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s. D 6
구마사제 베르길리우스 X 악마 단테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마르코 5,38-42
내가 그 순간에 뭘 할 수 있었을까.
베르길리우스는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모두가 잠든 새벽이면 조금 더 깊어졌다. 우울이 범람하는 시간과 호르몬이 그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멈출 수가 없었다. 실은 알고 있었다. 교구의 부름을 무시한다고 해도 그 고아원에 평생 머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치료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만이 구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는 오만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차라리 실체없는 힘이었다면 좋았을텐데. 보이지 않는 손길이었다면 애써 무시하고 회피할 수 있었을텐데.
그의 손길 하나에 화상을 입은듯 괴로워하고, 그가 기도하면 끔찍한 두통에 시달리며 괴로움을 못이기고 구마당하는 악마들이 선명하게 보이는 그 일에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 구마를 마친 뒤에 제정신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그 행위는 정말로 구원이었다.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언제부턴가 베르길리우스는 그에게 감사하다며 가족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뿌듯함이 아닌 압박감을 느꼈다. 굵은 사슬로 단단히 매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눈물을 기억하는 한 자신은 죽기 전까지 이 일에서 도망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울타리 문을 부술듯 잡아 열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라피스의 앞에 섰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금방이라도 눈물 흘릴 것 같다가도 슬픔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기쁨 이전에 훅 치미는 두려움을 느꼈다. 실제로 공황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이 기만스러운 시계가 그의 팔을 붙잡고 일단은 집 안으로 이끄는 손길에 따라 걸음을 옮겼을 리 없으니까.
그러니 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나?
이제 현현한 그의 심판자 앞에서.
베르길리우스는 그를 바라보는 그 무감한 시선 사이 흘리는 옅은 빛을 보았다. 그의 라피스는 무어라 말하려다 그보다 두걸음 멀리 떨어져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베르길리우스는 몇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다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다리 하나하나가 천근추처럼 무거웠다. 그대로 바닥을 지익 끄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힐끗 본 모습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아이는 자랐다. 키가 더 커졌고 그가 기억하는 앳된 얼굴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애는 라피스였다.
걸음을 옮긴 집 안은 따스했다. 그 안온한 공기 안에서 베르길리우스는 한기를 느꼈다. 추웠으나 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밀착한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당연하겠지. 그는 악마가 아닌가!
오히려 그 사실을 자각하자 부유하듯 멍해졌던 정신이 돌아왔다. 이 가증스러운 기만자가 자신에게 한 일이 순식간에 몰아쳤다. 얼마나 우스웠을까? 라피스가 자신에게 있는 것도 모르고 발버둥치고 극성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아주 사소한 단서라도 있으면 앞뒤 안 가리고 스스로를 내던지는 모습이!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심부에 가장 깊이 틀어박힌 분노가 서서히 상승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죄책감과 죄의식에 파묻혀 우울 이상으로 표현되지 않았던 그의 거대한 분노. 늘 끓어오르다 못해 차갑게 식어있던 화가 울컥 넘어오는 구역질처럼 머리를 달궜다. 저절로 시퍼렇게 빛나는 안광과 구겨지는 표정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라피스가 앞에 있는 걸 알면서도 손 끝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는데 어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장 눈 앞에 있는 이 사특한 것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어디부터 진실이었을까? 아니, 진실이 있긴 했을까?
자신의 고아원을 파괴하고, 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린 것이 이 악마일지도 모른다….
그의 심정을 알고 있을까? 정면으로 마주한 단테가 패드에 글을 적었다. 그리고 그 패드는 자신에게 향하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로 그와 시계를 번갈아 바라보던 라피스에게로 향했다. 그는 패드를 흘겨보았다.
[카론.]
아직도 나를 속일 수 있으리라 믿는 걸까?
[이쪽은 베르길리우스야.]
담담하게 글을 적던 단테를 바라보던 라피스가 눈을 깜박였다. 이내 입을 열어 작은 목소리로 “베르길리우스.”라고 말했다. 그가 기억하는 목소리였다. 아니, 정말 자신이 기억하는 목소리일까? 이것보다 더 높지 않았나. 이것보다 더 나직하지 않던가. 모르겠다. 회상과 꿈으로 덧칠되어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 탓이다. 악몽과 환시 속에 파묻혀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너를 찾겠다는 당위로 살아온 탓이다.
그러니 진정으로 마주한 순간 어떤 말을 해야하는지. 어떤 말을 듣고 싶은지 조차…
아니. 거짓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잠깐 이야기 할 게 있어서 그런데, 조금만 기다려줄 수 있어? 사탕 두 개 줄게.]
그를 원망하길 바랐다. 그를 비난하길 바랬다. 경멸하진 않더라도 용서하지 않길 바랐다. 그가 저지른 일을 하나하나 읊으며 죄의 구렁에 빠트려주길 원했다. 그렇지 않다면 죽을 것 같았다. 만일 그를 용서한다느니, 괜찮다는 말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무너질 것 같아서….
그건 감동이라느니 기쁨이라는 안온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 상황이야말로 그가 죽어서라도 피하고 싶은 장면이었다. 일종에 공포를 느끼다 못해 거부감이 일어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올라왔다. 모두가 그를 손가락질 하던, 그를 비난하고 경멸하던. 베르길리우스는 정말 한치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를 찬미하고 동경하다 못해 신과 같이 떠받들던 말던 아무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너만은.
라피스, 너만은.
너만은 나를 용서하면 안 돼.
단테는 기어이 사탕 다섯 개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카론을 거실로 보낼 수 있었다. 언뜻 내보이는 소파 사이로 양갈래로 묶은 머리가 흔들렸다. 또 몸을 기울인 채로 드라마를 볼 생각인가 보다. 단테는 그 모습에 내심 안도했다. 드라마는 한 편에 40분, 결판을 내기엔 충분했다.
무슨 결판을 내냐고? 단테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베르길리우스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감정이 눈동자에 빛처럼 담겨 두어번 흔들렸다. 그제야 네 눈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정작 이 지경까지 와서 드는 생각이 이런 감상 뿐이라니. 카론을 부러 멀리 떨어트린 건 그 아이를 방패로 써먹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그 선택이 불러올 결과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지금의 베르길리우스는 꼭 맹수 같았다. 금방이라도 그를 물어뜯을 짐승. 단테는 그 맹수가 그를 죽일 수 없도록 만드는 사슬을 풀어주는 꼴이었다.
자포자기의 심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단테는 살고 싶었다. 아, 물론 베르길리우스가 구마한다고 한들 진정으로 그는 죽지 않는다. 하지만 이 신체는 죽는다. 그가 떠나는 순간 한참 전에 죽어야했을 몸은 비틀어지다 못해 가루가 되어 흩어질 걸 알았다. 그가 만들어 놓은 모든 관계와 지위는 한 순간에 사라진다. 좋아하는 책을 읽는 것도, 오티스를 대동한 미식 탐방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그저 기호에 불과했다. 잃는다고 한들 약간 아쉬울 뿐이다.
그가 정말로 간절히 살아야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리고 단테는 진심으로 이 상황에 있어 자신의 열 두 계약자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위험의 구렁텅이를 피할 수 있음에도 선택했다. 하지만 당연하지 않은가. 비유하자면 그와 베르길리우스의 관계는 체스판을 두고 마주 앉은 상태와 같았다. 조사, 미행, 추적, 심지어는 상대의 트라우마와 막 여물기 시작한 사랑까지… 체스판 위의 말이었다. 원하는 대로 말을 움직여 상대의 킹을 잡아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리고 단테는 정말로 간절히 그 판을 뒤엎고 싶었다. 그만하고 싶었다. 하지만 베르길리우스가 원하지 않는다면 판은 뒤엎이지 않는다. 두사람이 동의하지 않는 한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적어도 공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자신의 킹을 적진 한 가운데에 두는 것이라고 해도.
게임이 끝나는 것으로 원하지 않는 종결을 맞는다고 할지라도….
베르길리우스는 말없이 계단을 오르는 시계의 뒤를 따랐다. 집요한 시선으로 단테를 주시하며 한걸음. 한걸음 걸어갈 때마다 계단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울렸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드라마 소리가 찬찬히 멀어지자 지독한 침묵이 감돌았다. 불이 꺼진 2층에는 한기가 스며왔다. 계단을 다 오르고 나니 꽤 넓은 복도와 닫히지 않은 방문이 보였다. 단테는 미적거림 하나 없이 복도를 나아가는 듯 싶었지만 차마 숨기지 못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몸을 떠는 것 같았다. 그러나 복도를 지나 두번째 방 손잡이를 잡는 손이 헛도는 걸 봐도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 고요한 분노가 한계까지 물을 담은 잔처럼 일렁였다. 한방울이라도 흘리는 순간 범람할 것이다.
아주 조금의 계기가 생기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두사람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아니, 무슨 행동을 한들 그의 분노를 식힐 수 없었을 것이다. 도주하거나 멈춰선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었다만 애당초 여기까지 오지 않는다. 단테가 숨도 없으면서 가슴을 부풀였다. 끼익, 방문이 열렸다.
그 순간 베르길리우스가 단테를 덮쳤다.
그래도 꽤 멀었던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는 듯이. 단테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무거운 힘에 떠밀려 그대로 바닥에 몸을 부딪혔다. 열린 문을 한 걸음 걷지도 못하고 이는 충격에 저절로 비명같은 째깍임이 흘렀다. 딱딱한 바닥에 손을 짚지도 못하고 떨어진 탓에 악, 하고 소리를 질렀으나 듣는 이가 없다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자신을 짓누르는 이 남자가 그 비명을 가증스럽게 여길지, 아니면 들어 보기라도 할지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쿵, 하는 소리가 짧게 울렸으나 단테의 고난은 이 때부터 시작이었다. 베르길리우스가 흉곽이 바닥에 눌리다 못해 못해 아플 정도로 등 뒤를 무릎으로 압박하는 탓에 바닥에 늘어진 손을 파닥였다. 숨을 쉴 수 있었다면 질식하다 못해 버거워 기절했을 것이다. 이럴 때마다 쉬이 놓지 못하는 정신이 원망스러웠다. 아파, 단테는 손 끝을 세워 바닥을 두드려 그 통증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려고 했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던 베르길리우스가 더욱 체중을 실어 단테의 등을 눌렀다.
빠득. 하는 소리가 났다. 단테가 도무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뎅—! 하고 다시금 소리를 울렸다. 거슬렸다. 라피스가 들으라고 하는 소리일까? 그렇다면 최악의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는 느리게 숨을 내쉬며 시계 아래 목을 콱 쥐었다. 의체라는 사실이 퍽 기꺼웠다. 이래도 쉽게 죽지 않을테니. 베르길리우스가 비죽이 웃었다.
“한 번만 더 소리내면, 다음은 저 시계가 될 겁니다.”
막 사라지기 시작한 멍자국 위로 다시금 압박히 가해졌다. 이번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베르길리우스는 아프다 못해 위험한 소리가 나는 등을 압박하던 힘을 아주 조금 약하게 해주었다. 한쪽 무릎은 단테의 위에, 한쪽은 바닥에 붙히고 손을 뻗어 단테의 상체 근처에 눌러붙인 채였다. 바닥을 향해 머리칼이 수직으로 흩날렸다. 목을 조르지 않는 반대 손은 단테의 손목을 잡아 바닥에 짓눌렀다. 베르길리우스는 잠깐 고민했다. 이대로 손목을 부러트러버릴까. 서슴없이 그에게 내밀었던 이 역겨운 손을 다시는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릴까.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단테가 손가락을 세워 바닥을 밀어보다 헛된 움직임을 깨달았는지 두어번 몸에 힘을 주다 늘어졌다. 느리게 틱틱 울리는 시계소리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제껏 단테에게 들려준 목소리 중 가장 다정하다 여겨질 음조였다. 되려 이렇게까지 화가 나니 오히려 즐거운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스스로 느끼기에 놀라울 정도였다. 베르길리우스는 바르작거리다가도 힘에 부쳐 몇번이고 몸을 들썩이는 단테를 내려보았다. 아, 이 연약한 유다 이스가리옷을 보라. 그러나 그는 예수가 아닌 자신을 팔아넘겼다. 은전 4냥을 내어주지 않아도 말이다. 그러니 베르길리우스는 부러 아닌 것을 알면서도 읊조렸다. 당신이 원한 것 아닙니까?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을 텐데. 피학 취미라도 있는지. 되려 좋은 일을 해주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지는 군요.”
째깍째깍, 하고 부정하는 듯한 시계소리가 울렸다. 베르길리우스가 다시금 세게 무릎에 체중을 실었다가 단테가 손으로 바닥을 두드리며 고통을 표현하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야 무릎을 내렸다. 목을 조르던 손을 내려 거칠게 셔츠를 잡고 위로 올렸다. 속옷 아래로 십자모양으로 난 흉터가 선명하게 보였다. 몸이 어찌 약한지 벌써 무릎으로 짓이겨진 자리에 시퍼렇게 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베르길리우스가 등을 훤히 들어내자 몸을 옆으로 굴려 그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단테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말로 하지 그래. 할 줄 알잖습니까? 아니면 내가 그것도 모를 만큼 바보처럼 보였나?”
당신, 말할 줄 알잖아. 베르길리우스가 말을 덧붙였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지 않는가. 단테는 지금껏 만난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었다. 분명 패드로 말했다기엔 상대방의 대답이 어긋나는 지점이 있었다. 이 시계는 글을 쓰는 것 말고 다른 방식으로 대화할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만… 이 시계가 그를 끌고다니며 만난 사람들은 다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래,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사람들 전부가.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베르길리우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아니. 할 수 없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됐다. 오히려 머리가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악마에게 놀아나는 것도 여기까지다. 그는 손을 누르고 있던 손으로 단테의 등을 짓눌렀다. 목덜미 바로 아래 날개뼈 사이, 거의 뜯어지듯 올라간 셔츠를 고정하고 느리게 숨을 내뱉었다.
