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인연

리월의 선비.

첫만남

1.

가볍게 손을 들어 햇볕을 막은 남자는 몸을 흔들어 짐을 고쳐매었다. 그의 이름은 로언. 페보니우스 기사단의 기사이다. 몬드의 기사가 어째서 리월에 있는 지를 알려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그는 현재 기사단장의 파견으로 무리하고 있는 단장대행의 대행..이다.

얼마 전, 몬드와 정기적으로 교류하고 있는 리월 모 상단에 협박 편지가 도착했다. 이에 페보니우스 기사단은 기사단의 기사를 파견해 마차를 호위해주겠다 나선다. 여기까지가 이야기의 서론이다. 본래라면 일반기사 두어명을 파견하면 될 일이지만 몇 주째 단장실에 박혀 서류와 싸웠으니 단장실 밖의 적들과 싸우고 오라는 단장대행의 지시에 따라 그가 파견나온 것이다.

로언이 리월로 출발하기까지의 하극상과 반항은 이 이야기와 맞지 않으니 잠시 미뤄두도록 하자. 어쨌거나 그는 리월에 도착했다.

“여기가 리월항인가.”

2.

상단주와 이야기를 마친 로언은 아닌 척 피곤에 절어 있었다. 몇주째 실전은 커녕 기초훈련만 겨우하던 그의 체력은 리월항의 땅을 밟은 순간부터 항복을 외치고 있었다.

‘밥을 먹자… 일단 숙소를 잡고 생각해야겠어.’

“끄응..”

기사단장 대행의 대행..으로 나온 이상 그의 태도가 곧 기사단의 태도였다. 페보니우스기사단의 문양이 보이는 중에는 적어도 빈틈없는 기사의 모습을 유지해야했다. 그래서 로언은 새까만 망토를 두르고 곧게 폈던 허리를 구부렸다. 문양만 안 보이면 누가 그를 기사단의 기사라고 알 수 있겠나?

다시 말하지만 기사단의 체면까지 챙기면서 식당을 찾기엔 그의 체력은 바닥난 지 오래다.

3.

‘적당한 맛집 어디없나. 이왕이면 술도 팔면 좋겠는데..’

그떄 로언의 눈에 갓을 쓴 사람을 들어왔다. 어두운 적발에 검은 눈을 가진 사람은 딱 봐도 일반인 같지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복장을 보아 리월에 사는 사람을 아닌 듯 했지만 리월의 차를 능숙하게 마시는 모습을 보아 매우 박학다식하거나 리월이 익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루언에게는 자신에게 맛집을 알려줄 수 있을지만이 중요했다.

오. 저 사람 굉장히 박식해 보이는데? 한 번 물어볼까.. 관광객 중 맛집 투어를 안 다녀본 사람이 있을리가 없지.

“저기, 실례합니다. 뭐 하나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그의 목소리에 검은 눈이 천천히 돌아갔다. 그녀는 로언의 행색을 한 번 훑어보곤 마시던 차를 내려놓았다.

“… 그 쪽은 누구시죠?”

루언은 짧게 고민했다. 여기서 정체를 밝혀야 할까? 상대의 기세를 보니 확실한 정체를 밝히기 전까진 경계를 풀지 않을 성 싶었다. 루언은 로브를 살짝 열어 기사단의 문양을 들어냈다.

“실례했습니다. 몬드의 페보니우스 기사단 소속 루언이라고합니다.”

다행이 루언의 행동이 정답이었는지 갓을 쓴 여자는 숨을 가볍게 내뱉었다.

“그렇군요. 저는 사월이라합니다. 무턱대고 경계해서 죄송해요. 무슨 일이시죠?”

“급하게 오게 된 터라 사전조사가 부족했습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근처에 묵을 만한 곳과 적당한 음식점을 여쭙고싶습니다.”

“..아. 망서객잔을 추전드릴게요. 사정을 설명하면 아마 객실을 내어줄 겁니다. 그곳은 예전부터 고국상단과 교류가 활발하던 곳이거든요. 고국상단일로 오신 것 맞죠?”

“어떻게 아셨습니까? 맞습니다. 혹시 협박편지를 누가 보냈는지도 아십니까?”

루언은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 했다.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묵어야 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일이 쉽게 풀리고 있었다.

“아니요. 이 이상은 저보다 천암군이나 리월칠성이 더 잘 알고 있을겁니다. 더 물을 게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도움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여기까지만 알려준다해도 그게 어딘가. 정보를 얻을 곳만 알아도 이미 반은 넘게 온 거라 말 할 수 있었다.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맛있는 밥만 먹으면 완벽하다.

