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장. 연고 - 2
緣故. 일의 까닭.
“무엇부터 얘기해 드릴까요? 스승님의 제자로 들어간 이야기부터요? 그거야말로 정말 별것 없는데…. 스승님을 만나게 된 계기는 아버지가 스승님에게 넣은 의뢰였어요. 귀한 도자기를 고성으로 유통해야 했는데, 주술사가 소유했던 것들이라 사람에게 해가 없다고 보증을 받아야 했거든요. 마침 소항에 방문했던 스승님이 적절한 가격에 의뢰를 받아주겠다고 하셨죠.”
그때 가람을 비롯한 언니들도 처음 만났다며 소명이 회상했다. 가람 역시 당시 열다섯의 맹랑한 소녀였던 소명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명의 아버지인 태천상단의 상단주가 소세하와 의뢰 협상을 하는 동안 소명은 소세하의 세 제자에게 차를 내주는 일을 맡았다. 원래는 제 언니에게 돌아갈 일이었지만, 언니가 자리를 비웠던 터라 운이 좋았다며 소명이 슬쩍 웃었다.
“그래서 스승님보단 언니들과 먼저 안면을 트게 됐어요. 아버지와 스승님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평소 주술에 관해 이것저것 궁금했던 걸 물어봤었죠. 소항이라 해도 주술사를 직접 볼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요.”
소항은 이름 그대로 바닷가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항구 도시였다. 바로 바다에 붙어 있는 대항에 비해서 도시 규모는 작았지만, 대항에서 한 차례 걸러진 물건과 상인들이 자연스레 소항으로 몰려들었기에 거래는 대항 못지않게 활발했다. 그만큼 도시를 거쳐 가는 상인과 손님도 많아 소항은 사시사철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중 주술에 관련된 물품 거래도 적지는 않았다. 주술의 흔적이 남았거나 주술사가 사용하던 것으로 알려진 물건은 양반집에 종종 비싸게 팔려 가곤 했다.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물건을 유통하는 데 별다른 제한이 없었지만, 한 양반집 자제가 저주의 술이 걸린 보석을 멋모르고 사들여 온 집안이 줄초상을 치른 비극이 일어난 후, 왕가에서 규제를 걸었다.
주술과 관련된 물품을 최초로 거래할 때는 무조건 주술사를 섭외해서 안전하다는 보증을 받을 것. 논리적으로 필요한 절차였지만, 주술 물품 위주로 거래하던 상인들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주술사를 고용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은 까닭이었다. 큰돈을 주면 의뢰를 받아줄 주술사를 쉽게 찾을 수 있을 테지만 이익이 그만큼 줄어들었고, 의뢰비를 적당히 낮추자니 그 값에 일을 받아주겠다는 주술사가 없었다. 그나마 태천상단처럼 잘나가는 상단은 비싼 값을 주고서라도 보증을 받을 수 있었지만, 소규모 상단들은 사업을 접고 다른 거래 품목을 발굴해야 했다.
사실 태천상단이라고 주술사의 의뢰금이 부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상단주는 적당한 값에 보증을 해주겠다는 소세하를 감지덕지하며 잡았고, 소명에게 제자들을 잘 대접하라며 신신당부했다. 둘째 딸이 비상하게 눈치가 빠른 걸 알고 있으니 아마도 안심하고 일을 맡겼을 터였다. 하지만 그날 소명의 눈치는 다른 곳에서 가치를 발휘했다.
“저… 실례되는 질문이라면 죄송합니다만, 주술사는 모두 선명한 보라색 눈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혹 그건 부풀려진 소문이었을까요?”
실내에서도 너울을 벗지 않은 설아는 논외로 치고, 가람과 온유의 눈동자에 보라색이 일절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명은 차를 따르던 와중에도 눈치챘다. 정말 주술사의 제자가 맞느냐는 뜻으로 무례하게 들릴 걸 알아서 조심스럽게 꺼낸 질문에 가람이 너그럽게 답해주었다.
“모든 주술사의 눈이 선명한 보라색은 아니긴 하지. 보라색 눈이 재능의 상징이라는 것도 완전한 거짓은 아니지만.”
셋 다 소세하의 제자는 맞지만, 아마 설아만 정식 주술사가 될 거라며 가람이 웃었다. 가람의 친절한 태도에 힘입어 소명이 질문을 이어갔다.
“그러면 주술사님 밑에서 무얼 배우고 계신가요?”
주술사의 제자를 만날 기회가 흔치 않다 보니 궁금해서 무례를 무릅쓴다는 말에 가람이 자기 옆자리를 가리켰다. 이왕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편하게 앉아서 얘기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제안에 소명은 고민하다가 방석을 가져와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앉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보였는지 가람은 차를 마시며 소명이 묻는 대로 성의 있게 대답했다.
“당연히 주술은 배우지. 비록 나나 온유는 하급 주술밖에 못 익히지만. 주술사로서 정식 의뢰를 받을 실력까진 못 되겠지만, 일상에서 생각보다 유용하게 쓰이긴 해. 그 외에는 주술에 관한 지식과 검술도 따로 익히고 있어.”
