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s. D 4

구마사제 베르길리우스 X 악마 단테

창고 by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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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마르코 9, 38-40

그는 꿈을 꾸었다. 몇 번이고 반복된 꿈을 꿨다. 10년 동안 이어져온 악몽은 토씨하나 없이 같은 대사를 반복하는 연극 같았다. 늘 같은 말을 하면서 연출은 매번 다르게 돌아오는 연극 말이다. 어떤 날에는 그는 사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으며, 어떤 날에는 정말 그의 역할이기도 했다. 어떤 날에는 정말 무대처럼, 오래된 영화 필름을 틀어주는 것처럼 전체적으로 색이 바라고 눈 앞이 지직거렸다. 본래는 색도 맛도 느껴지지 않을 꿈은 깨어나기 전까지는 실제로 그의 후각이 자극 된 것처럼 향을 내뿜는다. 그는 늘 꿈속에서 비릿한 피냄새를 맡았다. 일어나고 난 뒤에도 여전히 머물러 그의 삶을 지배할 것 같은 그 냄새. 사실은 밤마다 착색된 현실를 몇 번이고 다시 사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최근에는 루프물이라고 하는 창작소재도 존재하지 않는가. 그것이 정말로 상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의 꿈이 1년 내내 반복될 즈음 하곤 했는데.

베르길리우스는 같은 천장을 올려다본다. 그가 사랑한 천장이다. 그 작은 고아원은 처음부터 베르길리우스의 눈에 띈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선한 사람이었으나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괜한 정의심을 가지지도 않았고 무례한 동정심을 가지지도 않았으며 으레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무감한 온도를 유지했다. 그와 같이 신학교 시절을 함께한 친구 중에는 정의로운 사람도 있었고, 주 그리스도의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둘이 비슷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검소하게 살았고, 그만큼 타인에게 베풀었으며. 자신의 사비를 들여 노숙인들을 먹이고 심지어는 집에 데려와 씻기고 자리를 내어주기도 했다. 신도들은 그런 모습을 보며 그들이 진정으로 성스럽다고 말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런 모습을 그저 지켜보았다.

그렇게 굴면 자신이 진정한 봉사자가 된 것 싶던가?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사회에 끝임없이 증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은 집단 내에서 끝없이 관계를 형성해야한다는 말이기도 한다. 모든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불안을 잠재하고 있다. 사회라는 흐름에 탑승하지 못한다면 안될 것 같은 기분. 그저 흘러가는 우주 속에서 누군가 자신에게 중력을 주었으면 한다. 사람의 목숨은 그렇게나 가벼우니까. 그렇게나 날아갈 것 같으니까. 그러니 결국 필사적으로 변한다.

그는 비관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행동을 비난하려는 의미에서 꺼낸 것이 아니었다. 지나칠 뿐이지 그들은 실제로 봉사한 것이다. 자신들이 위험을 감수했다고 믿으며 말이다. 그저 타인의 삶이다. 베르길리우스는 그들이 가질 감정이나 고양심, 실제로 쾌락을 느낄 위해한 ‘선의’에 대해서 생각한다. 사람은 원죄있이 태어난 터라. 진정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살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진정 순수하다면, 그는 쉽게 무례할 것이다.

구마사제로 살아가면서 그는 봉사에 대해서 생각했다. 신실함에 대해서 생각했다. 성스러운 행위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람들은 그의 옛 친우들이 검소하게 살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자신들이 기부한 돈으로 성전을 중축하고 다른 나라에 선교를 하러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참 성스럽다고 말했다. 그들이 주의 말씀대로 행동한다고 말했다. 그들이 수난을 받아들이고자 어려운 봉사의 길을 걷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진정으로 성스러운 행위란 그가 지금 하고 있는 구마가 아닌가? 이보다 명확한 ‘성스러운’ 일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숨듯이 살아야 했으며, 늘 구마행위는 몰래 이루어졌다. 교구는 정말로 신이 내린 수난의 길, 고난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베르길리우스를 숨기려고만 했다. 그건 그를 위해서일까?

베르길리우스는 이 생각이 어릴적 잠시 들었던 치기어린 생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옛 벗들의 생활을 질투하며 편한 생활이라 단정하고 자신을 위로하고자 한 못된 마음. 고해소에서 제 몸에 채찍을 내려치며 몇 번이고 잊으려고 했다. 하지만 잊지 못했다. 오히려 통증은 그의 의문을 되살려주는 하나의 트리거가 되었다.

처음, 그가 그 작은 고아원을 찾아간 이유는 한 소녀 때문이었다. 그가 구마한 이의 딸이었는데, 베르길리우스가 유독 그 아이를 기억한 것은 처음 그 저택에 들어갔을 때 보았던 모습 때문이었다. 백색이라기에는 탁한 회백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채로 그 세피아색이 가득한 저택 안에서 유독 혼자서 무채색인 것 같은 모습. 그저 눈과 머리색을 뜯하는 게 아니었다. 외관의 모습보다는, 베르길리우스는 그에게 가볍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복도 계단 틈새로 사라진 아이의 모습을 시선으로 오래 쫒았다.

그를 안내하는 부인에게 이끌리면서도, 베르길리우스는 그녀의 그 낯가림이 타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알 수 없을 만큼의 거리가 느껴졌다. 그에게뿐만 아니라, 그를 이끄는 그녀의 어머니였을 사람에게도 말이다. 그 거리감의 진실을 알게된 것은, 그가 그 집을 떠난 지 한 달이 지난 뒤였다.

마지막 구마의식을 끝낸 뒤 교구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한 달 전 그가 구마한 이의 근황을 물으며 그 집의 아이에 대해서도 물었던 것 같다. 그곳의 수녀는 유독 무뚝뚝 했는데. 평소라면 그냥 간단히 잘 지낸다고 넘겨버릴 말을 삼켜버렸다. 그저 고개를 들어 베르길리우스의 눈을 바라보고 한참을 망설이는 듯 했다. …무슨 일 있습니까? 하고 그가 재촉하자 시선을 피하며 그에게 서류를 넘겨줬다.

