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부(解剖)의 시간
그날은 유난히도 걸음이 가벼웠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것 없는데 기분이 들떴다. 이곳에서. 이 땅에서. 이 하늘 아래서 감정이 높이 올라가는 일은 드물었으나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좋은 날이었다. 그래... 우연. 우연히, 그를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부질없는 기대감에 한껏 집어삼켜진 날이었다.
날이 밝은 것도 아니었고, 불어오는 바람은 찬 기운을 잔뜩 머금었는데도 아론은 인간임을 버리지 못해 기대감이라는 것을 품고 있었다. 버리기 위해 수십, 수백 번을 냉소했으나 이제는 기대가 충족되지 않는 예상과 상처마저도 사랑할 수 있게 되어서. 생기지 못하는 것보다는 아파하는 게 살아있는 것 같아 감정의 제어가 풀어지고 있었다.
익숙한 피비린내와 검게 물든 길바닥이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알면서도 금방 지워버릴 만큼 그가 보고 싶은 날이었다.
알면서도 외면해지는 날. 이상한 걸 느껴도 속아버리는 날. 속고 싶은 날. 신발에 달라붙은 피가 쩌억, 하며 주둥이를 벌리고 침을 흘려도 축축한 흙으로 착각하는 날.
아론은 최근 뉴스와 기사를 떠올린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곱씹는다. 대외적으로 일어난 일들, 알고자 하지 않더라도 들려오는 이야기들. 이 집의 문을 열면 존재할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를 인물을 그리며 문을 여는 순간 아론은 수술대 위에 발을 올렸다.
"… …."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던 썩은 냄새를 모른 척해도 마주해야 할 때가 왔다. 인간의 형태를 했으나 신원을 알 수 없는 살덩어리가 소파에 달라붙어 있다. 아니, 기댔는데 흘러내렸다고 하는 게 맞을까. 그것이 짐승이 아니라 인간임을 확신할 수 있을까. 머리, 어깨, 가슴, 골반, 다리…. 인간일 수밖에 없는 형체였다.
시체가 뭐가 대수라고.
질릴 만큼, 질리면 안 될 정도로 많이 본 게 시체이고, 그런 곳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시궁창은. 이 G섹터라는 곳은. 그래, 고작 시체 하나다. 그것도 누구인지 모를. 자신이 아니면 누구라도 상관없는 그런 고깃덩어리. 아론은 현관에 멈춰서 문을 닫는다. 썩은 냄새가 바깥으로 빠져나간 것도 잠시. 밀폐된 공간에 사향이 다시금 가득 찬다.
생각할 수 있게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이렇게 쓸모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시간이 흘러가고, 선택과 판단의 연속이 찾아오니까. 숨을 들이마신다. 깊은 호흡. 숨을 참아 허파에 가득 채우고 나서 천천히 입술 사이로 내보낸다. 그제야 다가갈 때마다 쩍쩍 달라붙는 살점의 존재를 자각한다.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의 형태, 지문이 녹아버린 손. 그럼에도 이것이 '그'라고 알리는 그의 남은 것들이 우습다.
그와 똑같이 생긴 시체가 나와도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허술하게 되어있는 시체를 그라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너무 보고 싶어서 내 뇌가 망가진 게 아닐까? 나는 그가 죽는 걸 새삼 바란 적이 없었나?
이곳이 실험대인가, 수술대인가.
'자, 보세요.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세요. 보스. 그는 당황하지도, 울지도, 오열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아요. 저 모습을 보세요! 저 자는 보스를 사랑하지 않는 게 분명해요! 어떻게 할까요? 시체 훼손? 유기?' 누가 감히 그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하겠나 싶지만 어떤 말을 하든, 하지 않든 다름없을 것이다. 나를 판단하는 사람들의 시선 사이에 있는 그. 짜인 각본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 자리에서 앉아 자세히 살펴볼까 싶다가도 주저앉지도 못하는 육체가 근처에서 의자를 끌어온다.
의자에 앉은 채 허리를 숙여 그의 모습을 천천히 바라본다. 그저 하염없이 지금이 영원할 것처럼.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이 상황에서 공기가 살갗을 가른다. 복부부터 위로 갈라져 내장이 아래로 쏟아져 나오고 흉부를 지나 목과 턱 아래까지 세로로 길게 육신을 긋는다. 그럼 나는 숨을 토해내며 웃는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웃음도, 울음도, 분노도, 슬픔도. 그저 짙은 숨 사이로 호흡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시체일 때조차 내 것이 되지 못하는 사람.
하이더 구테레스. 니글렉티드. 파이로키네시스 돌연변이. 그니파 공업단지 출생. 왼 뺨과 양손바닥 안쪽의 상처. 신장 195cm, 몸무게 127kg. 조직 가름의 4대 수장. 가름. 흔들리지 않는 굴지의 조직, 절대적인 힘의 질서. 약 60여년의 역사. 니글렉 차별 철폐의 발화. 총 30,944명의 조직원, G섹터의 뿌리.
