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s. D 2
구마사제 베르길리우스 X 악마 단테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아모스 7, 14-15
[먼저 사과부터 듣고 싶은데. 뭐든 절차가 중요한 법이거든.]
삑, 기계음과 같은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보통 이같은 음성 보조 장치는 읽는 목소리가 더 사람같도록, 높낮이와 숨 길이를 섬세하게 맞추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야 이질감이 들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이 시계의 보조 장치는 달랐다. 꼭 무료로 배포하는 번역기가 읽어주는 글 같았다. 전혀 사람 같지 않은, 기계의 목소리. 저런 음성을 사용하는 이유는 달리 있을 것이다. 가령, 보편화의 구속을 떨친다던가 말이다. 그는 머리가 없는 의체이며, 이는 분명한 이질감을 가져왔다. 단테 알리기에리 상원 위원은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자신의 이질감을 줄이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그 이질감을 더 강화시켰다. 언어는 특별 음성 보조 장치인 디지털 패드를 사용하고, 패드가 없는 상황에서는 수화를 사용했다. 물론 이후에는 필담으로 자신의 말을 전해왔지만, 공식 석상에서 말 한마디 없이 수화를 시작하는 정치인이란 얼마나 상징적인가?
시계는 꾸준했고, 늘상 성실했다. 아니, 진심을 다한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악마에게 진심이라! 베르길리우스는 영국에 와 악마의 단서를 찾아내는 초장부터 단테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가 시계머리여서가 아니다. 지나치게 지지도가 높아서도 아니다. 그의 머리의 의체 때문이었다. 의체 사업이 날로 발전하면서 사용자의 기상천회한 주문을 만족시키는 공방이 많아지고, 기업마저도 실용성 의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의체는 더이상 의학의 문제가 아니라 실리의 문제였다. 그 와중에 이 시계가 선택한 의체를 보라. 타지 않으면서도 늘 불타는 화염. 아무에게도 제 말과 표정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시계 소리만은 흘릴 수 있는 머리. 흘러가지 않아 시간조차 확인할 수 없는 바늘. 자신의 목을 잘라내서 말하고 있는 이 불합치를 보라.
이런 짓을 하는 이는 지독하게 괴짜거나, 아니면 삶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일 것이다. 전신을 의체로 바꾸는 사람은 많아도 머리만 의체로 바꾸는 사람은 꽤 적다. 목이 떨어져 나간다라는 명제부터가 서늘하며 뇌를 꺼내 잠시간 의식이 끊어지는 그 순간. 그 순간이 자신의 죽음일지 어찌 안단 말인가? 의체 사업이 발전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뇌는 미지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사람의 생존욕구를 자극하는 것이다.
그러니 미쳐있는 사람은 오히려 즐거워할 것이다. 광인은 태가 난다. 제정신이 흐리어진 사람은 본인을 위안하여 타인을 잘 보지 못한다. 어디선가 일그러진 느낌이 사람의 걸음걸이에서부터 느껴졌다. 그러나 단테는 아니었다. 이 상원의원은 미쳤다기엔 그 누구보다 제정신이었으며, 심지어 제정신을 넘어선 인성마저 찬란했다.-이는 언론의 표현을 빌린다.-
그러니 이같은 군상은 딱 하나 아니겠는가? 삶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
제 목숨을 체스판 말처럼 여기는 이들. 한 번 죽는 것이 두렵지 않고 오히려 코웃음 치는 것들.
그래, 이야말로 악마가 아닌가.
“미안합니다.” 베르길리우스가 흘려보내듯 사죄의 말을 뱉었다.
누가보아도 대강 말한다는 느낌이 든 그 피로감이 담긴 언어에, 그 상원 의원은 만족했다는 듯이 손자국이 남은 제 목을 두어번 더 주물렀다. 아마 오늘이 지나가기 전에 저 목에는 청보라빛의 멍이 남을 것이다. 성수 대신 제 피를 사용했으니 화상자국도 좀 남을지도 모른다. 등에도 시퍼렇게 멍이 들겠지. 베르길리우스는 그 순간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강하게 압박할 걸, 하는 생각이 흐릿하게 남아있었다.
[뭐, 그래. 이 정도로 만족할게. 그쪽의 수녀님, 말려줘서 고마워.]
의자에서 멀리 떨어져있던 파우스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성당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베르길리우스가 제 손으로 얼굴을 한 번 길게 쓸어내렸다. 깨물렸던 검지에는 이미 피딱지가 얹어있었다.
[사실은 좀 더 제대로 된 사과를 받고 싶었지만 말이야. 눈 앞에서 쓰러지기에 성당까지 데려오느라 힘들었다고, 신부님. 내일 사설기사 1면에 남을 제목이 벌써부터 두렵네. 단테 알리기에리 상원 의원과 보육원에서 쓰러진 신부님이라. 얼마나 헛소리로 범벅을 할지. 거기다가 당신이 이렇게 멍자국을 남긴 탓에 이 여름에 목도리라도 해야하나…]
저 시계는 꽤 말이 많았다. 베르길리우스는 끝없이 이어지는 기계음에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한풀이를 하고 있는지. 애당초 파파라치를 몰고 다니는 저쪽 잘못이 아닌가. 괜히 사진이 찍혔다는 소리를 들으니, 꽤 좋지 않았다. 지금 압박을 넣으면 기사 몇 개 정도는 막을 수 있으려나. 한참 밤인 것 같은데 사무실 애들을 닥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와 기사를 타버린다면, 베르길리우스가 사진을 찍히는 걸 싫어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교구 내에서 또 무슨 질책이 이어질지. 벌써부터 피로감이 머리를 쿡 찔렀다. 베르길리우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파파라치를 끌고 다니는 그쪽 잘못 아닌지. 알아서 막으십시오.”
[왜 막아?]
째깍, 소리가 울렸다. 베르길리우스가 고개를 들어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 시계는, 이제는 조금 느긋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는 건데 말이야.]
“막아.”
[싫어. 폭행으로 고소하지 않을테니까. 합의금인셈 쳐.]
“고소하면 곤란한 건 그쪽 아닌지. 단테 알리기에리 상원 의원.”
