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 30일간의 정권지르기

11월간 진행한 30일간의 1000자 정권지르기 / 아무씨피 다 섞여있음, 3회차까지 모두 스포일러 주의

야남홈리스 by 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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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레이븐 / 3회차 5챕터 에어

레이븐.

당신은 이 별에서, 명백히 타인이지요.

당신의 핸들러는 분명 이 별에서 어떠한 목적으로 당신을 이용하지만, 그것을 자신만의 사명이라고 여기는 듯했어요. 칼라가 내내 당신을 내방자라 호칭한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그는 자신의 사명을 당신이 짊어지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당신이 감정을 되찾기를 바라는 것과는 또 모순적이죠. 이 별에서 만난 기업의 인간들과 루비코니언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그들에게 당신은 이용할 수 있는 폭력에 불과했죠. 무언가를 제안하고 그를 달성하면 보수를 얻는다, 라는 개념은 저도 확실히 이해하고 있지만……. 다른 것도 알아요. 그 또한 남에게 좋을 대로 쓰이고 버려질 뿐인 무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요.

하지만, 레이븐.

저는 항상 생각했어요.

루비코니언 '에어'는, 코랄의 흐름에서 태어나 동포를 해방할 숙명을 느끼지만 당신과 마찬가지로 코랄에 대해서도 타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레이븐이 마침내 저의 목소리를 보았기에 우리 둘은 서로가 서로의 타인이 아닐 것이 분명하다고. AC에 탑승하지 않은 당신은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고, 어디에도 갈 수 없지요. 그리고 그것은 어디에도 갈 수 있지만, 아주 오래도록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었던 저와 같아요.

올 마인드의 계획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일방적이기 짝이 없는 그 방식은 인간인 당신으로서는 분명 불안하고 두려울 거예요. 섬 돌마얀이 세리아라는 개체에게 등을 돌렸듯 당신 또한 그렇게 행동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추측합니다.

...그래도, 레이븐.

당신만은 이해해 주길 바라요.

저는 더 이상 단순한 공존만을 욕망할 수 없게 되었어요.

‘나’는, 당신과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형태를 가진 이들끼리만 할 수 있는 대화가 있다면 그조차도 탐이 납니다. 당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있는 힘껏 나와 대화해주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사람과 투쟁하기 위한 형태를 하고 있다면 제가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나란히 서고, 때로는 맞설 수 있는 모습을 가지고서.

당신이 워치 포인트 델타에서 ‘나’를 찾아주었듯이, ‘나’ 또한 당신에게 찾아가고 싶기 때문에요.


레드 건 / 마작하는 G3456 이구아수 시점

주사위 정도라면 빨리 끝나는 편이라 괜찮지만 솔직히 마작은 오래 걸려서 그닥 구미가 당기는 종목은 아니다. 근데 하필이면 레드 자식이 마작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우 화하이가 거기에 꽂힌 거다. MT 끄는 놈들 데리고 머릿수를 채울 수는 있지만 그런 놈들까지 부르기엔 미시간 영감의 눈은 두려운 모양이다. 기본적으로 숙소가 멀지 않은 넘버링끼리 마작 할 수 있는 네 명을 채울 수 있다면 같은 심산이었을 거다. 웃기지 마, 누가 맨날 해 준대? 착각도 유분수지. 어쨌든 그 열기에 떠밀려 역이 적힌 종이 다발을 쥐어 주고 대충 설명해주고 장이 시작됐다. 나 같으면 이 따위로 설명 듣고는 시작 안 한다.

동 3국 12순. 오야는 볼타. 이번 국을 시작할 때 갑작스레 나일이 난입해 레드의 뒤에서 고스트를 자처하며 패 구경을 시작했다. 비밀로 해 준다나 뭐라나……. 비기너즈 럭인지 뭔지는 몰라도 레드 놈은 뭔가 심상찮은 반응이더라니 "이게 맞습니까, 선배?" 이 따위로 우물쭈물하며 만관 쯔모를 두 번 했다. 덕분에 내 오야도 덧없이 날리고 자연스럽게 점봉이나 뜯기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이번 국, 배패는 죽도 밥도 못 될 쓰레기다. 유국 때 텐파이나 할 수 있으면 양반일까? 다행히도 우나 볼타의 패도 지지부진한 것 같았지만…….

"여기서는 이구아수가 버린 저 패를 받아야지."

"아, 그렇군요. 퐁 하겠습니다."

대가인 레드가 나일의 지시 하에 방금 버린 3만을 받아갔다. 보통 초보자가 그렇듯 또이또이가 가장 이해하기 쉬웠던 모양인지 아까부터 계속 시도하고 있는 것 같다. 나일이 말없이 패 몇 개의 머리를 콕콕 두드리며 레드와 시선을 교환하는 걸 보니 텐파이이거나, 가깝거나. 제기랄, 왜 저기만 패가 저렇게 빠르고 좋은 거야? 뭔가 걸고 하는 판은 아니지만 그래도 생초보보다 점수가 낮은 건 고깝다.

다시 한 바퀴가 돌았다. 16순인데 여전히 량샨텐인 건 너무하다. 대충 노 텐유국으로 넘어가고 볼타의 오야를 빨리 끊…….

"선배, 그건 론입니다."

아, 정말!!! 저렇게 버리고 청일색 같은 거 하지 말라고!


프6 / 식별명

그 AC를 ‘독립용병 레이븐’의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식별 태그뿐이다.

눈 앞에서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는 분석 영상에서 ‘레이븐’이라는 태그를 단 용병의 AC는 왼손, 오른손, 어깨의 무기, 때로는 코어까지도 부지런하게 갈아치웠다. 기체의 도장조차도 늘 제멋대로다. 가끔은 AC의 이름까지도 바뀐다. 상대가 누구인지—혹은 무엇인지에 따르는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일관성이 없다. 때로 유희에 지나지 않는 선택을 하는 일까지도 보게 된다. 분명히 잔탄이 있을 터인 무기를 퍼지하고 주먹을 내지른다. 언제는 터미널 아머, 언제는 어설트 아머, 가끔은 중량 기체를, 최근은 경량 2각……. 어떠한 일관된 경향도, 취향도 발견할 수 없다.

프로이트는 영상실의 소파에서 신발을 벗고 무릎을 모아 앉았다. 가벼운 소일거리라 여겨 들어온 영상분석이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웠다. 조금은 까슬해진 턱을 무의식적으로 매만지며 영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번에는 피르메차 헤드인가? 나쁘지 않지.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제법 즐거워 저도 모르게 지껄였다.

공교롭게도 그 어떤 전투에서도 그의 음성 신호가 녹음된 일은 없다. 노출된 핸들러와의 공용 회선에서도 그의 주인이 일방적으로 지시를 할 뿐, 딱히 레이븐이 ‘응답’을 하는 구도는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에 인간이 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버릇’ 정도는 있다는 뜻이다. 퀵 부스트를 사용할 때는 대부분 상대의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오른손 무기의 탄환은 낭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도 어느 타이밍의 돌발적인 공격에는 마치 상대의 궤적을 몇 번이고 본 것처럼 유연하게 피해낸다. 상대방의 ACS 리미트까지 몰아붙여 철저하고 끈질기게 물어뜯는다. 스네일이 말했던 ‘유인과 무인의 유의미한 차이’는 분명히, 이런 곳에서 오는 것이다.

하지만 ‘레이븐’의 동기는 그 모든 것을 포괄하고도 또 다르다. 프로이트는 확신했다. 빙원에 홀로 남겨져 PCA의 HC와 고기동 LC 다수를 단독으로 격파하는 그 기체의 주변으로 불꽃이 번쩍인다. 그 움직임에서는, 분명한 열락을 느꼈다.

아아, 틀림없이 너는 동류로구나.

마지막 영상의 재생이 종료되었다. 프로이트는 웃었다.


RaD / 채티칼라

'자아'를 손에 넣은 후 가장 처음 받은 요구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로우데이터가 부족했던 그 때는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것이라면 AI가 아닌 더 잘 할 수 있는 주변의 인간에게 맡기면 좋다. '채티 스틱'의 제안 시스템은 그런 것을 위해 제작되지 않았다는 확신은 그 당시의 나에게도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스가 한 가장 처음의 요구는 거절되었다. 나에게 그 정도의 권한은 허락되어 있었다. 이유는 단순히 '비합리적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의 리스폰스와 사유를 확인한 보스의 너털웃음 기록은 중추 메모리에 저장해 두었다. 웃으라고 전달한 리스폰스는 아니었지만, 그것을 기록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보스는 그 이후에도 종종 비합리적인 요구를 하곤 했다. 심지어 초반의 펌웨어 업데이트에서는 제안 명령어를 꽤 많이 추가한 것 같았는데, 나의 입장에서는 모조리 '칼라를 위해 움직인다'는 우선 원칙에 위배되는 것뿐이었다. 당연했다. 불필요한 제안과 발언은 도리어 보스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 그렇게 말했더니, 보스는 '내가 터무니 없을 정도로 조심스러운 녀석을 만들었네!'라며 바닥을 굴러다녔다. 그 이후로 보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요구한 적은 없다.

보스는 '나'에 대한 별도의 백업을 준비하지 않았다고 했다. 백업이 있는 것보다는 없는 편이 사람 같다는 감상론에서였다. 그 이유에는 틀림없는 논리모순이 있었지만, '칼라를 위한다'는 원칙은 위반하지 않았다. '칼라'는 내가 사람처럼 살기를 바랐고, 나는 '칼라'를 위해 그렇게 하기로 했다.

