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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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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년 째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자면 역시 지겨워진다.

주경태는 팔짱을 끼곤 의자 등받이에 무게를 실었다. 블루라이트 안경을 콧잔등에 걸친 채 두 눈을 가볍게 감아본다. 컴퓨터 모니터를 볼 때만 쓰는 안경이다. 

최근의 모의고사 문제를 머릿속에 로딩했다. 괴랄한 경우의 수를 끔찍한 상황 판단력으로 상쇄해나가는 기가 막힌 킬러 문제를 되짚는다. 실상 이 문제까지 도달하는 인원은 적고 또 적을 것이었으므로, 그는 잠시 자신의 강의가 허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문제에서든 얻어낼 수 있는 요령은 있다. 만일 그것이 없다 해도, 적어도 출제자의 주된 기조 정도는 파악할 수 있으리라.

그것이 학원 강사인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문제 풀이의 요령을 밝혀 귀여운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 말이다. 그래,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좀 더 보람을 가져 보자.

그런 언제나의 다짐을 하고 눈을 뜨니 교무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재잘대는 여자아이들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오다가, 닫힌 문에 가로막혀 조용해졌다.

"주쌤~"

우연찮게 모두가 강의를 나간 교무실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던 경태였다. 눈을 가늘게 뜨곤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본다. 화학 강사인 임은도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아쉬운 얼굴의 경태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은도. 한 손에 든 강의 파일엔 현란한 색의 스티커가 어지럽게 덕지덕지 붙어있다. 그 파일이 제 바로 옆의 책상에 놓이는 것까지 보고 나서, 경태는 시선을 들어 동료 강사를 올려다 본다.

"여자애들이랑 사이가 아주 좋으셔."

"네일 어디서 했냐고 물어보더라고~"

그러며 양 손등을 대뜸 내미는 은도다. 오늘의 네일은 더운 여름에 어울리는 주황색. 바탕이 되는 매니큐어 위에 큐빅인지 뭔지 모를 잡다한 인조 보석들이 우둘투둘 박혀 있다. 왠지 눈이 부셔서 경태는 슬쩍 시선을 돌리고 만다.

"수능 끝나면 이 임쌤이 직접 해 주겠다고 했죠."

반짝이는 네일아트의 제작자는 다름 아닌 임은도 자신.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취미다, 라고 경태는 생각한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변하지 않는 감상이다.

은도는 의자를 꺼내 제 책상 앞에 앉는다. 얼음이 다 녹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입 홀짝이더니, 맛이 없는 듯 미간을 찌푸린다.

"주쌤도 손톱 관리 잘 하는 것 같던데. 엄청 탐나~"

"그럼, 하루종일 분필 잡고 있어야 되는데 손톱이 길면 쓰냐."

길고 뾰족한 손톱으로도 잘만 판서를 하는 은도 쪽이 별종이리라.

"손에 하이라이트가 있어야 애들이 판서를 잘 따라오지 않겠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대꾸 없이 턱수염을 만지작대고 있으니 돌연 한쪽 손을 낚아채였다. 한 손을 두 손으로 주물대는 감각이 생경하지만 나쁘지는 않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자니, 몇 달 전의 헌팅 실패가 떠올라 짐짓 우울해진다.

"와, 손톱 예쁜 것 좀 봐. 주쌤, 월요일에 시간 돼요?"

"헬스 가야 돼."

"아이, 헬스 하루 빠진다고 죽나."

"돈이 아까워."

"한 달에 얼만데요?"

"반 년에 오십."

"그럼 하루에 삼천원도 안 되네."

이상하게 단순 계산이 빠른 인간이다. 과학이 아니라 수학을 가르쳐야 했던 게 아닐까. 경태는 이미 여러 번 떠올랐던 의문을 오늘도 속으로 되짚는다.

"삼천원 드릴 테니깐 네일 하게 해 줘요~"

"월요일에?"

"제 집에서."

"너 어디 살더라?"

"저, 분당. 서현 쪽."

경태가 살고 있는 양재에서는 삼십 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다.

은근슬쩍 시선을 올려 은도의 얼굴을 살핀다. 사람 좋게 처진 두 눈은 리트리버와 꼭 닮아 있다. 그 앞에 놓인 둥그런 금속 테 안경은 밝은 금색. 뒷목을 덮는 기장의 곱슬머리는 하단 5cm 만이 베이지색으로 물들어 있다. 충동적으로 했던 염색의 잔재임을 경태는 알고 있었다.

