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베르단테

창고 by 칼
146
3
1

*본 회지는 소설 ‘레베카’의 장소나 소재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이후 회지로 발간될 확률이 높으며 웹공개를 예정해두고 있습니다.

*초안은 별다른 맞춤법 검사, 수정 없이 이어집니다.


0.

어젯밤에, 맨덜리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다.

높은 절벽 위에 세워진 저택, 바닷바람과 물살 소리가 매섭게도 들려오는 곳. 정원 뒷문으로는 바닷가가 연결되어 있고, 모래사장과 자갈들이 섞여 해안가를 이루는 그 곳. 나는 어젯밤에 그곳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다.

사람과 사람을 엮고, 쉼없이 먼지가 쌓이고. 어두워 늘 촛불을 키고 있었던 그 곳으로. 저택 동쪽에서는 늘 해가 떠올랐지만 짙은 구름에 막혀 일출 한 번 보지 못했던 그 곳. 노을은 아주 짧게 지나가고 늘 축축한 남색의 색 밖에 볼 수 없었던 그 곳. 수많은 사람을 맞이했던 지난 날의 영광 없이. 마지막 남은 가문의 외동딸이 죽기만을 기다리던 그 저택. 사람의 손길이라고는 늘 상주하던 버틀러 이외에는 닿지 않았던 그 저택.

이제는 불타 재가 되어버린 그 저택으로.

당신과 함께 돌아가는 꿈을 꾸었다.


1.

그가 여섯번째 황금가지를 손에 넣었을 때. 바짝 마른 것처럼, 꼭 벼락맞아 부서질 것처럼 검은 가지를 얻었을 때. 버스는 잠시 정차했다. 단테는 버스가 본사 근처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베르길리우스가 자주 외출했으며 돌아올 때마다 한층 죽상인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별로 어렵지 않게 그가 저택에서 있었던 돌발 행동으로 인한 귀찮은 댓가를 치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버스 분위기는 한 없이 험악한 것 같으면서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어쨌든 베르길리우스가 외출 겸 본사의 부름을 받을 동안은, 수감자들에게도 작은 휴식이 주어졌던 것이다. 파우스트는 수감자들을 포함한 모든 버스 인원들에게 휴식이 필요한 지점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므로 이례적이게도, 모두에게 삼 일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이 삼일 간은 외박을 하던, 아예 개인실에만 처박혀 있던 개인의 자유였고. 삼 일이 지나는 자정 안에만 돌아온다면 뭘 하든 신경쓰지 않겠다고 고했다.

단테는 그 말이 끝나고 나서 모든 수감자들 사이에서 돌았던 숨죽인 흥분을 기억했다. 모두가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눈을 깜박이다가, 이 주어진 휴가를 어떻게 하면 잘 쓸지 고심하는 것처럼 눈에 이채가 돌았으니까. 다만,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파우스트는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듯한 수감자들에게서 몸을 돌리고선 버스 앞 좌석에 앉아있던 단테와 잠시 일감을 잃은 운전수를 바라보았다.

“아시겠지만. 두 분 께서는 외출이 불가능합니다. 버스 안에서 자유롭게 보내주세요.”

뭐. 그럴 것 같긴 했지만. 단테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몸을 틀어 운전석에서 사탕을 물고 있는 운선수를 바라보았다. 한껏 방탕한 자세로 운전석에 기대있던 카론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잠시 시선을 주다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 잠깐의 행동에서 옅은 실망이 묻어나는 듯 했다. 단테는 몸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째깍, 시계소리가 났다.

<알았어.>

그 소리를 기점으로, 삼일간의 휴가가 시작되었다.


의외로 꽤 많은 수감자가 버스에 머물렀다. 물론 외출이 잦았지만 착실히 버스로 돌아왔다. 머문 둥지의 지도를 가져와 하고 싶은 것과 먹고 싶은 것을 빼곡히 적은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같이 움직이는 일이 잦았다. 둘 셋씩 짝을 지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듯 했다. 단테는 잠시 초기의 그들을 떠올렸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비웃고, 가끔 폭력사태가 이뤄졌던 아주 처음의 시작을 말이다. 점차 나아갈 수록 수감자들 사이에서는 전우애 같은 끈끈한 감정이 싹트는 듯 했다. 누군가는 친구로 여겼고, 누군가는 동료로 여겼으며, 누군가는 보호자로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말로 꺼내진 않았지만, 꼭 가족 같기도 했다. 단테가 살짝 주위를 돌아보았다. 빈자리가 눈에 띄였다.

