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종뱅] 신수

만족글: 더 쓸지 안쓸지 모름

2차 by 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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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하이

신수에 붙여지는 수식어는 한도 끝도 없는 무구함이라 생략한다. 그러니 박병찬을 소개한다면, 옛적에 용이 되었어야 할 이무기라고 정연하게 말할 수 있겠다. 어떻게 신수의 이름이 영락없는 사람 이름일 수 있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인간에게 덜미를 잡혀 승천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을 테다. 그리고 그 어린 신수는 주박에 묶여 반 불구가 된 제 무릎에 요란해진 속을 자학하면서도, 결국 운명에 수긍해버렸더랬다. 그런데도 외로움은 좌절과는 또 다른 마음인지라 온정을 받지 못한 대신 주고 살아왔단다. 그게 어연 200년이다. 간명하게 정리하자면 박병찬은 저를 지상으로 끌어내린 가문의 자제를 언젠가, 기어코 사랑할 수밖에 없던 운명인 게다.

마침내 그날은 태풍이 몰아쳤다. 그렇다고 진짜 태풍이 왔다는 건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명백히 태풍의 현신이었다.

그건 2014년, 꽃샘추위가 두 번 왔다간 한반도의 조상인 단군이 한빙지옥의 송제대왕과 머리채를 쥐어잡으며 협상타임에 들어가겠구나 싶은 어느 2월이었다. 새까만 고수머리의 성질 머리 하나는 어느 저승사자를 잡아먹었을 까탈스런 성정을 보자하니 저게 태풍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단 걸 직감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때에 할머니 손을 잡으며 제 기거하는 호수에 발을 들인 아해는 고작해야 초등학교 2학년이었지만 박병찬을 똑바로 응시하는 눈에는 호기심 이외의 무언가가 있었다.

“인사드리거라. 앞으로 네 옆을 지켜주실 신수님이시다”

“… 할매, 다리 병신 만들어놓고 신수 대우하는 것도 웃기지 않아?”

하필이면 그날 비가 와서, 그래서 가문의 주박에 씌인 무릎이 더 시큰해 답지않게 말이 모질었다. 대개 웃는 낯이었던 병찬은 뒤늦게 할머니 뒤에 숨어버린 작은 아해를 보고선 쓴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리고 말을 덧붙인다. 꼬마야, 너한테 하는 말은 아니야. 그러고는 풀 위로 발을 문대 비틀며 비냄새를 풀로 덮는다. 병찬의 말에 아해는 고개를 옆으로 빠끔 내밀어 그를 본다. 종수는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며 말했다.

“꼬마가 아니라 최종수야”

“…얼씨구?”

퍽 당황한 기색의 할머니는 최종수의 머리를 아래로 푹 숙인다. 신수님께 예의없게 무슨 행동이야, 사과드리려무나. 그리고 연신 병찬의 눈치를 살핀다. 아직 아이가 어려서 그렇습니다. 본래 마음이 여린 아이이니 너그러이 보아주시지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할머니의 시선은 병찬의 무릎을 향해 있다. 그러니 말은 경외의 대상에게 바치는 말일지언정 두려움은 없다. 병찬은 눈썹을 잠시 찡글거리곤 물었다. 내 무릎에 무슨 볼일이라도? 그 질의에 할머니는 시선을 피할 뿐이다. 그러는 동안에 종수는 치켜뜬 눈으로 검은 머리 사이 보이는 신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눈에 새겨놓고 있다. 가지런한 인상과 달리 느슨하게 묶은 고름은 동정 밑에 살갗을 내비치고, 종수는 그 목덜미의 여리한 선을 본다. 집안 어른들이 안주거리 삼아 낄낄대며 읊던 신수의 불구된 무릎에는 시선이 갈 새가 없다. 가문의 주박만 풀리면 어차피 멀쩡해질 무릎이 아니던가. 그러니 최종수는 무릎을 보는 대신 이름을 읊는다. 박병찬, 박병찬.

내 신수, 박병찬.

“미안, 신수님.”

할머니와 박병찬 사이에 내린 팽배한 긴장 속에서 종수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버르장머리 없게도 제 고개를 누르는 할머니의 손을 옆으로 치워두고는 박병찬을 올곧게 바라본다. 형형한 검은 눈빛은 한 대상에 깊게 박혀있다. 그리고 입꼬리를 살짝 올린다.

