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장. 연고 - 1
緣故. 일의 까닭.
태천상단의 장녀가 손아래 여동생에게 급보로 보냈던 서신의 내용은 강렬하리만치 느긋했다.
소명 보아라. 소항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은 잘 받아보았다. 삼은고개를 떠나기 전에 네가 이 편지를 받을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다만, 언니 된 도리로 알려야 할 용건이 있어서 붓을 든다.
이연상단이 새 거래를 트려고 홍악마을에 사람을 보낸다고 한다. 사절단원의 신원은 알아내지 못했지만, 추측 상으론 네 도령님인 것 같더라. 내일 출발해서 남대교를 건너 이동한다고 들었으니, 운이 좋으면 소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칠 수도 있겠지.
감사의 말은 필요 없다. 집 오는 길 조심하고, 이 언니를 위한 작은 선물이나 사 오너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서신을 손안에 구겨버린 소명은 이른 새벽 때아닌 탄성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눌러내야 했다. 언니, 고마워요! 내가 꼭 홍악마을에서 멋진 선물 사 갈게요! 간만에 얼굴이나 보고 오라는 뜻이었지 그곳까지 따라가라는 말은 아니었다며 어이없어할 언니의 잔상을 머릿속에서 치우고 소명은 곰곰이 고민에 빠졌다.
남대교를 건너 삼은고개까지 오는데 어림잡아 하루. 대교를 건너 묵을 객잔이 있는 마을까지 오는데 빠르면 반나절. 소명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이윽고 운명을 잡아챌 계산을 마친 소명이 손뼉을 짝 쳤다.
그 결과가 지금 소세하의 옛 제자들 앞에 펼쳐져 있었다. 한 남자 앞에 선 소명이 수줍게 웃으며 다소곳이 손을 모으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람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왜 답지 않게 내숭을 떠느냐는 질문이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 같은 까닭이었다.
“이도 도령님, 이렇게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니, 이 소녀는 정말 기뻐요.”
가람이 다른 제자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설아는 의아하게 소명을 쳐다보면서도 낯선 사람을 앞둔 탓인지 너울을 고쳐 쓰며 침묵을 지켰고, 온유는 이 광경을 아예 외면했다. 예의상 인사는 해야 했으니, 어쩔 수 없이 맏제자인 가람이 목을 가다듬고 소명 곁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소명의 동문 도가람이에요. 이쪽은 설아, 자온유라고 하고요.”
그쪽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가람은 소명의 눈치에 간단한 자기소개로 마쳤다. 설아와 온유가 번갈아 가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소명 앞에 선 남자가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반갑습니다. 이연상단의 윤이도라고 합니다. 태 소저와는 일적으로 만나서 알게 된 사이입니다.”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다고 했는데. 소명이 웅얼거리자 이도가 머쓱하게 미소 지었다. 익숙지 않다 보니 그만. 짧은 대화가 오가는 사이 가람이 자신을 윤이도라 소개한 이를 조용히 뜯어보았다.
윤이도는 가람 또래의 예쁘장한 남자였다. 어렸을 적부터 산을 타고 다녀 피부가 까무잡잡한 가람과 달리, 고동색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검게 보일 만큼 얼굴이 하얬다. 인상도 선하고 말투도 부드럽기 그지없어 소명에게 들은 말이 없었다면 상인이 아닌 어느 양반집 자제로 착각할 만했다.
반면 이도 곁에 선 남자에게서는 강견하고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풍겼다. 허리춤에 찬 긴 칼이 어색해 보이지 않는 큰 키와 검은 머리카락을 대충 목덜미에서 꽁지머리로 묶은 모습을 관찰하던 차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눈매를 접어 씩 웃었다.
“강채경이라 하오. 지난 여정부터 여기 이도 도령의 호위를 맡고 있지.”
그쪽과도 간략하게 맞인사를 나눈 가람이 다시 소명에게 눈을 돌렸다. 어느새 소명은 이도와 사담을 나누며 원하는 바를 쟁취하기 위한 밑밥을 깔고 있었다.
