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s. D 5

구마사제 베르길리우스 X 악마 단테

창고 by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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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지혜 2,12.17-20

“오늘도 왔네, 아저씨.”

베르길리우스는 교구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건 그가 구마사제로 살아온 이후로 처음 겪은 휴식이었으며, 처음 시도한 반항이었다. 그는 사제 서품을 받은 이후 신을 의심하고 운명에 힘겨워한 적은 있어도 신에게 반항한 적은 없었다. 그에게 내려진 길을 그저 묵묵히 걸어갈 뿐이었다.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말이다. 그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소모되고 무뎌진다고 하더라도, 그 고난마저 자신에게 내려진 운명이라고 믿었다. 신께서 예비하신 길에는 모두 뜻이 있고,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마음가짐이라고 배웠다. 그 또한 그렇게 믿었다. 믿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다고 생각한 지점은 이미 한참 지나있었으므로. 그는 붕괴되지 않도록, 최대한 둑을 높혀 아슬아슬하게 차오르는 우울감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순수한 악의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베르길리우스는 차마 숨길 수 없는 허무함이 그에게 밀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 둑을 얼마나 더 높게 쌓을 수 있을까? 수없이 밀려오는 의심과 불안 사이에서 그는 숨 돌릴 공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것이 행운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는 적어도 잠시간 시선을 돌릴 장소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그 고아원에는 늘 일손이 부족했고, 자라나는 아이들은 호기심으로 늘 들떠있었으며, 베르길리우스는 라피스라는 변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파양 당한 아이를 돌본다는 명분은 그가 듣기에도 썩 괜찮아보였다. 교구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팍팍 냈지만, 결국 그를 재촉할 수는 없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고아원에서 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성당에서 몸을 의탁할까 싶었던 그에게 고아원 원장이 먼저 숙식을 제안했다. 그는 이 고아원의 임시교사가 되어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시작했다. 늘 타지를 돌아다니며 부실했던 식사는 따듯하고 든든하게 변했고, 아무도 말 붙이지 않았던 그에게 아이들의 말소리가 스미기 시작했다. 그를 의심하고 동물원의 동물 보듯 하던 시선대신 아이들의 순수한 호기심이 담긴 눈길이 닿았다. 그는 진정으로 이 공동체 안에서 치유됨을 느꼈다.

베르길리우스는 대부분 몸으로 하는 일을 도맡아 했으며 막 혈기 넘치는 사내애들과 노는 것도 그의 몫이였다. 그는 몸으로 하는 일은 뭐든 잘했기에 공놀이의 심판을 맡거나 캐치볼을 하거나, 심지어는 장작까지 패오곤 했다. 아이들의 학구열 넘치는 질문 또한 잘 답변했으며, 매일 밤 잠에 들기 전에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도 그의 몫이였다.

이곳은 아늑했고,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저 퇴마로 쓰여지는 삶이 아닌 다른 인생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작은 시골에 성당을 하나 세워, 고아들을 가르치며 조용하게 살아가고 싶다.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인간의 선함을 의심하지 않으며, 그저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그가 그 고아원에 머문 두 달은 정말로 꿈과 같은 시간이었다.

한 달이 막 지나갔을 무렵, 교구의 독촉이 시작됐다. 지금도 악마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일각을 다퉈 싸우고 있다고. 당신이 필요하다는 편지에는 일부 책망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참 세심하도 그를 비난할 뿐, 라피스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건들이지 안 될 부분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선명한 의도를 읽고서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가볍게 자신의 생존을 알리는 안부 편지, 그리고 곧 돌아가겠다는 기약없는 약속을 적었을 뿐이다.

편지를 부치러 시내에 다녀오던 날,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장난감 가게를 들렸다. 한 달동안 그래도 같이 지냈다고 아이들 개개인이 좋아할 장난감들을 하나하나 담던 와중이었다. 그는 라피스의 선물을 고르려다 발걸음을 멈췄다.

라피스는 여전히 방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방은 혼자 쓰고 있었고, 그녀의 소꿉친구인 가넷만이 그 방에 함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가벼운 노크와 함께, ‘라피스, 나야.’ 이 말 하나면 굳게 닫혀있던 문이 스르르 열렸다. 틈새로 살짝 보인 그 방은 늘 불을 끄고 있는지 어두웠고, 방 안에선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줄기만 스칠 뿐이었다.

그녀는 원할 때 방 밖으로 나왔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선 잘 보이지 않았으나 비가 오기 전날 오후에는 반드시 나왔다. 고아원 뒷편의 나무를 타고 올라가 저 먼 곳의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베르길리우스는 처음에는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그녀는 그 순간 만큼은 도망치지 않았기에 짧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무감한 백색 시선이 그를 스치고 지나가 흐린 회색빛 하늘을 바라보며, 그 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의 소꿉친구인 가넷은 베르길리우스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며 그를 잘 따르는 편이었다. 다른 사내애들 처럼 몸으로 하는 운동은 좋아하지 않았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단 둘이 캐치볼을 하는 걸 유독 좋아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세심한 편이었고 공감 능력이 뛰어났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라피스가 가넷 만큼은 곁에 두었던 것은.

‘라피스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해요.’