“끝까지 말하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군요. 이제 그만합시다.”
이 지독한 악연을 끊을 시간이 되지 않았나. 물론 베르길리우스가 단테를 그의 고아원을 덮친 악마로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바닥에서 바르작 거리는 건 단테가 아닌 그가 될 터였다.
물론 단순히 놀이나 취미로, 그를 조롱하기 위해 이런 상황까지 설계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극히 드물었다. 그야 그가 붙잡고 있을 수만 있다면, 어떤 악마든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게 신이 내려준 성흔의 의미였다. 끝없이 피눈물을 흘리며 가시관을 지고 갈지라도, 단 한 순간도 멈출 수 없고 멈춰서도 안 되는 성자의 망토….
그래, 그만 하는 게 맞았다. 이 악마를 구마한 뒤에 라피스와… 라피스를….
내가 너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
베르길리우스가 무의식적으로 단테의 등을 더 세게 눌렀다. 단테는 이제 질식하지 않아도 사람은 기절할 수 있구나, 라는 사실을 체득하기 바로 직전이었다. 영원히 이러고 있을 것 같던 베르길리우스가 상체를 숙였다. 조금 더 가까워졌다. 그의 숨소리와…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다정한 목소리. 왜 이럴 떄일까? 왜 이 상황에서야… 자신에게 주는 것이 그저 허물일 뿐이라는 걸 알았다. 진정 그가 고아원의 있던 아이들과 제 사무소에 있는 이들에게 주는 다정에 비하면 오히려 모욕적이게 느껴질듯한 이 미소가.
하지만 이런 적선이라도 받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 아니던가. 단테는 이 답을 이미 들은 것 같았다. 그래, 자신은 사람이 아니지. 악마니까… 이 지긋지긋한 생 속에 낳음 당한 것을 슬퍼하는 것이 인간 하나겠는가? 자신이라고 악마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다! 자아를 얻고 싶어서 가진 게 아니다. 애당초 사람의 아들이 그들을 내쫒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에게 이름을 붙여 정의했을 때! 그 때 단테는 태어나고야 말았다.
그리고 불운하게도 필멸의 생을 궁금해한 죄로, 지옥같은 영생을 살고 있지 않은가.
지익, 하고 살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단테가 작열통에 몸을 떨었다. 아파, 아파. 산채로 인두를 가져다 대는 느낌이었으나 열기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 겨우 아문 십자가의 상처 위로 다시금 그의 피가 떨어졌다. 느리게 주기도문을 외우는 소리와 같이 손으로 십자가를 그린다.
아프다. 뇌가 녹아버릴 것 같이 고통스러웠다. 구마의 원리는 퍽 간단했다. 그 몸을 떠나고 싶을 정도로 악마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이름을 묻는 것도, 성수를 뿌리는 것도 전부 고통을 주기 위한 단계에 불과했다. 제대로 성직자의 손이 닿거나 성수를 뿌리면 화상에 입은 것 처럼 아프구나. 단테는 차라리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 이래서 다들 나가는 건가. 언뜻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글지글 소리가 나다못해 식은땀으로 옷이 축축해졌다. 바닥을 긁던 장갑은 헛도는 게 계속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인가. 벗고 있었다면 손톱 한 두개 꺾이는 건 일도 아니겠다 싶었다.
정신이 흐려지는 와중 기도문을 외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라리 정말 불로 지지는 화상이라면 피부가 지져지다 못해 검게 물든 순간 조금이라도 덜 아플텐데. 영적 상흔은 결국 정신적 통증과 같은 말이었다. 단테는 나직한 목소리를 들으며, 기어이 참다 못해 두어번 상체를 비틀다 기절했다.
베르길리우스는 움직임을 멈춘 단테를 가만 바라보았다. 심하게 버둥거리더니 주기도문을 다 외우고 성모송으로 넘어갈 즈음 실이 뚝 끊어진 것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어느새 멎은 엄지 손가락의 상처를 눌렀다. 이로 짓이긴 탓에 다시금 피가 스멀스멀 배어나왔다.
단테의 등은 처참할 지경이었다. 사실, 정말 구마를 한다고 해서 사람의 몸이 화상을 입는다던가 하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영적인 힘이지 정말 달군 인두로 지지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렇지만 이 단테의 경우는 달랐다. 따지자면 200년 전에 죽은 아이의 몸을 지금껏 살려내 거죽을 쓰고 있는 거니까. 반쯤은 단테의 능력-즉 절반 정도는 단테의 진정한 육신이라고 봐도 옳았다.
그렇다면 이 신체를 죽이는 것으로 구마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의문도 자연스럽게 생길테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악마는 죽지 않는 존재다. 또한 단테의 능력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 몸을 직접 불에 태워도 상하지 않을테지. 그가 남긴 상처가 남는다는 건, 그 이외의 방법으로는 몸이 상하지 않는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베르길리우스는 우둘투둘하다 못해 검게 변한 단테의 피부를 바라보았다. 화상 자국처럼 깊고 까맣게 죽어버린 살이 십자 모양으로 선명했다. 그가 남긴 상처를 가만 들여보고 있노라면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분노 대신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찬찬히, 살아오며 담아온 마음의 병 속에는 까맣게 감정이 깔려 있었다. 이 병은 계속계속 차오르기만 해서 도무지 어쩔 수 없는 날에는 범람하곤 했다.
그렇지만 그의 병은 단 한번도 쏱아진 적 없었다. 물이 한방울 더 떨어진다면 그 한방울만. 한 웅큼 쏱아진다면 한 웅큼만 흘렀다. 흘려내지 못한 감정이 꾹꾹 눌러담겨 이제는 병이 쏱아지지 않도록 지탱했다. 이제껏 베르길리우스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병이 쏱아지는 상황을 그가 감당할 수 없을 게 분명했으니, 이렇게 쌓여 죽는다고 할지라도 상관 없었다. 오히려 그게 나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알았다. 정작 병이 쏱아져야 하는 상황에서 쓰러지지 않는다는 건, 그의 생각보다 더 괴로운 일이었다. 화가 나는 데 그걸 어떻게 해소해야할지 몰라서, 원망과 분노가 꼬꾸라져 결국 그에게 향했다.
그만하자. 단테에게 내뱉은 그 말은 결국 그 자신에게 하는 것과 같았다.
전부 그만해버리자. 이 악마를 없애고, 사무실을 정리한 뒤에… 정당한 죄값을 받자고. 그가 그토록 찾아 해매던 라피스가, 그의 심판자가 나타났으니 말이다.
세상에 종말이 오는 날에는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불어 각각의 재앙이 지면에 떨어지고, 네명의 기수가 말을 타고 내려와 사람들을 불사른다고 했다. 그 때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은 구원자가 아니라 심판자이며, 천국과 지옥만이 남아 종말의 날 회개한들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리라.
베르길리우스의 종말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지척에 가까워진 불길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염원하고, 진정 바라던……
“베르.”
지옥.
“단테를 놔 줘.”
헉, 단테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그를 누르던 힘은 사라진 뒤였다. 눈도 없지만 시야가 자꾸만 까맣게 흐려졌다. 어딘지 알기 위해 팔을 휘젓다가 딱, 하고 나무 다리 같은 곳에 세게 부딪혔다. 으악, 속으로 비명을 뱉으며 아려오기 시작한 팔을 품으로 끌어왔다. 깜빡하고 불을 키고 끄는 것처럼 일렁이는 시야 사이에 멀쩡히 달려있는 팔이 보였다. 다행이다. 아직 죽지는 않았구나. 그런 안도감이 잠시, 흐트러진 와이셔츠와 장갑 사이에 비친 손목이 무서울 정도로 시퍼렇게 변해있었다.
멍… 일까? 멍이 이렇게 괴사한 것처럼 들어도 되는 건가? 아니, 화상일지도 모른다. 단테는 그의 등 뒤에서 느껴지던 통증을 기억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이었다. 숨도 쉬지 않았는데 목 안쪽이 턱 걸리는 기분이었다. 두려움이 턱 끝까지 차올라 금방 터져나갈 것처럼 울렁거렸다.
시야가 점멸한 순간 단테는 죽음을 직감했다. 끔찍하게 아파서가 아니다, 단테가 제 육신에 대해 통제권을 잃는 그 순간. 그에게 저항할 수 없을 때. 베르길리우스가 원한다면 그는 쫒겨날 수 있었다. 그가 가진 성흔에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성흔도 안 썼는데 그렇게 아팠던 건가. 단테는 서서히 몸을 떨었다. 아픈 건 싫다. 죽는 것도 싫다. 하지만 다시 그 고통을 겪자니 그냥 놓아버리는 게 나을지도 몰라.
왜 살려뒀을까? 그를 두고두고 고문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그런 가정을 하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죽 떨어지는 것 같았다. 떨군 고개가 들리질 않았다. 서서히 시야는 안정되고 있었는데 몸은 여전히 흔들렸다.
고통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단테가 손을 가볍게 쥐었다. 악, 하며 팔을 떨구지도 못하고 허공에 흔들었다. 욱신거리다 못해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통증. 자꾸만 시계가 헛돌았다. 온 몸, 적어도 등과 목… 손은 치료를 받아야할 것 같았는데. 이 상처는 그냥 다친 것도 아니라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영적, 그러니까 영혼이 다친 거니 보통 사람보다 배는 느린 속도로 나을지도 모른다. 아니, 낫기는 할까? 나을 동안 그가 살아있을 수는 있을까?
그런 공상과 불안이 그를 잠식해 도무지 움직이지 못할 무렵, 단테는 시야에 나타난 여린 손을 보았다. 보통 사람보다 창백하고 흰 그 손. 마디마디가 얇고 손톱은 곧게 자라서… 아, 슬슬 잘라줘야겠네. 옅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째서 아직 살아있는 지 알 수 있었으므로. 단테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카론이 그의 옆에서 가만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단테는 걱정스럽게 제 손을 붙잡은 아이를 보았다. 그제야 안도감이 훅 치밀어 현실감이 올라왔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같이 미안함이 단테의 마음 한편을 아릿하게 쓸어내렸다. 어떻게든 혼자 해보려고 했는데, 결국 카론을 방패로 쓴 셈이지 않나. 단테가 떨리는 손을 끌어 카론의 손바닥에 글을 적었다.
[괜찮아.]
믿을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제가 생각해도 그리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의 열 두 계약자 중 한사람이라도 옆에 있었다면 당장 아프다고 침대를 구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곁에 있는 건 카론이었고, 그렇기에 단테는 괜찮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래야했고 말이다. 단테는 천천히 고개를 틀어 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 그의 신부를 바라보았다. 나의?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내 것이 아니지. 늘 주의 신부였잖아.
그래, 그래서 문제였다. 정작 얻고 싶은 것은 제 것이 아니다. 원하는 것만은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단테가 손을 뻗어 카론의 어깨를 두어번 토닥였다. 부러 괜찮은 척, 사탕은 조금 있다가 줄게. 같은 말을 적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단테는 침대에 무릎을 걸치고 있다가 그의 말에 아예 앉아 다리를 까딱이는 카론을 지나 바닥에 두 다리를 내려 단단히 지지하고 몸을 세웠다. 지탱한 손이 아려왔지만 고작 그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등을 세운 숭간 끔찍한 고통이 척추를 죽 타고 올랐다. 비틀거리다 못해 그대로 무릎으로 바닥을 찍은 채 쓰러졌다. 쿵 하는 소리를 보니 오늘이야말로 제 몸뚱이가 작살나는 날이겠거니 싶었다.
단테는 틱, 틱틱, 하고 계속 시계가 헛도는 소리를 내며 한참을 그대로 움직이질 못했다. 다시 일어나야 하는데, 그만한 용기가 부족했다. 등 뒤의 카론을 보고서라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할텐데. 단테는 그대로 고개만 들어 벽에 기댄 베르길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아무 미동도 없이 그저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비웃고 있을까? 아니면 여즉 증오스러울까? 화가났다면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좋겠다….
아직도 화가 나 있다면… 그렇다면 꽤 곤란할 것 같았다. 저 멀리서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저 남자의 시선이, 유독 먹잇감을 바라보는 고양잇과 동물을 생각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관리자 님, 그거 아세요? 고양이는 배부르면 심심풀이로 쥐를 잡아 죽인데요. 그래서 예전엔 고양이를 그렇게 많이 길렀다고 해요.
왜 이런 때에 그런 말이 떠오르는 지 모르겠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가 충분히 배부르길 바랐으나 그럴리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두려웠다. 통증이 조금 가라앉고 난 뒤, 단테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끔찍하게 아팠으나 예상해서 그런지 조금은 견딜만 했다. 그는 가장 먼저 대화할 수 있는 물품을 찾았다.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리자 낮게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패드는 저기 탁자에 올려놨습니다.”
기절하기 전, 어쩌면 달큰하게도 들렸던 목소리와는 달리 이전과 다를바 없는 음성이었다. 단테는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주위를 둘러보자 그가 기억하는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패드가 올려져 있었다. 그 옆에 있던 무드등이 살짝 기울어져 있었다. 단테는 다행히 멀쩡한 패드를 집어들었다가 잠시 망설였다. 무슨 말을 해야하지? 무슨 말을 할 수 있지? 그가 몇 번 째깍이는 소리만 내자, 베르길리우스가 몸을 세웠다.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설명할 게 많지 않습니까?”
도무지 말을 알아먹지 못하는 학생을 다그치는 선생 같았다. 단테는 그 말과 같이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베르길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아, 정말로…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카론이랑 같이 있을 걸 그랬다.
단테는 서서히 떨려오는 제 몸을 한 번, 그 공포의 원인인 베르길리우스를 한 번 바라보고선 주먹을 꾹 쥔 다음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해야할 말도, 전해줘야 하는 말도 아주 많았다.
