“집이 없으신 건가요?”
질문을 뱉고 나서야 가람은 무례했다는 걸 깨닫고 눈치를 보았다. 소세하는 화가 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되려 비웃음이 조금이나마 희미해졌다.
“내 소유의 머무를 곳을 마련하긴 했지만, 자주 돌아가진 않으니 집이라 부르기에 애매하긴 하지.”
“어디인데요?”
“이름 없는 작은 마을. 알면 찾아와서 주술을 보여달라 조르기라도 하려고?”
가람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발소리가 들리고 가람의 아버지가 양팔 가득 천으로 싸맨 약초를 든 채 모습을 드러냈다. 소세하가 미간을 모았다.
“떠나기 전에 ‘조금’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가 아버지와 다시 언쟁을 시작했다. 가람은 끼어들지 않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흐르던 시선이 주술사의 검에 닿자, 아이의 눈에 어떤 결심이 차올랐다.
“저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헛소리하지 말고 집에 가라.”
집에서 나오지 못한 나머지 닷새간, 가람은 열과 성을 다해 부모를 설득했다. 주술사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하자, 가람의 부모는 한때의 충동으로 치부하고 웃어넘겼다. 그러나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고, 사흘째에도 가람이 간곡하게 간청하자 그들은 가람을 앉혀놓고 진지하게 타일렀다.
“주술사의 제자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물며 너는 보라색 눈동자를 타고나지도 않았잖니. 이제 본격적으로 약초를 채집하고 다루는 법과 약방 운영을 배워야 하는데, 한눈팔며 놀 여유는 없다.”
“보라색 눈이 아닌 일반인도 치유의 술은 약간이나마 배워서 쓸 수 있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약방 운영에도 도움이 될 수 있고요. 검술도 배우면 산에 올라갈 때 제 한 몸 지킬 수도 있을 테고요.”
핑계 대지 말라고도 혼내고, 정 관심 있으면 약방 일을 제대로 익힌 후에 따로 선생님을 구해서 배워도 되지 않느냐고 회유도 했다. 그럼에도 가람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여태 큰 반항 없이 자라온 아이가 부리는 억지에 생각이 많아졌는지, 부모는 벌이 끝나는 날 가람과 다시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결국 그들은 우선 소세하의 허락을 구해오라고 하며 한발 물러섰다.
그날부터 가람은 하루 종일 소세하를 따라다녔다. 소세하 역시 처음엔 가람의 부모처럼 별생각 없이 아이의 치기로 여기고 적당히 무시했으나, 가람이 진지하다는 걸 깨달은 후로는 매몰차게 아이를 내쳤다. 하지만 가람의 고집은 단단하여 다짐이 깨지기는커녕 실낱 금도 가지 않았다.
가람은 매일 찾아와 저를 제자로 받아달라고 요청했고, 소세하는 늘 가람에게 돌아가라 일렀다. 가람이 소세하가 삼은고개에서 받은 의뢰를 모두 마쳤다는 소식을 들은 날도 똑같았다. 의뢰금과 짐을 정리하는 와중에도 열심히 뒤를 쫓는 가람을 곁눈질하던 소세하가 크게 한숨을 내쉬고 팔짱을 꼈다.
“약방의 아이가 내 밑에서 대체 뭘 배우고 싶은 건데?”
“주술과 검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주술사가 될 것도 아닌데 배워서 무엇 하게?”
부모에게 댔던 핑계를 댈 수도 있었지만, 보라색이 감도는 눈빛 아래 가람은 저도 모르게 어리고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영웅 비연을 동경하고 있습니다. 저는 영웅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그가 걸었던 길을 조금이라도 따라서 걸어보고 싶어요.”
소세하가 얼굴을 확 찌푸렸다. 날카로운 눈초리가 가람에게서 떨어졌다. 타이르는 말은 메마르고 고요했다.
“쓸데없는 소리. 다른 사람은 다 괜찮지만, 그처럼은 되지 말아라.”
가람이 소세하를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시선은 아이의 눈을 마주 보지 않았다.
“주술사님은 영웅 비연을 싫어하세요?”
소세하는 끝내 가람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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