그 나잇대 남자 치고는 제법 관리를 하는 편이다. 아니, 손톱까지 관리하니 말 다 했다. 곱슬거리는 머리를 고정하기 위한 핀도, 손톱 위에 올린 장식도, 빛을 찬란하게 산란해선 과하게 화려하다는 느낌을 주고 만다. 하지만 그것이 은도 자신과 섞이지 않는 것은 또 아니다. 오히려 어울린다는 감상을 갖게 만들어버려서. 패션의 지향점이 그와는 정반대인 경태로서는 대단한 미적 감각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솔직히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의 눈으로도 매력적인 치장이다. 경태는 최근 인정하고야 말았다.

남의 집에서 네일이라.

뭐, 하루만이라면, 눈요기라고 생각하면......

건전하지 못한 이유다. 그런 자각은 있다. 그렇지만 속내를 내비치지 않고 교류하며 이득을 얻는 게 어른 아니겠는가.

월요일 아침을 먹고 분당으로 내려가겠다고 하니 은도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양쪽 귀에 매달린 귀걸이가 진자처럼 흔들리는 모습을, 경태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어지간히 꾸미는 걸 좋아하나 보네."

화사한 색감으로 꾸며진 독신자용 아파트의 내부를 보고 저절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치수가 큰 신발만 숨긴다면 여대생의 자취방이라고 해도 믿기겠다. 편한 옷차림의 집주인은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낮은 원목 테이블 앞에 앉아선 경태를 맞이했다.

거실 한쪽에 넓게 뚫려 있는 창문 밖에선 비가 한창 내리고 있다. 벌써 장마철이 되었나, 하고 운전하는 내내 운치에 빠져 있던 경태였다.

테이블 위에 늘어선 잡다한 네일아트 도구를 훑어 본다. 경태가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도구는 매니큐어 뿐이 없었다. 그는 얌전히 은도의 맞은 편에 앉는다. 곧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을 경태 쪽으로 밀어주는 은도.

"응? 이게 뭐야."

"커피 드로잉 말차 프라푸치노~"

단어 각각의 뜻은 알 수 있었지만 한 군데에 밀어넣어 조합하니 영 의미를 읽어내기 어려웠다.

"프라푸치노? 대낮부터 거하다."

"별 세 개 짜리라서 시켰죠."

"임쌤 건?"

"피치 레몬 블렌디드~"

"참 다양하게도 먹네."

"이거 드실래요?"

"아니, 난 커피가 좋아."

별 것도 아닌 잡담을 마치고 은도는 곧장 경태의 손을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왼손 중지 안쪽에 박힌 굳은살이 흘긋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한다. 경태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보편적으로 '상당하다'라고 받아들여질 만한 양의 공부를 한 건 확실한데, 어째서 손가락에 그 흔적은 남지 않는지 궁금해 했던 기억이 있다. 아직까지도 까닭을 알 수 없지만.

키친타월로 손톱을 닦는가 싶더니 투명한 매니큐어를 치덕치덕 바른다. 비전문가인 경태도 이게 예행 작업이라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

"무슨 색으로 해 줄 거야?"

기본적으로 오마카세였지만 이건 한 번 묻고 싶었다.

"비~밀."

아무튼 자길 믿고 맡기라는 표정을 짓기에, 경태는 커피 어쩌고 프라푸치노를 한 모금 마시기만 한다. 은은하게 녹차 향이 나면서도 달콤하다. 그의 취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은도의 몫인 과일 스무디는 더더욱 취향이 아니다.

젤에 반짝이는 가루를 섞고. 그걸 손톱에 발라선 조그만 선탠 기기로 네일을 구워낸다. 그런 작업이 몇 번 반복됐다. 시시한 대화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은도는 꽤나 진지한 얼굴로 브러쉬를 움직이고 있었다. 학원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모습. 섬세한 붓놀림에 빠져 얼음이 갈린 음료가 녹아가는 것도 잊은 모양이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경태의 손톱에만 집중하고 있다. 곱슬머리에 덮인 정수리가 보일랑 말랑. 나이가 나이인지라 흰머리 몇 가닥이 엿보인다. 문득 다른 손을 뻗어 뽑아내고 싶다는 이상한 충동이 일었지만, 방해가 될 것 같아 관두었다.

"여자친구한테 해 주면 좋아하겠네."

말하고 나서야 무언가 묘하다는 느낌을 받은 경태였다. 다행스럽게도 은도는 별 생각이 없는 듯 눈웃음치며 헤실거릴 뿐이다.

"전 여친한텐 좀 해 줬죠. 엄청 좋아하더라고."

단어 선정을 보니 이미 헤어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애인과 헤어졌다며 우는 소리를 하던 그를 달랬던 기억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현재의 연애 사업은 어떠신가?"

"아~아, 잘 안 돼요. 학원 선생이라 마이너스. 예쁘게 꾸미고 다녀서 또 마이너스."

'예쁘게' 앞에는 '남자 답지 못하게'가 생략되었으리라.

그럼 반경을 넓혀서 남자라도 만나보지 그래... 라는 질 나쁜 농담은 뱃가죽 안으로 꿀꺽 삼켰다.