틱, 소리가 울렸다. 단테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검은 와이셔츠에 붉은 넥타이, 검은 장갑에 피부라고는 아주 옅게 고개를 흔들 때 비치는 절단면이 전부였다. 퍽 강박적이시군. 베르길리우스가 툭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었는지 시계가 살짝 기울어졌다.
[곤란하긴 하지. 폭행을 당했다고 하지만 사제를 고소해버리면 반응이 좋지 않을 거고. 당신은 알게모르게 인지도가 있거든. 아마 10년 전이었지? 그 보육원 사건 말이야.]
또각. 검은 구두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당 정 중앙으로 향하는 시계를 바라보다가, 베르길리우스가 몸을 세워 걸음을 옮겼다. 제대를 마주하는 긴 붉은 길. 그 중앙의 자리는 사제와 복사만이 지나갈 수 있는 길로. 미사가 있지 않는 한 걸어서는 안 되는 길이었다. 그런 예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시계가 천천히 붉은 길을 걸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의자를 끼고 오른쪽으로 난 길을 향해 걸어갔다. 조용한 성전 안을 걸어 다닐 때마다 구두소리가 울렸다.
“아는 걸 말해.”
[무섭게 구네. …진정해. 말할테니까. 그렇게 당장 죽여버리겠다는 눈을 하면 싫어도 말할 수 밖에 없잖아.]
붉은 시야를 정확히 바라보던 시계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발걸음이 멈췄다. 제대와 그 뒤의 커다란 십자가상을 올려보던 시계가 팔을 뻗어 손짓했다. 이리 오라고. 베르길리우스는 오른쪽 길 끝. 성모상을 마주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가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패드를 들여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시계가 글을 적기 시작했다. 이건 기계음으로 뱉어지지 않았다.
[내 시야를 들여보게 해준다고 해도, 싫겠지? 그럼 잘 상상해 봐. 신부님. 이건 작은 호의같은 거야. 어쨌든 신세를 많이 질 것 같거든.]
어째서 그 머리에서 웃음소리 같은 게 들린 것 같다면, 착각인 걸까. 베르길리우스는 고개를 숙여 그 패드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패드에 그려지기 시작한 그의 심상을.
머리를 자각한 순간 부터. 기억은 아주 드문드문 이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악마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이 시계 머리를 달지 않았던 날의 기억은 가물가물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 지는 알 수 있었다. 시작은 광야였고, 내가 존재했다고 느낀 시점은 아마 현대에 가까운 시점이었을 것이다. 예수를 광야에서 유혹한 것은 내가 아니었고, 수많은 나이기도 했으며. 그 ‘나’ 또한 숱한 객체에 불과했다. 초기에는 모두 하나였다. 우리는 악이라고 불리어져 유혹하는 자들이었다. 그래, 초기에는 뱀이었다.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어보라 꼬득이던 그 뱀의 이름.
예수 탄생 이전부터 우리는 여러개로 나뉘어졌다. 어떤 이는 문둥병을, 어떤 이는 귀머거리를, 어떤 이는 발작을 일으킬 줄 알아 각자의 이름을 얻었다. 우상으로 나타나 악마대신 외신으로 불리는 이들도 생겼다. 그래도 인간들은 여전히 우리를 일괄하기를 마귀라고 불렀다.
그래서 우리는 전체적으로 하나였으나, 점차 세기가 지날수록 각자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전체적으로 사탄이었을 적에는, 신 또한 우리를 함부로 하지 못하여 욥을 가지고 내기를 하였는데. 예수가 태어나 우리의 이름을 물으며 객체로 나눠지기 시작하자 우리 하나하나는 대단한 힘을 가지지 못하고 매번 쫒겨나기를 반복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그리하여 그 시기에 우리가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로 들어가 수살하였는데. 그러고도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저 몸과 몸을 타고 지나갈 뿐이었던 그 시기는 꽤 가물하였다.
시대가 바뀌며 나는 여럿 ‘나’들과 떨어졌다. 사람이 많아지며 죄도 숱하게 생겨났다. 악마숭배자들과 우상 숭배와 교만한 이들. 유혹에 퍽 쉬이 넘어가는 사람들과 끊없이 이어지는 악행. 가끔은 우리의 이름을 빌어 악독한 이들을 악마라고 불렀는데. 그 즈음 나는 글감에 흥미를 가져 시를 짓고 있었으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우리는 더이상 사람을 유혹하거나 그 몸을 탐하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이제 인간은 죄를 짓는 법을 택한 탓이다. 흉악범이 구속되자마자 제가 저지른 범죄는 모두 악마가 저를 유혹하여… 라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딱 그 정도의 감상으로, 나는 19세기를 지나갔다. 20세기에 이를어 나는 의체를 달게 되었고. 이로인해 20세기에는 19세기 마냥 활동할 수 없게되었다. 시인으로서의 삶은 꽤 재미났는데 머리를 바꿔달며 그 기억도 희미해졌다.
그리하여 나는 광야를 방황하던 어린 예수마냥 사막을 돌아다니며 재미없는 풍경이나 감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딱 그 즈음이… 네가 보육원을 잃었던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 즈음 광야를 돌던 악마가 꽤 있었다. 한 신부가, 성흔을 받았는데 악마라고는 쥐잡듯이 잡아내어 빙의가 취미인 것들, 문둥병 옮기는 것들. 귀 먹고 눈 가리는 악마들이 못살겠다 지옥으로 돌아간다 아우성이라는 소리는 들었다만, 나는 그들처럼 꼭 옮겨탈 몸을 가지진 않아도 되는 이라 별 신경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날도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광야의 어둠은 길다. 발 끝의 모래를 걷어차며 은하를 구경하던 날이었다. 유독 광야에 머물렀던 탓은 이 별들의 존재 탓이기도 했다. 그날도 높히 솟은 바위를 향해 걷던 날이었는데. 선객이 있었다. 모래바람을 감싼 채로 유독 창백한 얼굴의 여인이었고. 진주빛 눈동자를 가진 채로 빛 한 번 없이 투명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이미 감적색으로 말라붙은 핏자국을 남긴 흰 옷을 입고 있었으며, 그 길고 엉킨 은발을 휘날리며 한 손에는 붉은 보석을 쥐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선택받은 이로. 이 광야에서 왔다.
이 광야에서부터 간다.
내가 간구하니, 선생님께서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십니까.