언젠가 가넷이 속삭였던 말이었다. 그는 베르길리우스가 라피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도시에서 나갈 수 있게 되면 모든 맛을 먹어볼 거라 그랬어요. 단순히 사람들이 정의한 다섯 개의 맛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맛들을 먹어볼 거라고.’

그렇다고 저한테 홍삼 사탕을 준다니까요. 쓴 맛이 제일 오래 간다나. 하고 말을 덧붙인 가넷이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던 기억이 난다. 천천히 차오르는 가슴 속의 따듯한 애정을 차마 숨기지 못해 넘처흐르는 미소였다. 정말 좋다는 마음을 감추지 못해 멋대로 얼굴이 움직이는 순간. 순수한 친애가 머무르는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면 그 또한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라피스의 몫으로 여러 맛이 들어있는 사탕 한 봉지를 골랐다. 가넷의 몫은 새 글러브였다. 다 같이 쓰는 글러브 말고 그의 것을 하나 사주고 싶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외에도 인형이나 레고, 공기나 축구공 같은 것을 더 샀다. 챙기다보니 한 아름이었는데, 마지막으로 노란 꽃 자수가 새겨진 손수건을 담았다.

물건을 다 고르고 나니 이미 어둑해지는 무렵이었는데, 유독 해가 짧아지고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겨울이 찾아오고 있었다. 날은 점차 짧아지고 혹독한 계절을 경고하듯 단풍이 든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늘 이 계절은 불길했다. 어째서일까. 베르길리우스는 추위를 유독 싫어했다. 손 발이 차가워지고 가슴속을 스미는 한기가 단순히 육체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그가 인류의 고질병인 외로움에 떨고 있음을 확인할 때마다….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차마 인정하기 싫었던 것 같다.

베르길리우스가 선물을 한아름 가져오자, 아이들은 평소보다 배는 즐거워했다. 아무리 사랑으로 아이들을 키운다지만 별다른 후원자 없는 고아원의 재정이 넉넉할리 없었다. 그렇기에 선물은 자기 생일과 크리스마스 때 두 번으로 정해져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가능하면 이 고아원에 그의 모든 재산을 후원하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그 또한 있는 재산이 얼마 없었다. 자신이 머무르는 성당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개인에게 후훤하는 인물은 있었으나 교구에서 그 후훤액을 받는 탓이었다. 그의 비행기표나 숙소를 모두 예약해주는 대신, 베르길리우스에게 떨어지는 돈은 생활비 몇 푼 정도였다. 그는 검소하게 사는 탓에 이런 방식이 옳바르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별로 항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고아원의 사정을 알게 된 이후에는 근 시일내에 빨리, 교구에 항의하여 제대로 후원금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에게 돈을 밝힌다느니, 부패했다느니 성직자답지 않다느니 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 그저 방관해온 행태를 두고보지 않을 셈이었다. 무엇이 진정한 봉사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그에게 봉사하는 마음이 없다는 말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베르길리우스는 마지막으로 원장에게 꽃 자수가 그려진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녀는 눈을 두어번 깜박이다 고맙다며 입을 열었다.

“아, 이 꽃… 메리골드네요.”

“메리골드… 꽃은 몰라서 그냥 골랐습니다.”

“꽃말이 좋아요. 나중에 한 번 찾아보세요. 고맙습니다.”

거듭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베르길리우스는 그 손수건에 새겨진 옅은 자수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정교해서 살 때와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그는 나중에 식물사전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2층으로 향했다. 라피스는 나와있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선물을 전해줄 생각이었다.

추워질 수록 삐걱이는 계단을 걸어오르며 곧 겨울을 준비 해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라피스가 오르는 나무도 벌써 잎을 하나 둘 떨어트리고 있었다. 담요를 싸매며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는 그 백색 시선과 겹쳐지는 하늘이, 곧 겨울이 온다는 것을 알리듯 마지막 푸르름을 발하고 있었으니까. 베르길리우스는 조심히 문 앞에 서서, 잠깐 숨을 고른 뒤 노크했다. 라피스.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선물을 사왔어.”

잠시 고민하나 싶더니, 가벼운 소리와 함께 문은 쉽게 열렸다. 베르길리우스는 늘 이런 명분이 아니면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원최 그의 성격이 그랬지만 라피스에게 말을 걸 때는 더 대하기 어렵다고 느꼈던 것 같다. 나무 아래서 서로 시선을 맞추지 않을 때는 그저 그 자리에 있는 자체로도 서로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시선을 마주하면 베르길리우스는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시험 당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성탄은 한참 멀었는데.”

아니, 한참까지는 아닌가. 라피스가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가 시선을 맞췄다. 어두운 방 안에서 옅은 빛이 보였다. 베르길리우스는 문득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들어가도 되겠니?”

사탕봉지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라피스는 문틈으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에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 모습은 꼭 그가 말하길 기다린 것 처럼 보이기도 했고, 의외의 행동임을 되새기는 것 같기도 했으며, 결과적으로는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제야 그가 한 걸음 먼저 다가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라피스의 방은 사실은 2인실이었다. 그녀가 이 방을 혼자 쓸 수 있게 된 것은 고아원에 방이 남았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겠지만, 그녀와 평생을 같이 자라온 아이들도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라피스를 조금 불편하게 여겼다는 점에 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미묘한 껄끄러움이 있다고 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거부감이 분명 그녀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있다고 여겼다. 그의 눈길을 끌었던 그 시선 말이다. 허공을 탐하는 것 같으면서도, 모든 것에 무감한 듯 보이는 그 눈이.

