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에서 공작 부인으로, 공작가의 족보를 망쳐보겠습니다.
<로판풍 GL 웹온리전 : 영애!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해요!> 참가 작품입니다.
부스명: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망사.
주의 키워드: 모브 남캐(스토리상 주인공들 다음으로 많이 나옵니다! 남캐의 존재 자체가 싫으신 분들은 읽지 않으시는 걸 추천합니다.)와의 결혼 및 스킨쉽(전연령이므로 그에 맞게 묘사했습니다.), 유사 ㄹ친(모녀 관계가 됩니다.) 등등… 절대 해피 엔딩이 아니며 부스명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래서 유료 결제 라인을 걸어두지 않았으니 읽으시고 저한테 뭐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대답해, 되도록 간결하게. 내가 납득할 수 있게 대답하라고!”
“…언성을 높이면 안 되지, 프리시.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왜 그랬어? 왜… 왜 죽였어?”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을 것 아니니. 무의미한 질문이구나.”
“…네게 귀족으로서의 삶을 줬잖아. 그걸로 된 거 아니야? 애초에 접근한 건 그거 때문이었으면서 왜 그랬어, 왜!”
“쉬이… 프리시,”
“날 그렇게 부르지 마!”
“이런… 우는 거니?”
“네가 미워… 끔찍해.”
분노에 몸을 떨며 파르르 떨던 애처로운 여인이 휘몰아치는 격동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한번 터진 둑을 막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 금방 온 얼굴이 젖어 들도록 흐느껴 울 수밖에 없었다. 여상한 얼굴로 프리실라의 날 선 말들에 대꾸하던 아셀린은 어쩐지 기꺼운 얼굴로 다가와 그런 프리실라를 끌어안았다.
“눈물을 그치렴, 아가. 네 눈물 한 방울에도 가슴이 저미는 듯하구나…”
“흐윽… 네가, 너무, 미워…! 이거 놔!”
“쉬이… 눈물을 그치기 전까지는 이대로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란다. 착하지, 우리 아가.”
괜찮아요, 다 괜찮아질 거예요, 착하죠, 우리 아가씨.
그 옛날 익숙하게 들었던 목소리와 겹쳐 들리는 말에 프리실라는 목 놓아 울었다. 정말 좋아했는데. 너의 말은, 무엇이든 다 믿었었는데. 어째서… 왜 내게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이제는 쿠키 냄새나 부드러운 섬유의 향이 아닌, 향유와 짙은 향수 냄새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품에 안기면 느껴지는 약간 까슬거리는 하녀 복이 아니라 부드러운 실크가 느껴졌다. 모든 게 달랐다. 아래로 질끈 묶은 머리 대신 위로 높고 화려하게 장식한 머리칼. 토닥일 때마다 느껴지는 팔찌나 짤랑이는 귀걸이. 일하기에 편하게 적당히 짧고 넓은 옷 대신 허리를 잘록하게 조이고 아래는 있는 대로 부풀린 드레스. 자신을 부르는 호칭, 우리의 관계. 단 하나, 달라지지 않은 게 있다면, 나를 안았을 때 들을 수 있는 거센 심장 소리.
***
제국법이란 교묘하고 굉장히 치졸해서 찾으려면 허점을 수백만 가지 뽑아내 서적을 몇 권씩 만들 수도 있을 거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걸 가장 잘 이용하는 건 권력자었으며, 휘둘려지는 건 권력가를 제외한 모두였다. 그것은 왕족이라고 해도 피할 수 없었고, 귀족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의 지위란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으로 정해지기 마련이니 여자들 치마폭에서 휘둘린다는 말도 사실상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도 아니었다. 치마폭보다 큰 것이 가문의 지붕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집안의 성으로 갈아 끼우게 되었는지, 그곳에서의 대우는 어떤지, 후에 어떤 자식을 낳았는지에 따라 천차만별로 갈리곤 했다. 이후 자식의 평판에 따라 또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평판이었으므로 여성의 삶이란 공중에서 돌아가는 동전처럼 1초에도 수십번씩 갈리곤 했다.
그런 역사가 쭉 내려오던 어느 날 가문의 후계자가 될 법한 남자를 모조리 죽여버리고 스스로가 가문의 대표가 된 여성이 있었으며 그렇게 역사는 새롭게 적혀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 가문이 새롭게 생겨나 타 가문에 비해 역사가 무척 짧았다는 특이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므로 오래된 가문일수록 그런 사실을 탐탁지 않아 했다. 플랑슈 공작가가 그중 하나였다.
플랑슈 공작 부인은 금지옥엽 외동딸 한 명만을 낳고 몸이 완전히 망가져 이후 출산할 수가 없었는데 그 소식을 전하던 주치의가 그날 명을 다했다는 사실은 저택 내에 공공연하게 돌아다니는 사실이었다. 다만 고명한 가문일수록 후처에 대한 것이 까다로웠기 때문에 그저 몸이 아주 많이 허약해졌을 뿐인 공작 부인이 살아있는 이상 후사를 보는 건 어려웠다. 첩을 들이는 건 당연히 불가했고 공작은 그런 천한 여자의 피가 섞이는 것도 내켜 하지 않았으므로 그저 공작 부인을 살뜰히 챙기는 척하며 언제 명을 달리할까 오매불망 기다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쯤 본인의 체력은 장담하지도 못할 거면서. 따라서 플랑슈 공작자의 공녀는 자연스럽게 후계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공작은 언제든 아들을 낳은 생각으로 프리실라에게 크게 애정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차일피일 후계자 교육은 뒤로 미룬 채 신부 수업만 강행했을 정도였다. 그날은 여느 때처럼 프리실라가 제 아버지를 찾아간 날이었다.
“아가씨, 그만 우세요… 네?”
“아, 아버지가, 흡, 좋아하실 줄 알고… 갔, 는데…”
“주인님께서도 분명히 좋아하셨을 거예요. 이렇게 예쁜 자수를 저는 태어나서 처음 본답니다.”
“베티… 아버지가 이걸 보자마자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 아니지… 차라리 뭐라고 해주셨으면 다음에는 더 잘해갈 텐데 그냥… 집사를 불러서 내 식사를 챙기라고 하셨어. 그게 전부야!”
“…프리시 아가씨.”
아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다. 주변 사람들의 호의만 받으며 귀하게 자랐기 때문에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타인의 악의를 기민하게 눈치채곤 하니까. 천성이 예민한 프리실라는 공작의 ‘무관심’을 읽어내고 속이 잔뜩 상해 베르타에게 안겨 눈물을 쏟아냈다. 내가 뭘 해도 만족하지 않는 아버지, 이 가문의 자식은 나뿐인데도 여전히 공녀로 남아있는 나, 후계자 교육은커녕 공자가 받는 기본적인 학문조차 아직 배우지 못한 채 글을 깨치자마자 곧장 신부 수업을 위한 귀부인만 드나드는 저택. 모든 게 서럽고 억울했다. 그깟 성별이 뭐 대수라고. 공작가에 데릴사위로 들어오겠다는 공자들은 저택을 몇 바퀴나 두르고도 남을텐데. 제가 찾아갈 때마다 죽을 것 같은 기침과 깡마른 몸으로 맞이하는 어머니께 하는 것도 그랬다. 가끔 어머니의 허여멀건한 몸에 시퍼런 멍 같은 자국이나 손자국이 가득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는 유난히 더 힘들어하며 프리실라를 일찌감치 돌려보내곤 했었다. 그리고 그런 날 아버지를 찾아가면 아버지는 유난히 피곤해 보였다. 예민하기도 했고.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아, 여전히 아버지는 내 뒤로 남동생을 바라는구나. 그래서 주치의의 진단이 있었는데도 꼬박꼬박 어머니를 찾아가 저렇게 괴롭히는구나. 어린 프리실라의 마음에 무언가 싹이 꿈틀거렸다.
