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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업) LOVE U!

#Milliondrops

다락방 by 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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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그래서, 그래서. 둘이 어떻게 만난거야?"

"나 진짜 깜짝 놀랐잖아. 그 공돌이 베르가 연애를 한대서. 것도 연하."

"야, 고백은 누가했냐? 네가 함?"

"ㄱ,그게...."

"제가 했어요!!"

"도피오 네가? 역시...불도저라 이건가."

"야, 아무튼 예쁜 사랑하고, 오늘은 먹고 죽자~!"

00거리의 어느 호프집, 이곳에서는 ××대학교의 학생회 뒷풀이가 이어지고 있었다. 평소 이런 자리에는 안나오는 베르였지만 도피오의 애원에 못이겨 자리에 나왔고 그 결과 동기들의 짖궃은 질문에 귀가 붉어지다 못해 터지기 직전이었다.

도피오는 선배들과의 자리가 불편할텐데도 신경쓰지 않는지 능숙하게 이야기를 주도했다. 그러면서도 옆에있는 베르가 괜찮은지 항상 살피며 중간중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그 모습을 본 동기들은 도피오가 사랑꾼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베르에게 잘하라며 한마디 하는것은 덤이었다.

베르는 괜히 다 마신 잔을 기울이며 옆에서 웃고있는 도피오를 힐끔거렸다. 처음 본 고2때부터 지금까지, 도피오는 그보다 어렸음에도 그보다 더 연상같았다. 체대생이라는 것이 빈말은 아닌지, 큰 키의 다부진 몸을 지닌 그는 베르의 형이라해도 믿을 것 같았다.

"아, 그래서, 둘이 어떻게 만났는데. 빨리 얘기해봐."

"음,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그게 말하자면 긴데..."

1.

"야, 그 키 큰 애 봤냐? 이번에 도서부에 면접보러 온 1학년!"

"아니, 피지컬은 농구부 할 피지컬이던데..? 그리고 얼굴도 좀...매서워 보이고."

"야, 사람 겉모습으로 판단하는거 아니다. 걔 입여니까 애가 착하더만. 면접관으로 안 들어갔으면 조용히 해라~"

'걔가 면접을 보러 왔었다고..?"

나는 도서실 한쪽에서 친구들의 말을 들으며 그 '키 큰 애'를 떠올렸다. 어딘가 매섭지만 빨려들어갈 것 같은 눈, 자신보다 한 뼘은 큰 키, 당당한 말투. 그는 무려 신입생 대표로 선서까지 했기 때문에, 나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의외로 모범생일지도 모르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좁은 나로서는 그와 엮일 일이 없을거라 생각했다. 그랬는데..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들어온 도피오라고 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힘 쓰는 건 맡겨주세요~"

나는 눈앞에서 쾌활하게 웃고 있는 도피오를 보며 당황했다. 친구들도 처음엔 얼떨떨해보였으나 곧 그를 반겼고, 선생님도 책을 나를때 도움이 되겠다며 좋아했으나 점잖은 척 말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눈앞에서 사람이 인사를 하는데 어떻게 무시할 수 있을까. 나는 솔직히 그가 살짝 부담스러웠으나 아무렇지 않은척 웃으며 그에게 반갑다고 말했다.

"선배, 이거 어디다 두는거라고 했었죠?"

"선배, 이거 측인...

"선,

그래, 다 좋다. 다 좋은데, 기가 빨린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은 2학년들이 각각 한명씩 맡아 인수인계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맡은 후배는 도피오였다.

일주일동안 지켜본 결과, 그는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일도 잘했다. 한마디로 구김살이 없달까. 나도 어느정도 그에게 적응이 되었지만, 같이 있을때 기가 빨리는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아, 도서부장인데 인수인계는 좀 빼주면 안되나..안되겠지...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책을 들고 서가 앞을 서 성거리는 도피오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 그건 이쪽에다 꽃아두면 돼. 112이니까...음, 이쪽이네."

청구기호를 따라 옮긴 시선 끝에는 생각보다 높은 책꽃이가 있었다. 나는 잠시 낮은 사다리를 가져올까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저..

"여기 맞죠? 형."

뒤에서 산뜻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훅 풍겨왔다. 고개를 들자 책을 꽃으며 싱긋 웃는 도피오가 보였다. 그는 나보다 덩치가 커서 뒤에서 누군가가 본다면 내 모습이 아예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괜스레 울렁거리는 기분을 참으며 말했다.

"어..맞아."

"아, 혹시 제가 선배라고 안 불러서 좀 그런가요? 그냥..선배라고 부를까요?"

"아니야, 됐어. 1살차이 밖에 안나는데 그냥 형이지, 뭐."

"다행이네요. 사실 좀 걱정했는데. 그런데 형, 가까이서 보니까 손이 엄청 예쁘세요. 손가락도 길고."

나는 순간 할 말을 생각하지 못하고 잠깐 얼어버렸다. 도서관에 단 둘만 있어서 그런가, 단순히 손이 예쁘다는 칭찬에도 왜 이리 당황스러운지 모를 일이었다.

...요즘 내가 많이 외롭나..? 얘는 남잔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거지?..

"어,어...고마워. 너도..손, 예쁘다..곧고.."

"하하, 그래요? 형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기분이 좋네요. 안그래도 제 친구가 저보고 손모델..."

도피오는 웃더니 금방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그의 모습에 머쓱해서 괜히 다른 곳을 흘끗 바라보았다.

"얘들아, 저 책들. 서가에 다시 다 꽃으면 돼~"

도서관에 들어서자 마주한 광경은 책상을 한가득 매운 책들과 그 옆에 널브러져 있는 친구들이었다. 간간히 후배들도 보였다.

후배들은 도서부가 이렇게 노동을 하는 곳인줄 몰랐겠지. 봉사시간은 꽁으로 생기는게 아니다. 이 사람들아.

나는 소매를 걷어붙히며 근처에 있던 책을 집어들었다. 저 구석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는 도피오가 보였다.

"열심히 하네."

"누구..아, 형! 오셨어요?"