그녀가 읊조리길, 나는 구원자가 아니며 주께서 보내셨으니 너희가 가서 예언하거라. 종말의 때가 가까이 왔으니 네가 예언하리라. 네가 새로 태어났으니 금일로 네게 새 이름을 주리라.
주께서 말하시길, 나를 카론이라고 하셨다.
베르길리우스가 천천히 사라지는 패드 속 환영을 바라보았다. 영상물 같은 그것은, 실제로 이 악마의 기억이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볼 수 있었다. 제 앞에서 사라진 아이의 조각을. 이 편린이라도 갖기 위해서 몇 년을 지나왔던가? 몇 년을 앓아왔던가? 라피스, 네가…
어떤 형태로라도, 살아있기만 한다면.
이미 검게 변한 패드 속 화면을 바라보는 그 사제는 금방이고 쓰러질 것 같기도 했고, 오히려 돌변하여 제 멱을 잡을 것 같기도 했다. 한가지 확실한 건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았다. 단서를 내어주면 기뻐할 줄 알았다. 적어도 조금은 안도할 줄 알았는데. 눈 앞에 이 사람은 그 누구보다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테가 조심스럽게 화면을 켜 글자를 적었다.
[카론… 그러니까. 아마 이 애가 당신이 찾는 라피스가 맞아?]
“맞습니다.”
즉답. 단테가 패드에 올렸던 손가락을 살짝 오무렸다. 맞단 말이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베르길리우스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더 깊숙히, 시계를 바라보며 눈을 붉혔다.
“지금 어디있지.”
그러니까. 가까웠다는 소리다. 단테가 허리를 뒤로 굽히며 패드에 글자를 적었다. 안 보고도 타자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좀 있으면 이마라도 맞댈 기세에 서둘러 고개 사이에 패드를 넣어 화면을 보였다.
[몰라.]
“몰라?”
[진, 짜 몰라. 어느날 사라져버렸어.]
그러니 이 시계의 말에 의하면 이렇다. 그 뒤로 광야에서 같이 지내곤 했는데. 자신과는 달리 카론은 인간의 몸이라서 물이나 음식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대강 거적을 뒤집어쓰고 음식을 구해오곤 했다고. 기억이 없는 모습에 동질감이 느껴져서 유독 챙겼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거적을 뒤집어 쓰고 시장에서 음식을 사고 있었다고 했다. 그 애는 사과를 좋아했는데, 겉의 붉은 껍질을 싫어해서 말이야. 마침 초록색 사과가 있기에 그걸 사려고 했거든. 시계가 필요 이상으로 째깍였다.
아마 소매치기 였을 거야. 거적을 가져가려고 했는지 벗겨내는 게 목표였는지. 지나치면서 거적을 잡아당기는 탓에 그대로 넘어졌고, 천가지도 벗겨졌지. 그 때 보여버린 거야. 이 의체 말이지… 나라고 알리기에리 가문에서 붉은 시계머리 의체를 찾는 줄 알았겠어? 하필이면 광야도 영국에서 가까워선, 그대로 지명수배범이나 된 것처럼 끌려갔지 뭐야.
이것저것 일이 있던 이후에 다시 광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그 떄 이미 카론은 없었어. 광야를 삼일 밤낮을 뒤지고 다녔는데 말이야. 그래서 그냥, 예언하러 갔겠거니 생각했지.
“…그게 다입니까?”
[나도 그냥 평범한 여자애였으면 더 찾고 걱정했겠지만, 신부님. 그 애는 예언자야. 그 입을 빌어 말을 토해낼 네 주님이 예언자만큼은 반드시 보호한다는 사실을 알잖아.]
주를 의심하던 요나도 살아남았다고. 단테가 글을 덧붙였다. 베르길리우스는 흔들림없는 시계의 패드를 바라보았다. 그리 뚫어지게 쳐다본다고 해도 글귀가 바뀔리 없고, 달라지지 않는다. 패드를 지나 눈 앞의 시계를 살펴보아도 별다른 반응은 없다. 떨림도 없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거짓 증언으로 자신을 속이려고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 애가 예언자의 이름을 받아 광야에 떠돌고 있다고.
눈 앞이 캄캄해질 것 같으면서도, 전부 백색광으로 뒤덮혀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 나는 이제 광야로 향해야하나. 악마의 손길을 잡아 사라진 네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고하고 있다고. 그가 무어라 더 말하기 전에, 시계가 다시금 타자소리를 냈다.
[이제 자정이야. 당신도 들어가 봐. 내일은 바쁠 거야.]
아, 내일이 또 온단 말이지.
[내가 데리러 갈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겨 정중앙 붉은 길을 통해 성전 밖으로 사라졌다. 베르길리우스는 그가 저 멀리 멀어져 점차 작아지고, 빛이 들어오는 문을 얼고 나가, 다시금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한차례 비췄던 빛이 사라져 다시금 고요한 어둠을 찾은 성전 제대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대표. 근 10년간 어디서도 예언자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없어예.”
“물론 사이비 종교를 포함한다면 저희가 2주는 꼬박 새야할 정도로 많지만요.”
차례로 란 옌, 리카코가 입을 열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제대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고개를 들어 거대한 십자고상을 마주하고 있으면 늘 의심과 원망이 터져나왔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제게 주셨나이까? 어째서 이 성흔을 가진 사람이 자신이어야 했는지. 왜 하필이면 그날이어야 했는지. 왜 하필이면 그곳이어야 했는지… 몇번이고 생각해봐도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고해할 수도 없었다. 그저 고난이라고 말하기에는 지독하지 않은가? 그 애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그는 걸음을 옮겨 천천히 성전을 벗어났다. 자정을 넘어 거리는 고요했고 가로등 몇개가 깜박거렸던 것 같다. 몇 블럭을 그렇게 걸었는지 모르겠다. 강가를 지나고 공원을 지나 정처없는 개처럼 걸어도 목적지는 확실했다. 베르길리우스가 땀에 흠뻑 젖어 사무실에 도착했을 즈음은 새벽 다섯 시였다.
벌컥,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선 그 모습이 얼마나 우중충했는지. 출퇴근 없이 사무실에서 자고있던 덴버가 소리를 꽥 질렀다.
대표?!!
시끄러… 겨우 잠들었는데… 대표?
