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덤에 수국을 꺾어 헌정하라

삼장. 연고 - 4

緣故. 일의 까닭.

오찬 식사는 간단히 주먹밥으로 이루어졌다. 모여 앉은 여섯 명 중 말문을 먼저 튼 건 온유였다.

“그런데 소항에서 출발하셨다고 했는데, 왜 남대교를 건너오기로 하셨나요? 홍악산맥으로 가는 길이라면 북대교를 건너는 게 빨랐을 텐데요.”

“저도 처음에는 진로를 그리 짰습니다만, 채경 형님이 고성을 거쳐 가는 길보다는 돌아가더라도 이쪽이 나을 거라 하시더군요. 자세히는 듣지 못했지만, 최근 수도가 어수선하다고 들었습니다.”

고성 이야기가 나오자 온유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 있나요? 질문이 나오자마자 채경이 손뼉을 짝 쳤다. 약속드린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드릴 시간이 왔소이다. 먹던 주먹밥도 내려두고 채경이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자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오로지 이도에게만 관심을 쏟던 소명도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무명마을로 떠날 때까지만 해도 들은 건 없었는데…. 태천상단 소식통도 느리다곤 할 수 없을 텐데요.”

“상단을 통해서 얻을 수 있을 만한 소식은 아니오. 소식이라기보단 소문에 가깝지만, 무려 왕실과 관련된 이야기니까.”

“왕실이요?”

“어떤 소문이길래요?”

온유와 가람의 목소리가 겹쳤다. 본인의 날 선 반응을 자각한 온유가 입술을 꾹 물었다. 그를 모른 척해주기로 했는지, 채경이 입꼬리를 씩 올려 분위기를 가볍게 풀었다.

“최근 왕실의 비밀 군사가 고국 곳곳으로 퍼졌다는 이야기가 있소. 사람을 찾기 위해 나왔다는 말도 있고, 물건을 찾기 위해 나왔다는 말도 있지만, 내 소식통에 의하면 왕실에서 도난당한 귀한 물건이 있다고 하오. 그걸 되찾기 위해 군사를 풀었다고 하더이다.”

대체 무슨 물건이길래 비밀 군사가 움직이나요? 가람이 의문을 표하자 채경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까진 나도 모르오. 귀한 보물이었는가 보지. 어차피 다 소문뿐이고. 그래도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니었냐며 채경이 웃음 짓자 온유가 납득하지 못한 듯 끼어들었다.

“그런 소문만으로 고성이 어수선해진다고요?”

“…왕실 주술사가 한 명 죽었어.”

가라앉은 조용한 목소리의 주인은 이틀간 몇 마디도 꺼내지 않은 설아였다. 다섯 쌍의 눈동자가 저를 향하자 설아가 움츠러들었다. 죽다뇨? 한층 낮아진 음성으로 온유가 묻자 설아가 머뭇머뭇 거의 들리지도 않는 소리로 말을 이었다.

“최근에 왕실 소속 주술사와 일할 기회가 있었어. 의뢰가 잘 풀려서 다음에도 일이 있으면 내게 의뢰하겠다고 했었는데, 무명마을을 떠나기 전에 연락이 왔어. 공식 발표는 아직이지만, 왕실 주술사가 살해당했고, 그를 죽인 범인이 도망쳤다고. 가능하다면 와서 조사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서신을 받았어.”

“…그날 밤, 제게 거절할 거라 얘기한 의뢰가 그것이었나요?”

소세하의 장례를 치른 날, 마을로 내려와 설아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린 온유가 질문했다. 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진 채경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내가 말한 소문이 그저 소문이 아닐 수도 있겠소. 물건이 아니라 살인자를 찾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

“또는 둘 다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귀중한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살해당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얌전히 있던 소명까지 보태자 삽시간에 공기가 무거워졌다. 설아가 눈을 굴리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가람을 힐끔거렸지만, 가람 역시 분위기를 어찌 전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채경이 이를 눈치챘는지 일부러 호쾌하게 목소리를 냈다.

“하여간 운이 좋아 우리 두 일행 다 진로를 잘 잡은 것 아니겠소? 속도를 조금만 더 내면 하늘이 어두워지기 전에 마을에 도착할 거요. 이대로면 금곡마을까지 사흘이면 갈 수 있겠는데, 자 소저의 고향이라고 하지 않았소?”

“…고향은 아니에요. 그곳에 살고 있는 건 맞지만요.”

온유의 정정에 채경이 실례를 범했다며 멋쩍게 웃었다. 실례는 아니었다며 온유가 부인하자, 이도가 조심스레 끼어들어 물었다.

“혹 금곡마을에 묵고 갈만한 여관이 있을까요?”

