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덤에 수국을 꺾어 헌정하라

일장. 장례 - 2

葬禮. 장사를 지내는 일. 또는 그런 예식.

어둑한 푸른빛이 남아있는 하늘 아래 불꽃이 춤을 추었다. 설아의 손끝이 우아하게 반원을 그리고, 무용을 선보이듯 허공에 복잡하게 술식을 그려나갔다. 글씨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한 선을 그리는 설아의 얼굴엔 극도의 집중이 서려 있었다. 오랜만에 바깥에서 너울을 벗어 길게 땋아 내린 연갈색 머리카락이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는 게 보였다.

돌무더기 위에 눕혀진 소세하의 시신에 보라색 불꽃이 붙었다. 마흔아홉에 세상을 뜬 자의 얼굴은 미련 없이 평온해 보였다. 가지런히 정돈한 긴 검은 머리카락 끝부터 점점 불꽃이 커지며 시신을 삼켰다. 시체가 타는 고약한 악취는 없었다. 화장의 술은 마치 종이를 태우듯 깔끔하게 시신을 불살랐다. 살 한 점, 뼈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주술사의 시신이 재로 변해 바람에 휘날려 하늘로 돌아갔다. 그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던 가람이 한 발짝 앞에 나서 큰절을 올렸다.

“주술사 소세하의 일 제자, 도가람. 스승님의 명복을 빕니다.”

다음은 설아의 차례였으나, 손끝으로 화장의 술을 펼치고 있어 무릎을 꿇지 못한 설아는 대신 머리를 숙였다.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감정으로 떨리는 엷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주술사 소세하의 이 제자, 설아. 스승님의 명복을 빕니다.”

곧이어 온유가 다소곳하게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절제된 동작은 몸에 밴 듯 군더더기 없고 깔끔했다. 치마에 흙이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유는 고요한 음성으로 인사를 올렸다.

“주술사 소세하의 삼 제자, 자온유. 스승님의 명복을 빕니다.”

마지막은 소명이었다. 소명은 강아지 같은 큰 눈을 깜빡이며 잠시 불타는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먼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언니들을 따라 큰절을 올렸다.

“주술사 소세하의 사 제자, 태소명. 스승님의 명복을 빕니다.”

보라색 불꽃이 더 환하게 타올랐다. 아직 새벽을 벗어나지 못한 시각, 희끄무레하게 머리를 내민 해보다 눈 부신 빛이었다. 이제 시신은 가슴에 새겨진 글씨를 제외하고는 재가 되어있었다. 그마저도 불길 속에 형태가 사라지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우아하게 곡선을 그리던 설아의 손이 천천히 멈추고 몸 옆으로 툭 떨어졌다. 장례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가람이 우두커니 서 있는 설아에게 눈짓하고 조용히 말했다.

“스승님의 영옥은 네가 챙기는 게 좋을 것 같다.”

영옥(靈玉)은 화장의 술로 장례를 치른 후에 남겨지는 주술사의 유해였다. 주술의 힘은 전혀 담기지 않은 보라색 구슬일 뿐이었지만, 유명한 주술사의 영옥은 돈 많은 양반들 사이에선 일종의 부적처럼 비싼 값에 팔리기도 했다. 한때 고국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주술사라 일컬어진 자양화의 영옥이라면 이름 있는 양반은 물론 고씨 왕가도 탐냈을 거라는 이야기가 돌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가 행방불명되면서 다툼의 소지는 아예 없어져 버렸지만.

하지만 소세하 같은 변방의 명성 없는 주술사의 영옥은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았다. 영옥의 처분은 자연스럽게 제자들의 몫이 되었고, 가람은 그 책임을 설아에게 일임했다. 주술사로 명맥을 잇는 제자는 설아가 유일했으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온유와 소명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온유는 오히려 일이 빠르게 정리되어 다행이라는 기색을 보였다.

“이제 집만 정리하면 끝이겠네요. 괜찮다면 오늘 전부 정리하고 돌아가죠. 오래 자리를 비우기 부담스러워서요.”

질문이 아닌 통보에 가까운 형식에 가람이 쓴웃음을 지었다. 해산 당시 얽혔던 지저분한 다툼을 떠올리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온유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으리라. 소명도 반발 없이 어깨를 으쓱이는 걸 보니 오래 머무르고 싶은 생각은 없어 보였다. 최대한 신속하게 일을 끝마치자고 가람이 둘을 달래려던 참이었다.

“할 말이 있어. 중요한 일이야. 시간을 내줘.”

