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연성

nn회차(3)

2020.08.14

그 다음부터 엔리카의 아지트는 둘의 아지트가 되었다. 둘은 힘을 합쳐 물건들을 세우고 옮겼다. 앉을 자리가 좀 더 만들어지자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그리고 공간이 또 하나 있어서 기계장치가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엔리카는 둘러보다가 표면의 이끼를 쓸었고 점멸하는 전등을 발견하였다.

“오래된 기기인가봐요. 아직 살아있어요. 한번 조작해 볼 수 있겠는데요?”

스캐너다운 흥미였고 새로운 장난감을 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어디가 전원을 켜는 버튼일지 잔뜩 살펴보던 엔리카를 레이피스가 만류하였다. 호기심에 빠지면 너무 몰입하게 되는 것이 스캐너의 특성이기에 멈출 이가 필요했다. 엔리카는 순순히 물러나며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포드가 때마침 새로운 임무를 전달하였다. 간만의 휴식이 끝난 것이 안타까웠다.

“어쩔 수 없죠. 이곳은 다음에 다시 오기로 해요.”

엔리카는 그리 말하며 레이피스를 먼저 내보냈다. 역시 드나들기에 비좁아서 레이피스를 밀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엔리카는 가고 싶지 않은 듯 발걸음을 슬슬 느리게 했다.

“엔리카!”

“잠시만, 딱 삼분만요.”

레이피스는 별수 없다는 듯이 웃고 벽에 기대어서 기다렸다. 엔리카도 내부의 벽에 기대었다. 엔리카의 표정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레이피스가 보지 못 하는 사이 엔리카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닫았다가 간신히 떼었다. 음울한 중얼거림이 흘렀다.

“미안해요, 레이피스.”

그리고 잠시 그렇게 있었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돌아와서 틈으로 빠져나왔다. 중얼거림이나 음울함은 아지트에만 남겨둔 듯 티없이 밝기만 했다.

 

*

 

엔리카는 이 장소를 좋아했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곧잘 콘크리트 벽에 몸을 기대어 앉아 가만히 있곤 했다. 서늘하고 고요한 그곳은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었다. 벙커의 자신의 방에서도 레지스탕스의 숙소에서도 그런 안정감을 찾지 못해 엔리카는 이곳을 찾곤 했다. 아무도 없는 것이 좋았다. 그건 감시당하는 자의 본능과도 같은 행위였다. 타인들의 눈길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

그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이번의 엔리카는 운이 좋게 찾아 내었지만 다음번에도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한다. 엔리카는 레이피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친절한 이이고, 엔리카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엔리카는 그에게 이 장소를 좋아하고 아끼는 기색을 잔뜩 드러내었다.

자신이 언젠가 ‘살해’ 당하더라도, 기억이 깔끔하게 폐기되더라도, 레이피스는 언젠가 엔리카를 다시 이곳으로 안내해줄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엔리카카 아니더라도, 그들이 재회한다면, 다시 사랑을 나눈다면, 언젠가는.

임무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서로의 손등이 스쳤다. 레이피스가 엔리카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안드로이드 특유의 작은 진동이 전해졌다. 레이피스는 웃고 있을 것이다. 엔리카는 손을 맞잡곤 바이저 아래로 눈을 감았다. 레이피스의 애정을 이용하게 되는 것이 더없이 미안했다.

 

*

 

레이피스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람이었으면 레이피스의 상태를 보고 극도의 공황상태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피스는 안드로이드였고, 같은 안드로이드들은 시스템에 오류가 생겼거나, 바이러스에 걸렸다고 생각해주었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사람들의 추측이 더 정확했다. 그러나 레이피스에게는 상태에 대한 추측이나, 이해 도움 따위는 원치 않았다. 그 어느누구의 간섭없이 혼자 가라앉고 싶었다.

 

혼자서 생각을 다행하게도 이곳은 레이피스의 방이었고 다른 이는 아무도 없었다. 레이피스는 그 자리에서 서서히 주저앉아서 귀를 막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외부와 이어지는 감각을 전부 차단해버리고 싶었다. 레이피스가 그러고 있자 포드가 말했다.

“보고 : 사령부에서 메일 송신. 해당 메일을......”

“닥쳐, 포드.”

“메일에 의하면......”

“닥치라고 했어.”

