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연성

겨울로부터의 이야기(1)

2020.05.09

레이엔리 1000일 기념 

동화 눈의 여왕 AU 

옛날옛날의 이야기야. 어느 작은 마을에 어려서부터 친하던 두 아이가 있었어. 한 아이의 이름은 엔리카, 다른 한 아이의 이름은 레이피스였어. 두 아이는 작은 꽃이나 풀에도 감탄하며 신비로워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 둘이 뱉었던 탄성을 그 마을에서 자랐던 꽃이라면 전부 들었어. 두 아이는 서로에게 다정해서 여느 때나 눈이 마주치면 부드럽게 미소 지었어. 엔리카는 강가에서 예쁜 조약돌을 골라다가 레이피스에게 건네주었고, 레이피스는 토끼풀을 엮어서 화관을 만들어 씌워주었지. 그래, 참 사이가 화목한 아이들이었어.

 

아, 그러나 세상은 두 아이가 그저 화목하게 자라게만을 내버려 두지 않았어. 어느 가을날의 일이야. 둘은 그저 낙엽 사이를 걷고 있었어. 두 손을 맞잡고, 거센 바람에 낙엽이 흩어지는 것을 보았지. 수백 개의 낙엽이 일제히 비행하다가 땅을 스쳤고 다시 날아오르는 광경은 한 폭의 오케스트라처럼 웅장했어. 물론 아이들은 오케스트라를 본 적은 없었지만, 악단의 연주는 상상해 볼 수 있었지. 그런데 보드라운 낙엽 사이에 날카로운 것이 섞여 있었지 뭐야? 엔리카는 그것을 보지 못했어. 낙엽이 너무 많았거든.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몰라. 꽃 따위를 보고 감탄하는 둘을 엽신이던 짓궂은 사람이 돌맹이를 던지고 모래를 뿌렸을지도 몰라. 아니면 저 너머의 벌판에서는 전쟁이 벌어진다던데, 산을 넘어온 군인이 레이피스를 보고 놀라서 무기를 쏘아버렸는지도 몰라. 땅에 심어둔 함정이 레이피스를 덮쳤을 수도 있어. 분명한 것은, 날카로운 적의가 레이피스를 다치게 했어. 레이피스는 자신을 상처입힌 것을 마주 보았어.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어린아이의 몸과 마음을 상처입히기는 충분한 것이었어.

 

엔리카가 뒤늦게 레이피스를 발견하고 서둘러 다가왔어. 그리고 파들거리며 떠는 새 같은 레이피스를 붙잡았어. 엔리카는 몹시 놀라서 눈물이 툭 터져나왔지만 계속 울 수는 없었어. 지금은 레이피스가 먼저니까. 엔리카는 외쳤어.

 

“누구 없어요? 레이피스가 다쳤어요!”

 

그러나 황량한 바람이 여전히 낙엽을 가지고 놀기만 할 뿐, 아무도 답하지 않았어. 산길은 비틀거려서 넘어질 것 같았어. 엔리카는 급하게, 그러나 레이피스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엔리카를 이끌고 집으로 향했어. 마을에서 다시 한번 외쳤어.

 

“제발 도와주세요! 레이피스가 다쳤어요!”

 

마을은 이상하게 스산했어. 모두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질 않았지. 레이피스는 보지는 못 했지만 모든 걸 들었어. 레이피스의 안쪽에 차곡차곡 쌓였지. 엔리카는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고 엔리카의 부모님들이 황급하게 치료를 도와주었어. 피를 맑은 물로 씻어내고 다친 곳에는 약을 바르고 붕대로 싸매었지. 레이피스는 오랜 시간이 걸려 나았어.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돌아왔지. 그러나 눈과 심장은 전과 같지 않았어.