병찬은 순간 아해의 눈 밑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는 어둑시니를 보았다. 음습하고 눅눅하고, 습윤한 기운을 띠며 저 밑바닥서부터 요동하고 있는 덩어리에 느릿하게 눈꺼풀을 감고뜬다. 그리고 할머니를 흘긋 바라본다. 손자를 바라보는 할머니는 많은 말을 삼키듯 입술을 꾹 닫고 있다. 아마 저와 같은 것을 보았던 거겠지. 병찬은 시선을 다시 아해에게로 내린다. 그리고 쯧. 혀를 짧게 찬다.

대체 가족이 무어길래 신수에게 입을 화는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제 자식을 저리 싸고돌 수 있나.

저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일찍이 이 가문은 한참 오래 전에 멸했을 것을, 자식이 무어라고 하늘의 큰 죄인 줄 알면서도 신수를 지상에 붙잡아뒀는지. 병찬은 쓰게 웃는다. 먼 옛적에 제 무릎에 주박을 씌우고 인간의 이름을 내린 주술사가 맨 처음으로 빌었던 절박함이 떠올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문의 장자들에게 대대로 내려온다는 귀신병은 이번에도 비껴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못내 성정이 모질지 못했던 그는 아해의 앞으로 성큼 걸어와 무릎을 낮춘다. 잎새에 아슬히 매달린 빗방울이 병찬의 어깨 부근에 떨어지고, 병찬은 그것을 고스란히 받는다. 그리고 무심히 팔을 올려 아해의 머리 위를 가린다.

할매, 애 우산은 챙겨오지 그랬어. 고뿔에 걸리면 어쩌려고.

제 머리 위로 펄럭이는 옷자락에 놀란 종수의 어깨가 가볍게 튀었다. 그러면서도 놀라지 않은 척, 시야를 가리는 천을 들어올리곤 저를 응식하는 동그란 눈에 말간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번에는 너구나”

“너도 날… 알아?”

종수의 눈이 홉 커진다. 여전히 무덤덤한 태도로 일관했어도 발그레진 뺨이 상기된 기분을 드러내며 속내를 알린다. 그러나 병찬은 아해가 어릴지언정 그리 순진한 감정의 것으로 비추는 언색 따위가 아님을 모른다. 그리하여 그는 무릎에서 오는 시큰한 감각을 뒤로한 채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눈을 찡긋했다.

“이 가문이 자제들이야, 늘 기다리고 있었지”

“오, 꼬맹아. 웬 네잎클로버”

“네잎클로버가 행운을 가져다준대”

“어… 그건 나도 아는데. 그러니까 이걸 왜 나한테 줘?”

인간의 감정이란 것이 불가해의 범주에 속한 줄 알면서도 병찬은 그저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가문이 곱게 보일리는 없었지만, 빌어먹을 가문의 핏줄로 태어난 장자들은 제 사정과는 무관하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종수는 이전 세대와는 달리 병찬을 귀찮게 구는 편도 아니었고, 무릎을 운운하며 수호의 정당성을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렇게 종종 호수에 찾아와 어느 꽃을 건네주고는 했는데, 대개는 토끼풀이거나 길가에 자란 어느 이름 모를 풀꽃이다. 그러나 오늘은 흙먼지 다 묻은 얼굴과 손으로 건네는 네잎클로버에 병찬은 짐짓 당황하며 눈을 끔뻑였다. 매사에 깔끔한 걸 좋아하던 애가 안 하던 짓을 하니 놀라기도 했었고, 보아하니 네잎클로버를 찾느라 옷을 다 버린 꼴이 웬일로 제 나이에 맞는 모습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평소라면 행색을 보고 낄낄 놀리고도 남았을 터였으나 지금은 종수의 행동에 기꺼이 어울리기로 했다.

“…싫어?”

동굴 구석에 찾아와 불쑥 네잎클로버를 내민 탓에 병찬이 토끼풀 위로 쭈그려 앉은 저를 상상하는지도 모르고 종수가 물었다. 느른한 입매로 웃고 있던 병찬은 감각을 현실로 이끌어 종수를 살핀다. 짜증과 무안함과 약간의 기대가 뒤섞인 표정을 내려다보다 병찬은 시선을 나란히 두었다.

“어허, 싫다고 한 적 없는데”

“그럼 빨리 받아”

빨리 가져가라는 듯 네잎클로버를 쥔 손을 병찬에게 들이민다. 병찬은 얼떨결에 네잎클로버를 받으며 종수와 그것을 번갈아 살폈다. 종수야, 근데 이거 진짜 나한테 줘도 되는 거야? 그러자 종수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한다.

