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덤에 수국을 꺾어 헌정하라

일장. 장례 - 1

葬禮. 장사를 지내는 일. 또는 그런 예식.

이 년 만에 돌아온 스승의 집은 온기 없이 싸늘하여 사람 사는 집 같지 않았다. 삭아가는 초가지붕을 보며 가람은 틀린 표현은 아니라고 자조했다. 이곳에 홀로 살던 스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으나, 죽은 지 최소 사나흘은 지났을 터였다.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초가집이라 왕래가 달리 없어 시신이 완전히 부패하기 전에 발견된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누가 최초 발견자라고 했더라. 고민에 잠긴 가람을 뒤돌아 세운 건 아직 앳된 목소리였다.

“가람 언니.”

돌아본 가람의 눈에 막내 제자였던 소명이 들어왔다. 소녀의 통통한 볼은 언덕을 바지런히 뛰어왔는지 발그레했다. 가람보다 한 뼘은 작은 키. 거슬리지 않게 대충 하나로 묶어 올린 가람의 고동색 머리카락보다 어두운 검은색 머리카락을 일부 틀어 올려 꾸민 귀여운 모습. 강아지처럼 크고 동그란 갈색 눈동자까지 소명은 이 년 전 보았을 때와 변함이 없었다. 이제 약관이 갓 지났으려나. 가람이 잘 지냈냐고 묻기도 전에 소명이 앞서 용건을 꺼냈다.

“온유 언니가 마을 초입에 도착한 것 같아요. 이리로 와달라 말을 전해달라고 마을 보초에게 일러두었으니 곧 올 텐데. 그런데 설아 언니는 어디 있어요? 벌써 와 있다 하지 않았어요?”

“글쎄. 나도 설아가 제일 먼저 왔다는 얘기만 들었지, 아직 만나진 못해서.”

신경 쓰느라 수고했다는 말을 뒤늦게 덧붙이자, 소명이 헤벌쭉 웃었다가 집 안을 기웃거리고 표정이 심각해졌다. 집 정리에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고 각오했는데 어쩐지 떠났을 때보다 훨씬 단출해진 것 같다고 중얼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서는 가람 뒤에 소명이 따라붙었다.

“설아 언니가 따로 전언 남긴 건 없어요?”

“아직까진 듣지 못했어.”

“으음… 저나 온유 언니는 몰라도 설아 언니가 없으면 곤란하지 않아요? 장례 예식을 진행할 수 없잖아요. 화장의 술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제자가 설아 언니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스승님을 계속 저리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가람과 소명의 시선이 절로 시신이 눕혀진 옆 단칸방을 향했다. 먼저 도착했다던 설아가 보존의 술을 걸고 갔는지 시취는 없었지만, 이미 시작된 부패는 외관으로 드러날 터라 눈에 담는 게 썩 편치 않을 터였다. 가람이든 소명이든 장례를 차일피일 미루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소명이 입술을 모으고 가람에게 넌지시 물었다.

“설아 언니가 오지 않으면 언니가 대신하면 안 되나요? 주술에 가장 뛰어나진 않더라도, 언니가 스승님의 첫 제자였으니 자격은 충분할 것 같은데.”

“피치 못하면 그렇게 해야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은 없어서.”

변방 마을의 주술사 소세하가 들였던 네 제자 중 주술에 타고난 재능이 있는 이는 설아뿐이었다. 소세하처럼 좋은 스승에게서 교육받는다면 재능 없는 일반인도 하급 주술은 무리 없이 쓸 수 있을 터였으나, 주술의 위력은 개개인의 기량에 달려있었기에 미미한 수준에서 그쳤다. 그래서 효율의 이유로 주술사는 재능 없는 이를 제자로 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종종 의원을 직업으로 삼은 이들은 치유의 술을 의술의 보조 삼으려 주술사 스승을 찾기도 했지만, 그조차 흔한 편은 아니었다.