“…그래서 돌아가신 스승님의 부탁을 들어드리기 위해 홍악산맥으로 가는 중이었어요.”
“안타까운 소식에 유감을 표합니다. 홍악산맥까지는 먼 길인데, 스승에 대한 공경이 정말 깊으시군요. 참 존경스럽습니다.”
“에이, 스승님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들어드리는 게 도리지요. 칭찬까지 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건 또 무슨 가증스러운 연기냐며 중얼거리는 온유의 손을 툭툭 쳐서 조용히 시키고 가람이 대화에 슬쩍 끼어들었다. 아까부터 무얼 하려는지 눈치챘으면 좀 도와달라는 소명의 따가운 시선이 계속 옆얼굴에 박힌 탓이었다. 사교성이 높지 않은 온유와 설아에겐 일말의 기대도 안 하는지, 자신만 집중적으로 힐끔거리는 소명에게 이에 대한 대가는 나중에 받아낼 거라고 다짐하며 가람이 짐짓 모르는 척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도령께서는 이곳에 어쩐 일로 오셨나요? 소항에 비하면 강서 쪽은 그다지 상단 거래가 활발하지 않을 텐데요.”
“아, 저희도 일이 있어서 홍악마을로 향하는 중이었습니다. 우연히 목적지가 같네요.”
어머나, 굉장한 우연이네요! 옆에서 호들갑을 떠는 소명을 째려보지 않기 위해 가람은 엄청난 인내심을 다져야 했다. 이 정도 떠먹여 줬으니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는 눈빛을 보내자, 소명이 눈꼬리를 휘었다.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자태만 보면 곱게 자란 요조숙녀가 따로 없었다.
“혹시 그렇다면 한동안 함께 이동하는 건 어떠세요? 호위는 있으시다지만, 아무래도 인원이 많을수록 강도들의 습격에서 더 안전할 테니까요. 설아 언니는 무려 주술사고, 가람 언니도 검술 실력이 뛰어나니 도움이 될 거예요.”
언니들을 팔아먹는 광경을 보며 가람은 모든 걸 내려놓았다. 설아는 본인의 이름이 나오자 움찔했지만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고, 온유는 여전히 상황을 외면하고 있었다. 소명이 이도와 채경을 끼고 열심히 의견을 나누는 듯하더니, 만족스러운 합의에 다다랐는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가람에게 날듯이 뛰어왔다.
“금곡마을까지는 함께 가기로 했어요! 마차는 합칠 필요 없이 같이 움직이면 될 것 같고요. 협조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언니.”
“그래. 그런데 소명아.”
사랑은 운명이라며? 눈썹을 둥글게 휘고 속삭이는 가람을 향해 소명이 짓궂게 웃었다. 윤이도 앞에서 보여주던 것과 딴판인 미소엔 익숙한 활기가 넘쳤다.
“좋은 상인이라면 무릇 없는 운명도 제 손으로 만들어야 하는 법이죠.”
태천상단의 떠오르는 샛별은 반박을 거절했다.
다음 마을까지는 하루를 더 이동해야 했기에, 하늘이 어두워지자 일행은 자연스럽게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소명의 일행은 여성들뿐인데 괜찮겠냐고 걱정스레 묻던 이도는 네 제자가 손발을 딱딱 맞추며 천막을 치고 불 피울 장작을 구해오는 걸 보고 입을 다물었다. 되려 이도 도령이 제일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며 채경이 농담했다.
“자주 여행 다닐 일이 있었나 보오?”
“자주까진 아니었지만, 스승님이 먼 곳에서 의뢰를 받으실 때면 종종 따라가곤 했었죠.”
아, 그 주술사 선생.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지 채경이 불을 피우려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가람을 바라보았다. 두 남자가 잘 천막을 설치하는 이도와 그를 돕고 싶어서 주변을 맴도는 소명을 고갯짓하며 채경이 웃음을 흘렸다.