별 거 아니에요. 원래도 입양이었던 모양인데.

그가 건내받은 서류에는 그 부부의 인정사항이 적혀있었다. 결혼관계, 가족관계… 그가 이 도시에 도착하기 한 달 전에 입양 된 아이는 그가 구마를 마친 그 날 파양 당했다. 그가 저택 주인이자 한 아내의 남편인 남자를 치료한 뒤에 무참히 버려지듯 잘라낸 그 글귀. 베르길리우스는 한참동안 그 서류를 바라보았다.

이런 일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악마들린 이의 가족들은 신앙의 힘 만큼 미신도 믿었다.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다 해본다. 정신병원에 보내보기도 하고, 이상한 주술을 실행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신에게 빈다. 미신이니 금지된 주술이니, 그 중 하나가 바로 ‘덮는 빙의’였다. 희생양을 데려와 악마를 덮어씌우는 식으로 넘겨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희생향은 보통 부모도 친지도 없는 고아인 경우가 많았다.

베르길리우스는 수도 없이 이런 사례를 보았다. 다만 이렇게 투명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가 다녀간 바로 그 날 파양을 해버리는, 참 투명한 선언 아닌가. 그는 서류를 다시 건내주며 수녀에게 이 아이가 돌려보내진 고아원에 대해 물었다. 그녀는 머뭇거리지 않고 주소를 말해주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자 또한 그 아이가 가여워서 뜸을 들인게 아니라는 것을. 그저 이런 신도들의 추악함을 직시하면 그가 다시 구마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할까 봐. 사람의 이중적인 면모에 충격을 받을까 봐 말하길 어려워했던 것이다.

하지만 베르길리우스는 지겨웠다. 뭐든. 사람들의 악의나 의중성이나, 간절하고 절박할 수록 그를 원하면서도 그를 의심하고 천하게 여기는 사람들에 태도에 늘 힘겨워했다. 그래, 힘에 부쳤다. 의식은 어렵지 않았으나 그를 수행할 수록 사람들의 시선이나 행동에 알게모르게 상처가 늘었다.

숨을 쉬기 힘들다고 느꼈다. 늘상.

그는 성당을 나와 고아원을 향해 걸어갔다. 대중교통을 타고 20분 정도, 그는 걸어갈까 고민하다가 시간이 늦어지기 전에 도착하기로 마음 먹었다. 작은 고아원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4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낮고 흰 울타리가 쳐진 작은 마당 안에 전체적으로 흰색과 베이지 색으로 칠해져있는 고아원이 보였다. 아늑해보였다. 소박한 크기였으나 오히려 그래서인지 아늑해보였다. 그는 천천히 마당의 돌길을 지나 흰 문을 두드렸다.

똑똑, 두어번 문을 두드리자 저 멀리서부터 아이들의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렸고, 그는 앞치마를 두른 그 고아원의 원장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생각보다 젊었고 이 작은 고아원을 혼자서 운영하고 있었다. 어머, 신부님. 무슨 일이세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는데, 베르길리우스는 그 여인의 몸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과 눈을 마주쳤다. 그가 입을 열었다.

아이를 한 명 찾고 있습니다.

그는 원장실로 안내받았다. 천천히 복도를 지나가는 와중 눈을 굴렸으나 그가 찾는 회백색머리의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뒤에 붙어있던 아이들, 유독 개구져보이던 아이들은 낯을 가리지도 않는지 냉큼 그에게 매달렸다. 뒤를 쫒아오며 신부님, 하고 질문을 쏱아냈다. 왜 오셨어요? 진짜 신이 있어요? 어제 쟤가 제 장난감 뺏었어요. 혼내주세요… 베르길리우스는 이러한 재잘거리는 목소리에 당황하면서도 신부님이라는 직업이 오히려 아이들과의 거림감을 줄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영국은 크리스쳔의 나라. 태어났을 떄는 모두 성당에 가서 축복을 받는 것이 보편적이니 말이다.

아이들을 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게 보였던 걸까. 원장실에 도착하자 그녀는 먼저 그를 들여보내고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는 아이들을 물려주었다.

애들이 참 활발하죠? 뭐라도 드시겠어요? 커피랑 녹차가 있는데.

녹차로 부탁합니다. …예, 활발하네요.

저희 애들이 좀 그래요. 하지만 고아라고 축 쳐져있어야 한다던가, 동정을 사야한다던가. 실제로 제가 수습으로 있었던 고아원에서는 그런 작전을 썼어요. 그래야 후원자들이 기부를 하고 아이들을 데려간다나 뭐라나. 다들 얌전한 아이를 원하지 활발하고 사고치는 아이들을 원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참 이상하죠? 그녀가 말을 덧붙이며 그의 앞에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베르길리우스는 옅게 김이 올라오는 머그잔을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이를 한 명 찾는다고 하셨죠.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이름은 모릅니다. 다만, 한 달 전에 커머스 부부가 입양한 아이인데요. 파양이 됐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아. 라피스를 말하시는 것 같은데…

베르길리우스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도 외관도 확인하지 않았지만 그 아이가 맞을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눈을 한 번 깜박이고선 허리를 세워 베르길리우스를 마주했다. 당차면서도 굳은 시선이었다. 그건, 분명한 보호자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베르길리우스는 그 질문에 답할 의무가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가 구마사제이며, 커머스 부부에게 구마의식을 진행했고, 그 이유 때문에 아이가 파양을 당한 것 같다고. 눈 앞의 원장이 악마라던가 구마의식을 믿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다. 그러나 그가 아는 한 이것이 진실이었고, 이것이 파양의 이유였다.

…그래서 아이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아닙니다. 그저, 파양 소식을 들은 다음에 한 번 찾아와야겠다는 생각밖에 머리에 없었습니다.