“아니요. 작은 마을이고 방문하는 외부인도 적은 편이라…. 묵을 곳이 필요하시다면 마을 촌장님 댁에 머무르실 수는 있을 거예요. 제 집은 동문들에게 내어주어야 해서.”

그럴 필요는 없을 거라며 이도가 정중히 사양했다. 여관이 따로 없다면 금곡마을엔 잠시 들러서 물자만 정비하고 홍악마을로 바로 떠날 예정이라는 말에 아쉬움이 소명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꽤 중요한 거래처를 트러 가시나 봐요. 소명이 떠보듯 묻자, 이도가 선선히 머리를 끄덕였다.

“최근 형님께서 의류 사업을 새로 시작하셨는데, 홍악마을에 뛰어난 품질의 가죽을 파는 상인들이 많다고 해서 형님의 부탁을 받고 알아보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좋은 물건이라면 경쟁자가 나타나기 전에 선점하는 게 중요하다며 어찌나 닦달하시던지.”

그런 의미에서 이제 길을 떠나자며 눈짓하자, 소명이 마지못해 이도 옆에서 떨어졌다. 먼저 마차에 오른 온유를 뒤따르려다가 소명이 미적거리는 걸 눈치채고 잔소리하려 돌아선 가람의 시선이 설아에게 닿았다. 너울을 고쳐 쓰는 표정이 이상하게 어두웠다.

“설아야?”

설아가 고개를 들자 면사포가 하얀 얼굴을 가렸다. 잠시 후 다시 면사포 밑에서 드러난 얼굴엔 불안의 흔적이 지워져 있었다.

“왜?”

말문을 잃은 가람이 망설이자 마차에 올라탄 소명이 둘을 재촉했다. 이도의 마차와 멀리 떨어지지 않기 위해선 지금 출발해야 한다는 독촉에 가람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 조금 찜찜한 기분으로 마차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설아는 타인의 감정을 읽는 감이 예민했으나 상황에 필요한 말을 고르는데 미숙했고, 거짓말에는 더더욱 재능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온몸으로 불안을 드러내는 설아를 보다 못한 가람이 야영에 필요한 장작을 찾아오겠다며 자원해서 설아를 끌고 나섰다. 한참을 걸어 일행의 눈과 귀에서 충분히 멀어졌다고 판단한 가람이 팔짱을 끼고 돌아섰다.

“얘기 좀 해보자. 무슨 걱정이 있어서 그렇게 시름시름 혼자 앓고 있니? 모른 척 시치미 떼지 말고. 이도 공과 채경 공도 무슨 일 있냐고 나한테 넌지시 물어볼 정도로 티가 났으니까.”

너울 아래 얼굴을 가린 설아는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이번엔 가람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자리에서 꿈적하지 않고 기다린 게 얼마나 지났을까, 설아가 이윽고 조그마한 소리로 대답했다.

“알아서 좋을 것 없는 이야기야.”

“그건 내가 듣고 판단할게.”

단호한 어조에 설아가 너울을 벗고 가람과 눈을 맞췄다. 땅거미가 지는 황혼의 잔해가 청보라색 눈동자 위로 그림자를 덮었다.

“고성에 관한 소문이… 신경 쓰여서 그랬어.”

“전에 네가 말한 주술사가 죽었다는 얘기? 아니면 채경 공이 말한 비밀 군사에 관한 얘기?”

“둘 다. 아마 서로 무관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며 가람이 미간을 찌푸리자 설아가 말을 고르는지 머뭇거렸다. 끝내 정리가 되지 않았는지 설아는 결국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왕실의 물건을 훔쳐 달아났다는 소문은 사실일 거야. 죽은 주술사는 그 물건을 지키는 사람이었을 테고. 그걸 되찾고 강도를 잡으려 비밀 군사를 풀었겠지.”

“대관절 그 물건이 무엇이길래 고성이 난리가 나고 고성에서 잘 활동하지도 않는 너에게도 이야기가 들어가는 건데?”

“…추측은 있지만, 확신은 없어. 직접적으로 의뢰와 관련되지 않은 내게 세세한 정보는 주지 않으니까.”

가람은 설아가 추측하는 것에 관해 묻지 않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쉽게 답을 줄 것 같지도 않았고,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일지언정 그들과 딱히 상관없어 보인 까닭이었다. 대신 그 점이 의아했던 가람이 물었다.

“왕실에 큰일이 있었다는 건 알겠어. 그런데 넌 그 의뢰를 받지 않았잖아. 우리가 고성을 거쳐 가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걱정되는 거야?”

둘 사이로 고요한 침묵이 오랫동안 내려앉았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온 것 같은 기분에 가람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직전, 설아가 고개를 살짝 틀어 시선을 피했다.

“우리하고도 연관이 없지 않을 수 있으니까.”