“권고 : 명령을 지체없이......”

“포드, 내가 다시 허용할 때까지 어떤 발언도 금지한다.”

레이피스가 짓씹듯 내뱉자 그제야 포드는 소리를 내는 것을 멈추었다. 침묵이 돌았다. 레이피스는 웅크려 앉았고, 고요 속에서 침잠했다. 절망이 그를 휘감았고, 레이피스는 그러도록 내버려두었다. 그 속에서 간신히 하나의 의문을 토해내었다.

“엔리카...... 대체 어째서요?”

메일의 내용은 엔리카를 처형하라는 명령이었다. 엔리카가 위험수위가 허용치를 넘었다. 레이피스는 속으로 되 뇌였다. 엔리카, 나와 약속했잖아요. 약속했었잖아요.

 

*

 

금세라도 꺾어질 것 같이 비틀거리는 걸음걸이였다. 한 손에는 칼을 헐겁게 쥐고 질질 늘어뜨리고 있었다. 돌과 칼끝이 마찰하며 끔찍한 소리를 울렸다. 그러나 레이피스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한걸음, 한걸음을 옮겼다.

엔리카는 먼발치서부터 레이피스를 보았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가, 무슨 일이냐고 달려가서 물어보려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섰다. 근처의 동물들이 뒷걸음질치다가 달아났다. 그 정도로 심상치 않은 기세였다. 그러나 석궁에는 손도 가져가 대지 않으며 느리게 발을 떼는 것이 도망을 권유하는 모습 같기도 했다. 그러나 엔리카는 눈을 잠시 감으며 기다렸다.

괜찮은 삶이었다. S형으로서 수많은 정보를 파헤쳤고, 호기심을 충족시켰다. 그 결과로 항상 눈치를 보아야 했고 많은 순간이 위태로웠으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삶을 꽤 연장하였다. 행운이 찾아와서 준비도 해놓고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말미에는 과분한 행복이 주어지기도 했다. 그 행복은 레이피스 덕분이었는데......

엔리카는 다시 눈을 떴다. 레이피스가 지척에 있었다. 레이피스는 몇 걸음 앞에 섰다. 검의 공격궤도 안이었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이기도 했다. 레이피스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를 그렇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래도 알아야했다고 생각하며 멈추지 않았던 것은 자신이 이기적인 탓일까?

“엔리카.”

레이피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처형이 아니라면 그가 그런 표정을 지을 이유가 없으리라. 레이피스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노련하게 칼을 갈무리하는 배틀러의 태도는 아니였다. 그러나 기어코 누구 하나를 베어버릴, 불안정한 감정이 날뛰는 모습이었다. 올 것이 왔다.

“ ...... 요르하게 대해 알아봤어요?”

레이피스의 목소리는 허망했다. 엔리카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영영 묻어줄 수 없는 사실들이니까요.”

엔리카는 메모리에 떠오르는 죄책감을 지워냈다. 지금 그에게 미안해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일은 전부 저질러놓고선. 그간 그를 속여놓고선. 되물릴 기회가 있었음에도 택하지 않아놓고선.

레이피스는 자신을 사랑했고, 그가 자신을 원망하기에는 지금 냉랭한 태도가 나으리라. 그러면 어쩌면 레이피스는 집행을 덜 고통스러워할지도 모른다.

“단지 그것뿐이었어요? 당신에게 나는...... 나는 당신을......”

아, 엔리카는 차곡차곡 정돈해둔 메모리가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모든게 뒤집어지고 제 마음이 쏟아졌다.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잘못을 하나하나 고백하고 싶다. 나도 당신이 소중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수많은 거짓말을 했지만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과 서로가 나눈 애정만은 거짓이 아니라고 털어놓고 싶다.

그러나 그래서 무엇을 얻고 싶어? 죽기 직전의 죄책감 해소? 너무 늦었잖아, 엔리카.

“나는 당신이 나와 약속한 줄 알았어요.”

레이피스에게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엔리카는 그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눈을 돌리지 않았다. 눈물이 자신의 심장을 도려내도록 내버려두었다. 우리에게는 심장이 없지만, 인간이 심장이라고 명명했던 감정기관은 우리에게도 있다고, 엔리카는 확신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또한 서로를 괴롭게 만들어버릴 수 있다.

레이피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다시 말했다.