당연하지만, 휴가가 주어지자 마자 버스에서 내려 혼자 사라진 사람도 있었다. 오티스와 료슈는 망설임 없이 버스 밖으로 향했고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의외로 뫼르소가 머문다는 사실이 놀랍게 여겨졌다. 다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사이가 좋을지도 모르겠네. 단테가 시끄러운 버스 안을 바라보다가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가야할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그는 시끄러운 버스 뒷편 대신, 지나치게 고요한 버스 앞좌석으로 향했다.

[카론.]

“…시계.”

똑, 똑. 단테가 의자 뒷편을 두드렸다. 사탕 막대를 물고 있던 카론이 고개를 돌렸다. PDA에 적힌 글을 읽은 운전수가 고개를 기울였다.

[지루하지 않아? 계속 앉아있기만 하잖아.]

“별로. 지루하지 않습니다.”

단테는 운전석에 널브러진 사탕 껍질을 바라보았다. 누가 준 것도 있는 것 같고, 베르길리우스가 주고 간 것도 있는 것 같았다. 수감자들은 아닌 척 하면서도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단테, 뭐라도 사올까? 뭐, 기념품이라던가. 라고 이야기 한 로쟈라던가. 오늘은 꽤 유명한 카페를 갔는데요. 거기 액자에 예쁜 사진이 많았거든요. 관리자님도 같이 보면 좋았을 것 같아요. 라고 말해준 싱클레어라던가. 다들 눈치보지 않았으면 했지만 아무래도 홀로 버스에 있는 자신이 안쓰러운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단테는, 딱 수감자들이 자신을 안타까워 하는 것 만큼 카론이 안쓰러웠다.

자신이야 당연히, 없어지거나 납치당하면 큰일일 뿐만 아니라 머리에 황금가지도 들어있는 상태가 아닌가. 회사 차원에서도 문제가 되고 늘 열둘을 끌고 다녀도 늘 위험천만한 상황인데 고작 호위로 수감자 둘 셋을 끌고 나갈 수는 없는 마련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별로 나가고 싶지도 않다는 게 큰 위안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카론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기대하고 있었고, 자주 창 밖을 바라보았다. 수감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애당초 베르길리우스가 어디 갈 때 데려가지 않는 한 운전수는 늘 이 버스 앞좌석에 박혀있었다. 혼자서.

[…나가고 싶지 않아?]

“카론, 기다리라고 했어.”

[베르길리우스가?]

“그러니까 안 가. 흰 승객이 말해서가 아니야.”

그렇다기에는… 단테는 그 눈에 스미던 이채를 기억했다. 자유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고, 먹고 싶은 것이 있을텐데. 늘 투정을 부리기 보다는 삼키는 게 더 어울리는 것처럼 굴었다.

[…그래.]

단테는 운전석에 널브러진 사탕 껍질과 다 먹은 막대를 모아 정리하고선 몸을 돌렸다. 어딘가 답답했다.

그리고 관리자께서는, 그 답답함을 그냥 놔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두번째 날 저녁, 베르길리우스가 돌아왔다. 휴가이기에 불침번이 따로 없었고 잦은 외출 탓인지 전부 이르게 개인실로 돌아갔다. 단테는 유난히 고요하게 느껴지는 버스 안에서 노트를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떠있던 수감자들의 목소리가 없어진 탓일까. 한층 조용한 백색소음 속에서 버스 앞좌석에서 비닐 부스럭 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노트에 더 적을 말도 없어 일기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누군가 버스문을 두드렸다. 똑, 똑. 운전수가 백미러를 바라보더니 버스 문을 열었다. 그가 돌아왔다.