보스는 무거운 것을 짊어진 사람이었고 동반자가 필요했다. 백업 없이 단 한 번 뿐인 '삶'을 흉내낸다는 것만으로 그 자격을 얻을 수 있다면 응당 그래야 했다. 나는 그것을 위해 생명을 부여받았으므로, 기꺼이 따랐다.

언젠가는 채티 너도 웃을 수 있으면 좋겠네. 이거, 기분이 좀 나빠도 웃다 보면 일이 잘 풀리거든. 보스가 말했다. 논리적으로는 성립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피커로 출력하지는 않았다.


베스퍼 / V5 인사평가 녹취록

페이터 군에 대해서? 아, 벌써 인사평가 취합 시즌인가? 자네도 고생이 많아. 이야, 세월이 무상하구만. 다른 대장들의 평가는 어떻던가? 하하, 그렇겠지.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성정이 아닐까? 본인들도 만만치 않은 성격들인데 말야. 일단 들어와서 좀 앉아서 이야기하지.

뭐, 나는 싫어하지 않아. 쭉 보좌관으로 두고 있는 건 그래서야. 가끔 툭툭 튀어나오는 그 성격도 잘 보면 귀여운 구석이 있다네. 아하하, 역시 자네는 이해하기 어려운가?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아. 그 정도의 통제력은 발휘하고 있거든.

하지만 좀 들어 보게. 자네 세대부터 10세대까지는 생존률이 꽤 괜찮은 편이라지?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7세대라네. 응, 스윈번도 그렇지. 4세대 이후로 두 번의 코랄 기술을 사용하는 세대가 더 있었지만, 결과는 알고 있는 대로야. 7세대 초반에 시술을 받은 스윈번이 그렇게 꼬여 버린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5, 6세대는… 언급하기 싫을 정도로군. 정말 많은 이들이 죽었다네. 동료도, 부하도. 루비콘 성계까지 온 마당에 시술을 거절하고 모성으로 돌아갈 수 있는 녀석들은 거의 없다시피 했지. 나는 그걸 지켜봤어. 쭉, 쭉. 그럴 수 있기 때문에 보류하고 미루었지만, 아니었다면 그 시체들 중 하나가 되었을 걸세.

계속 합리화하고 있는 거야. 모조리 죽지 않으니까 지금은 그나마 나은 거라고.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고. 그리고 후세대인 자네들에게도 애착이 생길 수밖에 없는 거지. 아득바득 살아남아 올라가려고 하는 것들을 어떻게 예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냔 말이야.

그래, 그런 맥락이지.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것들 사이에서는, 조금 모나도 괜찮아. 오히려 모난 쪽이 좋지. 생존을 위한 강점이라면, 무엇이든 가지고 있는 편이 좋아. 게다가 본인은 열심히 가장하고 있잖은가? 그런 부분도 아직은 어리니 귀여운 구석이 있지.

그런 연유로 당분간은 계속 보좌관으로 두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네. 혹시 모르잖나? 언젠가 내가 죽고 그가 베스퍼 5를 달게 될지.


칼라와 월터 / 밀항 전

남자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익숙한 의자에 무게를 실었다. 손끝이 엠블럼의 화려한 색에 닿으면 곧장 유쾌한 목소리가 통제실을 채웠다.

「여어, 월터. 영상 회선 정도는 열어 두지? 얼굴 다 잊어버리겠어.」

"정례 보고 교환인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RaD 쪽은 어떻지?"

「이쪽은 순조롭게 손에 들어왔어. 꽤 괜찮은 위장이 되지 않을까? 웃긴 녀석들도 꽤 있고. 그쪽은 어때?」

"마지막 용병이 준비됐다. 기동이 늦어 애를 먹었지만…, 이만하면 투입할 수 있을 테지."

「봉쇄 기구의 방위 라인은 예정대로 617네가 뚫게 되나? 그건 역시 위험한 걸. 위기상황일수록 잘 해 주는 애들인 건 알고 있지만 말이야.」

맞는 말이다. 하지만 '기업'과 거래할 수 있는 신분을 손에 넣고 정보를 얻어 집적 코랄에 도달하려면 그것을 내려보내는 것 이외의 방법은 없다. 손에 쥔 목줄을 모두 잃어도, 그것의 두 발이 루비콘3의 지상에 닿게 해야 한다.

"다른 수가 없어. C4-621은 이번 플랜의 핵심이니까."

AC를 조종할 때 이외에는 시체나 다름없을 정도의 존재. 존엄을 잃고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한 인간. 허나 그렇기에 비장의 패가 될 수 있다. 강력하고 순수한 폭력의 현신이.

그야말로 모순이다. 이 별의 타고 남은 것들을 청산하기 위해 그 피해자를 이용한다. 하지만 그와 칼라, 그의 지인들이 짊어진 것들은 그 모순에 무너질 정도로 가벼운 무언가가 아니다. 지상에 발 디딘 수많은 생명을 앎에도, 그 땅을 불태우지 않으면 안 되는 사명이──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어. 하지만 표정 관리 정도는 확실히 해 둬. 그 애들, 후각이 꽤 좋은 편이니까 자기가 어디로 갈지는 알 걸.」

"……."

「무엇보다 월터, '너'는 다 티가 나. 옛날부터 그랬잖아? 별 일 아니라고 둘러대면서도 막상 보면 풀이 죽어 있지.」

"시시한 이야기는 그만 둬, 칼라."

「값진 조언이니까 진지하게 들어. 그럼, 끊는다.」

남자는 깊게 한숨을 쉬고, 착신 종료가 떠오른 화면을 손대어 치웠다. '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루비콘 해방 전선 / 러스티에게 일을 가르치는 플랫웰

미들 플랫웰의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이 되바라진 청년의 교육을 그가 도맡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봐야 했다. 수숙이라 불리기 한참 이전의 그는 외성 기업에 잠입한 전선의 스파이였고, 지금은 '좋게' 퇴사한 슈나이더의 인맥을 이용하려 하고 있다. 그러니까, 눈 앞의 이 녀석을 꽂아넣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네 콜 사인은 '러스티'가 될 거다."

"헤에."

어찌저찌 '형식'은 갖춘 강화 수술을 마쳤다지만 가르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산더미다. 제대로 된 매뉴얼 같은 것은 당연히 소실된 지 오래이므로 경험에 기반한 가르침이 최선이었다. 다행히, 지시에 따르는 태도는 다소간 불량할지 몰라도 그의 AC 파일럿으로서의 적성은 압도적이었다. 그것만은 정직히 말해 천운이라고 봐도 좋았다.

"진지하게 들어. 네 진짜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내가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 이해하지?"

"알고 있어. 그 콜 사인의 의미도 이해한다니까. '현장의 판단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말도, 귀에 딱지 앉게 들었다고."

현장의 판단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말이 어떤 무게를 가지는지 이 애송이는 아직도 모르고 있다. 전선의 사람을 마주치면 쏴야 하고, 아는 얼굴을 격추해야 할 수도 있다. 누구를 믿고 믿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갈등하고 때로는 마음이 가는 이조차 떠나보내야 한다. 제대로 안심하고 잠들 수 있는 날은, 아마도 영영 없을 것이다.

"수숙."

"……."

"플랫웰."

"…너라는 놈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요. 정말로요."

플랫웰의 복잡한 생각을 안심시키듯 끊어버린 녀석이 드물게 눈을 내리깔고 얌전히 웃는다. 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루비콘은, 너를 필요로 한다."

"응, 알고 있어."

그는 오늘을 위해 얼기설기 만들어 둔 교본을 내려놓고 지친 듯 얼굴을 문질렀다. 에고 덩어리인 녀석의 프라이드에는 분명 녹이 슬고 말 테지. 그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떠나온 전장으로 그를 돌려보내야만 한다.

루비콘이 다름아닌 이 별의 아이인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레드 건 / 레드에게 다시 연락책 일을 맡기는 미시간

하크라가 죽었다. 그리드 135에서 루비콘 해방 전선 잔당과 붙던 도중이었다. 물론 녀석도 명색이 레드 건의 넘버링이다. 당연히 그 MT 무리에게 당한 것은 아닐 터다. 문제는 봉쇄 기구의 대형 무장 헬기였겠지. 해방 전선이고 기업 소속이고를 가리지 않고 화포를 쏟아부었을 게 분명했다.

하크라의 기체와 라이센스를 회수한 부대로부터 다른 정보 또한 자연스레 전해들었다. 그 헬기를 쓰러트린 치는 레이븐이라는 콜 사인을 가지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월터 녀석의 사냥개였던 모양이다. 분명 그 시가지에서 당장 필요한 라이센스 정보를 탈취해 제 개의 명의로 삼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 주인이 누구인지는 크게 의미가 없다. 녀석이라면 뻔뻔스레 제 휘하의 용병 교육을 부탁할 수도 있다.

사실 작금의 문제는 그게 아니다. 노장은 툭, 툭, 자신의 턱을 두드렸다. 목성에서부터 수많은 난전을 거쳐 온 그다. 당연히 휘하의 인물을 잃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여느 부대와 달리 그는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기억했고 이름을 불러 주는 실로 고지식한 타입의 우두머리였다. 당연히 숫자가 붙은 놈들은 각별했다. 아득바득 지옥 바닥부터 기어올라온, 장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주워다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놈들은 자신을 닮았다. 닮고 만 것이다. 자신이 아끼는 만큼 부대 내의 결속은 인간성으로 얽힌다. 당연히 있어야 할 녀석이 사라지면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슬픔을 느낀다. 그것은, 부대로서 치명적인 결점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미시간은 자신의 방식을 고수했다. 가슴 한 켠의 공허함을 두고, 지금은 이 쓸모 없는 녀석들을 돌봐야 했다.