도피오는 내 얼굴을 보고는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는 지난 두 달간 내가 당번인 날이면 항상 도서관에 얼굴도장을 찍었다. 내가 대출당번 일때는 항상 책을 빌렸고, 서가를 정리할때는 책을 찾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가끔 그가 내 일을 도와주기도 해서, 나도 그의 행동이 싫지는 않았고 오히려 친동생처럼 말동무를 해주는 그가 고마웠다.

좀 더 친해지고 알게 된 사실은 그는 의외로 디저트나 귀여운 것들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서로 공통점을 찾은 그 어느날 하굣길, 웃으며 자연스레 다음약속을 잡는 그의 말에 괜스레 틱틱거렸던것은 왜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이미 그를 좋아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 감정을 알아차리기에는 내가 미숙했었다.

"형, 그 책들 제가 꽃을게요. 위에 꽃아야 하잖아요."

"또 나 키 작다고 놀리지. 나도 사다리 밟으면 꽂을 수 있거든?"

"아니, 그게 아니고...알았어요, 뭐."

도피오의 말에 나는 장난스레 화답했고 그런 나에게 그는 무어라 말할려 했으나 피식 웃고는 다시 책을 분류하는데 열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근처에 있던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곧 도피오도 내 옆에 서서 서가정리를 시작했다.

와. 손 엄청 크네. 내 손의 두배는..될 것 같아. 손목..은 잡히고도 남겠지. 키도 크고, 부럽다..

"뭘 그렇게 봐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아니. 그냥, 너 ㅊ,책! 빨리 정리한다 싶어서."

"이 정도는 해야 그래도 봉사시간을 받죠."

"..갑자기 현실적이네."

도피오는 숨죽여 웃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책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아쉽다."

응? 뭐라고-

"얘들아, 모두 수고했어~! 선생님이 아이스크림 사왔다! 오늘 고맙다고 주는거니까 들고 가면 돼. 내일 보자~!"

나는 도피오에게 무슨 뜻인지 물으려 했으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나가는 바람에 물어보지 못했다. 사서선생님이 들고오신 봉지에는 아이스크림이 종류별로 들어있었고 친구들은 그 주변에 서서 아이스크림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형, 이거 받아요. 이 아이스크림 좋아하죠?"

그때 도피오가 내 옆에서 아이스 바를 내밀며 말을 걸었다. 그는 이미 자신과 나의 가방을 챙기고 서 있었다.

"응. 그런데 너 어떻게 알았어? 아, 가방은 내가 들게. 고마워."

"괜찮아요. 무겁잖아요. 그보다 어떻게 알았냐면, 음, 지난번에도 형이 그거 고르셨으니까? 제가 은근히 기억력이 좋다구요."

"...그 얼굴로 기억력도 좋으면 불공평한데."

"잘 안들렸어요. 다시 말해 줄래요?"

"고맙다고. 빨리 가자."

우리는 실랑이 끝에 서로 가방을 하나씩 등에 맨 채 입에는 아이스 바를 물고 교문을 나섰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시간이었지만 여름이어서 그런지 밖은 한낮같았다.

"...그래서, 제가 그때 뭐라고 했게요."

"네 성격에 안봐도 뻔하지...내가 너를 한 두번 보냐."

우리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길을 걸었다. 이전 도서관에서의 일을 묻고 싶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말을 꺼내기가 망설여졌다. 옆에서 속도 없이 웃는 도피오를 보고 묻고 싶었다.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진짜 친한 형으로 좋아하는건지 아니면....그럴땐 어떻게 해야하지? 난..동성이랑 그런 사이가 되는걸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

"..형,형?"

"어?"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얼이 빠져있어요?"

"아니,아무것도. 그보다 뭐라고 했었지?"

"형은 여친없어요?"

"..갑자기 아픈 곳 찌르지마라. 에휴, 나도 있었으면. 넌 좀 반에서 인기많을 것 같은데."

"저요? 저는...아직 친구들이랑 노는게 제일 좋아서요. 그리고..형이랑도요."

"오, 좀 감동이다? 내가 또래친구들만큼 편하다는 뜻이잖아. 어디 너같은 여자 없나. 네가 여자면 바로 사귀는 건데."

나는 그의 말을 받으며 천천히 걸었다. 그때 도피오가 갑자기 멈춰서서 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도피오?왜.."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 형네 집에 다 와서."

그가 가리킨 곳에는 내가 사는 아파트가 있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항상 고마워. 덕분에 안 심심하고 잘 왔어. 너는 이 옆의 아파트랬나? 안 데려다줘도 되겠어?"

"제가 애도 아니고, 뭘 데려다줘요. 괜찮아요. 그럼 다음에 봐요, 형."

그는 내가 아파트에 들어가는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매미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도피오의 집은 우리집과 정반대방향 이었다고 한다.

2.

"..그래서, 여기 칠판에 종목들 써놨으니까 나갈 종목에 이름쓰기!"

어느덧 가을, 체육대회 시즌이 다가왔다. 반 분위기는 이미 반티셔츠를 고르는 일로 들떠있었고, 체육대회에서 우승한 반에게는 무려 문화상품권 10만원 이라는 소식에 더 후끈 달아올랐다.

"그래서, 베르. 너는 무슨 종목 나갈건데?"

"아...꼭 해야해? 나 몸쓰는거는 자신 없는데..."

"반 행사인데 당연히 나가야지! 야, 넌 나랑 2인 3각하자. 어때?"

"..너 항상 될때까지 물어보잖아. 그래, 뭐. 같이하자."

나는 대충 옆자리에 앉은 친구에 말에 화답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체육대회에 참가하는 시늉만하고 도서관에 박혀있으려던 내 계획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체육대회 당일이 되었다. 방송부를 포함한 몇명은 체육대회 준비를 위해 미리 밖에 나가있었고, 나머지는 대회로 들떴는지 왁자지껄하게 교실에 모여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 베르야. 살짝 눈 감아봐. 응, 그렇게."

"와, 얘 피부 진짜 좋다. 나보다 좋은 것 같아."