베르길리우스는 결국 그 손을 떼어낼 수 밖에 없었다. 가만히 자신을 내려보는 그 시선을 마주하자 그의 분노는 순식간에 사그라들다 못해 치미는 우울에게 자리를 내어주기까지 했다. 그가 찬찬히 손을 떼어내고 몸을 일으키자, 라피스는 기절해 맥없이 늘어진 단테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손을 뻗어 다 늘어진 와이셔츠를 지나 목에 검지를 눌러붙였다. 두근, 두근하고 열심히 뛰고 있는 맥박을 듣고 있을까. 여전히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불수의근의 움직임을 재고 있을까. 그의 생각이 이어지기 전에 카론이 고개를 들었다.
“죽였어?”
물씬, 치미는 것은 언제나 가시지 않는 비릿한 내음이다. 베르길리우스는 지독한 두통이 그를 찌르는 것을 느끼며 나직히 말을 뱉었다.
“죽이지 않았어.”
죽이지 않았나? 아니, 내가 죽였다. 모든 일은 나로 인해서 일어났다. 머물지 않았다면 살릴 수 있었다. 온정에 기대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러니,
그 아이들은 내가 죽인 것과 다름 없어…….
“무거워.”
베르길리우스는 어느새 일어나 단테의 팔을 붙잡고 당기기 시작한 아이를 바라보았다. 침상에 눕히고 싶은지 힘 껏 팔을 당기고 있었으나 저렇게 끌면 단테의 어깨가 빠지다 못해 탈구될 참이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단테를 붙잡아 들어올리기 전에. 눈을 살짝 크게 뜨고 멈춰섰다.
모든 감정이 가라않고 정신이 돌아오니 그의 뇌리를 찌르는 의문이 있었다. 라피스의 말이 저렇게 적었던가? 그 애가 저렇게 호기심을 숨기지 않고 굴었던가? 이런 행동은 라피스 보다는… 꼭 어린아이 같지 않은가. 베르길리우스가 어떤 염원, 간절한 기원과 같이 입을 열었다.
“라피스?”
그의 시선을 마주한 아이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무 흥미 없이 그를 스쳐지나가다 잠깐 돌아온다. 자신을 호명하는 거냐고 묻듯이. 이내 손을 뻗어 자신을 가리켰다.
“카론. 라피스가 아니라 카론이야.”
카론을 말하는 거야? 베르길리우스는 언젠가 읽었던 단테의 문장을 떠올렸다.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를 아저씨라고 불렀던 그 아이와 이 아이는 다르다. 같은 사람이었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것처럼 굴었다. 기억상실일까? 아니면 이중인격일지도 모른다. 트라우마로 인한 자아분리는 꽤 보편적인 증상이었다. 정확한 병명도 상태도 알 수 없었지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카론은 베르길리우스를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을 잃은 상태로는 그를 심판할 수도 없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의 지척까지 다가왔던 안식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카론, 하고 중얼거렸다. 이내 단테를 손쉽게 들어올려 침상에 눕혔다. 그 뒤로 그가 일어나기 전까지 무거운 침묵이 서로를 감돌았다. 잠시 그를 흘려보던 카론이 침대에 앉은 뒤 다리를 달랑거렸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때를 놓친 캐롤이 맑은 목소리와 같이 흘러나왔다. 베르길리우스는 수직하락하는 정신력을 느끼며 그 노래가 몇번이고 되풀이 되는 것을 들었다. 어쩌면, 그날 들었을지도 모르는 찬송이라고 생각하니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으나, 그의 종결이 아직도 아니라는 사실에 내심 절망했던 것 같다.
단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퍼특 움직이며 깨어났다. 베르길리우스는 공황에 빠진 듯 심하게 떨며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시계를 보았다. 카론이 다가가 손을 붙잡기 전까지 어느 진창에 빠진 것처럼 연신 허우적거렸다. 베르길리우스는 새삼스러운 반응에 눈을 살짝 좁혔다. 사실 그가 악마를 구마한 것은 이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나 정작 구마한 뒤의 악마가 어떻게 되는 지는 알 지 못했다. 단지 죽지는 않았구나 생각할 뿐이었으며 궁금하지도 않았다. 차피 다시 돌아다니며 새로운 희생양을 찾아 떠도는 악한 것들이라고만 생각했다.
악한 것이라. 베르길리우스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않는 단테를 보고 무의식적으로 움직인 오른 손을 내려보았다. 방금, 부축해주려고 한 건가? 가서 상태를 확인하고 일으켜주려고? 정작 그를 해친 것은 자신이 아닌가. 그는 제 감정에 불쾌감을 느꼈다. 대체 뭐라고 저 떨리는 몸을 일으키고 달래주고 싶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다시는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그는 이중적인 감정에 가볍게 눈을 감았다.
단테는 몇 분 지나지 않아 몸을 일으켰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뒷편에서 단테를 가만 바라보는 카론을 보았다. 한 번 일깨운 뒤로는 부축도, 도움도 없이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는 카론이 그가 아는 라피스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물신 차오르는 그리움과 죄책감을 느꼈다. 그 아이가 할 행동이었기에, 금방이라도 다시 라피스하고 부르고 싶은 마음이 일렁였다. 아저씨, 하고 대답이 돌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베르길리우스는 스스로 느끼기에도 나약한 마음에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단테는 그의 말에 단단히 다짐한 듯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기에 베르길리우스는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로 카론이 따라왔는데, 맨발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오르페우스가 된 기분이 들었다. 지하세계에서 자신의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서 절대로 뒤를 돌아보면 안되는 그 신화 말이다.
하지만 그건 비극이었다. 결국 돌아볼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으므로. 단테는 방을 나와 복도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장 깊숙한 방으로 그를 인도했다. 숨기고 싶은 물건일 수록 가까이, 오히려 드러내라는 말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저도 단테도 그러지 못하는 족속인가 보다. 손 안에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디질 못했다.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면 예민하게 굴고 만다. 베르길리우스는 열쇠를 꺼내 잠긴 문을 여는 단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셔츠가 닿지 않으려는 듯 등은 구부정하게 휘었고 그의 손목이 닿은 뒷목은 벌써부터 보라색 멍이 들었다. 꾹 누르기만 해도 물 밖에 나온 고기처럼 퍼덕이겠지. 베르길리우스는 손을 올리려다 말았다. 카론이 바로 뒤에 있었다.
달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렀다. 단테는 먼저 몸을 이끌고 방의 불을 켰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흰 커튼으로 창을 가린 커튼 옆에 놓인 둥근 전신거울이었다. 살짝 기울어진 그 거울은 방의 풍경을 비추고 있었다. 시선을 돌리면 바로 옆에는 고풍스러운 탁자가 있었다. 그 위에 서류가 쌓여있었고 잘 보니 편지도 꽤 많았다. 어질러진 티는 전혀 나지 않았는데 잘 보면 어딜 봐도 각이 잡혀있었다. 베르길리우스의 사무실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을테지만 분위기는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거울의 옆에는 폭신해보이는 의자와 담요, 알 수 없는 기계들이 널려있었다. 머리에 쓰는 것 같은데 여러 코드가 널려있었으며, 그 옆에는 분명히 실험일지 같은 게 남아있었다. 정결한 사무실과 미친 과학자의 실험실이 반반 섞인 듯한 괴리감이 있었다. 베르길리우스가 경고하듯 입을 열었다.
“인체실험이라도 한 겁니까?”
그 음성에는 분명하게, 단테의 시계를 금방이라도 구겨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섞여있었다. 단테는 고개를 내저으며 패드를 보였다.
[설마. 그냥 뇌파 측정기야. 의심스러우면 가져가서 확인해봐도 돼.]
베르길리우스는 물끄러미 그 기계를 바라보다 그 근처에 놓인 클립보드를 들었다. 정결하게 적힌 필기체에는 회백질의 유기결합 및 특정 사진과 영상에 따른 뇌파 결과를 분석하고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그 보고서를 읽으며 뒤통수가 멍해지는 충격을 느꼈다. 보고서의 내용 또한 중요했으나 그는 실험자 옆에 쓰인 이름을 읽었다.
파우스트 교수.
“…파우스트?”
베르길리우스의 나직한 물음에 단테가 한숨이라도 내뱉듯 째깍, 소리를 흘렸다.
[당신만 잠입요원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야.]
톡, 하고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베르길리우스는 클립보드를 책상에 올린 뒤 손으로 이마부터 입까지 주욱 쓸어내렸다. 파우스트 수녀가 단테의 사람이라고.
“어떻게 한 겁니까?”
신부보다는 쉬울지라도 수녀가 되는 것도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심지어 베르길리우스의 지척에 머물고, 교구에서 거의 일급 비밀로 간주되는 그의 거처와 목표를 아는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왠만치 수녀로 있던게 아니면 어려운 자리였다. 단테는 가만 패드를 두드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일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어. 부패한 성직자 하나를 돈으로 매수한 뒤에 그녀를 교구에 추천하게 했지. 처음에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더니, 신부를 몇 더 매수해 보증을 서게 하자 금방 뚫렸어.]
돈이라. 베르길리우스는 이름 모를 그 성직자들에게 경멸감을 느꼈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해 신부가 되었으면서 결구 목표는 금전이라니.
[당신처럼, 신실한 신부일 수록 전혀 의심하지 않지. 자신처럼 상대도 깨끗하리라 생각하니까.]
단테는 몇 번 숨을 들이키듯 가슴팍을 들썩였다가 탁상에 놓인 서류 몇 개를 들고왔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서류를 잡으려다 심하게 흔들리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단테가 여전히 떨고 있었다. 그가 이 자리에서 단테를 깔아눕히지 않을 걸 알면서도 공포감을 숨기질 못했다. 베르길리우스는 무어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그냥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든 이젠 쏱아진 물이었다.
[파우스트는 꽤 뛰어난 교수이자 실험자야… 연구 윤리를 집착적으로 지키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게 문제가 아니긴 했다만, 베르길리우스는 고개를 살짝 틀었다. 라피스가 퍽 폭신해보이는 의자에 반쯤 누운 채로 기대 자신과 단테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런 사람이 당신을 돕지?”
교수, 그것도 그렇게 젊은 나이에 높은 성과를 이룬 연구자라면 잠입요원이 되달라는 말에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까? 애당초 돈을 위해서 움직일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베르길리우스의 예상은 언제나 빗나가질 않았다.
[내 계약자니까.]
계약자라. 베르길리우스가 숨을 내쉬었다. 분명 단테는 원하는 것을 주고 받는, 등가교환의 계약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의 계약자만 말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는 그 계약자 안에 여왕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무슨 조건이기에… 아니, 몇이나 있는 겁니까?”
[열 두명.]
열 둘. 아연해지는 숫자였다. 베르길리우스는 짧게 침음했다. 당장 그 계약자 리스트를 내놓으라고 한들 그가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심지어는 교구마저 말이다. 애초에 그 안에 감시원이 숨어있었다니….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상한 계약은 아니야. 강압적이지도 않고, 서로 효력있는 계약서까지 작성했다고.]
단테가 패드를 내밀었다가 여전히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있는 베르길리우스를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문제 있어?
“애초에… 돈도 명예도 충분한 사람들이 뭘 원해서 계약을 한 겁니까?”
사랑? 베르길리우스는 흔히 소설에 등장할 법한 단어를 중얼거렸다. 단테는 그 말을 듣고선 째깍, 하고 짧게 웃는 소리를 냈다.
[설마. 자기 감정도 남의 감정도 억지로 만들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 그들은 내게 영혼을 내어주었고, 나는 그들에게 생이 끝나기 전까지의 불멸을 약속했지.]
불멸과 영생. 지겹도록 반복되는 단어였다. 가진 것이 많을 수록 더 오래 살고 싶어했다. 그래서 베르길리우스는 자주 죽고 싶었다. 품에 넣은 것이 얼마 없어서, 금방이라도 다 털어내고 생을 마감할 수만 있다면….
그의 공상을 끊듯 단테가 크게 째깍 소리를 냈다. 베르길리우스가 미간을 좁히곤 단테를 바라보았다.. 이내 시선을 내리자 그가 내어주던 서류를 아직도 잡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베르길리우스는 구김이 남은 서류를 잡고 가볍게 툭 두드렸다. 단정한 글자가 프린트 되어있는 서류였다. 보고서의 양식이었으나 내용은 상담일지였다. 내담자 이름 옆에 카론, 이라고 적혀있었다. 내용으로는 그가 그렇게 충격 받을 말은 없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아무 생각 없이 종이를 넘겼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베르길리우스는 차마 숨을 내뱉지도 못한 채로 일지를 바라보았다. 눈 한 번 깜박이질 못했다. 서류 맨 상단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면담자, 단테.
내담자, 가넷.
……가넷.
시선만 굴려 제 눈 앞의 시계를 바라본다. 베르길리우스는 어쩐지, 째깍 소리 하나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단테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짙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가 서류를 더 세게 쥐었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 환청 같기도 하고, 그를 꾸짖는 나팔소리 같기도 했다.
베르길리우는 깨달았다. 몽롱한 감각 속 단 한가지 확실한 건, 그 또한 더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뿐이라고….
이 불쌍한 자야.
스스로 모순을 만들어 아무도 걸쳐주지 않은 십자가를 지고 있구나.
이 오만한 자야.
너의 주께서 내려주지 않은 고통을 선택하며 구주를 원망하도다.
이 모순적인 자야.
눈을 뜨지도 않고 맹인 행세를 하니 누가 네 눈을 띄워주겠느냐?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면담기록 1]
면담자: 단테 알리기에리
내담자: 가넷
여는말: 본 상담은 심리치료의 목적이 아닌 서문 형식의 기록에 가깝다. 면담자를 D, 내담자를 G로 칭한다.