우 화하이가 귀띔해준 대로라면 볼타나 이구아수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원래도 탄력성이 좋은 녀석들이니 서로가 있다면 괜찮을 터다. 아마도 지금 문제는 정에 약하고 무르기 짝이 없는 6번이다. 정례 회의 때 멀쩡한 체를 하고 있지만 큰 충격을 받은 것이 티가 났다. 회의록을 두고 오거나, 종종 다른 곳을 보거나, 집중하지 못하거나. 미시간은, 야속하게도 이런 상태의 애송이를 다루는 법을 잘 알았다.

"G6. 듣고 있나?"

"옛, 총장!"

등 뒤에서 경직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럴 때, 이런 원칙주의자 녀석에게 필요한 처방은, 하나다. 몰아붙이기. 네 녀석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을 거다. 이 상실에도, 이 일에도.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미시간은 돌아섰다.

"레드. 네 녀석이 다시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베스퍼 / 식후땡하는 오키프와 마테를링크

오늘따라 유난히 엉망이었던 구내식당의 점심 메뉴 덕에 심기가 잔뜩 상했다. 지상에 가까운 흡연실을 찾았더니 사람이 꽉 들어차 있었더랬다. 풀리는 게 하나도 없는 날이었다. 마테를링크는 속으로 잔뜩 투덜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올라 가장 높은 층을 눌렀다.

빙원에 설치한 전진기지다. 옥상에서의 흡연이 금지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외는 이가 갈릴 정도로 추웠다. 보온장치가 있는 지상 흡연실이 바글바글한 건 당연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나름 대장이니만큼 그에게 보급된 방한 재킷의 성능이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텅 빈 옥상에 부는 바람이 싸늘했다. 눈은 내리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서 그냥 빨리 한 대 태우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 마테를링크는 펜스 한구석을 차지하고는 한 개비 물고 클릭 타입 라이터를 꺼냈다. 그 때 시야 한 켠에 피로한 인상의 남자가 들어왔다.

"아, 먼저 와 계셨군요, 오키프 장관님."

"마테를링크인가. 아래쪽이 좀 북적거리지?"

김이 올라오는 종이컵을 들고 오키프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사람이 많아 올라온 건 그도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한 쪽 손에는 거의 다 피워 짧아진 한 개비를 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상관의 휴식을 방해한 모양새라 마테를링크는 조금 곤란한 마음이 되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불편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오키프가 손을 저어 왔던 탓이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마. 이것만 다 마시고 들어갈 거라서."

"예,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아래쪽은 마땅치 않아서요."

"추워서 그러려니 해. 네 재킷은 그들 것에 비해 그래도 성능이 나쁘지 않잖아?"

"하하."

오키프가 뱉는 말이 자신이 했던 생각과 비슷해서 마테를링크는 저도 모르게 웃으며 불을 붙이고, 한 번 빨아들였다. 백색의 빙원 위에 새빨간 하늘이 덮여 있고, 담배 끝은 하늘과 비슷한 색을 띠고 있었다.

"매번 여기 계십니까?"

"뭐, 그렇지. 사람이 없잖아."

"그렇겠네요."

이것만 다 마시고 들어간다, 는 말과는 달리 남자는 한 개비를 더 꺼내는 듯했다. 여전히 웃고 있던 마테를링크가 라이터를 켜곤 가까이 걸어갔다. 오키프는 익숙하게 고개를 숙여 담배 끝으로 불꽃을 빨아들이고,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러6 /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독립 용병 레이븐은 워치 포인트 알파 심도 3의 돌파를 완수했습니다.」

출격 직전, HUD 한켠에 떠오른 음성 메세지를 러스티는 열었다. 아르카부스는 월벽의 용병을 제대로 마지막까지 써먹을 모양이다. 한 번 그를 버림패로 쓰려고 한 것치고는 뻔뻔하게도, 위험한 작전에서 그를 가장 앞세웠다. 심도 3의 레이저 장벽까지 돌파해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대단히 복잡한 감정이었다. 안도, 불안, 그리고 이 마음 안에서 어찌할 도리 없이 커져가는 경계심, 그 모든 것이 뒤섞여 나온 러스티의 한숨은, 실로 길었다.

「이번 레드 건의 요격 및 섬멸을 의뢰할 때, 그가 수행하지 않는다면 당신, 베스퍼 4가 수행하기로 되어 있다고도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태연스레 베스퍼 5와 8을 격추했군요.」

미답 영역을 앞두고 제동을 건 아르카부스 앞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했다. 아르카부스가 의뢰한 레드 건 잔존 부대의 요격 대신, 베스퍼 5와 베스퍼 8의 급습을 수락했다고 수숙 플랫웰이, 그리고 지금 이 보이스의 주인인 베스퍼 2가 전해온 것이다. 혼란스러웠다. 분명히 그 목줄은 핸들러 월터가 쥐고 있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그의 사냥개는 나아가는 것이 틀림없었다. 기업이든, 전선이든, 돈을 받으면 그만인가? 혹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목적이 있나. 레드 건의 잔존부대를 격파하고, 그 '걸어다니는 지옥'을 격파하고 나서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과연… 미답 영역에 무단 돌입하려 하는 용병이 있습니다. V4, 당신의 다음 미션을 이해했겠죠.」

여유로운 듯한 베스퍼 2의 브리핑이 귀를 울렸다. 초조해졌다. 그는 여기서 돌아갈까? 아니.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직감은 맞을 것이다. 아마,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그일 테지.

전우,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내게는 사명이 있다. 무언가를 짊어지지 않은 너와는 달리.

네가 만일 방향 없는 폭력일 뿐이라면 나는 여기서 너를 멈춰야 해.

너는, 나아가서는 안 된다.

단 한 번도 그의 말에 대답한 적 없는 이를 향해, 남자는 중얼거렸다.


루비콘 해방 전선 / 아실과 쯔이

내부의 반대를 이기고 독립 용병 레이븐에게 의뢰한 덕으로, 벨리우스 남부 수용시설에 구속된 동지 구출은 어떻게든 종료되었다. 메샘의 죽음에는 가슴이 아팠지만 모두 지지 않고 잘 이겨내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수부를 구출할 수 있었던 점이 크게 다가왔다. 수부께서 살아남아주셨기 때문에 희생의 슬픔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몇 주가 지나 쯔이의 회복도 순조로웠다. 원래도 강직한 성품을 가진 그다. 씩씩하게 있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모두의 힘이 된다. 쯔이는 '여동생'이라는 말을 듣는 걸 싫어했지만, 쯔이가 '여동생'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강해질 수 있었던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조금 더 누워 있지 그래? 수술한지는 꽤 됐지만, 아직은 너무 많이 움직이면 안 돼."

"하아, 또 잔소리. 몸이 근질거리는 걸 어떡해?"

"너도 참…."

괜히 조금은 비뚤어진 표정을 해 보이는 쯔이를 달래는 것도 내 당연한 일과였다. 조금 열린 창문의 바깥에서 찬 바람이 들어오고 있기에 닫고, 그를 위해 들고 온 따뜻한 물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답답해서 열어 둔 거야. 왜 닫아?"

"안 돼. 이 상태에서 감기라도 걸렸다간 이번에야말로 로쿠몬센 씨가 할복하려고 할 걸."

"…흥."

"물론 나도 걱정하고 있거든."

쯔이는 내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머그에 담긴 따뜻한 물을 마셨다.침대에 걸터 앉아 있는 모습이, 확실히 처음 구출했을 때보다 훨씬 상태가 좋아 보여서 마음이 놓였다.

"뚫어지겠다. 뭘 그렇게 웃어?"

"아, 미안. …다행이다, 싶어서."

"뭐가?"

"이번에야말로 네가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약한 마음이 수도 없이 들었거든. 네가 약속했는데도…."

"바보 같은 소리."

쯔이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꼭 말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자,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분명히, 근질거리는 소리라고 싫어할 거야. 그래도.

"네가 버텨 줘서, 돌아와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메샘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을 그만둘 수가 없네…."

"AC에도 못 타는 약골이니까 그런 약한 생각을 하는 거야."

"너무해!"

…쯔이가 이 쪽을 보고 웃는다. 그제야 비로소 이 애가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다행이다.


레드 건 / 월벽 전 이구아수와 볼타

야, 볼타! 일을 배운다니 대체 무슨 소리야? 뭐? 아, 제발…, 너 그 미친 영감한테 같이 한 방 먹여주자고 했잖아! 몇 년 지났다고 벌써 잊어버린 거냐? 우 그 자식이 너한테 협박이라도 했냐? 아아?! 네가 부탁했다고?!

…그 영감한테 그렇게 굴욕적으로 두들겨 맞아 놓고, 몇 년이나 지났다고 벌써 송두리째 까먹은 거냐? 이 쓰레기같은 변두리 행성에 억지로 끌려 온 것까지도? 웃기지 마. 너는 잊어버렸을지 몰라도 나는 아냐.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자식을 박살 낼 거라고.

