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창작] 할머니와 손주들과 쿠키

말숙 씨의 노후 생활

낡은 지팡이 하나에 기댄 몸이 기우뚱거린다. 손 때가 타 거뭇해진 지팡이를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으로 힘껏 쥐어 몸을 일으킨다. 아이고, 되다…. 절로 앓는 소리가 난다. 마르 수코는 세월의 흐름을 두 달에 한 번은 느끼는 것 같았다. 한 달이 흐르고 두 달이 흐르면 몇 년은 전처럼 느껴지는 몸상태가 그립곤 했다. 선선한 바람이 휘 불어온다. 운동하다 사람 잡겠구나. 여기에서 좀 쉬다 가자꾸나…. 동글하고 통통한 몸이 조심스럽게 넓적한 바위 위에 앉는다.

허공에 살며시 띄워진 다리가 대롱대롱 거린다. 고된 운동을 한 것처럼 벌개진 뺨이 히끗 올라간다. 물병에 담아온 물을 한모금 마신 마르 수코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린다. 함, 머니이…. 턱이 대롱거리는─마르 수코가 턱을 가리키자 힘을 주어 다시 턱을 맞췄다─ 귀여운 손녀가 자기도 목이 마르다는 양 손을 뻗어온다. 구울의 날카로운 손톱이 혹시 마르 수코를 다치게 할까 조금 떨어진 곳에서 허우적거린다.

마르 수코의 펑퍼짐한 치마 밑에서도 점액질 투성이의 끈적한 괴물이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옳지, 옳지… 조금만 기다려라. 마르 수코는 새로운 물병을 꺼내들며 자신의 소중한 손녀와 계약자에게 줄 물을 나무로 된 컵에 담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바람이 풀냄새를 가득 싣고 마을로 향한다. 게걸스럽게 물을 마시고─손녀는 반은 물을 흘렸지만─ 만족스런 소리를 내는 동반자들을 보며 마르 수코가 웃었다.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오늘은 손자가 오기로 한 날이었다.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손자는 단 걸 좋아하고 톡톡 튀는 식감의 파스캣 넛츠─고소하지만 한 입 깨물면 타다닥 튀는 식감이 입 안을 간지럽혀 호불호가 갈리는 견과류─가 들어간 쿠키를 좋아했기 때문에 파스캣 넛츠를 구하기 위해 산에 오른 참이었다. 마르 수코의 손에 들린 건 잘 익은 망고같이 부드럽고 한 입 베어물면 알싸한 맛이 감도는 롱 데블러였지만….

“물리면 개미한테 물린 것처럼 따끔거리니 조심하거라. 이렇게 흐물거리는 다리를 입 쪽으로 모아주고 끈이나 나무 줄기 같은 걸로 묶어서 가방에 넣고…. 옳지. 물에 푹 고아내면 알싸한 맛이 나는 소스도 얻을 수 있고, 몸통은 말랑하고 담백하니 이런 늙은이들 먹기에 좋거든….”

구울의 거친 손길에 상처가 좀 나긴 했지만 마르 수코는 이런 일로 구울을 혼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핏줄이 마른 작고 옹졸한 두상을 자글한 손으로 쓰다듬는다. 아주 익숙해졌어. 이젠 잘하는구나…. 구울이 기분 좋은 웃음 소리를 낸다. 켁켁대는 소리. 이렇게 집을 한 번 나서면 가져갈 물건도 많고, 쉴 일도 많았다. 마르 수코는 열이 나는 것 같이 뜨거운 제 무릎을 툭툭 두들겼다. 나이가 드니 관절이 문제였다.