흘러넘치는 감정을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는 어린 아가씨를 꾸준히 끌어안고, 쓰다듬고, 토닥이던 베르타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유모는 아니었지만, 프리실라가 기억하는 가장 유모 같은 사람은 베르타였다. 유모는 프리실라가 젖을 다 떼기도 전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런 프리실라에게 분유와 가슴을 내어주며 키운 게 베르타였기 때문이었다. 처녀의 가슴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데 아직 젖을 때지 못한 아가씨가 분유를 거부하며 울 때마다 속이기 위해 자기 것을 물리느라 고생했다는 이야기는 아주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어미의 정이 부족해서인지 프리실라는 이렇게 상처받고, 괴로울 때마다 베르타의 품을 찾았다. 그 덕에 감히 공녀의 침대에 풀썩 앉을 수 있는 건 사용인 중에서는 베르타가 유일했고. 목 끝까지 올라오는 하녀 복의 단추를 톡톡 끌러낸 베르타가 앞섶을 훤히 드러낸 뒤 프리실라의 머리를 그곳에 대게 했다. 귀족만큼 관리를 하지 않는 평민이라 그런지 살결이 아주 곱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프리실라는 베르타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마음은 진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직 어린 아가씨는 이렇게, 하녀의 가슴에 뺨을 묻고 잠들곤 했다.
“…주인님. 어찌 이곳까지……”
“딸자식 방에 아비가 못 올 건 아니지. 주제넘은 말이구나.”
“죄송합니다… 저, 그럼, 아가씨를 깨울까요?”
“되었다. 나중에 해도 되는 말이니 일어나거든 날 찾아오라고 해라.”
“예, 주인님.”
“흠, 네 이름과 나이가?”
“베르타라고 합니다.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갓 스물을 넘겼을 거라 생각했는데 꽤 나이가 있구나.”
“예? 아, 어머니께서도 그런 말씀을 종종 들으셨다 하셨습니다.”
“그래. 앞으로 프리실라를 잘 보살피거라.”
프리실라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가 다시 풀어졌다. 그야 물론 이 집의 주인은 공작이고 자신은 하녀장도 뭣도 아닌 공녀의 아끼는 하녀일 뿐이라지만 이건 정말… 불쾌했으니까.
속옷까지 벗은 건 아니라지만 첫으로 덧댄 가슴은 타고난 크기 때문이라도 가까스로 가려지는 것에 가까웠다.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부드러운 천을 사용하느라 그런 거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공작이라고 해도 보통의 상식을 가진 신사라면 시선을 피해준다거나 자리를 뜨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건만. 공작은 성큼성큼 가까이 다가와 그곳을 뚫어지게 보더니 프리실라의 뺨을 가볍게 톡톡 두드리고 가면서 그 위를 손가락으로 슥 문지르고 간 것이다. 수치심에 어깨까지 붉게 달아오르자, 공작이 키득거리며 방을 나섰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공작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기 전까지 몸을 바짝 굳히고 있던 베르타는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쉰 뒤에야 프리실라를 침대에 눕힐 수 있었다. 눈물로 젖은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준 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나오는 베르타의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주인이 사용인을 탐하는 것은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으나 없는 일도 아니었다. 그들이 ‘사용’인 이었기 때문이다. 못된 주인을 만나면 쉴 새 없이 사람이 바뀌어 문턱이 닳기도 했었다. 플랑슈 공작은 그 정도로 안하무인은 아니었으나 종종 어수룩한 신입 하녀가 공작의 방에 잔뜩 긴장한 채로, 혹은 설렘을 가득 담아 들어갔다가 다음날 급하게 저택을 빠져나가는 경우가 왕왕 있기는 했었다. 몇 날 며칠 잘 지내다가 배가 부르기 시작해 당혹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하녀장에게 불려 가거나.
공작이 베르타를 ‘그런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본처가 멀쩡히 있는데 첩이나 애인을 두는 건 손가락질당하는 일이었으나 평민이나 노예를 심심풀이로 희롱하는 건 너무 흔해서 길거리에 치이는 돌과 같았다. 공작은 애가 탔다. 시간이 흐를수록 후처로 들어올 만한 괜찮은 영애는 전부 나이가 차 결혼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본인은 후처를 들일 거면서 상대는 재취이길 용납할 수 없었고 이왕이면 처녀를 맞아 튼튼한 아들을 낳기를 바라는 과분한 욕심이었다. 침대에 누워 꼼짝도 못 하는 부인의 상태를 확인하느라 하루에도 수십번씩 주치의를 불러내고 그도 성에 안 차 공작 부인을 찾아갔다가 짐승처럼 욕구를 해소하고 온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럴수록 공작 부인은 점점 야위어갔고, 프리실라를 만나기 어려워졌으며 이제는 뱃속까지 울리는 기침 소리도 거의 들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플랑슈 가문의 자랑인 후원이 가장 만개한 어느 날, 공작 부인은 근 10년 가까이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팔려 오듯이 공작가에 시집와 수차례의 관계 끝에 겨우 가진 가장 소중한 보물, 프리실라를 남겨둔 채. 공작 부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건 손에 꼽았다. 우선, 공작 부인의 부모와 가장 측근에서 살피던 하녀, 그리고 프리실라. 자신의 딸을 친정으로 데려가겠다는 말에 프리실라가 식음을 전폐하고 반대하자 공작은 그런 프리실라를 방에 가둔 뒤 장인·장모에게 그러라고 했다. 그리고 프리실라가 물도 마시지 못한 채 삼 일이 막 지났을 무렵, 베르타가 공작의 앞에 이마를 찧어가며 제발 아가씨를 봐달라 간청했고 그날 이후 프리실라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울다 지치고, 허기와 갈증으로 망가져 가는 프리실라 앞에 공작이 다정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내일부터 플랑슈 가문의 후계자가 될 이의 모습 같지 않구나. 베티, 가서 아이를 씻겨라.”
“…예, 주인님.”
뒤따라 들어오는 베르타의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아내는 프리실라를 물끄러미 보던 공작은 유유히 방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프리실라가 아무리 울고, 베르타의 품을 파고들어도 그날 베르타가 프리실라에게 맨살을 드러내는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10살이 되도록 어머니의 품에 안겨본 적도 없고, 자상한 말 한마디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도 프리실라는 그 부재를 견디기 어려워했다. 그때마다 베르타가 토닥여주지 않았더라면 혹독한 후계자 수업도 해낼 수 없었을 정도로. 매일매일 잠잘 시간도 줄여가며 숙제를 해내고 복습까지 끝마쳐도 공작의 싸늘한 시선에 온기가 채워지는 건 볼 수조차 없었다. 베르타는 아직 얼마 안 되었으니 너무 상심할 필요 없다고 말을 붙였지만, 프리실라의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건 단 하나, 아버지의 인정이었다. 너무 미웠지만 동시에 너무도 사랑받고 싶었다. 공작은 매일매일 프리실라의 방에 들어와 공부하는 걸 보고 갔는데 그때마다 베르타에게 다가가 어떻게 지내고 있나 묻곤 했다.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뜻이구나, 싶어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묘하게 열기를 띠는 것도, 베르타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도… 사부작거리는 천이 부대끼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말이다. 그런 소리가 들릴수록 더 잘 보이기 위해 서적에 고개를 박고 몸을 한껏 웅크려 집중했다. 이렇게 하면 뒤에서 지켜보는 아버지가 더 기특하다 생각하시겠지? 간혹 이상한 소음이 들리는 것 같으면 뒤를 돌아보고 싶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공작이 공부에 집중하라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다시 고개를 고정한 채 두 사람을 등지고 그렇게 글만 써 내려갔다. 30분 정도, 프리실라가 한 과목 숙제를 거의 끝내가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공작은 방을 나서며 베르타에게 나쁘지 않군. 하며 어깨를 툭툭 두드렸는데 그게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언젠가는 저 입에서 좋다는 말이 나올 것 같아 기쁜 표정으로 그제야 베르타를 바라보면 베르타의 표정이 썩 좋지만은 않아 갸웃할 때도 있었다.