 

누군가는 말했어. 저 아이를 다치게 한 것은 악마의 거울 조각이라고. 거울 조각이 심장에 박히면 얼음처럼 차가워진다지. 어떤 것에도 심장이 따뜻하게 뛰지 않는대. 눈에 박히면 세상이 비틀려 보인다는 거야. 아름다운 것은 뒤틀리고, 결점은 더 크고 생생하게 보여준대.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몰라. 레이피스는 달라졌으니까. 레이피스는 세상을 공허한 눈으로 보았어. 꽃이 만발해도 레이피스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어. 엔리카는 새로운 꽃을 꺾어왔지만 레이피스는 방치했어. 어느 봄날에는 앞뜰에 제비꽃이 피었어. 제비꽃은 레이피스가 유독 좋아하던 꽃이었어. 그래서 엔리카가 뜰로 데려왔지만 레이피스는 보고 날카로운 말을 뱉었지.

 

“이런 건 흔하잖아. 다발로 매년 피는 꽃인걸. 게다가 마구잡이로 아무데나 자라잖아. 그리고 금새 시들어버려. …… 차라리 조화가 낫겠어.”

“레이피스!”

 

엔리카가 깜짝 놀라 외쳤지만 제비꽃들도 그 말을 이미 들어버렸어. 꽃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빠르게 졌고 그 다음 몇 해 동안 피어나지 않았어.

 

레이피스는 때때로 화를 터뜨렸고 말에는 한기가 돌았어. 게다가 잔인하게 굴었어. 계단에서 어떤 아이를 밀쳐서 다치게 만들어버리기도 했어. 주먹다짐 한번 않던 그 아이가 말이야. 그 일로 레이피스는 어른들이 호통을 쳤어. 레이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무서운 눈빛을 하고 있었어. 텅 빈 용서를 뱉고 유순하게 굴었지만 그건 진심이 아닌 가면이었어. 다른 이들은 몰라도 엔리카는 알아볼 수 있었지. 엔리카는 레이피스를 걱정했고, 찾아갔어. 레이피스가 받은 충격이 가시지 않아 그렇다고 생각했거든. 그러나 레이피스는 엔리카를 피했지. 둘은 전과같이 어울리기가 어려워졌어.

 

그리고 겨울이 찾아왔어. 그해 겨울은 매서웠지. 사람들은 꽁꽁 싸매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어. 원래는 엔리카과 레이피스도 같이 모닥불 앞에 앉아 코코아를 마시곤 했는데 이번 해에는 엔리카 혼자였어. 모닥불이 따뜻하게 피워져도 엔리카는 마음이 편하게 풀어지지 않았어. 레이피스가 끝없이 걱정되었어. 레이피스가 겨울이 시작된 이래로 보이지 않았거든.

 

엔리카는 눈보라를 헤치고 레이피스의 집을 찾아갔어. 장작이 떨어져서 덜덜 떨고 있는지 않을까? 이런 지독한 겨울에는 옆집에 무슨 사고가 닥쳐도 알아차리기 어려운 법이니까,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그렇게 찾아갔을 때 레이피스는 마침 밖으로 나가고 있었어. 엔리카를 보는 눈은 여전히 같았어. 사고가 일어난 다음처럼 가라앉아 있었다는 뜻이야. 그래도 엔리카는 안심했어.

 

“무사했구나, 다행이야, 레이피스.”

“뭐가 다행이야?”

“네가 그간 보이지 않아서 걱정했었어.”

“내가 그렇다고 네 집에 갈 이유는 없어.”

“레이피스 …….”

 

레이피스는 엔리카를 외면하고 발걸음을 옮겼어. 엔리카는 레이피스를 붙잡고 물었어.

 

“레이피스, 어디로 가는거야?”

“……알 것 없어.”

 

레이피스가 매몰차게 내치는 바람에 엔리카는 그 자리에 멈춰설 수밖에 없었어. 레이피스는 눈 내리는 거리로 발자국을 남기고 종종 사라졌어.

 

엔리카는 서러운 마음을 품고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그 다음 일은 몰라. 그리고 레이피스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그 일은 얼음과 바람만이 알고 있어. 하지만 그들은 눈의 여왕 편이지.