하이더 구테레스. 니글렉티드. 파이로키네시스 돌연변이. 그니파 공업단지 출생. 왼 뺨과 양손바닥 안쪽의 상처. 신장 195cm, 몸무게 127kg. 조직 가름의 4대 수장…. 하이더 구테레스. 하이더. 하디. ……. 사실만을 나열해 놓고 나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고요하다. 그는 늘 이렇게 조용했다. 침묵. 그 침묵 속에서도 차고 넘치는 사랑이….
발끝이 서서히 젖는다. 시체 악취 사이로 바다 냄새가 밀려온다. 하늘을 비추지 않아 푸른 기 하나 없는 투명한 파도가 핏물을 비춘다. 빨간 파도가 거대하게.
'빨강'
'빨강을 만난 건 겨울이었거나 겨울이 아니었더라도, 그는 흰 눈 위에 떨어진 핏방울 혹은 얼음 속의 불. 나는 사흘에 한번 빨강을 앓고 하루에 한번 그를 앓으며 빨강이 되어간다 빨강은 얼어붙은 불이었거나 불타는 얼음 이미 날은 어두워졌는데 얼음은 관용의 기미조차 없는데 몇켤레의 빨강 발자국 지나간다 빨강은 죽어간다 그리고 아직은 살아있다 색(色)에 빠지면 흑백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 한다는데 나는 붉어진다 홍조를 띤 것처럼 빨강이 되어간다 불타오를수록 추운' 1)
가라앉은 부정이 체념으로 이어진다. 모든 생각은 그에 대한 생각이었음에도 제 머릿속에는 그에 대한 생각을 단 하나도 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그의 주변. 사회적 위치. 지금 이렇게 단둘이 있을 기회가 짧을 것이라는 초조함. 그에 대한 생각만 하는 것도 바쁜데 이상하게 자꾸 공중으로 흩어진다. 당장이라도 뺏길 것 같아서. 그런데도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부패하는 살점을 노리고 기어 오는 벌레. 갉작. 갉작갉작갉작. 바닥에 흐른 살점을 받아먹은 파리가 몸에 달라붙는다. 건방지게 알을 싸지르고 집으로 만들려는 꼴을 바라보다 녹여버렸다. 그의 주변에 악취보다 독한 독을 뿌려 주변에 있는 버러지들을 형태도 없이 없애버리고 나면 아론은 기이한 만족감에 웃었다.
"하. 하하하, 하. 하하하. 하... 하...!"
어디서부터 시작된 줄 모르는 희열. 그를 가졌다는 만족감, 그의 마지막을 처음으로 본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 아. 죽었구나. 왜 이곳에 와서 죽었을까. 어쩌다가 죽었을까. 왜 다쳤을까. 어떻게. 누가 죽였을까. 왜! 왜 여기에서 죽었을까.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렇지. 아아…. 희열이 아니라 오한인가. 달아오른 전율이 한없이 올라갔던 만큼 바닥으로 추락한다.
파도 앞에 그저 서 있다.
휩쓸려가도록. 잘게 부서지도록. 쓰러져 바닥을 기도록. 온몸이 젖어 울음이 나도록. 울부짖을 수 있도록. 오열하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굽어 숨을 곳을 찾기 위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신에게 기도하듯 몸을 둥글게 말아서.
이곳에 신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는데. 푸른색을 가진 종교. 가름의 희생양. 신. 신이 죽어버렸으니 누구에게 기도하면 될까. 나는 가름도 아닌데. 슬퍼할 이유도 없는 타인일 뿐인데.
아아, 가야 해. 더 늦기 전에. 내가 있었던 모든 흔적을 지우고. 복잡하게 잘못 엮이면 곤란해. 알아. 나만 곤란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아론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본다. 숨을 내쉰다. 슬퍼할 틈이 없다. 여유도, 자격도.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될 수 없다. 그런. 그런 사이니까.
파도에 휘말리는 것도, 익사하는 것도, 타버리는 것도. 녹아버리는 것도…. 투욱. 살점 덩어리에 기대는 상상을 한다. 이대로 잠들어버리면 좋을 텐데. 아론은 여전히 의자에 가지런히 앉아있다가 걸음을 옮겼다. 의자와 발자국을 지우며 저 멀리서 몰려드는 벌레를 내려본다.
벌레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뺏길 시체.
서서히 갈라진 제 육신을 꿰맨다. 목과 턱부터 흉부, 복부를 꿰매며 흘러내린 장기를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언젠가 슬퍼해도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언젠가. 언젠가 울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1)『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빨강, 유병록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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