“베티, 표정이 왜 그래?”
“아… 제가 어젯밤 잠을 설쳤나 봐요.”
“치…… 공부는 내가 하는데 베티가 왜 잠을 설쳐~”
“그러게요, 힘든 건 우리 아가씨께서 다 하시는데… 아, 죄송해요. 이제는 플랑슈 소공작님이시죠?”
“으응, 아니야. 베티에게만큼은 프리시 아가씨로 불리고 싶은걸?”
“하지만… 누가 듣기라도 하면 제가 혼날지도 모르는데요.”
“베티 말대로 이제 내가 이 가문의 후계자인데 마음에 드는 사람 한 명쯤은 곁에 둘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그 정도는 감싸줄 수 있어! 그러니까, 응?”
“……”
“어머니도 안 계시고… 이제 내 어린 시절을 아는 건 네가 유일하잖아. 너와 있을 때만큼이라도 좋으니 그냥…… 아버지께서 아시면 크게 화내실까?”
“우리 프리시 아가씨, 아직 이렇게 여리고 작으신데… 주인님께서도 괜찮다고 하실 거예요.”
“그럴까…?”
“그럼요.”
어리광 부리듯 품으로 파고드는 프리실라를 끌어안아 준 베르타가 뒷머리를 쓸어내리며 조용조용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바보같이 베르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철부지였다.
열 살이 되자마자 시작된 교육은 삼 년이 지나자 얼추 꽃을 피우기 시작했는데 그즈음에는 여느 타 가문의 후계자들 못지않게 프리실라도 제법 대화를 섞을 정도가 되었다. 타고난 성정이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자기는 벌써 영지를 보러 갔는데 영애는, 하며 운을 띄우는 재수 없는 공자들의 콧대를 꺾어놓는 일은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 사이 베르타는 서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프리실라의 곁에만 있었다.
“베티는 좋아하는 남자 없어?”
“좋아하는… 남자요?”
“응! 나 때문에 이미 한참 늦었지만, 베티가 원하면 좋은 혼처를 알아봐 줄 수 있어. 당연히 재취 자리 말고! 우리 베티를 그런 놈한테 보낼 수는 없으니까.”
“아뇨, 저는… 가능하다면 아가씨 곁에 계속 있고 싶어요. 허락해 주신다면요.”
“그러기엔 베티의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나 해서… 그야 내가 베티 없이는 이제 아무것도 못 할 정도로 의지하고 있지만, 베티가 정말로 공작가를 나가서 하고 싶은 게 생긴다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 거야.”
“저는… 제 인생은 아가씨를 곁에서 모시는 걸로도 충분해요. 지금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가시는 아가씨로 가득해서 이 마음에 남자를 담을 시간도, 여유도 없는걸요?”
“음…… 그래?”
“혹 저에 대해 무슨 소문이라도 들으신 걸까요?”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베티가 요새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있었잖아. 몰래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나~ 했지! 그런 거면 말하고 당당하게 만나라고 말해주고 싶었어.”
“사용인에게 과분한 처사예요, 프리시 아가씨…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한 건 정말 죄송합니다. 누구를 만나러 간 건 맞지만, 그게……”
“응?”
“…공작님께서, 부르셔서 갔었어요.”
“아, 그랬구나! 그럼 그런 거라고 말을 하지 그랬어~ 또 나에 대해 물어보셨어? 이번에는 뭐라셨는데? 아이참, 아버지도~ 그냥 나한테 와주시면 좋을 텐데.”
“요즘 힘든 건 없으신지… 이야기를 듣고 가셨어요. 아무래도 어릴 때 혹독하게 대하셨던 게 남아 있으셔서 그런지 직접 찾아오시기에는 조금… 어려우신가 봐요.”
“그런 걸까? 언젠가는 같이 석찬이라도 들면서 대화를 나누면 좋겠다. 그런 날이 오겠지?”
“그럼요.”
프리실라는 베르타의 말에 양 볼을 붉게 물들이며 다시 보고 있던 책에 집중했다. 아버지의 일을 도와드릴 정도가 되면 지금보다 더 자주 뵐 수 있겠지. 베티를 불러서 이야기를 듣고 가는 게 아니라 나를 직접 불러 주실 거야. 꿈에 부푼 마음이 가쁘게 움직였다.
바쁘다는 핑계에 떠밀려 얼굴을 못 본 지 한 달이 넘게 지나가는 어느 날이었다. 베르타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되자 안달이 나진 프리실라는 조용히 자리를 비우는 베르타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베티는 은근 과묵한 구석이 있어서 그날 다 말해주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몰래 가서 듣기만 하고 얼른 돌아오면 둘 다 모르겠지? 베르타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뒤 코너를 돌자, 프리실라는 돌기 직전 벽에 붙어 가슴에 손을 모으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윽고 베르타의 입이 먼저 열리기도 전, 몸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누가 보기라도 하면……!”
“쉬잇, 아직도 입에 붙지 않은 모양이지? 호칭이 그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그건… 방에서만 부르기로 한 게, 아윽…!”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응? 베티. 나와 약속한 게 있었을 텐데.”
“아닙니다, 아니에요… 잊은 적 없어요. ……여보.”
심장이 내려앉았다. 손끝이 차가워지고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였지만 소리를 내면 안 될 것 같아 그대로 입을 틀어막았다. 끔찍하고 역겨운 대화는 더 이어졌다.
“하아… 선물해 준 향유 냄새가 나는구나. 그래, 네게는 이런 게 어울려. 봐, 살결도 아주 보드랍게 변했지 않니.”
“…제게는 과분합니다. 고작 하녀가 쓰기에는, 윽…”
“내가 선택한 여자가 고작? 지금 내 안목을 감히 네가 판단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너는 그저 얌전히 있으면 된다.”
“아, 아픕, 니다…”
“오오, 그래… 고운 얼굴에 손자국이 남을 뻔했구나. 자… 곧 저택에 손님이 방문할 예정이라 내 시간이 많이 없단다. 어서 나를 기쁘게 해주려무나, 응?”
“누, 누가 지나가면… 곧 아가씨께서 저를 찾으실 시간이기도 해서……”
“오늘따라 고분고분하지 않구나, 베티. 벌을 받고 싶은 게냐? 그날 내게 빌며 했던 말이 아직도 이 가슴에 사무치거늘… 나를 매정한 지아비로 만들 셈이구나. 더불어 매정한 아비가 되기를 종용하고 있어.”
“그런 게…!”
“그래그래, 네가 프리실라를 아낀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단다. 그래서 약속까지 하지 않았니. 자, 어서.”