“저 작은 아가씨가 어쩌다가 도령과 만나게 되었는지도 궁금하고. 오래 알고 지낸 건 아니지만, 저 숫기 없는 도령에게 관심을 보이는 아씨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해서 말이지.”
가람은 쉽사리 답하지 못하고 멋쩍은 미소만 지었다. 소명과 이도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는 가람 본인도 아직 듣지 못했다. 제자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소명에 관해 잘못 얘기해서 인상을 망쳐놓았다간 두고두고 원망을 들을 것 같았다. 다행히 귀신같이 모호한 분위기를 눈치챈 소명이 가람에게 총총 다가왔다.
“무슨 이야기 중이에요, 언니?”
“여기….”
문득 호칭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가람이 채경을 힐끔 쳐다보았다. 편하게 불러도 좋소. 이립을 넘긴 지 오래되지도 않았고 꼬장꼬장하게 굴 생각은 없다며 채경이 호쾌하게 웃었다. 감사의 뜻으로 가람이 고개를 숙이고 소명에게 답해주었다.
“채경 공이 네가 윤 도령을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하다고 하시길래.”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떻게 일반인으로 주술사의 제자가 될 결심을 했는지도 알고 싶고.”
“…그건 저도 조금 궁금합니다.”
이도마저 천막 설치를 뒤로하고 와서 끼어들자, 생글생글 웃으면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던 소명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아마도 소세하에게 제자로 받아달라며 막무가내로 들이받았던 과거를 반추하고 있는 듯했다. 넷이 한군데에 모여있으니 무슨 일인가 싶어 급기야 설아와 온유까지 다가왔다. 소명이 눈을 한 번 굴리고 빠른 수습에 나섰다.
“조금 부끄럽긴 하네요. 옛날, 철없었을 때의 이야기라.”
가람도 속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얼굴을 붉히며 얼버무리는 연기가 일품이었다. 채경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옆에 다가온 이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면 도령이 얘기해주는 건 어떻소? 어쩌다가 운 좋게 이리 꽃 같은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나?”
채경의 악력이 생각보다 셌는지 옆구리를 문지르며 이도가 어깨를 으쓱였다. 태 소저 말대로 재미있을 이야기는 아니기에. 성씨로 돌아온 호칭에 소명이 보이지 않게 입술을 비죽였고, 채경은 심심했는지 끈질기게 이도에게 달라붙었다.
“저번에 이어 이번에도 말수 적은 도령과 내내 침묵 속에 여행하게 될 줄 알았는데, 불쌍한 호위 하나 지루함에서 구해준다 생각하고 이야기보따리 좀 풀어보시오. 답례로 나도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 해줄 테니.”
흥미로운 이야기요? 가람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자 채경이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무려 도령에게도 얘기해주지 않은 건데, 그 전에 먼저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지 않소? 채경의 재촉에 가람도 이도와 소명을 쳐다보았다. 소명이 이도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어쩌다 좋아하게 되었는지 궁금한 건 가람도 마찬가지였다. 말 없는 다른 두 제자도 근처를 떠날 기미가 없자 소명이 포기한 듯 한숨을 푹 쉬었다.
“언니들까지 꼭 듣고 싶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다 듣고 나서 그게 정말 다냐고 따져 물어도 전 몰라요.”
두 손을 든 소명이 이도를 향해 비 맞은 강아지처럼 퍽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관심의 화살을 한 몸에 받게 된 소명에게 동정심 또는 측은지심이 들었는지, 이도 또한 선선히 말문을 텄다.
“소저 홀로 얘기하게 두면 목이 아플 터이니, 같이 첨언하며 얘기해 드리죠. 물론 채경 형님이 약속을 지킨다는 가정 하에요.”
약속은 곧 죽어도 지킨다며 가슴을 치는 채경과, 관심 없는 척 옹기종기 모인 언니들과, 시작은 양보하겠다는 듯 저를 보며 어색하게 미소 짓는 이도를 번갈아 보고 소명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진짜 별거 없는 이야기지만요. 소명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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