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의 형태
깜깜한 밤.
새카만 하늘에 작은 별만이 총총히 빛나는 은하수의 밤, 마법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찬란한 별빛이 부드럽게 내려와 다정한 손길로 그의 온몸을 감싸는 듯했다. 별은 모든 마법의 근원이자 모든 마법사들의 어버이. 마법사로 태어난 이는 자연히 밤하늘의 모든 별을 경외하고, 사랑한다. 마법사치고 유독 냉랭하다는 소리를 듣는 그라도 그 이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별을 보는 마법사의 물빛 눈동자가 따스하게 물결치며 반짝였다.
“뭐해? 바람이 찬데.”
“….”
그 때, 발코니 문이 열리며 키가 크고 다부진 청년이 나타나 물었다. …마법사는 잠시 생각을 멈추었다가, 그를 힐끗 바라보고,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일언반구 없이 무시했을 테지만 그는, 청년은 마법사가 쉬 무시할 수 없는 단 한 명이었다.
“별.”
“아아.”
짧은 감탄사를 뱉은 청년이 자연스레 마법사의 곁에 와 섰다. 밤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정리한 그가 마법사를 바라보며 묻는다.
“그래서, 어떤 게 그… 그거야?”
그거?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마법사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눈썹 한 쪽만을 슬쩍 들어올리자, 뒷머리를 몇 번 긁적인 청년이 막 떠올랐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그, 왜, 어, 아 맞다. 수호성. 네 수호성.”
“오르토스.”
“어어 맞아 그거. 겨울의 별이랬나? 지금 겨울이니까 잘 보여야 하는 거 맞지?”
“….”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마법사의 하얀 손 끝이 까만 밤 하늘 서쪽을 가리켰다. 둥근 천공의 서녘으로, 무수히 빛나는 별무리의 한 가운데 제왕의 별 아라벨이 있다. 그리고 그의 동서남북을 지키고 있는 것이 각각 봄의 별, 가을의 별, 여름의 별, 겨울의 별.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눈부시게 빛나는 아라벨의 북쪽, 겨울의 별 오르토스를 정확하게 짚었다.
…솔직히 말해, 차이를 모르겠다. 마법사가 아닌 청년에게 별은 다 똑같은 별이었다. 그럼에도 청년은 구태여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 적당히 듣기에 좋은 말로 둘러대었다.
“역시 잘 보이네. 멋있는 별인데.”
“….”
그 순간 청년은 보았다. 서릿발처럼 차갑기만 하던 마법사의 얼굴에 실낱같은 미소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별을 향한 칭찬이 그리도 기꺼웠던 것일까. 스스로를 향한 칭찬보다 더 기쁠 정도로.
하면 너는 언젠가 내게도 그런 표정을 지어줄까. 청년은 고민한다. 별을 향한 애정에 웃는 것처럼 언젠가 나를 향한 애정에도 웃어줄까. 네가 내게 가진 애정은 어떤 형태를 하고 있을까. 친애일까, 성애일까, 순애일까.
답은, …알 수 없다. 아마 마법사 자신도 모를 것이다. 그러니 청년은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그의 단 하나 뿐인 마법사가 언젠가 답을 가지고 그를 찾아오기를.
해가 진다.
하늘의 가장 큰 광명이 서쪽으로 넘어가며 하늘이 황금빛과 붉은빛으로 제각각 물들었다. 마법사, 타르가옌은 그 아래를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곧이어 찾아올 까만 밤하늘을 기다리며. 저녁 하늘의 끄트머리 가장 먼저 나타날 금성과 망루의 별을 기다리며….
“으이구, 이 느림보.”
“….”
하늘을 보며 세월아 네월아 걷고 있던 마법사의 어깨에 누군가 팔을 걸쳤다. 팔의 주인은, 보지 않아도 안다. 매끈하던 흰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불퉁해진 목소리로 마법사가 말했다.
“느리지 않았어.”
“느렸어. 내가 한참 앞에 있었다고.”
“…네가 빠른 거야.”
“뭐, 내가 좀 그렇긴 하지.”
…짜증나.
마법사가 그, 청년, 데이를 쏘아보았다. 마주친 금색 눈동자는 환하게 웃고 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한껏 미소 짓느라 드러난 하얀 이. 잘생긴 얼굴은 노을빛에 물들어 아스라이 빛나고, 반짝이는 눈동자에 비친….
눈동자에 비친…. 노을에 비친….
아.
순간 마법사는 전율한다. 그도 몰랐던 질문의, 그도 모르는 대답을 찾은 것만 같은 느낌에. 아주 오래되고 해묵은 방정식의 해결법을 찾아낸 느낌에. 그러나 아직도 그것을… 손으로 잡기엔 너무도 멀고 아득한 그것을, 어렴풋이 깨달아버린 느낌에.
너는 내게 어떤 사람일까? 나는 네게 어떤 사람일까.
나는 너를 어떤 마음으로, 너는 나를 어떤 마음으로….
잠잠하던 머릿속에 폭풍이 몰려든다. 콰아아, 어디선가 회오리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것은, 이토록 혼란스러운 것은 처음이다. 마법사가 아는 애정이란 ―그라고 해서 어찌 애정의 형태를 모르겠는가― 언제나 고요하고 다정한 것이었다. 그래, 모든 것을 포용하고 감싸안는 밤하늘의 고요함처럼. 언제나 그를 내려보고 축복해주는 어버이 별의 다정함처럼.
그러나 이토록 요란한 것을, 마구잡이로 날뛰며 무엇이든 집어삼키려고 요동치는 것을, 애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감히 애정이라고 불러도 되는가?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 또한 애정의 한 형태임을 깨닫는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애정인지는 알 수 없으나. 노을 아래 붉은빛과 황금빛을 함께 머금은 청년을 보며, 아, 찬란함이란 무엇이었는지― 세상에 진정 빛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
“어이, 리옌?”
“….”
마법사는 말이 없다. 그저 한 걸음, 딱 한 걸음만 내디딜 뿐이다. 그가 한 걸음 나아가자 청년이 바로 그의 앞에 있었다. 서로의 숨결이 닿고 호흡이 닿는 거리에. 팔을 뻗으면 모든 것을 그러쥘 수 있는 자리에.
그래서 팔을 뻗었다. 멈춰있는 청년을 끌어안고 가만히 숨을 내쉰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것을 끌어안을 수 있는 것처럼. 이 뜻 모를 감정까지 끌어안을 수 있을 것처럼.
자신을 향한 청년의 의문도 저 한 쪽으로 미루어 놓고, 이 감정의 끝을 확인하기 위해. 이 애정의 형태를 손으로 쥐어보기 위해.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히….
그리 해 답을 깨달았는가? 아니, 마법사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단지 그의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숨소리, 거칠게 느껴지는 들숨과 날숨, 들썩이는 가슴팍만이 마법사의 세상을 흔들었다. 세상이, 흔들렸다. 그저 그것만으로.
그래, 마법사는 깨닫는다. 대답을 알게 된 것은 아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다만 한 가지. 제 아무리 위대한 마법사라도 손 쓸 수 없는 마음이 있다는 것. 그런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제 안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이제 자신은, 그것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
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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