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제

[설제]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협객 1

20230202 백업용. 동양풍 BL. 무협 아님!

DILLO by 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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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완만한 산길을 지나고 있었다. 짐을 진 나귀 한 마리를 끌고 앞장서서 걷던 이립이 채 안 되어 보이는 남자가 산중턱에 난 길 한쪽에 앉아있는 시커먼 사내를 발견하고는 경계심어린 낯빛이 되었다. 

하지만 사내가 길을 막고 있거나 다른 무리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다 여기서 돌아가자면 산 속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야숙을 못할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낯선 산 중에서 밤을 보내는 건 다른 얘기였다. 

결정을 내린 남자가 가던 길을 그대로 걸어갔다.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막 사내 앞을 지나려는데, 웅크리듯 앉아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여행자신가? 이쪽에는 볼만한 게 없을 텐데.”

산길 중간에 떡하니 앉아있던 사내는 중년쯤 되는 나이로 보였다. 중년의 사내는 적어도 보름 정도는 길거리를 헤맨 듯 지저분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음성은 또렷하고 맑아서 기이한 인상을 주었다.

“친척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나귀를 끌고 산길을 지나던 젊은 남자가 대답했다. 피부가 깨끗하고 손이 매끈한 게 고생하고 자란 사람 같지는 않았다.

“여기 볼일이 있는 게 아니라 지나는 길이었나보군.”

앉아있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섰기 때문에 나귀를 끌고 가던 남자의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일어선 사내가 허리띠에 검을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도 젊은 남자는 행색은 멀끔해도 누군가 작정하고 덤벼들었을 때 당해낼 것 같은 풍채는 아니었다. 

나귀 뒤편에서 따라 걷고 있던 키 큰 남자도 중년 사내쪽을 보는 듯했다. 사내가 그쪽을 힐끗 봤지만 키 큰 남자는 죽립을 쓰고 천까지 둘러 얼굴과 시선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던 터라 파악할만한 건 없었다. 장신인데다 옷 때문에 멀리서는 티가 안 났는데 가까이서 보니 몸이 꽤 탄탄해 보였다.

중년 사내는 조금 전에 숲길을 지나느라 시야를 가리는 천을 걷고 있던 키 큰 남자가 사람을 발견하곤 얼굴을 가리는 걸 봤었다. 무슨 이유든 저런 차림이라면 이목을 끌 텐데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얼굴을 가려야 하는 사정이 있는 듯했다.

“흑운랑이라 하오.”

“흑운…… 뭐요?”

산을 며칠은 헤맨 꼴을 한 중년의 사내가 자신을 가리켰다.

“흑운랑이라고 한다 했소.”

“아, 그쪽 이름이…… 흑… 운, 랑? 이라고 하셨구나.”

젊은 남자는 무척 떨떠름하게 말했다. 어쨌든 저쪽에서 먼저 자기 소개를 했으니 그도 이름을 밝혔다.

“저는 제헌이라고 합니다. 이 녀석은 순이라고 하고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소. 제헌 소협, 순 소협.”

얼굴을 가린 키 큰 남자가 순 소협이라 말하며 인사하는 흑운랑이란 중년 사내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자신을 제헌이라 밝힌 젊은 남자가 조금 당황한 낯으로 일행을 보았으나 특별히 다른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본인을 흑운랑이라 밝힌 중년 사내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일단 내 몰골에 관해 해명을 해야겠군. 본인은 귀식대법을 익혀 땅 속에서 며칠이든 은신할 수 있소. 사정이 있어 지난 며칠간 땅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지. 그런 이유로 지금 모습이 썩 좋지 못한 점 소협들에게 양해를 바라겠소.”

호탕한 목소리와 호쾌한 몸짓이 퍽 인상적이었으나 그 내용의 진위 여부는 또 별개였다. 제헌이 슬그머니 제 일행을 보았으나 시선을 받은 그는 고개를 갸웃 기울일 뿐이었다. 보이진 않았지만 순진한 눈빛으로 눈을 깜빡이고 있을 게 뻔했다.

덩치에 맞지 않는 귀여운 행동이라 기분이 좀 묘해지긴 했지만 어쨌든 의도는 전해졌다. 제헌의 일행도 저런 사람이나 그가 주장하는 능력에 관해 아는 바가 없다는 뜻이었다. 