베르길리우스는 그가 문 틈으로 보았던 광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방문 맞은편에 크게 놓인 창문 앞에 촛불이 하나 놓여 있었다. 어두운 방을 밝히며 은은한 온기를 주는 그 촛불 앞에는 읽으려는 용도는 아닌 듯한 성경이 놓여있었다. 베르길리우스가 천천히 창가로 다다르려는 참에, 라피스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

“음?”

베르길리우스는 고저 없이 그를 부르는 말에 살짝 긴장한 채 고개를 돌렸다. 나가라느니, 혹은 다른 부정적인 말이 쏱아질까봐 저절로 가슴이 조여들었다. 생애 처음으로, 그는 타인과의 거리를 좁혔다. 먼저 손을 내밀고 한 발자국 들어가 관계를 진전 시키려고 했다. 그 탓인지 꽤 많이, 떨리고 두려우며 긴장됐다.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안 걸까? 라피스는 가만히 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선 픽, 웃음을 터트렸는데, 베르길리우스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그녀의 아이같은 웃음에 벙찐 얼굴을 보였다.

“사탕부터 줘야지.”

옅은, 키득이는 웃음소리 사이로 가넷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치만요, 아저씨. 사실은… 사실 라피스는…

생각보다 더 잘 웃고, 장난꾸러기예요.

베르길리우스는 그날 이후 그녀의 방에 들어갈 수 있는 두번째 사람이 되었다. 라피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읽는데 보냈다. 사람을 들이고 난 뒤에도 두꺼운 소설책을 읽거나 침대 위에서 예술사에 관한 책들을 읽곤 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녀가 창문 앞에 둔 성경을 뒤적이곤 했는데, 유독 지혜서에 구김이 많았던 것을 기억했다. 그녀는 지식의 허기에 시달리곤 했는데, 가끔 책을 읽다가 단어 몇 개를 그에게 물어보곤 했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문장을, 소설의 내용과 명확히 제시된 의도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은 결코 열정 넘치는 토론장이 아니었다. 라피스는 침대에서 온갖 자세를 바꿔가며 책을 읽었고 정 심심하고 재미없는 내용이면 그에게 다가와 작은 장난을 치곤 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녀가 배웅-그 방에서 나가는 짧은 걸음이었을 뿐이지만-하겠다고 나섰던 날을 기억했는데. 베르길리우스는 라피스가 그의 등 뒤에 ‘바보’라고 적힌 종이를 붙인 것을 두 시간이 지난 뒤에야 발견했다.

라피스는 그의 핑계이자 계기였으며, 그 누구보다 편안한 아이였다. 왜 가넷이 그녀와 같이 있고 싶어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가넷이 라피스를 챙겨주는 줄 알았으나 곧 그 반대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라피스와 같이 시간을 지대다보면 깊은 바다에서 느껴지는 안정감이 찾아왔다. 자신의 꿈과 길을 알고 굳은 의지를 가지며 미래를 꿈꾸는 사람. 베르길리우스는 눈 앞의 어린 소녀가 그가 만나온 모든 사람보다 단단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기에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안정이 그 무엇보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라피스는 더 먼 곳으로 나아가고 싶어했다. 언제나, 늘. 지평선을 넘어 이름만 아는 나라에 가서 그들의 그림을 보고, 유물을 보고, 더 많은 음식을 먹으며 살아갈거라고 말했다.

그녀는 베르길리우스가 구마의식을 하러 이동한 모든 지역과 나라를 궁금해했으며 그는 촛불 하나만 켜진 어두운 방 안에서 가넷과 라피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집 안에 꽁꽁 봉인한 저주를 호기심에 풀어 탈이 난 소년부터, 가족 대대로 악마의 먹이가 된 소녀 이야기. 길을 지나다 악마들린 부랑인을 봐 그 자리에서 퇴마했다는 일까지. 베르길리우스는 어째 한쪽으로 편협해진 주제를 인지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웠다. 이제껏 타지에 가면 그곳의 음식과 문화를 즐길 생각도 못해봤던 것이다. 그는 괜한 의심과 부정에 괴로워하느라 흐린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 고아원에 두 달 정도밖에 머물 수 없었다. 교구에서 보내오는 독촉장이 거의 애원이 되고, 그가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주겠다는 확답을 받아내고 난 뒤에는 여정을 더이상 미루기도 미안해진 탓이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의 통장에 찍힌 금액의 반 이상을 고아원에 후원한 뒤에 제법 후련해진 발걸음을 옮겼다. 라피스는 그가 떠나는 것이 뭇내 아쉬운듯 가만 올려보다가도, 그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조를 한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성탄 전날에는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그는 약속했다.