저벅, 하고 한층 피로에 지친 발걸음이 이어졌다. 어깨는 조금 쳐졌고 피로로 눈가가 거뭇했다. 안그래도 못 자는 사람이 이틀을 꼬박 시달렸으니 어련하겠나. 버스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느리게 몸을 피던 베르길리우스가 시선을 한 번 단테에게, 한 번 카론에게 향했다. 그제야 운전석에서 나온 운전수에게. 몸을 숙여 조심스럽게 시야를 맞춘다.

“아직 안 자고 있었나.”

“기다리고 있었어. 베르. 늦어.”

“…그래, 미안하다.”

들어가 쉬어. 사탕 줄까. 아니… 단테는 이어지는 특색의 목소리를 들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언뜻 피로가 묻어나왔다. 그건 체념과도 닮았고, 어쩔 줄 모르는 무지의 영역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아이를 다루는 법은 모르는 모양이지. 카론은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무거운 침묵이 두사람을 갈라놓았다. 단테는 한 걸음 떨어진 의자에 앉아 가만 두사람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둔다면 안그래도 한계치까지 몰린 베르길리우스가 쓰러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왠지는 모르겠다. 분명 그는 튼튼하고 제가 걱정할 필요 없는 사람인데도. 흐르는 피를 끝없이 맞으며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을 했던 그날의 베르길리우스가 계속해서 겹쳐보였다. 그 가시관을 두른 모습에서 단테는, 어쩐지 모르게 계속해서 불안을 떨치기 어려웠다. 당신이 쓰러질 것 같아. 어느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늙은 개처럼 주인이 보지 않는 곳에서 생을 마감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단테가 몸을 일으켰다. 두사람의 시선이 저절로 따라왔다. 째깍, 말 대신 소리를 내고 PDA를 보였다.

[늦었으니까 일단 돌아갈까? 카론. 베르길리우스가 왔으니까… 내일은 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

물론 그 글귀를 베르길리우스도 읽고 있었다. 삼일 간의 휴가는 그도 전해들었겠지. 아니라면 오자마자 불침번이 없다고 꼽을 줬을 테니까. 가만 화면을 바라보던 카론이 고개를 들어 단테를 바라보았다.

“카론. 4번지에 있는 가게에 가고 싶어.”

4번지? 단테가 기억을 되감듯 고개를 기울였다. 아. 이상하고 싱클레어, 돈키호테가 잠깐 들렸다던 가게다. 알록달록한 사탕과 젤리가 많았는데 많이 못담아왔다고 말했었지. 카론이 생각나 가져온 게 분명했지만 그저 남이 고른 걸 전해받는 걸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베르길리우스의 시선이 저절로 단테에게 향했다. 뭐, 뭐. 어쩌라고. 단테는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일찍 일어나. 카론은 아침 일찍 갈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운전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버스 복도를 지나 제 방으로 들어갔다. 탁, 하는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두사람이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일으키고 미간을 꾹 누른 베르길리우스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설명. 둘 다 입이 있는데도 몸짓으로 대화하는 게 더 익숙했다.

[싱클레어가 그 근처에 사탕가게를 다녀왔는데. 아무래도 직접 가고 싶은 모양이야. 시달려서 내일 만큼은 푹 쉬고 싶은 거 알지만… 하루만 더 희생해주라. 안 그래 보여도 계속 당신을 기다렸거든.]

“…예.”

[좀 주제넘었나?]

“아뇨. 됐습니다… 그보다, 단테.”

응. 단테가 대답 대신 가벼운 틱, 소리를 냈다. 지독한 피로감에 구겨진 얼굴이 어째 두렵기보다는 안쓰럽다. 비틀대는 일 없이 발 끝을 직직 밀며 복도로 돌아가던 베르길리우스가 잠시 고개를 돌렸다.

“아마 내일 나들이, 에는 당신도 포함되는 모양인데. 잠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나도?]

베르길리우스는 별 다른 첨언 없이 고개를 돌리곤 복도로 걸어갔다. 어라, 나도? 단테는 안그래도 오지 않는 잠이 막 달아난 걸 느꼈다. 옷… 다른 거 입는 게 나으려나. 수감자들은 그냥 코트만 벗고 다녀오긴 하던데. 아무래도 붉은 색은 너무 눈에 띄겠지. 아니, 눈에 띄는 걸 치자면 의체부터가 문제인가? 아무래도 불 나오는 시계니까.