"하긴, 당장 우리 학원만 해도 연애 중인 사람이 거의 없지 않냐."

"주쌤도 솔로, 나도 솔로, 그리고...... 유쌤도 그렇죠?"

같은 교무실을 쓰는 생물 강사인 유탐정의 이야기였다. 경태는 그에게 수작을 걸다가 포기한 전적이 있다. 삼십 년 된 그의 직감이 말하길 유쌤 역시 호모라는데, 제가 취향이 아닌 건지 아님 따로 애인이 있는 건지 완고하게도 튕겨나오고 말았다.

물론 그건 은도에게 털어놓을 만한 대화거리가 딱히 아니었다. 애당초 그가 유탐정에게 걸었던 수작질을 '수작질' 그 자체로 보았던 사람이 있기나 했을까. 그의 직감이 또 말하길, 있을 리 없단다.

에나멜 층에 닿았던 매니큐어의 차가운 감촉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손톱을 한 겹 한 겹 착실하게 덮어가고 있다는 방증이겠지. 은도는 이제 작은 사이즈의 인조 보석을 집게로 집어선 네일 위에 부착하고 있다.

"유쌤도 솔로 아냐? 하여간 학원 강사란 팍팍...... ......아, 왜 아직도 손톱이 투명해?"

그리 물으니 은도는 키득키득 웃는 것이다. 지금은 귀걸이가 흔들리지 않는다. 귓불의 작은 구멍만이 시야에 들어온다.

"다 칠하고 알려드릴게."

"이거이거, 네일아트가 아니라 손톱강화제 같은 거 아냐?"

"주쌤 손톱을 강화해서 어디에 써요~"

"칠판이라도 긁지 뭐."

"에이, 그런 거 아니에요."

잠시 경태를 바라보던 은도는 다시 고개를 숙여 네일아트에 몰두한다. 지금 보니 중지와 소지의 네일에는 글리터가 들어가 있다. 베이스가 투명해서 잘 보이지 않았을 뿐.

은도의 치렁치렁한 주황색 네일은 아직도 열 손가락에서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하지만 경태는 두 손 전부에 저런 불편한 장식을 하고 싶진 않았으므로, 일단 왼손 하나만 내어주겠다는 조건을 걸어두었다.

"근데, 주쌤은 결혼 안 해요?"

마흔 중반을 쾌속 주행 중인 경태다. 이젠 어느 모임을 나가도 듣는 익숙한 질문. 이런 질문에서 자유로운 모임이란, 자신과 같은 동성연애자 커뮤니티 밖에 떠오르지 않는 그였다.

"음, 솔직히 이젠 늦었다고 생각해. 반 포기 상태."

사실 그렇게 늦은 나이도 아니다만.

"그런데 그렇게 관리하고 다니시는 거예요?"

"자기 만족이지, 뭘."

자기 만족이라는 대답에 은도는 대충 납득한 듯 보였다. 둥근 안경 너머의 처진 두 눈이 멋쩍은 모양으로 몇 번 껌뻑인다.

이후 두세 번의 선탠을 거쳐 왼손 다섯 손가락의 네일아트가 완성되었다. 글리터와 큐빅이 조화롭게 얽혀있는 건 경태도 잘 알 수 있었지만, 여전히 그 베이스는 투명하다. 이래서야 잘 보지 않으면 네일을 했다는 것도 모르겠다 싶었다.

"임쌤? 설명."

"아이, 성격도 급하긴."

설명은 않고 비실비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화장실에 발을 들이미는가 싶더니, 곧 작은 바가지에 수돗물을 담아 가져오는 것이다.

"왼손, 넣어보세요."

군말 없이 지시를 따랐다.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운 물이다. 멈추지 않고 왼손을 바가지 안에 푹 담근 결과.

"......오오."

방금까지만 해도 투명했던 네일이 순식간에 검푸르게 물들었다. 손을 빼내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니, 이젠 서서히 투명해진다.

"짜잔~ 이게 바로, 온도 변화 네일."

"나 참, 재미있네."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왼손의 네일을 이리저리 살피는 경태.

"어때요? 오른손도 하실래요? 주쌤 손톱, 역시 예뻐서 네일 하는 맛이 있네."

"오른손은 안 돼. 판서하기 어려울 것 같아."

"전 잘만 하잖아요~"

"그건 임쌤이 진화한 거고......"

은도는 한동안 어질러져 있던 네일아트 도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손을 빌려줄까 하다가, 붓을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어 단념하는 경태였다.

"그 네일, 비밀이 하나 더 있는데......"

"비밀? 무슨?"

"히히히,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될 거예요."

캐묻고 싶었지만 아무리 들볶아도 알려주지 않을 게 뻔했으므로, 경태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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