베르길리우스는 두 달간 쉰 탓에 눈코뜰새 없이 밀려오는 구마일정을 감당해야했다. 그는 자는 시간까지 쪼개 숟한 사람들을 만나고 퇴마를 위한 작업에 힘쓰면서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를 믿지 못하면서 왜 이리 늦게 왔냐고 원망하는 사람들에, 예전이라면 심란한 마음에 밤새 앓았을 말들에도 의연히 넘길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예전처럼 굳은 빵 하나로 식사를 넘기지 않았으며 가능한 방안에 있는 것보다는 거리를 걸었다.

거리의 간판, 공원의 분수대. 미술관처럼 보이는 건물에는 기꺼이 들어가 다양한 작품들을 구경했다. 가능한 식당에 들어가 식사했고,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라피스와 가넷의 또 다른 눈과 귀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저절로 베르길리우스의 정신은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아졌다. 그는 이제 채찍을 꺼내지 않았으며 일기를 썼다. 돌아가면 들려줄 이야기가 하나 둘씩 늘어났다. 이렇게 많은 걸 할 수 있었구나, 새삼 깨달았다. 이전에는 하루가 24시간인 것이 늘 길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물론, 퇴마를 마쳤다고 바로 고아원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 근처의 지역을 돌아다니며 추가로 퇴마할 사람들이 있다면 도왔고, 사건에 따라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도 했다. 가령 퇴마를 끝낸 뒤에는 그를 고소한다던가, 약속했던 댓가를 주지 않는다던가. 오히려 그를 사이비로 치부하며 돈을 내놓으라는 일도 꽤 흔했다. 예전이라면 숱히 겪는 일임에도 그 하나하나에 크게 흔들렸을 베르길리우스는 이제는 한 귀로 흘리며 성탄 전까지 돌아갈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다행히도 교구의 방법-이제는 알아서 법조인을 연결했다-으로 베르길리우스는 12월 23일에 비행기에 올라탈 수 있었다. 고아원이 있는 지역으로 도착하면 막 성탄 전야가 될 것 같았다. 그는 귀찮게 발이 잡혀있는 동안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잔뜩 사서 케리어에 실었다.

라피스에게는 틴케이스에 담긴 제비꽃 사탕을 샀다. 그에게는 생소한 맛이었기에 그녀 또한 좋아할 것 같았다. 베르길리우스는 입 안에 퍼지는 향긋한 맛에 기뻐할 라피스를 생각하며 가방에 든 틴케이스를 매만졌다. 성탄 전야를 준비하는 건 각자 다양하겠지만, 베르길리우스는 고아원 원장에게 들은 말을 기억했다. 이 지역에서는 사과를 잔득 사서 애플파이를 만들곤 한다고. 그래서 성탄 날에 이웃에게 파이를 돌리며 성탄을 축하한다고 했다.

그는 비행기에서 내려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초저녁 즈음에 겨우 마을에 도착했다. 막 문 닫기 전의 과일가게에 들려 사과를 한 보따리 산 뒤에는 언덕을 올라갔다. 그 작은 고아원은 언덕을 하나 넘고 난 뒤 목장을 지나 조금만 걸어가면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베르길리우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 손에는 캐리어를, 한 손에는 사과 보따리를 들고 걸어갔다. 기뻐할 아이들의 얼굴을 생각하면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초저녁을 지나 노을이 스쳐가는 그날의 바람. 베르길리우스는 순간 그의 시야에 비쳤다 사라지는 연보라빛 하늘을 올려보다가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하늘에 다시금 걸음을 바삐 옮겼다.

그가 까닭없는 불길함을 인지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하늘이 유난히 어둡고 이르게 그를 맞이하듯 컴컴해졌다. 베르길리우스는 유독 조용한 목장을 지나가며 그의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양 울음소리로 가득 차야했던 목장은 아무도 없는 것마냥 고요했다. 양들이 축사에 들어갔다느니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왜 목초지의 잔디가 노랗게 말라죽어 있는지.

왜 양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것인지.

왜 순식간에 찾아온 암흑이 그를 이끄는 듯, 등을 떠밀듯 연신 너울대는지…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직시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만은, 오늘만은, 여기서는……

제발, 여기만은 안 돼.

이곳만은 안된다고…….

그는 어깨에 매고 있던 보따리를 툭 떨어트렸다. 그의 손에서 떠난 케리어가 뒤로 밀려나다 넘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려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 상황을 믿기 싫어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함께 늦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공존했다. 베르길리우스는 뛰기 시작했다. 오르막을 세차게 박차며 이미 그가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래도. 이번 한 번만은 그의 예측이 빗나가길 빌었다. 삶은 늘 자신을 배신하고 고난을 안겨주었으며, 그의 신은 단 한 번도 그의 부름에 응답한 적이 없었다. 원망하고 의심할 적에도, 그가 가장 신실했을 적에도. 그가 간절히 빌며 부르짖을 때도.

어떻게 이리 잔인하십니까. 그 물음의 답은 이미 적혀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욥기를 읽었다. 알고 있었다. 그의 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임을 알았다.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베르길리우스는 이제 지치다못해 그의 신을비난하고 싶었다. 온 몸에 종기가 나 돌로 몸을 긁어대던 욥의 처지가 오히려 나은 것 같았다. 차라리 그런 방법으로 그를 시험하면 되지 않는가! 그를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며 쓰레기더미 위에 던져놓고 사람들이 비난하게 두란 말이다!