베르길리우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언뜻 씁쓸하고 흐릿한 미소였다.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라피스는 말이죠. 참 신기한 아이에요. 그 애의 소꿉친구가 늘 말했죠. 라피스는 정말 신비한 아이라고. 저는 그게 어른스러운 아이라는 뜻이라고 생각했어요. 조용하면서도 심지가 있고, 똑똑하면서도 무례하진 않은 아이. 처음에는 많은 상처를 받아서 속을 숨길 뿐인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점차 나아가면서 이 아이가 속이 참 깊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저는, 생각해버렸답니다.

이 아이라면 입양을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이죠. 제가 본 것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이 빛나는 아이를 분명 누군가는 마음에 꼭 들거라고 생각했어요. 싹싹하고 애교부리지 않아도 분명 사람들은 이런 아이를 원하니까요. 그래서 그 아이를 원한다고, 커머스 부부가 찾아왔을 때는 정말 기뻤어요. 그 부부는 평판도 좋고 돈도 많았으니까요. 물론, 그것만 따진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저는 꼼꼼히 살핀 다음 아이를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네요.

그녀의 말 한마디마다 후회가 뚝뚝 배어나왔다. 자책, 그리고 미안함. 그리고… 분노.

한 달 만에 파양의사를 밝혔을 때, 저는 놀랐지만 적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이가 맞지 않는다면, 생각했던 것과 다른 문제가 생겼다면, 조금 무책임하긴 하지만 방치하거나 학대하는 것 보다는 다시 시설로 보내주는 게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마음에 더 큰 상처가 생기기 전에요.

…하지만 라피스에겐 그게 아니었던 거겠죠. 정말 좋은 가족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마지막 밤까지 그런 말을 했는데.

기어이 몸을 떨던 원장이 고개를 숙였다. 베르길리우스는 소리없이 오열하는 원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근처에 휴지를 내어줬다. 자신에 대한 분노를 겸한 후회가 난자당한 것처럼 아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몇 번이고 그렇게 돌려보내졌을 다른 아이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 모두가 이렇게 인정많은 원장을 만나진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감정을 추스른 다음 베르길리우스를 라피스의 방 앞으로 안내했다. 한 달 전 파양을 당한 뒤로 최대한 터치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늘 소꿉친구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긴 하지만 분명 상처를 받았을 것 같아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고. 그녀는 무을 두드렸고, 라피스에게 신부님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했다고 말했으며, 잠시간의 침묵 뒤에 문이 열렸다.

베르길리우스는 그를 올려다보는 백색의 시선을 마주했다. 첫만남과 달라진 것 없이, 모든 것에 무감한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것을 꿰뚫는 것 같기도 한, 그 시선. 필요치 않는 곳에는 주어지지 않는 시선이 그를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라피스가 입을 열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소리를 들었다.

“…아저씨.”

헉, 다시금 눈을 뜬다. 호흡이 가빠지고 식은 땀이 흐르는 등줄기가 차갑게 느껴지다가도 다시 뜨겁게 느껴졌다. 제 호흡이 귓가에 거슬리고 시야가 흐릿하게 느껴지면 다시 눈을 감았다. 대표 일어나는 걸 보면, 가끔 공황에 빠진 것 같기도 해요. 언젠간 그렇게 말했던 리카코의 목소리가 되감기는 것 같다. 혀 끝에 느껴지는 짠맛. 비강에 어떤 비린내도 닿지 않는 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눈을 뜰 수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꿈을 떨치려는 듯이 고개를 움직이려다가 등 뒤의 감촉이 지나치게 부드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퍽 보드럽고 따듯했다. 이상했다. 등을 타고 흘러야 할 식은땀이 중간에 사라졌다고 할까. 그가 눈을 떴다.

그리고 바로 다시 눈을 감았다. 천천히 굳은 몸을 움직여 최소한의 흔들림만 가진 채로 이마부터 입가까지 손바닥으로 주욱 쓸어내렸다. 미치겠군.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눈을 뜬 순간 베르길리우스는 그의 몸 위에 올라탄 시계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정확히는 그의 가슴팍에 제 시계 앞판을 붙이고 그의 복부에 가슴을 꾹 눌러 올린 채로 오른 허벅다리를 감싼 뒤 반쯤 올라타 잘도 자고 있었다. 어떻게 편안한 자세를 찾았는지 그가 호흡하며 꽤 심하게 흔들렸을 텐데도 꺠지도 않고 잘 자고 있었다. 그제야 베르길리우스에게도 무게감이 느껴졌다.

사람의 온기도 같이. 체온이 원래도 높은 편인지, 아니면 자고 있어서 그런가 그보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몸을 붙인 채로 느리게 호흡하고 있었다. 어꺠가 살짝 흔들렸고 그의 장골에 부푼 배가 살짝 닿았다가 물러나고, 다시 살짝 닿기를 반복했다. 이게 뭐하자는 거지? 그는 재빠르게 어젯밤의 기억을 되살렸다. 그래, 분명 씻고 난 뒤에, 시계가 같이 자자고 했고. 차마 부탁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같이 누웠다. 그리고 난 뒤에…

무슨 말을 했지?

베르길리우스는 다시 곰곰히 기억을 되돌렸으나 괜히 시계가 지가 줬던 베개를 뺏어버리고 몸을 밀착했던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이 날아간 것보다는 컴컴한 동굴 속을 해메는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어떤 실마리도 쥘 수 없었다. 그러다가 피곤해서 까딱 기절했던 걸까? 그는 삼일 밤낮을 새고도 잘 자지 못하는 심한 불면증을 앓고 있었는데 말이다. 이쯤되니 천천히 의심스러워졌다. 그가 슬며시 눈을 떴다.