 

그 날 레이피스는 벌판으로 향했어. 세상의 모든 것이 일그러져 보여서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 않았거든. 레이피스는 혼자 있고 싶었고, 흰 벌판에 서서 온통 무결한 눈송이 만을 보고 싶었어. 눈송이는 악마의 거울도 비틀지 못하는 무정물의 아름다움 중 하나였어. 레이피스는 벌판 한가운데 오래오래 서서 눈을 바라보았어.

 

그런데 하나의 눈송이가 유독 컸어. 레이피스는 저도 모르게 그것에 시선을 집중했어. 그 눈송이가 땅에 닿자 서리가 자라나듯 위로 결정이 뻗어 나갔어. 다른 눈송이가 몰려들고 어느 희고 우아한 사람이 생겨났어. 그 사람은 눈밭에 긴 손가락을 가져가더니 희고 두터운 망토를 꺼내 둘렀지. 레이피스는 신비한 광경에 홀렸어. 그 사람은 눈의 여왕이야. 눈을 지배하고 강대한 눈보라를 자신의 병력으로 끌고 다니지. 그러나 레이피스를 위해 눈보라는 서른 발자국 밖으로 잠시 물려두었어.

 

“왜 이곳에 홀로 있니?”

 

눈의 여왕이 물었어. 레이피스는 여왕의 초록 눈동자가 자신을 꿰뚫어 보는 느낌을 받았어. 반감 따위가 돌지 않는 광대한 광경 앞에 선 기분이 되어서, 레이피스는 솔직하게 대답했어.

 

“혼자 있고 싶어서요.”

“혼자?”

“마을 사람들은 가식적이고 시끄러워요. 나는 그곳이 싫어요.”

“안타깝구나, 그런 소란 속에서 살다니.”

 

눈의 여왕은 눈을 마주치더니 웃었어. 겨울 여왕은 단숨에 세 개의 마을을 아무것도 남지 않게 눈보라로 쓸어버릴 수 있었지만 레이피스에게 제법 친절하게 대했어. 거울 조각이 들어간 눈동자는 겨울의 빛깔을 띄었거든. 그리고 눈의 여왕은 겨울의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 필요했거든.

 

“내가 있는 성은 고요하다. 함부로 떠드는 이들은 목에 성에가 자라서 얼어붙고 말지. 네가 그 성에서 함께 지낸다면 좋으려만.”

 

그리고 레이피스의 뺨을 쓸어주었어. 이상하게도 레이피스에게 그곳은 매력적으로 들렸어. 차갑게 식은 심장이 움직이는 것만 같았지. 눈의 여왕은 망토로 원을 그리며 우아하게 돌아섰고, 레이피스는 옷자락을 붙잡았어.

 

“그곳에 저를 데려가 주세요.”

“신중하게 결정하렴.”

“…… 저는 떠나고 싶어요.”

“좋구나, 아이야. 그럼 나와 함께 가자구나.”

 

눈의 여왕은 망토에서 호각을 꺼내어 물었어. 높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고 여왕의 썰매가 눈보라 사이에서 나타났어. 매끄러운 얼음으로 빚어졌고 아래에는 날카로운 날이 달려있어서 얼음 위를 누구보다 날렵하게 가를 수 있었지. 눈의 여왕이 썰매에 레이피스를 태웠어. 그리고 고삐를 세게 내리치자 썰매는 순식간에 마을을 벗어났어. 고삐를 한번 더 내려치자 썰매는 하늘을 떠올라 날았어. 그러고도 썰매는 매섭게 달렸어. 레이피스는 왈칵 겁이 났고 몰아닥치는 광풍에 벌벌 떨었어. 눈의 여왕은 흰 망토를 레이피스 어깨 위에 둘러주었어. 흰 망토에 파묻힌 꼴이 되었지. 레이피스는 망토를 필사적으로 끌어당겼으나 추위는 가시지 않았어.