4.

예상대로 수사는 쉽게 풀렸다. 대부분의 정보는 얻었고 협박편지를 쓴 주동자와 동기까지 추측할 수 있었다.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 사람과 만난 지 하루만의 쾌거였다.

“흐음-흠 흠~”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내일 상단의 호위와 함께 주동자의 포획만 성공하면 그는 다시 언제나 노랫소리가 들리는 몬드에 박혀 있을 수 있다. 내일은 아침 일찍 출발할 예정이니 지금 먹는 식사가 리월에서의 마지막 식사였다.

“아저씨. 동파육 하나랑 청심주 하나주세요.”

“그래. 그거면 되겠니?”

“음.. 청심주 두 병만 포장해주시겠어요? 같은 사람에게 줄 것이니 같은 천에 넣어주세요.”

“그래. 알겠어. 곧 가져다줄게.”

“예, 감사합니다.”

리월의 청심주는 술인데도 맑고 깨끗한 맛이 있어 색다른 즐거움이 있다. 몬드에 있는 음주시인에게 주면 괜찮은 선물이 될 것 같았다.

5.

맛난 저녁을 먹고 객실로 올라가려는데 어제 만났던 선비님이 보였다. 뒷모습만으로도 어제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쓰고 있던 깃도 벗고 붉은 뿔도 드러내고 있는 게 굉장히 편해보였다.

…뿔?

“어라. 안녕하세요! 어제 뵌 분이네요. 루언, 맞죠?”

“아, 안녕하십니까. 맞습니다. …사월님 맞으십니까.”

루언은 조금 당황했다. 아니. 역시 조금 많이 당황했다. 사월은 어제와는 같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달라져있었다. 어느새 바뀌어 있는 눈동자색을 재치고도 그녀는 굉장히 발랄해져 있었다. 마치 인격이라도 바뀐 사람마냥. 리월에는 인외의 존재가 있다고 했었지. 그녀는 사람이 아닌건가?

“맞아요. 여기서 또 보네요! 사실 저도 망서객잔에 묵고 있거든요.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기분이 좋아보이시는데,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으음…글쎄요? 어때 보이나요?”

사월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해보였다. 리월의 정보를 꿰고 있는 거솥 그렇고, 심상치 않은 사람이다.나는 자꾸만 그녀의 눈동자와 머리위로 올라가려는 시선을 잡아끌었다. 눈 앞에 있는 사람인지 모를 자가 위험인물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루언은 눈을 접어 적당히 사회적인 웃음을 만들어냈다.

“기분 좋아보이십니다.”

“맞아요. 달이 밝으니 기분이 좋네요! 루언씨는 조사하고 오시는 길이신가요? 아직 범인이 잡혔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아니면 호위 외의 일은 천암군에게?”

호위 임무였다는 것도 알고 있는 건가. 계속 생글생글 웃고 있는 탓에 표정을 읽기도 요원했다.

“아니요. 내일 돌아가는 길에 체포해 몬드로 연행하기로 했습니다.”

“오, 벌써 조사가 끝났어요? 빠르네요.”

“과찬이십니다.”

“별말씀을요. 그보다 제 뿔, 신기하죠? 그러고보니 몬드에는 인간들의 비율이 높다고 했었죠? 인간이 아닌 사람은 처음보나요?”

계속 시선이 가던 걸 들켰나. 들키지 않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대놓고 찔러오는군.

“아닙니다. 실례가 됐다면 죄송합니다.”

“으음. 아니에요. 몬드에도 다른 종족이 있나보군요? 어느 종족인가요. 수인?”

“엘프 혼혈인 꼬마입니다. 몬드는 우연찮게 인간의 비율이 높을 뿐 차별은 하지 않습니다.”

“저한테 변명하실 필요없어요. 단지 궁금했을 뿐인걸요. 범인들은 모두 몬드로 연행하나요?”

사월은 이야기를 주도하는 게 익숙해보였다. 일전에 봤던 모습보단 이 모습이 본 모습이라는 거겠지. 뭐, 이 쪽이 더 좋아보이긴 한다만. 솔직히 상대하기 어렵다.

“예. 국적이 다양한 탓에 몬드에서 각국으로 돌려보내기로 했습니다.”