주술사의 장례는 다른 주술사가 치른다. 아마 그런 사유에서 비롯된 장례 전통일 거라고 가람은 생각했다. 불의 힘을 쓰는 화장의 술은 복잡하진 않았지만, 큰 화력을 요구하는 주술이었다. 보편적으로 죽은 주술사와 가장 가까웠던 주술사가 화장의 술을 주도하여 장례를 치렀다. 친우, 제자, 같은 스승 아래 배웠던 동기, 드물게는 스승, 또는 주술의 힘을 타고난 가족.

장례 의식은 주술사가 주술사로서 받을 수 있는 마지막 예우였다. 가람은 애매한 자신감으로 시도했다가 전 스승의 장례에 먹칠하는 건 피하고 싶었다.

“때가 되면 나타나겠지. 우리 중 스승님을 제일 잘 따르던 이가 설아였는데, 장례에 늦는다는 게 말이나 되겠니.”

그러겠죠. 소명은 반발하지 않고 순순히 동의했다. 다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가 문제인데…. 소명의 중얼거림은 다른 이의 목소리를 통해 형태를 찾았다.

“장례 의식은 언제 치르기로 했나요?”

차가우리만치 차분한 음성만으로 가람과 소명은 돌아보기도 전에 누가 도착했는지 알 수 있었다. 초가집 입구에 단정하게 차려입은 검은색 단발머리의 미인이 서 있었다. 어서 오세요, 온유 언니. 소명의 환대에 고개를 작게 끄덕여 화답하고 온유가 맏제자인 가람에게로 눈을 돌렸다. 날카로운 시선을 받아내며 가람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직은 몰라. 설아가 화장의 술을 주도해야 하는데,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거든.”

온유가 예쁜 얼굴을 찌푸렸다. 설아와 온유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지만, 이제 스승도 없이 둘 사이를 중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람은 조금 골이 아팠다. 온유가 뭐라 하기 전, 가람이 선수를 쳤다.

“이곳에 먼저 왔다는 건 확실하니, 곧 오겠지. 들어와서 좀 쉬고 있어. 우리 중 네가 제일 멀리서 왔으니 피곤하겠다.”

잠시 문간에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 있다가, 온유는 마지못해 신을 벗고 초가집에 들어섰다. 소명이 눈치 빠르게 얇은 방석을 가져와 마루에 깔았다. 넓지 않은 마루에 앉아 셋은 얼마간 침묵을 지켰다.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전에 말문을 튼 건 가람이었다.

“둘 다 잘 있었어? 소명이는 본격적으로 상단 일에 뛰어들었다고 했고, 온유는 뭐 하면서 지내?”

소명이 가람과 온유를 한 번씩 보고 온유를 향해 눈웃음 지었다. 온유부터 얘기하라는 뜻이었다. 대화를 반기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단칼에 끊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온유는 성실하게 답했다.

“마을 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평민 아이들만 받다 보니 돈을 많이 벌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생활하기엔 문제없고요.”

“나도 일해! 스승님하고 언니한테 배운 약초 거래로 시작했다가, 지금은 주술 공예품 유통을 담당하고 있어요. 주술사 중에선 그런 소소한 일거리는 받는 사람이 없고, 일반인 중에선 주술에 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없으니 은근히 인재가 부족했나 보더라고요.”

그야말로 제가 적격이었고 좋은 틈새시장을 차지했다며 소명이 활짝 웃었다. 그 외에도 깜짝 소식이 있지만 나중에 얘기해주겠다고 미루며 소명이 가람을 쳐다보았다.

“언니는요? 가족이 운영하는 약방으로 돌아갔다면서요?”

가람네 약방이 최상급 품질의 약초만 다룬다는 소문이 자자하다면서 소명이 기분 좋게 너스레를 떨자, 가람이 머쓱하게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부모님 밑에서 배울 게 많지만, 그래도 내 한몫은 보태고 있지. 다들 잘 지낸 것 같아서 다행이네. 설아도 주술사 의뢰를 받으며 괜찮게 지내고 있던 것 같고.”