업, 어버, 어버…. 업어줄게 할머니…. 착한 손녀는 제 몸을 잔뜩 숙이며 마르 수코의 안색을 살핀다. 툭 불거진 턱과 기이하게 자란 이빨들 사이로 뺨이었던 곳을 장하다는 듯 쓰다듬는다. 구울의 등은 척추가 움푹 들어가고 견갑골이 툭 튀어나와 누워있으면 몸이 불편했다. 마르 수코는 부드럽게 구울을 칭찬하는 것으로 가능하면 불편한 일을 피하려고 했다…. 위대한 존재와 계약을 맺었다 해도 인간의 몸은 인간의 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요정이나 악마와 거래할 걸 그랬나…. 괜히 그런 생각을 하면 심통이 난 계약자가 괘씸하다는 듯 마르 수코의 몸을 납작하게 눌러왔다. 이젠 물리적으로 압박을 주면 그대로 뼈가 부러질 걸 알기 때문인지 심적인 압박만 와닿았다.

구울에게 정리가 끝난 가방을 돌려준다. 커다란 구울에게도 몸 반만한 크기의 배낭이 묵직하다. 맑은 날이 이어진 탓인지 허브류와 향신료로 쓰이는 약초가 산책길에도 드문드문 보였다. 파스캣 넛츠를 구하기도 전에 가방이 가득 차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과하게 가져가면 나중에 정말 필요할 땐 부족할 수도 있다. 마르 수코는 애써 자신의 앞에서 흔들리는 청록빛 약초를 무시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시원한 향이 나는 포자를 바람결에 태우고 날려보내는 약초이니 며칠 뒤에 돌아오면 그 땐 더 많은 약초를 캐갈 수 있을 것이었다.

마르 수코의 느릿하고 좁은 걸음을 따라 또 천천히 구울 한마리와 슬라임 하나 만큼의 발자국과 점액질이 늘어진다. 파스캣 넛츠를 심어놓은 곳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짓은 그만하지 않으면 집에 돌아갔을 땐 어둑한 밤이 될 것이다…. 머리 둘 달린 어린 사이클롭스가 손자와 놀아주고 있을테니 걱정이 되진 않는다. 단지 그 어린 것이 나, 할머니랑 구울한테 보여줄 게 있으니까 꼭 만나자. 라고 말한 게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구울의 등에 업혀 돌아오자 집까지 오는 길이 이렇게 짧았나? 싶었다. 나이가 드니 이 짧은 거리도 그렇게 오래 걸리는구나. 조금은 씁쓸했다. 내가 반 년만 젊었어도 이정도 거리는 하루 반나절이면 다녀왔을텐데…. 구울과 함께 흙 묻은 손을 흐르는 물에 박박 닦으며 마르 수코가 생각했다. 아직 손자는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손자가 온다는 말에 들뜬건 마르 수코만이 아니었다. 키메라의 뱃가죽으로 만든 질긴 공을 입에 문 채 마을만 바라보고 있는 덩치 큰 삽살개부터 얼마 전에 막 걸음마를 떼서 어린 나무 하나정도는 부러트릴 수 있게 된 사이클롭스까지…. 집안의 식구들이 온통 손자만 기다리고 있었다.

고생한 구울의 등을 툭툭 두들기며 마르 수코가 그만 돌아가라 말한다. 오빠가 오면 뭐하고 놀아달라 할 지 가서 생각하렴. 다정한 말에 구울이 끽끽 소리를 내면서 허둥지둥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요즘 손녀와 손자가 푹 빠진 놀이는 고블린 인형과 오크 인형을 가지고 할머니 흉내를 내는 것이다. 오늘도 그 놀이를 할 지 궁금했다. 만약 오늘도 인형 놀이를 한다면 자신의 계약자는 슬라임이 아닌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줘야……할까. 아직 아이들에겐 너무 이른 게 아닌가 고민됐다.

“아이들이 댁이 진흙 슬라임인줄 알고 있네. 위대한 존재라고 안 알려줘도 되우?”

“…..”