여전히 그의 위에서 곱게 자고 있는 단테를 바라보았다. 팔을 덮어야 하는 슬립이 살짝 밀려 접혀져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제 얼굴을 쓸어내리던 손을 들어 그의 소매 끝을 잡았다. 꺠지 않도록 천천히 당겨 다시 팔을 덮어주었다. 그는 손을 살짝 밀어 단테의 손등을 문질렀다. 저절로 시선이 손등을 지나 그의 등으로 향했다. 목 뒤는 시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나, 얇은 슬립 너머로 살짝 등이 보일 것 같았다. 저 등에 어저깨 그가 만든 십자 모양의 화상이 있을까? 그런 의문과 함께, 이 잠 많은 악마가 무슨 수를 쓴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스멀스멀 가슴팍을 물들였다.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변하고, 그럴 수록 그는 대담해졌다.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등 위로 그림자가 졌다. 이대로 살짝 슬립을 끌어내리기만 하면 된다. 옅게 가려져 옷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건지 모를 정도였으나 안타깝게도 살결이 보이지는 않았으니. 베르길리우스는 천천히 손을 내리려다가 문득 침대 끄트머리에 비춰진 햇살을 바라보았다.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 틈으로 황금빛 햇볕이 얇은 줄처럼 그려져있었다. 이미 한참 낮인 모양이었다. 등 뒤만 확인하고 깨우자. 그가 그렇게 결심하고 검지와 중지를 내려 딱 단테의 목 뒤, 바로 슬립을 손가락에 걸어 살짝 들어올리려고 할 즈음이었다.

우탕탕하는 소리가 문 뒤에서 들렸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 급하게 달려오는 사람이 둘. 베르길리우스가 채 몸을 일으키키도 전에 문이 열렸다.

쿵.

“관리자-!!”

“관리자… 님?”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린 것에 대한 무례를 논해야 할지. 아니면 저기 멀리 떨어진 이불을 잡아다 이 시계의 몸을 가려야 할지, 아니면 당장 시계를 옆으로 밀어놓고 일어나야 할지 고민하던 베르길리우스는 정면으로 열린 문에 나타난 인물을 마주하고 난 뒤 그저 얼어붙었다.

물론 문을 연 상대와 그 뒤에 선 사람 또한 얼어붙은 것 마냥 그대로 굳어버렸지만 말이다. 베르길리우스가 삐걱이는 몸을 겨우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여왕폐하(Your majesty)?”


영국에는 여왕이 존재한다.

어릴적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흘리듯이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군주가 존재하는 나라. 로얄 스캔들이 존재하는 나라.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여왕이 존재하는 나라가 바로 영국이었다. 물론 굳이 깊게 알 필요는 없었다. 내각 체제라던가 황제의 권한이라던가. 실제로 어떤 식으로 국가가 돌아가고 정치가 진행되는지. 사실 베르길리우스는 그리 궁금하지 않았다. 으레 정직한 시민들이 그렇듯 법이 규정한 경계 안에서 살아갔으며 세금을 내고 있으니 국민들의 혈세를 받는 값만큼-물론 아주 성실하지는 않겠지만- 일하고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저 여왕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당연하게 그 신분제를 받아들였다. 늘 TV 너머로 보이는 얼굴이며 매일 잡지나 신문의 작은 귀퉁이라도 차지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단순히 익숙하다고만 생각했다. 신분이나 서열 같은 건 사실 별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 라고, 5분 전까지 생각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입에서 튀어나온 존칭에 놀랐고, 두번째로 눈 앞에 나타난 여왕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그녀는 TV에 나오는 것과는 달리, 흰 셔츠와 기장이 짧은 가죽바지를 입고 있었다. 상당히 편안해 보이는 복장이었고, 그말은 즉슨 이 공간이자 만남이 격식을 차릴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연해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돈’키호테라고 불리는 현 여왕은 두 번째 혈족으로 계승으로 따지자면 1순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형제가 황제의 관을 심히 무서워했고, 정신적으로 심약했기 때문에 그녀가 황제의 관과 왕홀을 건내 받게 되었다. 그녀는 어려보였고, 실제로도 어렸다. 물론 성인이었으며 얼굴이 심하게 동안으로 여겨지는 것은 있었지만, 그걸 전부 제외하고도 영국은 막 군림한 앳된 여왕에 열광했다. 초기에는 그녀가 살짝 비춰진 사진 만으로 신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전부 팔려나가기도 했다. 그녀는 유행의 선두주자였고, 활기찬 모습과 영웅과 성인을 동경하는 모습에 모든 지역의 교화가 꽉꽉 차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녀는 따지자면 현대 국왕의 업무를 가장 잘 수행하는 황제였다. 바로 새로운 의미의 아이돌(idol)의 업무 말이다.

사람들은 여왕을 사랑했고, 여왕은 영국을 사랑했다.

그것이 영국 입헌군주제의 근본이자 이유였다.

베르길리우스가 그런 생각을 이어가고 있을 때-실제로는 몇 초 지나지 않았다.-즈음. 그제야 그의 품 안에서 얌전히 안겨있던 시계가 부스럭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응, 하는 소리를 내듯 옅은 틱톡 소리가 울리며 그의 품을 더 파고들었다. 저절로 그의 몸 위를 가로지르는 햇볕이 슬립의 안쪽을 불투명하게 비췄다. 문가에서 “어-어어…!” 하는 소리와 함께 “실례하겠습니다 폐하…!” 하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베르길리우스가 고개를 드니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이 장갑낀 손으로 아슬아슬 닿지 않으며 여왕의 눈가를 가리고 있었다.

“단테. 단테! 안 일어납니까?”