미안하다.
아뇨… 무슨 일이에요? 일단 앉으세요. 쓰러지겠다.
베르길리우스는 잽싸게 일어나 소파를 비운 덴버를 바라보다가 리카코가 등을 떠밀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느린 발걸음으로 소파에 앉았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대고 나서야 피로감을 자각할 수 있었다. 성당에서부터 사무실은 꽤 멀었다. 그 거리를 그냥 걸어온 것이다. 아무 생각도 없이 몸을 움직일 이유가 필요해서였을까. 베르길리우스가 양 손으로 제 얼굴을 덮고 고개를 숙였다. 지독하게 괴로웠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단테에게 들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예언자라.
허점이긴 하네요. 악마에 대해서만 찾았지, 라피스를 찾지는 않았으니까.
특이한 외형이긴 하지만 전세계에서 여자애 하나 찾기는 사막에서 소금 찾기보다 힘드니까 그랬지.
쩝, 입맛을 다시던 덴버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베르길리우스를 바라보다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어쨌든 묻기는 해야하는 말이었으므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표, 그 말. 거짓말 같지는 않았습니까?
악마는 뭐든 꾸며내는 게 특기잖슴까. 특히 유혹에 있어선 도가텄죠.
베르길리우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여전한 피로감에도 머릿속을 아프게 찔러오는 사실이 있었다. 물론 그 영상을 보았을 때, 그가 조작이나 거짓을 의심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저 매끈한 의체를 가진 채로 자신을 속이려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었겠지. 그런데도, 그 영상을 본 이후에 저 악마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왜냐면…
내가 라피스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것 같아서…
저 악마가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나를 유혹하려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려는 순간마다 숨이 막혀왔다. 눈 앞이 새햐얗게 번지는 것 같았다. 아주 조그만 실마리 하나를 눈 앞에 두고 편해지고 싶어서, 도망치려는 걸까 생각이 들었다. 이제와서 살아있다는 말을 들어서, 어떻게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렇다고 너를 다시 육피트 아래 산채로 묻는 짓을 하겠다는 건가. 구역질이 치밀었다. 정작 오늘 속에 넣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내가 품에 넣은 것은 아무것도.
주무세요. 대표. 조금만 쉬어요. 저희가 찾아볼테니까.
눈 붙이십셔. …란 옌 선배. 예, 빨리 오셔야할 것 같은데…
툭, 제 어깨를 미는 작은 손길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밀리지 않을 몸이 그대로 소파위로 쓰러졌다. 그 위로 담요가 덮어졌다. 흐릿한 사무실 불 사이로 귀여운 문양이 잔뜩 남은 분홍색 담요가 보였다. 아, 난슬이 것이다. 그제야 눈을 감을 수 있었다. 흐릿한 정신 너머로 옅은 안도감이 느껴졌다. 가증스럽게도…
“물론 좀 유명하다 싶은 사이비들은 대부분 교주 얼굴이 나도니까 넘길 수는 있다고 쳐도. 실세 따로 있고 교주가 얼굴마담일 경우를 배제할 수 없단 말이죠.”
“그런 곳들은 경계가 삼엄한데다가 정보도 잘 없어서… 아예 업체 하나 만드는 게 나을지도 모르죠.”
쯧. 혀 차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세명이 동시에 모니터에서 고개를 떼고선 소파를 바라봤다. 대표, 커피 드세요. 난슬이가 찬 커피를 내밀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시선을 마주하며 손에 들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혀가 아릴 정도로 달아선지 오히려 정신이 번쩍 차려졌다.
“만들지.”
“진심이예요? 오래걸릴텐데.”
“여기까지 오는데 10년 걸렸어.”
그렇게 말하자면 또 할말이 없다. 두어번 머리를 긁적이던 란 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사이비 종교단체에 빠진 사람들 구호를 목적으로 해서 하나 하고예. 전세계면 좀 빡셀테니까 영국 중심으로 천천히 확대하는 걸로. 아예 안 받으면 의심할테니까 돈은 쪼매 받고, 정보 위주를 목적으로 하고… 잠입 인원 필요할테니까 밑에 애들 시켜서 좀 뽑아야겠심더.”
“좀 오래 걸릴 거예요. 정확한 광야 위치를 알면 더 빨리 찾을 수도 있고요.”
“아무리 예언자라도 걸어서 움직였을 거 아닙니까.”
리카코가 자판을 두드리다 서랍에서 세계지도를 하나 꺼냈다. 그대로 난슬이 받아 베르길리우스에게 전달했다. 그가 고개를 기울이기도 전에 덴버가 책상 위에 올려져있던 신문까지 건네줬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손에 들린 신문지를 알고 있었다. [가디언]. 주로 진보적인 신문사로 [타임스]와 대척점에 이르는, 그러니까 꽤 점잖은 일간지에 속해있었다.
그는 컵에 담긴 커피를 마저 들이키고 나서야 그 신문의 헤드라인을 읽을 수 있었다. 다시금 강조하자면, 가디언은 꽤 깨끗한 일간지였다.
[단테 알리기에리 상원 의원, 보육원에서 사제와의 밀회? 그의 캔디보이는 누구인가?]
“컥.”
베르길리우스가 사레에 걸렸는지 크게 기침했다.
“봤죠.”
“이야~ 대표, 캔디보이랍니다. 캔디보이!”
“슈가달링이 아닌 게 다행아인가 싶고.”
차례대로 리카코, 덴버, 란 옌이 말을 붙였다. 난슬이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오해인지는 모르겠다만 저 셋은 놀린다고 치고, 이쪽은 제대로 믿어버린 것 같은데. 베르길리우스가 일간지를 와그작 구겼다. 시계가 자신을 짊어지고… 정확히 어깨에 팔을 올리고 차 안으로 밀어넣는 사진이 절묘하게 찍혀있었다. 파파라치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찍었는지. 두어개의 사진이 덧붙여져 있었는데. 그것만 보면 꼭 상원의원이 신부를 차 안으로 데리고 가, 입을 맞추는 것 같았다. 차 뒷자석에 허리를 숙여 고개를 밀어넣은 상원의원과 차 밖으로 다리를 낸 상태로 누운 신부라. 하도 급해서 차에 들어가기도 전에 애정행각을 벌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이 사진을 찍고 나서 얼마에 팔지 기뻐하는 파파라치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이 점잖은 일간지가 이런 제목을 붙였으니, 평소엔 언급되지도 않는 다른 가십지는 얼마나 더 자극적인 제목을 붙였겠는가? 베르길리우스는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려오는 것 같았다.