“신기하네요. 보통은 같은 나라 사람끼리 뭉치는 게 대부분인데. 이런 걸 알려줘도 괜찮아요?”

“사월님의 정보력을 봤을 때 저 하나 숨긴다고 숨겨질 것 같지 않습니다. 숨기지 못할 것을 숨겨봐야 의미는 없지 않습니까”

“루언도 딱히 정보가 느리진 않은 것 같은걸요. 하루만에 범인을 추려내시고?”

“대단한 것 아닙니다. 사월님 도움이 컸습니다.”

“별 말씀을요! 나중에 또 리월에 올 일 있으면 망서객잔으로 찾아오세요! 만민당을 소개해 들릴게요. 향릉 주방장의 슬라임 무침은 리월항의 자랑이에요”

슬라임 무침? 이름부터 거리감이 장난아니다. 언제부터 슬라임이 식용이었지. 리월엔 슬라임을 먹는 종족이라도 있는걸까.. 상상했더니 더 이상하다.

“..예 알겠습니다.”

내 표정이 가관이었는지 사월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슬라음 무침은 좀 너무한 거 아닌가?

“푸핫, 하하하.. 알았어요. 장난이에요. 반응이 좋으신 분이네요”

음..감사인사도 했겠다. 할 말도 떨어졌으니 슬슬 대화를 마무리 지을 때가 왔다. 나도 약간 피곤하고 상대도 피곤한 것 같으니 옳은 선택이었다.

“하하… 시간이 늦었습니다. 먼저 올라가십시오.”

“벌써 시간이 늦었네요 루언도 안녕히주무세요. 몬드로 잘 돌아가세요”

“예. 사월님도 안녕히 주무십시오.”

6.

드디어 몬드로 돌아왔다!!

간단하게 보고서를 작성하고 나온 나는 강제로 리월에 보내진 것에 항의하여 하루의 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 단장대행도 이 순간만큼은 불쌍하지 않았다. 멋대로 나를 리월 파견보내? 덕분에 불면증이 도져서 3일간 잠을 못 잤다.

기사단을 나온 나는 곧장 몬드의 명물인 음주시인을 찾아갔다. 오늘도 어김없이 분수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벤티!”

“오, 룬! 파견갔다더니 생각보다 일찍왔네? 좋은 소식통이라도 만난거야?”

“감이 좋은데. 운이 좋았어. 식당 물어보려고 한 거였는데 생각보다 거물이더라고.”

“흐음.. 그거 흥미로운데? 이 티바트 제일의 음유시인에게 말해봐.”

“음유시인이 아니라 음주시인이겠지… 별 거 없었어. 현지인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정보통이 리월칠성부터 천암군까지 연결되어 있더라고. 리월에 있는 왠만한 상단들은 다 꿰고 있는 것 같던데.”

“오호.. 리월에 그런 거물이 있단 말이지. 혹시 엄청 고상한 척 하지는 않았어?”

“ 고상한 분위기가 있던 것 같기도 하고. 만났을 때마다 인상이 변해서 잘 모르겠네. 아, 네가 저번에 친구 만나러 갔을 때 봤다던 그 선비랑 비슷한 느낌이긴 하던데. 혹시 같은 사람인가?”

“글쎄… 꽤 된 일이라 기억이 잘… 네가 가져온 술 맛을 보면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허어… 술 냄새는 또 어떻게 맡았냐? 하여간…. 너 마시라고 사온거야. 자”

“아싸!”

생각해보니 벤티가 말한 선비도 검붉은 머리고, 내가 본 사람도 검붉은 머리네. 옷도 비슷했고, 뿔이 생기면서 이중인격에 가까울 정도로 인상이 변한 것도…. 리월에는 독특한 사람이 많구나.

“술도 사줬으니 네가 저번에 말한 선비 이야기나 해줘. 리월의 선인들은 수명이 아주 길다고 했지? 엘프랑 비교하면 얼마나 길어?”

“그건 말이야... 옛날 옛날 리월이 아직 바위신의 통치를 받던 시절로 넘어가야 하지”

“리월은 바위신의 통치를 벗어난지 5년도 안 됐어.”

“그런 사소한 건 넘어가자구! 어쨌든…”

7.

나는 벤티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에 빠졌다. 벤티가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기분좋은 바람이 불었다. 3일 만의 숙면이었다.

날이 좋고 바람이 시원하니까, 벤티가 몇백년전의 이야기를 직접 경험한 냥 이야기한다는 사실은 오늘도 넘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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