"얘들아...나 그래도 일단은 남잔데..."

..나는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여 화장을 받고 있었다.

"무슨 그런 구시대적 발상을! 야, 요즘엔 꾸미는 남자가 대세거든?"

"맞아, 그리고 보통 남자애들이 '화장한다'라고 하면 무지성으로 허옇게 바르는것만 생각해서 그렇지, 자연스럽고 깔끔하게 하면 오히려 더 나을걸?"

"야, 오늘 뭐 잘 보이고 싶다던가, 그런 사람 없어? 누나들이 오늘 힘 좀 써준다."

그 말에 왜 도피오가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 진짜. 그 얼굴 그렇게 쓸거면 나줘라. 나였으면 사람들 꼬시고 다님."

"맞아. 왠만한 중소아이돌 뺨칠듯."

"..그렇게 띄워줘도 뭐 없다."

"쯧, 들켰네. 그래도 이 말은 진심이야! 이제 사과머리만 하면...됐다. 감사인사는 할 꺼면 돈으로 하셈."

"오, 야 너 여자애들이 꾸며줬냐? 좀 괜찮은데? 너 여자였으면 바로 사귐."

"너 나중에 우리 성인돼도 우리 잊으면 안됀다?"

"아, 뭐래. 너랑 사귀라는건 고문아니냐?"

"아니 이게 진짜,"

나는 친구들과 웃으며 교실을 나섰다. 보아하니 우리 반이 늦게 나온건지 이미 운동장에 줄을 서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도피오네 반도 있었는데, 그들은 마치 제복을 연상시키는 검정바지에 남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도피오를 찾고 있는 와중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게 입모양으로 뭐라 말하고 있었다.

'오늘 잘 어울려요.'

"어? 야,얘들아. 얘 귀 빨개짐. 뭐 저쪽에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냐?"

"뭐?어디어디. 저쪽 1학년 줄인데? 뭐야, 너. 아닌척하더니. 하긴 없는게 이상해, 능력자네."

"아, 아니라고 그런거..빨리 우리도 줄서자."

왜 그 말에 귀가 빨개졌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자, 이번 2인3각 경기는! 선후배간의 친목을 위해서~학년을 섞어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지금 반대표가 2명씩있죠? 한명은 같은 반의 1학년과, 한명은 3학년과 같이 뛰는거죠. 점수는 공동집계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학년을 섞어 진행한다는 사회자의 말에 놀람도 잠시, 학생들은 곧 모여 팀을 정하기 시작했다.

"야, 네가 1학년이랑 뛰어라. 내가 3학년이랑 뛸게. 너 이런거 불편해하잖아. 그나마 1학년이랑은 좀 낫겠지."

친구는 그 말을 하며 3학년으로 보이는 선배에게 이미 저만치 가고 있었다. 나는 친구의 말에 살짝 감동받을 뻔했으나, 긴 생머리에 키 큰 3학년 선배를 보자 감동이 와장창 깨졌다. 그 선배는 친구가 좋아할 것 같은 외모의 소유자였다.

저 자식...일부러 자기가 여자랑 뛰고 싶어서 저런거아냐? 뭐..나는 상관없지만.

"안녕하세요. 1학년 5반 도피오입니다, 선배."

친구가 사라진 자리를 어이없는 눈으로 보고 있던것도 잠시, 내 등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곳에는 나를 보며 씩 웃고 있는 도피오가 보였다.

"뭐야, 반 대표가 너였어? 그나저나 우리 키 안 맞는데..상관없으려나."

"에이, 발 맞춰 뛰는건데 무슨 상관이예요. 여차하면 제가 형 안고 뛰죠,뭐."

"2인 3각인데 그러면 실격처리 아니니..."

"푸흐,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도피오는 그 말을 끝으로 장난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 뭐. 발 맞춰뛰는건데, 큰일나겠어.

나는 경기가 시작한지 3분만에 그 생각을 후회했다.

도피오의 걸음은 당연히 나보다 더 빨랐고 보폭도 커서, 나름 맞춰서 가고 있음에도 발을 헛디딜 뻔 했다.

"..형! 괜찮아요?"

그때 도피오가 휘청이는 나를 잡아주어 운동장에 넘어지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그는 한 팔로 내 어깨를 감싸안은 채였다.

"..어, 고마워. 근데 이제 놓아도 되는데."

"또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냥 안고 갈게요. 혹시 싫어요?"

"아니, 싫은건 아니고.."

좋다 나쁘다를 따지자면 전자에 가까웠으나, 베르는 타인의 접촉이 생경해 당황스러웠다. 그의 어깨는 도피오의 손이 단단히 붙잡고 있었고, 평소와는 다르게 그와 더 밀착된것이 느껴져 기분이 이상했다. 베르는 애써 갑작스러워서 그런것이라며 자신에게 되뇌었다. 그는 걸으며 옆의 도피오를 흘끗 살폈다. 이런 베르 속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도피오는 그저 경기에 열중할 뿐이었다.

"아이고, 힘들어..."

"그거 2인3각 좀 했다고 뻗냐. 하여간 넌 도서부 때려치고 운동이나 해야한다고 내가 누누히 말했지?"

"도서부에서도 할 건 다하거든, 그냥 이 이상으로 열의가 안 날 뿐이야..."

나와 도피오는 중간 순위를 차지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무난한 순위였다. 그러나 내 친구가 무려 1위를 기록했기 때문에, 우리반의 순위는 꽤 높은 상태였다.

"에휴, 야. 그냥 앉아서 이어달리기나 봐라. 뭐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줘?"

다음 경기는 장애물 이어달리기였다. 곧바로 시작할 분위기인지 서로 다른 반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개중에는 도피오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그 사람을 주시했다.

"역시 어린 게 좋아."

"...무슨 변태늙은이처럼 말하지 말아줄래? 쟤네랑 우리랑 1살차이 밖에 안나. 그리고 너 좀 운동하라니까. 우리 고3되면 앉아만 있어야 하는데 그전에 좀 움직여 놔야지. 이거 성인되면 그냥 물몸 되는거 아냐?"