“…미치겠군.”
“이번엔 제대로 골치아프겠는데예. 교구에서 얼마나 난리를 치겠습니까? 성직자로서의 품위를 더럽혔다면서… 보수 카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아예 파문해버리라고 할테고, 그렇다고 대표를 자르자니 손실이 크고. 이야, 그쪽 주교님 머리털 좀 빠지겠는데.”
“너무 힘들면 걍 수단 벗어버려요. 이젠 그쪽보다 이 상원의원한테서 나올 정보가 더 많거든요.”
리카코가 의자를 주욱 밀며 말을 덧붙였다.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고선 말이다. 물론 돈도요.
“돈? 얼마?”
그 냄새를 지나칠 덴버가 아니였다. 냉큼 몸을 세운 덴버를 바라보던 리카코가 입을 연 그 순간에, 빵— 소리가 울렸다. 한 번 울리고 사라질 그 경적은 두어번 더 울렸다. 꼭 재촉하는 것처럼. 창문 가까이 가 발을 살짝 들고 아래를 살핀 란 옌이 픽 웃었다.
“끝내주게 많은가 본데. 저건 또 처음 보는 차네.”
창문에 쪼르르 붙은 사무실 직원들 뒤에서 가만 바라보던 베르길리우스가 허, 숨을 뱉었다. 흰색 마세라티가 사무실 건물 앞에 서서 경적을 울리고 있었다. 제가 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잉, 운전석 창문이 열리더니 검은 장갑을 낀 손이 툭 내밀어졌다. 언제 나오냐는 듯, 손을 연신 흔들고 있었다. 이 건물은 또 어떻게 찾은 거지. 베르길리우스가 어젯밤 들었던 악마의 마지막 말을 떠올린다.
[내가 데리러 갈게.]
사무실 사람들의 배웅같지도 않은 배웅-다녀와서 썰 풀어주세요. 잼예 해주세요 대표.-을 뒤로하고, 베르길리우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어제와 별 다를 것 없는 차림으로 시계가 핸들을 잡고 있었다. 검은 와이셔츠, 정장바지에 검은 장갑. 붉은 넥타이를 바라보고 있자면 계절이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라도 된 것 같다. 물론, 아직까지 수단을 입고 있는 그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인지 차 안은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있어 조금 추웠다. 베르길리우스는 왠지 흥분해보이는 시계가 차를 출발하기 전에 입을 열었다.
“미행은.”
[단단히 따돌렸지. 이래봐도 당신이 싫어할 짓은 알고 있거든.]
확실히, 사무실 장소는 극비였다. 어제 바보같이 걸어오는 바람에 미행이라도 붙여놨으면 다 들켰겠지만. 그래도 제가 꾸린 유일한 휴식처에 파파라치들이 코를 들이밀며 들쑤시는 모양은 보고싶지 않았다.
“어제는 따돌릴 생각이 아니었나봅니다.”
[뭐 책잡힐 상황도 아니었고, 너무 결벽적으로 피하면 오히려 다른 소문을 내니까 귀찮거든. 먹이를 주면 조용해지는 개처럼 말이야.]
확실히 고아원 봉사를 가는데 파파라치를 떨굴 필요는 없었다. 24시간 자신이 감시당하는 기분을 느끼긴 하겠지만, 알리에기리 가문 사유지로 들어가버리면 아무리 용써도 개인 공간까지 엿볼 수는 없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이제 더 물어볼 것은 없냐는 듯, 무릎 위에 패드를 올려놓고 흰 핸들을 잡는 단테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경쾌한 배기음과 함께 차가 출발했다.
잠깐 생각했던 거지만, 이 사람 역시 성격이 좋진 않다. 어딘가 흥분해보이는 시계를 조수석에서 가만히 바라보던 베르길리우스가 내린 결론이었다. 불길이 옅게 타오르고 어깨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엑셀을 밟는 발 끝이 조금 까딱였다. 별로 기분이 나빠보이지 않고, 오히려 좋은 편이라고 생각되는 데도 방금 이 시계는 가볍게 사람을 개취급했다. 증오나 진저리가 나서 말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냥 그런 거라고, 당연하게 말하는 듯한. 가만 바라보는 시선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신호등에 걸리자 무릎 위에 패드를 조작하던 단테가 고개를 기울였다.
[좀 추워? 에어컨 줄여줄까.]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어딜 가는지 묻고 싶은데.”
[일단은… 우리 어머니 단골집. 아침 안 먹었지?]
당신 어머니 단골집을 내가 왜. 아니, 어머니가 있다? 베르길리우스가 입 밖으로 내뱉으면 상당히 문제가 될 만한 발언을 삼켰다. 그 말을 알았는지 옅게 째깍소리를 낸 단테가 바뀐 신호에 다시금 핸들을 잡았다. 신나게 엑셀을 밟으며 몇분을 달렸을까. 생각보다 도심의 카페에서 차가 멈췄다. 일층이 전부 통유리로 되어있는 고풍스러운 카페. 브런치를 즐기는 손님들이 꽤 많은지 한적하지는 않았다. 단테는 부드럽게 카페 뒷편 주차장에 차를 댔다. 의외로 카페 주차장에는 보기 힘든 고급차도 몇 개 있었다. 유명한 곳이기는 한 모양이지.
카페 내부는 흰색 조형으로 깔끔했다. 적당히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났고 층고가 높아 개방감이 느껴졌다. 베르길리우스는 카페를 주욱 둘러봤다. 그가 아는 정도로 유명한 인물은 없었다. 눈 앞에서 째깍대며 주문하는 시계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딸기 수플레 괜찮아? 잉글리쉬 블랙퍼스트도 있는데.]
“…전자로. 커피도 한 잔.”
[아침부터 커피 마시면 안 좋은데.]