제헌은 자신의 동행인이 상상 이상으로 무능하다는 의심에 좀 더 무게를 더하며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저분한 중년 사내는 이번엔 두 사람을 향해 포권을 하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소협들에게 말을 건 이유는 긴히 부탁할 일이 있기 때문이오.”

“부탁이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오. 마을로 갈 때 이걸 내 지인에게 전해주기만 하면 되니까.”

흑운랑이란 지저분한 사내가 그보다는 덜 너저분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곤 묻지도 않았는데 열어서 안을 보여주었다. 거기엔 구슬을 꿴 아기자기한 실팔찌가 들어있었다. 잡동사니 수준이라 값어치는 그다지 없어보였다.

“딸에게 줄 선물인데, 사정이 있어 직접 전해줄 수가 없소. 아랫마을에 있는 내 지인에게 전달해주면 그가 알아서 전해 줄 거요.”

“마을에 못 들어가는 사정이라는 게 혹시 심각하거나 위험한 겁니까?”

“보기에 따라 다르겠지.”

제헌의 얼굴에 떠오른 솔직한 표정에 흑운랑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높은 사람에게 약간 밉보이긴 했지만 나쁜 짓을 저지르진 않았소. 지인에게 이걸 전해주는 것 정도로 문제가 생기진 않을 거요. 내 가족에게 직접 가는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소협들께선 어차피 하루이틀이면 여길 떠날 테니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지도 않겠지.”

“그래서 여기서 누가 지나가길 기다리고 계셨다는 말이군요…….”

딱 잘라 거절하진 않았지만 제헌이 내키지 않는 기색이자 흑운랑이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비록 지금은 지현의 부패를 들췄다는 이유로 쫓기는 몸이 되어 관군을 피해다니는 처지가 되었으나 나 또한 강호인이니 부탁을 들어준다면 마땅히 은혜를 갚을 것이오. 심부름 값이라기엔 뭐하지만 지금 당장은 패물이 없으니 이걸 같이 가져다 준다면 받는 이가 알아서 셈을 해줄 것이오.”

말을 마친 흑운랑이 웬 보따리를 내밀었는데, 안을 보니 웬 풀 같은 게 잔뜩 들어있었다. 아무 풀은 아닌 듯했고 산에서 캔 약초 종류로 보였다. 지금 당장 가진 돈은 없고 심부름을 완수하면 이 약초들만큼 값을 받으라는 뜻으로 보였다. 

제헌은 이제 와선 헷갈릴 지경이었다. 사실 자신이 다른 세상에 떨어지기라도 한 게 아닐까? 얼핏 이 너저분한 중년 사내의 말은 조리있게도 들렸다.

그러나 현실감각에 의심이 들려하면 자신을 흑운랑이라 소개한 사내의 꼴을 보고 냉엄한 현실로 정신이 돌아오곤 했다. 본인 주장에 따르자면 위기를 피하려 땅 속에 숨어있다고 하니 지저분한 몰골이 될 수도 있겠다 싶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봐도 너무 더러웠다.

“그렇…군요. 대협께선 협객이셨나 봅니다.”

관리의 부패를 들췄다 하니 꺼낸 제헌의 말에 지저분한 꼴을 한 중년 사내가 와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부끄럽게도 이 미욱한 자를 그렇게 부르는 이들도 있소.”

말은 부끄럽다지만 정말 눈꼽만큼도 부끄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자칭 협객인 흑운랑이란 남자는 두 사람을 아래위로 가볍게 훑더니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

“그런데 혹시 두 사람은 혼례는 올렸나? 슬하에 아주 귀여운 여식이 있는데…….”

“저 결혼했습니다.”

칼 같은 제헌의 말에 얼굴을 가린 제헌의 일행도 방긋 웃으며 뒤따랐다.

“저도 이미 맺어진 이가 있어요.”

덩치와 달리 말씨가 나긋했다. 흑운랑이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쉽게 됐군. 결례로 받아들이진 않았으면 하오. 비록 우리가 알아온 시간이 길지 않지만 본디 협을 아는 사내는 쉬이 만나기 어려운 법이라 마음이 급했소이다.”

제헌은 흑운랑이 말한 협이라는 것보다는 사지 멀끔한 젊은 남자가 돈도 있어 보인다는 이유가 더 클 거라고 생각했다.

“혼사는 따님의 의사가 중요한 부분 아닙니까?”

