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덤에 수국을 꺾어 헌정하라

고사二. 여정

旅程. 여행의 과정이나 일정.

세상 잘났던 주술사 자양화가 인생에서 가장 후회한 일은 그날 비연이 오염지대로 떠나겠다는 걸 말리지 못한 거였다.

“도대체 그 저주받은 땅에 왜 자진해서 가겠다는 건데?”

“몰라서 물으시는 거 아니잖아요.”

자양화는 제 앞에 반듯하게 무릎 꿇고 앉은 비연을 노려보았고, 비연은 웃는 낯을 유지한 채 사나운 보라색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자양화를 처음 찾아왔을 때 삐쩍 말랐던 모습은 어디 가고, 이제 적당히 살이 올라 생기 넘치는 얼굴은 결의로 가득했다. 언짢은 표정으로 미약하게 보라색이 감도는 비연의 고동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자양화가 머리를 흔들었다.

“헛소리하지 마라. 주술도 덜 배운 애가 토벌대에 지원해서 어쩌겠다는 건데?”

“어제까지만 해도 슬슬 데리고 다니기 귀찮으니 홀로서기 할 준비나 하라고 그러셨잖아요.”

“네 머릿속이 그렇게 덜 자란 줄 알았으면 그런 얘기 꺼내지도 않았다.”

한동안 말 없는 팽팽한 대치가 이어졌다. 끝내 한숨과 함께 먼저 화해 신청을 내민 건 비연이었다.

“제가 처음부터 주술을 익힌 목표가 토벌대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는 거 아시잖아요. 스승님, 저 그동안 열심히 배우고 실력을 갈고닦았어요.”

“그래, 쥐꼬리만 한 재능으로 참 열심히도 했지. 그 재능으로 그곳에 발 들이면 사흘도 못 가 죽는다.”

자양화가 손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맹랑하게 저를 찾아와 최고의 주술사 아래에서 가르침을 받고 싶다며 끈질기게 눌어붙은 과거 열여섯 살 소녀의 잔상이 마주 앉은 제자의 모습 위로 겹쳐 보였다. 얼마 전 갓 성인이 되었다고는 하나, 저보다 열한 살이나 어린 제자는 아직 자양화의 눈에 아이나 다름없었다.

받고 싶어서 받은 제자도 아니었고 빨리 독립하라며 노래를 부르지만, 멋모르고 지옥도로 걸어 들어가겠다는 걸 그냥 두고 볼 순 없었다. 하루가 멀다고 오염지대에서 평범한 주민과 주술사 가리지 않고 사람이 죽어 나간다는 소식이 여기까지 들려왔다. 높은 보상금에 혹해 넘쳐나던 토벌대 지원자도 이제는 옛말이었다. 그곳에서 죽는다면 곱게 죽지도 못할 거라고 치를 떨며 주술사들은 강제로 징집당하기라도 할까 봐 다들 숨죽이고 살았다.

말 안 듣는 어린아이도 오염지대라면 겁을 먹는 시대에 비연이 이를 모르진 않을 터. 그러나 비연은 두려움 한 점 없이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재능이 모든 걸 결정짓지 않는다고 말씀해 주신 것도 스승님이셨어요.”

저 이래 봬도 홍악마을 출신이에요, 그곳이 어떤 데인지는 제가 잘 알아요. 오염지대의 본래 명칭까지 들먹이면서 우기는 비연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자양화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그러면 이 년만 더 수련하고 지원해! 그 정도면 죽지 않을 정도로 어떻게든 실력이 키워지겠지.”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으면 스승님을 찾아오지 않고 스물한 살이 되자마자 길라잡이 시험을 봐서 오염지대에 들어갈 자격을 땄을 거예요.”

영원히 평행선을 그리는 대화에 결국 자양화가 벌컥 화를 냈다. 가서 죽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해! 비연이 슬그머니 웃고 손을 바닥에 대고 머리를 숙여 자양화에게 큰절을 올렸다. 하나로 올려묶은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부스스 흩어졌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겠습니다. 부족한 저를 받아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건강하세요.”

자양화는 고개를 돌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새벽 동이 트고 사 년간 살았던 방을 정리하고 나올 때까지 자양화는 비연 앞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스승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기에 큰 기대를 걸었던 건 아니었으나, 비연은 내심 서운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 번 세 번 꼼꼼히 짐을 확인하고 느릿느릿 집을 나설 때까지도 집안은 고요했다. 비연은 인사를 한 번 더 할지 고민하다가 문 앞에서 말없이 허리만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신을 고쳐 신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비연은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서 떠나는 마차를 구하지 못해 다음 마을까지 발로 이동해야 했다. 옆 마을에서 오후에 출발하는 마차를 타려면 뒤돌아볼 여유도 없이 부지런히 걸어도 부족했다. 막 일과를 시작한 마을 주민들이 어린 주술사를 알아보고 건네는 인사를 가볍게 받으며 마을 초입에 도착한 비연이 우뚝 멈춰 섰다.

그곳에 긴 머리를 목덜미에서 하나로 묶어 내린 수려한 인상의 남자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불만 섞인 날카로운 보라색 눈동자가 비연에게 닿았다.

“아침 일찍 떠나겠다더니, 빨리도 움직인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줄 알았다.”

“스승님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비연의 얼굴에 상기된 미소가 걸렸다. 그래도 그간의 정을 보아 마지막 인사는 허락하려는가 싶어 종종걸음으로 다가선 비연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자양화 뒤로 작은 마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는 걸 본 까닭이었다.

“어디 나가시나요?”

그제야 자양화가 외출복을 차려입었다는 걸 눈치챈 비연이 슬쩍 물었다. 자양화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동행 하나 생기는 데 불만은 없겠지? 거절은 받지 않겠다는 어투였다. 말뜻을 깨달은 비연이 눈을 크게 떴다.

“스승님도 같이 가시게요?”

“왜, 내가 방해될 것 같으냐?”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비연은 망설임 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고국 최고의 주술사를 꼽을 때 반드시 빠지지 않는 이름이 자양화였다. 아군이라면 그 누구보다 든든했고, 토벌대에서도 쌍수 들고 환영할 게 눈에 선했다. 그러나 오염지대에 일말의 관심도 안 보이던 그가 하루아침에 홍악산맥으로 가겠다고 하니 비연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저 걱정돼서 그러시는 거예요?”

“네가 갔다가 하루 만에 콱 죽어버리면 자양화의 제자도 별 볼 것 없다고 소문나서 내 의뢰 끊길까 봐 그런다.”

매섭게 쏘아붙이는 말에 비연은 결국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마차에 올라타려던 자양화가 뒤를 돌아보았다. 앳되지만 번듯한 주술사로 자라난 제자의 모습이 보라색 눈동자 속에 선명하게 비쳤다.

“오염지대까지 걸어서 갈 생각은 아니겠지. 안 오면 두고 갈 테니 알아서 와라.”

“하나뿐인 제자인데 좀 챙겨가 주시죠, 스승님.”

비연이 씩 웃으며 자양화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낡은 수레바퀴가 거친 길 위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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