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 찬미 - 4
讚美.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나 위대한 것 따위를 기리어 칭송함.
“끝까지 거절당했는데도 용케 제자로 들어갔네요.”
가람의 회상을 듣던 온유가 중얼거렸다. 가람이 피식 웃고 주먹 쥔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동생 많은 장녀로 살아남으려면 무엇에도 밀리지 않는 기개가 필요한 법이거든. 스승님도 결국 두 손 들고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오라고 하셨고,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지.”
“아마 오래가지 않아 싫증 나서 스스로 돌아가리라는 기대를 했던 것 아닐까요.”
“스승님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네.”
가람은 자그마치 11년을 소세하 아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당연히 약방 일을 완전히 등한시할 수는 없었기에 삼은고개의 본가와 소세하의 거처를 오가며 바쁘게 지내야 했지만, 배우고 싶은 걸 배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행복했다. 다만 부모와 스승이 경고한 것처럼 가람은 주술에 재능이 없어서 원리와 소소한 하급 주술 몇 가지를 익히는 게 최선이었지만, 그마저도 즐거운 과정이었다.
검술을 배울 때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주술과 달리 가람의 검술 실력은 배울수록 쭉쭉 늘었고, 소세하는 몇 해가 지나고 넌지시 다른 검술 스승을 찾아볼 걸 권유했다. 하지만 더 가르칠 게 없다는 말에도 가람은 소세하의 제자로 남기로 했었다. 소세하는 괜한 시간 낭비라는 조언을 해주면서도 가람을 억지로 내보내지는 않았다.
“그래서 해산 당시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우리를 그렇게 단칼에 내칠 수 있는 분이었다면, 나를 한참 전에 강제로라도 약방에 돌려보내셨을 텐데.”
“원체 필요한 것 외에는 말이 없는 분이었으니까요.”
때로 필요한 말도 생략해서 문제가 되었다는 말은 구태여 꺼내지 않았다. 싸늘해진 온유의 표정을 눈치챈 가람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이제 들어가자. 네게 재미있는 이야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들어줘서 고마워. 여전히 영웅 놀이를 꿈꾸고 있느냐는 잔소리 때문에 가족에게 이런 이야기는 못 했거든.”
사실 온유도 묻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정말 영웅 비연이 살았던 마지막 장소에 가보고 싶다는 욕심이 결정에 영향을 끼친 게 아닌가요? 그러나 가람은 이미 여정에 합류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 같았으니, 자신이 뭐라고 해봤자 달라질 건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온유는 입을 다물었다. 물 주전자를 다시 손에 든 가람을 따라가며 온유가 작게 숨을 뱉었다.
“그래도 제 조언은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스승님이 과거의 은인일지언정, 지금 언니가 책임져야 하는 이들은 따로 있으니까요.”
“그래.”
대답은 진중하다기보단 가벼웠지만, 온유는 그 이상 설득을 시도하지 않았다.
“저도 홍악산맥으로 같이 갈게요. 괜찮죠, 설아 언니, 가람 언니?”
새벽같이 일어나서 다른 제자들이 깨어나길 기다린 소명의 첫 마디에 다들 말을 잃고 눈만 깜빡였다. 갑자기? 하룻밤 사이에 뒤집힌 태도에 가람이 얼이 빠진 듯 보이자, 소명이 보조개가 파이도록 히죽 웃었다. 설렁설렁 흔드는 한 손에 작은 종이 두루마리가 쥐어져 있었다.
“어제 서항으로 서신을 보냈었거든요. 곧 돌아갈 예정이고 며칠 걸릴 거라고. 그런데 언니가 급보로 보낸 답장을 오늘 새벽에 받아봤어요. 이연상단이 새 거래처 때문에 홍악산맥으로 사람을 보낸다지 뭐예요.”
“이연상단? 너희 태천상단이 아니라?”
가람이 어리둥절하게 묻자, 소명이 설명이 불친절했다는 걸 깨닫고 손뼉을 쳤다. 그이가 속한 상단이에요, 이런 장거리 거래는 그이가 자주 맡아서 하거든요. 소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람보다 빨리 깨달은 온유가 헛웃음을 뱉었다.
“네가 좋아한다는 그 사람과 경로가 겹치니까, 스승님의 유언을 핑계로 그와 같이 있고 싶다는 이야기 아니야?”
“이것저것 생략되긴 했지만, 요지는 틀리지 않네요.”
가람은 아직 소명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있는 듯 빤히 막내 제자를 응시하기만 했고, 설아는 이유가 어찌 되었든 소명이 합류한다니 얼굴이 밝아졌다. 온유가 불만스레 팔짱을 꼈다. 새카만 눈에는 어제 가람에게 내보였던 근심 어린 못마땅함이 서려 있었다.
“네가 생각하는 만큼 쉬운 여행이 아닐 거야. 다시 고려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머, 저도 놀려고 가는 여행은 아니에요. 하지만 저에게 이보다 최고의 선택은 없는걸요. 그이의 얼굴도 볼 겸, 스승님의 유언도 이행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잖아요.”
“내 말은….”
어젯밤 가람과 한 대화를 되풀이하려다가 온유가 제 미간을 짚었다. 얼떨떨하게 소명을 바라보던 가람이 한숨을 쉬고 중재에 나섰다.
“시간은 있으니 조금 더 얘기해 보자. 일단 나와 설아는 온유와 금곡마을까지는 갈 거고. 소명이 너는 그러면 여기서 서항으로 바로 가는 대신 우리와 같이 갈 생각이니?”