이윽고 축축한 소음이 잇달아 들려 귓가를 간지럽혔다. 진흙이 고막을 파고든 것 같았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아버지와 …베티라고? 둘이 지금 무슨 대화를…… 비틀거리는 발걸음 사이사이마다 거친 숨소리와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프리실라의 발목을 옥죄어왔지만,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고작 3년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저렇게 익숙하게 만나 이야기를 나눌 정도라면 설마 그 전부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끔찍하고 추악한 가정만 이어져 프리실라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방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집어 던졌다. 예전 신부 수업을 해주던 귀부인들에게 들어 남자의 짐승 같은 욕구에 대해서 수도 없이 들어왔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아버지의 그런 면들이 충격이지는 않았다. 다만, 어머니처럼, 언니처럼,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준 이의 너무도 낯선 모습에 차라리 착각했다고 믿고 싶었다. 요 며칠 무리하느라 환각을 들은 것이라고, 모습을 본 것은 아니니 아닐 수도 있다고 치부해 버리고 싶었다. 내가 아는 베티가 그럴 리 없다고 애써 자위하며 덜덜 떠는 몸을 끌어안고 이불 속에 기어들어 갔다. 아마 곧 돌아와서 공작님께서 오늘은 이런 질문을 하셨고 저는 이런 대답을 했어요. 하고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겠지. 그래, 그럴 거야. 하지만 평소처럼 돌아올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도 베르타가 프리실라의 방문을 두드리는 일은 없었다.
베르타가 없는 하루하루는 공허하기 그지없었다. 하루 종일 기다리느라 무료할 정도의 하루는 아니었다. 프리실라는 베르타가 없으면 울 수도 없는 단순히 어린 아가씨가 아니라 빼곡하게 채워진 일정을 모조리 수행해야 하는 후계자였으므로. 다만 지금까지는 언젠가 다가올 날을 기다리며 기쁘게 해냈지만 지금은 하루하루 죽어가는 마음으로 버텨내고 있다는 것에 가까웠다. 어째서 그날 이후 베티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건지, 방 밖으로 나갈 때 어째서 사용인들이 묘하게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건지. 술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방법 같은 건 단 하나밖에 모르며 살았는데 그 하나를 할 수 없게 되자 프리실라는 진창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프리실라의 마음이 어떤지 관심도 없는 공작은 간만에 석찬을 같이 들자며 하녀를 통해 말을 전했다. 하녀는 공작님께서 이렇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하며 말을 덧붙였다. “중요한 자리가 될 거다.” 어쩐지 하나가 아니라 셋이더라니. 프리실라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치장을 돕겠다며 하녀 세 명이 프리실라에게 다가왔다. 토할 것 같이 마음이 울렁거렸다.
“오랜만에 오붓한 시간을 가지니 좋구나.”
“…예, 아버지. 그간 뵙지 못해 많이 아쉬웠어요.”
“혼자 이 넓은 영지를 살피려니 네게 못 해준 게 많다. 그래도 네 소식은 꾸준히 듣고 있었단다. 그 정도는 알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최선을 다해 맡은 바를 수행하고자 노력했어요.”
“그래, 삼 년의 시간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인데 네게는 길었던 모양이구나.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성장했어. 이제야 비로소 공작가를 책임질 수 있는 후계자의 모습에 가까워졌구나.”
“감사해요… 앞으로 더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공작가를 이끈다는 건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정말 듣고 싶은 말이었는데. 이 한마디를 위해 그 모든 순간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는데. 음식은 모두 프리실라가 좋아하는 음식이었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지나치게 화려하고 많았다. 지금까지 냉대하던 아버지가 고작 딸아이 칭찬해 주겠다고 준비한 것치고는 너무. 열 살이었다면 뭣도 모르고 바보같이 웃으며 살갑게 말을 붙였겠지만 그러기에 프리실라는 이제 억지로 자신을 감출 필요가 없었다. 보고 들을 게 있기도 했고. 그래서 아, 뭔가가 있겠구나…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흠… 그리고 언제까지고 안주인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겠더구나.”
“……아.”
“그동안 너를 보러 가지 못한 건 저택 일까지 살피느라 그런 것도 있었으니 슬슬 일을 덜고 싶더구나. 그래야 내가 사랑하는 딸과 시간을 보내지 않겠니.”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도 벌써 삼 년이 넘었으니까요. 제가 아직 부족해서 아버지의 일을 덜어드리지 못했네요.”
“그런 말을 들으려고 꺼낸 말이 아님을 알지 않니. 흠흠, 오늘은 소개할 사람이 있어서 이 자리를 준비했다. 음, 네가 가장 잘 아는 사람이겠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소개하마.”
“……설마,”
“앞으로는 베티라고 부르지 말고 어머니라고 불러라. 아셀린, 이쪽으로.”
“…프리시.”
“네가 어떻게… 어떻게 그런 모습으로……!”
“어허! 서약은 아직이지만 네 어머니다. 앞으로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깍듯이 모시거라.”
“…끔찍해. 끔찍하다고요, 아버지. 베티가 저한테 어떤 사람인지 아시면서 어떻게 그런 베티와…!”
“네게만 소중한 사람이 아니다! 아셀린은 내가 사랑하는 여자야. 그래서 내 곁에 두기로 결정한 거고.”
“사랑이요… 사랑. 그 사랑 참 역겹네요. 제가 이 여자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차라리, 차라리 저보다 어린 영애를 데리고 와서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해도 이 정도로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 거예요! 베티, 너도 마찬가지야. 이 더러운 것… 이러려고 내 옆에 붙어있었니? 아버지께 꼬리 쳐서 공작부인이 될 기회를 넘보려고?”
“프리실라 플랑슈! 말 가려서 하지 못해!”
“제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어머니께 꽃 한 번 들고 가보신 적 없는 아버지께서 사랑을 논하다니 우습기 그지없네요. 두 사람이 저 몰래 저택에서 그렇고 그런 짓한 거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어요. 그래, 베티는 하녀의 신분이고 아버지는 …얼마든지 취할 수 있으니까요. 근데 사랑? 사랑이요? 하! 전하, 다시는 저를 저 여자와 같은 자리에 부르지 마세요.”
“거기서지 못해, 프리실라!”
“제가 따라가 볼게요, 여보.”
사랑? 사랑이 저렇게 더럽고 추악한 것이라고 그 누가 알려주었단 말인가. 프리실라의 인생에서의 첫 번째 사랑은 어머니였고, 첫사랑은 베티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몇 입 먹지 않은 음식을 복도에 모조리 게워내며 켁켁거리는데, 시야에 나풀거리는 드레스가 들어왔다.
“…프리시.”
“나를…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마.”
“네가 얼마나 충격받았을지 알고 있어. 오늘은… 돌아가신 전 공작 부인의 기일이기도 하니까. 그저 너를 안아주고 싶어서 왔을 뿐이야. 다른 건 하지 않을 테니 그것만 허락해 주겠니?”
“…하. 그동안 나를 어떻게 생각했으면 이렇게 금방 태도가 바뀌는 걸까…”
“그런 게 아니라,”
“그저 아버지만을 노리고 있었구나. 내 곁에 있는 게 좋다고 했으면서… 다 거짓말이었어, 그렇지?”
“아니야…! 정말로, 정말 네 곁에 있는 게 가장 좋았어.”
“…그럼 아버지랑 이런 사이가 되지 말았어야지. 아버지를 사랑하면 안 되는 거잖아! 내가 얼마나 우스웠니.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위해 발버둥 치는 나를 보며 둘이 얼마나 비웃었어? 어차피 아버지는… 내가 아니라 널 보러 온 거였는데 그런 거에 기뻐하는 내가 얼마나 초라해 보였니… 왜 나를 이렇게 만들어. 차라리 나한테, …그렇게 다정하지 말았어야지.”
“프리시 아가씨, 정말 아니에요… 저는 그저,”
“…듣고 싶지 않아. 아버지와 사랑을 하든 부부가 되든 알아서 하렴. 어차피 정말로 내 생각이 궁금했던 것도 아니잖아?”