하? AC에 타지 않으면 그 영감을 쓰러트릴 수 있겠냐? 장사 따위 같잖은 생각을 하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미시간을 쓰러트리고 이딴 행성이든, 이 허접한 부대든 전부 때려치우고 나갈 거란 말이야!

지금 그 들개 새끼 얘긴 왜 하는데? 정규 기업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하는 들개가 우리에 비할 바가 되겠냐? 야…, 진심이냐? 그 새끼가 좀 우쭐거린다고 너까지 그렇게 말하는 거야? 아니면 그냥 할 말 없어서 변명이라도 하는 거냐?

4세대라고 다 같은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그 새낀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인데 왜 자꾸 걔 이야기를 하는 건데? 야, 아무리 레드 건이 거지 같은 기업 부대라도 독립 용병 나부랭이랑 우리가 같냐? 그 들개 새끼를 보고 뭐 대단한 감상이라도 들었나 본데 웃기지도 않아…!

…하, 꺼져, 이 새끼야. 너랑은 상종하기도 싫어. 너도 결국 그 미친 영감이 목줄 끌고 돌아다니는 데 좋다고 적응한 거겠지! 나일도, 우 화하이 그 새끼도 똑같이 그 영감한테 끌려다니는 걸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다니 참 대단하기도 하다! 장사? 그래, 해 보던가. AC를 버리고 나 없는 데서 네가 똑바로 살 수나 있겠냐?

닥쳐! 내 앞에서 그 영감 두둔하지 마.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그딴 얘기 하지도 마. 난 살아남을 거야! 그 목숨 귀한 줄 모르고 달려드는 들개 새끼하고는 달라. 왜? 볼타 너도 그렇게 멍청하게 방심하다가 콱 죽어버리지. 곧 월벽이잖아? 모르잖냐?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미시간 영감이 친히 구하러 와 주실지!


베스퍼 / 잘 됐네요, 스윈번 대장!

사실 스윈번 대장이 이런 일로 재교육 센터에 끌려간 건 처음은 아니다. 물론 전에 이렇게 대놓고 '거래'를 한 건 아니지만 알음알음 부대 내에 알려진 사건만 해도 셀 수 있을 정도긴 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훈계조치로 끝났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운이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PCA의 대응이 시작된 후 가뜩이나 날카로워진 스네일 각하의 심기를 건드릴 정도였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게 히알마르의 조사 캠프를 습격한 게 바로 그 레이븐이고, 그 사건으로 인해 PCA까지 빙원에 진입해 버렸다. 그런데 중요 거점인 「벽」의 사수도 놓쳤을 뿐더러, 그 레이븐에게 목숨까지 구걸했으니 각하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손대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번에는 그냥 끝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되었다. 우리 7번대는 상당히 어수선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지만 그런 것치고도 긴장감은 없었다. 저번처럼 언제든 태연히 돌아오지 않을까, 라는 대책 없는 기대가 있었던 것 같았다. 뭐, 그래 보여도 스윈번 대장은 성격이 좀 꼬였을 뿐이라 행동거지를 하나하나 조심해야 하는 1번대나 2번대에 속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어이! 스윈번 대장, 내일 센터 출소하신단다!"

"엥? 너무 빠르지 않아?"

"얌마, 누가 듣는다."

대원들이 저마다 웅성거렸다. 부대가 해산할 거라고까진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빨리 나와서 다들 놀란 기색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신기하긴 했다. 스네일 각하가 이번에는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거 아닌가?

지금 빙원에서는 C병기 아이스 웜의 토벌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지만 「벽」에 남겨진 우리 같은 후방 부대가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혹시 최전방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그런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을 때 대장이 출소했고 비로소 부대 오전 브리핑이 다시 시작됐다.

"훗, 녀석들. 오랜만이지만 해이하기 짝이 없군. 내가 없는 동안 느슨해졌던 마음을 다잡아 주마!"

"옛!"

…좀 피곤해보이는 것 빼고는 여전한가? 잘 됐네요, 스윈번 대장.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에게 청천벽력같은 빙원행 이야기가 떨어졌다.


레드 건 / 풍수약방 시절의 우 화하이와 나일

"헉, 허억, 헉…! 죄, 송합니다아, 부, 장…!"

"이 허약해 빠진, 자식들!"

숨이 턱에 걸리게 달리는 건 늘상 하는 일이지만 이 놈은 유독 끈질겼다. 평소에 체력 단련을 허투루 시키는 것도 아닌데 따라오던 녀석들은 모조리 뒤로 나가떨어졌다. 훈련 코스를 다시 짜야겠군. 하지만 내가 붙잡을 수 있다는 확신은 있었다.

다행히도 이 놈이 자칫 AC에 탈 일은 없다. 놈이 거금을 들여 마련했을 '풍수'의 AC와 그 격납고는 이미 우리 부대원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고 있는 상태. 여기서 놓친다 해도, 더 이상 놈이 도망칠 곳은 없다. 물론, 놓칠 생각도 없다. 놈이 코너를 돌았다. 걸려들었다. 반대편으로 넘어가기 위해 단층 건물의 얕은 옥상을 훌쩍 넘었다.

위에서는 놈에게 사법거래를 제안할 생각이다. 물론 놈은 잡히기 전까지는 거절할 거다. 그게 범죄자고 사기꾼이라는 족속이니까. '풍수'가 콜로니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처사이지만, 그게 또 '발람'의 방식이기도 하다.

원칙대로라면 그 재산과 함께 AC까지도 몰수행이겠지만…, AC를 잘 다룰 수 있는 녀석은 그렇게 많지 않다. 차라리 '기수'로서 목줄을 매어 버리는 편이 통제하기 쉬우니까. 놈도 죽는 것보단 이게 낫다는 판단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런 놈들 목줄을 잡는 데에는 정평이 나 있다.

얼마나 달렸지? 골목골목의 사람들을 제치노라면 슬슬 폐가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구겨진 스틸 볼라드를 짚고 방향을 바꾸는 놈이 보인다. 눈 앞에서 지나가려는 사륜차의 본네트를 뛰어넘었고, 놈은 반대편에서 오는 차를 제끼지 못하고 넘어졌다. 시끄러운 수 개의 경적 소리가 대로 한복판을 울린다. 하, 축하의 팡파레 고맙군 그래.

"헉, 헉, 큭, '나일'…! 어느 틈에…!"

"자아, 순순히 '이름'을 받아라. 좋은 걸로 줄 테니 말야."

절그럭, 주머니를 뒤져 수갑을 꺼낸다. 패색이 어린 놈의 낯짝이 우습다. 놈에게 줄 식별명은 이미 준비되었다.


스네프로스네 / 격납고의 수석대장은 콧노래를 부른다

"♪♬"

…이번에는 《반짝반짝 작은 별》이다. 제법 멋대로인 변주까지 넣어서는 리드미컬해졌다. 모성으로부터 아득한 거리에 있는 루비콘3에서까지 불리는 것을 알게 되면 과연 모차르트는 기뻐할 것인가. 복잡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모른 채 남자는 즐겁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러니까, 베스퍼의 수석대장, 콜 사인 '프로이트'가 승강 리프트 근처의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의 애기인 록 스미스 앞에 털썩 주저앉아서 태블릿의 페이지를 휙휙 넘기고 있는 모습은 제1부대원, 혹은 전담 미캐닉이라면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아마 웨폰을 고르며 다음 출격의 '준비'를 하고 있을 테지. 새 라이플의 보장 성능 데이터를 지금 행거에 거치된 웨폰들과 비교하는 듯했다.

태블릿을 뒤지다 록 스미스를 올려다보는 얼굴은 흡사 누군가에게 푹 빠진 소년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그가 동안인 부분도 한몫 하겠으나(우리는 이 원인을 그의 직업만족도로 추측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이제 중년이라 불리는 게 머지 않은 나이의 수석대장이다. 이런 식의 '무구해 보이는' 모습은 그다지 달갑게 다가오지 않는다. 특히 전장에서 그가 어느 정도로 잔학한 존재인지를 알고 나면 더더욱 그렇다.

입구 쪽에서 요란뻑적지근한 소리가 났다. 너도나도 앞서 고개를 숙이는 걸 보니 아마도 '각하'다. 수석대장이 개러지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이 시간에는 종종 있는 상황이었다. 리프트를 올라갈 때 은근슬쩍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지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제1격납고에 배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미캐닉은 긴장한 듯 작업에 얼굴을 묻는 척을 했지만 계속 헛손질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각하' 앞에서도 과연 수석대장이라고 천연덕스럽게 웃는 모습이다. '베스퍼'가 자신의 부대라고 말하는 남자 앞에서 어떤 상승욕구조차 느끼지 못하는 걸까? 늘 기묘하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이해가 갈 것 같았다. 확실히, 이 세계에서 그를 온전히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은 '각하' 뿐이다.

지금 '프로이트'는 '스네일'을 올려다보며 웃고 있다. 록 스미스를 바라볼 때의, 예의 그 표정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재미있게 만들어 줄 수단을 향하는, 그 얼굴.


