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연성

레이엔리 500일 기념, 별유 AU

2018.12.27

바람이 가볍게 불며 들을 스쳤다. 드넓은 벌판이 너울거렸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을 바라보았다. 하늘 끝에서 끝까지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보다가 구름이 언덕을 넘어가려고 하면 따라가 보자고 그렇게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둘이서 손에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 그렇게 행선지가 하루하루 걸음을 내딛을 만큼 단순하고 평온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지루한 적은 없었다. 네가 곁에 있었기에.

 

아침 이슬에 옷단을 적시며 걸었다. 발치에 자라난 꽃을 발견하고 들여다보며 조잘조잘 떠들기도 했다. 이끼로 뒤덮인 굵직한 나무뿌리에 걸터앉아 잠시 쉬기도 했다. 잎새 사이로 스며들며 아른거리는 햇살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너와 눈동자가 마주치기도 했다. 깜빡거리는 네 초록 눈이 재미있고 또 아름다워서 웃기도 했었다. 너도 나와 함께 웃었는데 너는 무엇에 웃었을까?

 

우리는 유독 자연을 좋아했다. 웅장한 산, 곧은 나무들이 드높게 자라 거대한 초록잎의 장막을 드리우는 숲, 하늘과 맞닿을 듯이 끝없이 이어지는 파란 바다, 부드러운 물결이 사박거리는 모래알 위로 흰 거품을 일으키며 밀려오고 사그라드는 해변, 매년 색색의 꽃이 오밀조밀 피어나는 들...... 우리는 그 수많은 풍경들에 발을 디뎠고 하나하나에 감탄하며 눈에, 손끝에, 머릿속에 새겨두었다. 가끔 마주친 타인들은 감흥 없는 표정으로 우리가 보았던 것을 대충 보고 너희도 곧 질릴거라고 툭 던졌다. 그러나 어찌 그럴 수 있을까?

 

너는 가을에 태어났다고 했다. 잎사귀가 화려하게 물들었다가 툭, 떨어지고 흩날리고 말라비틀어져 부서지고 사라지는 계절이다. 동물들도 깊게 숨어버리고 작은 꽃들은 최대한 움츠러들거나 검게 물들고 이내 죽어버린다. 그러고 나면 메마른 회색의 풍경만이 남는다. 절정과 죽음이 공존하는 계절이다. 그 후에는 흰 눈이 온 세상을 뒤덮은 하얀 지옥이 찾아온다.

 

너는 그래서 상실을 제일 먼저 배웠다고 한다.

 

나는 이른 봄에 태어났다. 검은 빛깔만을 띄는 나무 사이에서 아직은 차디찬 바람이 마른 풀들을 우스스 뒤흔드는 황량한 들을 바라보며 눈을 떴다. 그러나 살얼음이 녹아 내가 되어 흘러가기 시작하는 것과 녹지 않은 눈을 비집고 노란 꽃이 피어나는 것도 내가 동시에 본 것이다. 이윽고 봄비가 내리고 따스한 햇살이 들을 어루만지자 싹이 돋아나며 세상이 점점 생동감을 찾는 광경을 보았다.

 

나는 탄생을 제일 먼저 배웠다. 어떤 황량함에도 시간이 깃들면 생명이 돋을 거라는 걸 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믿는다.

 

나는 가끔 태어났을 적의 너를 생각한다. 섬의 광경을 사랑하는 너와 태어나서 마주한 온갖 작은 동식물들에 마음을 주었을 너와 시들고 사라져 가는 광경 속에 홀로 남았을 너. 그리고 먹먹히 긴 겨울동안 눈밭을 헤매었을 너. 봄을 모르고 겨울을 살아가는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는 겨울이 되면 흰 들을 아련하게 본다. 시선이 흰 눈송이 사이에 띄엄띄엄 맴도는데 눈송이가 사라지는 순간에 유독 머무르곤 했다. 찬바람에 네 코끝이 붉어졌는데 그건 때로는 마치 우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하다. 나는 그럴 때마다 네 손을 꼭 잡는다.

 

춥지? 바람이 거세지 않은 곳에 들어가서 우리 서로 기대자. 그럼 따뜻할 거야.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지?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내가 네 곁에 있다는 것도 다행이야. 우리가 함께 라는 것이 때때로 얼마나 기쁜지 알아?

 

네가 따뜻했으면 좋겠다. 나는 너를 꼭 안았다. 차갑게 식은 뺨이 맞닿고 천천히 서로의 온기가 전해질 때까지. 서로의 맥박이 울리고 품에, 팔에, 손끝에 네가 잡힌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선 너는 가끔 그저 광경인 것만 같아서, 불안해지는데 이렇게 안을 때면 생생하게 너의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턱을 네 어깨에 얹은 채로 나는 속삭였다.

 

나는 여기 있어. 우리는 함께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고 또 많은 것을 보낼 거야.

레이피스, 나는 여기의 모든 광경이 아름다워. 그런데 생각해보면 네가 있기 때문인 것 같아. 너를 볼 때마다 무언가가 피어나는 것 같아. 나뭇가지가 물이 올라 싹을 틔울 때처럼, 들에서 꽃이 만발할 때처럼. 이건 끝없이 피어날 거야. 너를 볼 때마다, 네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계속해서. 나는 이걸 잘 알거든. 탄생을 알거든. 이 섬의 눈이 녹고 깨어나는 이유가 봄인 것을 아는 것처럼, 마음속에서 끝없이 무언가 생겨나는 것이 네 덕분이라는 것을 알거든. 그래서 행복하고 세상이 아름다워.

 

나는 고개를 들어 너를 바라보며 웃었다. 네 초록 눈이 깜빡인다. 나는 하얀 숨결과 함께 한마디, 한마디 내뱉는다.

 

“너를 사랑해, 레이피스.”

출처: https://leavinggarden.tistory.com/20 [방치될 정원: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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