또다시 따라오면 그땐 벽에 머리를 박아버릴 거라고 말하는 통에 아셀린은 발만 동동 구르며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프리실라의 뒷모습만을 눈으로 좇았다. 아셀린이라니, 천박하기도 한 이름이지. 베티, 넌 알고 있을까? 아버지가 새로 지어준 그 이름에 무슨 뜻이 있는지. …귀족 여자. 플랑슈 공작은 사랑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남자였다. 그에게는 오롯이 소유욕과 체면만이 존재했으니까.
***
삼 년. 낳아준 어머니를 잊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어머니를 잃은 게 고작 열 살이었다면 더더욱. 어떻게든 어른이 되어야 했기에 아득바득 여기까지 왔건만… 가장 사랑했던 두 사람의 배신으로 프리실라의 모든 게 망가지고 말았다. 단순히 새어머니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었다. 섬세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아버지로부터 인생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프리실라가 그렇게 뛰쳐나갔다고 해서 당장 후계자 교육이 끊긴다거나 처벌을 받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미 사교계에 소공작으로 불리게 된 마당에 그렇게 됐다간 플랑슈 공작이 평민 여자에게 미쳐서 자식이고 가문이고 눈에 뵈는 게 없다더라. 따위의 소문이 돌 텐데 체면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그에게 그런 소문은 가당치도 않았다. 사실 그래서 삼 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거였다. 완벽한 귀족 신분 하나와 전 부인을 향한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는 시간을 계산해서. 최소 삼 년은 기리는 시간을 가질 것. 눈속임인 것을 알지만 공작은 어쨌거나 딱 삼 년을 채운 뒤 아셀린을 공작 부인의 자리에 앉혔다. 보통은 규모를 다소 줄여 올리는 게 일반적이건만, 공작은 첫 번째보다 더 화려하고 대대적으로 혼례식을 올렸다. 공작의 무정함과 귀족답지 못함에 수군거리던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참석한 식장에서 “플랑슈 공작이 저 여자, 큼… 공작 부인을 정말 사랑하나 보네. 그게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준비하겠어, 안 그래?” 같은 말을 나누며 졸지에 진정한 사랑을 찾은 로맨틱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프리실라는 건강상의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는데 후에, 결혼식에 왔다 간 귀족들이 안부 편지를 보내며 같이 적은 이야기를 보며 프리실라는 정말로 쓰러질뻔했다. 어머니가 불쌍하고 안쓰러워서. 그리고 동시에, 곱게 단장한 베티를 못 본 게 자신뿐이라는 게 아쉽고 속상했으며 그런 생각이 든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프리시, 괜찮으면 같이 후원에서 티타임을 가지지 않을래?”
“내가 왜.”
“경제학 선생이 네 수준이 벌써 또래를 훌쩍 넘었다고 하더구나… 아버지께서도,”
“내 일에 상관하지 마.”
“프리시,”
“그렇게 부르지 마! 귀가 더러워지는 기분이니까!”
“…이렇게 불리는 걸 가장 좋아했으니까, 엄마는 그저,”
“누가 내 엄마야, 대체 누가! 나한테 엄마는 한 사람뿐이야. 그게 너 일리는 없지 않겠어? 내가 그렇게 불리길 바랐던 사람은 모두 죽어서 없어. 그러니까 다시는, 날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마.”
정식으로 프리실라의 어머니가 된 아셀린은 끊임없이 다가와 살갑게 말을 붙였다. 그때와 똑같은 목소리와 표정으로. 정말로 혼자가 된 프리실라는 그냥 저 품에 안겨 똑같이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바라던 건, 진정 원한 건 그게 아니었으므로 강제로 어른의 길에 발을 디뎌버린 아이는 누구보다 차가운 얼굴을 한 채 끝까지 아셀린을 밀어냈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화목한 가족도, 가장 사랑했던 사람도 잃은 지금 프리실라에게 남은 건 후계자라는 자리 하나뿐이었다. 만약 저 둘 사이에 남자아이라도 태어난다면, 이 자리를 뺏길 것은 안 보고도 뻔했다. 태어나더라도 최소한 프리실라가 사교계나 가문에 단단히 자리 잡은 후가 되어야 했다.
그날 이후 저택은 웃음을 잃었고 모든 사용인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라며 숙덕거렸다. 대개 안주인이 일찍 죽어버린 집안의 부녀 사이는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에 의외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딸이 가장 아끼던 측근을 후처로 삼는 경우는 전무후무한 경우였다. 공작가치고는 부드러운 분위기라 밖에서도 그렇게 자랑하던 사람들은 결혼식 이후 완전히 바뀌어버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압박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도 그럴 게, 사실 공작 부부는 평소와 다를 것 없었고 오히려 더 좋아졌지만, 프리실라가 극도로 예민해졌기 때문이었다. 후계자 교육을 받기 시작한 이후에도 크게 거슬리는 일이 아니면 지나가곤 했으나 그 이후로는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호되게 벌을 주거나 내쫓기도 했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면 미움을 살 법도 한데 프리실라는 그렇게 굴어놓고 얼마 안 가 후회하며 방에 틀어박혀 하녀장을 통해 근황을 살피곤 했던 터라 졸지에 이게 다 안주인이 잘못 들어와 생긴 일이라며 화살이 다른 방향으로 틀어졌다.
애초에 그들은 모두 아셀린을 주인으로 모시고 싶어 하지 않았다. 똑같이 하녀였을 때도 프리실라의 눈에 들어 힘든 일은 모조리 피해 간다고 알게 모르게 따돌림을 당했었는데 이제는 공작의 눈에 들어 공작 부인이 되었으니, 그들이 아셀린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프리실라가 대놓고 아셀린에게 적대감을 보이며 어떻게든 가문에서 내보낼 방법을 찾고 있는 게 저택 내에 파다했기 때문에 더더욱 파가 나뉘듯이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공작은 어리고 예쁜 후처에게 정신이 팔려 이런 것에는 관심도 없었고.
외부에서 소문이 어떻게 돌든 간에 내부는 이러했고 프리실라는 아셀린을 볼 때마다 힘들던 시기를 차차 벗어나고 있었다. 싫어해야 한다고, 너무 끔찍하게 싫어서 밉다고 생각하며 사 년을 보내자 그럭저럭 미워할 수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열일곱. 프리실라는 어느덧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감출 수 있는 명실상부 가문의 제대로 된 소공작이 될 수 있었다.
“작은 주인님, 오랜만에 뵈니 더욱 아름다워지셨군요. 목욕물을 준비했으니 말씀만 하시면 시중들 아이들을 들여보내겠습니다.”
“오랜만이야, 집사. 아… 그래, 그게 좋겠어. 며칠 내내 마차에만 있었더니 몸이 영 찌뿌등해서. 손끝이 야무진 아이들로 부탁할게. 전하는 집무실에 계신가? 영지 사찰에 대한 보고를 드려야 해서.”
“아, 주인님께서는… 지금 저택에 계시지 않습니다.”
“외출?”
“그것이…”
“…하, 안 봐도 뻔하군. 또 그놈의 별장 나들이를 가셨나?”
“마님의 몸 상태가 좋지 않으셔서… 요양 차 남쪽에 있는 별장에 잠시 머물다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곧 돌아오실 것 같으니 작은 주인님께서도 그때까지 느긋하게 쉬시다가 보고는 돌아오시면 하는 게 어떠실는지요.”
“…그래, 어쩌겠어. 부부가 다정히 떠나셨다는데. 아예 그곳에 쭉 계시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아, 목욕보다 식사를 먼저 해야겠어. 방에서 먹고 싶으니 간단하게 차려서 올려보내 줘.”