이제는 베르길리우스도 뭘 가릴 때가 아니었다. 정신이 더 넘어가서 이 상황에서 도망치기 전에 유일한 해결책이며 질문에 답해줄 수 있을 단테의 어깨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단테는 퍽 잠이 많은지 그가 어깨를 흔들며 깨워도 “티익…” 소리를 내며 손을 뻗어 그의 몸을 더듬었다. 그래도 그가 멈추지 않고 살짝 힘을 주어 두드리자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지 뭐라 웅얼거리는 제스쳐를 했다. 그의 가슴팍 위로 [왜.] 하는 철자를 쓰면서 말이다. 그 느긋한 작태에 베르길리우스는 조금 미칠 지경이었다.

“눈 떠. 고개 똑바로… 하.”

결국 그는, 시계여도 눈을 반쯤 뜨는 듯 시야를 흐리는 것이 가능한지 한참 비실거리는 단테의 시계판을 양 손으로 잡고 문을 향해 돌려버렸다. 그 과정에서 힘이 좀 들어갔는지 시계에서 약간의 소리가 났다. 삐긱, 같은… 그게 통각으로 느껴졌는지 단테가 뎅—! 소리를 내며 펄쩍 뛰었는데, 처음에는 항의의 의미가 담겼던 그 시계소리가 점차 느리고 짧게 반복됐다. 고장난 태엽이 연신 울어대는 것 처럼 말이다. 베르길리우스 또한 이제 단테가 뭐라고 말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나. 분명 없는 숨을 삼키듯 가슴을 크게 부풀리고, 내쉬면서… 비명처럼 내뱉는다. 단테가 다급하게 상체를 세우며 말했다.

데—엥!!

<왜 둘 다 여기에 있는 거야?!>


상황을 정리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이 시계 또한 당황에 젖어있는 순간, 구원은 다른 쪽에서 나왔다. 여왕의 눈을 가리고 있던 짧은 머리의 여성이 “죄송합니다 관리자님,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폐하. 이쪽으로.” 하고 재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들이 문가에서 벗어나자마자 충직하고 눈치빠른 버틀러들이 문을 꼬옥 닫아주었다. 물론, 상황이 정리된 것과 두 사람 각각의 정신적 충격은 별개의 문제였다. 베르길리우스는 가슴팍이 다 내보이는 상태에서 여왕을 뵈었다는 것, 타인에게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에 대한 충격에 뒷머리가 아릿했다. 단테는, 말해 뭐하겠는가? 그녀는 멍하니 틱틱, 고장난 것 같은 태엽 소리를 내며 무의식적으로 이불을 끌어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충격은 충격이고, 어쨌든 일어나야했다. 따지자면 그들이 어물거릴 수록 밑에 있는 여왕을 기다리게 만든다는 뜻이었다. 베르길리우스의 귀엔 그게 참 끔찍하게 들렸다.

그래서 그는 거의 백지 상태에 들어선 단테를 일으켜 버틀러들의 손길에 내맡겨버리고 그는 화장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어제의 신부복이 아니라 캐주얼한 복장이었지만 옷을 내놓으라며 실랑이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냥 입기로 했다. 다행히 어제 잠옷과는 달리 사이즈가 꼭 맞았다. 베르길리우스는 어제의 침의가 의도적이었으리라는 의심은 버리기로 했다. 그게 더 안전했다. 어떤 의미로든 말이다.

그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단테는 이미 옷이 갈아입혀진 상태였다. 어제와는 다른 색의 정장이었으나 결벽적으로 몸을 가린 것은 동일했다. 베르길리우스는 서둘러 그의 곁으로 걸어가며 어제는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을 훑어보았다. 가슴의 굴곡이라던가 힐끔 내보이는 발목의 두깨 같은 것. 가령, 끝 단추까지 채워진 와이셔츠 카라 위로 보이는 목울대… 그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단테가 고개를 돌렸다. 살짝 위로 흘려 기울이고 있었는데, 베르길리우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 시계를 마주했다.

왜? 단테가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붙잡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 다급한 걸음인데도 그의 손바닥을 누르는 검지는 바쁘게 움직였다.

“별 거 아닙니다.”

[난 엄청 별 거인데. 나 이제 시집 어떻게 가?]

“뭐? 그건 나도 별 거다만… 하아, 결혼도 할 생각이었습니까?”

[당신 반말 좀 설렌다. 왜? 악마는 결혼하면 안 돼?]

베르길리우스가 계단을 내려가다말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따라 바쁘게 걸어가던 단테가 한계단 아래서 멈춰섰다. 왜 그래? 라고 묻는 듯한 옅은 시계소리가 울렸다. 악마가 결혼을? 그런 생각에 시선을 마주하다 그의 목을 지나 넥타이를 너머 정장 조끼에 새겨진 가문 문장을 발견한 탓이다.

따지자보면, 그래. 단테는 악마였지만 이 알리기에리 가문의 독녀이기도 했다. 그에게 형제가 없었으니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그녀가 대를 이어야 하는 게 맞았다. 물론 그녀가 입양이라는 선택지를 고르거나, 아예 그의 사촌들에게 넘겨버릴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 따지자면 결혼이라는 단어가. 퍽 그와 어울리지 않아서. 그래서 베르길리우스는 걸음을 멈췄다. 단테는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는 베르길리우스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어떤 혼란인지는 조금 예상이 갔지만, 그가 생각을 정리하고 위화감을 해소할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건 밑에서 돈키호테가 기다리고 있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뭐가 이상해. 괜한 생각 말고 빨리 가자. 기다리겠어.]

재촉하듯 손바닥에 글씨를 휘갈기자 베르길리우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뭔가 걸리는 듯한 얼굴이었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계단을 뛰듯이 내려가 응접실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두 사람 다 구두를 신고 있어 다행이었다. 괜한 힐 탓에 발목이 나가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으니까. 단테가 살짝 구겨진 베르길리우스의 소매를 털어준 다음 버틀러에게 눈짓하자 문이 열렀다.