하늘에서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썩 싫지 않은 눈치다. 내가 늙으니 당신도 변했어…. 사람도 몇 개월이면 변하는데, 당신들도 100년이면 변하는구만…. 마르 수코가 낄낄 웃으며 서로 부딪혀 청량한 소리를 내는 파스캣 넛츠를 도마 위에 올렸다. 억센 줄기를 낑낑대며 잘 벼려진 칼로 잘라낸다. 줄기는 소금을 잔뜩 뿌려 나흘을 절여두면 그제야 좀 씹을만 해지는데, 이걸 물에 다시 이틀 불려두면 밍밍해진다. 그걸 약한 불에 바싹 구워서 잘 건조시키면 삽살개가 좋아하는 간식이 되었다. 마르 수코는 잘 구부러지지도 않는 줄기를 회색 체크무늬 보가 얹어진 바구니 위로 쓱쓱 던져넣었다.

작은 라탄 의자를 끌어와 그 위에 올라선 마르 수코가 조그마한 망치를 집어들었다. 타다닥, 타닥, 토독 소릴 내는 파스캣 넛츠의 위에 탕탕탕. 둔탁한 망치 소리가 울려퍼진다. 어른 주먹만한 크기의 껍질이 깨지고 호두만한 과실 다섯 개, 어떤 건 여섯 개… 네 개. 푸른 기운이 도는 파스캣 넛츠의 과실이 도마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주름 진 손으로 싹싹 긁어모은다. 손바닥이 간지러울 정도로 튀어다니는 것들을 냄비 안에 집어넣고 재빠르게 뚜껑을 닫는다. 자기들끼리 부딪히며 먹기 좋게 다져지고 지칠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라탄 의자에서 내려온 마르 수코가 다시 바쁘게 통통통 움직인다. 넛츠들이 조용해지기 전에 반죽을 마쳐야 했다. 손자가 먹을테니 달콤한 설탕도 잔뜩 넣어야했고, 고소한 맛이 나도록 마을에서 제일 질이 좋은 버터를 넣어서 반죽을 만들어야 했다…. 이런 때엔 자기보다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 요정이나 정령들에게 부탁 한 번 하면 뚝딱 된다는 친구가 부럽기도 했다. 자신은 정령들의 짓궂은 장난을 견디기엔 체력이 부족해서 할 수도 없었겠지만….

인간의 몸 빈 부분을 진흙을 구워 떼워넣은 골렘에게 찬장 깊숙한 곳에 집어넣어둔 밀가루를 꺼내달라 부탁한다. 골렘은 아직도 자신이 인간일 적의 키와 같다고 믿기 때문에 종종 머리를 박아 도기 깨지는 소리를 내곤 했는데, 오늘도 그랬다. 아이고! 마르 수코가 새 된 소리를 낸다. 얼굴의 절반이 깨졌으면서 아픈 것도 모르고 밀가루, 반죽할 그릇, 다음으로 이스트 같은 걸 꺼내는 몸짓이 점점 느릿해진다.

“우….”

둔한 소리와 함께 진흙이 철벅철벅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대로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은 거구의 골렘은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고 벙벙하게 앉아있는다. 깨진 부분으로 살펴보아하니 장기가 상한 곳은 없어보인다. 주문을 조금만 보완하면 다시 멀쩡해질 것 같았다. 와서 우리 애 좀 데려가거라! 마르 수코의 외침에 장성한 사이클롭스 둘이 부엌을 비집고 들어온다. 한 명은 진흙 좀 닦아주고.

똑똑한 아이들은 마르 수코가 시키는 일은 꼭 해내고 말았다. 조심조심 골렘을 옮기고 축축하게 젖은 걸레로 진흙을 닦기 시작하는 사이클롭스들 덕분에 마르 수코는 다시 베이킹에 집중할 수 있었다.


고소하고 달큰한 쿠키 구워지는 냄새가 집안을 따뜻하게 뎁힌다. 마르 수코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흔들 의자에 앉아 자기 몸의 세 배는 되는 삽살개의 털을 빗어주고 있었다. 진흙 골렘의 수복도 마쳤고, 아이들과 함께 어떤 모양의 쿠키가 좋을지 이야기도 나누며 오븐에 넣는 데에도 성공했다. 어지럽혀진 부엌은 다함께 힘을 합쳐 치우니 금방 깨끗해졌고…. 자신은 정말 행복한 노파임이 틀림없었다. 착하고 말 잘 듣는 손주들에게 둘러쌓여 보내는 노후는 모든 노인들이 꿈꾸는 생활 아닌가?