“알겠습니다.”
프리실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옆으로 누웠다. 재작년부터 시작된 영지 사찰은 한 번 다녀오면 진이 다 빠지곤 했다.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영지민들에게 가장 힘든 시기에 얼굴을 비치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 중 하나였으니까. 원래대로라면 공작이 직접 돌아다니며 꾸준히 인기몰이를 했겠지만, 프리실라에게 넘긴 뒤에는 그 시기 동안 매번 따뜻한 지역을 찾아다니며 아셀린과 여행을 떠나곤 했다. 벌써 세 번째였으니 이제 꽤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아무도 없는 저택에 돌아오면 이렇게 헛헛한 마음이 들곤 했다. 집사장은 쉬어도 된다고 했으나 두 주인이 없는 저택이 잘 돌아가 봤자니 프리실라는 목욕까지 끝내고 난 뒤에 집사장과 하녀장이 간신히 굴려놓은 이 저택부터 다시 꼼꼼하게 살펴야 했다. 공작이 되면 저렇게 사랑놀음을 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이윽고 노크와 함께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식사거리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사찰에서 돌아온 프리실라를 위해 화려한 음식들을 준비했으나 피로에 지친 프리실라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본인도 원하지 않자 이렇게 쉽게 먹을 수 있는 것들로만 준비하게 된 거였다. 달그락거리며 얼마 안 돼 식사를 끝낸 프리실라는 씻고 싶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식사가 사라지고 프리실라의 옷을 벗겨준 하녀들이 뒤로 물러났다. 너무 뜨거운 물은 기운이 빠져 좋아하지 않는데 적당히 미지근한 물에는 프리실라가 좋아하는 입욕제가 들어가 있어 몸을 담그기만 했는데도 기분이 좋아졌다. 하아…… 아무래도 영지 사찰은 생활을 지켜보러 간 거라 저택에서처럼은 지낼 수 없어 이런 호화로운 목욕은 오랜만이었다. 참방거리며 몸이 적당히 노곤노곤해지자 밖에서 하녀 한 명이 이제 들어가도 괜찮냐 물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작은 주인님.”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네. 새로 들어왔니?”
“아, 네. 손끝이 야무진 사람을 원하셨다고 들어서… 제가 이 저택에 오기 전까지 귀하신 분의 마사지를 자주 해드렸었어요.”
“그랬구나. 이름이 뭐야?”
“베… 시입니다.”
“…베시. 그래, 그럼 오늘은 네게 맡길 테니 잘 부탁해.”
“불편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정말로 귀족들의 마사지를 꽤 오래 한 모양인지 손길이 부드러우면서도 힘은 꽤 세서 단단하게 굳은 근육을 천천히 풀어주는 실력이 훌륭했다. 약간 아픈 것 같으면서도 그 뒤에 찾아오는 시원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동안 마사지를 꽤 여러 번 받았지만 보통 겁먹어 힘을 너무 안 주거나, 무작정 세게 짓누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 사람은 달랐다. 전속으로 두고 싶을 정도로. 윽… 하아…… 프리실라가 만족스럽게 웃자, 머리맡에 앉아서 목과 어깨를 풀어주던 하녀가 점점 타고 올라와 두피를 문지른 뒤 쇄골까지 훑어내렸다. 적당한 통증이 상반신을 스쳐 지나가며 오래 묵혀있었던 피로가 노곤하게 풀렸다.
“정말 잘하네… 앞으로 마사지는 네게 맡겨야겠어.”
“만족스러우시다니 다행입니다.”
“어떻게 아픈 곳만 골라서 해줄 수 있는 거지? 신기하네…”
“프리시 아가씨께서는 집중할 때마다 목과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습관은 아직 여전하신 것 같,”
“……너,”
촤악-! 욕조에 푹 잠겨있던 프리실라가 거칠게 몸을 일으키자 수면이 거세게 요동치며 흘러넘쳤다.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쩐지 손길이 익숙하다 했지. 프리실라는 자신이 조롱당한 것 같은 기분에 온몸을 굳힌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그에 아셀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이 식어가는 프리실라에게 황급히 가운을 건넸지만, 프리실라는 그 손을 매섭게 쳐내고는 성큼성큼 걸어 욕실을 빠져나갔다.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주인이 그리하라 했으니 별수 있겠는가. 그래… 가문의 주인이 될 때까지는 나도 이 여자를 어떻게 할 수가 없겠구나. 프리실라는 패배감에 젖어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이를 깨물며 참았다.
“몸이 식어요, 프리시 아가씨…!”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바로 나갈게요. 나가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물기를 닦고 가운이라도 걸치세요, 아가씨 제발……!”
“듣기 싫으니까 닥치라고!!!”
“프리시,”
“그렇게 어머니, 어머니 하며 딸처럼 대하더니 이제는 또 아가씨 취급이야? 나를 우습게 보는 것도 유분수지… 네가 이따위로 굴면 내가 옛 추억에 젖어 네 품에 얌전히 안기기라도 할 줄 알았니? 내가 너 없이 못 살 것 같았던 건 아주 어린 열 살 무렵의 일이었어. 근데 그게 아직도 나한테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
“하지만… 안기고 싶으시잖아요, 아가씨.”
“…뭐?”
“제가 아가씨에 대해 모르는 게 있을까요? 어쩌면 아가씨조차 모르는 것도 잔뜩 알고 있을 텐데요. 가령… 거짓말을 할 때 떨리는 속눈썹이라거나, 너무 세게 뛰어 어쩔 줄 모르고 튕기는 엄지손톱 같은 거요. 슬프고 힘드시죠? 안기셔도 돼요, 내어드릴게요.”
“그 몸을 누구한테 들이미는 거야. 왜, 점점 시들어가는 게 보이니까 이제 나한테 다시 붙으려고? 꿈도 꾸지 마. 전하가 관심을 끊는 순간 넌 별채로 쫓겨날 거야. 내 어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빛도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평생 누군가를 그리워하다 쓸쓸하게 숨을 거두겠지. 내가 너한테 그렇게 못할 것 같니?”
입술을 깨물며 독하게 말하는 프리실라가 무섭지도 않은지 아셀린은 가볍게 웃은 뒤 프리실라에게 다가가 어깨에 두텁고 부드러운 가운을 걸쳐주었다. 성난 고양이처럼 손을 휘두르려는 프리실라를 가볍게 끌어안은 아셀린이 귓가에 조용조용 말했다.
“그런 건 하나도 무섭지 않답니다. 그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아가씨를 만져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때처럼요.”
“너는 정말 갈수록… 최악으로 남으려고 하는구나. 이딴 짓 다시 한번 했다간 당장 저택에서 쫓아낼 줄 알아. 너는 수단이었겠지만, 적어도 그때의 나한테는… 전부였어. 이따위로 더럽히지 마. 마지막 경고야.”
“그때의 일이 아가씨께 의미 있었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저는 정말… 그걸로 됐어요.”
“…허튼소리.”
말은 늘 매섭게 쏘아붙이고 매몰차게 밀어내면서도 정작 정말 아셀린에게 해를 끼칠만한 짓은 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택 내에서의 입지가 썩 좋지는 않으니, 가신들과 의견을 모아 내쫓으려면 내쫓을 수 있었지만 정작 그런 기회가 생기면 애써 모른 척 “전하께서 싸고 도시니 저라고 별수 있나요.” 라는 식으로 모른 척하기 일쑤였다. 그런 자신을 바보 같다고 천하의 미련퉁이라고 자조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이어도 보고 싶었으니까. 어릴 때 받은 애정과 사랑이 이토록 무서운 거였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마음에 금이 가는 걸 느끼면서도 차라리 깨져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베티가 아닌 아셀린마저 좋아져 차라리 공작이 아셀린을 데리고 떠나있는 게 편했다. 속은 조용할 수 있었으므로. 그리고 그런 프리실라의 마음에 기대라도 하듯이 다음 날,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평정심이 완전하게 깨지게 되었다.
