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덤에 수국을 꺾어 헌정하라

고사三. 결의

決意. 뜻을 정하여 굳게 마음을 먹음.

홍악산맥을 처음 방문하는 외부인 열에 아홉은 새빨간 땅이 불길하다며 처음엔 흙을 밟는 것조차 꺼리곤 했다. 오염지대라는 멸칭을 얻고선 그 편견은 더욱 강해졌다.

주술사 자양화는 그 다수에 속하지 않았다. 더는 오염지대에 가까이 가지 않겠다는 마부를 설득하던 비연을 잡아당겨 마차에서 내리고, 도망치듯 사라지는 이를 향해 그는 되려 비웃음을 날렸다.

“겁만 많은 사람들이 쓸데없는 미신에 의존하곤 하지. 회유하는 시간도 아깝다.”

“죄송해요, 스승님. 저 때문에 괜히 먼 길을 걷게 생겼네요.”

“여기서 걸어봐야 반 시진이다. 내 다리는 장식처럼 보이냐?”

비연의 사과에 자양화가 퉁명스레 대꾸하며 짐을 이고 저벅저벅 발을 옮겼다. 그 뒤로 비연이 빠르게 본인의 짐꾸러미를 챙겨 따라붙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아시네요?”

“아까부터 나를 바보천치로 모는 기분이 드는데, 착각인가?”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홍악산맥에 가보신 적 있느냐는 뜻이었어요.”

자양화가 성의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가본 적은 없어도 길은 알지. 오염지대에 본격적으로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역한 기운이 이렇게 강하게 느껴지니까. 그 한마디에 비연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홍악마을로 가는 길은 그 이후로 조용했다.

마을 초입에 도착한 두 주술사는 환대 아닌 환대를 받았다. 이곳이 어디인 줄 아냐며 마을 경비에게 눈초리를 받은 비연이 주술사의 패를 꺼내 들자 태도가 즉시 공손해졌고, 자양화의 이름을 듣고서는 얼굴에 빛이 난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만큼 표정이 밝아졌다. 당장 토벌대를 이끄는 대장에게 자양화의 도착을 알려야겠다면서 경비가 비연을 바라보았다.

“같이 오신 분은….”

“내 제자다. 문제가 되진 않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솔직히 아무 주술사의 도움이라도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하물며 자양화 님의 제자라면 든든하옵죠.”

평소라면 이런 풋내나는 꼬맹이까지 띄워주느라 노고가 많다고 비꼬았겠지만, 자양화는 더 말 붙이고 싶지 않았는지 묵묵부답했다. 비연이 어색해진 공기를 눈치채고 끼어들었다.

“바로 약속이 잡힐 것 같지 않으면 잠깐 마을을 둘러보지 않겠어요? 지리는 빨리 익힐수록 좋으니까요.”

“시간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면 길라잡이를….”

“괜찮아요! 저 사실 홍악마을 출신이거든요. 몇 년 못 오긴 했지만, 마을 안내는 혼자 할 수 있어요.”

설득은 오래 걸리지 않았고 자양화는 결국 비연의 손에 이끌려 본격적으로 마을에 들어섰다. 환한 대낮임에도 하늘은 이상하게 흐렸고 밖에 돌아다니는 주민은 많지 않았다. 군데군데 무너진 건축물이 으스스한 분위기에 보탰다. 그나마 시장가는 검과 활을 비롯한 무기를 파는 상인들과 끼니를 때우러 온 토벌대 일원들이 모여있어 활기가 돌았다. 비연은 입으로는 마을 지리를 설명하면서도 쉴 새 없이 주변을 힐끔거렸고, 자양화는 이내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다그쳤다.

“뭘 그렇게 찾고 있는 거냐?”

“정말 오랜만에 돌아왔으니까요. 혹시 제 친구들이 아직 이곳에 있을까 싶었거든요.”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

자양화의 조언은 따스하지 않았다. 비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스승님의 말이 맞겠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혼잣말하듯 과거를 회상하는 비연의 어조엔 깊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그때 저 혼자 이곳을 떠난 게 계속 마음에 걸렸었거든요. 마을 밖으로 나가면 스승을 구해 주술을 배울 수 있다는, 주술사가 되어 돌아오면 고향에 도움이 될 거라는 꿈은 그저 핑계가 아니었을지 아직도 고민해요. 나만 편해지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었을까? 돌봐야 하는 동생들이 귀찮아서 도망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더라고요.”

자양화는 비연의 과거를 세세히 알지 못했다. 비연은 홍악마을 시절에 관해선 묻기 전에 먼저 얘기하지 않았고, 자양화는 꼬치꼬치 캐물을 위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제지간으로 오랜 시간 같이 지내며 알게 된 몇 가지는 있었다.

비연은 고아였다. 오염지대로 변모한 지 오래된 홍악마을에서 이는 드문 사연이 아니었다. 몇 살에, 어떻게 부모를 잃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자양화는 비연이 같은 처지의 아이들과 가족처럼 의지하며 살았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열두 살에 미약하게나마 주술에 재능이 있는 걸 깨닫고, 주술사가 되기 위해 마을을 빠져나왔다는 얘기는 제자로 받아달라고 달라붙었을 때 들었었다.