소세하의 영옥을 챙겨 품에 넣은 설아가 가까이 다가왔다. 짧지만 강렬한 요청에 가람이 감탄사를 흘렸다. 장례를 치르느라 머리가 복잡해서 전날 밤에 설아가 했던 말을 잊고 있었다. 장례가 끝나면 얘기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무를 순 없었다. 벌써 거부감을 드러내며 눈썹을 모으는 온유를 가람이 설득했다.

“약속은 지켜야지. 어차피 스승님의 집으로 돌아가서 정리해야 하니, 그 전에 잠깐 앉아서 설아의 말을 들어보자.”

표정에 불만이 역력했으나, 온유는 대놓고 반대하지 못했다. 소명은 이번에도 어깨를 으쓱이며 중립을 표했다. 설아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머리를 살짝 숙였다.

“그래, 우선 어제 어디서 뭘 했는지부터 들어보자. 괜찮지?”

초가집으로 돌아온 네 제자는 마루에 얇은 방석을 깔고 모여 앉았다.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온유와 예의 바르지만 무심한 얼굴을 한 소명을 옆에 두고 가람이 판을 깔아주었다. 설아는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었다.

“난 지난주에 도착했어. 스승님의 부고를 전해 들은 지 하루만이었고. 다행히 바로 옆 마을에 머무는 중이어서 소식을 받고 빨리 올 수 있었어.”

“부고를 전해 들었다고요? 스승님을 먼저 발견한 게 설아 언니가 아니었어요?”

소명이 슬쩍 끼어들었다. 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첫 발견자는 마을 약방의 의원님이었어. 스승님이 모아둔 약초가 이제 필요 없어 조금씩 정리해 둘 테니 매주 와서 가져가라고 말했다 하더라고. 그러다가 지난주에 스승님을 방문했는데 아무런 답도 없었고, 혹시나 해서 문을 열어봤는데 잠겨있지 않아서… 돌아가신 걸 발견했대.”

당황 속에서도 의원은 소세하와 짧게 나눴던 대화 중 옛 제자인 설아가 근처에 머무르고 있다는 얘기를 기억해 냈고, 곧바로 설아를 찾았다고 했다. 주술사가 아닌 일반인이 주술사의 시신을 함부로 건드리면 저주가 내린다는 미신 때문에 의원은 더 급하게 설아의 행방을 수소문했을 터였다. 제자들이 떠난 후 소세하를 제외하곤 주술에 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근방에 전무했던 까닭이었다.

그 직후 설아는 가람에게 전언을 보냈고, 온유와 소명에게도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시신에 보존의 술을 걸고 옛 동문들을 기다리며 집 정리를 하던 중 소세하가 남긴 전언의 술을 발견했다고 했다.

“기다렸다가 같이 확인하는 게 좋을까 생각했는데… 유언을 남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힘들어서 먼저 확인했어. 미안해.”

소명이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온유도 예상대로 큰 반응이 없었다. 가람은 말도 없이 단독 행동을 벌인 설아에게 한마디 할지 고민했지만, 설아가 소세하에게 보였던 존경과 애정이 사제지간을 넘어 가족에 가까운 형태였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넘어가기로 했다. 스승의 죽음에 가장 충격받았을 설아가 유언을 발견한 즉시 확인하고 싶어 한 건 당연했겠지. 가람이 부드러운 질문으로 이해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무슨 내용이었는데? 그게 네가 자리를 비운 것과 연관이 있어?”

“응. 유언이 맞았거든. 아마 돌아가시기 직전에 남겨놓으신 것 같아.”

소세하의 유언은 이러했다. 이 년 전 해산도 갑작스러웠는데, 이렇게 장례까지 급작스럽게 치르게 해서 미안하다. 잘 살펴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란다. 가끔 생각이 닿는다면, 우리가 호숫가에서 함께 배웠던 시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아의 입을 통해 간결하고 사뭇 형식적인 전언을 들은 가람이 미간을 모았다. 호숫가? 조용히 중얼거리는 가람의 머릿속에 한 장소가 떠올랐다. 모순적으로 유언이 암시한 것처럼 그곳에 자주 방문하여 스승에게서 주술을 배웠기 때문은 아니었다.

마을에서 일각 가량 걸으면 작은 뒷산이 나왔다. 높지는 않아도 길이 험하고 가팔랐기에 산을 찾는 마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소세하만 약초를 캐러 이따금 산에 올랐고, 그보다 가끔 제자들을 데려갔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산의 정상까지 오르는 일은 없었다. 중간쯤 길이 없는 산속으로 들어가서 쭉 걷다 보면 나오는 곳이 유언에 언급된 호숫가였다. 강으로 연결되는 호수엔 낡아 쓰러지기 직전인 정자가 하나 있었고, 경치는 나쁘지 않았지만, 절경으로 불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 장소의 특이한 점은 맑은 날에 저 멀리 옛날 오염지대라 불렸던 곳이 희미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본래는 지대의 흙이 붉다고 하여 홍악산맥(紅嶽山脈)이라 불렸지만, 백 년 전 큰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지며 깊숙이 묻혀있던 마기가 지대를 오염시키는 바람에 오염지대라는 멸칭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염된 땅의 동식물은 마물로 변모했고 인간의 피를 갈구했으며, 인근의 수많은 마을 주민이 희생되고 나서야 고국 왕실은 오염지대에 대한 대책을 마련했다.

