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 Deadman on Display 0
전 회차 스포일러
https://youtu.be/bFG_ZaR1LvA?si=qEtCnjMJak9Xybb-
Angra / Dead Man On Display
ISB2262, 루비콘3에는 눈이 내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얀 잿가루 덩어리가 떨어지는 것이었지만, 다른 행성에서 목격했던 그 기상현상과 비교해서 육안으로는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눈이 내린다고 불렀다. 바닥에 쌓인 재, 눈, 아무튼 그런 것을 헤치고 내 AC는 호버링은 꿈도 못 꾼 채 뒤의 수송 컨테이너를 조심스럽게 끌며 나아갔다. 다행히도 내리는 것이 시야를 그렇게 가리지는 않아서, 전방 식별 카메라는 간신히 제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핸들러, 곧 그리드 135예요. 정차 지점에 마킹해 주실래요?”
-좌표를 보낼 테니 잠시 기다려라.
“네에.”
나는 느긋하게 대답하고는 핸들러가 보낼 마커를 기다렸다. 어차피 이 근처에는 정말로 아무 것도 없으니까 사주경계도 의미가 없다. 시가지였던 것의 흔적이나 잿더미의 한가운데서 그나마 자생하고 있는 나무 비슷한 것이 어지럽게 널려 있을 뿐이다. 그 위를 끊임없이 눈이 덮고, 또 바람에 날려 갔다. 같은 풍경이 계속될 뿐이라 약간 졸리기는 했다.
올려다 본 하늘은 온통 적색과 백색이었다. 지금은 엄격하게 따지자면 모성 기준으로 ‘정오’에 가까운 시간인데도 머리 위만은 황혼과 닮은 색을 띠고 있어 묘하게 두근거리는 기분이 됐다. 눈이 날리지만 HUD의 기온 그래프는 섭씨 20도 안팎을 가리키고 있었다. 왠지 괴리감이 장난 아니라고 생각할 때, 핸들러의 통신이 되돌아왔다.
-마커 정보를 갱신했다. 이동해서 아직 사용 가능한 수직 캐터펄트가 있나 확인하도록.
“카피.”
살다살다 AC를 썰매로 쓰는 상황은 처음 겪어 봤지만 그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다른 행성이나 콜로니에서는 못 해 본 일인데다, 보통 AC에 탑승할 때는 주변을 신경 쓸 수 있을 정도의 속도가 아니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AC는 인간형 결전병기다. MT도 아닌 AC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핸들러도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다.
컨테이너를 안고 불탄 원기둥 모양 거대 설비를 조심스럽게 넘어갔다. AC의 사이즈로나 넘을 담이 바깥쪽으로 이어진 걸 보니 담 안쪽은 거주구획인가, 싶기도 했다. 곳곳에는 파괴된 MT가 나동그라져 있었고 아마도 차량이 다녔을 고가도로 비슷한 게 보였다. 길을 따라 쭉 움직이면, AC로 추정되는 잔해도 한두 대 정도 있었다.
여전히 어디에도 생체신호는 없다. 아무래도 당연하려나. '불' 이후로 반 세기 가까이 지났으니 말이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 해도 굶어 죽었겠지. 문명의 흔적만이 간신히 남은 곳을 헤치고 가는 기분도 꽤 생소했다. 코랄을 퍼 올리던 시절의 루비콘3는 꽤 풍요로운 곳이었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정도로 영락한 꼴을 보자니 정말 대단한 불꽃이었겠구만, 같은 감상 정도가 다였다.
마커와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컨테이너를 안아들고 조심스럽게 상승 추진을 반복해서 간신히 약간 높은 건물 위에 다다랐다. 좌표에는 진짜로 낡은 캐터펄트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모서리의 라이트가 올라오지 않아서 반신반의한 기분으로 핸들러에게 물었다.
"있긴 있는데요, 핸들러, 이거 움직이는 거 맞아요?"
-매립형이니 작동에 큰 문제는 없을 거다. 여차해도 한 번 정도는 작동하겠지.
"끄응…, 불안한데. 일단 알겠습니다. 물건이 좀 흔들릴 수는 있어요."
어쨌든 이 위로 가야 한다는 거지? 내 기체의 상승추진으로는 안 닿을 높이이기는 했다. 컨테이너를 핸드 파츠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캐터펄트 위로 올라서서 아래로 하중을 살짝 실었다.
"웃."
기체와 컨테이너가 수직으로 상승하자마자 머리를 짓이기는 것 같은 중력이 느껴졌다. 잠깐 시야가 널찍해지나 싶더니 곧장 붕 뜨는 감각에 상승추진을 서둘렀다. 컨테이너가 좀 흔들리긴 했지만 괜찮을 것이다. 애초에 캐터펄트를 쓰라고 한 건 핸들러니까 내 책임은 아니다.
어찌되었건 간신히 큰 건물 앞마당에 착지할 수 있었다. 주변으로는 내가 든 컨테이너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컨테이너가 열을 맞추어 놓여 있었다. 무슨 용도로 쓰던 장소인지는 몰라도 어지간한 충격에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건물의 바로 앞에는 큰 구덩이도 하나 보였다.
-착지했나?
"넵. 여전히 걸리는 생체 신호는 없네요."
-그럼 주변을 스캔한 후 다음 지역으로 진행하도록.
"네에."
일은 일이다. 나는 컨테이너를 조심스레 한 구석에 내려 두고 시킨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달고 있는 것도 없겠다 부스터를 켜고 보이는 곳부터 스캔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럴, 계획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몸을 돌려 컨테이너를 막아섰다. 무언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운 내 머리 위에서, 프로펠러 소리와 뒤섞인 무감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핸들러의 아이콘과 TTS 메세지가 HUD 한켠에 떠오른다.
[코드 23, 정보 조회를 개시. 코드 44로 이행. 식별 번호…, 동세대 조회 불가.]
"핸들러!"
-행성 봉쇄 기구의 무장 헬기다. 오래 된 물건이니, 대응에 문제는 없을 거야.
"아이, 씨…. 이런 거 있단 얘기 안 했잖아요?"
-걱정할 필요는 없어. 이 행성에 남아 있는 건 잔존 방위 병력에 지나지 않으니까. 자동 보수로 간신히 보존됐을 뿐이고 네트워크는 끊긴 지 오래야. 증원도 오지 않아.
하여간 뭘 믿고 저렇게 자신만만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실력을 보여 줄 차례라는 건 확실했다. 아무튼 나는 그걸 위해 이 행성에 왔으니까. 아마도 이 무장 대형 헬기, 컨테이너가 아닌 움직이는 이 쪽을 노릴 거다. 왜냐하면….
[조회 완료. 구세대 DB 식별 번호, RB-23, 식별명 "레이븐". 위협 레벨 최상. 적정 대응 프로세스에 진입합니다. 코드 78E 전송…, 콜 백 없음. 재전송 실행.]
"레이븐, 증원 안 온다는 거 확실하죠? 빨리 정리하고 떠요!"
내가 지금 탑승하고 있는 기체는, 성계를 불태운 우주 최악 범죄자, 내 핸들러의 AC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불 루트 이후의 이야기가 됩니다. 긴 글을 못 써서 고민이 많았는데, 정권지르기를 마치니 어떻게든 자신감이 조금 생겼네요. 열심히 한 번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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