주자가 몇번 바뀌고, 드디어 마지막 주자가 달리기 시작했다. 1학년 5반의 마지막 주자는 도피오였다. 5반은 지금까지 1, 2위를 다투며 격차가 크지 않았지만, 도피오는 그 격차를 서서히 벌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쟤는 아주 날아다니네. 아까까지 나랑 2인 3각했던 사람 맞아?

친구의 말대로 진짜 운동이라도 해야하나 생각하며 도피오를 멍하니 보고 있을때였다. 그때 도피오가 왠 쪽지를 보고는 이쪽으로 뛰어오는게 보였다. 그는 눈깜짝할 새 내 앞으로 와 손을 내밀었다.

"형, 빨리 뛰어요!"

"뭐? 잠깐,"

도피오는 손에 들린 쪽지를 휙 보여주더니 내 팔을 잡았다. 나는 갑작스러워서 어안이 벙벙했으나 도피오가 너무 다급해보여 냅다 그의 손을 잡고 뛰었다. 오랜만에 달리는 것이라 나때문에 1위를 못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정도까지는 아니였다.

운동...흐....진짜 해야겠다.

죽을듯이 뛰는 나와 달리 도피오는 여유로워보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가 살짝 즐거워보여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1위는, 1학년 5반!"

그는 결승선에 들어오자마자 반 친구들에거 둘러싸였다. 친구들과 같이 있는 그는 매우 즐거워보였다. 훈훈한 광경이었지만 나는 밀려오는 생각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아, 도피오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 (같은 반 제외.)

나와는 다른 감정으로 나를 좋아하는구나.

누군가는 말할 수 있다. 단순히 좋아하는 사람이면 친구도 가능한거 아니냐고.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엔 그동안 애써 무시해왔던 것들이 필사적으로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중학교때 꽤 연애를 해봤고, 도피오가 나를 볼때의 그 눈은 고백직전의 여자애들이 하는 눈이었다. 사실, 그가 나를 연애감정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한건 여름방학 때부터였다. 동성간의 연애는 생각도 해본적이 없어서 아예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아귀가 맞아 떨어졌다.

문제는...내가 동성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여태까지 사귄 사람들은 모두 여자였고, 애초에 나는 도피오를 그저 친한동생으로 여기고 있었다. 혹여나 나중에 그가 나로 인해서 상처를 입을까 걱정이 되는것도 사실이었다.

"자, 내일은 종업식날이다. 고3 올라가기전의 마지막 방학이니까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2학년을 끝 마칠 시기가 되었다. 나는 도피오와 가깝게 지내지도,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못 한채로 애매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나자 이전에는 눈치채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노골적인데 왜 그때는 몰랐을까.

나는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사물함을 정리하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도피오였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말을 걸며 오랜만에 같이 하교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순간 알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혀 입을 열었다.

"너, 집 나랑 반대방향이라며."

그 말을 내뱉고 나도 내가 왜 불만스러운 목소리였는지 놀랐다. 그는 그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란 눈으로 잠시 나를 바라봤으나, 이내 수긍하며 말했다.

"..그동안 알고 있었어요? 아니, 그런건 사서선생님이나 친구들한테 물어보면 알겠네요..."

"..나도 여름방학쯤에 알았어."

"그래요..사실, 형이랑 같이 집에 가는게 너무 좋았거든요."

그는 그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냐고 물어야하나? 근데 그 다음에 이어질 내용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한참을 그러고 서 있었을까, 나는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도피오가 말하는 것이 더 빨랐다. 나는 익숙한 느낌에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형, 사실 저 형 좋아해요. 친한 형으로서 말고요. 알아요, 형은 저를 그냥 친한 동생으로만 생각한다는거요..."

나는 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마지막 말을 듣고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 있었어? 그럼..왜 말하는거야? 말하지 않으면 우린 계속 친구로 지낼 수 있잖아."

"그건 못 하겠어요. 그냥..제 마음을 이야기 하고 싶었어요. 사실 이런건 다 있어보이려는 변명이고 그냥 형이 저 좋아한다고 해줬으면 좋겠어요. 아, 이거 하교하면서 말하려 그랬는데.."

그는 답지않게 말소리가 작아지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그의 모습에서 일말의 희망이 고개를 드는것을 보았다. 그렇기에 더욱,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안, 도피오. 난 너를.."

"..더 말 안하셔도 괜찮아요. 이미 다..아니까. 다 예상했다구요."

그는 그 말을 내뱉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수 있으나 그를 가까이에서 봐온 나는 알 수 있었다. 그의 눈가가 살짝 붉어져 있다는 것을. 그 얼굴을 보자 죄책감이 밀려왔으나 나는 필사적으로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아, 그래도 말하고 나니까 후련하네. 형 너무 죄책감 가지지 마세요. 저는 이미 예상했으니까. 그럼 다음에 뵈요!"

그 말을 끝으로 도피오는 멋쩍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교실 밖을 나갔다. 마지막까지 신경쓰지 말라는 듯 그는 담담하게 말했으나, 목소리 끝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눈가도 붉어진 주제에, 담담하게 말하려 노력하는 네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 네가 알까.

그 날 이후로 나는 그를 만날 수 없었다. 겨울방학중에는 동아리도 활동하지 않았을뿐더러, 내가고3이 되자 바빠졌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피하는것인지, 타이밍이 나빴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우리의 1년은 끝이났다.

3.

"...르. 김베르 학생?"

"ㄴ,네!"

그로부터 3년 뒤, 나는 수험생활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원하던 대학에 최종합격하였다. 도피오는 수능 응원을 하러 여러 후배들이 온 자리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으나, 이제와서 연락하는것은 너무 몹쓸 짓같아 그럴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의 사이는 이도 저도 아닌채 나는 대학교 2학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도피오 학생?"

응? 내가 잘못들었나?

"도피오 학생 없나요? 참..개강 첫 날부터 결석이라니,"

"교수님! 저 왔습니다!"

순간 누가 급히 들어오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급히 돌아보았다.

"여기 앉아도 되죠?"