왜 겨우 트인 숨마저 앚아버린단 말인가. 차라리 이리 두지, 영원히 그를 고통안에 놓아두지. 잠깐 꿈꾸엇던 삶과 희망이 지독히 달아 입 안이 텁텁했던 그 순간. 그는 그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오르막을 지나 기어이 모습을 드러낸 고아원은 불온한 안개에 휩싸여있었다. 불 하나 켜지지 않은 건물에는 사람의 온기 하나도 느껴지지 않은 것 같았다. 베르길리우스는 숨이 차올라 심장이 터질듯이 뛰는지, 끊없이 머리속에서 반복되는 끔찍한 예상 탓에 이리 뛰는지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니, 둘 다인 것 같기도 했다. 아이들이 뛰어놀던 앞마당에는 누렇게 말라죽다 못해 갈빛으로 변한 잔디가 비틀어져 있었으며 늘 왁자지껄한 고아원 안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채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시퍼런 색으로 잠겨버린 이 조용한 공간은 그가 사랑했던 작은 고아원이 아니었다.

그가 사랑하고 싶었던, 그 조그마한 공간은 이런 색이 아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앞마당을 지나 거침없이 문 앞에 도달했으나, 차마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참상을 직접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문 손잡이를 붙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금속의 온기가 그를 감싸안아 온 몸이 떨려왔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가 무너지다 못한 손길로 문 손잡이를 돌려, 천천히 문을 열었다.

짙은 혈향이 그의 비강에 파고들었다. 끔찍한 참상이 느껴졌다. 공포에 직면하여… 베르길리우스가 느리게 읆었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은데, 오히려 시야는 더 뚜렸해졌다. 그는 문 옆에 쓰러진 아이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떨리는 손으로 문을 닫자 반대편 손잡이에 피로 물든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어떻게든 도망치고자 한 흔적이었다.

그가 사랑한 이들의 시신이 쌓여, 몇 번이고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서서히 갈변되고 있는 흔적은 이 참사가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걸 증명했다. 그는 후회했다. 바닥에 쓰러져 온기라고는 남지 않은, 창백해지고 있는 아이들을 지나치며 쓰러질 것 같은 감각을 견뎌내야 했다. 하루만 더 일찍 움직일 걸. 사과를 사겠다고 미적거리지 말 걸. 왜 더 일찍 오지 못했을까? 교구가 뭐라하든 그냥 무시하고 이곳에 있을 걸 그랬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죽지 않았겠지. 적어도 한 달이 지났을 때 이곳에 들렸다면 악의 손길을 알아차렸을지도 몰랐다. 모든 것이 제 탓이었다!

자신이 머물지만 않았어도, 이 아이들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어중간하게 머무른 탓에. 그가 어중간하게 선택한 탓에. 그가…

그가 이곳을 사랑한 탓에.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피로 너울진 길은 그를 인도하듯 죽 이어졌다. 베르길리우스는 여전히 고아원에서 느껴지는 이 불온함에 그 자리서 오열하지도 못하고 몸을 움직여야 했다. 이곳을 이리 만든 악마가 아직 남아있는 걸까? 그를 조롱하기 위해? 그렇다면 그 오만함으 댓가를 치르게 해야했다. 그는 흐릿한 시야를 다잡아 붉은 길을 이어갔으나, 정작 계단을 마주치자 그대로 쓰러지고 싶은 감각에 휩싸였다. 이 비열한 것이 그를 어디로 부르고 있는지 깨달은 탓이었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방.

그의 부름에는 언제나 열리던 그 방.

촛불 하나로 불을 밝힌 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작은 방….

아저씨, 나는 어른이 되면 이 마을을 떠날 거야. 아주 멀리 가고, 아주 많이 먹어볼 거야. 아저씨보다 더.

그 말을 할 때의 너의 눈동자를 기억한다. 늘 무심하게 보였던 그 눈동자에 옅은 희망의 빛이 스미고 유독 뚜렷하게 보였던 네 미소를 기억한다. 침대에 누워 발끝을 까딱이면서도 시선은 늘 책에 인쇄된 수많은 명화에 향해있던 너의 꿈을. 너의 미래를 기억한다. 감히 그 곁에서, 어른이 된 너와 같이 분수대 옆을 걷는 미래를 꿈꾸었던 나를 기억한다. 네 부모는 아니어도 후견인은 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나를….

그 모든 꿈이 산산히 꺠어진 뒤에야 알 수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피로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잔인하게도 그 방문은 피로 진득히 물들어있었다. 그는 마르지 않은 피에 몇번이고 헛도는 방문 손잡이를 꾹 잡고 문을 돌렸다. 그의 손바닥에 누구인지도 모를 아이의 피가 물들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떨리는 몸을 숨기지 못한채 그 문을 열었다. 늘 어두웠던 그 방. 그 방안에는 단 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이미 숨을 거둔듯 한 고아원 원장과… 가넷. 그 아이가 창문 옆에 쓰러져 창백한 낯을 하고 누워있었다. 늘 강인한 열정을 품고 있던 그 몸이 지나치게 차가워 보였다.