응접실은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안온함을 느끼게 하는 목재로 만든 가구들, 무늬가 거의 없는 의자와 바닥에 깔린 카펫. 이제는 장식용으로만 남아있는 벽난로가 한층 더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아침 댓바람부터 그들을 찾아온 손님들은 동그랗게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탁자 위에는 작은 다과와 홍차가 든 예쁜 컵이 놓여있었다. 얼마 마시지 않았는지 탁자 위에는 각설탕 껍질 두 개가 나뒹굴었다. 두 사람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지 문이 열리자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와 단테를 바라보는 여왕의 눈이 반짝거렸다.

“관리자—!!”

티익, 당장이라도 일어날 듯한 몸짓으로 그를 맞이하는 돈키호테의 모습은 정말 활기차고 밝았다. 단테가 천천히 그녀에게 걸어가며 패드에 글을 적었다.

[돈키호테 폐하(Your majesty)! 아침부터 무슨 일입니까?]

베르길리우스는 잠시 멈칫했다가 그의 뒤를 따라갔다. 단테는 성큼성큼 걸음을 좁히더니 여왕의 앞에 서 허리를 굽혀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시계판을 눌러붙였다. 사람이었으면 입이 있을 자리였다. 그러고 난 뒤에 그녀의 손짓에 따라 꼬옥 포옹한 다음 물러섰다. 베르길리우스는 그에게 손짓하는 단테를 바라보다가 결국 여왕의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춘다음 떨어졌다. 격식 있는 자리가 아니니 무릎까지 꿇을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정당히 단테가 하는 대로 따라했을 뿐이기에. 베르길리우스는 어쩌면 그를 배려해서 먼저 예시를 보여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괜한 호칭은 됐네. 오늘따라 시간이 남기에 그대와 느긋하게 폴로 한 경기 즐기려고 했지! 마침 정문에서 오티스 경도 발견했지 뭔가! 그대가 평소와는 달리 늦게 일어나기에 놀래켜주려고… 했는데… 크흠.”

돈키호테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어가다 힐끗, 그녀의 대각선 의자에 앉은 베르길리우스를 살펴보았다. 그리고선 눈을 데굴 굴리더니 크흠, 입가에 주먹을 대고선 작게 속삭였다.

“그… 같이, 있을 줄은 몰랐소. 본인도 신문을 보기는 했지만 그렇게 발전된 사이었을 줄은…….”

허? 베르길리우스는 터져나오는 숨을 삼켰다. 단테 또한 그 말이 이어지자 뎅—!!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은 돈키호테가 엇,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엇, 아닌가? 하지만 분명….”

“아닙니다, 폐하.”

[오해야. 정말….]

흐음,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을 피하던 단테가 다다다 글을 적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맞은편에 앉은 단테가 불나도록 여왕에게 해명하는 동안 고개를 살짝 돌려 그의 맞은 편에 앉은 여성을 바라보았다. 여왕의 말을 들으니 생각이 났다, 단정한 숏컷, 단테보다 더한 것 같은 단정한 정장. 단테가 결벽적이라고 의심할 정도라면 그녀는 실제로 결벽증이 있는 것 처럼 굴었다.

오티스 상원의원. 이 사람 또한 만만치 않게 돈 많고 명성 높은 가문의 여식이었다. 탄탄대로의 길을 밟아온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장교였던 기록이 존재했다. 참전용사였고, 잔뼈 굵은 지휘관이었으나 이제는 국방의 업보다는 국민을 위한 길을 나아가고자 한다는, 기사를 봤던 기억이 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사람을 앞에 놓고 하기에는 실례지만 그녀의 인상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잘 말하면 사회생활 잘 하는 사람이고, 좀 나쁘게 말하자면 비리정치인… 같은 느낌. 실제로 그 탓인지 유독 가십지에서는 그녀가 비리를 저질렀다느니, 뒷돈을 쓴다드니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부풀려 적는 기사가 많았다. 보수당의 인식을 안 좋게 하려는 전략이겠지만 왠지 모르게 싹싹한 모습이라던가, 권력자 앞에서는 아부에 가까울 정도로 과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설마 하고 혹하는 사람도 꽤 많을게 분명했다.

실제로 최근에는 단테의 곁에서 비서에 가까운 일을 한다며 그녀가 스스로 원한 일이라지만 곧 총리가 될지도 모르는 단테의 곁을 차지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며 수근거리는 소리가 꽤 컸다. 물론 진보파에선 그의 태도보다는 같은 상원의원을 비서로 부린다며 단테의 인성을 비난하는 기사를 냈다. 이건 맞받아치는 기사를 냈던 걸로 기억하는데. 베르길리우스는 사무실로 돌아가면 신문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땐 라피스와 관련된 내용이 아닌 것 같으면 모두 대충 읽고 모아두기만 했다. 베르길리우스가 그런 생각을 하며 살짝 두었던 시선을 돌리려고 할 때, 오티스가 고개를 돌렸다. 가볍게 웃고선 미소를 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티스 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오티스 씨.”

그녀가 악수를 청하기에 베르길리우스 또한 손을 내밀었다. 상처가 가득한 손을 바라보던 그녀는 조금의 당황도 없이 그의 손을 붙잡아 악수했다.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하고 있었으나 어딘가 꾸밈 있어보였다. 그의 선입견 때문인지 그녀의 자연스러운 인상 때문인지, 이제 그는 구분할 수가 없었다.

“신문에 나온 건 잘 봤습니다. 기사를 전부 읽었는데 당신이 신부라는 것 이외에는 별 쓸만한 정보가 없더군요.”

“그렇습니까.”

두 사람의 대화 사이로 여전히 시계소리와 흐으음, 진짜인가?! 정말로?!! 하는 돈키호테의 소리가 들려왔기에, 그들은 조금 더 목소리를 낮췄다. 힐끔힐끔 단테가 궤중소리를 울리며 패드의 어느 단어를 강조하듯 가리키는 걸 보면서 말이다. 오티스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그러기에 조금, 사적으로 알아봤습니다. 구마사제시더군요. 이력도 깔끔하시고, 물론 걸리는 것이 몇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더군요.”