[기록 시작]
D: 기록을 시작할게. 녹음기는 키지 않을테니 부담없이 말해도 괜찮아. 먼저 이 기록의 목적을 설명할게. 이 면담은 네 유년시절에 대한 내용을 정확하게 교차검증하기 위한 기록이야. 기억나지 않거나 확실하지 않는 내용도 말해도 괜찮아. 나중에 문서를 보여줄테니 그 때 수정하거나 코멘트를 덧붙여도 좋아.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네가 편하게 이야기해도 된다는 거지. 괜찮니, 가넷?
G: 네, 괜찮아요.
D: 그럼 가장 처음부터 시작해보자. 네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을 알려줄래?
G: 가장 오래된 기억은… 고아원에 있었던 날이었어요. 아마 여섯 살 정도 됐던 것 같아요. 날은 따듯했고 기분이 좋았어요. 방은 따듯했고 주위에는 종이와 크레파스가 널려 있었죠. 저랑 라피스, 다른 아이들이 한 방에 있었고 선생님은 다른 아이들을 챙기러 잠시 자리를 비웠어요. 저는 종이 위에 선을 긋다가 그대로 몸을 굴려 누웠어요. 천장에는 등과 모빌처럼 종이별이 달려 있었어요. 분명 저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 오빠들이 만들었을 거예요. 가만히 별을 바라보다 손가락을 접어 별을 셌어요. 하나, 둘… 다섯까지 셌는데 그 다음의 숫자가 도무지 기억나지 않더라고요.
다섯에서 말이 이어지지 않자, 뻗은 제 손을 쥐어 다시 엄지를 들게했어요. 네, 라피스가… 그리고 ‘여섯’이라고 말했죠. 그 뒤로는 여섯번째까지 셀 수 있었어요. …너무 사담인가 싶은데 기억나는 게 이 장면이어서요. 라피스는 여섯살 때도 고아원에 있었어요. 저도 그랬죠. 나중에 전해들었는데 눈이 오는 어느 겨울에 문고리에 걸려있었다고 했어요. 라피스가 먼저, 저는 두 달쯤 뒤에요.
라피스는 그 문고리에 달려서도 울질 않았데요. 그래서 그 한겨울에 얼어죽었을지도 몰랐다고 했어요. 하필이면 문 앞에도 아니고 문고리에 걸려있었으니까요. 그래도 발견해서 다행이죠. 그 뒤로는 수시로 문을 열어보는 것 뿐만 아니라 문고리도 확인하셨다고 해요. 다행이죠. 저도 거기 걸려있었으니까요.
D: 고아원의 생활을 어땠어?
G: 좋았어요. 원장 선생님은 정말 착하고 다정하신 분이었어요. 늘 사랑으로 저희를 키우셨죠. 저희도 그 사랑에 보답하려고 했어요. 늘 풍족하게 지내진 못했지만 적어도 행복했어요.
D: 라피스도?
G: …그랬을 거예요. 직접 행복하다고 말하진 않았지만 눈을 보면 알 수 있는 걸요. 전에 라피스가 혼자 방을 썼다고 말한 적이 있었잖아요. 딱히 모두가 싫다거나, 혼자 동떨어져 있고 싶어한 건 아니었어요. 따돌림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요. 단지… 라피스는 유독 독립적인 아이라서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했어요. 왜 있잖아요. 예술가들이 집과 작업실을 따로 분리하는 것 처럼요. 라피스도 자기만의 작업실이 필요했던 거겠죠.
D: 화가가 꿈이었다던가?
G: 그건… 모르겠어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책에 그려진 명화를 보는 걸 더 좋아했어요. 따지자면 박물관의 도슨트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을까요.
D: 도슨트라. 그렇지만 지금은 박물관에 가자는 이야기는 안 하던 걸.
G: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처음에 제게 연락하셨을 때, 라피스의 이름을 보고 기쁘고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웠어요. 남은 목숨을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고아원의 다른 생존자를 찾고 있긴 했지만 정작 마주하자니 제 존재가, 이 만남이 그날의 끔찍한 기억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실제로 다른 사람들을 찾았지만 연락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 편지가… 제게 용기를 줬어요.
D: 내가 배려가 없긴 했네. 음, 그렇지만 결국 라피스는 기억을 잃었지.
G: 괜찮아요. 언제까지 피할 순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라피스를 마주하기로 한 순간에, 정작 그 애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안 뒤에도. 어쩌면 안심했던 것 같아요. 끔찍한 일이었으니까요. 차라리 기억하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D: 확실히 카론은 옛 기억을 찾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보여.
G: 그 모습이 카론과 라피스를 정말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다른 자아라고 보기엔 어렵다고 저번에 말씀하셨죠. 하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요? 정말 다른 사람처럼, 새 인생을 살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저도 이제 어른이니까요. 라피스와 함께했던 옛 추억은 저 혼자만 간직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조금은 아쉽지만, 나중에라도 카론이 궁금하다고 하면 말해줄 수 있는 걸요.
라피스가 카론으로 새 인생을 살아간다면, 저도 카론과 새 인연을 만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해요. 아마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겠죠. 모두가 그 참사에서 머물러있지 않고 새 삶을 살아가고 있더라고요. 사실… 그래서 자주 만나지 않으려고 해요. 아무리 그립고 기뻐도 만나면 생각날 수 밖에 없거든요.
D: …그를 만나고 싶지는 않아?
G: 아저씨요? 당연히 보고 싶죠. 한 번 정도는 만나고 싶어요. 그래도… 기다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원하지 않는데 먼저 찾아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 누구보다… 그 참사를 잊고 싶으실 테니까요.
[기록종료]
[면담기록 07]
면담자: 단테 알리기에리
내담자: 카론
여는 말: 면담자를 D, 내담자를 C로 칭한다.
[기록시작]
D: 안녕, 카론. 오늘 기분은 어때?
C: 나쁘지 않아.
D: 그거 다행이네. 오늘도 비슷한 질문이라 네 기분이 좋기를 바랐거든.
C: …흥.
D: 절차적인 거라 어쩔 수 없어. 사탕 대신 마들렌 줄게. 싱클레어가 구워온 게 있거든. 기억하지? 저번에 만났잖아. 머리가 복실복실하고 노란.
C: 병아리 승객.
D: 정답. 나는 먹을 순 없어도 분명 맛있을 거야. 사탕은 자주 입이 까지잖아.
C: 카론은 사탕이 더 좋습니다.
D: 하나는 줄게. 대신 마들렌은 우유랑 같이 먹어야 해. 좋아. 교섭 성공이다. 그럼 물어볼게.
카론, 네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 뭐야?
C: 시계를 만났을 때.
D: 나랑 만났을 때 말이지? 그 이전에 대한 기억은 없는 거야?
C: 카론은… 눈을 감고 있었어. 떠도 아무것도 안 보였으니까. 몸이 둥실둥실 떠다녔고 포근해서 아무것도 안 들렸어. 그대로 있었더니 어느 순간 발이 따가웠다. 눈을 떴더니 시계가 있었습니다.
D: 둥실둥실 말이지. 누군가 옆에 있었다던가 너를 붙잡는 압박 같은 게 느껴지진 않았어?
C: 전혀. 저번에 단테가 가져온 물침대처럼 푹신푹신 했습니다.
D: 같이 가져왔던 양털 모피랑은 느낌이 달라?
C: 전혀. 포근했지만 복실복실하지 않았어.
D: 그런가.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볼게. 카론.
누군가 너를 라피스라고 부르면 기분이 어때?
C: ……카론은 카론이야.
[면담종료]
[레테 강 알아?]
겨우 서류에서 고개를 떼어낸 베르길리우스의 앞에 다시금 단테의 패드가 보였다. 그는 이 상담뭉치를 손에 쥐고 있어야 하는지, 그가 진정 다 읽어야 하는지 가늠하는 참이었다. 단 두개의 일지를 읽었는데도 머리가 지독하게 아팠다.
그래, 알고 있었다.
실은 그 참사에서 모두가 죽지는 않았다는 것을.
분명 몇은 살아남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걸 알았다. 원한다면 충분히 만나러갈 수도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 있었다. 총리와 일반인을 저울에 두면 당연히 일반인 쪽이 조사하기 더 쉽지 않겠는가. 맨 처음 사무소를 꾸렸을 때도 한 번 들은적 있는 질문이었다.
대표, 살아있는 아이들은 조사 안해도 괜찮겠어요?
그건 단순한 그리움이라던가, 그의 통제벽에 대해 묻는 말이 아니었다. 희생양을 그대로 두어도 되냐는 물음이었다. 무슨 의도였고 어떤 목적이었든 확실한 건 그 사건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새로운 사건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 한 번 노려진 목숨이 두 번 노려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베르길리우스는 묵인하기로 했다. 그 아이들의 새로운 삶과 나아갈 삶을 전혀 바라보지 않은 채로 그의 길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다.
그게 자신의 흐름이라고 믿었다.
그러니 이제와 이런 서류뭉치를 들이밀어봐야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미 모두 그가 포기한 것이다. 그가 내버린 것이다. 베르길리우스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패드를 지나쳐 단테를 바라보았다. 그 시계는 되물음은 커녕 그의 반응을 뭐라고 판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별다른 손짓 없이 다시 패드를 두드렸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망각의 강. 한 모금이라도 입에 대버리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강물 말이야.]
알고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는 메이져한 편이고 철학적이라고 할까, 옛 희곡들은 신화를 재해석해 노래한 것이 주였다.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로, 신화에 문회한인 사람도 첫 구절만큼은 알고 있을 것이다.
노래하소서 무사이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그 강 말이야. 실제로 있어.]
째깍, 가볍게 시계가 감겨드는 소리가 났다. 베르길리우스가 눈을 감았다 떴다. 그저 이야기라고 여겨지는 그 신화가. 강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물론 죽은 영웅들이 가는 천국 엘리시움이라던가, 죽음의 신 하데스가 실존한다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그 많은 신화에 나오는 강 중에 레테는 있어. 망각만큼은 모든 피조물에게 주어저야 하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당신 말은… 지금 라피스가.”
[카론.]
베르길리우스가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이내 손으로 얼굴을 덮어 쓸어내린 뒤 입을 열었다.
“그래. 카론. 그 애가 지금 레테를 마셨다는 겁니까?”
신화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베르길리우스는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나, 눈 앞에는 악마가 있고 자신이 그런 악마를 내쫒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별 말 없이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는 강 안에 있었던 것 같지만 효과는 비슷하겠지. 한 모금으로 이름을 잊고, 두 모금으로 과거를 잊지. 세 모금으로 모든 걸 잊어.]
모든 것을. 단테가 강조하듯 패드를 내보이다 고개를 살짝 틀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정말 그만하라는 듯이. 무엇을? 무엇을 그만하란 말인가.
[당신이 아는 라피스는, 이제 죽은 것과 다름이 없어.]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는데…….
베르길리우스는 몸을 틀어 안락의자에 앉아있는 카론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졸린지 등을 의자에 기댄 채로 나른한 듯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다리를 흔드는 모습에 지독한 향수를 느꼈다. 언뜻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침대에 누워 발을 내놓고 흔들며 책을 읽던 라피스가. 그러나 저 아이는 카론이고, 다시는 라피스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어느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단테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내버려둘 뿐이었다.
차분히 다음 말을 패드에 적었다. 방금 전이 해야할 말이었다면, 단테는 반드시 베르길리우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기어이 흐릿하던 카론의 시선이 감기고 그녀가 색색 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고 난 뒤에야 고개를 돌렸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아니, 머리로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그는 이 기묘한 감정과 충동에 스스로도 정리하지 못한 채로 제 머리를 뒤져보려고 했다. 왜 라피스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그렇게도 찾으려고 했을까.
당연하지 않나. 소재 파악이 안 되는 생존자는 라피스 그 아이 하나 뿐이었다. 그것도 악마의 손에 끌려갔으니… 반드시 찾아야 했다.
째깍. 상념을 깨부수듯 시계소리가 울렸다. 베르길리우스가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비겁해.]
뭐?
[당신을 만나면 꼭 하고 싶었던 말이야. 비겁하게 숨어있지 말라고, 아이들을 핑계거리로 만들지 말라고.]
“당신이…….”
뭐라고. 베르길리우스는 그 말을 마치기도 전에 울렁이는 감각을 느꼈다. 고개를 들고 나서야 알았다. 단테는 다시 그에게 자신의 심상을 보여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패드에 내보였던 그 때와는 달랐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한 없이 넓은 것 같기도 했고 한 없이 좁은 것 같기도 했다. 베르길리우스가 카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순간, 거울이 부서지듯 수많은 상이 쪼개졌다. 베르길리우스가 고개를 들었다. 단테가 차분히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거울던전에 온 걸 환영해. 베르길리우스.]
이곳에 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베르길리우스는 수십가지로 조각나던 상이 어느순간 사라진 것을 보았다. 거울처럼 그를 비추던 수많은 자신… 이내 그의 앞에는 거대한 문 하나가 나타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전히 단테는 그의 옆에 서 있었고, 주위를 둘러보자 전체적으로 붉고 어두운 공간이었다.
그들이 서있는 길 밖에는 불꽃이 간헐적으로 타올랐으며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도 너울거리며 흔들렸다. 언뜻 노란 색으로 보이다가 점차 깊어질 수록 붉어지는 불. 베르길리우는 가만 길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저 시계 위에 있는 불도 이렇게 흔들리곤 했다.
[조심해. 닿으면 화상 입으니까.]
“날 어디로 데려온 겁니까?”
[말했잖아? 거울던전이라고.]