스승을 닮아 본인의 이야기는 잘 하지 않으면서 비연은 가끔 홍악마을 친구들을 입에 올리곤 했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배는 곯지 않으려나. 서신이라도 보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타인에게 관심 없는 자양화도 비연이 그들에게 품은 애정을 눈치채지 않기란 힘들었다.

그래서 자양화는 안내가 점점 성의 없어지고 시선이 바빠지는 걸 모른 척해줬다. 어차피 마을 지리 정도는 알아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옆에서 따라오는 발소리마저 사라지자, 그는 미간을 모으며 돌아보았다. 몇 발짝 뒤처진 곳에서 비연이 어린아이에게 동전 한 닢을 건네주고 꽃을 사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하냐?”

한 품 가득 수국을 안고 비연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조금 시들시들해진 연보라색 수국을 자양화에게 보여주며 비연이 물었다. 몇 송이 드릴까요? 자양화의 답은 칼 같았다. 됐다. 무뚝뚝한 응수에도 비연은 활짝 웃으며 꽃잎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그것 아세요? 다시 자양화 옆에 붙어 걸으며 비연이 조잘조잘 말을 이었다.

“홍악산맥 부근은 토질 때문에 꽃 대부분은 뿌리를 내리지 못해요. 수국이 이 땅에서 유일하게 피는 꽃이죠. 그러니까 어쩌면 스승님도 언젠가 이곳에 오게 될 운명이었던 게 아닐까요?”

자양화(紫陽花), 수국이라는 뜻을 가진 그의 이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자양화가 코웃음 쳤다.

“어차피 본명도 아닌 것, 쓸데없는 의미를 부여하지 마라.”

“남이 골라준 게 아닌, 자신이 직접 고른 이름이니까 더욱 의미 있는 거죠.”

비연은 기죽지 않았다. 자양화가 반박하기 전에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머, 너 비연 아니니? 스승과 제자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중년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연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비연이 입을 손으로 가렸다.

“순희 아주머니! 맞죠? 우물 집에 사시던?”

“세상에. 돌아올 줄 몰랐는데. 진짜 주술사가 된 거니?”

비연이 힘차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어엿한 주술사고 토벌대에 합류할 거라며 자랑스럽게 얘기하며 비연이 순식간에 자양화를 끌어당겼다. 이분은 제 스승님이세요. 굳이 저까지 소개할 필요까지 있냐며 못마땅해하는 자양화를 뒤로하고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잇던 비연이 눈을 반짝였다.

“아주머니는 아시겠다! 혹시 저와 같이 지내던 애들 소식 아는 것 없나요? 애란이, 명희, 성진이… 마을을 다 둘러보진 못했는데, 한 명도 만나지 못했거든요. 아직 그 변두리 초가집에 살고 있으려나?”

“…비연아.”

말로 꺼내기 전에도 어두워진 표정으로 인해 비연은 안 좋은 소식을 짐작할 수 있었다. 비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여인이 비연의 손을 잡았다.

“이 년 전, 대규모 마물 출몰이 있었어. 그때는 마을 자체가 아예 끝장나는 줄 알았는데… 토벌대가 어찌 마을은 지켜냈지만, 많은 사람이 죽었어. 네 친구들도 그때 전부….”

상실은 일상이 되었지만, 슬픔에 익숙해지기는 쉽지 않았는지 여인이 말을 흐렸다. 한 명 한 명 시신을 수습하기 어려워 한꺼번에 장례를 치러 미안하다는 말에 비연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소식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애들이 살던 집은 그대로 두었어. 아무도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거든. 지금쯤이면 폐가가 되었겠지만….”

무겁게 내려앉은 적막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얼굴 봐서 좋았다며, 무운을 빈다는 인사와 함께 여인은 떠나갔고, 비연은 한동안 바닥을 내려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잠시간 침묵으로 배려한 자양화가 조용히 물었다.

“가볼 생각이냐?”

“…그래야죠.”

비연은 울지 않았다. 눈가가 불그스름해진 제자의 얼굴을 곁눈질하다 자양화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기에 늦지 않았다.”

“전 이곳에 남을 거예요.”

친구들과 재회하겠다는 희망이 산산조각 났으니 의미 없지 않으냐고 지적할 정도로 자양화는 냉혈한이 아니었다. 비연이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웃었다. 품에 안은 수국이 가슴팍에 힘 있게 짓눌렸다.

“전 고향을 평화로운 곳으로 되돌려 놓고 싶었어요. 오염지대가 아닌, 홍악산맥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그러니 지금 제가 여기 있는 게 의미 없지 않아요.”

비연의 눈에 마을 전경이 비쳤다. 고동색 눈동자에 희미하게 보라색이 빛났다. 그 속에 담긴 건 산맥을 초월하는 무게여서 자양화는 더는 비연에게 떠나자고 설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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