다시 만난 그는 2년전보다 더 선이 날렵해진 느낌이었다. 그는 그동안 운동을 했는지 체격이 더 다부져 보였다. 그가 내 옆자리에서 앉아있을동안 내 머리속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시끄러웠다.

오랜만이라고? 그 이후로는 어떻게 지냈냐고?

죄다 고백했다가 차인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특히 고백받은 당사자가 말이다.

그러나 강의내내 도피오는 아예 그 일을 잊은건지 잊은척 하는건지 아무렇지도 않아서, 도리어 내가 그의 눈치를 보게되었다. 그가 나와 같은 대학에 진학한것은 매우 의외였지만,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우연히 일어난 해프닝일거라 생각했다.

"저 동아리 가입하러 왔는데요,"

동방에서 누워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도피오와 눈이 마주친건 그때였다. 그도 내가 여기있으리란건 예상치 못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허둥지둥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말했다.

"어..어, 그, 안녕..반갑다...?"

도피오는 쏜살같이 문을 닫고 뛰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에 어안이 벙벙해짐과 동시에 오기가 들어 그를 쫒기 시작했다. 왠 남정네 둘이 건물 복도를 뛰어다니다니 우스꽝스런 모양새였다.

"야하,너,흐...거기 서..그때 친구말 들을걸, 쟤는 밥먹고 달리기만 했나."

우리는 건물을 나와 급기야 캠퍼스 내를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때 아닌 추격전에 다들 우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에, 나는 급기야 앉아서 무릎을 부여잡고 다친 시늉을 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도피오는 뒤따라오는 사람이 없어지자 머뭇거리며 쭈뼛쭈뼛 내쪽으로 다가왔다.

"..형, 어디 다쳤어요?"

나는 질세라 그의 셔츠자락을 붙잡았다. 도피오는 내 무릎이 깨끗한것을 보고 걸렸다는듯 얼굴을 살짝 찌뿌렸다.

"너 왜 나 피해."

"..형이 기분나빠 하실까 봐요. 대학도 따라오고, 수업도 따라오고, 동아리도 ㄸ,"

"아,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따라 와."

"그러니까, 내가 기분나빠할까봐 그랬다고...?"

"네..사실 형이랑 같은 대학가고 싶어서 여기온 건 맞는대요...그게 다였어요! 수업도 형이랑 겹칠줄은 몰랐고, 동아리도 멩세코 음침하게 형 따라다닌건 아니라구요...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도피오는 답지않게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이 크나큰 오해를 정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우선, 나는 너를 전혀 그런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어. 나는 널 처음 봤을때 무척 반가웠단 말이야. 미안하다니, 그런건 오히려 ㄴ,"

미안하다니, 무엇을? 그를 좋아하지 않아서?

나는 급하게 말을 멈추었다. 그것은 오히려 그에게 두번 상처주는 일이었다. 그가 그 일을 묻고 지내기를 원한다면 언급하지 않는 것이 맞았다.

"...아무튼, 난 전혀 상관없으니까 동아리 들꺼면 들고 가. 우리 대학에서도 친한 형,동생 사이로 지내자."

도피오는 내 말을 듣다가 씁쓸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렇죠. 친한 형,동생 사이죠."

내가 도피오를 싫어하냐고 물으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좋아하는 쪽에 가깝다. 그렇다고 사귀고 싶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다. 어쭙잖은 감정으로 사귀었다고 상처주기도 싫고, 내가 애초에 얘를 연애대상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가끔 뭐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얘전에 챙겨준 적은 있어도..그냥 친한 동생이니까, 이 정도면 흔한 일 아닌가?

"흔하기는 개뿔이, 너네가 친구면 난 친구없다. 너희 뭐하니?"

내 얘기를 들은 친구가 나를 얼척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내가 고등학교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절친으로,현재는 재수 끝에 대학교 새내기 생활을 즐기고 있다.

"좋아하네, 좋아하네."

"근데.. 그 친구는 그 사람을 그냥 친구라고 생각해."

"얘기 들어보니까 그 사람도 네 친구 좋아하는거 같긴한데...아, 몰라. 그냥 까놓고 말하자. 걔지?"

"ㅁ,뭐?"

나는 마시고 있던 쉐이크를 거의 뿜다시피했다.

"뭘 그렇게 놀라. 내가 너 한두번보냐? 친한 친구 얘기고 자시고, 그 도서부 키큰애 맞잖아. 너는 진짜 1살이나 더 먹고는 뭐하냐."

순간 친구의 마지막 말에 울컥해서 한마디 하려했으나 곧 의아해서 물었다.

"잠깐, 너 알고 있었어?"

"모를리가 있나. 걔가 점심시간마다 우리반와서 하루가 멀다하고 너 찾는데, 아마 우리반애들 다 어렴풋이 알걸. 특히 여자애들."

"아....잠깐, 그럼 그 체육대회때도?"

"이 형님이 도와줬는데도 어떻게 진전이 없냐, 진전이."

"..진짜 너무 숨고 싶은 심정인데. 걔는 그냥 친한 후배, 동생이라고. 난 걔를 그 정도로는 좋아하지 않았단 말이야."

"아니? 내가,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봤을때도 너희는 쌍방이었어.

너 고등학교 때 걔 줄려고 점심시간마다 매일 되도않는 1+1핑계로 음료수 줬던건,"

"..매일 아니야. 그리고 진짜 1+1이었어. 한살 많은 형아 놀아줘서 고맙다는 표시도 못하냐."

"학교 끝나고 걔랑 같이갈려고 일부러 청소당번 자처했던건."

"혼자가면 심심하잖아."

"..걔 아프다고 했을때 걔네 집에 약이랑 죽사가지고 간건."

"...그때 집에 걔 혼자 있다고 해서..."

"아오! 속터져. 너도 네가 말하면서 뭔가 이상하지? 그게 내 심정이다. 넌 진짜 걔 옆에 다른사람이 있어야 깨달을거 같아. 뭐가 문제야. 걔가 남자라서?"