“지금 뒷조사 한 겁니까?”

베르길리우스는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오티스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오티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각오한 일 아닙니까? 거의 유일한 총리 후보의 연인이 되려면 이 정도는 감당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여간, 중요한 건 말입니다.”

오티스가 잠시 말을 멈췄다. 시선을 직시하며 그녀의 눈동자와 마주했는데, 베르길리우스는 그 잘나의 순간 옅은 동정을 읽었다. 그래, 동정심을. 폴로 경기장 안에 잘못 들어온 토끼를 바라보는 것 같은 눈빛 말이다.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이미 관리자님께서 알고 계시더군요. 상당히 오래되고 사소한 것, 모두 다.”

베르길리우스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가볍게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의 질문을 들은 그녀가 살짝 눈을 휘었다. 독사 같은 미소였다. 그래, 에덴 동산에서 수치를 모르고 살아가던 태초의 인간이 뱀에게 유혹에 넘어가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처럼. 베르길리우스는 그녀의 입술이 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주 느리게, 시간이 흐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아아—알겠소!! 믿어줄터이니 이제 어릴 적 이야기는 그만 꺼내시게!! 그 때는 본인도 어렸단 말일세!! 그렇지만 그대는 어른이 되어서 입 맞춘 거 아닌가! 악—!! 이게 아니라! 알았으니까 그만 폴로 하러 가시게. 관리자아—!!”

베르길리우스는 동시에 터져나온 여왕의 비명소리-따지자면 투정이겠지만-에 고개를 돌렸다. 마침 패드를 내려놓던 단테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꼭, ‘왜 그래?’ 하고 묻는 것처럼. 베르길리우스가 등 뒤로 흐르는 옅은 식은땀을 애써 모른채 하며 눈을 깜박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 아무것도 아니어야 했다.


폴로는 최근들어 조금 알려지긴 해도 대중적인 스포츠는 아니었다. 일단은 승마실력이 필요할 뿐 아니라 왕과 고위층이 즐긴다는 이미지가 박혀있었으므로, 베르길리우스도 신학대학 시절 폴로클럽의 홍보지를 본 적 있었으나 가볍게 넘겼다. 그는 승마를 배운 적도 없었으며, 애당초 스포츠를 선호하지 않았다. 그는 몸으로 하는 것은 뭐든 잘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골을 넣어 이목을 끌거나, 지나치게 빠른 달리기로 입단 제의를 받거나. 그를 돈이나 명예로 꼬득이려는 이들의 귀찮은 설득을 받는 것은 어릴 때로 충분했다. 어쩌면 그런 속물적인 제안들이 그를 성직의 길로 이끌었는지도 몰랐다.

그가 하이스쿨에 입학할 무렵, 그는 이미 수도생활을 하기로 마음 먹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미들 스쿨에서의 해프닝이 알려지지 않은 학교 생활은 무난했다. 베르길리우스가 기억을 되감았다. 확실히 그 때도 승마클럽은 있었을지 몰라도 폴로클럽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 그 시기까지 왕의 스포츠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 같았다.

베르길리우스는 그를 이끄는 단테를 가만 바라보았다. 그는 왔을 때와 같이 베르길리우스의 손목을 붙잡고 반 걸음 빠르게 걸어나갔다. 베르길리우스는 그와 보폭을 맞추는 대신 반 걸음 뒤에서, 그의 옆태를 바라보며 따라 걸어갔다. 그의 시선 앞에서 타지 않는 불이 일렁이며 여려 형태를 만들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의 시선을 스치는 그 불꽃을 마주한 채로 걸어가다, 문득 떠오른 의문에 반대손을 뻗어 단테의 손을 쥐어 돌렸다. 순간 멈칫한 단테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별다른 내색도 없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저 두 사람. 왜 당신을 관리자(manager)라고 부릅니까?”

사실, 두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오티스 상원의원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가 총리후보를 뭐라 부르든 무슨 상관인가? 지금은 같은 상원위원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여왕이 그를 관리자라고 부르는 건 꽤 신경쓰였다. 단테가 다시 걷기 시작하며 PDA를 조작했다.

[아, 예전에 외국 기업하고 잠시 교섭을 할 일이 있었거든. 그 때 내가 총 책임자로 있던 게 기억에 남았던 모양이야. 꽤 큰 문제라 견학 개념으로 같이 오셨었거든.]

여왕이 참여할 만한 기업과의 교섭이라. 아마 신문에도 대문짝하게 났을지도 모른다. 돌아가면 찾아볼 정보가 늘었군. 베르길리우스가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테는 그에게도 폴로를 권했으나. 승마 경험도 없다는 사실을 알자 빠르게 포기했다. 아무래도 승마는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혹독한 것이다. 말 위에 타서 하는 하키 같은 느낌. 베르길리우스는 집 안에 위치한 폴로 경기장과 살짝 떨어진 의자에 앉았다. 원래는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경기지만 셋이서 하는 경기니 각자의 팀을 나누기 보다는 골대에 공을 넣는 사람이 득점하는 룰인 것 같았다. 베르길리우스는 한 걸음 뒤에서 세 사람이 말을 타고 공을 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막 해가 중천에 뜬 하늘 아래 태양이 세 사람을 내리쬐며 한 폭의 그림같은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와이셔츠를 두 개 푼 그의 살결 위로 땀방울이 반짝이며 흐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죄악감이 그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가 악마와 동침한 것 보다, 악마와 함께 다닌 것 보다.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감각이 그의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 피부 위로 땀방울이 스쳐, 쇄골을 지나 가슴골 사이로 들어가는 것을, 선명하게 바라본 그 순간. 그가 느꼈던 감정에 대하여…

베르길리우스는 다시금 채찍을 꺼내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고해소로 들어가 그의 몸을 내리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어릴 적 성스러운 행위에 대해서 생각했을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채찍질은 그 순간에만, 그의 죄를 덜어가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오히려 선명하게 남아 상흔과 함께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는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벌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이다. 끝없이 신에게 기도하며 자신을 용서하시라고 빌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야, 그 와이셔츠의 카라 넘어로, 그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뒷목을 본 순간, 알아버렸기 때문에…… 베르길리우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다시는 뜨고 싶지 않았다.