“그때의 약속은 무엇이었나요?”

엔리카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와 약속한 순간에 엔리카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당장 처형당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엔리카에게 의심을 틔워놓기에는 충분했다. 더 파고드는 것을 포기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레이피스의 제안에 달라붙었다. 그때의 레이피스의 호소는, 모든 것을 잊게 만들어서, 그래서......

“거짓이었어요.”

엔리카는 답했다. 야멸차게. 자신이 전부 잘못했으니까.

“그걸 믿었나요?”

다음 순간, 검은 엔리카를 꿰뚫었다. 엔리카의 눈이 크게 뜨이고 동공이 확장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가늠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순간적인 반응이었을 뿐이다. 상황을 예측했고, 받아들였다. 레이피스가 자신을 찔렀다, 제거를 위해서.

파손을 알리는 메시지가 정신없이 뜨고 시야가 붉어졌다. 신경들을 통해 커다란 고통이 밀려왔으나 시스템은 과부화에 시의적절하게 망가졌다. 운동 제어 기능이 정지를 선언했고 몸의 모든 곳이 통제를 벗어났다. 중요한 곳을 노려 일격에 무너뜨리는 것은 E타입의 전투 습관이었다. 엔리카는 허물어졌고, 아직 말을 듣는 눈만을 굴려 간신히 레이피스를 올려다보았다. 레이피스는 애원하는 것 같았다. 무엇이라고 띄엄띄엄 말하며 입을 벌리는데, 제 안의 오류 메시지가 너무 시끄러워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안타까웠다. 무엇이라도 듣고 싶은데. 만약 자신을 저주하더라도, 그 말을 받아주고 싶은데.

레이피스는 칼을 뽑아내고 다시 들었다.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복잡한 메시지도 끝나고 이제는 삐- 하는 이명만이 끝을 알리고 있었다. 세상이 느려지고 흑백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렇기에 레이피스의 표정만은 섬세하게 볼 수 있었다. 그는 괴로움에 표정을 일그러지고 있었다. 칼이 천천히, 하지만 실제로는 아주 빠르게 내리쳤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

 

레이피스는 허망하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엔리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데이터는 확실하게 파괴되었다. 레이피스 자신이 직접 찔러서 처분했다.

이리저리 구멍이 나 있었으나, 레이피스는 그 모습에서 누운채 웃어보이던 엔리카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둘만의 작은 아지트에서의 일이었다. 엔리카는 매트리스에서 잠에 든 체를 하며 고르게 누워있었지만 사실은 깨어 있다는 것이 다 보였다. 레이피스는 다가가 이마에서 입을 맞추었고 엔리카가 간지럽다고 웃었다. 그렇게 휘어지는 눈은 아름다웠었다.

그때의 놀음은 다 무엇이었단 말인가.

레이피스는 그저 앉아서 천천히 생각했다. 임무......를 완료했으니 사령부에 연락해야지. 포드에게 통신을 명령하면 된다. 아직 포드에게 발언 금지를 했던 것이 유지되어 있던가? 그러면 그것을 먼저 풀어주고...... 아주 간단한 일인데도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그저 엔리카가 떠올랐다.

엔리카 왜 그랬어요? 레이피스는 엔리카와 어울리던 모든 순간을 떠올렸다. 영원히 안주하고 싶었던 행복. 그리고 그럴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게 해주었던 약속. 수많은 리셋 중에 처음으로 일어났던 기적. 그러나 산산이 부숴졌다.

“우리가 그렇게 있을 수 있고, 이렇게 행복하다면 모든 것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레이피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는 우리가 최선을 찾았다고 믿었는데. 당신에겐 아니었나봐요.”

대체 최선이 무엇일까? 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파괴당했다. 아니, 부정당한 것일지도 모른다. 상황을 깨뜨린 것은 엔리카였다. 안주하기를 거부했다. 레이피스가 아무리 노력해도 엔리카가 움직이면 상황은 뒤집어질 수 밖에 없다.

“엔리카. 다시 그럴건가요?”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배신감이 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마냥 허무했다. 레이피스는 고개를 들어 마른 눈으로 폐허를 보았다.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레이피스는 다시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고민할 여력도 없었다. 그저 많은 것이 힘들었다.

출처: https://leavinggarden.tistory.com/76 [방치될 정원: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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