 

“아직은 겨울의 한기를 견디기 어렵나보구나.”

 

눈의 여왕은 그리 말하며 레이피스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어. 살얼음이 이마에서 부숴지는 것 같았어. 입맞춤에서 내려앉은 한기는 레이피스의 온몸으로 파고들었어. 그리고 더 이상은 춥지 않았어. 손끝도, 발끝도, 뺨도 시리지 않았어. 그제야 망토가 포근하게 느껴졌어.

 

눈의 여왕은 한번 더 입맞춤을 내렸어. 이번에는 한기가 머릿속으로 파고 들었어. 레이피스는 따뜻한 기억들을 전부 잊어버렸어. 엔리카나 마을의 작고 소소하지만 오래전에 좋아했던 것이들이 지워졌지. 눈의 여왕은 이마 위의 머리를 쓸어 정돈해주며 말했어.

 

“이게 마지막이야. 세 번째 입맞춤은 너를 죽음에 이르게 한단다.”

 

썰매는 희고 검은 광경을 스쳐 지났고 높고 낮은 땅을 날았어. 낮과 밤을 번갈아 맞이했고, 곧 뒤로 스쳐 보냈어. 강대한 눈보라가 주위를 호위하며 따랐고 언젠가 거대한 새가 와서 합류하였어. 그 모든 것은 레이피스를 붕 뜨게 만들었지. 이어 희미한 졸음이 감돌았어. 눈의 여왕은 레이피스의 눈가에 손을 얹었어.

 

“잠시 자두렴, 아가야. 우리는 오래 달릴 것이고 앞으로 네가 맞을 겨울은 이보다 길 거란다.”

 

*

 

봄의 엔리카는 울적함에 잠겨있었어. 그날 이후로 레이피스가 보이지 않았거든. 엔리카가 본 모습이 마지막이었어. 많은 사람들이 레이피스가 죽었다고 말했어. 제멋대로 길을 나섰다가 비탈에서 굴렀고, 그 다음에는 꽁꽁 얼었을 거라고 했지. 눈이 녹으면 시신이 드러날 거라고 했어. 엔리카는 긴 겨울날을 울며 지냈고 봄에는 눈물을 흘릴 기운조차 바닥났어. 봄기운이 아른하게 올라오고 새싹들이 피어나고 새들은 지저귀는데 그곳에 레이피스는 없었어.

 

봄이 되어도 레이피스의 시신은 어느 비탈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어. 사람들은 그렇다면 아니면 함부로 마을을 넘어갔다가 다른 맹수나 사람들에게 공격당했을 거라고 했어. 안타깝게도 시신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지.

 

“레이피스가 죽었구나.”

 

엔리카가 말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봄볕이 말했어.

 

“레이피스는 죽었어.”

 

엔리카가 냇물에게 말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냇물이 답했어. 그러자 엔리카도 레이피스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어. 엔리카는 눈물 자국을 닦고 일어났어.

 

그리고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빵과 우유를 챙겨서 작은 가방에 챙겨 넣었어. 레이피스를 찾으러 가기로 결심 했거든. 엔리카는 잠든 부모님의 뺨에 입맞춤을 남기고 오빠에게는 손을 쪽지를 남기고, 튼튼한 신발을 신고 집밖으로 나갔어. 그날 보았던 레이피스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알아. 그쪽으로 가면 산이 있었어. 아직 산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있을지 몰라. 엔리카는 산으로 향했어.

 

산은 어릴 적부터 뛰어놀아 친숙했지만 모든 것을 알기에는 너무 커다란 곳이었어. 산은 산으로 이어져 있어서 길을 잘못 들면 계속해서 산을 떠돈다고 했어. 아무리 빠져나가고 싶어도 말이야. 하지만 엔리카는 산을 올랐지. 항상 노닐던 산 중턱을 벗어나서 산의 맨 꼭대기까지 올랐어. 그건 무척 힘든 일이었지만, 혹시 레이피스가 그런 곳에 있을 수도 있잖아? 엔리카는 꿋꿋하게 산을 올랐어. 그리고 어느 꼭대기에 다다랐어. 그러나 그곳은 수많은 봉우리 중에 하나였지. 가야할 곳이 한참이 있다는 사실에 힘이 확 빠졌지만 엔리카는 산봉우리에 외쳤어.