훅, 바람을 타고 물씬 비릿한 향취가 그를 감싸왔다. 늘 닫혀있던 그 창문이 열려 커튼을 휘날렸다. 그가 읽어주던 성경이 바닥에 떨어져 바람이 불 때마다 차르르 하고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그 작은 탁상 위에, 라피스가 있었다. 흰 파자마를 붉게 물들이고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던 라피스가, 여전히 무심한 눈을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아저씨…….

그 순간, 베르길리우스는 그녀를 붙잡은 악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라피스가 살아있었다. 아니, 몇 더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았다. 분노와 비탄, 증오가 단번에 덥쳐들어 머리속의 어떤 선이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가 정신을 자렸을 때, 그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시야가 지독하게 흐렸고 정신이 멀어졌다. 라피스는 그를 바라보다가, 그 악마에게 이끌려 창문 밖으로 향하다가도 끝까지 그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표정을 잔뜩 일그러트리고, 비탄의 빠져 비명을 부르듯 그를 불렀다.

아저씨-!

베르길리우스는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자꾸만 손이 헛돌았다. 손을 뻗어 내밀려고 했으나, 그저 힘없이 툭 떨어질 뿐이었다. 그는 기절하기 직전, 그의 옆에서 싸늘하게 굳어있는 고아원 원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앞치마 앞 주머니에 손수건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정교하게 수놓인 그 꽃이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 그래, 메리골드. 베르길리우스는 그 꽃의 꽃말을 기억했다.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정신이 헛돌고 있다. 베르길리우스는 현 상황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근래들어 피로감 짙은 사건이 계속 일어난 탓이다. 베르길리우스는 그를 휘몰아간 사건들이 고작 3일 내에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을 쏙 빼놓고 거부감을 흐리게 한 다음 멋대로 휘두른다. 그 또한 알고 있는 방법이었다만 자주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지 순식간에 휩쓸렸다. 애당초 금일 아침의 경우에는 상상도 못한 인물을 마주친 탓에 머리가 둔해졌다.

그는 차로 입을 축이기도 전에 다음 일정을 처리하려 떠난 여왕을 배웅했다. 베르길리우스는 ‘다음 번에도 꼬옥 본인을 불러야 하오…!!’ 하고 단테의 손을 붙잡고 몇번이고 당부하는 여왕의 모습에 조금 불안해졌으나 현재로썬 두 사람이 어떤 약조를 했는지 알아낼 방안이 없었다. 또한, 그는 여왕과 같이 온 것과는 달리 두 사람의 사이에 서서 떠나지 않는 오티스 상원의원을 바라보았다. 베르길리우스는 제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오티스에게 작게 속삭였다.

“안 갑니까?”

그녀가 그를 슬쩍 흘겨보더니 단테에게까지 다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히려 가야할 건 그쪽이 아닌가? 관리자 님은 오늘도 처리할 일정으로 하루가 꽉 차있다. 하는 일 없이 탱자탱자 노는 네놈과 시시닥거리며 놀 여유가 없으시단 말이지.”

베르길리우스는 문득 그녀의 태도를 보고 있으면 어느날 덴버가 보여준 햄스터가 생각났다. 털이 북실북실하고 서서 앞발을 모으고 있었는데 표정이 묘하게 아첨하는 것 같아 웃긴 사진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물론 그녀를 바라보며 그렇게 귀여운 생명체를 떠올렸다는 사실에 무의식적으로 얼굴이 굳었는데. 그 표정을 뭐라 해석했는지 모르겠다만 조금 더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애당초 존칭은 그렇다 치고, 도대체 그녀에게 단테가 뭐라고 저렇게 깍듯이 대하는 걸까. 단순한 아첨이 아닌, 진심으로 비서 노릇을 하다 못해 그 자체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와 자신이 가장 가까우며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우월감.

우월감? 베르길리우스가 거슬린 단어를 되짚었다. 단테가 뭐기에? 총리도 아니고 총리 후보일 뿐인 상원의원 아닌가? 가문이 좋아서라기엔 그녀 또한 알아주는 명문가다. 하는 태도만 보자면 단테가 총리가 아닌 여왕이라도 되는 것 같다. 아니, 여왕이 아니라 꼭 신처럼….

째깍. 베르길리우스가 더 깊은 상념에 잠기기 전에 끌어올리려는 것처럼. 단테가 시계소리를 내며 패드를 내보였다.

[아, 맞다. 오티스. 오늘 일정 없애주라.]

“네?”

예? 되묻는 오티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단테가 웃었다. 찌르르, 지저귀는 것처럼 울리는 경쾌한 시계소리.

[탱자탱자 놀면서 데이트 할 거야.]


뭐라고. 하는 얼굴을 하던 오티스 상원의원은 이내 베르길리우스를 아들 낳은 후궁을 바라보는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비유 또한 덴버가 보여준 사진에 의한 것임을 밝힌다. 여간, 착실하고 순수하던 우리 관리자님을…! 하는 표정이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낯을 바라보고도 별 내색하지 않았다만 훅 치미는 억울함에 괜한 시계나 바라보았다. 따지자면 착실하고 순수한 건 본인 아닌가? 이 악마에게 휘말리면서 정말 별 경험을 다한다 싶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베르길리우스는 안 오냐는 듯 손짓하는 단테를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되돌아가고 나니 딱 점심 식사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단테는 외투를 챙기고 깨끗하게 세탁한 그의 옷이 담긴 가방을 내민 다음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말했는데, 입도 없는 사람이 식당은 퍽 많이도 안다 싶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슬슬 그의 사무실로 돌아갈 시간이라는 걸 알았지만, 어쨌든 밥은 먹고 가기로 했다. 이 넓은 주택에 차도 없이 걸어가다간 꼬박 하루를 다 써야할테고, 솔직히 그가 끌고다니는 미식탐방은 꽤 높은 만족감을 주었다. 그는 식사를 즐기지 않는 편인데 말이다.