괜한 잔소리를 하던 시계는 딸기 수플레 두 개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자리로 가져다드린다는 말 직후에, 그가 몸을 돌리더니 베르길리우스의 소매를 잡았다. 꾸욱, 명확한 손길이 느껴졌다. 차에서부터 그렇고, 좀 신나지 않았나. 이 사람. 그런 생각을 뒤로 하고 창가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시내에, 통유리창이 가득한 즐겨가는 카페라. 허, 베르길리우스가 편안한 의자에 몸을 뉘이며 속삭였다.
“아예 찍으라고 광고라도 하시지?”
[광고하는 중이야.]
단테가 어깨를 으쓱였다. 기왕이면 이런 곳에서 만나는 게 좋지 않겠어? 괜히 성당이나 우리 집으로 가면 밀회라고 추문이 더 돌거든. 덧붙인 말에 베르길리우스가 느리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익숙해보이는 군요.”
[질투하는 거야?]
“겠나?”
[너무 걱정마. 내가 기억하는 한 전에도 앞으로도 당신 뿐이야.]
패드를 살짝 기울인 단테가 장갑낀 손으로 당신, 이라는 글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베르길리우스가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연 순간 직원이 탁자위에 수풀레를 올려두었다. 한 접시에 두 개가 나왔는지 꽤 많았고, 그 큰 접시는 모두 그 앞에 놓여졌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올려놓은 직원이 가볍게 웃었다. 맛있게 드세요.
[내가 먹어보진 못했지만, 어머니가 좋아하셔. 정말로. 먹어 봐.]
느릿하게 눈 앞의 불길이 흔들렸다. 베르길리우스는 사기 이전에 피로감을 느꼈다. 그는 먼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삼키고, 적당히 부푼 수플레와 그 위로 올라간 크림, 딸기를 바라보았다. 위에는 잼도 같이 올려져 있는 것 같았다. 대강 큰 조각으로 잘라 입에 넣자. 적당한 단맛이 느껴졌다. 크림은 크림치즈 함량이 높은지 약간 산미가 느껴졌고, 단 잼과 딸기를 같이 먹으니 조화로웠다. 느끼하지 않고 풍미가 느껴진다고 해야하나. 식사는 입에 들어갈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순례를 다닐 때엔 딱딱한 통밀빵을 들고 다녔던 베르길리우스에겐 이 부드러운 빵이 썩 맛있게 느껴졌다. 몇 번 씹지 않아도 입 안에서 부드럽게 뭉그러졌다.
말 없이 절반 정도 먹어치우자, 시계가 뿌듯한지 가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베르길리우스가 묵묵히 눈 앞에 놓인 빵을 입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꽤, 기분 좋아보입니다만.”
[티 났어?]
“차 끌고 왔을 때부더.”
[사용인 없이 혼자 나오는 건 오랜만이거든. 간만에 운전석 앉으니까 신났어.]
의외로 속도감을 즐기는 걸까. 생각해보면 오는 길에도 도심인데 꽤 엑셀을 밟았다. 규정속도를 어기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 치킨런을 즐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깐. 베르길리우스는 이어지는 글에 빵을 입 안에 욱여넣었다.
[당신이랑 데이트 한다는 것도, 기대돼서 밤을 꼬박 샜거든.]
아. 예. 베르길리우스는 중얼거리고선 그냥 이 맛을 느끼기로 했다. 대체 이 상원의원이 무슨 생각인건지 영 알기가 어려웠다. 밀회니 숨겨둔 정인이니 기사가 난 바로 다음 날에, 꼭 보란듯이 자신을 데리고 즐겨찾는 카페에 왔다. 마음껏 찍으라는 듯이. 별다른 입장 표명 없이 자랑하는 것처럼 말이다. 베르길리우스, 째깍 소리가 감겨들었다. 슬슬 패드에 쓰지 않아도, 제 이름을 부르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올리자, 어느새 시계의 손이 가까이 와있었다.
흰 손수건을 꺼내 그의 입가를 직접 닦어주던 손길.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차가운 체온.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와중 그 시계는 뭐가 좋은지 다시금 짧게 틱, 소리를 냈다.
[크림 묻어있었어.]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너는.
식사를 챙긴 이후, 단테는 다시금 그를 차에 태우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에는 파파라치도 몇 따라오고 있었고, 슬 경호원도 붙어있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경호원도 없이 다니다니 간도 크다. 악마라서 안 죽을거라 생각하는 건가. 정치인 피습은 꽤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베르길리우스는 여름치고 높은 하늘과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영국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날씨가 맑았다. 고개돌려 창문을 바라보던 베르길리우스가 툭, 말을 뱉었다.
“어디 가는 겁니까.”
[맞춰볼래?]
“운전하면서 타자치지 말고.”
째깍, 투덜거리는 듯한 시계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안 보고도 칠 수 있다던가, 그럼 왜 말을 거느냐는 투정이겠지. 베르길리우스가 별 말 없이 조용해지자. 시계는 패널을 몇 번 조작해 노래를 틀었다. 차 안에서 조금 크게 찬송가가 울리기 시작했다. 샹투스-리베라 소년 합창단? 베르길리우스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맞춰준 건지, 진짜 취향이 찬송가인지 모르겠다. 악마가, 찬송을 듣는다? 그런 얼굴로 바라보니 살짝 고개를 튼 시계가 틱,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퍽 답지 않은 취향 아닌가. 아니, 애당초 머리 아프다던가 기분 나빠하지 않는 건가. 구마시에 사용되는 찬송과 일반 찬송가는 다르다지만 말이다. 이 시계, 점차 알아가면 알아갈 수록 악마답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래, 정말 그냥 사람 같았다… 베르길리우스가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는다. 그걸 알아차렸는지, 아니면 신호에 걸린 걸 기회 삼아 말하고 싶었는지. 타자 소리가 들렸다.
[합창단 좋아해? 난 좋아하는데. 상원의원 직책 맡으면서 타국으로 합창단 따라갈 수 없다는 게 좀 아쉽긴 했지.]
“전 세계로 순회를 도니까요. 머리 아프거나 하진 않나?”
[딱히. 당신처럼 강한 성흔을 받았다던가, 지나치게 신실하다던가, 주한테 직접 축성받는 사람이 아니면 약간 따갑고 마는 정도라서. 좋잖아. 노래도… 뜻도.]