“흠, 오랜만이구나.”
“예, 그렇네요.”
“올해 영지 사찰은 더욱 힘들었다고 하던데.”
“…북부 지역의 가뭄이 심각하여 영지민들의 생활이 좋지 못했습니다. 식사 후 마무리하여 보고하려 갈까 했습니다만, 지금 말씀드릴까요?”
“아니, 그런 건 이 사람 없을 때 하는 게 좋겠구나.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예, 그럼 이따 찾아뵙도록 하죠.”
“너는 네 어미가 아파서 요양을 다녀왔다는 말을 들었을 텐데도 그런 딱딱한 태도만 취하는구나. 쯧쯧… 다만 이제는 내 너의 그 방만한 태도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
“네게 동생이 생겼다. 그러니 앞으로 깍듯이 대하며,”
“동생, …지금 임신했다는 건가요?”
“그래.”
“정말이야?”
프리실라가 아셀린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공작이 노발대발하는 게 시야 한구석에 보였지만 두 사람은 오롯이 서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프리실라가 원망과 황당, 그리고 약간의 충격을 내보이며 정말 확실하냐고 재차 물었다. 아셀린은 그저 두 손으로 아랫배를 감싸며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그렇게 붙어있더라니… 더러워.”
“뭐, 뭐라고 지금…!”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사찰에 대한 보고는 다른 사람을 통해 전달하도록 하죠.”
프리실라는 어린 날의 그때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식당을 벗어났지만, 이번에는 비틀거리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공작과 프리실라는 다른 이유로 아이의 성별을 궁금해했는데 한쪽은 빼앗기 위해, 한쪽은 지키기 위해서였다.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저 아이가 남자면, 자신이 지금껏 뭘 해왔든 이 자리를 단번에 뺏길 거라고. 만약에 남자아이라면 그렇게 되기 전에, …죽여야 했으니까. 의사는 번번이 아직은 알 수 있는 게 없고 최소한 서너 달은 지나야 알 수 있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초조하게 안전기가 될 때까지 기다리며 공작은 집무실에 틀어박혀 지냈고 종종 하녀들이 밤에 드나드는 걸 봣다는 말이 프리실라의 귀에 들어오곤 했다. 저런 인간에게 인정받고 싶어 애쓰던 게 무가치해질 정도로 모두 쓰레기 같은 순간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약 삼 개월의 시간이 지났고 하필이면 주치의가 방문하는 그날, 프리실라는 급한 일정이 생겨 황성에 다녀와야 했다. 딱 봐도 공작이 자신에게 미룬 게 뻔했으나 권력의 우위를 놓고 보자면 당연하니 순순히 따를 수밖에. 프리실라는 공작을 노려보면서도 마차에 올라탔다.
“아쉽게 됐구나, 프리실라. 좋은 소식은 온 가족이 함께 듣는 게 모두의 기쁨인 것을.”
“허면 제가 듣고 갔으면 하는데요.”
“폐하께서 찾으시는데 내 어찌 일을 미루겠니. 믿고 맡길 수 있는 건 하나뿐인 후계자인 오직 너밖에 없단다. 자, 어서 출발해야지?”
“…예, 그럼 부디 좋은 소식이기를 바라죠.”
이른 아침에 출발해 거의 새벽이 되어서야 도착한 프리실라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누군가 오는 것도 아닌데 이 시간에 모든 사용인이 허둥지둥 서두르고 있었다. 대체 뭘 위해서? 그리고 프리살라가 혼자 들어오는 걸 발견한 집사장이 황급히 다가와 허리를 숙이는 걸 손으로 제재한 뒤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저… 그것이,”
“대체 이 시간에 왜 이리 소란스러운 거지?”
“면목 없습니다, 작은 주인님. 이 부족한 것 때문에 이런 일이…”
“왜 그러는지 말을 해야 알 거 아니야. 무슨 일인데.”
“저, 그것이… 주인님께서, 사고로 그만……”
“…많이 다치셨어? 얼마나?”
“사람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택에 있었으면서도.”
“……죽었다고?”
“다행히 마님과 태중에 아기씨께서는 무사하십니다.”
“사고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봐.”
“두 분이 함께 계단에서 구르신 것 같습니다. 다만 그것이… 평소 사용인들도 거의 드나들지 않는 곳이라, 발견이 늦어서 그만… 주치의가 늘 그렇듯 방으로 찾아갔는데 안 계셔서 그제야 찾다가 두 분이 피를 흘리고 계신 걸 찾았습니다. 주인님께서는 마님을 감싸며 떨어지셨는지 머리를 크게 부딪히셔서…”
“아셀린은.”
“몸에 멍이 들고 발목을 약간 다치셨지만, 목숨에 지장은 없으십니다. 주치의 말로는 아기씨의 맥도 무사하다고 하고요.”
“…어째서, 살았을까.”
“예?”
“아니, 아니야… 그저… 아니야, 집사. 가서 일 봐. 나는 만나보러 가야겠어.”
“아, 마님께 가시는 거군요. 분명 큰 위안이 될 것입니다.”
프리실라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걷다가 이윽고 달리기 시작했다. 분노로 몸이 떨렸다. 그리고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 아셀린이 누워있는 침대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다행히 방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아셀린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프리실라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처음으로 돌아간다.
“아버지 소식을 들은 모양이구나.”
“…왜 너만 살았어?”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니?”
“떨어진 곳은 저택 내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계단이라고 했어. 그곳으로 유인해 아버지를 죽일 생각이었겠지. 근데 떨어지면서 널 붙잡으셨나 보지? 같이 다친 걸 보면. 아이가 생겼으니 이제 혼자 독차지할 생각이었나 본데, 어쩌지 이렇게 의심이 살만한 일이 생겨버려서.”
“…그런 게 아니래도.”
“그럼 똑바로 설명해, 내가 납득할 수 있게! 그걸로 만족했어야지, 더 욕심내지 않았어야지!”
“…네게 귀족으로서의 삶을 줬잖아. 그걸로 된 거 아니야? 애초에 접근한 건 그거 때문이었으면서 왜 그랬어, 왜!”
“쉬이… 프리시,”
“날 그렇게 부르지 마!”
“이런… 우는 거니?”
“네가 미워… 끔찍해.”
아셀린에게 안겨 마구 때려가며 우는 걸 들은 하녀장이 황급히 방으로 들어와 프리실라를 데리고 나갔고 아셀린은 아쉬운 얼굴을 하면서도 프리실라를 잘 부탁한다며 침대로 가 누웠다.
그리고 다음 날, 장례식은 직계 가족끼리만 조용히 보냈다. 임산부가 있다는 좋은 핑계가 있어서 다행이었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후원을 거닐고 있는데 저 안쪽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게 들렸다. 어차피 가문 내에서 자신을 저렇게 부를 수 있는 건 현재로서는 아셀린뿐이었다. 그대로 돌아 나가려는 걸 붙잡은 한마디 때문에 프리실라는 어쩔 수 없이 테이블에 앉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저택을 나갈까 해. 남편을 잃은 내가 이제 이곳에 어떻게 있겠어. 아이도 생긴 마당에… 네게 짐이 될 수는 없지.”
“…진심이야?”
“정말이야. 이대로라면 아이를 통해 휘둘릴 수 있으니 호적에서 지워도 되고. 다시 평민으로 돌아가도 상관없거든.”