풀 다이브 했다가 큰일 날 뻔한 오키프 씨

이번 수송 저지 건으로 확실해졌다. '독립 용병 레이븐'은 공생 중인 코랄의 제안을 따라 올 마인드와 접촉한 것이 틀림없다. 그가 보는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자명하다. 집합임계점을 넘은 코랄은 당연스레 전 세계로 확산될 것이고──그렇게 되면 우주가 다시 쓰일 대사건 발생이다. 놈은 그저 코랄 변이 파형에 대한 천진한 호기심과 갓 만들어진 가짜 연대감으로 그 속삭임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깊게 한숨을 쉬고 크레이들에 몸을 깊게 묻은 채 헤드기어를 고정했다. 일단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최소한 올 마인드의 행로를 저지한다면 접촉 빈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용병 지원 서버를 일시정지한다거나? 당연히 백업이 있을 테니 어렵고 리스크가 크다.

차라리 독립 용병 쪽의 미공개 회선을 건드려 놓는 쪽이 빠르다고 판단했다. 지금 어떤 코드를 사용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올 마인드의 암호화 회선에는 대개 파악하기 어렵고 골머리 아픈 규칙이 있기는 했다. 접선하기 어렵게 만들어 둔다면 당장의 미봉책 정도는 될 것이다.

크레이들의 커넥터가 목 뒤로 파고드는 불쾌한 감각을 잠깐 견디노라면, 접속 메세지와 함께 데이터가 시각적 공간의 형태로 구현되었다. 헤드기어의 어둠이 전면차단한 시야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수천, 수만 개의 데이터 스트럭처가 지나갔지만 지금 확인할 것은 아니다.

「DTA 상승 조정 완료. 바운스 다이빙으로 이행합니다. 바텀 타임 체크」

건조한 COM 음성이 프로세스를 알려 온다. 3대장까지 달게 된 이후 굳이 풀 다이브까지 동원한 것도 오랜만이었다. 놈과 놈의 핸들러는 지금 워치 포인트 알파의 심도 1에 있다. 지저 여행에 열중한 지금 손을 대 둘 필요가 있다.

구획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용병의 이상할 정도의 무패 전투 기록을 뒤로 하고, 아레나의 전적을 미루고는 메세지 데이터베이스를 찾아냈다. 다소간의 수신 설정만 변경한다면, 결정적일 때 메세지를 닿지 않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판단이었다. 하지만 잠깐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던 것이다.

자각하자마자 주변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 위에서 아래로 뻗는 것은 손인가? 아니, 다른 무엇이었나? 지금은 분명히 다이브 중일 텐데──

「경고. 다이버 오버헤드 확인. 다이브가 곧 해제됩니다. 액센트 레이트 상승. 디컴프레션 프로세스 진행──실패, 재시도에 들어──」

〔유감입니다.〕

뚝. 격통과 함께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것들의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긁어낸 지 이미 오래다! 들릴 리가 만무한 그건, 보이스웨어로 녹음된 메세지였다. 정교하게 사람 흉내를 내고 있는 C 변이 펄스의── 헛구역질이 났다. 남자는 아까 마셨던 것을 모조리 쏟아내고 크레이들 옆으로 구르고 말았다. 온 몸이 저릿거렸다. 그래, 그런 생물이었지,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정말 오랜만이군.

"크, 헉… 욱, 우,웨엑."

"오키프? 이게 무슨─"

문이 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바깥에서 누가 들어온 모양이다──스네일인가? 곤란한데. 아, 젠장, 레이븐. 정말 그건 그만둬라. 스네일에게는 뭐라고 설명하면, ───뺨이 뜨겁고 축축해졌다. 그 감각을 마지막으로 정신이 끊어졌다.


에어레이븐 / Weapon

시간이 없다. 레이븐을 태운 자일렘은 지금 카르만선을 돌파했다. 과거 V4를 달고 있었던 러스티가 그와 충돌할 것이라는 예상 분석이 남아있지만, 지금의 '레이븐'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레이븐은 '오버시어' 핸들러 월터가 남긴 최후이자 최강의 불씨이다.

행성 봉쇄 기구의 궤도 정거장은 몹시도 적막해서 레이븐과 나란히 있던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 본인은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지만 늘 주위를 요란스럽게 만들던 사람. 위성 포격 시스템의 권한을 우회취득한 직후, 자일렘 컨트롤 타워를 조준했다. 오버히트 타임 체크. 역시, 이게 빗나간다면 다음은 없다.

「새틀라이트 캐논 에임 보정 양호, 발사 시퀀스에 돌입」

봉쇄 기구 AI의 건조한 음성이 들렸다. '오버시어'는 멈추지 않는다. 그 신념은 살아서 꺾이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위성포로 자일렘을 멈추는 일 말고도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 더 있다. 레이븐의 저지. 둘 모두가 이루어져야 '우리'의 파멸을 막을 수 있다. 그걸 위해서는──

아아, 보인다. 그도 보고 있을 것이다.

나의 동포. 나의 형제. 이들의 수많은 목소리를.

그 목소리를 품은 기체가, 이 앞에 있다. 가능성의 현현. 어쩌면 스스로를 소모해라서라도 공존하고자 했던 '우리'의 방식. 내게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루비코니언으로서의 그들은 불살라져서는 안 된다.

「IB-07: SOL 644── 기동에 들어갑니다. 매뉴얼 드라이브 이행」

헤드라이트가 붉게 반짝인다. 나는 그것을 안팎에서 모두 관측했다. 그와 함께 보았던 이 행성의 적색과 닮았다. 그 찬란한 적색을 사랑했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와 '다른 것'을 구분할 수 있을 때부터였나? 누구도 들어 주지 않았다. 누구도 듣지 못했다. 나는 여기에 있는데도. 오직 그만이 들어주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결국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 당신은 모든 것을 불사를 때까지 멈추지 않는 무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너무도 늦게 깨달았다.

컨트롤 타워가 부서진 자일렘이 가까워진다.

스테이션 31에서 열원이 감지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다가오고 있다.


오버시어 / 핸들러와 사냥개와 우인友人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관측자들이 스러져 갔다. 반 세기가 조금 넘는 시간동안 그들은 자신의 '눈'을 다음 사람에게 물려주고, 또 그 다음 사람이 그 눈을 물려받으며 끊임없이 '업'을 계승했다. 그 정도의 일이었다. 미지의 공포를 눈 앞에 두고, 차마 어찌할 수 없는 파멸을 예감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모조리 불태우고 남은 것까지도 태워 두 번 다시 나타날 수 없을 때까지. 정말로 그것만이, 최선이었다.

반 세기가 찰나로 느껴질 정도로 허덕이며 달려 온 삶이었다. 기연의 죄악을, 코랄의 위험성을 깨달은 이들은 모두 같았다. 우주 각지로 흩어진 그들은 필연적으로 다시 도래할 재액에 대비했다. 필요한 것은 까마득하게 많았다. 무력, 기술, 재력, 인력, 온 우주에서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연결했다.

그리고 그 연결의 가운데에는 그가 있었다. 핸들러 월터.

또렷한 눈을 가진 소년이 성장하여 '오버시어'의 중심이 되었다. 그의 출신과 행적, 그리고 넘겨받은 모든 것을 생각했을 때 그 모든 끈의 중앙에 자리하기 알맞았다. 모든 관측자가 그리 바랐고, 자란 이 또한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핸들러 월터'는 그렇게 그 끈으로 스스로를 속박했다.

그는 죄악의 결과물을 받아들였다. 코랄 시술을 받은 강화인간들. 처음의 몇 번은 분명히 일을 그르쳤다. 남자는 보기보다 정이 많았고, 그 탓에 데려 온 용병을 수 번 최악의 형태로 잃었다. 개중의 누군가는 그 어리석음에 경멸을 표하며 등돌렸다. 그 자신의 신체까지도 일부 잃고 나서야 관측자 중 하나가 단호하게 말했던 것을, 남자는 뇌리에 쭉 새기고 있었다.

〔네가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지 잊지 마라, 월터〕

수많은 것들의 속삭임이 보인다. 잃어버린 이들. 떠나보낸 눈들. 이 별의 적색.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결국 또 다시 자신의 수많은 사냥개들과 자신을 잇는 끈. 그 끈의 끝에는 부정해야 하는 감정이 있다. 여기까지 도달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여기까지?

「621, 거기에 있는 것은, 너냐」

〔너는 우리의 우인友人, 사명의 증거다〕

〔우리의 존재를 네가 기억하고 지지해 이어가 주는 거야〕

사라진 우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눈 앞에는 그가,

평범한 삶을, 그것은 이기적인 속죄였다. 네가 번 돈이다, 그런 말로는 되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있다. 우리들의 일은 끝이다, 제발, 621. 모든 것을 마치고──

그의 옆에는 반짝이는 목소리가 있다. 분명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 불씨가, 너를 지지해 주었구나.

그래. 네게도, ──우인이.


621월터 / 개러지에서

짤막한 브리핑이 끝나고 출격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다. 이송 헬기를 대기시켜 둔 상태에서 개러지의 두 사람은 테이블을 하나 두고 마주앉아 있었다. 소파에 몸을 깊게 묻은 핸들러 월터는 말없이 태블릿을 조작하다가, 주변시로 얼쩡거리는 움직임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지, 621."

반대편에서 대답은 없다. 원래도 의사표현이 뚜렷하지 않고 말이 없는 녀석이다. 앞선 '하운즈'에 비해서도 유독 그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자극'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다른 AC파일럿과 어울리게 해 본 적도 있었지만 그리 만족할만한 결과는 아니었다.

여전히 어색하게 얼쩡거리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핸들러 월터는 그 움직임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지금 보고 있는 일을 내려두고 그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우물쭈물하다가 조금씩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거리를 좁힌 녀석은 조심스럽게, 월터의 옆에 앉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이야기해라."