“전에 그렇게 말했잖아. 행운은 너 편이 아닌 것 같다고.”

“…아”

그놈의 장마가 문제였다. 비가 유독 쏟아지는 날이면 종수는 걱정스러운 민낯을 띄우며 저를 찾아왔고, 그럼 병찬은 동굴 깊숙한 곳에 처박아뒀던 고개를 돌려 흐릿하게 웃었다. 그리고 왜 왔느냐고 물으면 종수는 말을 고심하는 냥 조용하다가 그냥, 이라고 얼버무렸다. 그렇게 지내기를 어연 3년, 비가 지면에 닿는 시간의 총합만큼이나 둘의 시간도 끝없는 기약에 켜켜이 쌓인다. 그리고 조용하게 저를 응시하는 게 전부인, 그러나 자신이 눈을 감을 때면 불구가 된 무릎을 문지르며 길게 한숨을 쉬었던 종수를 병찬은 모른 체 했다. 그러다 빗방울이 유독 굵었던 1주일 전, 우산이 대차게 뒤집어져 비를 쫄딱맞은 종수에게 제 두루마기를 건네며 너나 나나 운이라곤 없나보다, 하고 농과 진담이 섞인 말의 무게를 알아챈 게 분명했다.

“정확히는 우리 둘 다라고 했는데, 종수야”

“아니. 난 운 좋은데”

“…라고 물에 빠진 쥐였던 종수가 말했습니다”

“뭐래”

종수는 불만 가득한 눈으로 병찬을 흘겨보고는 익숙하게 그의 옆자리에 앉아 삐뚜름한 표정을 한껏 지었다. 종수야, 누가보면 여기가 네 안방인 줄 알겠다? 이런 안방, 줘도 안 가져. 어쭈. …흥. 종수는 고개를 홱 돌리며 대화를 종결시켰다. 병찬은 남은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다 피식, 웃음을 내치곤 따라 앉았다. 그리고 네잎클로버를 얼굴 위로 들어올려 줄기를 찬찬히 돌려보며 말갛게 웃었다.

“아무튼 고마워. 종수가 형아에게 행운을 선물로 줬네”

나도 종수에게 행운을 줘야 할 것 같은데. 입새 사이로 흘러나오는 웃음에 종수의 고개는 속절없이 돌려졌다. 찰랑이는 검은 머리카락하며 곱게 접어진 눈이며, 시원하게 웃는 입꼬리하며. 왠지 정말 네잎클로버가 그에게 행운을 가져다준 것만 같아서 심장은 울린다.

“…진짜로?”

“그래, 진짜로”

종수는 그날에 자신이 지었던 표정을 알 리 없을 테다. 컴컴한 어둠만 내려앉은 동굴 속에서 얼마나 빛나던 눈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기대에 찬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리고 병찬은 그것들을 보며 크게 웃고는 검은 고수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우리 쫑수, 왜 그렇게 귀여워? 그 말을 듣자마자 병찬이 알고 있던 종수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아무튼. 그 뒤로 이어진 대화는 평상시와 다른 게 일절 없었다.

아씨, 박병찬. 애 취급하지 말라니까? 얼씨구, 백날 그래봐라. 네가 너보다 나이 한참 많아, 임마. 내가 더 키 크면 어쩔 건데. 그래도 나이는 내가 많은데? 됐고, 소원이나 하나 들어줘. 혹시 내 말이 안 들리냐? 어. 얌마….

고집대마왕 아니랄까봐, 처음볼 때부터 반말하기 일쑤였던 종수에게 병찬이 먼저 두손을 들었다. 오냐, 까짓 거 들어주마. 그 말에야 종수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 말 꼭 지켜, 알겠지. 병찬은 능갈치며 대강 대답했다. 예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는 아이가 빌 수 있는 소원이래야 무거울 리 없다는 걸 오랜 세월을 통해 알고 있었고, 어차피 제 영원 속에 인간은 반려가 아닌 이상 한낱 스쳐가는 인연일 뿐이므로 거창한 의미를 붙일 이유가 없던 탓이었다. 그러나 제게 이리도 당돌하게 말을 거는 가문의 자제들은 여태껏 없었던 까닭에 문득 궁금해지기는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구태여 묻지는 않는다. 기다리는 건 익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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