오염이 심각하게 진행된 지역의 주민은 강제로 이주당했고, 땅을 타고 퍼지는 오염을 막기 위해 왕실은 정화와 봉인의 술에 능한 주술사를 모집했다. 처음에는 높은 보상금에 혹한 주술사들이 실력 상관없이 몰려들었으나, 마기의 오염으로 몸이 약해지고 마물에게 다치거나 목숨까지 잃는 이들이 늘어나며 많이들 지원을 꺼리게 되었다.

수십 년이 흐르며 오염된 면적이 커지고 정화할 주술사는 줄어들어 고국의 멸망까지 우려하게 되었을 때, 고국을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 비연이 나타났다. 고국 최고의 주술사라 불리는 자양화의 제자로 주술에도 검술에도 능했던 그는 목숨을 바쳐 오염지대를 완전히 정화했다.

그것이 벌써 17년 전. 이제는 이주당했던 이들도 조금씩 돌아와 마을을 재건하는 중이었다. 가람을 비롯한 소세하의 제자들은 옛 오염지대에 한 번도 가본 적 없었으나, 그들의 스승은 이곳에 오면 붉은 산맥이 어스름하게 보이는 지평선을 말없이 오랜 시간 보곤 했다. 한 번은 가람이 물은 적 있었다. 스승님은 오염지대 정화에 참여하셨던 적이 있나요? 소세하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표정만 짓고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하산하자고 말을 돌렸었다.

그 장소에 관한 추억은 그뿐이었다. 가람뿐만 아닌 온유와 소명도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설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장소는 그 뒷산의 호수밖에 없는데, 스승님이 유언에 거기를 언급한 이유를 알 수 없었어. 그래서 직접 가봤어.”

어쩐지 마을을 수소문해도 설아가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마을에서 벗어난 호숫가에 있었다면 말이 된다고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더 발견한 게 있었나요? 소명이 채근하자 설아가 무릎 위로 포갠 제 손을 내려다보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호숫가 부근을 전부 뒤져서 스승님의 술식 흔적을 찾아보았는데, 물가 근처 바위 동굴 틈새에서 또 다른 전언의 술을 발견했어. 여기 남겨놓은 것보다 식을 복잡하게 꼬아놔서 푸는 데 시간이 걸렸어.”

그래서 산에 오른 건 이른 아침이었지만, 해가 한참 지고서야 내려왔다고 설아가 덧붙였다. 하고픈 말을 그려둔 술식에 담아 보존하는 전언의 술을 남기는 데는 대단한 재능이 필요 없었지만, 전언을 듣기 위해선 주술사가 직접 그린 술식을 풀어야 해서 술식 해제는 천차만별의 난이도를 자랑했다. 소세하 밑에서 배우던 시절을 떠올린 가람은 그의 술식이 얼마나 악랄해질 수 있는지 알고 있어 침음을 흘렸다. 소명 역시 질린 표정을 지었다.

“고생했겠네요. 그런데 스승님의 유언은 이미 이곳에 남겨두셨다고 했는데, 그곳에 있던 전언은 무슨 내용이었어요?”

설마 비밀리에 감춰둔 주술 비급을 인제야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다던가? 가벼운 농담에 설아는 반응하지 않았다. 설아가 가람과 소명, 그리고 온유와 차례대로 눈을 맞췄다. 잠시 꾹 다물었던 입술이 열렸다.

“진짜… 유언이 있었어.”

“진짜 유언?”

세 제자의 시선이 설아에게 박혔다. 설아가 품에서 소세하의 영옥을 꺼냈다. 진한 보라색 구슬이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오묘하게 빛났다.

“영옥의 처분에 관한 유언이었어. 스승님이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고 영옥을 지정하는 장소에 가져가서 부숴달라는 부탁을 우리에게 남기셨어.”

소명은 예상치 못한 내용에 침묵했고, 대화 내내 말이 없던 온유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질문은 맏제자인 가람의 몫이 되었다.

“영옥을 어디로 가져가 달라고 하셨는데?”

설아의 머리가 돌아갔다. 창밖을 향한 눈은 마을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옛 오염지대, 홍악산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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