“이번 보증 의뢰도 주술사님 옆에서 배우며 도우시는 건가요?”
“그럴걸? 주술 물품 보증 의뢰는 어렵지 않아서 전에도 가끔 도운 적이 있거든.”
주술에 관심이 많은가 봐? 가람의 친근한 물음에 소명이 답할 기회는 없었다. 닫힌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소명이 벌떡 일어서서 방석을 정리하고 문을 살포시 옆으로 밀어 열었다. 마침 문 앞에 당도했던 태천상단 상단주와 소세하가 소명을 내려다보았다.
“손님분들 입에 차는 맞으셨다니? 잘 대접했으리라 믿는다.”
“그럼요, 아버지.”
기분이 좋은 걸 보니 대금 협상이 잘 풀렸나보다 추측하며 소명이 소세하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보라색이 얼핏 비치는 날카로운 고동색 눈동자가 소명에게 잠깐 머물렀다.
“의뢰를 진행하는 동안 저택에 머무시겠다고 하니 제자분들은 소명이 네가 손님방으로 안내해 드리거라. 소하가 오기 전까진 수고해 주어야겠다.”
소명의 언니이자 태천상단 장녀의 이름이 나오자, 소명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이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본래 언니분에게 돌아갔을 일이라고 하셨군요. 소명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배시시 웃었다.
“운이 좋게도 언니가 돌아온 후로도 바빠서 안내는 제가 계속했어요. 그러다가 언니들과 친해지게 되었고, 주술에 관심이 생겨서 스승님에게 제자로 받아달라고 부탁하게 되었죠. 상인은 뭐든 아는 게 많을수록 좋은 직업이니, 분명 집안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아니, 그런데 언니분….”
가람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소명과 이도가 돌아보았다. 소명의 눈이 가늘어지자 가람이 어색하게 얼버무렸다. 그래서 그때 제대로 만나 뵙지 못한 것 같다고. 소명이 소세하의 제자로 지냈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 이도의 관심을 돌리자, 가람이 몰래 한숨을 쉬었다. 옆에 앉아 있던 온유가 가람에게만 간신히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그러게 처음부터 끼어들지 않는 게 편했을 텐데요.”
애교 많은 막내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맏제자는 어깨만 으쓱였다. 대화는 이제 소명이 완전히 휘어잡아 이끌어가고 있었으니 더는 참견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가람은 소명만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진실과 거짓을 교묘히 섞어 얘기할 자신이 없었기에 천만다행이었다.
가람의 시선이 여전히 요조숙녀 연기를 펼치는 소명에게 닿았다. 소세하의 제자로 들어오려고 했을 적에도 저리 티 나게 애쓰지는 않았는데. 어지간히 저 도령의 마음에 들고 싶은가보다 싶어 가람은 물끄러미 둘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가람이 기억하는 열다섯의 소명은 여태 들은 이야기 속 소녀와 제법 달랐다.
“언니, 주술사님의 제자분들을 대접하는 일, 제게 맡겨주시면 안 돼요?”
소세하의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가람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태천상단 저택에 온 첫날 잠깐 말을 나눴던 강아지 같은 소녀의 얼굴은 기억났지만, 이름이 가물가물해 선 채로 고민하던 중이었다.
“네가 뜻 없이 그런 부탁을 할 것 같진 않고. 원하는 게 뭐니, 소명아?”
태소명. 소녀의 대화상대 덕분에 이름을 상기한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재중이라던 언니가 돌아왔나 보다. 감상은 거기에서 그쳤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차에 소명이 맑은 목소리로 벼락같이 선언했다.
“저 주술사님의 제자로 들어가려고요.”
내가 뭘 잘못 들었나? 가람의 머릿속에 떠오른 첫 생각은 소명의 언니 태소하의 황당한 반문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너 뭐 잘못 먹었니?”
“지금 저에겐 일생일대의 기회나 다름없다고요. 언니는 이미 상단 내에서 자리를 잡았으니 공감 못 할 수도 있겠지만, 제겐 꼭 필요한 경험이에요.”
“주술사의 제자로 들어가는 게? 소항에서 제일 잘나가는 상인이 되는 게 꿈이라며?”
“그러니까 필요하다는 거죠.”
가람이 멍하니 서서 들려오는 대화를 소화하는 동안 소명과 소하가 주고받는 말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일단 들어보겠다는 심산인지, 소하는 열렬히 제 계획을 설명하는 소명을 막지 않았다.
“아버지는 태천상단을 이끌 후계자로 오빠를 점찍어두셨죠. 곡식 거래는 당연히 오빠의 몫이 될 거고, 언니에겐 대신 귀한 소금 거래처를 주셨고요.”
“설마 아버지가 너만 빈손으로 두시겠니?”
“제게도 무언가 떼어주시긴 하겠죠. 하지만 제 밑으로 소안이와 소윤이도 있잖아요. 새어머니의 아이들만 박대한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은 거래처 중 제일 좋은 건 그 애들에게 돌아갈 거예요.”