유일하게 자리에 없는 제자 설아의 이야기가 나오자 온유가 잠깐 문으로 눈길을 돌렸다. 오래 기다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얼굴에 훤히 드러나 보였지만, 가람을 재촉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입 밖으로 불만을 제기하진 않았다.

다시 찾아온 침묵 속에서 가람과 소명은 티 나지 않게 시선을 교환했다. 아직 밖에는 해가 중천이라 하루가 끝나기엔 멀었으니, 한시라도 빨리 설아가 돌아오길 바라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초가집 문밖에 인기척이 난 건 해가 떨어지고도 한참은 지난 한밤중이었다. 소명은 피곤하다며 자러 들어갔고, 가람과 온유만 고요함 속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문이 작게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곧이어 머리에 너울을 쓴 늘씬하고 호리호리한 여성이 안으로 들어섰다. 가람이 그를 맞이하려고 일어섰지만, 단정하게 앉아 있는 온유가 그를 쏘아붙이는 게 빨랐다.

“설아, 무얼 하다 이제 와요?”

설아가 너울을 벗었다. 흔치 않은 연한 갈색 머리카락과 옅은 청보라색 눈동자, 그리고 고국(高国)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이색적인 얼굴이 드러났다. 얼음장 같은 분위기에도 설아의 하얀 얼굴은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찾을 게 있었어. 할 얘기가 있는데, 소명은 아직 안 왔어?”

“자러 들어갔어.”

더 큰 불화로 번지기 전에 가람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설아의 표정엔 미미한 조급함이, 온유의 표정엔 짜증이 깃들었다. 기껏 말려놓은 다툼에 불씨를 붙이고 싶지는 않았으나, 가람의 판단에도 설아가 해명할 필요는 있었기에 잠깐 시차를 두고 물었다.

“어디를 다녀온 거야? 쪽지 하나 남기지 않고.”

추궁의 어조는 아니었지만, 질책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설아는 눈치 없진 않았다. 사과의 뜻으로 설아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경황이 없어서 전언을 남길 생각을 하지 못했어. 미안해.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릴지 몰랐어. 하지만 할 말이 있다는 건 정말인데, 혹시 소명을 깨워줄 순 없을까?”

가람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 턱짓으로 깜깜해진 바깥을 가리켰다. 정확히 모르긴 해도 아마 축시에 가까워지고 있을 터였다. 누군가를 깨우기에 미안한 시간이기도 했고, 아침 해가 밝자마자 해야 할 일도 많았다. 가람이 멀뚱히 서 있는 설아에게 이를 상기시켰다.

“아침 일찍 장례를 치르려면 우리도 자야지. 특히 설아, 너는 화장의 술을 주도해야 하잖아. 최상까진 아니어도 최선의 상태로 임하는 게 스승님께 예의가 아니겠어?”

예상대로 스승을 언급하는 순간 설아의 얼굴에 갈등이 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설아는 말없이 수긍하고 물러섰다. 온유는 이미 일어서서 방석을 정리하고 있었다. 가람이 손뼉을 짝 치고 마무리했다.

“그럼 다들 자러 가자. 방은 예전에 쓰던 방 그대로 쓰면 될 거고. 설아, 네 얘기는 장례식이 다 끝나고 들어줄게.”

더 말 나누지 않고 설아와 온유는 가람의 지시대로 방으로 사라졌다. 그나마 둘이 각방을 쓰고 있어서 아침까지 분쟁이 또 생길 일은 없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가람이 깊게 숨을 뱉었다. 소명과 같이 쓰는 방으로 향하려던 가람의 시선이 스승의 시신이 있는 단칸방으로 향했다. 복잡한 감정이 솟아올라 가람이 눈을 감았다. 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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