낮부터 폴로 경기를 즐긴 세 사람은 완전히 녹초가 된 뒤에야 말에서 내렸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시계는 그렇다 쳐도, 오티스 상원의원조차 살짝 걸음걸이가 느슨한 것을 본 베르길리우스는 꽤 놀랐다. 상당히 체력을 많이 소모하는 스포츠인 모양이지. 하긴, 승마에 상체까지 쉬질 않는 놀이니.

땀으로 흠뻑 젖은 셋이 씻으러 간 동안, 베르길리우스는 저택을 구경했다. 단테의 설계대로 세워진 집이자 그의 취향으로 꾸며진 공간. 어쩌면 이 악마가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런 공간을 탐색하는 건 신문으로 그의 단편적인 삶을 핥는 것 보다 더 큰 가치가 있었다.

그는 카펫이 깔려 소음이 적은 복도를 걸어나갔다. 구 시대의 잔재라도 되는 것처럼 전등도 있었지만 같이 켜져있는 촛불이 그의 성격을 약간 드러냈다. 조각보다는 그림을 선호하고, 사실주의보다는 인상파. 온화한 그림도 몇 있었지만 대부분은 강렬했다. 저택의 모든 문을 열어볼 수는 없겠지만, 베르길리우스는 명패가 붙어있지 않은 곳의 문손잡이는 반드시 돌렸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지나 다시금 응접실로 돌아가면서, 베르길리우스는 오티스의 말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뒷조사라. 분명 그 또한 단테의 뒷조사를 했다. 아주 오랫동안, 정성스럽게. 그러나 그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단테를 악마라고 거의 확신했고, 라피스와 관련이 있으리라 믿었다. 그 당위는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단테가 그에 대해서 조사한다? 이건 이상했다. 그가 구마사제라고는 하지만 교구에서 인정하는 구마사제는 훨씬 더 많았다. 그가 가장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단테처럼 유명하고 보는 눈 많은 사람을 건들일 수는 없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마지막 가정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쩌면,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라피스가 그의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베르길리우스가 단테를 주시했던 것처럼, 단테 또한 베르길리우스를 주시할 이유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를 살피고, 조사하고, 면밀하게 따라붙어 삶을 들여다볼 이유가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늘 단테에 대한 보고를 들을 때마다, 그의 인생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이제야 되묻는다.

단테 또한 그의 뒤를 따라 걷는 기분을 느꼈을까?

당신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당신도, 나를…


응접실로 돌아가자, 그를 맞이하는 것은 살짝 어두워진 금발을 탈탈 털고 있는 돈키호테였다. 베르길리우스는 정면으로 마주친 시선에 살짝 눈을 크게 뜨고 허리를 숙이려고 했으나 괜찮다는 듯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운동의 피로 탓인지 평소보다 느릿해진 얼굴에, 창문을 등져 평소보다 조금 더 붉게 보이는 눈동자. 베르길리우스는 무례도 잊고 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조금 더 세로로 길게 늘어진 그 눈동자를 말이다. 그녀 또한 시선을 느꼈는지 느리게 눈을 휘며 웃었다.

“그대는.”

나직한 목소리가 흘려나왔다. 그래, 저 얼굴이었다. 관상용 우리에서 막 벗어난 새를 보는 듯한 눈길. 윙컷을 당한 것도 모른 채로 퍼덕이며 얼마 가지 못해 내려앉는 비참한 추락을 예견하는 얼굴. 그를 동정하다 못해 연민하는 시선.

“그를 사랑하나?”

사랑하냐고? 베르길리우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갑작스러운 어지럼증이 몰려오는 것처럼 시야가 흐릿했다. 그는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의 앞의 상대는 대답을 재촉하거나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똑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응접실에서, 그의 옆에 앉았던 상원의원과 같이. 아니, 어쩌면 일전에 들렸던 파인 다이닝의 헤드셰프도 저런 얼굴을 했던 것 같다. 찰나의 순간이었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 모두가, 그를 가엾게 여겼다. 베르길리우스는 머리속에서 흐릿하게 들려오는 소리를 되감았다.

이 오만한 자야.

그건 꼭, 이 가엾은 자야, 처럼 들렸다.

“저는…”

베르길리우스가 고개를 들었다. 창문 틈새로 언뜻 보이는 태양이 그의 머리 위로 쏱아지는 것 처럼 느껴졌다. 그는 실내에 있었는데도 머리 위에 지붕 하나 없이 뙤양볕 앞에 던져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입술을 가볍게 물고 단어를 골랐다. 수만개의 단어들 속에 허용할 수 있는 단어 하나를 찾지 못해 길을 헤맸다.

그래, 늘 그렇게 단어 하나를 고르지 못해 늘 늦었다. 모든 것을 잃고 난 뒤에야 겨우 형용할 수 있는 단어 하나를 찾아냈다. 베르길리우스는 항상 끝나고 난 뒤에야 시작할 수 있었다. 그가 입을 벙긋거렸다.

나는……

그가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조금 더 편안한 정장을 갖춘 단테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옅은 째깍임이 기만스러웠고, 그의 몸뚱이는 거짓이였으며, 모든 말과 행동이 그를 악의 구렁텅이로 꼬득이는 것 처럼 느껴졌다.

너를……

그래, 그는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저 악마가 무슨 술책을 꾸려 그를 꼬득이려고 할지라도. 그의 신과 내기하여 이 시대의 욥으로 지정했더라도. 그는 단 한치의 의심도 없이, 깨끗하게…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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