그렇게 고민도 잠시. 단테는 텅 빈 버스 안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밤을 새는 건 익숙해도 늘 불침번이 곁에 있곤 했으니까. 정작 이렇게 고요한 적은 없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침묵은 공허가 되고, 공허는 옅은 외로움이 되어 살결에 스치듯 했다. 단테는 없는 오한을 느끼며 차라리 방에 들어가 이불이나 덮고 있어야 겠다는 판단을 마쳤다.

저벅, 저벅. 마지막 구두굽 소리를 느끼며 방에 들어가기 전, 단테는 맞은 편에 위치한 베르길리우스의 방 문을 살짝 훔쳐보았다. 다른 수감자들의 방과 달리 창문 없는 방 사이로 괴로운 신음이라도 들려올까 싶었다. 아니면 옅은 코골이라도 말이다.

안타깝게도, 단테가 원하는 소리 하나 없이 복도는 고요했다. 가끔 엔진이 우는 소리 이외에는 그 흔하던 천둥소리 하나 없었던 것이다. 단테는 제 방 문고리를 돌리고.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렸다. 맞은 편 방문에서 뭐라도 흘러나오기를 바라는 것처럼. 이상하다. 내가 원래 저 사람한테 이렇게 관심이 많았던가?

괜히 오늘따라 피곤해보여서 그런 걸지도 몰라. 안쓰러워서? 뭘까. 그거랑은 좀 다른 감정인데…

미적이는 발걸음 따라,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겨우 돌려낸 단테가 째깍, 소리를 내며 공상을 접었다. 에이, 뭐. 별거 아니겠지.

무슨 일이라도 있겠어?


똑. 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단테가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막 정신이 든 참이라 눈 앞이 흐릿했다. 생각하다가 잤나보다. 더듬거리며 침대를 휘젓자 근처에서 PDA가 잡혔다. <어, 금방 갈게.> 누군지도 모르는 방문객에게 대꾸하고 나서 구겨진 셔츠를 탁탁 두드리며 몸을 일으키는데, 여전히 노크소리가 끝나지 않았다. 나간다니까. 하고 대꾸하려던 단테가 째깍, 소리를 냈다. 문 너머라도 충분히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수감자들이 아닌 모양이다. 그리고 어젯밤에, 분명 카론이 나들이 가자고 했지. 베르길리우스랑, 나까지.

“일어났습니까?”

문 너머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어젯밤보다는 좀 살아있는 목소리였다. 잠은 잔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이네. 단테가 코트를 팔에 걸치고선 다급히 문을 열였다. 째깍째깍 소리를 내주는 걸 잊지 않고.

벌컥, 문을 열자 평소와 같은 차림의 베르길리우스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래, 뭐. 하루 외출한다고 옷을 바꿔입을 필요는 없지. 애초에 옷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어제 와서 확인해 본 결과, 단테에게는 딱히 나들이 갈 옷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가만 문을 열고 있자 베르길리우스의 시선이 머리부터 발 끝까지 향했다. 뭐지? 이 기분 나쁜 눈빛? 뭐라 적으려고 했는데 베르길리우스가 더 빨랐다. 그가 손을 뻗어 넥타이를 쥐었다. 밤새 흐트러지고 풀린 붉은 넥타이를 가볍게 풀고, 다시 바르게 매는 데 일 분도 안 걸린 것 같다. 어정쩡하게 올라간 단테의 손이 다시 내려갔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가 싶더니 그 손으로 주름진 셔츠까지 탁탁 친 다음에야 물러섰다.

뭐지? 가깝지 않나? 티익… 맥없는 초침소리의 끝으로 베르길리우스가 말 없이 몸을 돌렸다. 먼저 복도를 지나가기에 방문에서 한 걸음만 밖으로 향한 채로 한참을 버벅거렸다. 너무 가깝지 않았나… 방금. 말했으면 내가 했을텐데. 시간 아끼려고 그런 거겠지?

