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

검계, 뫼이상.

창고 by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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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누울 자리 하나 펴두시겠소?

한 밤 깊은 달이 휘영청 떠오를 때, 달빛 아래 날개없는 새들이 돌아다닌다. 발자국 소리도 없이 조심조심, 작게 무리지어 날개짓하는 살수 무리가 있었다. 자고로 살수는 각자 도생이라지만, 서로 연을 맺어 수학修學이라는 형태로 무리지어 활동하고 있었다. 유독 어리고 약한 것들을 데리고 다니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것이다.

각자 이유는 달라도 목표는 분명했다. 검에 매진하고, 무를 이루기 위해 우두머리의 믿으로 들어와 살수의 길을 걷는다. 살과 뼈가 부서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도록. 그러나 완벽하게 자취를 감추는 것을 목표로 하는 ‘암살’ 위주의 시협회와는 다르다. 검계 살수는 무도를 추구하며 혈의 내음을 맡는다. 들어와서 혈귀가 된 것인지. 혈귀가 된 자들을 들이는 지 모를 만치 검에 홀려 있다. 조금 더, 피를 원하는 검의 움직임을 따라 내어준다. 흥분에 팽창한 근육이 장딴지를 단단하게 만들 때 까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다시금 뱉어내기 어려울 때까지. 달빛 아래 젖은 피가 언뜻 푸르게, 희게 비치는 것을 바라보며 웃는 이들. 그런 사람들만 모이는 것인가….

사고가 깊게 침체될 때는 가끔 닿을 듯 다가오는 보름달을 두고 반주라도 하는 것이 옳았다. 바둑의 복기를 하며 상대방을 분석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일정 이상 경지에 오르면 더이상 몸의 배움은 의미가 없어지는 때가 온다. 신체강화에는 한계가 있다. 순수한 인간의 몸으로 도달할 수 있는 곳에는 분명 끝이 온다. 몸의 역할이 끝나면 그 다음은 머리의 차례가 돌아왔다. 상대와 수를 겨루고 합을 맞추는 것으로 승패를 구분할 수 있을 만한 배움의 시간이 필요했다. 거기에다 그는 검계의 우두머리였다. 그의 선택으로 많은 것이 바뀔터였다.

뫼르소는 야밤 달이 가장 잘 보이는 정자로 향했다. 그곳에 앉아 바둑판을 매만지며 약주를 들이키면 적어도 악몽은 꾸지 않을 수 있었다. 쉼없이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할 수 있었다. 이성적이지 못한 상태이기에 이성을 다잡을 수 있었다. 모순이 가끔은 그를 괴롭히더라도,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도움이 됐다. 그가 약주가 든 호리병과 잔을 들고 장지문을 열었다. 한 걸음. 두걸음. 그 다음 걸음은 새겨지지 않았다.

“…….”

하고, 나직한 한숨을 뱉은 우두머리가 가만 머리를 감싸쥐었다.

정자에는 선객이 있었다. 달빛 아래 검을 품에 안고 눈을 감고 있었다. 하도 익숙한 객이기에, 뫼르소는 더 보지 않아도 상대가 무슨 자세로 있을 지 알았다. 양반다리를 한 채로 검을 그 사이로 찔러넣는다. 오른쪽으로 검을 기대 어깨위로 눌러붙인다. 그대로 뺨을 살짝 기울인채로 사색하듯 눈을 가만 감고 올 사람을 기다린다.

글쎄다. 과연 올 사람을 기다리는 건지. 그냥 생각에 잠길 뿐인지. 아니면 선잠이라도 잘 시간이 필요한지는 모르겠다. 아직도 뫼르소는 그가 이곳의 찾아오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니, 알 것 같아도 확신하고 싶지 않았다.

“날 샐 마음이신지.”

눈도 뜨지 않은 불청객이 나직히 속삭였다. 바람결을 타고 들려온 소리는 전혀 다정하다곤 할 수가 없다. 걸음소리가 들리지 않아 뱉은 불만인지. 뫼르소가 한 걸음 더 들어가선 등 뒤로 장지문을 닫았다.

“내려오지.”

“싫소.”

간혹 찾아오는 건 그렇다고 친다. 다만, 이상. 그가 앉아있는 자리가 문제였다. 마련된 방석을 두고도 부득불 바둑판 위에 올라가 몸을 구겨놓고 있었다. 내려와 앉으라고 사정까지 한 것은 아니었지만, 권고 겸 위협은 해두었는데도 말 안듣는 고양이가 부뚜막 오른 것처럼 그 다음 날은 아주 몸이라도 뉘일 모양새였다. 그날은 그대로 장지문 닫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감새 꿈자리가 사나웠다. 일어났더니 귀엽지도 않은 사내가 배 위에 올라 검날을 핥고 있었다. 그 행동 자체에 질려서 그 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무시하고 돌아가진 않기로 했다.

다시는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게 그 이유라면 이유겠다. 참 사람 질리게 만드는데 재주 있으시다고 목구멍까지 툭 튀어나온 말을 삼켰다. 그럴 위치도 아닐 뿐더러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뫼르소가 그 앞 놓인 방석에 앉았다. 금새 거리가 가까워졌다. 인치로 잴 수 있을 만치 얼굴이 가까웠다. 그대로 바닥에 잔과 술병을 내려놓자 슬그머니 눈이 떠진다. 검고 깊은 눈동자가 낯을 훑어보나 싶더니 술병을 가르킨다. 검을 쥐고 있던 손을 펼쳐 살풋 흔들기 시작했다. 내놓으라는 심산이다. 가만 보던 우두머리가 손 위로 둥근 술잔을 올려주었다.