베르길리우스는 전혀 설명되지 않았다는 얼굴로 단테를 가만 바라보았다. 그 표정을 바라보던 단테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딱 사람 하나가 지나갈 수 있는 길만이 불에 타지 않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틱, 하는 음이 몇 번 울리나 싶더니 그 문 앞에서야 걸음을 멈췄다. 차분히 그 뒤를 걷던 베르길리우스는 거리가 가까워질 수록 그가 생각한 것보다 그 배는 큰 문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봤을 때는 겨우 3m 되어보일까 하던 그 문은 정작 서고 나니 고개를 들어봐도 그 끝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거대한 문에는 양각으로 새겨진 수많은 사람의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언뜻 보면 비명을 지르는 것 같기도 했고, 무척 괴로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라고 말했지만 문에 새겨진 조각에는 온전한 사람의 형체가 매우 드물었다. 대부분 손과 발, 잘해봐야 상체만 나와있을 뿐이다. 꼭 이 안으로 들어가면 저 조각들 처럼 필사적으로 도망치게 될 것이라는 것처럼. 베르길리우스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기분 나쁜 문이었다.
“던전이라니… 적이라도 나오는 겁니까.”
실제로 던전의 유래는 성의 가장 높은 곳을 뜻하는 단어에서 비롯되었으나. 중세에는 성탑의 높은 곳을 감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의미가 강조되어 현대에는 보편적으로 지하감옥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21세기에서 던전이라고 말하면 그 누구라도 게임이나 소설에서 쓰는 단어를 떠올리고 만다. 적들이 잔뜩 몰려있고 보스를 잡으면 보상을 받는 던전 말이다. 단테 또한 그 의미로 사용한 말인지 가볍게 패드를 두드려 베르길리우스에게 내밀었다.
[원래는 그래. 그렇지만 이건 당신이 아니라 내 심상으로 만들어낸 던전이야. 목표가 명확하니까 공간도 안정되어 있지.]
“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곳이군요….”
비일상의 극치가 아닌가. 약간은 착잡한 마음으로 눈을 흘기자 단테가 고개를 기울였다.
[사람들한테 있어선 당신 존재도 판타지인데 뭐. 기억을 보여주기 가장 편해서 끌어들인 거야. 하나만 조심하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단 하나? 베르길리우스가 눈을 깜박였다. 단테는 패드를 돌려 보여주며 한 손으로 그 문에 손을 가져다댔다. 거대하고 육중한 문은 단테의 손길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글을 읽었다.
[절대로 당신 이름을 말해주면 안 돼.]
누구에게? 물었으나 대답은 없었다.
문이 열리며 나는 금속음이 꼭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베르길리우스는 딱 사람 둘 정도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열린 문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느리게 열리던 육중한 문은 두사람이 온전히 몸을 뺴고 나서야 쿵 소리를 내며 닫혀버렸다. 느리게 열린 것과는 다르게 빠른 움직임이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고개를 들었다. 내부는 붉었으며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피가 떠오르는 공간은 아니였다. 따지자면 불꽃 같았고, 더 깊게 바라보니 창성 같기도 했다.
그래, 별 말이다. 따지자면 은하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흔히 보는 사진처럼 반짝이지는 않았으나 느리게 바닥이 움직이며 수없이 많은 창조와 소멸이 일어났다. 삶과 죽음이 무연하고 존재의 의미가 흐려지는 공간… 베르길리우스가 고개를 돌렸다. 단테는 그 은하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걸어나갔다.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고 위와 아래가 그저 발 딛고 있는 것과 아닌 것으로 구별할 수 밖에 없는 공간. 베르길리우스는 순간 미로에 같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단테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어디로 가야할 지도,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도 알 수 없을테다.
그런 불안을 알고는 있는 걸까 단테는 길이라도 아는 것처럼 망설임 없이 걸어가더니 갑자기 멈춰서 손을 두어번 흔들었다. 그러자 그가 처음 이 심상에 불러와졌던 것처럼 눈 앞에서 상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부서진 거울이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 거울은 이 은하를 한 번 비추더니 서서히 부피를 키워가며 새로운 장면을 보이기 시작했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의 손이 거울에 닫기 전에, 그 부서진 창에서 사막을 보았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죽음이라는 건 이렇게 외로운 거구나.
“너는 말이야, 꼭 신화에서 나오는 사람 같단 말이지.”
생각해보면, 그 시대는 상당히 이상해서 나 같은 사람도 끼어있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프랑스에서 단두대가 바쁘게 일하고 있던 그 무렵 말이다. 시대는 급변하는 만큼 약간의 비일상을 허용할 수 있게 만들어서. 그래서 이 평화로운 21세기에서 살았다면 금방이라도 이질감을 느꼈을 행동도 그냥 특이하다, 라고 여겨졌던 것이겠지. 단테는 그에게 멋진 시계머리 의체를 달아줬던 친구의 말을 기억했다. 분명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따지자면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호메로스나 소포클레스 같은….
[비극이잖아.]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거지.”
[대체 어디가? 소포클레스의 작품은 오이디푸스 왕이나 안티고네 같은 거잖아.]
“자, 자. 너무 토라지지 말고. 너는 정말로 틱틱댄다니까.”
그야 시계니까 그렇지. 단테는 굳이 그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곰곰히 내용을 떠올렸다. 그리스 비극은 꽤 많이 읽었고, 그 시대에는 연극도 자주 이뤄졌으니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도, 소포클레스의 모든 비극도 결국 근원적인 주제와 내용은 비슷했다.
[…반드시 이뤄지는 예언.]
“바로 그거지.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유쾌한 인생이든 불유쾌한 인생이든 결국 재각각 신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나. 결국 비극에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조건이 있지.”
단테는 문득 생각하고 만다. 이 발명가는 늘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반드시 정해진 운명에 저항한다는 거야.”
그 말을 딱히 부정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즐거운 시간은 지나치게 빠르게 흘러갔다. 수세기를, 애초에 예수 탄생 이전에도 살아가던 단테에게 있어서 100년이라는 시간은 눈 깜작할 새도 없이 흘러갔다.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들이 가득해 만족스러운 삶과 시간이었지만, 사람과 같이 어느새 자신에게도 욕심이 생겨 조금 더, 이 시간과 시대를 누리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람의 몸은 썩어 죽기 마련이지만 내심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늙음을 연기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친구의 노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단테는 차마 욕심을 부릴 수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왔다.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며 스스로의 끝을 마주보고 있었다. 단테는 알 수 있었다. 그에게는 죽음이 가까워졌고, 금방이라도 그 영혼은 신의 부름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정말로 후회하는 것은…
단테는 어느 깊은 밤에, 그의 손을 잡고 조용히 속삭였다. 네가 죽지 않으면 좋겠어. 그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고 할지라도, 내가 네게 영원을…
영생을…….
그러나 말은 소리가 되지 않아, 옅게 틱톡이는 소리만 울렸을 뿐이었다. 그의 매끄러운 손 위로 주름 진 친우의 손이 올라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가볍게 토닥였다. 단테는 차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조금 더 일찍, 사고로 다쳐 죽음에 가까워졌다면 단테는 모든 것을 말한 뒤 그와 계약을 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을 보라.
이 노인을 보라. 자신의 삶에 만족해 마땅히 삶의 종결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단테는 내심 그런 마음을 품은 자신에게 수치심을 느끼면서 그를 고귀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의 마지막만큼은 볼 수가 없었다. 그 죽음 앞에서 슬픔 대신 안타까워하는 자신이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 밤을 마지막으로 도망치듯 도시를 떠났다. 나중에야 그가 유언으로 자신에 대한 처우를 맡겼다는 걸 알았다.
다시금 사람을 떠나 광야를 떠돌던 시간. 단테는 그제야 자신이 외롭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본디 사람의 육신을 얻고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지 않았으면 몰랐던 즐거움이 어느새 그를 물들여 늘상 머물렀던 이 광야가 몹시 밉게 느껴졌다. 이곳에서는 사람도 없고 모랫바람만이 휘날려 그가 아꼈던 붉은 코트를 금방 헤지게 만들었다. 단테는 수없이 많은 자신의 동포들, 즉 악마들이 광야를 떠돌며 그를 별종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어떡하랴, 그는 이미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으며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그저 구두코로 모래를 툭툭 치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뿐이었다. 광야의 하늘은 맑았고 늘 별이 반짝였다. 이대로 종말의 날까지 기다리기에는, 단테는 정말로 외로웠다. 눈을 감았다 뜨면 그리운 꿈을 꿨고, 그런 날에는 지독히 기분이 나빴다. 인간과 같이 태어난 우리 악한 것들도 주의 자식이 아닌가. 이리 괴롭다면 차라리 지옥에 가는 편이 낫겠다. 그곳에는 불과 비명이 있어 지금보다야 괜찮겠지 하는 생각으로 걸음을 옮길 무렵. 단테는 그의 앞에서 새차게 부는 모래폭풍을 마주했다.
그것이야말로 신의 선물이었으며, 이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음을 단테는 알았다. 그러나 진실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하니.
내가 어떻게 그 운명을 거절하겠느냐고….
장면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다시금 나타난 붉은 성운에 눈을 깜박였다. 단테의 시점에서 보는 사건은 그에게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지만, 그가 완전히 단테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따지자면 단테의 뒤에 세걸음 물러선 상태로 그저 주시할 수 밖에 없다고 해야할까. 그의 속마음이나 감정이 전부 되새겨지는 느낌이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으나, 어찌되었든 이해는 됐다. 단테의 의도가 정말 이 장면을 보여주기 위함인지, 아니면 그의 감정까지 다 전해지도록 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베르길리우스가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곤 입을 열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있는 겁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속이 울렁거렸다. 억지로 이끌어진 외로움은 그에게 있어서는 색달랐으나, 별로 좋은 의미는 아니었으니 더욱. 그의 말을 들은 단테가 반대손을 올리려다 몸을 틀어 패드를 두드렸다.
[두 번? 아마도.]
당신이 얌전히 있는다면 말이야. 베르길리우스는 그 뒤에 덧붙인 말을 듣지 않기로 했다. 그가 다시금 입을 다물자, 단테는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다른 방향에서 거울이 나타났다. 흐릿하게 보이는 공간 속에서, 베르길리우스는 찰칵, 하고 울리는 사슬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단테에, 바나나 껍질 어디에 둬?”
<그냥 탁자에 올려놔!>
으응, 하고 대답하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영화 소리가 들려왔다. 두두두, 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또 총격전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15금 이상은 피하라니까. 단테는 매번 해봤자 듣지도 않는 잔소리를 살짝 미뤄두기로 했다. 요즘 어째 한숨이 자꾸 느는 것 같단 말이지. 입도 없는데.
“단테. 냉장고에 감자가 안 보이오만.”
<싹나서 버렸는데.>
“그렇담 고구마도…”
<그건 정원에다 심었어. 잘 하면 무럭무럭 자라지 않을까?>
단테는 그러한가… 하는 소리를 뒤로 하고 현관으로 향하는 이상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아마 확인하러 가면서 온갖 화분을 둘러볼테지. 어째 자기 연구실이나 집에는 안 두고 여기다 자꾸 식물이나 꽃을 가져온단 말이지. 단테는 슬슬 집을 주욱 둘러싼 화분들을 생각하며 가볍게 째깍 소리를 냈다. 어쨌든 카론이 좋아하니 된 거 아닐까. 요즘엔 유치원에도 식물 키우기를 많이 한다고 들었다. 아, 카론을 유치원생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정신 연령이 대강 그 정도니까… 난 왜 사람도 없는데 변명하고 있는 걸까. 왠지 허탈한 기분이었다.
단테는 카론을 데리고 광야에서 벗어났다. 처음에는 어떻게 글이라도 팔아가며 생활을 꾸려보려고 했지만, 어쩌다보니 사고에 휩쓸려 이렇게 되었다. 시장에 갔다가 소매치기를 만났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 옆에는 카론도 있었다는 게 거짓말일 뿐이지만. 하여튼 단테와 카론은 그렇게 알리에기리 집안에 가게 됐다. 카론까지 양자로 입양하려는 손자부부의 말에, 단테는 왜인지 불안감이 들어 거부했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베르길리우스가 더 빠르고 손쉽게 그녀의 행방을 알게 되었겠지만 말이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흘러가는 상황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단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내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단테는 알리기에리 가문에서 떨어진 곳에 자신의 은신처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카론을 위한 공간이었지만, 나중에는 그의 계약자들이 즐겨찾는 공간이 됐다. 그도 처음엔 제 은신처를 자기 집처럼 드나드는 계약자들에게 아연실색했지만 카론이 혼자 외롭게 잇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 시선이 많이 따라붙는 계약자 몇에게만 출입할 때 주의하라고 당부한 뒤에, 단테의 은신처는 식당 겸 하숙소 겸 영화관 겸 실험실이 되어버렸다.
어쩌겠나. 못 막은 내 탓이지. 그리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단테는 카론을 겸해 계약자들이 하고 싶다고 하면 꽤 물러지는 경향이 있었다. 정말 안되는 것 몇을 제외하고는 결국 조심히 하는 거야. 라고 말하곤 했으니. 단테는 마침 2층에서 내려오는 홍루를 바라보았다. 거대기업의 대표이사 답지 않은 후줄근한 옷을 입고 한 손에는 서류묶음을 들고 있었다.
“단테님~ 이거 오티스 씨가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오티스가. 단테는 막 팩스로 도착한 따끈따끈한 서류뭉치를 바라보았다. 홍루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단테의 앞에 서서 서류를 건네줬다.
<이 시간까지 고생하네… 아, 저기 쿠키 구워뒀는데 가져다줄래?>
“네. 아, 그런데 말이죠. 단테님이 원하시면 저도 알아볼 수 있었는 걸요.”
<음? 아아… 너희 회사에 있는 사람도 있나봐?>
단테가 가볍게 틱 하는 소리를 냈다. 아무리 그래도 홍루가 모든 사원들을 기억하는 건 아닐 거다. 애초에 사람이 엄청나게 많을 거고, 그 하청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생각보다 더 유능한 사람이 껴있을 지도. 단테를 가만 바라보던 홍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보려는 건 아니었는데요. 팩스는 하나하나 나오니까요. 으음~ 분명 예전에 본 적 있는 얼굴이어서요.”