저번에 만든 쿠키는 날이 찰 때 만들어서 그런지 불꽃 모양이나 털이 복슬복슬한 펜리르 형태의 쿠키틀이 인기가 많았는데, 오늘은 꽃이 인기가 많았다. 구울은 해골 쿠키틀을 들고 꽃, 꽃. 이라고 말하길래 무슨 꽃이냐 물어보니 공동묘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시체꽃 이야기를 했다. 관찰력이 좋은 아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걸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마르 수코는 진심을 다해 아이를 칭찬해줬다. 사이클롭스는 손자가 함께 해 준 공놀이가 재밌었는지 방망이 모양의 쿠키틀과 둥근 쿠키틀을 유독 좋아했다. 그 외에도 입에 물면 달콤한 맛이 나는 꽃이나 꺾으면 30분 정도 은은한 빛이 돌아 잠들기 전에 잠자리에 꽂아주는 깜빡이 꽃 같은 걸 고르기도 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걸 알아가는 건 몇 년이 지나도 즐거운 일이었다.

작년 손자의 생일을 축하하며 보낸 통신망이 울렸다. 손자의 방에 하나, 거실에 하나 나란히 설치한 통신망은 마르 수코가 한 선택 중 잘한 일 천… 몇 번째에 들어가는 일이었다. 품에 안겨있던 삽살개가 혀를 내밀고 거실로 우당탕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건강도 하지…. 조금 뒤에 콧잔등 위에 조그마한 쪽지를 얹어온 삽살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마르 수코가 편지를 열었다. 지금부터 가요!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인 짧은 편지였다. 흙냄새가 나는 걸 보니 한창 놀다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손자가 온다는구나.”

붕붕 꼬리 흔드는 소리, 박수치고 끽끽대는 소리, 우우 흥분하며 내지른 소리…. 해가 저물어가니 모두들 내심 걱정한 모양이었다. 오늘 온다고 했는데, 안 오면 어떡하지? 같은 걱정….

“오빠, 형이 혼자 오는 건 힘들테니 데리러 갈 착한 아이가 있을까?”

“나, 나… 같이 가.”

삐쩍 마른 구울 하나가 손을 든다. 옆에 있던 다른 구울도 손을 든다. 함께 갈 아이들은 숱하게 많았다. 그렇게도 노는 게 좋을까? 이런 점이 아이 같으니 좋은 거지만…. 마르 수코가 빙그레 웃는다. 그러면 부탁하마. 할머니는 조금 더 쉬어야겠어. 환해진 얼굴로 구울들이 망토를 뒤집어 쓴다. 날이 추우니 든든히 몸을 감싼다. 마을에서 마르 수코의 집까지 오는 길은 고작 5분 남짓이다. 흔히 말하는 마녀의 집이니 뭐니 하는 소문도 돌지 않아 그 누구도 해를 입히진 않지만, 마르 수코는 늘 이렇게 아이들에게 아이를 부탁하곤 했다.

마르고 긴 발이 바닥을 차는 소리가 들린다…. 그 뒤를 어른 구울들이 따라가며 걱정하는 소리도. 아무 일 없을거야. 걱정마렴. 마르 수코가 말한다. 그 말에 거짓은 없다는 것처럼 계약자가 조용하다. 달콤하고 고소한 쿠키가 다 구워져가는 참에 일어날 불상사는 애초에 자신의 계약자가 가만 둘 리도 없었다. 무릎 위에 툭 얹어진 커다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르 수코가 웃었다. 오늘 우리 손자가 무슨 선물을 가져올까? 이제 어둠이 내려앉는 숲이 또 다시 떠들석해진다.

나이 들고 힘 없는 노인의 웃음 소리가 울린다. 서늘하지만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다. 기분 좋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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