“제가 폐가 되지 않는다면요.”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소명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앳된 얼굴은 그저 싱글벙글했다. 어쨌거나 가람과 설아는 소명의 합류를 거절할 까닭이 없었고, 온유만 불만 서린 표정으로 가람과 소명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가람이 온유를 바라보다가 꾸린 짐에 눈길을 주었다.
“그럼 혹시 모르니 식량과 약초를 더 챙겨달라고 해야겠네. 가서 이야기하고 올게. 설아야, 같이 가자.”
둘의 의견 충돌은 알아서 해결하라는 뜻으로 가람은 일부러 설아까지 챙겨서 집안으로 사라졌다. 온유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고개를 돌려 소명을 응시했다. 저보다 반 뼘은 큰 언니를 올려다보며 소명이 눈을 접어 웃었다.
“온유 언니 눈에는 제가 진지해 보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요. 그렇지만 저도 아무 생각 없이 여정에 합류하는 건 아니에요.”
“…생각이 짧다고 뭐라 하려는 게 아니야. 네가 고려하지 못한 위험이 동반될 수도 있어서 그래.”
“저도 알아요.”
소명의 입술은 여전히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눈가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순하게 쳐진 갈색 눈동자에 어울리지 않는 냉철함이 깃들어 있었다.
“주술사와 관련된 일은 늘 어느 정도 위험을 동반하죠. 고작 주술의 흔적이 남겨진 예술품을 다루는 것도 그러할진대, 부적 외엔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해도 주술사의 영옥은 누구에게나 탐나는 물건이에요. 무명 주술사였던 스승님도 거기에서 예외가 될 순 없죠.”
가람보다 나이는 다섯 살 어린 소명이 오히려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어서 온유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소명이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은 고마워요, 경고는 새겨둘게요. 결국 결론은 어젯밤과 다를 게 없어 온유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소명이 뒤를 힐끗 바라보고 바짝 온유에게 다가섰다. 한층 소리를 낮춘 목소리는 진지했다.
“언니. 제가 전에 설아 언니가 우리에게 거짓말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 거 생각나요?”
그리 오래된 대화는 아니었기에 온유는 쉽게 긍정했다. 소명이 다시 주변에 둘밖에 없다는 걸 확인하고 온유에게 속삭였다.
“그 말은 철회할게요. 정확히 말하자면, 거짓말은 아니어도 설아 언니가 모든 걸 말해주었다곤 생각하지 않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상인의 감?”
온유가 얼굴을 찌푸리자, 소명이 반은 농담이라며 키득 웃고 검지로 제 눈을 가리켰다.
“무명마을을 떠나기 전에 가람 언니가 설아 언니를 데려왔잖아요. 그 후부터 이상하게 저희 눈을 마주 보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설아 언니는 거짓말하는데 요령이 없잖아요. 그래서 뭔가 말하지 않은 게 있고, 아직 할 생각이 없구나 싶었어요.”
“그러면 왜 따져 묻지 않았어?”
“굳이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온유의 경고까지 듣고 나니 둘이 완전히 연관 없는 이야기는 아닐 거라는 감이 들었다며 소명이 머리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온유가 눈을 돌려 가람과 설아가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노려보았다. 소명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가 다시 온유를 올려다보았다.
“언니가 따져 물으시게요?”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지.”
“그렇지만 언니는 홍악산맥으로 안 가실 거잖아요.”
온유의 말문이 막혔다. 입가에 미소를 달고 소명이 냉정하게 조언했다.
“따져도 저나 가람 언니가 따질 일이지, 온유 언니가 끼어드는 건 원치 않은 참견이에요. 제게 경고해 주신 것까지는 호의로 받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월권이죠. 저희는 다 성인이고 언니는 동문 제자이지, 스승이나 부모는 아니니까요.”
온유의 입이 가늘게 다물렸다. 들숨과 날숨을 두어 번 내쉰 후 나온 목소리는 소명의 것과 비슷하게 차분하고 냉담했다.
“네 말이 맞지. 더는 신경 쓰지 않을게.”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악의가 있어서 언니의 도움을 거절한 건 아니니,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온유는 침묵으로 답했고, 소명도 애써 만든 평화를 깨려고 하지 않았다. 다행히 머지않아 가람과 설아가 품에 이것저것 안고 모습을 드러냈다. 가람이 바닥에 정리된 짐을 풀어 가져온 말린 식량을 넣으며 온유와 소명을 번갈아 보았다. 둘이 얘기는 잘 나누었냐는 소리 없는 질문에 소명은 대답하는 대신 활짝 웃었다.
“금곡마을까지 닷새는 더 같이 있겠네요. 옛날 생각도 나고, 나쁘지 않은 여행이 될 것 같아요.”
“그래. 겸사겸사 네 낭군님도 볼 수 있을 테고.”
온유가 반박하지 않자, 가람은 소명이 어련히 다툼을 잘 풀어내었겠거니 생각하고 한시름 놓았다. 넷은 충분히 태울 수 있는 마차를 부른 게 다행이라며 중얼거리다가 가람이 문득 소명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쪽하고는 언제 합류할 계획이야? 서신은 보내놓았니?”
“아니요?”
그럼 어떻게 만날 생각이냐며 황당해하는 가람을 향해 소명이 발그레 웃으며 두 손으로 제 뺨을 감쌌다. 걱정하지 마세요, 사랑은 운명이니까요! 어처구니없다는 세 사람의 눈초리가 한꺼번에 쏟아졌지만, 당당하게 생글거리는 막내 제자는 그에 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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