"...그런것보다는 난 아직 이 감정이 연애감정인지 잘 모르겠어. 괜히 사귀었다가 걔한테 상처주면 어떡히니? 심지어 동생인데."

"야, 20살이면 다컸지. 그리고 걔가 부탁했어? 너의 짐작일 뿐이잖아. 뭐..정 네가 확신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면 뭐라 하지는 못 하겠는데, 헷갈리면 걔옆에 다른 사람이 있단 걸 생각해봐. 내가 장담하는데, 그렇게 좋은 기분은 아닐걸?"

다른 사람...그렇지, 도피오 얼굴에 과팅은 들어오고도 남겠네.

나는 동아리실에서 과자를 먹으며 생각하고 있었다. 안에는 몇몇선배들과 도피오가 한창 수다를 떨고 있었다. 도피오는 결국 내가 있는 동아리에 가입했다. 그는 금방 다른 사람들과 친해졌고, 마치 동아리의 기존 멤버처럼 녹아들었다.

"야, 그래서. 너 과팅 할 생각없냐?"

"그래, 야, 그 얼굴이랑 키두고 뭐하냐."

"에이, 아직은 공부에 집중하려구요."

"..와, 여자애들이 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구만. 그럼 너 혹시 이상형있어?"

"딱히 생각은 안해봤는데, 음. 저는 귀여운 사람을 좋아해요."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과팅에 나간 도피오를 상상해 보았다.

과팅이면..그 자리정하기 게임도 하겠지? 도피오는 잘생겼으니까, 걔랑 얘기하고 싶은 사람도 많겠지..그런데 그 중에 도피오가 마음에 들어하는사람이 있으면 어떡하지?

...어떡하긴 어떡해. 나는 그냥 친한 형인걸.

나는 과팅 후 서로 사귀는 도피오와 의문의 여자를 상상해보다가 기분이 언짢아져 그만두었다. 친구의 말처럼 내가 도피오를 그런..쪽으로 생각하는건지 모르겠지만 가능성을 열어둔 것만으로도 갑자기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나저나 너랑 베르 뭔가 예전에..아는 사이갔던데? 맞아? 야, 너는 이렇게 잘난 애를 너 혼자만 알고 있냐."

"맞아. 꼭 눈빛이..."

눈빛이 왜, 뭐 어떤데?...

나와 도피오는 지레 찔려 눈알만 굴렸다. 동기의 입이 떨어지기 까지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엄청 반가운 사람 만난 것처럼. 맞지,맞지?"

"..아, 저랑 베르 형은 같은 고등학교 였어요. 동아리도 같이 했는데. "

도피오는 살짝 안도한 듯 말했다.

"와, 그럼 고등학교 같은 동아리에 대학교도 같은 동아리네? 대박이다."

"야, 이정도면 사귀어야 하는거 아냐?"

"아, 아니거든. 그냥 친구사이야."

평소 착하지만 장난기가 많은 동기가 짗궂게 웃으며 덧붙였다. 평소 같았으면 웃어 넘겼을테지만 방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터라 괜히 당황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혹시 귀 빨개졌으려나. 옆에 도피오가 앉았으니까 다 보일텐데.

나는 옆에 앉은 도피오를 힐끗 보았다. 그는 정말로 이제 아무 감정이 남지 않은건지 그저 허허 웃을 뿐이었다. 감정을 의식하고 나자 그동안 나의 행동들이 스쳐지나가며 괜히 부끄러워졌다. 나는 목 뒤까지 열이 오르는걸 느끼며 자리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형, 무슨 일 있어요? 아까 급하게 가길래."

도피오가 뒤따라오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걸었다.

...어떻게 얘는 손도 잘생겼지. 얼굴도 잘생겼고..혹시 나, 꽤 얼굴을 보는 편인가?

나는 속으로 감탄하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도피오는 다시 조용히 말을 걸었다.

"..형은 저랑 그런 식으로 엮이고 싶지 않은거죠? 이해해요."

"...뭐? 아니, 그런게 아니라."

나는 그런게 아니라 변명하려 했으나 곧 멈추었다.

뭐, 이제와서 '알고보니 나도 너를 좋아하는것 같아'라도 말할꺼야? 사람 마음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진짜 아니고, 그냥 내가 끝내지 못한 과제가 있어서 그래. 너 oo교수님 과제, 알지? 우리 같이 듣는 교양 말이야."

도피오는 나를 관찰하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곧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거겠죠. 그나저나 형, 아까 동아리 형누나들이 다같이 동아리 엠티가자고 하던데, 형도 오실거죠? 저 동아리에서 아직 친한사람 형 밖에 없는데..."

사실상 그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를 올려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물었다.

"..너도 가게?"

"네! 저 이런거 해보고 싶었거든요. 같이 가요. 네?"

그는 알겠다는 내 대답을 듣고는 눈에 띄게 기뻐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대형견같아 절로 흐뭇해졌다.

좋아. 이번에 가서 오해를 푸는거야.

나는 굳게 다짐하며 차에 올랐다. 내 옆자리에 앉은 도피오는 무척 들뜬 듯 했다. 지난 일주일 간, 나는 그와 더 같이 있고 싶은 동시에 도망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막상 같이 있을때는 좋은데, 그가 이런 내 심정을 알아채면 어떡하나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혹여 그가 내가 장난치는 걸로 받아들여 기분이 나쁠까봐 더 조심스러운 것도 있었다.

..지금은 도피오가 나를 안 좋아해도, 어쩔 수 없지. 걔는 1년이나 기다렸잖아. 이번에는 내가 기다려야지. 일단은 같은 선상에서 출발하는게 낫지 않겠어?

"도착해서도 날씨 좋았으면 좋겠다, 그렇죠?"

"..그러게."

도피오는 이런게 처음이라는게 빈말이 아닌지 내가 앉자마자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줄줄이 읊었다.

"저희 가면 보드게임도 해요! 제가 가져온 게 있는데..,아, 고기도 당연히 구워먹겠죠? 이따가 고기굽고 먹어야하니까 감자랑 고구마도 가져가요. 그리고...아, 죄송해요. 형 멀미 하는데."

