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덤에 수국을 꺾어 헌정하라

일장. 장례 - 3

葬禮. 장사를 지내는 일. 또는 그런 예식.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요.”

대화가 시작된 후 온유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날카로운 목소리에 설아는 물론, 가람과 소명도 그를 돌아보았다. 온유의 얼굴엔 불만을 넘어선 분노가 서려 있었다.

“저는 장례에 참석해 스승님께 예를 올리는 것으로 제 도리는 다했어요. 하물며 홍악산맥이요? 여기서 그곳까지 가는데 못해도 족히 이 주는 걸려요. 그마저도 쉬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죠. 전 그렇게 시간 못 내요.”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다는 말은 생략되었어도 자리에 있는 이들 전부 눈치챌 수 있었다. 살얼음판 같아진 분위기에 가람은 눈치를 보다가 설아가 입을 여는 순간 조용히 있으라며 잽싸게 손짓했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먼저였고, 대화를 진행하려면 온유부터 진정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지금 설아가 설득을 시도해 봤자 역효과만 날 터였다.

하지만 의문스러운 유언을 마주하고 혼란에 빠진 건 가람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서부터 뭘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온유가 저리 반발부터 하고 나서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온유 언니, 저 무서우니까 화내지 마요.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는걸요.”

소명이 유들유들하게 온유의 화를 먼저 달랬다. 온유도 세 살이나 어린 동생에게 화내고 싶진 않았는지 입술을 꾹 물고 분노를 삭였다. 그러나 잠시간의 침묵 후 나온 목소리는 여전히 싸늘했다.

“설득할 생각은 하지 마. 난 내 뜻을 충분히 표명했어.”

“어머, 설득이라뇨. 저도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요.”

막내마저 반대하고 나서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는지, 설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명을 쳐다보았다. 소명이 어깨를 작게 으쓱였다.

“스승님께 큰 유감이 있진 않지만, 온유 언니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요. 설아 언니는 한 곳에 매여있는 일을 하는 게 아니지만, 저희는 아무런 준비 없이 자리를 오래 비우기가 곤란해요.”

옛 스승의 바람만으로 상단 일을 인계도 없이 무작정 내팽개치고 떠날 수는 없다며 소명이 못 박았다. 가람도 부모님과 동생들의 손에 맡겨둔 약방을 떠올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설아의 낯에 초조함이 떠올랐다.

“일정을… 어떻게 양해를 구하면 안 될까? 당장 떠나자는 건 아니야. 일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저 결혼 준비도 해야 해서 어려울 것 같은데요.”

결혼? 가람이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그런 말 없었잖아? 여태 오간 편지가 몇 개인데 금시초문이라며 가람이 타박하자 소명이 입술을 삐죽였다.

“아직 그이를 꼬시는 중이라서 정확한 날짜는 못 잡았거든요. 스승님 장례 준비를 하며 꺼낼만한 이야기도 아니었고요. 하지만 올해 안엔 반드시 꼬셔내서 결혼할 거니까 준비는 미리 해둬야죠.”

소명이 샐쭉 웃었다. 막내의 당당한 발언에 가람은 할 말을 잃었다. 온유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소명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 서늘한 시선을 설아에게 돌렸다.

“당신이 간다면 말리지는 않아요. 영옥을 처분하러 가는 데 저희가 다 같이 갈 필요도 없잖아요.”

설아가 영옥을 꼭 쥐었다. 자신 없는 목소리엔 확신 대신 간절함이 담겨있었다.

“내가 아닌 우리가 가주었다면 좋겠다고 하셨으니까…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거야.”

스승님이 무언가를 하고자 할 땐 늘 이유가 있었으니까. 설아의 호소는 벽에 막혔다. 온유가 웃음기 없이 입꼬리만 올렸다.

“이유는 있으셨겠죠. 스승님이 가진 모든 주술 비급을 왕실에 넘기고 저희를 갑자기 해산시켰을 때처럼요. 그때도, 지금도,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전 이해 못 해요.”

온유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득은 거절하겠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소명이 눈치를 보다가 빠르게 온유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시간이 더 늦기 전에 정리를 시작하자는 소명의 애교 어린 재촉을 귀찮아하면서도 온유는 그를 매몰차게 떼어내지 않았다. 소명이 온유를 안쪽 방으로 유도하며 가람에게 눈짓했다. 이 이상 설아와 온유가 부딪히지 않게 잘 달래달라는 무언의 부탁에 가람이 쓴웃음을 지으며 미간을 짚었다. 설아를 역으로 설득할 자신은 없었으나, 소명이 솜씨를 발휘해 만들어준 기회를 헛되이 날릴 순 없었다. 가람이 일어서서 설아에게 손짓했다.