 

“레이피스! 어디 있어?”

 

들려오는 답은 없었지. 레이피스는 그보다 훨씬 먼 곳에 있었으니까.

 

“산아. 네가 레이피스를 감추고 있니? 레이피스를 돌려줘!”

 

산은 나뭇가지들을 크게 흔들었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아니, 라고 대답하는 듯 했지. 엔리카는 한참 산봉우리에 서 있었어. 거기까지 올라가느라 꽤 지치기도 했거든. 온종일 올라가느라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어. 엔리카는 붉은 노을을 오래 보았어. 노을은 산을 온통 붉게 물들였어. 그 많은 붉은 산들 사이에 레이피스의 푸른 머리칼과 비슷한 것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어.

 

내려오는 길은 어두웠어. 엔리카는 깜깜한 숲속에서 길을 잃었지. 내딛는 한발 한발이 보이질 않았어. 풀이 스치며 슥삭이는 소리도 엔리카를 무섭게 만들었지. 엔리카는 바들바들 떨며 서두르다가 그만 바람에 발을 헛디뎠어. 잘못해서 굴러버렸지. 덤불들이며 잔가지들이 서두르며 엔리카를 받아주었지만 비탈은 너무 가팔랐고 엔리카는 어디인지 모르는 곳에서 멈췄어. 어지러워서 세상이 데굴데굴 굴렀어.

 

‘레이피스도 이런 식으로 사라졌을까?’

 

멀리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렸어. 그렇지만 엔리카는 깜박 정신을 잃고 말았어. 초봄이어서 아직 밤은 무척 추웠어. 자칫하면 얼어죽을 뻔했지. 그런데 땅에 잠들어있던 새싹들이 자라나 엔리카를 감쌌고 엔리카는 무사히 시린 밤을 넘겼지. 일찍 뜬 해가 제일 먼저 엔리카를 찾아내어 비출 때까지 말이야.

 

그리고 어떤 아이가 한들한들 걷다가 새싹이 무더기로 피어난 곳을 발견했어.

 

“이런 찬 바람이 부는 데도 벌써 싹이 피어나다니. 무슨 일이지? 날을 착각했을까?”

 

그리고 엔리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어. 설마 사람일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 사실 아이는 요정이었고 이곳은 사람이 오지 않는 깊은 숲속이었거든. 요정 아이의 이름은 레들리였고 사람을 무서워했어. 레들리는 달아날까 깨워야 할까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엔리카를 흔들어 깨웠어. 엔리카는 옅은 숨을 내쉬다가 깨어났어.

 

“아……. 내가 어디에 있는 거야?”

“여기는, 그, 요정의 숲이야. 너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어?”

“나는 레이피스를 찾아왔어. 혹시 레이피스를 보았니? 내 또래의 소년인데.”

 

그리고 엔리카는 레이피스가 어떤 소년인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했어. 레들리는 마음이 누그러졌어. 엔리카가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아졌거든. 요정은 차츰차츰 용기를 내었어.

 

“이곳에서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어. 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알지도 몰라.”

“정말? 그럼 나를 데려가 줄 수 있겠니?”

“좋아. 하지만 잠시만, 여기 이르게 피어난 새싹들을 돌보고 가야 할 것 같아.”

 

레들리는 손에서 노랗고 자글거리는 작은 구슬들을 소매에서 꺼내어 쥐었다가 새싹들 위에 흩뿌렸어. 구슬이 닿는 곳에서 노란 아지랑이가 아롱아롱 피어났고 새싹이 잎을 살랑거렸어. 레들리는 작게 웃으며 속삭였어.

 

“되었다.”