시간이 그리 늦지는 않았으나, 단테가 말한 것처럼 두사람이 탱자탱자 놀며 데이트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한 말이겠지. 베르길리우스는 계단을 내려가기 전 손을 내미는 단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잡아. 그런 말을 하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심지어 내민 손을 보니 에스코트를 하는 쪽이었다. 당최 무슨 생각이지? 이제는 그 재주가 놀라울 지경이다. 베르길리우스는 매번 말을 잃게하는 솜씨에 옅게 숨을 내쉬고는 그대로 단테의 손목을 잡아 돌린 뒤 그대로 검지를 손바닥에 눌러 지긋이 민 상태로 손을 잡았다. 저절로 부드러운 피부와 따듯한 온기가 전해졌다. 이 시계는 자기가 먼저 내밀어 놓고선 그가 꽤 짙은 함의를 담아 붙잡으면 째깍, 하는 소리를 내며 목 뒤를 붉혔다.

정장과 와이셔츠 사이로 아주 살짝 내비친 목이 상처 아래로 붉었다. 분명 만지면 조금 뜨겁겠지. 베르길리우스는 이제 그 생각을 부정하지도 않은채 그냥 흘려두게 두었다. 자신이 이 악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게 그리 중요하던가. 중요한 건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다. 그래야 이용할 수 있지 않은가. 그게 무엇이든….

두사람은 말없이 계단을 내려간 다음에야 붙잡은 손을 놓았다. 베르길리우스는 헛된 째깍임만 내고 있는 시계를 바라보다가 앞에 놓인 차를 바라보았다. 이건 또 어제 타고 온 것과 다른 차였다. 면허는 있다만 대부분 교구에서 주거나 랜트카만 운전하는 베르길리우스에게 차종이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서, 차 앞에 달린 엠블럼으로 이것도 어마어마하게 비싼 차겠군 짐작할 뿐이었다. 어제와는 다르게 돌아서 운전석으로 가지 않는 단테를 보며 베르길리우스가 나직히 입을 열었다.

“안 갑니까?”

그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이 패드를 두드리던 단테가 살짝 몸을 기울여 그에게 가까이 붙었다. 글이 잘 보이기는 하다만 이 퍼스널 플레이스를 가볍게 침범하는 행동이란. 같이 붙어 자기도 했는데 뭐 어떻냐는 태도가 당당히 묻어나왔다.

[오늘은 기사님이 데려다주신다고 해서. 나도 낮부터 말 타서 그런가 몸이 피곤하긴 해서 그렇게 하시라고 했어. 괜찮아?]

“예.”

괜찮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단테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차 문을 열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순간 에스코트 한 건 자신인데 이래도 되는가 싶었으나 애당초 변덕스럽게 보이는 이 시계의 당돌한 제안에 응했을 뿐이니 더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차 안으로 몸을 구겨넣은 베르길리우스는 얼마 안 있어 뎅-! 하는 시계소리를 들었다. 물론, 그 또한 단전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내뱉었으니.

차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기사가 아닌 오티스 상원의원인 탓이었다.

단테 또한 예상하지 못했는지 시계가 조금 더 빨리 감겨드는 소리가 났다. 패드를 보지는 못했지만 대강 들려오는 대답을 들으니 그녀가 기사노릇을 한 건 처음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게 오늘이 아닌 건 분명했다. 오티스는 연신 째깍거리는 단테의 소리에도 ‘괜찮습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이 오티스가 편하게 모시겠습니다.‘ 하며 도무지 물러나지 않았다. 베르길리우스는 제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필사적으로 단테의 곁에 있으려는 이 사람이 퍽 거슬렸다만 시간이 더 지체되다간 배가 등에 달라붙는다는 말을 실감하게 될 것 같았다. 결국 그는 단테의 옷깃을 잡아 주욱 당겼다.

“일단 가시죠. 여기서 계속 있을 건 아니잖습니까.”

[괜찮겠어?]

베르길리우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괜찮지 않은 건 뭘까. 베르길리우스는 단테가 꾸준히 묻는 그 ‘괜찮아?’라는 물음에 항상 긍정의 답을 내뱉었으나 이는 관성적인 대답임을 알고 있었다. 사실 사람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나. 진정 제 삶이 괜찮은지 살피면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길게 이어진 도로를 지나 정문을 지날 때 즈음에야 예쁘게 조경된 나무가 서서히 멀어졌다. 베르길리우스는 푸르렀던 시야에 서서히 드러나는 건물을 바라보다 문득 눈을 깜박였다. 손등에 간질간질한 감각이 느껴져 옆을 돌아보니 단테가 장갑 낀 손으로 그의 손등에 선명히 새겨진 핏줄을 매만지고 있었다.