반박할 말이 없는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자리를 뜰 생각도 못 한 가람 역시 숨을 죽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랄하고 가벼운, 그러나 씁쓸한 어조가 깃든 소명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새어머니나 동생들을 탓하려는 의도는 아니에요. 우리 그래도 사이가 나쁘진 않잖아요? 다만 제가 가장 후순위로 밀려났다는 걸 부정하진 말자는 얘기죠.”
“…그래서 주술을 배우는 게 네 상황의 타개책이 된다는 뜻이니?”
“그럼요. 주술사님이 무엇 때문에 이곳에 방문하셨는지 언니도 들으셨을 것 아녜요?”
소하는 소명의 뜻을 바로 이해했는지 감탄사를 흘렸다. 고민은 짧았고, 소명에게 깔끔한 수락이 떨어졌다.
“언니가 되어 여동생의 꿈을 짓밟을 수는 없지. 대신 태천상단의 이름에 먹칠이 가는 일은 없도록 하렴.”
“당연하죠, 언니. 제가 은혜는 꼭 갚을게요.”
발소리가 멀어지자 가람은 참았는지도 몰랐던 숨을 내쉬었다. 조만간 스승님에게 귀찮은 일이 더해지겠다고 생각하며 돌아선 가람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뒤에 소명이 생글생글 웃으며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도가람 님. 혹시 다 들으셨나요? 그러면 이야기가 빠를 텐데.”
변명하기도 전에 소명이 선수치고 들어와 가람의 말문이 막혔다. 예의상 사과하는 게 마땅했으나, 소명의 얼굴에 화는 보이지 않았기에 가람은 머뭇거리다가 다른 말을 꺼냈다.
“경칭 안 붙이고 편히 불러도 상관없어.”
“어머, 고마워요. 언니가 먼저 친하게 지내자고 하면 저야 좋죠.”
뻔뻔할 정도로 뛰어난 친화력은 가히 재능이었다. 몇 마디 더 나눴다고, 가람은 저를 도와달라는 소명의 요청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소세하의 탐탁지 않은 시선 아래 가람이 멋쩍게 눈을 아래로 슬쩍 굴렸다. 소명이 가람에게 부탁한 건 소세하와 단독으로 이야기할 기회를 만들어달라는 것뿐이었다.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가람도 모른 척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다만 가람은 그 어설픈 계획을 꿰뚫어 보지 못할 만큼 소세하의 눈치가 둔하지 않다는 점을 간과했다.
“그 애가 너와 닮아서 마음에 들었더냐?”
닮았다뇨. 다섯 살이나 어린 소녀의 사교술과 능청스러움은 스무 살 된 가람이 감히 탐내지 못할 정도였기에 절로 그리 되물었다. 소세하의 눈썹이 위로 휘었다. 제자로 받아달라 억지 부리는 모습이 몇 년 전 너와 똑 닮았더만. 무뚝뚝한 말이 불러일으킨 부끄러운 과거에 가람의 뺨이 달아올랐다.
“그런 이유는 아니에요. 제게 거절할 구실이 없었을 뿐이에요.”
“태천상단의 차녀씩이나 되는 아이에게 동정심이라도 든 거라면,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주술에 관한 지식을 익히건 말건, 평생 먹고사는 덴 지장 없을 거라는 지적에 가람이 고개를 저었다. 동정심 때문은 아니고요. 단어를 고르는 가람의 목소리에 점차 힘이 들어갔다.
“스승님도 제게 원하는 걸 얻을 기회를 주셨잖아요. 똑같은 기회를 바라는 애를 제 선에서 내치는 건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원래 세상은 공평하지 않은 법이야.”
소세하가 한숨을 쉬고 팔짱을 꼈다. 가람이 눈치를 보다 물었다. 그 애를 거절하실 건가요? 소세하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소를 지었다. 스승의 성격을 익히 아는 가람이 어색하게 웃었다. 단칼에 거절하고 오셨겠구나. 소세하가 코웃음 치고 돌아섰다.
“한 달간의 유예 기간을 주기로 했다.”
“역시 그러셨… 네?”
관성적으로 대답하던 가람이 머리를 번쩍 들었다. 맏제자를 되돌아보는 주술사의 눈엔 읽을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보기보다 영악한 아이더구나. 부모의 허락을 미리 받아온 건 물론이고, 자신을 제자로 들이면 내게 올 이익 백여 가지를 늘어놓으려고 하길래 시끄러워서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다. 손익에 밝은 아이니 한 달이면 내 밑에 있는 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파악하고 돌아가겠지.”
입을 약간 벌리고 선 가람에게 소세하가 퉁명스레 말했다. 일이 늘어난 데는 네 책임도 있으니, 한 달간 그 애는 네가 책임지고 돌보도록 해라. 하려던 말을 다 한 듯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겨 멀어지는 소세하의 등에 대고 가람은 뒤늦게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어느덧 친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아이에게 임시로나마 좋은 소식을 들려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가람의 마음이 조금 들떴다.
소명이 한 달을 훌쩍 넘겨 삼 년 동안 소세하의 제자로 남을 줄은 가람도 소세하도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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