저도 잘 할 수 있는데. 단테는 왜인지 모르게 초롱초롱한 시선을 피하고선 하하, 하고 웃었다. 산책 나가려다가 비가 와서 못 나가는 강아지의 얼굴이랄까. 조금 더 비밀스럽게 알아야 할 일이라서 오티스만 알고 있던 내용이었는데. 괜히 알렸다간 홍루에 더불어 그레고르나 파우스트도 토라질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키호테는 그냥 제외하기로 했다. 그녀는 이런 일이 아니라 모든 일에 자기를 끼우지 않았다고 토라지니까….
<그냥. 적게 알 수록 좋은 일이라서 그래. 그런 점에선 오티스가 확실하잖아.>
“그런가요? 그래도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셔야 해요. 단테님.”
약속. 단테가 손가락을 들어 새끼손가락을 감았다. 이내 만족한 얼굴로 부억에서 쿠키를 들고 저 안쪽 방으로 향하는 홍루를 끝까지 바라보다가 옅게 째깍 소리를 냈다. 한숨을 푹 내쉰 뒤에 천천히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가장 첫번째 장에는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 찍혀 있었다.
<가넷이라….>
신기하게 다들 본명은 보석 이름이네. 단테가 서류를 다시 쥔 다음 천천히 2층으로 향했다.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했다.
딸랑.
카페 문에 달린 종이 소리를 냈다. 단테가 고개를 들어 문가를 바라보았다. 도심에서 살짝 멀어진 골목골목의 한 카페. 단골 몇만 있는 조용한 곳에 밀크티가 유명한 곳이었다. 가장 좋은 건 문가에 있는 통창을 커튼으로 가릴 수 있다는 거였다. 단테는 이 카페를 통째로 빌렸다. 기간은 일주일 정도였는데, 사장이 휴가를 갔다고 한 뒤 문을 닫은 것처럼 만들었다. 그가 만날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을 뿐더러. 경계심이 강한 사람은 고작 하루만에 나타날 것 같지도 않았기 떄문에.
내부는 고요했다. 전체적으로 엔틱한 분위기였는데 원래도 자리가 몇 없어서 그런지 그렇게 비어보이지는 않았다. 단테는 이 카페의 문을 열어두었다. 원한다면 언제든 들어갈 수 있도록. 그가 만날 사람들 각각에게 날짜만 다르게 알려줬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만나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진 않으니까.
그래서, 가장 처음으로 부른 건 당연하게도 가넷. 그 사람이었다. 오티스가 알아본 것에 의하면 카론과 가장 가까운 사이었다고 했다. 똑같이 영국에 살고 있어 가깝기도 했고 말이다. 아쉽게도 오티스가 조사한 사람들 중에는 타국에 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결국 편지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단테는 영국을 자주 떠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비행기표를 보내면 너무 수상하니까….
문 앞에 있는 사람은 두어번 망설이나 싶더니 이내 거침없는 손길로 문을 열었다. 단테는 정장을 차려입은, 생각보다 앳된 얼굴을 마주했다. 몸을 반쯤 밀어넣고 단테를 바라본 청년은 잠깐 멈췄는데. 단테는 제 머리탓인가 싶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아무래도 시계머리 의체는 보기 힘드니 말이다.
다시금 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단테는 조금은 망설이는 걸음으로 다가온 사람을 바라보았다. 단테는 서류상으로 보았던 얼굴보다 더 어려보이는 그 얼굴을 바라보다 패드를 두드렸다.
[안녕. 괜찮다면 거기 앉으면 돼. 커피 마실래?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저기 있는 사람도 내 사람이거든.]
단테는 몸을 틀어 앞치마를 매고 있는 파우스트를 가리켰다. 철저하게 안경까지 쓴 다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잘 모르겠지만 파우스트는 천재니까 커피도 잘 타지 않을까. 그런 자부심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머뭇거리던 가넷이 일단 그의 앞에 놓인 자리에 앉았다.
“…괜찮은데. 네, 하나 주세요.”
거절하는 게 더 큰 실례라고 여겼는지. 그는 자리에 앉아 잠시간 시선을 피하다가 크게 숨을 마시고 고개를 들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테는 차마 사회초년생을 바라보는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파우스트. 카페라떼… 아니. 카페모카 부탁해.>
계약자랑 있을 때 가장 편리한 건 바로 이런 거다. 단테는 말을 전한 뒤에 다시 패드를 두드렸다.
[편하게 있어도 돼. 아. 내 설명부터 할게. 나는 단테야. 지금 카론… 그러니까 네가 아는 라피스의 임시 보호자지.]
“네, 알고… 있어요.”
그건 단순히 카론의 보호자라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니었다. 단테가 짧게 째깍소리를 냈다. 이 반응을 보면… 역시나.
[너무 어렵게 생각 안해도 돼. 상원의원이라고 말하면 더 안 올 것 같아서 숨겼어. 미안해.]
아무래도 영국에 살다보면 모를 수가 없는 시계긴 하지. 단테가 짧게 티익, 하는 소리를 냈다. 그 글을 읽은 가넷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알았다면 저도 고민했을 것 같으니까요. 라피스의 일이라고 해도….”
가넷이 가볍게 입을 달싹였다. 여기까지 나오는 데 큰 용기를 낸 것 같지만 여전히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단테가 그런 가넷을 바라보다 글을 적으려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 고운 손 하나가 쑥 나타났다.
“카페모카입니다. 미지근하니 바로 드셔도 됩니다.”
[고마워. 파우스트.]
별말씀을요. 파우스트가 짧게 대답하고선 돌아섰다. 타이밍을 잘 맞추는 걸 보니 참 든든했다. 단테는 머그잔을 매만지다 한 모금 삼키는 가넷을 바라보았다.
따듯한 음료는 사람의 긴장을 풀어준다. 손 끝에 온기를 먼저, 목을 지나치면 기분좋은 온기가 퍼지기 마련이니까. 파우스트는 분명 잔뜩 긴장한 상대가 조금 진정할 수 있도록 딱 좋은 온도로 맞춰줬을 것이다. 거기다가 단 음료면 조금 더 효과가 좋았다. 머그잔을 문지르던 가넷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시선을 흐리지 않았다.
“저는 가넷이에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라피스… 이젠 카론이라고 했죠. 카론의 보호자시니 궁금한 게 많으실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답할 준비가 되어있고요.”
굳은 다짐을 한 그 얼굴은 어디선가 결의까지 느껴질 것 같았다. 단테는 가만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그 사건은 무엇이기에, 이 이름은 무엇이기에 그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맞아. 너만이 답해줄 수 있는 질문이 정말 많거든. 그렇지만… 네가 원치 않는 질문은 답하지 않아도 돼. 그건 네 권리거든.]
단테가 고개들 살짝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머리 위의 불꽃이 여전히 일정하게 타올랐다.
[네가 의무감에 답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야. 그리고 동일하게도, 너도 내게 질문해도 돼.]
가넷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의체를 달고 있는 사람들은 많다. 단순히 의료 목적이 아니라 미용 목적으로도, 실용적인 면에서도 이용되고 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의체가 많아지고 보편적이라고 한들, 어릴 적 작은 마을에서만 살던 가넷에게는 그 모습이 낫설었다. 이질감까지는 아니었지만 의체에서는 어딘가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어쩔 수 없는 금속의 성질인가 싶었던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정작 마주한 이 사람은 뭔가 다르다고 할까. 단테는 희미한 온기가 느껴지는게 머리 위에서 계속해서 타오르는 불꽃탓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자신을 계속 살피고 배려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나도 그렇게 할테니까. 괜찮지?]
그래서일까. 사실 편지를 처음 받았을 때보다 이곳에 들어설 때 더 긴장했다.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정치가라는 걸 알아서. 혹시라도 라피스를 이용하려하는 걸까봐. 혹시라도 자신을 이용해서…… 아저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단지 그것만이. 가넷이 다시금 머그잔을 문질렀다. 처음에는 따듯하다고 느껴진 잔이 천천히 식어 미지근했다. 그렇지만 아직 음료는 따듯하겠지. 그는 한모금 더 삼키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마음이 안정되는 것은. 분명 음료가 단 탓이리라 생각하며.
베르길리우스가 숨을 뱉었다. 안온한 카페의 광경이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 끔찍하게 느껴졌다. 정면해서 마주하는 그 앳된 얼굴. 그에게는 몸만 커진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랬다. 쭈볏대는 몸짓과 경계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다가올 때는 굳은 결심을 하는 아이. 그 누구보다 사려깊은 모습이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러나 고개 돌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이 폭압적인 상황 속에서, 베르길리우스는 서서히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기억하는 가넷만이 가넷이 아니었다. 눈가의 깊이. 손의 주름과 크기. 상대를 가늠하면서 짓는 미미한 웃음.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내면의 성숙함이 서서히 시선에 걸려왔다.
아이는 자랐다. 그의 기억속에 남아있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는 가넷의 품에 분명히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남아있지는 않았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가며, 다양한 경험과 상황에 놓이며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유지한 채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얼마든지 사람은 재창조된다. 파괴와 창조만큼 사람과 가까운 건 없었다.
기억은 온전하지 않고, 언제라도 빗바랠 수 있도록 망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베르길리우스는 묵과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단테가 소리도 내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베르길리우스는 확실하게 그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왜 이 공간에 데려왔는지. 왜 그에게 이렇게까지 기억을 해쳐 보여주는지…
단테가 다시금 손을 들어올렸다. 이번에는 사슬소리 너머로, 덜커덩. 하고 태엽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어지러이 펼쳐진 서류 속에도 규칙은 존재한다. 단테가 탁자 주변을 두어번 돌며 걸어다녔다. 어딘가 생각하는 듯한 틱틱 소리가 끊기질 않았다. 단테는 가끔 이렇게 계약자들도 듣지 못하는 말을 했다. 시계소리도 내지 않을 수 있겠지만, 생각이 멀어지면 잘 조절이 안된다는 걸 이 방 안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방안에는 단테가 조금 머뭇거리며 생각을 고르는 것도 참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실제로 시간이 많이 흘러, 단테는 카론에게 말을 전하는 날 자신의 계약자들에게도 상황을 알렸다. 단순히 계약으로 엮여있기에 한 선택은 아니었다. 이미 시간이 꽤 흘러 다들 카론과 한 식구처럼 지냈고, 그렇다면 말하지 않는 게 언뜻 배신처럼 여겨질 수도 있었다.
단테는 그런 상황이 오지 않았으면 했고, 덧붙여 모두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는 것도 무시하기 힘들었다. 단순히 물질적인게 아니라, 다양한 의견이 필요했다. 단테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금 탁자 위에 있는 서류에 검지를 눌러 주욱 문질렀다.
“단테.”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단테가 이상을 바라보았다.
“그대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으나… 결국 대화는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단테의 시선이 잠깐 이상을 향했다. 틱, 소리를 내나 싶더니 다시금 서류로 돌아간 고개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무슨 반응이 나올 줄 알고.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더 신중해야할 것 같아서 그래.>
방 안 사람들의 시선은 결국 그 서류에 닿았다. 사제복을 입은 채로 막 서품 받을 적의 젊은 얼굴을 하고, 정갈한 글씨체로 이름을 적은. 베르길리우스에 관한 서류에 말이다.
단테는 가넷의 이야기를 듣고, 이후에도 대화에 응한 다른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결과 단테는 한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는데, 모두가 ‘아저씨'를 언급한다는 사실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작 그가 있던 시기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고아원에 있던 다른 날보다 그 아저씨에 대한 일이 떠오른다고 했다. 단테는 아마도 그 참사가 충격적인 나머지 기억에 잊히지 않아, 바로 전의 기억도 선명하게 남은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또한, 생존자 모두가 참사 이전의 기억은 흐릿하다고 답했다. 정확히는 기억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이미 상담치료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가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 모두가 괜찮아지지는 않는다. 그저 내일은 오늘보다 덜 힘겹기를 바라며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래서, 단테는 이 죄인들이 좋았다. 터무니 없을만큼 인간을 사랑하게 됐다. 자신의 삶을 가꾸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보여주기 싫은 것도 있고.>
베르길리우스가 싫었다.
“관리자 양반, 그게 제일 큰 거 아닌가."
단테가 틱틱 소리를 내며 그레고르를 바라보았다. 다크서클이 한층 깊어져 있었다. 저러다 쓰러지지. 최근엔 어머니의 압력으로 정치계까지 떠밀려 다닌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전 보호자라고 무조건적으로 만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그 사람이 카론을 찾고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단테가 기어이 서류에서 손을 떼어냈다.
<단지 핑계로밖에 안 보여서 그래.>
그래. 핑계. 단순히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며 움직이게 하는 헛된 동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단테는 처음 그의 존재를 알았을 때 그 누구보다 베르길리우스를 만나고 싶어했다. 당연하지 않는가. 단테는 카론에 대해서 더 알고 싶었다. 그는 카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떨 때 기뻐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으나, 카론의 가족이나 유년시절은 알 수 없었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가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점차 오티스가 보내준 자료를 읽을 때마다 생각이 달라졌다. 단순히 참사에 대해 알게 돼서, 고아원에 보낸 시간이 짧아 그 또한 카론의 유년을 잘 모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구마사제라는 것도 흠은 아니었다. 어쨋든 사람의 직업에는 귀천이 없고, 자신이 악마라고 한들 대화가 통한다면 기꺼이 만날 의지가 있었다.
그래. 대화가 통한다면.
단테는 자료를 차분히 읽어나갈 때마다 점차 굳어갔다.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종이를 넘겼다. 이 남자는 정말로 ‘라피스'를 찾기 위해 움직이는 걸까? 왜? 라피스 말고도 생존자들은 있었다. 그가 진정 아이들을 그리워하고,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이미 희생자들을 찾았을 것이다. 단테가 쉽게 얻은 이 리스트를 그가 찾지 못했을리 없었다.