"아니야, 괜찮아. 약 붙였어."

우리가 시답잖은 얘기를 조잘댈 동안 차는 서서히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틀어놓은 여름노래가 분위기를 밝게 끌어올렸고 모두들 여행이 주는 기대감에 젖어있었다.

망했다. 안 자려고 약도 붙이고 왔는데. 자면서 침이라도 흘렸으면 어떡하지?

눈을 떠보니 이미 장을 보기로 한 마트에 도착해 있었다. 우리를 포함해 몇명은 숙소에 도착하기 전에 장을 보기로 한 상태였다.

"형, 내려오세요."

도피오는 차문을 열어주며 나에게 말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더운 열기가 훅 끼쳤다. 이런 날씨에 엠티라니...나는 순간 잘못 왔나 싶었지만 재밌을거라 되뇌이며 시원한 마트로 향했다.

'미안, 도피오. 나는 너를..'

입학식때부터 봤던 그 형은 단호하게, 그렇지만 상냥하게 말했다. 사실 그 형이 나를 연애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은연중에 알고 있었는데도, 혹시 내가 더 잘하면 날 좋아해 주지 않을까 생각했던 날들이 스쳐지나갔다.

괜히 말해서 이 관계를 깨뜨린 것 같고, 형 마음에도 짐을 쥐어준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날은 괜찮다며 얼른 교실을 나왔지만, 앞으로 형을 어떻게 볼지 용기가 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던 내가 우연히 형이 가게된 대학을 지망하게 된건 순전히 변덕이었다. 물론 가서 형을 만나겠다는 거창한 것은 아니었고, 그것보다는 그냥 그와 작은 것 하나라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추억은 정말 서서히 잊혀질 것만 같아서.

'도피오, 도피오 학생 없나요?'

그러니까 형과 강의가 겹치고, 내가 입부하려던 동아리에 형이 있었던건 정말 우연이었다는 소리다. 나는 동아리실에서 형을 보자마자 당황스러운 나머지 그만 그자리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분명 우스워보였겠지.

'우리..대학에서도 친한 형,동생 사이로 지내자.'

그 말을 들었을때 안도함과 동시에 더 씁쓸해졌다. 왜 드라마나 웹툰 속 클리셰 있지 않은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 내지는 동생이 갑자기 연애상대로 의식된다는. 물론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나도 내심 그런걸 기대했다. 그러나 형의 말로 인해 확인사살을 받은 듯 했다. 너는 그저 친한 동생일 뿐이라는. 하지만 동시에 이런 관계라도 이어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런데 요즘의 형은 무언가 이상했다. 마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귀가 붉어지는 것이-

아냐, 그럴리가 없는걸. 그렇지만..만약 그렇다면?

마트는 생각보다 넓어서 우리는 두명씩 한 카트를 맡아 장을 보기로 했다. 엠티 인원이 인원인지라 생각보다 많은 것이 필요했다. 나는 필요한 것을 골라오다가 먹고싶었던 신상 과자를 발견하고는 슬그머니 카트에 집어넣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은 그 옆에 있던 초콜릿과 젤리도 쓸어담고 있는 중 이었다.

"...형, 단 거 너무 많이 담으신거 아니예요..?"

도피오는 그런 나를 보다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고 그런 그의 지적에 나는 괜히 찔려 다시 몇개를 뺐다. 도피오가 피식 웃으며 말하는 것은 그때였다.

"뭐, 사람도 많은데. 누군가는 먹겠죠. 그냥 카트에 들어있는건 사죠."

아, 정말. 왜 저렇게 웃는거야. 이러니까 꼭..

"그래, 누군가는 먹겠지. 사람이 몇인데. 남으면 네가 다 먹어줘야 해."

나는 괜히 퉁명스레 대답하며 열이 오르는 얼굴을 돌렸다. 그저 지금의 내 얼굴을 그가 보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뒤에서 도피오가 제가 다 먹을테니 걱정말라고 외쳤다.

"아, 죄송합니다."

그날 유독 마트에는 사람이 많았고, 내가 어떤사람과 걷다가 부딪힌 것은 그때였다. 꽤 강하게 어깨를 부딪혀서 나는 살짝 뒤로 휘청거렸고, 그런 나를 잡은 것은 도피오였다. 마치 그가 나를 뒤에서 안은 모양새가 되었다.

"형, 괜찮아요?"

"어,어. 난 괜찮아."

돌겠네, 진짜. 이거...섬유유연제 냄새인가?

..그때랑 같은 냄새.

도피오의 품은 탄탄하고 넓어서 내가 들어가도 충분히 남았다. 은은히 풍겨오는 포근한 향기에 심장이 두방망이쳤다. 뻘쭘해서 괜히 그를 올려다봤으나, 오히려 나를 보며 웃고있는 눈과 마주쳐서 괜히 시선을 피했다.

"큼, 이제 야채류 사러가자."

나는 불에 덴듯 서둘러 도피오에게 떨어져 다른 곳으로 향했다. 갑자기 내가 잘 걷고 있는지, 팔다리가 서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는 않는지 신경이 쓰였다.

아...너무 귀엽다...

나는 옆에서 과자를 까먹고 있는 형을 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형은 저를 의식하다 못해 호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인 것 같았다. 정확한 계기는 모르겠지만, 하나하나 따지기엔 그럴 겨를이 없었다. 누군가는 속도 없다고 뭐라 할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드디어 나를 봐준다는데 그런게 대수랴.

우리는 장을 다보고 숙소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형은 그 이후로 나를 힐끔힐끔 보며 조용히 간식을 먹고 있었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며 딴청을 피웠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웃지 않기위해 허벅지를 꼬집어야했다.

그러나 형의 기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것처럼 주변을 자꾸 맴돌았다. 처음에는 재밌어서 모른척 했는데, 한번은 궁금해서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얼토당토 않은 말이었다.

뜬금없이 같이 배드민턴을 치자던가, 네가 가져온 보드게임을 하자던가...분명 무언가를 말하려 그랬는데 막상 차례가 되니 부끄러워서 둘러대는게 틀림없었다. 나는 점점 오기가 생겨서 이 말도 안되는 게임에 기꺼이 어울리기로 했다.