“왜,”
“그래서 마지막으로 너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어. 들어줄래?”
“…잠깐이라면.”
“……어떤 여자가 있었어. 평범하고, 그저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었지. 그러다가… 인생 전체를 내줘도 아깝지 않을, 아니지 인생을 주는 것 정도도 싸게 먹힌 것 같은 보물을 만나게 돼. 온통 흑백인 세상에서 그 사람만 화려한 색색의 빛으로 빛났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 하여튼 그 보물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어서 그저 행복했어. 아, 이렇게 사는 게 전부였으면 좋겠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매일매일 평생 믿어본 적도 없는 신에게 빌 정도로. 그런데… 분에 넘치는 소원이라서 신이 화나기라도 했던 건지 그 행복을 더럽히는 남자를 만나게 된 거야. 추잡스럽고, 역겨운… 남자를. 근데 그 보물에게 참 중요한 남자라… 어쩔 수 없이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어.”
“…그 보물을 빌미로 협박이라도 당했나 보지, 그 여자는?”
그에 아셀린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찻잔에 담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머리가 자라며 그랬겠구나. 하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쪽이 더 어울리는 가정이었고. 다만, 프리실라에게는…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래도 보물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견딜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버텼을 거야. 눈을 감고 더러운 것보다 소중한 이의 목소리를 떠올리면 끔찍한 시간이 지나가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 짐승 같은 남자는 시간이 갈수록 더 역겨운 요구를 해왔지. 아쉽게도 여자에게 가진 거라곤 몸뚱이가 전부라 감히 저항할 수도 없었어. 그래도 시간이 지나서 보물이 조금 더 크면 되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도 했었는데 아쉽게도 그건 불가능했어. 말했지? 남자의 역겨운 요구는 더 심해졌다고. 보물과 여자는… 최악의 날, 최악의 방법으로 관계가 재정립되지. 그 여자는 한 번도 그런 걸 바란 적 없었는데 말이야. 물론 보물에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겠지만. 이해를 바란 건 아니었을 거야. 그럴 일이 아니기도 했고.”
“보물도… 이제는 알고 있을걸.”
“그래? 똑똑하기도 하지… 어쨌든, 노력한다고 했는데 무슨 성과가 있었겠어? 더 멀어지기만 했지. 그래도 보물은 갈수록 눈부시게 성장해서 미움받아도 좋으니 그저 곁에서라도 볼 수 있으면… 미움받는 것도, 모진 말을 듣는 것도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어. 근데 그 남자, 언제나 남자가 문제였어. 그 더러운 작자는 언제나 남자아이만을 원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그 여자의 배로 낳은 아이면 상관없다는 말을 하더라고.”
“…뭐?”
“그동안 가르쳐놓은 게 아깝지만 그만큼 좋은 물건이 됐으니 좋은 집안에 보낼 수 있을 거라고 하면서…”
“……”
“여자가 가진 건 오직 몸뿐…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가만히 있었겠니. 때를 노리고 노렸지. 음, 사실 때는 많았어. 욕심을 내서 보물을 만나러 가고 싶었을 뿐이라 늦춰졌던 거야.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잠깐, 너…”
“같이 죽을 생각이었을 지도 모르지. 누군가의 말마따나 더러운 피가 섞인 몸으로 이 가문에 남을 만큼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야. 근데… 실패했어. 여자가 눈을 떴을 때 얼마나 절망스러웠을지 상상이 가? 지긋지긋한 인생,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 하고 생각했을걸.”
“그만… 그만해. 더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근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아… 신이 준 기회일까? 그 보물의 기억에, 삶에 영원히 나라는 흔적을 남길 기회를 주신 걸까?”
“베티,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정신 차려!”
“저택에서 나가기 전 마지막 티타임이니까 제가 내린 차를 한 모금만 마셔주세요, 아가씨. 제 마지막 소원이랍니다.”
“…정말 나갈 거야?”
“정말이에요. 이 아이의 존재 자체가 아가씨께 위협이 될 테니까요.”
“평민으로 신분이 돌아가더라도… 여생을 편히 살 수 있게 도움을 줄 거야. 난 누구와는 다르게 쓰레기 같은 공작이 될 생각은 없으니까.”
“……네, 부디. 현명하고 자애로운 분이 되어주세요.”
프리실라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맞은편에 앉은 베르타가 꿀꺽꿀꺽 들이키는 게 보였다. 저렇게 목이 탔나…? 하는 순간이었다. 베르타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흘러나왔다.
“죄송, 해요… 이런 걸 드시게 해서……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가씨가 의심을 사실, 큽…! 쿨럭……”
“너, 대체 무슨, 베티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조금 더 곁에 있고, 싶었는데… 어떻게든 아이를 안 가져, 왔는, 데… 죄송, 해요…”
“어, 어떡해… 베티 제발, 아… 제발…… 나가서 산다며, 산다고 했잖아!”
“하, 지만, 이제… 조금, 지쳤어요, 아가씨…… 저는, 더러운 여자라서, 아가씨 곁에, 있을 수가… 없잖아요…”
힘없이 풀썩 쓰러지는 몸을 받아 들자, 프리실라의 코에서도 피가 주르륵 흘렀다. 내장이 녹아내리고 있는 베르타에 비하면 코점막이 약간 상한 정도였지만 그마저도 안쓰러운지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 피를 닦아주며 하염없이 프리실라를 바라봤다.
“아시죠…? 제 보물은, 언제까지나… 프리시 아가씨, 흐… 뿐이에요.”
“나, 나한테도, 베티만… 그랬어. 내 엄마이길 바라지 않았던 건, 그러니까,”
“쉬이 아가씨… 곧 사람들이 올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계시죠…? 우리 아가씨는, 똑똑, 하니까…”
정말로 힘겨운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고통 섞인 신음 하나 내지 않던 베르타는 그렇게 얼마 안 가 프리실라의 품에서 마지막 숨을 내뱉고 온기를 잃어갔다. 프리실라가 오열하며 소리 지르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자 이윽고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이 몰려왔고 그대로 혼절하는 프리실라를 받쳐 든 집사장이 상황을 정리했다. 두 여자를 아주 옛날부터 지켜봤던 집사장과 하녀장은 묵묵히, 익숙하게 현장을 통솔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다음 날, 아셀린 플랑슈와 프리실라 플랑슈를 독살하려고 했던 하녀가 잡혔다. 뭐라 뭐라 중얼거리던 하녀를 물끄러미 보던 프리실라는 “자신은 살았으며 죽은 건 평민 여자 한 명뿐이니 그에 맞는 벌을 주는 게 맞겠지.”라며 일축했다. 그 뒤는 집사장에게 맡겼는데 어차피 베르타가 매수한 하녀이므로 사형이든 뭐든 큰 의미가 없었다. 자신에게 딱 한 모금만 마시라고 한 것도 의심받지 말라고 그런 거였으니 말이다. 바보 같은 여자. 바보 같은 베티, …내 보물.
프리실라는 아셀린 플랑슈를 다시 베르타로 돌려놓았고 적당한 곳을 찾아 묻어주었다. 그게 끝이었다. 공작 부인이 아니므로 따로 예를 갖출 필요도 의무도 없었으니까. 다만 프리실라는 남은 생 내내 곁에 그 누구도 두지 않았다. 마치 그래야 하는 사람처럼.
다른 분과의 합작이므로 따로 결제선을 두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주최님의 뜻에 따라 소액이지만 후원창의 의미로 소액을 걸어두려고 하니… 제가 쓴 마라맛 백합이 괜찮으셨다면 해주시거나 해주세요! 물론 댓글이나 기타 다른 방법으로 표현해주시는 것도 너무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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