그런거지. 단테가 생각을 갈무리 하고 재빨리 복도를 지났다. 버스 문 앞에선 이미 카론이 잔뜩 기다린 얼굴로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시계, 늦었어.”

[미안, 깜빡 자버렸네.]

“일찍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대신 사탕 두 개 사줄테니까.]

“두 봉지.”

그건 너무 많지 않나? 단테가 뭐라 적기도 전에 카론이 들뜬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 뒤로 베르길리우스가 따랐고, 뒤쳐지지 않으려 호다닥 걸어가는 구둣소리가 버스 바닥을 울렸다. 다행이 날은 맑구나, 단테는 문 밖으로 보이는 흰 햇볕에 들리지 않게 옅은 웃음소리를 냈다.

첫 나들이의 시작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세사람은 가장 먼저 4번지의 사탕가게에 들렸다. 밥도 먹기 전에 간식부터 챙기는 게 맞나 싶긴 했지만, 산다고 바로 먹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다양한 사탕을 담아오면 무게별로 계산하는 가게였다. 단테는 굳이 살 필요는 없었기에 카론의 근처에서 구경했다. 베르길리우스는 문 근처에서 늘 시선으로 두사람을 쫒고 있었다. 팔짱을 껴고 언뜻 무관심해보였다만, 그 자세에서 K사 입국심사의 추억이 떠올랐다. 그 때도 저런 얼굴이지 않았던가?

“시계. 저것도 집어 줘.”

아아, 응. 단테가 고개를 끄덕이고선 카론 대신 집게를 들고 조금 위에 있던 붉은 젤리를 집었다. 봉투에 넣어주며 고개를 기울였다. 붉은 색 싫어하지 않았던가? 괜히 묻지는 않았다. 단테는 저것도. 하고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열심히 일일 직원이 되어주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서 그 봉지는 베르길리우스의 손으로 들어갔다. 익숙하게 짐을 받아든 그가 빠른 스텝으로 길을 걸어가는 카론의 뒤를 묵묵하게 따랐다. 단테는? 그 즐거운 몸짓에 붙잡힌 채로 손을 잡고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별다른 가이드와 지도 없이 사탕 가게만 목적으로 한 걸음이었지만 의외로 4번지는 유명한 음식점이 많은 것 같았다. 길가다 괜찮아 보이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들어가 식사를 챙겼다. 물론 단테는 먹지 못했지만, 두사람의 식사를 구경하는 것도 나름 괜찮았다. 대부분 카론이 시켜놓은 음식의 대부분은 베르길리우스의 입으로 들어갔지만 말이다. 한 두입 먹고 나면 그릇이 그의 앞으로 밀어졌고, 별 내색 없이 익숙하게 음식을 처리했다. 그래, 처리에 가까웠다.

단테는 조심히… 들키지 않게. 초침 소리도 없이 가만 속삭였다. 아무리 봐도 그의 모습은,

<아버지구나….>

아아, 아버지. 이제야 깨달아요….

“단테.”

어? 들렸나? 멍하니 바라보던 단테가 PDA에 글을 적었다.

[왜?]

“꼬리가 깁니다.”

가만 바라보던 베르길리우스가 마지막 접시를 처리하고 난 뒤에 티슈로 입을 닦았다. 단테가 별 대꾸 없이 째깍… 소리를 냈다. 눈치는 진짜 빠르다니까. 그가 접시를 비우기를 기다리다 못해 티슈로 종이접기를 하던 카론이 발을 두어번 동동 구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 먹었으니까. 운동.”

[운동?]

“카론, 지나가면서 봤어. 예쁜 분수대.”

그 말대로, 분수대는 정말 근처에 있었다. 레스토랑을 나와 오 분 걸었을까. 몇 블럭 건너자 건물 사이로 광장 같은 곳이 보였다. 날이 좋아 꽤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잘하면 수감자들을 만날 수도 있겠네. 카론이 손을 놓고 먼저 분수대 근처에 섰다. 물이 뿜어져 나와 옅은 물방울이 튀는 분수대를 빙글빙글 돌았다. 시계도 같이 해. 가만 분수대 끝에 서서 걸어가던 카론이 그를 이끌었다.