그는 그 말에도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의식적으로 몸에서 힘을 빼고, 월터에게 기대어 왔다. 「당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라는 제스처를, 월터는 어렵지 않게 전달받았다. 기댄 몸이 딱 좋을 정도로 따뜻한 상태였다. 아마도 약간 졸린 상태인 것 같았다.

'사냥개'는 아주 가끔 그런 형태의 감정적 요구를 해 왔다. 아주 가끔이었다. 감정이 희박한 상태에서도 드물게 무언가를 찾는 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런 때였다. 별 일이 아니라면 들어가서 수면을 취하라고 지시했을 것을, 그의 핸들러는 굳이 내버려 두었다. 짧은 한숨과 함께 담요를 덮어주면서까지.

녀석은 곧장 잠들었다. 구세대의 통상 수면 모드는 재깍 온오프를 전환할 수 있다. 늘 그랬듯 제가 알아서 타이머를 설정해 두었을 것이다. 곧 출격인데도 어쩐지 긴장감이 없는 모습이라고 생각한 남자는 짧게 한숨을 쉬고 켜져 있는 태블릿으로 시선을 돌렸다. 왼쪽 어깨에는 조금 따뜻한 김이 느껴진다.

출격까지는 시간이 약간 남았다. 조금은 쉬어 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실종 미션 레드 시점 / here in hell

주변은 온통 불바다였다. 공용 회선으로 계속 아르카부스 MT 부대원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지는 무인기의 습격으로 인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 워치 포인트 알파 심도 2에, 그는 '홀로' 남아 있었다. 그토록 경애하던 총대장도, 다른 동료들도 모조리 잃어버렸다. 그나마 생존을 확인할 수 있었던 이구아수의 생체 신호까지 미답 영역에서 소실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 고통조차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G6, 네녀석은 후방 지원으로 남아라. 이건 명령이다.」

처음에는 그 명령의 의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총대장에게 자신이 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G4가 월벽에서 공석이 되고, G2 또한 심도 1의 진입에서 피치 못할 희생을 했다. 발람 인더스트리가 자랑하는 최강의 부대 레드 건은 궤멸 직전까지 와 버렸다. 자신의, 자랑스러운, 모두의, …….

레드 건 잔존 MT부대는 철수하지 않았다. 철수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거기에 아르카부스의 베스퍼 4가 대응할 것이라고, 총대장의 라이거 테일이 재조정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당연히 레드 건의 승리를 확신했었다. 당연했다. 총대장의 라이거 테일이 있다면, 다소의 희생은 있을지 몰라도 V4 정도를 격파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상대는 규격 외였다── 그는 그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을 후방으로 남기고자 한 총대장의 의도를 깨달았다. 총대장은 자신이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살아남으라고, 살아남아서 추하게나마 기어 올라가서, 저 빙원의 공기를 다시 폐에 담아 섬기라고 명령한 것이다.

"하하."

헛웃음을 흘리게 된다. 온통 오류 메세지를 던지는 주변의 격벽과 불꽃으로 시야가 새빨갛게 점멸하고 있다. 산소가 부족해지고 있다. 숨을 쉬는 것도 조금씩 어려워진다. 그 가운데 차례차례 아르카부스의 MT를 격파해간다.

이런 녀석들에게 쓰러질 정도로 레드 건은 만만하지 않다. 그렇지요, 총대장. 그 때 우군 식별 신호가 보였다. G13, 레이븐. 레드 건에 몇 번이고 머물렀다 사라지는 까마귀의 콜 사인을.

"네놈은… G13이냐?"

─아, 이것은 네 녀석에게서 비롯된 지옥인가.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가 닿았다. 모든 것이 그가 13번 기수를 받아간 후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선배나 다름없지 않은가? 본인에게도 악몽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 지옥의 중심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면, 분명히 견딜 수 없어지겠지. 눈 앞의 기체가 가벼운 움직임으로 MT를 정리하고 자신에게 돌아온다.

G6 레드는 남겨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형이고, 선배이며, 기용 담당이다.

'규격 외'인 13번 기수에게도, 그 사실은 달리 적용되지 않는다.


술라월터 / 그게 네 잘못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배스큘러 플랜트가 아직 지상에 남아 있던 기연의 지하도시에는 부모 세대의 개척에 신물이 난 일부 루비콘 이주 2세대들이 모여들었다. 어느 정도 테라포밍을 마치고 거주 그리드 건설까지 마쳤지만 지상에서의 생활은 여전히 척박했기 때문이었다.

그 녀석과 처음 만난 게 그 때였다. 빌어먹을 1조수의 실험에 처음 동원되었을 시기였다. 꼬마치고 이상할 정도로 형형한 눈빛이었다. 여전히 떠오르는 그 또렷한 시선은 솔직히 말해 불쾌했지만, 그 이후는 그따위 것은 신경쓰지도 못할 정도로 끔찍한 나날이 이어졌다.

신자원으로서의 코랄에 눈을 돌린 연구자들은 우리의 거주 구역을 거대한 케이지로 사용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코랄의 정보도체 특성을 이용한 강화인간 작성으로 AC와의 싱크로를 높인다는 발상이었지만, 뭔지도 완전히 규명하지 못할 물질을 뇌에 쑤셔넣는다는 건 당연히 터무니없었다. 아니, 이미 그때쯤의 그들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코랄이 그저 단순한 신물질이 아닌, 생명체 군집이라는 사실을.

열 명 중 한 명이나 살아남을까 말까 한 수술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미쳐버리거나 죽어갔다. 나는 운이 좋게 살아남아 AC에 탈 수 있게 되었다. 말도 안 되는 학살을 저지른 기연의 쓰레기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는 우선 살아서 도망쳐서, 힘을 길러야 했다. 어떻게든 성계의 우주정거장에 닿았을 때는, 발 밑이 이미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이비스의 불. 복수는 허망하게 재가 되어 흩어졌다. 용병 일을 하며 살아가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가장 바라던 일을 잃어버린 삶은 가치가 없었다. 루비콘3의 상황은 변해버렸다. PCA가 그 자리를 차지했고, 루비콘3에 진입하는 것들을 「사냥」하라는 의뢰를 보내왔다. 코랄을 노리고 다시 기연 같은 놈들이 들어오지 않도록. 그리고 그 「진입하는 것」들을 엿볼 기회가 생겼을 때, 그 이름을 발견했다. 「월터」.

핸들러의 이름을 달고, 개를 끌고서 놈은 돌아온 것이다. 코랄이 탐이 난 것인가? 그토록 명민한 눈을 하고도 결국 아비의 계보를 이어버리나. 우습기 짝이 없었다. 아, 물론이지. 기꺼이 몇 번이고 「사냥」해 주마. 그게 네 잘못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글쎄.


브런치 / 지금의 네 번째

일어났어, 레이븐?

아, 미안해. 몸을 가누기가 힘들 거야. 침대 헤드를 조금 높일게. 우주공항 터에서 샤르트뢰즈와 킹이 탈출 포드를 찾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어. 나도 조금 충격을 받는 바람에…. 아냐, ‘레이븐’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파일럿의 파트너라면 응당 각오했어야 했던 일인 걸. 응, 당신이 처음 그 이름을 얻었을 때처럼…. 그렇지. 그래도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어쨌든, 이제 그 이름은 쓸 수 없게 되었네. 응, 괜찮아. ‘다음 이름’은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 두 사람에게 부탁해 보거나…, 앗, 내가? …그럴까. 당신 부탁이라면 고민해 볼게. 후후, ‘레이븐’ 다음의 이름이라니 어깨가 무거운 걸.

‘새’ 레이븐은…, 어땠어? 당신 마음에 들었으려나? 알아, 마음에 차지 않았으면 당신이 거기에서 멈추진 않았을 거고. 파일럿으로서의 기량은 아직이려나, 싶으면서도……. 응, 꽤 좋은 오퍼레이터가 붙어 있는 것 같았지. 아이, 참. 지금 그런 말 해 봤자…, 알아. 그래도 그 오퍼레이터의 기량도 제법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해. 어쩌면…, 당신 말대로 이 별의 미래를 지켜 볼 정도의 사람일지도 몰라.

기억하지? 스테이션에서 킹과 샤르트뢰즈가 양동으로 시간을 벌어 주고 우리는 이 별의 정보를 퍼트렸을 때, 당신, 고여버린 이 별의 미래에 무언가 변화가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잖아. 어쩌면 그게 거대한 불길을 불러올지도 모르는데, 그 한 줌의 가능성에…, 당신은 걸었어. 응, 이해해. 이대로 봉쇄 기구가 닫아버린 별에서는 어떤 것도 살 수 없을테고, 이윽고… 전부, 시들어버리고 말 거야.

나, 당신이 그 때 한 선택이 옳았다고 믿어. 당신은 ‘코랄’이 생명체라고 생각하지? 루비콘에 사는 인간도, 원주민인 코랄도 공생할 수 있는 제 삼의 수단을 모색하고 싶었던 거지? 그 과정에서 어떤 희생이 있어도, 이 다음의 무언가가 보고 싶다고, 그리고 그가 그것을 성취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거지?

…나, 당신의 이 다음 이름이 떠올랐어. 들어 줄래? 당신의 다음 이름은, …….