대부분의 뜻이라곤 주를 찬양하는 것 뿐이지 않나. 별 반감도 없는 건가 싶었다. 애당초 악마라는 건… 악마라는 건 뭐지? 내놓아진 탕아라고 한다면 오히려 인류에게 어울리는 호칭이다. 기어코 죽음 이후에는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게 될테니. 그 생각을 읽은 걸까. 잠시 고개를 돌려 바라보던 시계가 별다른 대답 없이 틱, 소리를 냈다.
차 안은 고요했고, 지나치게 성스럽고 고운 아이들의 노랫소리만 울리는 채로 그렇게 한참을 달려갔다.
베르길리우스는 그날 하루동안 이 시계에게 끌려다녔다. 정확히는, 모든 비공식 일정을 같이 한 것에 가까웠다. 단테는 그를 끌고 온갖 봉사를 같이 다녔다. 가볍게는 주민들의 안부를 묻는 것부터, 후원하는 기관에 들려 보고를 받는다던가. 온갖 편지와 서류를 가방에 넣는 그가 의외로 즐거워보였다. 점심은 샌드위치로 차에서 챙겼고, 막 저녁을 먹으러 가는 참이었다. 하루가 고되기보다는 알찼다. 베르길리우스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움직인다는 것에 세삼 놀랐다.
그의 인간관계는 10년 전에도 좁았고, 꽤 얕았다. 지금이야 열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만한 사람이 그의 곁에서 유일하게 친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10년 전 구마사제로 활동할 즈음에는 보조사제도 없이 혼자 악마들을 내쫒으며 다녔다. 숱한 성당을 떠돌아다녔으며 성전의 가득 찬 신도들도 언뜻 멀게 느껴졌다. 모든 사람이 보호해야할 것으로만 여겨졌다. 현실과 유리되는 감각속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저 알고만 있다고 느껴졌다. 그들이 어떤 얼굴을 하는지, 무슨 하루를 살아가는지는 베르길리우스에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늘 기도하는 사람들의 옆 얼굴과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 정도였다. 이제는 악몽처럼 남은, 아저씨. 부르는 소리와…
[베르길리우스.]
째깍, 시계가 감겨드는 소리가 났다. 베르길리우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이라며 시민단쳬까지 알뜰하게 들린 시계가 차에 도착하자 5분만 쉬자고 늘어진 탓에. 차는 아직 출발하지 않고 이제는 조금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잠깐의 상념마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단테는 툭, 소리를 내어 그를 심상에서 끌어냈다.
[저녁은 뭐가 좋아? 먹고 싶은 음식 있어? 오늘 하루 고생했으니까 마음껏 뜯어내도 좋은데.]
고생이라. 확실히 하긴 했지. 중간에 옷가게 들리면 안 돼? 하고 묻는 시계의 말에 잠시 고민했다만, 아무리 그래도 성직의 몸을 바친 인간인데다가 이리 같이 다니는데 수단까지 벗으면 안그래도 안 좋은 소문에 신부직을 내려놓느니 뭐니 하는 소문만 더 고착될 뿐이다.
“바라보는 시선들이 퍽 따갑더군요. 이것도 의도한 겁니까?”
영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일간 신문은 아직까지 보편적인 편이고, 방송사에 따라서는 예비 총리의 사생활이라며 아침 뉴스에 내보냈을 지도 모른다. 보란듯이 데리고 다녔으니 그 스캔들이 사실이겠거니 싶었겠지. 다들 살갑게 이 시계를 반기다가도 그 뒤에 침울하게 서 있는 베르길리우스를 보고 멈칫, 하곤 했다.
[조금은. 당신을 키링처럼 사용한 건 아니야. 사실은 데이트라고 말은 했으니까 진짜 데이트처럼 놀러가는 것도 좋았겠지만… 그렇다고 일정을 뺄 수는 없었거든.]
당신이 데이트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말이야. 단테가 덧붙이고선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저녁 밥은? 좀 한정되어 있지만 파인다이닝도 갈 수 있는데. 당일 예약하면 좀 툴툴 거리겠지만 좋은 주방장이 있는 곳을 알거든. 갈래?]
“마음대로 하십시오.”
온 종일 돌아다니는 것 보다는 그 시선에 질렸다. 조금 과장하자면 오늘 하루동안 만난 사람이 그가 10년간 만나온 사람보다 많은 것 같았다. 보통 악령 씌인 자와 그 가족만 잠깐 만나고 말았으니까. 그 대답을 긍정이라고 여겼는지 단테가 패드를 잠깐 두드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기어를 움직였다.
“와아, 단테님…! 오랜만이에요….”
“시, 대. 드. 미?”
으아아, 료슈 씨이. 베르길리우스는 꽤 고풍스러운 건물로 들어오자마자 흰 앞치마를 두른 두 사람을 마주쳤다. 정확히는 그 차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마중을 나온 것 같긴 했다. 성큼성큼 안내하던 단테가 정확히 문 앞에서 기다리는 두 사람을 보고 째깍, 소리를 냈다. 한쪽은 검은 머리를 질끈 묶고 있었고, 헤드 셰프인 걸 알려주는 명찰을 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선 소심해보이는 노란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는데. 눈을 굴리면서도 반가운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하, 오랜만. 드디어 미쳤냐고? 이제 안 거야, 료슈?]
“당. 예. 모. 분. 몇 번이나 말 했을텐데?”
[료슈 밖에 생각이 안 나서 그랬지. 내가 아는 한 최고의 셰프니까.]
“쯧… 들어와.”
료슈라고 불린 셰프는 몇번 실갱이를 하더니 익숙한 듯 몸을 돌려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단테는 노란 머리칼의 소년-조금 어려보였다.-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어서오라는 듯 베르길리우스에게 손짓을 했다. 두어걸음 밖에서 가만 바라보던 베르길리우스가 걸음을 옮겼다.
밖에서 은은한 빛을 뿌린 것과 같이. 내부는 꽤 깔끔했다. 난해한 그림들이 걸려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예술적이었고, 룸 구조인지 시끄럽지 않았다. 바닥에는 소리를 흡수하는 카펫이 늘어져있고 층고는 꽤나 높은데다가 유리장식물이 반짝거렸다. 싱클레어, 일 하는 게 어렵지는 않고? 단테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네에… 그래도 수셰프 자리니까요. 가끔 료슈 씨가 이해도 안 가고 어렵고 부당한 명령을 하시긴 하지만…! 저는 괜찮아요.”