정말로 라피스를 찾기 위해서 이렇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걸까. 단테는 그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기에 그의 동기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분노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로 인해 죽은 수많은 아이들을 위해 복수를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카론을 만나고 싶은게 아니라 카론을 데려간 그 악마의 행방을 쫒는 것으로 밖에 안 보였다. 스스로의 병. 죄책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저 사람이.
살아있는 아이들보다 죽은 아이들에게 매달려 사는 저 사람이.
죽은 라피스가 아닌 살아있는 카론을 만날 자격이 있을까?
“…단테. 기억하세요.”
지나치게 조용한 공기를 가르듯, 파우스트가 속삭였다.
“가장 중요한 건 카론의 의지에요.”
그제야 단테가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소리로 말이다.
<그건 나도 알아.>
“그래서요?”
주욱, 빨대를 따라 주황색 환타가 딸려올라갔다. 이전에도 생각했는데 참 자기 머리색 같은 걸 좋아하는 구나 싶어서. 단테가 고개를 들었다. 시내의 한 패스트푸드점. 단테는 후드를 쓴 채로 다시금 모자의 줄을 당겼다. 여전히 불이 조금 일렁거리긴 했지만 구석 자리에 있으면 그렇게 수상하지는 않았다. 단테가 괜히 검은 코트를 구겨넣으며 조용히 째깍였다.
<아직 말 안했어.>
“뭐, 그럴 것 같았어요.”
<왜?>
단테가 괜히 테이블에 놓인 종이만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스마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각보다 고집 세시잖아요. 관리자 님.”
단테가 괜히 종이만 괴롭히며 아니라고 말하려는 순간. 테이블 위에 그림자가 졌다.
“야. 안으로 들어가 봐.”
“당신이 들어가면 되잖아요.”
“네가 비켜야 들어갈 거 아니냐? 또 성질 돋구네, 이게…”
“이게?”
뎅! 단테가 조금 크게 시계소리를 냈다. 잠깐 이목이 집중되나 싶더니 금새 시선이 사라졌다. 이래서 패스트푸드점이 좋았다. 금방금방 소란이 사라지니까. 이런 조합으로 만나야한다면, 단테는 최대한 소란이 묻히는 곳을 고르곤 했다.
<둘 다 그만해. 히스클리프. 이쪽으로 앉아. 내가 안쪽으로 갈테니까.>
이스마엘은 뭐라 더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단테는 안쪽으로 몸을 구기며 처량한 시계소리를 냈다. 틱틱틱, 째흐흑… 까흐흑….
“아오. 알겠다고. 이상한 소리 내지마라. 시계대가리.”
효과는 발군이었다. 언제나 잘 먹힌다니까. 단테는 냉큼 옆에 앉아 햄버거 포장지를 까는 히스클리프를 바라보았다. 와구. 한 입 베어무는 걸 볼 때마다 남자는 25살 까지 성장기라는 말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이스마엘은 제 옆에 앉은 뫼르소에게서 버거를 받아들었다. 네 사람 사이에서 포장지 벗기는 뽀시락하는 소리만 울리나 싶더니, 이스마엘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어쩌고 싶은데요?”
<나야… 솔직하게는 만나기 싫은데.>
단테는 맛나게 햄버거를 먹는 세사람을 바라보았다. 이 바쁜 청년들. 그래도 짬내서 은신처를 들릴 수 있는 자차 보유자들과는 다르게 하루하루 과제하고 출근하기 바쁜 세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이렇게 단테가 가끔 찾아와 밥 사줄 때를 제외하곤 말이다. 안그래도 최근 회사에 들어간 이스마엘과 뫼르소의 안색이 심각하게 안 좋았다. 단테는 돌아가기 전에 시계를 돌려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럼 안 만나면 되는 거 아니냐?”
와암. 벌써 햄버거 하나를 해치운 히스클리프가 감자튀김을 집어들며 말했다.
<카론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니까.>
단테가 다시금 종이를 만지려고 하자 이스마엘이 그 손에 말랑이를 쥐여줬다. 이거 뭐야?
요즘 회사에서 짜증날 때마다 주물러요.
그렇구나…. 단테가 회색 말랑이를 주무르며 느리게 한숨을 뱉었다. 어째 이 세사람을 만날 때마다 유치해진다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단테라고 늘 파우스트와 오티스 사이에서 의젓하게 있을 수는 없는 거였다. 좀 유치하게 굴고 싶은 날도 있는 거다.
<괘씸해서 만나게 해주고 싶지 않아.>
우물우물. 가만 햄버거를 먹던 세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틱틱 소리를 내는 걸 보니 꽤 싫은 것 같았지만, 실제로 단테는 정말 싫은 사람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늘 그가 처리하고 나중에야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하곤 했으니까. 즉 지금은….
“그렇게 싫으면 안 보여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으음, 그렇지만 싫은 건 아니란 말이지. 뭐랄까. 밉게 보이는 건 사실인데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야. 따지자면 미운데 자꾸 눈길이 간다고 해야할까. 이게 미운놈 떡 하나 더 준다는 걸까.>
“그럴 수도 있죠.”
영혼없이 대답한 이스마엘이 다시금 음료를 살폈다. 감자튀김 대신 교환한 치즈스틱을 물기 전에 다시금 말했다.
“근데. 싫은 건 아니면 결국 보여줄 거 아니에요?”
“추론 상 만남을 최대한 미루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단테가 이어진 뫼르소의 말에 말랑이를 꾸욱 주물렀다.
<약간 불안한 것도 있어서 그래. 정말 만나게 되면… 괜히 휩쓸릴 것 같아. 그냥 예감이기는 한데. 미뤄둔 운명이 가까워지는 걸 느끼고 있거든.>
실제로 단테는 카론을 만난 뒤에 세계를 세심하게 살폈다. 파우스트와 이상의 도움을 받아 거울을 발견한 이후 다른 세계를 확인하기보다는 현 세계의 굴절율을 살폈다. 운명과 종말을 예측하기 위한 장치였으나. 최근들어 거울의 상태가 이상했다. 곧 터질 것처럼… 이스마엘은 말랑이를 주무르는 단테를 보다 한숨을 내뱉었다.
“저야 잘 모르지만, 파우스트 씨나 이상 씨가 말한 거면 확실하겠죠. 그렇다고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는 거잖아요. 차피 미룰 수 없으면 단번에 빼버려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단 말이지….>
단테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스마엘은 가끔씩 이렇게 당찬 기개를 보이곤 했다. 역시 남 밑에서 일할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괜히 힘들게 일하고 있는 건 아닐가 걱정 됐다. 단테가 말랑이를 돌려주고 틱. 소리를 냈다. 어느새 햄버거를 해치운 히스클리프가 콜라를 마시다 단테를 바라보았다.
“어쨋든, 말할거냐?”
<말해야지…….>
“왜?”
어라? 단테가 고개를 돌렸다. 히스클리프가 시선을 굴리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라면 안 만나.”
히스클리프가 잘근, 입에 물고 있던 빨대를 씹었다. 단테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잠깐 잊었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조언을 구할 사람은 히스클리프 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언쇼 가의 입양아라는 사실은 꽤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정작 히스클리프는 그런 소문에도 아랑곳 않고 그곳 아가씨와 좋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렇지만 그 또한 고아였다. 부모가 그를 버렸다.
“들어보니까. 다른 놈들은 멀쩡히 있는데 안 찾았다며. 멀쩡히 있는 사람들은 내버려두고 나만 찾는다? 나였으면 안 만난다.”
여튼 그렇다고. 히스클리프가 괜히 머리를 긁적이다 컵에 담긴 얼음을 와작와작 씹었다. 단테는 괜히 더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듯 제 시계태를 툭툭 두드리다 대각선에 앉은 뫼르소를 바라보았다.
<뫼르소는? 말하고 싶은 거 없어?>
“명령입니까?”
<어… 솔직하게 알고싶어. 뭐든 다른 생각이 있다면 말이야.>
단테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뫼르소가 고개를 틀어 정면으로 마주 본 다음 입을 열었다.
“관리자 님의 걱정과는 달리 의사를 물었을 때 긍정적인 답변을 할 확률은 심히 낮습니다. 불안요소가 있다면 오히려 관리자 님이 대상을 만날 확률이 높다는 것이군요.”
<내가? 왜?>
단테는 여전히 평온한 뫼르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당연한 사실을 통해 추론하는 그의 말은 꽤 높은 확률로 정답이었으니까.
“대상이 관리자 님을 찾는 것은, 단 한가지 경우 뿐입니다.”
꼭 예언처럼 말이다.
“관리자 님이 카론을 데려간 악마라고 생각할 때.”
이번에는 깨지지 않았다. 베르길리우스는 서서히 멀어지는 공간을 바라보았다. 붉은 성운은 온데간대 없고 온전한 공허만이 남아 그를 감싸고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희뿌연 시야속에 아무것도 없는 암흑에 내던져졌다. 고개를 돌려봐도 아무도, 무엇도 없었다.
“…단테?”
단테. 단테…. 소리는 메아리처럼 공간을 울렸다. 돌아갈 곳도 없는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퍼졌다. 베르길리우스는 까닭없는 불안함에 눈을 깜박였다. 어딘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어깨에 차가운 손길이 닿은 것 마냥 시려왔다.
절대로 당신 이름을 말해주면 안 돼.
단테의 말이 떠올랐다. 베르길리우스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눈을 감았다. 그 한기는 그의 어깨를 짚었다가 손을 뻗어 등을 감싸고, 이내 목을 쓸어내렸다.
“베르길리우스.”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느리게 한숨을 뱉었다. 말하지 말라더니. 이미 알고 있지 않나.
그를 쓸어내던 손길이 기어이 뺨을 향하고, 베르길리우스는 미세하지만 느낄 수 있는 손길을 가늠하고 나서야 눈을 떴다. 그를 등 뒤에서 매만지던 무언가가 제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아채버렸으니.
“…….”
“베르.”
시야에 들어찬 것은, 지독하게 붉은 눈동자였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신도 악마도 아니다. 이것은 따지자면….
그래, 따지자면……
“너무하지?”
판도라의 상자다.
“아니. 전혀.”
“왜 그렇게 생각해? 당신을 멋대로 재단하고, 헤쳐놓은 이기적인 작태일 뿐이잖아.”
베르길리우스는 나부끼듯 흔들리는 흰색 코트를 보았다. 다정하고 아름다운 목소리. 꿈 같이 부드러운 감각 속에 베르길리우스는 입을 열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되게 했으니.”
“아니야, 베르. ‘생각 되게 하다'라는 건 없어. 저 악마는 그저 너의 최선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그의 뺨을 토닥이는 손길, 작은 아이를 다루는 듯한 행동.
“너 또한 최선을 다해, 있는 힘껏 싸워왔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까. 저 악마가 사랑하는 인간들과 네가 같다는 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니까. 멋대로 끼워맞추고 네 진심을 곡해하지.”
베르길리우스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너는 진심으로 아파했어. 그 아이들을 사랑한 만큼, 그 아이들의 죽음을 견딜 수 없었던 거야. 그걸 단순히 분노라고 일갈할 수는 없는 거야.”
그 달디 단 소리에.
“이대로 묻어둔다면 너 또한 곪을 뿐이야. 네 상처를 돌볼 생각도 없는 저 악마를 봐.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너를 바라보지도 않는 걸. 진정 너를 사랑한다면 이렇게 대하지 않을 거야.”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는 듯한, 사려 깊은 목소리.
“네 마음만 짓밟힐 뿐이야. 베르. 억울하지 않아?”
베르길리우스는 차마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정말로 그런 마음이 없었냐고 하면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도 사람인지라 어떨 때는 억울하기도 했고 어떨 때는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단테에게.
자신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걸까.
“보여주자.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너의 고통과 아픔을 보여주면 저 악마도 생각을 달리 먹게 될 거야. 네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고, 괴로워했으며,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는지.”
베르길리우스는 느리게 숨을 내뱉었다. 가슴가가 계속 답답했다.
“너는 그럴 자격이 있어. 베르.”
지독하게 유혹적인 제안에, 그 또한 혹하지 않는다면 거짓이었다.
“그러니, 네 이름을 말해줘. 내게 허락해줘.”
너의 색을 나에게 보여줘.
베르길리우스는 고개를 들었다. 물결치듯 흐르는 갈색 머리칼이 그의 시선에 스쳤다. 마주본 눈동자는 붉었고, 오싹하면서도 안온했다. 전혀 반대의 감정이 그를 몰아쳤다. 억울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반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가 라피스를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악마를 잡기 위해서, 단순히 그 이유로 그 아이를 찾은 게 아니다. 죽은 아이들을 분노의 동력으로 사용한 게 아니다. 그걸 보여줄 수 있다면, 그에게 느끼게 할 수 있다면….
베르길리우스는 입을 달싹였다. 목 안쪽이 바짝 말라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정말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베르길리우스는 멋들어진 정장을 입고 걸어오는 가넷을 보았다. 그 아이의 얼굴을 보고, 손등을 바라보고. 어린 티를 벗어 새 사회에 뛰어든 모습을 보았다.
그는 자신을 내려보던 카론의 눈동자를 기억했다. 책 대신 영화를 좋아하고, 쓴 것보다는 단 사탕을 좋아하며. 그 무엇보다… 자신을 카론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그것을 존중해야 했다.
더이상 아이들은 그의 품에 없다.
판도라는 호기심에 상자를 열어 모든 재앙을 세상에 풀어놓고 만다. 순간적인 선택이 모든 것을 망쳐버린 순간, 그녀는 죄책감과 후회에 빠져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 지독한 자책의 순간 상자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희망입니다. 상자를 다시 열어주세요. 내가 이 재앙과 재해로 망가진 세계에서, 절망하는 인간들 사이에서 내일을 꿈꾸게 만들겠습니다.