스네프로스네 /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지 말아주세요

“프로이트!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나 지정 근무 시간은 노는 시간이 아니라고 누누히 말했는데도 도저히 제대로 주워섬겨 들은 적이 없는 남자다. 베스퍼 파일럿 직군의 근무 시간은 출격 일정 이외에는 제법 유연한 편인데다, 그나마 존재하는 지정 근무 시간조차 그렇게 긴 편도 아니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할 테지. 다른 파일럿이라면 애저녁에 재교육 센터에 처박았을 근태이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상대가 다름아닌 베스퍼 1, 프로이트였기 때문이다.

그가 누군가, 베스퍼의 이지와 모략의 상징, 베스퍼 2 스네일 각하다. 저렇게 씩씩거리며 찾아다니는 모습은 한 달이 넘게 근무한 격납고 담당들이라면 다들 한 번쯤 봤을 테지만, 각하의 수행원인 나에게도 보통 일은 아니다. 하여간 각하도 포기라는 것을 참 모르는 남자다. 베스퍼의 수석대장 프로이트는, 어지간하면 몇 번 봤을 때 이상한 사람이라는 걸 눈치채고 뒷걸음질 칠 인종이다. 아니, 이 사람이니까 그런 인종을 감당할 수 있는 건가.

“각하, 제1격납고에 방금 수석대장이 들어갔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쪽으로 모실까요?”

“하아…, 그러죠.”

단말에 로드한 위치를 안내하니 순순히 그쪽으로 향하기로 한다. 아마 이번 ‘팩토리’에서의 검증 결과를 논의하기 위함일 것이다. 통상이라면 기업의 이런 잔학한 실험이 수면 위로 올라올 일은 없다. 하지만 여기는 루비콘 3 성계 지부고, 차석대장이 주도하는 실험은 그만한 중요도가 있었다. ‘무엇이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가’에 대한 논의를 AC를 통해 검증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 실험의 주된 테스트 파일럿은 수석대장이었다. 아마 지금에 이르러서는 무엇이 AI이고 무엇이 인간인지 전투만으로 구별할 수 있는 경지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많은 실험이 이루어졌고 주목할만한 성과를 얻었다. 선진개발국 인공지능 파트에서도 유의미한 결과물을 내놓기 시작했다.

제 1격납고에 들어서자 너도나도 앞서 고개를 숙인다. 개러지 한복판을 지나 각하는 우리를 물리고 리프트 위로 올라가 수석대장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남자는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는 이해할까? 저 웃음의 뒤에 도사린 의도는 모르겠다. 하지만 저 ‘각하’가 자기 머리 위에 두기로 결정한 남자다. 우리로서는 별 도리 없이 따를 뿐이다.


우 화하이가 마테를링크에게 집적거릴 뿐인 이야기

“이런,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 곧 집적 코랄에 도달할텐데, 목표도 달성이겠다, 조금 웃어보는 건?”

“한담을 주워섬길 시간이 있다면 기체 정비에 만전을 기하길 바란다.”

“저런, 쌀쌀맞기도 하지. V6, 6번 기수에, 6번대 대장인가. 이럴 때는 억지로라도 여유있는 체 하는 게 좋아. 머리가 초조해하면 발 아래 둔 녀석들이 불안해하거든.”

“주제넘은 충고도 자제해주었으면 좋겠는데.”

“너무하는군. 젊은 당신을 생각해서 경험에서 우러나는 말을 해 주었을 뿐이야.”

“…….”

“그러지 말고 들어 봐. 내 오늘 아침에는 점을 쳤지. 여기는 또 루비콘이라, 모성에서 읽던 별의 흐름하고는 차이가 있단 말야. 그런데 내가 또 변칙적 독해에는 강하지. 웬걸, 길조 중의 길조가 나왔다니까. 그러니 오늘은 분명 그 끝까지 도달하게 될 거야, 누구도 아닌 자네와 내가!”

“…G3, 우 화하이. 당신은…”

“음? 질문사항이 있다면 뭐든지 말해 봐. 초회는 너그러이 수업료를 면제해 주고 있거든.”

“독립 용병 레이븐이 레드 건 잔존부대를 격파했다고 들었는데. 우리에게 붙은 건 분명히 대가를 생각했을 때 후회할만한 일은 아니겠지만…, 당신은 아무런 감상이 없는 건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데.”

“아차~ 초장부터 사적인 질문인가. 이건 조금 곤란한걸. 뭐어, 대답을 못 해줄 것도 아니지만….”

“이걸 질문으로 받아들이나? 그건 그것대로 상종하기 싫어지는군.”

“나 참, 정말 까칠한 아가씨야. 레드 건의 선머슴들하고는 또 달라서 어렵군. 댁 같은 모범생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후후. 나는 발람 치하 성계에서 사업을 하다 레드 건에 목이 매인 신세라 말이지.”

“한심하고 뻔한 이력이군. 당신이 의무 같은 것에는 일절 얽히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겠어.”

“뭐어, 그것보다는…, 생존력이 좋다고 해 주겠어? 사랑하는 이를 슬프게 만들지 않기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소중히 여긴다~ 흠, 어필이 좀 되었을까?”

“불쾌해. 1000m 이내로 접근하지 말았으면 한다.”

“아~ 역시 어렵구만. 어이쿠. 레이더 내에 미확인 무인기 다수 포착. 그럼 실력으로 어필해 보실까나. 아! 통신 끊지 말아 주겠어?!”


루비콘 기술조사연구소 / 좀 웃어 봐라, 이 녀석아

나가이 교수의 제 2조수는 단언컨대 그렇게 아이를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다. 교수의 부탁으로 ‘장난감’이라도 만들어 주라는 주문을 들었지만 당연히 그의 특기인 ‘장난감’ 만들기라는 건 애들이 가지고 놀 만한 애착물건 조립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이 사람은 애초에 조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정말이지 황당하기 그지없었으나 일단 떠맡은 꼬마에 대해서는, …그도 수용해야만 했다. 애초에 그 제 1조수의 아들이다. 나가이 교수를 위시한 연구진 모두가 그 참상에 책임이 있었다. 교수가 돌봐 준 이래로 웃은 적이 없다고 하니 골머리가 아팠다.

애초에 장난감이란 뭐지? 단어 본연의 의미로 돌아가기엔 그도 꽤 나이를 먹었다. 게다가 장난감이라는 게 연령대에 따라서도 꽤 다르다고 들었다. 그가 어릴 때의 장난감과 지금의 장난감은 기술적으로도 완전히 다른 물건일 텐데. 열 살 남짓의 꼬마가 좋아하는 건 뭘까? 기왕 하는 거 좋아할 수 있는 걸로 만들어야 할 텐데. 그가 스스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음을 깨닫는 건 꽤 오래 후의 일이었다.

“짜잔.”

“…이건….”

“환영 선물이야, 꼬마. 뜯어 봐.”

유난히 조용했던 소년의 또랑한 시선이 돌아오자, 그는 의기양양해졌다. 제 아무리 무뚝뚝한 꼬맹이라도 이건 웃지 않고는 못 배길 거다. 포장지를 풀면 상자가 하나 보인다. 그 안에는 조금 유치한 색상의 팟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뭐 흔히 말하는 마법 냄비 같은 거. 그 주변으로는 이것저것 ‘부속품’들이 준비되어 있다. 성간 쇼핑몰에서 히트 상품 참조를 좀 했지. 자,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뜯어서 넣어 봐. 나름 마법의 냄비거든? 조합식은 미리 준비했으니 설명서를 잘 읽고, 순서대로 넣어 보는거야.”

“…….”

아, 이 녀석 의심도 많네. 눈 예쁘게 안 뜨냐? 그런 얘기까지는 할 수 없으니 속으로 삼키고 얼른 해보라고 손짓했다. 너무나도 친절하고 상냥한 설명서를 읽으며 차근차근 팟에 물을 넣고, 칩이 내장된 별 모양 플라스틱을 넣고, 준비된 밀가루와 깃털을 뿌리면 내장된 초소형 가습기가 수증기를 내뿜는다…! 크, 이펙트까지 완벽해. 이제, 수증기로 가려진 냄비 바닥에서 그게…!

퉁, 소리와 함께 하얀 개 모양 인형이 튀어나왔다. 비장의 강아지다. 잠깐 허공에서 포물선을 그리던 솜뭉치는 퍽, 녀석의 얼굴에 적중하고 말았다. 아, 젠장! 사출용 스프링이 적당한 게 없어서 아무거나 썼더니! 울어버리면 곤란한데…! 교수한테 뭐라고 설명을…!

“…….”

“괜, 괜찮아?! 다치진…!”

“…풉, 흐, 하하하.”

“너…!”

“으, 하하. 괜,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칼라….”

웃지 않았다고 하는 이 애가 실소를 터뜨리자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고 말았다. 근처에 있던 의자에 털썩 앉아 한숨을 쉬고 있노라니 그 꼬맹이… 월터는, 하얀 개 인형을 웃다가 난 눈물이 고인 눈으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비콘 해방 전선 / 힘내는 미들 플랫웰 씨

실패한 레드 건에 이어 러스티가 아르카부스의 「월벽」에 참가하게 됐다. 녀석에게는 베스퍼라는 조직 내에서 온전히 자리잡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할 것을 지시했지만, 이 결과로 전선은 「벽」을 잃게 될 것이다. 스트라이더를 잃은 직후 저거노트마저 잃는다면 더욱 뼈가 아플 게 분명하지만 당장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러스티는 전선 비장의 카드다. 반 년만에 4번 대장이라는 직함을 단 지금 시점에서 의심을 사서 좋을 것이 없다.