<떨어지지 않으려나… 사람도 꽤 많은데.>

거기다가 사람들 다 보는데 분수대 끝에 서는 건… 카론은 곤란해하는 몸짓에도 강경했다. 같이 돌아. 잡히면 안 돼.

음, 어쩔 수 없지. 어차피 한 번 지나고 마는 동네. 단테는 까짓거 별로 나오지도 못하는 데 괜히 나들이의 분위기를 깨지 않기로 했다. 분수대 끝은 생각보다 넓어서 안정감 있었다. 급히 걷지만 않는다면 빠지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왠지 시선이 찌르는 것 같아도 무시하기로 했다. 천천히 걷고 있자면 제 반대편에서 카론의 모습이 물에 비쳐 흐릿하게 보였다. 그래, 카론 보다는 제 모습이 더 자세히 보였다.

나, 이렇게 내 모습을 가까이 본 적 있었던가. 그렇지. 버스의 거울은 나를 비춰주지 않으니까. 붉은 시계 위로 불이 타오르며, 비쳐지고 다시 흔들리고. 어느새 단테는 분수대의 비친 제 모습을 보며 걷고 있었다. 흐릿한 물 사이로 제가 보이는 것 같다가도 다시 사라지고. 다시 투영되고…

그리고 다시 빙글 돌아서, 나. 그리고 나의…… 아.

삐끗, 했을지도 모른다. 제대로 앞을 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단테는 몸의 균형이 흔들리며 팔을 휘젓는 그 모습을 비추는 물이. 그 물에 비치던 제 손이 자신을 잡아당기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양 손으로 나를 움켜쥐고, 바르게 매어진 넥타이를 당겨서…

“——!! 단테—!!”

퐁당, 비쳐진 상의 반대쪽으로 빠트려 버린다고.


<—…헉, 허억…….>

뭐지? 단테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눈 앞이 점멸하고, 잠시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헐떡이며 숨을 고르자 시야가 조금 진정된 것 같았다. 깜박, 할 때마다 눈 앞이 보였다.

깜박, 흰 이불과 검은 제 손.

깜박, 막이 내려진 침대 기둥과 지나치게 고풍스러운 천들.

깜박, 프릴이 달린 흰 슬립과 인기척. 아니야, 주황색 머리—.

<이스마엘?>

단테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장 익은 이름을 불렀다. 아, 물에 빠지고 난 뒤에 다행이 이스마엘이 근처에 있었나보다. 기절했으니까 방으로 옮긴 건가? 나들이를 제대로 마무리 못해서 미안하네. 어쩌지… 많이 화났으려나. 근데 이 방 너무 고풍스럽지 않나? 등에 느껴지는 감촉도 내 이불이랑 다른데. 뭔가 너무 푹신해서 오히려 잠들기 어려울 것 같아. 완전 포근하네… 누구 방이지? 홍루? 홍루도 근처에 있었던 건가? 공상은 끝없이 이어지고 계속해서 생각을 늘렸다. 어느정도 적당히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추론을 마쳤을 즈음, 단테가 제대로 눈을 떴다. 그 순간, 빼곡히 시야에 잡힌 건.

“아가씨, 괜찮으세요?”

누가봐도 버틀러의 옷을 입고 있는 이스마엘이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HL

댓글 1


  • 창의적인 호랑이

    첫 문단부터 압도적이었습니다. 제 영혼은 맨덜리로 순식간에 날아가 늘 어둑했던 저택 복도를 걷다가->버스 운전석에 서서 가만히 놔두면 무너질 것만 같은 붉은시선을 바라보았다가->재빠르게 다가와 넥타이를 매 주는 흉터 가득한 손에 시선을 주었다가->산뜻한 바람이 불고 있는 어느 날, 예쁜 분수대 옆에서 세 사람의 즐거운 나들이를 바라보았다가->단테와 함께 분수대 물 속으로 끌려들어갔다가->이윽고 또 다시 고풍스러운 저택에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다음 편이 매우 기다려집니다. 단테 아가씨를 데려온 낯선 손은 누구의 것이었는지? 이 세계에서 베르길리우스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서 미치는 청년이 되다.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