“설아야, 잠깐 나가자.”

허망한 얼굴로 소명과 온유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설아가 순순히 가람을 따라 마당으로 나왔다. 늦봄에 접어든 날씨는 기분 좋게 따스해서 가람은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어두운 얼굴을 한 설아에게 차분하게 말을 걸 수 있었다.

“솔직히 나도 네가 한 말을 전부 납득한 건 아니야. 믿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갑작스러웠다는 거지. 그러니까 차근히 처음부터 한 번 더 얘기해줄 수 있어? 스승님의 유언에 관해서.”

가람이 아는 설아는 앞으로 나서는 걸 싫어하는 이였다. 악의에 예민해서 제자들이 다 같이 살던 당시엔 티가 날 정도로 갈등이 생길만한 상황을 최대한 피해 다니던 게 설아 아니었던가. 해산 후 오랜 시간이 흘렀을지라도 사람의 성격이 뒤바뀌진 않았을 터. 그런 설아가 다툼을 무릅쓰고 그들을 끈질기게 설득하려던 이유가 궁금했다. 설아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얘기할 수는 있어. 그런데 그게 정말 다야. 호숫가에서 찾은 전언의 술에 스승님이 남긴 말은 길지 않았어. 우리, 네 제자가 스승님의 영옥을 가지고 홍악산맥에 올라 비연의 영웅비가 있는 곳에서 부수어 주었으면 한다. 절대로 우리 외엔 아무도 알게 하지 말아라. 갑작스러운 부탁을 해서 미안하다. 가는 길 조심하거라.”

그게 전부라며 설아가 끝맺었다. 가람이 눈썹을 모았다. 설아가 망설이다가 가람의 옷소매를 잡았다. 조금 전 온유와 언쟁을 벌였던 게 거짓말처럼 목소리는 주눅 들어 있었다.

“나도 왜 이런 유언을 남기셨는지 안다고는 못해. 하지만 직접 전언을 들었으면 이해했을 거야. 중요한 일이라는 걸. 정말 간절하게 부탁하는 목소리였으니까.”

가람이 머리카락을 거칠지 않게 헤집었다. 그가 흔들리는 걸 파악한 설아가 소매를 힘 있게 쥐었다. 연한 청보라색 눈동자가 고동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가람 언니, 도와줘. 나 스승님의 마지막 부탁은 꼭 들어드리고 싶어.”

가람이 눈을 질끈 감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항복의 표시를 읽은 설아의 얼굴이 밝아졌다. 가람이 조용해진 초가집을 돌아보고 설아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그래도 내가 스승님의 첫 제자인데, 유언을 못 들은 척하고 돌아가기는 기분이 안 좋긴 했어. 같이 갈게. 대신 내 마을에 들려서 부모님께 먼저 상황을 설명해 드려야겠다.”

설아가 괜찮다며 힘차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여는 순간 가람이 선수를 쳐서 끼어들었다.

“다른 애들한텐 내 집에 들러서 하룻밤 묵고 가라고 할게. 어차피 그 애들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 있으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거기까지야. 설득은 네 몫이고, 끝까지 거절한다면 너도 그들의 의사를 존중해야 해.”

잠시 아무런 말 없이 땅을 내려다보다가, 설아는 알겠다는 뜻으로 가람에게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해가 지기까지 집을 정리하고 쓸고 닦았으니 지쳐 곯아떨어져야 했으나, 밤이 늦었음에도 온유는 잠들지 못했다. 이불에 누워 한참을 뒤척이다가 결국 잠들기를 포기하고 온유는 옷을 챙겨입었다. 소세하의 집을 나서자 식은 공기가 뺨에 달라붙었다. 춥다고 여길 정도는 아니어서 온유는 다시 들어가는 대신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언덕을 내려가 구불구불한 골목을 몇 개 돌고 나자 마을의 중심지에 다다랐다.

등불 몇 개를 제외하곤 불빛이 전혀 없어 사위가 깜깜했다. 그러나 소세하의 제자로 지내며 이 마을을 왕래한 게 족히 팔 년은 되었기에 온유는 두렵지 않았다. 되려 사람이 없어 하루 종일 다른 제자들과 부대끼며 곤두섰던 신경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망설임 없이 마을로 내려오긴 했지만, 딱히 가고 싶은 곳이 있던 건 아니었기에 온유의 발은 정처 없이 마을 둘레를 배회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은 마을 입구에서 멈춰 섰다. 그곳에 온유가 아는 이가 서 있었다.