그 외의 상황도 결코 좋다고 볼 수 없었다. 벨리우스 전역에 이어 BAWS가 제 2공창 내에 숨긴 「우물」까지 고갈되었다. 밀웜을 키울 여럭이 되지 않아 아사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들어올 때마다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무능해진 수부를 대신한 지 오래 된 나지만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종교적인 믿음 대신 현실의 대안이 필요했다.

그래도 독립 용병에게 비밀 회선으로 접선 후 회유하는 방법은 수확이 있었다. 기업 소속이 아닌 파일럿인 만큼 개개인의 역량은 떨어질지 몰라도 지금은 작은 손 하나가 급한 상태였다. 실제로 '레이븐'이라고 하는 독립 용병에게 접선한 결과 주목할 만한 행적을 볼 수 있었다. 단신으로 레드 건의 넘버링 두 명을 상대로 갈리아 댐을 사수해 낸 것이다. 그 두 명 중 하나는 이번 실패한 「월벽」에서 사망이 확인됐다는 보고를 들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좋은 일만 있으라는 법이 없다. 이번의 「월벽」에 참가하는 것이 바로 그 레이븐인 것이다. 아르카부스의 구매를 독립 용병이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그가 돈에 의해 움직이는 용병이라면 전선이 기업에 이길 기회도 희박하지만 있다.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나에게는 있었다.

이 이야기를 러스티 녀석에게 전하면 분명 마냥 좋아하지는 않을 터다. 슈나이더에서의 내가 그랬듯 녀석도 다르지 않아, 끊임없이 의심하고 시험하고 싶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변할지도 모른다면, 달라질지도 모른다면───우리는 그에게 걸어 봐야 한다, 러스티.


레드 건 / 만취한 이구아수 주워가는 볼타

[볼타! 어떻게 좀 해 줘! 이구아수 자식 일어나질 않아!]

수화기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오늘 보급이 왔다고 식당에서 한바탕 벌이러 간 MT부대 쪽 녀석들이다. 이구아수도 거기 끼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자제 못 하고 마셔 대서 쭉 뻗은 모양이다. 나는 영감이 시킨 일이 있어서도 있지만 오늘은 왠지 마시고 싶은 컨디션이 아니어서, 이구아수 녀석이 틱틱거리는 걸 무시하고 남았더니 뒤치닥거리를 해야 하게 생겼다.

"용케도 안 버리고 전화를 하네. 그 주사 감당이 되냐, 들?"

[그렇게 말하지 말고 빨리 와~! 올버니 옷에 토했다고, 이 자식!]

"에이…."

투덜거리며 겉옷을 챙겨 입고 숙소 문을 나서, 식당이 있는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온통 시끄러운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문을 여니 만취한 놈들이 흐느적거리며 큰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아니, 적당히 좀 마시라고.

"어~이 볼타! 이구아수도 내팽개치고 일이라니 어떻게 된 거야~"

"아, 제발 닥쳐. 왜 보급 올 때마다 단체로 이 난리야?"

"너야 매번 그렇게 마셔도 마지막까지 남잖아. 네 술이 센 걸 왜 우리 탓을 하고 그래."

킬킬거리는 놈들 주변으로 불쾌한 술 냄새가 풍긴다.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꾹꾹 누르고 이구아수가 있는 곳을 찾았다. 어렵지는 않았다. 저쪽에서 쿵 하고 치고받는 소리가 났으니까. 이구아수는 장난스럽게 옆사람을 툭툭 치는 버릇이 있다. 하여간 술버릇도 더러워.

"야, 이구아수. 뭐 하냐? 빨리 안 가면 영감이 점호 시간에 난리피운다."

"오~ 볼타아. 오늘 들어온 게 도수가 죽이더라. 빙원 나가도 안 추울 것 같아!"

"개소리 좀 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팔을 붙잡고 일으키니 아니나다를까 역한 냄새가 가까워졌다. 턱 끝까지 욕이 치밀어오르는 걸 참고 힘이 빠진 놈을 부축했다. 아, 이 새끼. 내일 밥이라도 사야 할 거다.

"아, 더 마실 수 있다고~"

"지랄하지 마라."

꿈질거리는 이구아수를 끌고 가면서 전화를 걸었던 포토맥에게 눈짓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놈도 마찬가지로 만취한 올버니를 부축해 데려다 주려는 것 같았다. 남은 놈들은 알아서 하던지, 영감에게 털려도 내 알 바 아니지. 그렇게 투덜거리며 숙소로 향했다.


아실쯔이 / 유년의 인게이지먼트

십여 년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건물 외벽과 천장이 부서져 바깥이 드러난 사이로 비쳐드는 햇빛을 따라 먼지가 반짝거리며 부유하다 떨어져내렸다. 우리가 코랄에 대해 가지는 마음과 비슷하게, '불' 이전 루비콘 이주 1세대에는 거대한 존재에게 마음을 의탁하는 이가 일부나마 존재했고 그 장소는 그런 이들을 위한 곳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건물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누구도 오지 않는 공간이 되어버렸다고도.

앙상하게 살만이 남은 창문에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색색의 유리가 가공되어 들어갔다고 했다. 긴 의자가 분명했을 목재는 불타거나 썩어 문드러져 더 이상 용도를 다할 수 없게 되었다. 가운데로 나 있는 긴 길의 끝에는 형태만을 간신히 유지한 연단이 보였다. 적막의 가운데에는 나와 그 애만이 있었다.

아마도 그 때는 이미 좋아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폐허가 된 장소를 신기한 듯 돌아보는 늘상의 그 표정을 정말로 좋아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껏 긴장이 차올라 되는 대로 지껄일 수밖에 없었다. 쯔이, 나 수숙이 주셨던 파일에서 읽은 적이 있어. 지구에서는 이 길을 지나오고 나서, 영원히 함께한다는 맹세를 한대.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았을 때는 아차, 싶었다. 영원히 함께, 라는 말의 의미를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받아들였던 것이다.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던 그 애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순간에는 긴장감이 터져 눈물까지 날 것 같았다. 뭐야, 바보 아실. 그런 건 맹세까지 할 필요도 없잖아. 너는 내가 없으면 금새 울어버리니까, 내가 꼭 돌아와서 지켜 주지 않으면 안 된다구. AC를 요람 삼아 자란 그 애는 곧 '돌아오는' 일상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나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게 싫지는 않았다. 다만 분하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너 또 바보 같은 생각 하지? 그 애의 머리 위로 햇빛이 드리웠다. 산란하는 루비콘의 하늘을 따라 발갛고 노란 베일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야, 그런 거. 변명하듯이 고개를 돌리려다가 그 애가 뺨을 붉히고 있다는 착각까지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럼, 맹세할 테니까. 들린 말에 잠시 아득함을 느끼는 순간, 입술에 따뜻한 것이 와 닿았다.


베스퍼 / 스네일 군 생일 챙기는 호킨스 씨

"매번 그렇게 놀라는 표정을 해 주니 보람이 있구만, 스네일."

"놀란 게 아닙니다. 용케도 아직 그런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이런 반응이다. 평정을 가장하고 싶어하지만 그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싶어 웃음이 나왔다. 저런 대답치고는 적극적으로 '그런 일'에 대해 제지 사인을 보내지 않는 것도 그의 재미있는 점이다.

"뭐, 일단은 물자 담당이니까. 대장이 몇 명이나 된다고 그걸 대충 넘어가면 섭섭하잖나?"

"그럼 나를 빼면 되지 않습니까? 가뜩이나 바쁜 사람에게."

"그건 안 되지, 스네일. 차석 체면이라는 게 있잖아."

루비콘3 원주민들과의 교착 상황이 지속되어 「월벽」의 준비로 예민한 스네일 군이었다. 부대 곳곳에 불똥이 튄 모양이라 나는 더더욱 그냥 넘길 수는 없다는 판단을 했다. '아직까지는' 그는 나에게 모질게 굴지는 못할 터다. 그런 확신과는 별개로, 어찌 되었든 테이블 위에 내려 놓은 부드러운 케이크 형태의 대용식에 스네일 군이 포크를 꽂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맛은 좀 괜찮나, 스네일 군? 최근은 공사가 다망하지?"

"아직도 그 호칭인가요…, 일단은 순조롭다고 해 두겠습니다."

반응과는 달리 내가 '군'을 붙였을 때는 '상담'을 할 때라는 걸 안다. 내가 V5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는 차근차근 위의 넘버링을 제치고 상승가도를 달렸다. 그가 부하이던 시절부터 차석에 이른 지금까지, 필요할 때는 이야기를 듣고 등을 밀어주었다.

"…그런 연유로 이번에는 V4의 테스트를 겸하려고 합니다."

"음, 그렇지. 아무리 슈나이더의 추천이라지만 반 년만이라, 역시 자네 입장에서는 마뜩찮지?"

"마뜩찮을 것까지도 없습니다. 쓸모가 없으면 내버리면 그만이니까요."

그렇게 대답하며 잔을 기울이는 걸 보니 제법 기분도 나아진 모양이다. 루비콘3에서의 일월의 주기는 다른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모성 기준으로 한 해가 흘렀음을 알릴 때의 표정들은 언제나 다양했다. 일 년 전과 비교해 가장 달라진 이는 늘 스네일이겠지만, 본인은 깨닫고 있지 못한 모양이다.


마지막 30일차는 연재라서 다른 포스트로 뺍니다(ㅋㅋㅋ)

30일간 정말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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