판도라는 다시금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희망이 빠져나와, 사람들은 고난을 겪게 되었으나 희망만은 놓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희망이었을까?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의 앞에 놓인 상자를 바라본다.
새로운 재앙이 그를 속이고 있는 것 아닐까.
달콤한 말로 그를 유혹하며, 새로운 재앙을 불러오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베르길리우스는 상자를 열지 않는다.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라고 할지라도. 진실로 한 줌 남겨진 희망이 그에게 애원하는 것이라도.
이미 엎지른 재앙을 묵묵히 견뎌내고 자책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래, 살아간다. 이 생이 지겹고 무거워 숨이 막힌다고 할지라도 허락하는 한 계속 걸어갈 것이다.
끝내 그에게는 지옥이라는 안식이 주어지리라고 믿고.
“후회할텐데.”
베르길리우스가 눈을 떴다. 붉은 시야 사이로 뜨거운 핏방울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이 고통과 시련을 겪어나갈 그를 위로하기라도 하듯. 끝없이 흐르는 이 피의 망토는 언제쯤 그치게 될까.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니.”
다시는.
“후회하지 않는다.”
유리가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를 맞이하는 건 붉은 성운이었다. 느리게 움직이며 각각의 종말 대신 빛을 내며 사라지는 창성의 순환. 베르길리우스는 시야를 가리는 붉은 빛에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바닥에 채 마르지 않은 피가 흥건히 묻어나왔다. 가만 바라보고 있자니 장갑낀 손이 불쑥 나타났다.
째깍.
차피 가죽이라 제대로 닦이지도 않을텐데. 베르길리우스는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는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장갑을 낀 손, 붉은 코트를 바라보고 있자니 아에 팔을 들어 그의 얼굴을 북북 닦았다. 베르길리우스는 그의 얼굴을 아예 갈아버리는 것처럼 문지르는 단테의 손길에 결국 얼굴을 뒤로하고 윗팔을 붙잡았다.
“사람 얼굴을 빨래판 처럼 쓰…….”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베르길리우스는 붙잡은 팔에서 떨려오는 진동을 느꼈다. 그를 살짝 비낀 채로 고개를 돌린 단테가 떨고 있다는 사실을. 얼굴을 북북 문지른 탓에 피로 흥건해진 코트 소매가 천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입을 다물고서 팔을 놓아주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단테는 가만 그를 바라보다가 패드를 집어들었다.
[난 괜찮아. 베르길리우스.]
그건 꼭 괜찮아질 거야. 라는 말처럼 보였다. 그는 다시금 손을 올린 단테가 그를 이끌어 문 앞까지 데려다 놓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미안하다고? 그렇다기에 그에게 들었던 분노는 진실이었다. 그 행동을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베르길리우스는 결국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그 육중한 문 앞에 서서, 단테는 그에게 손짓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그가 바라는 대로 문에 양 손을 올려놓았다. 그 문은 차가웠고 꼭 맥박치는 것처럼 움틀거렸다. 손바닥에서 간지러운 감각이 일어 떼어낼까 싶다가도 눈을 흘겨 단테를 바라보고 있으니 왠지 그대로 있고 싶었다. 단테가 천천히, 문을 밀기 시작했다 들어올 때는 손짓 하나로 떼어낼 수 있던 그 문은 두 사람이 안간힘을 써야 열리기 시작했다. 조금의 틈새 사이로 옅은 빛이 들어왔다.
사람의 마음도, 들어올 때는 거침 없이 벌컥 열어버리면서 나갈 때는 이렇게 힘겹게 떠나가는 구나 싶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서서히 열리는 문을 바라보았다. 틈새로 스미는 빛이 어쩐지 슬퍼졌다. 그는 열린 문 사이로 몸을 끼워넣어 통과한 다음 단테의 뒤에서 좁은 길을 걸어갔다. 여전히 길 옆의 불길은 흔들렸고 들어올 때와 같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나, 베르길리우스는 어째서인지 멀어진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산산히 조각난 심상은 깨어져 두 사람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방 안에 서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서서히 여명이 움트기 시작한 창문 밖의 광경을 바라보다 시선을 옮겼다. 카론이 안락 의자에 누워 색색 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째깍, 소리를 내며 단테가 그에게 패드를 내밀었다.
[있지. 가넷을 만나볼래?]
베르길리우스는 고개를 들어 그 글을 바라보다,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게도, 그 뒤로 두 사람이 만나는 일은 없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베르길리우스 대로, 단테는 단테 대로 서로의 일상에 복귀했다. 그 모든 일이 한여름 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베르길리우스는 여전히 사무실을 운영하고 구마사제로 돌아다니며 악마를 내쫒았다. 라피스를 데려갔던 그 악마를 찾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쁜 상황에서 베르길리우스는 가끔 단테의 생각을 했다. 오히려 바쁘면 생각할 여유도 없어질까 싶어 몸을 혹사시킨 점도 있었다. 허나,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이 영 독한 것이라 그날의 기억이나 단테의 흔적이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베르길리우스는 늦게 찾아온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인정하고 그리워하다 언젠가는 잊히겠지.
베르길리우스는 아직도 단테가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모든 반응들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었으나. 거울 던전에서 본 모습을 보면 그렇게 목을 붉히고 손길에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연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마음을 의심하기 싫었으나 어쩌면, 하는 생각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고는 했다. 하지만 이제 두 번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다. 베르길리우스는 깔끔하게 마음을 접자고 다짐했다.
일상은 이어졌다. 하지만, 단 한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베르길리우스는 더이상 주말에 일하지 않았다. 새벽까지 몸을 갈아가며 과로하던 습관도 고쳤다. 그는 휴일에 가넷을 만났고, 카론과 같이 시내를 돌아다녔다. 외국에 있는 다른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몇일간 휴가를 내기도 했다.
처음에는 모든게 어색했다.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도 몰라 이상한 주제로 화두를 잡기도 했다. 그러나 버벅이는 베르길리우스를 보는, 이제는 어른이 된 아이들에게는 그 모습이 꽤 신기하고 즐거웠던 모양이다. 만남이 길어지고 잦아질 때마다 참사의 기억은 오히려 멀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상처는 입 밖으로 낼 때 더 빠르게 치유되는 모양이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악마를 잡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그러나 더이상 살아남은 아이들을 무시하지도 않겠다고 다짐했다. 죄책감에 파묻히는 대신 앞으로 나아갈 아이들의 손을 붙잡기로 했다.
베르길리우스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단테는 그를 구했다. 그의 과도한 자책과 마주보지 않는 시선을 돌려놓았다. 베르길리우스는 마지막 밤 그에게 감사인사를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말을 전할 수도 없고, 카론에게 대신 말해달라고 부탁하는 건 진정성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아주 오랜만에 성당 중앙에 무릎을 꿇어 앉아 손을 모았다.
베르길리우스는 눈을 감고 그의 아버지 하느님에게 기도를 올렸다.
단테를 고난에 빠지게 하지 마시고, 그의 앞날이 찬란하기를 빌었다.
어쩌면 신에게 악마의 안전과 보호를 바란다는 기도를 올리는 것이 우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는 여태 올렸던 그 모든 바람보다 간절하게, 마음을 담아 기도했다. 그가 행복하기를 빌었다.
성당을 나오니 시간은 벌써 오후 세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늘진 나무 아래서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에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사무실로 갈까 싶었는데 왠지 강을 보고 싶은 기분이라 조금 돌아서 걸어가기로 했다. 인적이 드문 산책로를 따라 푸른 나무 밑을 지나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다 보니 기분이 더 나아졌다. 그는 막 다리 위를 걸어가며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강변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휴대폰이 진동했다. 베르길리우스가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자 사무소에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베르길리우스가 가볍게 고개를 기울이며 전화를 받았다. 연락할 게 있었나? 어쩌면 심부름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받은 전화기 속에서, 어딘가 흥분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 당장 TV 켜봐요! 아니다. 유튜브 라이브 생중계 있으니까 그거 봐요! 빨리!!“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급하게. 볼게. 전화를 끝어야 보지.”
베르길리우스는 그를 재촉하는 말에 결국 전화를 끊고 유튜브를 틀었다. 라이브 태그를 누르자 가장 상단에 익숙한 시계가 보였다. 긴급 기자회견을 연 모양이었다. 베르길리우스는 홀린듯 영상을 눌렀다. 평소에 소리를 크게 트는 탓에 기자들이 왁자지껄 서로 질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꼼짝없이 단테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마지막에 본 것보다 조금 말라보였다. 뭘 먹기는 하는 몸일까. 저러다 살만 계속 빠지면 어쩌지. 괜한 걱정이 들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의 목에 감긴 붕대를 바라봤다. 아주 미세한 틈으로 보였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남긴 상처와 화상을 치료하기 위함이겠지.
여기저기서 후레쉬가 터져나갔다. 찰칵 하는 소리가 끝없이 들리고 기자들이 악을 쓰듯 질문을 내뱉었다. 단테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손을 들었다. 흥분한 기자들이 조금 진정했는지 소리치는 일은 줄어들었다. 단테는 늘 그렇듯이 수화로 먼저 말한 뒤에 패드를 말을 적었다.
[근래에 있던 일에 대해, 국민 여러분과 저를 지지하는 유권자분들에게 큰 심려를 끼친 점 사죄드립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정갈한 말에 왠지모를 대견함을 느꼈다. 허. 대견함이라니. 아주 갈때까지 갔다는 생각과 함께. 단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기자가 소리쳤다.
“신부와의 스캔들을 공식 인정하시는 건가요?”
웅성이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후레쉬가 터져나왔다. 퍽 귀찮은 장소라고 생각했다. 단테는 그 기자를 바라보는지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이내 다시금 말을 전했다.
[제가 한 성직자와 교제한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로 인한 유언비하 및 개인정보 유출은 강력하게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적당한 대처였다. 사실이 아니라고 못박고는 일반인을 건들였다는 명분으로 신문사를 압박할 수 있겠지. 뻔히 보이는 말에 베르길리우스가 화면에서 잠깐 눈길을 돌렸다. 여전히 강가는 아름다웠다. 그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나잇값 못하긴.”
베르길리우스는 제 상태를 짧게 평가한 뒤 다시금 화면을 들여다봤다. 조금 조용해진 좌중 사이로 한 기자가 손을 들었다.
[발언하세요.]
“그렇다면 두 분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솔직히 말해서 베르길리우스도 궁금했다. 우리는 무슨 관계였던 걸까. 하룻밤도 아닌 스쳐지나간 불장난? 아니라면 원수인가. 평생 공존할 수 없는 신부와 악마의 관계일지도 모른다. 한가지 확실한 건 이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단테는 그 질문을 듣고 천천히 수화하기 시작했다. 베르길리우스는 수화를 배우지 않았기에 그 말을 해석할 수 없었지만, 아마 기자 중에는 단테가 상원의원이 된 이후로 수화를 배운 사람들이 꽤 많다고 들었다. 혹여 다른 말을 했을까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말이면 타자가 빨라지거나 후레쉬가 터져야할텐데. 베르길리우스는 어딘가 얼이 빠진 것 같은 기자들을 한 번 살폈다. 그러더니 단테는 패드를 두드렸다. 어쩐지 어깨가 올라간 게 조금 신나보였다.
째깍, 소리와 함께 단테가 웃었다. 그래, 그건 분명 웃음이었다. 베르길리우스는 확대되기 시작한 단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제게 그 누구보다 뜨거운 경험을 선사해준 사람입니다.]
삼 초. 그 뒤에 기자회견 처음의 열기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기자들이 마이크와 사진기를 들이댔다. 미친듯이 쏱아지는 불빛 사이에서 단테가 다시금 패드를 들어올렸다.
[또한, 제가 구애하고 있는 쪽입니다. 그러니 아직 교재한다는 소문은 피해주시죠.]
그런 기사는 성사된 다음에 보고 싶다고. 단테는 말을 덧붙이더니 유유히 단상에서 내려와 떠나갔다. 기자들이 미친듯이, 어떤 의도의 발언이시죠?! 하는 말이 쏱아졌으나 단테는 돌아오지 않았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영상을 끄지도 못한 채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베르길리우스는 몰랐다. 단테의 말이 무슨 의도인지. 어떤 위험을 짊어진 것인지. 앞으로 국면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다만 그가 알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지독하게 그리운 흰색 마세라티가 곧 그에게 찾아올 것이라는 것. 베르길리우스가 어딘가 허탈한 듯한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속의 답답한 감각을 전부 털어내기라도 할 것처럼. 어렵게 묻어놓은 감정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타오르고 있었다. 베르길리우스가 눈을 감았다. 단테의 진의라던가, 자신의 고민이라던가. 어쩐지 이제는 전부 웃음이 터져나올 정도로 상관없게 됐다.
지나온 길도 돌아온 길도 전부 엉망진창으로 엮여, 도무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삶을 지나서. 돌아가고 밀어내며 부정하고 난 뒤에서야 알았다.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은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달콤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독하게 서로를 꿰뚫고 엮어 설탕을 졸이고 졸이다 못해 씁쓸한 캐러멜이 되어 누가 먹듯 인상을 찌푸릴 정도로 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달콤하지 않아도, 생각보다 더 아프고, 가끔은 서로를 밀치고 상처입히고 끝내 미워할지라도.
끝내 우리는 사슬과 가시나무로 서로를 엮어낼 테니.
보라, 아직 종말의 때가 오지 않았다.
그러니 당신은 예수가 아니고, 욥이 아니다.
죄없이 어린 양의 피를 흘려 못 박힐 메시아가 아니고, 신과 악마의 장난에 놀아나 고통받는 인간도 아니다.
당신은 그저 사람이다.
그뿐이다.
베르길리우스와 단테의 긴 여정을 함께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본 글은 이후 미공개 외전 3개를 포함해 실물 회지로 판매됩니다. 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빕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