손에 종이 두루마리를 쥔 설아가 인기척을 느끼고 온유를 돌아보았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너울을 덮은 면사포가 휘날려 설아의 얼굴이 드러났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도 그는 크게 당황하지 않은 듯했다.

자신보다 나이는 한 살 어리지만, 이 년 먼저 소세하의 제자로 들어온 설아를 온유는 처음부터 대하기 껄끄러워했다. 해산 이후 어색하던 감정이 거북함으로 발전한 후에는 더더욱. 그래서 온유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돌아섰다. 온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붙임성 있게 말을 걸 만큼 친밀하지 않은 관계에서 보이는 최대한의 존중이었다. 그건 설아도 마찬가지였기에, 온유는 그가 저를 잡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게 온 의뢰서야. 거절하기로 했어.”

앞뒤 없는 설아의 해명에 온유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나 반사적으로 돌아보자, 그의 손에 들린 두루마리가 눈에 들어와 온유는 곧바로 문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저 두루마리는 주술사 설아를 찾는 의뢰서일 테고, 설아는 거절의 답신을 보내려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 테지. 시간을 보아하니 웃돈을 주고 개인적으로 파발꾼을 부른 듯싶었다. 그만큼 스승의 유언이 설아에게 가지는 의미가 컸을 터다.

하지만 온유에겐 그뿐이었다. 설아가 얼마나 절박하든 말든 온유의 결정에 큰 영향은 미치지 못했다. 대꾸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설아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아직도 스승님을 원망해?”

온유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한차례 화를 삼키고 팔짱을 끼며 몸을 돌리자, 설아가 짜증 나리만큼 평온하게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울과 어둠에 가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니 평온해 보인다는 건 온유의 착각일 수 있었으나, 그게 그리 중요하진 않았다.

“그러는 당신은 어떻게 그를 원망하지 않나요? 실질적으로 제일 피해를 본 건 당신일 텐데.”

내용도 모르는 의뢰가 담긴 두루마리를 눈짓하는 온유의 행동에 소리로 꺼내지 않은 말이 담겨있었다. 그들 중 현재 주술사로 활동하는 이는 설아밖에 없었고, 아직 제자였을 시절에도 가람과 온유, 소명은 설아가 주술사로서 소세하의 비급을 전부 전수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공평성을 떠나 셋은 일반인에 가까웠고, 주술에 타고난 재능을 가진 건 설아뿐이었기 때문이다. 물려받아야 할 것이 하루아침에 증발했으니 온유는 설아가 당연히 자신처럼 화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설아는 그때도, 지금도 화내지 않았다. 조용한 목소리엔 거짓이 없었다.

“스승님이 우리에게 베풀지 않은 것보다 베푼 것이 많았으니까, 베풀지 않은 것에 합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믿는 거야.”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 앞에서 온유는 비소를 지었다. 사람을 함부로 믿은 대가가 얼마나 잔혹하게 돌아오는지 아느냐고 묻고 싶은 충동은 꾹 내리눌렀다. 오래 묵은 분노의 끝에 있는 건 설아가 아니니 괜한 분풀이밖에 되지 않을 터였다. 성격적으로 맞지 않을지언정, 온유는 설아에게 개인적인 유감은 없었다. 설아가 그에게 악감정이 없는 것을 알기에, 혼자 미움을 품기엔 자존심이 상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 똑같은 자존심은 설아에게 먼저 숙이고 들어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온유는 불현듯 피로해졌다. 밤 산책의 영향이 이제야 몰려오는가 싶어 그는 이만 돌아가서 자기로 마음먹었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이번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온유의 발을 멈춘 것은 동정심도 너그러움도 아닌 설아가 처음으로 꺼낸 ‘부탁’이라는 단어였다. 그에게서 들어본 적 없는 단어가 돌부리처럼 튀어나와 온유가 가는 길을 방해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설아의 간청은 이어졌다.

“스승님의 유언을 지킬 수 있게 해줘. 그러면 다시는 붙잡지 않을게.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같이 가람 언니의 마을로 가는 길까지만 고민해 줘.”

헛소리 말라고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대꾸를 잡은 건 어느 옛날의 기억이었다. 모든 것을 잃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몰라 갈림길에 우두커니 선 열세 살의 자온유에게 툭 내뱉듯이 주어진 조언이었다.

‘버린다는 것에 두려움을 갖지 마. 하지만 네가 쥐고 있는 걸 버림으로 인해 더욱 큰 후회를 낳을 것 같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마. 떠나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낮고 단호한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온유가 얼굴을 확 찌푸렸다. 왜 하필 이럴 때 떠오르는 건 그 원망스러운 사람의 가르침인지.

“부탁할게, 온유 언니.”

온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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