꼬이고 꼬인 답변에 가람은 짜증 내지 않으려 입술을 꾹 물었다. 그래서 연관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답답해서 가슴을 치는 가람 앞에서 설아가 힘없이 어깨를 들썩였다. 나도 잘 모르겠어, 미안해. 사과는 필요 없으니 되는 데까지 자세히 설명해 보라는 요구에 설아가 윗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소세하의 영옥이 지는 햇빛을 받아 보라색으로 빛났다.

“스승님이 연관되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가람의 탁월한 눈치에 설아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또한 확실하진 않지만, 정황상 그렇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 설아의 실토에 가람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도난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일어난 건 스승님이 돌아가신 후였잖아. 생전 의뢰를 받으실 때도 고성 근처엔 얼씬도 안 하셨었고.”

“의뢰 쪽으로 연관된 게 아니라, 그 물건 자체에 연관이 되셨던 게 아닐까 싶어.”

“스승님이?”

단순한 되물음에는 설멍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의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실력이 좋기는 하셨지만, 보라색 눈을 지니지 않은 무명 주술사에 불과했던 소세하가? 눈을 찌푸리던 가람의 생각이 스승이 주술로 남긴 유언에 닿았다.

“혹시 유언에 따로 말씀 남기신 게 있었어?”

소세하가 남긴 전언의 술을 직접 들은 건 설아뿐이었다. 설아가 힘차게 머리를 흔들어 부정했다. 그것에 관해 거짓을 말한 적 없다는 설아를 가람이 지적했다. 호숫가에 있던 다른 전언의 술은? 이번에도 설아는 부정했다. 그건 끝까지 풀지 못해서 내용을 알 수 없었어. 가람이 도로 팔짱을 꼈다. 그러면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추측이 나왔냐는 추궁에 설아가 손에 든 너울을 꼭 쥐었다.

“스승님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찾아뵈러 갔을 때 얘기해주신 게 있어. 해야 할 일이 있고, 내가 계속 찾아온다면 위험할 수 있으니 이제 더는 오지 말라고.”

설아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떨리는 목소리와 달리 청보라색 눈에는 확신이 담겨있었다.

“그날 난 스승님에게서 보았어.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를.”

보라색? 가람은 되묻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가람 역시 변장의 술에 관해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변장의 술은 유지하기 복잡했고 기력도 많이 드는 주술이었다. 소세하가 제자들과 지낸 오랜 시간 동안 변장의 술을 유지해 보라색 눈동자를 숨겼다는 게 가능한가? 반신반의하는 가람에게 설아가 진지한 어조로 쐐기를 박았다.

“스승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대단한 주술사였을지도 몰라. 아니, 아마 그게 맞을 거야. 그러면 모든 것이 이해돼. 거듭 조심하라고 남기셨던 말도, 유언에 관해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는 당부도.”

“그게 진실이라면, 이 여정이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라는 말이 되겠네요.”

차가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가람과 설아의 머리가 동시에 돌아갔다. 소리 없이 다가온 온유가 온기 한 점 없는 시선을 설아에게 고정했다. 설아가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물었다.

“어디서부터 들었어?”

“필요한 건 대충 다 들은 것 같아요.”

온유 뒤에서 소명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강아지 같은 얼굴에 무해한 미소는 여전했으나, 막내 제자의 말에는 뼈가 들어있었다.

“언니들이 한참 돌아오지 않아 온유 언니가 찾아 나서는데, 혹시 추적의 술을 써야 할 수 있으니 저도 와달라고 하더라고요. 그이 곁에서 떨어지기 싫었는데, 따라온 걸 오히려 잘했다고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설아의 변명은 시작되기도 전에 온유 선에서 막혔다. 말하지 않은 유언부터 이 여정의 위험성, 또 우리에게 숨긴 것이 뭐가 있나요? 온유의 힐문에 설아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불타는 시선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온유가 코웃음 쳤다.

“당신은 정말 스승님을 많이 닮았어요. 반드시 해야 하는 이야기도 하지 않아서 타인에게 민폐를 끼친다는 점이요.”

설아의 창백한 얼굴을 뒤로 하고 온유가 가람과 소명을 번갈아 보았다. 경고의 어조는 냉정했다.

“저는 금곡마을에서 헤어질 거예요. 언니도 소명이도 홍악산맥에 가는 걸 다시 숙고해 보길 권해요. 왕실의 군사가 연루되었다면 단순히 여행길이 위험하다는 수준으로 끝날 얘기가 아니에요.”

가람과 소명이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울상이 된 설아가 입을 열려고 했지만, 온유가 쏘아붙이는 게 더 빨랐다.

“스승님의 장례로 부족했나요? 다음엔 동문 제자들의 장례를 치러야 성이 풀리겠어요?”

설아가 힘없이 머리를 떨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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