“그야 당연하지! 그래서 일단 만나보라고 할 생각이었네만 소협들이 벌써 혼인을 했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다행히 흑운랑은 자기 딸을 만나보라 더 권하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걸 권했다.

“아참, 혹시 따로 머물만한 곳이 있는 게 아니라면 괜찮은 곳을 추천해주겠소.”

두 사람의 입장으로는 나쁠 것도 없는 제안이었다. 좀 이상한 호객꾼 같기는 했지만 가기로 한 곳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마을을 들르긴 해야 했으니 말이다. 

산을 넘어 가는 길에 흑운랑이 경공을 보여준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그냥 열심히 움직이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산을 타고 움직이는 게 평범하게 보이지는 않아 유심히 보아두기는 했다.

흑운랑은 나귀가 걷기 좋은 길이나 위험한 곳을 알려주는 등 괜찮은 길잡이 역할을 했다. 칼 들고 다니는 것보단 길잡이가 더 천직이 아닌가 싶었다.

동행은 산 바로 아래까지였다. 산이라면 몰라도 마을까지 들어가면 자신을 쫓는 관군의 귀에 소식이 들어가 가족들도 위험해진다는 게 흑운랑의 주장이었다.

피차 제헌도 칼을 들고 다니는 지저분하고 수상한 사내와 계속 동행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해어질 수 있었다. 다시 두 사람과 나귀 한 마리가 된 이들이 점차 평탄하고 걷기 쉬워지는 마을 길로 접어들었다.

한 사람 겨우 지날만큼 좁은 산길에서 벗어나 마을로 접어들면서 길이 넓어졌기 때문에 제헌과 일행이 나란히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순은 나귀 이름이고 네 이름은 설이잖아, 바보야. 저 정신나간 아저씨가 순을 네 이름으로 알아들었다고.”

얼굴을 가린 키 큰 남자가 질책하듯 말하는 제헌의 투덜거림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상관 없지 않나요? 저는 순이란 이름도 마음에 드는 걸요. 그리고 제 이름을 어찌 기억하든 이제 다시 볼 사이도 아니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

제헌은 찝찝한 기분을 털어내듯 고개를 가로젓고는 자기 일행의 이름을 잘못 안 중년 사내가 알려준대로 오늘 숙박할 장소를 찾아갔다. 

본명이 아닐 게 뻔한 흑운랑이라는 이름이나 겉모습도 그리 신뢰가는 행색은 아니었지만 흑운랑이 말한대로 두 사람은 특별히 머물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이 마을 길도 몰랐다. 일단 찾아갔다가 영 아닌 듯하면 그냥 다른 곳을 찾아가면 될 터였다.

다행히 그들이 헛걸음 하지는 않았다. 흑운랑이 알려준 곳에는 제법 번듯하고 손님도 꽤 드나드는게 척 보기에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 객잔이 있었다.

“이쪽에 앉으세요! 나귀는 마굿간에 두시면 됩니다!”

두 사람이 문 앞으로 다가가자 안에 있던 작은 소년이 쪼르르 와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소년은 작은 덩치에 몸이 가늘지만 눈빛이 좋고 영민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름 나귀까지 있는데다 두 사람의 행색이 빈곤해 보이지는 않는 터라 손님을 맞이한 소년은 퍽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

여기까지 오며 들른 숙소 대부분 마구간이 없고 그냥 말이나 나귀를 묶어두는 나무 기둥 정도나 있었는데 여긴 번듯한 마구간까진 아니어도 나름대로 기둥을 세우고 싸리로 두 면을 벽으로 막고 이엉을 올린 지붕까지 있었다.

제헌이 나귀를 마구간에 잘 묶어두는 사이에 뭘 보는 건지 나귀를 유심히 보던 소년이 뭔가 떠오른 듯 박수를 짝 쳤다.

“혹시 산에서 정팔 아저씨를 만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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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이것은 연성교환을 위해 작성한 무형의 것들 3차 창작입니다. 짤막짤막하게 쓸 예정입니다. 더 놀라운 건 무협물이 아니라는 점…….


원래 포스타입에 업로드한 걸 시범삼아 백업용으로 펜슬에 올립니다. 설정 등에 실수가 있을 수 있지만 너그럽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차창작의 의미: 제가 쓴 오리지널을 다른 분이 동양풍으로 2차창작하신 걸 제가 또 2차창작하여……. 그렇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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