전혀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앞치마를 쥐고 잠시 부르르 떨던 소년이 고개를 들고선 가볍게 웃었다. 그래도 단테님이 도와주신 덕에 생활이 어렵지 않아요.
[다행이다. 조금 걱정했거든.]
“료슈 씨 말을 제대로 듣는 게 저 밖에 없기도 하고요….”
아, 도착했다. 긴 복도를 지나 먼저 주방으로 향한 헤드 셰프와는 달리 직접 방까지 안내한 소년이 가볍게 문을 열고 한 걸음 물러났다. 본래는 웨이터의 일이지만, 이런 대우를 받는 건 이 시계가 상원 의원이어서 일까. 수셰프는 베시시, 옅은 웃음을 띄고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돼요. 단테님… 하고, 애인…? 분.”
뭐? 그 오해를 정정해주기도 전에 소년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주방으로 향해버렸다. 그 말에 잠시 굳은 건 그 뿐이 아니었는지. 그의 옆에 서 있던 시계도 티익, 옅게 감겨드는 소리를 냈다. 다만 별다른 말 없이 먼저 걸음을 옮겨 방 안에 들어갔을 뿐이다. 베르길리우스 또한, 두어번 얼굴을 쓸어내리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원형 탁자 위에는 흰 천이 깔려 있었고, 편안해 보이는 의자 두 개가 마주보게 놓여있었다. 단테가 안쪽으로 향했고, 그는 자연스럽게 문 근처에 앉았다. 적당히 고요했고, 편안한 공간이었다. 지나온 복도처럼 벽에는 그림이 하나 걸려있었고 전체적으로 안온한 색을 띄었다.
[싱클레어가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이네…]
“아마 오늘 봤던 모든 사람도 저런 오해를 하지 않겠습니까.”
[허, 청교도의 나라 맞아? 신부님이잖아.]
“퍽 개방적이게 된 모양이죠.”
[그걸 당신이 말해도 되는 건가…]
베르길리우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동시에 웨이터가 문을 두드렸다. 한입거리들이 먼저 나왔는데, 당연하게도 단테의 앞에 놓여지진 않았다. 긴 설명이 이어졌는데 베르길리우스가 이해한 것이라고는. 대강 여러가지 사용했으니 오른쪽부터 먹으라는 말 뿐이었다. 점차 표정이 굳어가는 모습을 보던 시계가 째깍, 소리를 냈다. 허, 저 시계. 분명 웃었다.
웨이터가 나간 이후에야 수저를 들 수 있다니.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음식이란 건 대강 입에 쑤셔넣고 씹을 수 있다면 뭐든 괜찮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던 베르길리우스에게는 꽤 쓸데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런 설명과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오는 곳이지만 말이다. 그가 작은 한입거리들을 입에 넣고 우물거릴 즈음. 단테가 패드를 두드렸다.
[맛은 어때?]
그리고 베르길리우스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음식은 꽤 맛있었다. 입 안에서 녹는 듯한 식감에 감칠맛이 길게 이어졌다. 양이 적은 게 단점이라면 단점인가. 조금 더 먹고 싶었고, 앞으로 나올 음식이 조금 기대됐다. 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군요.”
[다행이네. 앞에서 한 말은 빈말이 아니거든. 료슈는 내가 아는 한 최고의 셰프야.]
먹어볼 수 없다는 게 아쉽단 말이지. 그가 농담하듯 덧붙였다. 코스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메인의 스테이크를 가를 때 즈음, 노란 머리의 소년이 다시금 나타났다. 분명 싱클레어라고 불렀고, 명찰에도 에밀 싱클레어라고 이름이 쓰여있었다. 본래는 코스 중간에 셰프가 등장하진 않는다. 작은 파인다이닝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렇게 큰 식당에서는 주로 웨이터가 묻는 질문을 굳이 하려고 나온 건 꽤 특별 대우처럼 느껴졌다.
“식사는 좀 어떠세요?”
“괜찮군요.”
[맛있대.]
시선을 굴리던 싱클레어는 그의 대답을 지나 단테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안심했는듯 다시 베시시 미소를 지었다. 디저트 준비해드릴게요. 그 짧은 질문을 하려고 온 것인지 등장은 짧았지만 퍽 행복해보였다. 베르길리우스가 어느새 빈 접시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당신을 꽤 따르는 모양입니다.”
[싱클레어? 그렇지. 지금 이 식당에서 일하는 것도… 내 입김이 없다고는 못 하니까. 그래도 처음부터 셰프로 들어온 건 아니야. 접시닦이 일부터 했으니까 지금 저 자리에 올라간 건 모두 싱클레어가 열심한 한 거야.]
느린 타자소리.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단테가 툭, 탁자를 두드렸다. 어딘가 머뭇거리는 동작이었으나 결심했는지 다시금 패드를 두드렸다.
[저 애는…… 의체 테러 사건의 희생자야. 테러 단체로 인해 가족을 전부 잃었어. 친구도, 이웃도. 마음이 단단히 부서져버려서 아무대도 가지 못한 채로 병원에만 덩그러니 앉아있었어. 매번 봉사를 갈 때마다 혼자 하늘을 바라보고 있더라고. 마음이 안 좋아서 신경쓰기 시작했지.]
그래, 아마도 그 때즈음. 깨달았던 것 같다. 어렴풋이 남아있던 사람에 대한 감정이 미움이나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었다는 것을. 나는 정말이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해서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순간. 단테가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눈 앞의 사제에게. 그 누구보다 악마를 만나왔으며 숱하게 내쫒았을 이에게 되묻는다.
[악마답지 않지?]
베르길리우스는 그 질문을 마주했다. 시선을 아래로 옮기면, 처음에는 깨끗한 채로 식기를 감싸고 있던 흰 천이 여러 소스로 인해 더럽혀져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희지만, 부분적으로는 더럽다. 베르길리우스가 고개를 들어 시계를 마주했다. 없는 시선이 스치는 것 같다는 착각이. 무겁게 가슴을 짓누른다. 그가 눈을 깜박였다. 고요한 눈동자가 여전히 타오르는 불을 향한다.
“…그렇군요.”
퍽, 답지 않다. 그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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