“방금 뭘 한거야?”

“음……. 새싹들이 얼지 않았으면 해서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었어.”

 

레들리가 어물어물 대답했어. 엔리카는 비료 비슷한 것을 주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건 사실 봄의 조각이었어. 레들리는 봄의 요정이었거든. 구슬이 떨어진 곳에는 이제 봄의 미풍이 머물거야. 새싹들이 얼지 않고 자랄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온기가 감쌀 거야.

 

그리고 레들리는 자신의 가족들이 머무는 곳으로 안내했어. 그곳은 환한 공터였어. 노랗게 일렁이는 아지랑이를 지나가자 요정들의 공간이 나왔어. 테두리는 여리고 새로 자라는 연한 잎으로 둘러 쌓여있었고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어. 레들리의 부모님은 레들리가 데려온 엔리카를 보고 놀랐지만 친절하게 맞아주었어. 엔리카는 그들에게도 자신의 이야기와 레이피스 이야기를 했어. 어른 요정들은 신중하게 고민하다가 언젠가 보면 알려주겠다고 했어. 그리고 일단은 이곳에서 쉬고 가라고 했지. 엔리카를 위한 산딸기나 블루베리가 있으니 마음껏 먹으라고도 했고. 잔뜩 구르다가 다친 상처도 치료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어. 엔리카는 망설이다가 그들의 손을 잡고 들어갔어. 그러자 밖의 나무들은 제 가지들을 꽁꽁 엮으며 요정들의 은신처를 숨겨주었지.

 

엔리카는 맛있는 베리들을 먹으며 푹 쉬었어. 그리고 요정들은 약초를 팔꿈치와 무릎에 난 상처에 발라주었어. 그리고 마시는 약을 주었지. 엔리카는 꼴깍 마셨어. 그러자 바깥의 기억이 확 옅어졌어. 요정들이 마냥 사악한 존재는 아니었어. 그들은 단지 엔리카가 나가기에는 바깥 세상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거든. 엔리카 같은 어린아이가 나가서 세상을 떠돌다가 다쳐버릴까봐 보호해주려고 했던 거야. 엔리카는 갑자기 졸려져서 긴 잠을 잤어. 요정들은 그간 정원을 샅샅이 뒤지며 제비꽃을 찾아 꽃잎을 똑똑 두드렸지. 그리고 잠시만 들어가 달라고 부탁했어. 요정들은 제비꽃을 보면 엔리카가 레이피스를 떠올리고, 나가버릴 것이 걱정되었거든. 제비꽃들은 꽃과 잎을 접고 땅속으로 들어갔어. 요정들이 그간 친절하게 대해 주었으니까 그 정도의 부탁은 들어줄 수 있었어.

 

자고 일어나자 머리가 맑은 기분이 되었어. 엔리카는 정원으로 뛰쳐나갔어. 그곳은 엔리카가 평생 보았던 것보다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었어. 꽃들은 계절에 상관없이 만발했어. 커다랗고 싱그러웠지. 과실수에는 간혹 꽃 대신 달콤한 과일이 달려있기도 했어. 베어 물면 상큼한 과즙이 입에 번졌어. 그곳에는 미풍이 불었고,

 

레들리는 수줍음이 많았지만 곧 엔리카를 잘 따르게 되었어. 요정의 부모님은 엔리카를 친자식처럼 아껴주었지. 엔리카는 풀과 열매를 뜯어서 레들리와 소꿉놀이를 했고, 따스한 햇볕을 밭으며 폭신한 풀밭에 눕기도 했어. 밤이면 어른 요정의 무릎에 앉아 반딧불이가 될 애벌레들이 은은한 빛을 내는 것을 보다가 잠에 들었지. 엔리카는 그날도 그 다음 날도 정원을 뛰놀며 그들과 함께 웃었어. 따스하고 부드러운 것만이 가득한 영원한 봄의 공간이었지.

출처: https://leavinggarden.tistory.com/75 [방치될 정원: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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