아무말 없이 침묵이 길어졌다. 이상이 술병을 한 번, 그 손을 한 번, 그대로 낯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뫼르소가 가만 술병목을 잡고 기울기 시작했다. 잔에 술은 금새 채워진다. 투명한 액체에 발효된 약주 특유의 독한 향이 코를 찔렀다. 잔이 넘치기 직전 손을 치우려고 했다. 문득 튀어나온 흉 많은 손이 병목을 아래로 쳐박았다. 술잔에 넘친 술이 손가락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줄줄 흐르던 술은 금새 바닥 웅덩이를 만들었다. 뭐하자는 짓인가 가만 고개를 들어보니 확장된 동공이 달에 비쳐 반짝인다는 착각이 일었다. 무슨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그 찰나에 무엇을 읽었는지. 이상이 비죽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심사가 뒤틀렸나 싶었다. 아니, 좋은건가. 모르겠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어린 흑괭이를 앞에 두어도 이렇게 변덕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드실텐가?”

“….”

“그래, 들어갈 구멍 없는데 나올 것 있을리 없고.”

그럼 두시게. 잔에 넘치도록 따라진 술이 기울어졌나 싶더니 그대로 술잔이 정자 기둥으로 날아갔다. 쩍하고 술잔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없이 구시면 이쪽도 그렇게 하고.”

“돌아가겠다.”

한참 닫혀있던 목구멍에서 하나 튀어나온 말대로 행할 예정이었다. 그대로 무릎을 세워 일어나려니 나직하게 검집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소박 맞히실 참인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니 돌아가 잠들 생각이다. 들어가 쉬도록.”

“뒤돌지 마시게.”

“…….”

말을 들었으면 매번 이 지경까지 오진 않는다. 둘 다. 달빛 아래 검날이 퍽 아름다울 것이라고, 머리 하얀 살수가 중얼거릴 것이다. 우두머리의 정원에는 매화가 피지 않는다. 꽃나무는 들여오지도 않았다. 기질 예민한 고양이가 기침이나 할까봐.

“아니. 돌면 더 짙어지겠군. 도시게.”

그 사정도 헤아리지 않고 사람 긁어대는 소리만 하는 게. 어느날은 괭이 발톱을 다 뽑아버릴까 싶다가도 그대로 두었다. 긁어봐야 얼마나 긁고, 깊어봐야 얼마나 깊겠는가. 그게 기분 나쁘다고 앵앵거리며 우는 것도 어느정도 감수는 해야하는 것이다. 부모될 것 아니고, 연 이을 것도 아니다. 밥그릇, 물그릇 두고 잠자리 제공한다고 길냥이가 제 냥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제 성질 못이기고 하악질 한들 받아칠 의무 없는 것도 사실이고, 머리는 잘도 이해하고 있으나. 가끔 우두머리는 그렇게 생각하곤 하는 것이다. 저 괭이도 목덜미를 물면 어릴적 생각하며 사지를 굳힐까 싶어서. 그러니 절반은 그 모가지를 자르지 않는 제 탓이고. 어느정도는 받아준 죄값 있으니.

“이상.”

“으응.”

“금일 취침예정 시각은 자시子時 넘어가가 전이다.”

딱 그 전까지 어울리지.

이상이 가만 검날을 집어넣었다. 만족스러운 소리라기엔 가늠하기 어려웠으나 다시 바둑판 위에 올라가 앉았다. 그게 제 자리라도 되는 양. 뫼르소가 다시 방석 위로 올라갔다. 끄트머리가 술에 젖어 색이 짙게 변해있었다. 눅눅한 술향기 위로 취하지도 않은 낯 들여다보자니 입안이 쓰다. 아니, 한참 다물어 입안에 단내가 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걸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상이 고개를 기울였다. 입맞춤이라도 바라는 모양이기에 가만 감은 눈을 지나 이마 위로 손가락을 세워 딱, 소리가 나게 튕겨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 그럼에도 행하는 것이, 모르겠다. 가끔은 변덕 부려도 좋지 않은가. 자신은 제가 부모인양, 친우인양, 혹은 곁방에 낀겨둔 첩실마냥 구는데. 이쪽이 괭이 취급하는 것이 무어 문제라고.

딱, 하고 소리난 이마가 붉게 물들기도 전에 이상이 물에 빠진 고양이 마냥 눈을 치켜떴다. 검날에 가는 손목을 틀어쥐고 끌어당겼다. 그제야 달래주듯 입술을 내어붙여주자 온기 물들기도 전에 입술을 깨물었다. 혈향이 지독히도 흐른다. 그대로 중심을 뒤로해 정자에 누워버렸다. 지탱할 곳 없는 이도 딸려와 그 위로 엎어지듯 무너졌다.

하, 하하.

허탈한 웃음 뒤로 기어이 광증이오. 하는 말이 귓구녕을 스친다. 갈라보지. 일생 무엇 들었으랴 싶었으니. 그 등 위로 무게실어 끌어안으니 꿍시렁하는 소리만 들릴 뿐 굳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차라리 광증이면 좋으련만 싶었다. 그래. 쇠퇴한 무리와 타락한 윗선에 밀려 떠돌 것인가, 남을 것인가. 결정은 이를 수록 좋을 것을 알면서 미루게 되는 것이다. 그래, 너처럼 피라도 적셔볼까…. 중얼거리지는 않는다. 대뜸 그 위에 올라간 이상이 고개를 들어 중얼거렸다. 고민을 아는 양, 모르는 양.

“묘혈이나 파두시오.”

“그래, 그것도…”

묘수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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