큰일났다..

나는 도피오와 단둘이 얘기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렸으나 매번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바람에 때를 놓쳤다. 더군다나 말을 꺼내려 할때마다 '이런 중요한 얘기는 좀 더 조용하고 진지한 곳에서 해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막상 되도않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도피오는 뜬금없는 내 제안에도 기꺼이 어울려주었고, 그럴때마다 나는 그가 나를 웃기게 생각할까봐 더욱 부끄러워졌다. 더군다나 오히려 그는 재밌어하는 눈치여서, 그때만 생각하면 다시 쥐구멍에 숨고싶었다.

"자~!이번에 새로 온 신입들 모두 환영한다!"

바비큐가 끝나고, 원하는 사람들끼리 술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도수가 매우 낮은 술을 홀짝거리면서 옆에 앉은 도피오를 힐끔거렸다. 그는 의외로 술이 잘 받는 체질인듯 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한 선배가 진실게임을 하자며 제안했고, 다들 흥미를 보이며 눈을 반짝였다.

"이거 술뚜껑 돌린다, 아, 첫번째 순서는 도피오다. 우선 내 질문은 이거야. 너 지금 좋아하는 사람있어? 대답하지 않을거라면 그냥 마시면 돼."

"있어요."

도피오의 망설임없는 대답에 장내는 술렁거렸고 질문했던 선배도 멍하니 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지,진짜? 그럼 그 사람이 지금 여기 있어?"

"질문은 한번에 하나, 였던 것 같은데요."

"아, 그렇지..그럼 다음 순서가 뚜껑 돌리자."

나는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여학생들의 눈에 스파크가 튀는 듯한 착각을 했다. 그동안 열의가 없던 사람을 포함한 모두가 그의 나머지 대답을 듣겠다는 의지 하나로 그가 또 지목되길 빌었다.

그런 기도가 통한 것일까. 다음에도 그가 지목되었고 지목한 여학생은 서둘러 그에게 그 사람이 왜 좋은지 물었다.

"글쎄요, 그냥...처음 봤을때부터 좋았어요. 또 그사람은 엄청 배울점이 많은 사람이예요. 아닌 척 하면서도 저를 챙겨주기도 하고, 힘들 때 고민상담도 자주 해주고 그랬거든요."

..내가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나는 그의 대답을 들으며 저 사람이 나이기를 빌며 잔에 담긴 얼음을 휘저었다. 아마 그런 생각을 하는것이 나뿐만은 아닐것이다. 그중에는 나보다 더 멋진 사람도 있을거라 생각하니 갑자기 울적해져 괜히 뻥튀기를 집어먹었다.

나는 흘끔 질문한 여학생을 보았는데, 그녀는 뒤에서 무엇인가 중얼거리며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를 보고 있자니 마치 고등학교때 나와 도피오를 보고 웃던 여자애들이 생각나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혼자 중얼거리며 웃는 게 어딘지 무서워서, 나는 특이한 친구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대부분 자러가고, 나와 도피오는 술게임에 져서 뒷정리를 하기위해 자리에 남았다.

지금이다. 오늘 꼭 말해야 해.

나는 크게 심호흡하고는 입을 열었다.

"저기..도피오."

"네?"

도피오는 왜인지 즐거운 낯으로 내 말을 받았다.

"저..저기, 있잖아.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사귀자고요?"

"너를, 응?"

"아...이게 아니었나."

도피오의 들뜬 얼굴이 금방 또 시무룩해졌다. 이대로 두면 또 땅을 파고 들어갈 기세라, 나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큼...내가...너를 좋아하는거 같은데...근데 너는 나를 지금은 안 좋아할 수도 있으니까.."

"제가 형을 왜 싫어해요?"

도피오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니..네가 그,고백..했던건 벌써 2년전이니까. 그동안 다른 사람이 좋아졌을 수도 있으니까..나도 그때의 너처럼 그냥 내 마음을 말하고 싶었어. 사실 나도 그때 네가 좋았던 건지도 몰라. 그런데 나는, 괜히 지레 겁먹어서, 너한테 상처줄까봐 그걸 외면했어..나한테는 이 감정에 대한 확신이 없었거든. 물론 내가 그랬듯이 너도 그냥 모른척해도 돼.

..말하다 보니까 나 엄청 못됬었네. 미안해. 사실..네가 사귀자고 해줬으면 좋겠어. 아니, 아니야.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러나 나의 뒷말은 도피오의 입으로 막혔다. 그의 입에서는 옅은 알코올 냄새가 났는데, 그마저도 나에겐 좋았다. 저번에 그가 농담조로 무엇이든 다 잘한다는 말을 했었는데, 지금보니 그것이 농담이 아닌 듯 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나는 숨이 막혀 그를 약하게 쳤고 그는 그제야 나를 떼어냈다.

"저도 좋아해요, 체면같은거 따질 시간없이 형한테 바로 키스하고 싶을 정도로요. 2년만에 원하는 답을 들었는데, 기분이 날아가고 싶은게 당연하잖아요! 진짜, 진짜 저 좋아해요? 장난치는거 아니죠?"

"응..."

그는 눈을 반짝이면서 얼굴을 가까이 했다. 나는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그러나 그마저도 좋다는 듯 도피오는 나를 안으며 여기저기 뽀뽀했다. 그의 뒤로 흔들리는 꼬리가 보였다.

"야,잠깐. 거기 예민한 데라고..."

밤은 깊어가고 있었고 그렇게 우리의 우여곡절 엠티는 끝이 났다.

이건 나중에 안 사실인데, 이미 동아리의 눈치 빠른 몇몇 사람들은 우리사이에 무언가가 있다는것을 눈치챘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대체 얼마나 좋아하는 티를 낸거냐고 도피오에게 괜시리 핀잔을 주며 투닥댔지만, 그는 뭐가 좋은지 맞으면서도 허허 웃을 뿐이었다.

-Love U!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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