“뭐 합니까?”

아무래도 운전석에 듣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지, 소리가 조금 더 작게 새어나왔다. 두어번 더 그의 손등을 살짝 문지르던 단테가 반대 손으로 패드를 두드렸다.

[신기해서. 내 손은 이렇게 튀어나오지 않았거든.]

볼래? 단테가 그의 손을 매만지다 말고 장갑을 꾸물대며 벗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검은 가죽장갑 사이로 내보인 얄쌍하고 긴 손을 보았다. 험한 일을 안해서 그런가 어디 거슬리는 것도 없이 매끄럽고 보기에도 좋았다. 창백할 정도로 희고 마디마디 말라 관절이 보인다는 점이 조금 힘 주면 금방 부서질 것 같기도 했다.

베르길리우스는 물끄러미 그 손을 바라보다 덥썩 붙잡았다. 체온은 생각보다 서늘한 편인데, 금일 아침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따듯했단 말이지. 그는 굳은살 하나 없는 매끄러운 손바닥을 엄지로 문지르다가 손 끝을 살짝 세워 손금을 타고 주욱 내려갔다. 손목을 간지럽히며 손을 돌릴 즈음에는 서늘했던 손이 어느새 따끈해져 있었다. 베르길리우스가 고개를 살짝 틀어 단테를 바라보니 그를 차마 보지도 못하고 틱, 티익, 시계바늘이 헛도는 소리만 냈다. 무릎 위에 올라간 패드에는 말이 되지도 않은 오타가 적혀있었다.

[그렇게 신ㄱ디 ㅎ;.?]

만나고 나서 단 한번도 오타를 낸 적 없었던 단테가 고작 이정도 접촉에 당황을 숨기질 못했다. 정작 어제 저녁 그에게 안겨들었던 건 자신이면서. 아, 베르길리우스가 깨달았다는 듯 낮은 탄성을 흘리며 단테의 손등을 꾹 누르며 전체적으로 문질렀다. 어쩌면 단테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상황에만 그렇게 대담한 걸지도 모른다. 이미 머리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렸으니 행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다는 걸까. 그렇다면 그가 취할 행동은 하나뿐이다.

“신기하군요.”

발견한 약점을 잘 써먹을 수 밖에. 베르길리우스는 손을 조금 더 올려 마디마디 드러난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꼈다. 처음보다 따듯하고 붉어진 손이 마음에 들었다. 단테가 그의 속을 읽을 수 있었다면 불만스럽다는 듯 빠르게 째깍거리며 ‘페어플레이 하자고! 당신 약점도 내놔!’라고 말할 게 뻔했지만, 안타깝게도 이 악마는 그런 능력까지는 없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의 상태를 모르는 척 농밀하게 손을 매만지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그는 살면서 처음으로 해보는 스킨쉽에 최대한 그의 반응을 살피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어렸을 적 애인을 사귀지도 않았고,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별다른 시청각 자료를 본 적도 없었다. 애당초 성직자라는 직업은 금욕의 대명사 아니던가. 다만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베르길리우스에게 이 금제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살아오면서 타인에게 끌림을 느껴본 적이 없었으며 혈기 왕성한 청소년기에도 욕망에 휘말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는 자신이 잘 하고 있는 걸까 의구심이 들었으나, 그 떄마다 그의 손길 하나하나에 착실히 반응하는 시계를 보면 좀 마음이 놓였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틱, 하고 태엽이 헛도는 소리, 결벽적으로 싸고도는 와이셔츠가 덥다는 듯 반대손으로 목깃을 당겨 두어번 크게 없는 숨을 내뱉는 것 같은 행동. 그리고 그 사이로 내보이는 붉어진 목 주위가, 베르길리우스는 퍽 마음에 든다는 듯 시선을 흘렸다. 그 집요한 눈길을 알아챘는지, 단테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그와 마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조금 더 좁혀졌고, 그의 시계와 베르길리우스의 얼굴이 마주 보다못해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질 무렵.

빵——!!!

하고 자동차의 경적이 울렸다.

고개를 돌리니 자동차 경적 위에 주먹을 올린 오티스가 가만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말을 하나하나 씹어뱉으며, 차마 언성을 높이지는 못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겨우 웃었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죠 관리자 님.”

단테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리나케 깍지 낀 손을 때어내고 장갑을 손에 쥔 채로 반대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허둥대는 모습이 뻔히 내보였다. 베르길리우스는 내심 아쉽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로 오티스와 시선을 마주쳤다. 저 시선이 거슬리는 것도 한 두번이지. 슬슬 네가 뭘 할 수 있지?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왜 덴버가 그렇게 도시 아침 드라마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베르길리우스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린 뒤 문을 열고 내렸다.

단테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꽤 정신을 회복했는지 아무렇지도 않으려는 듯 걸음을 옮기며 그보다 반 발자국 더 빠르게 걸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불협화음을 만족스럽게 여기며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슬슬 베르길리우스는 단테가 미식에 꽤 관심이 많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정작 자신은 시계머리를 하고 있으면서 말이다. 물론 미식탐방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훌륭한 밑받침이 된다.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그런 상태에서 정치적 이야기든 금전적 이야기든 좋은 인상을 남기기 훨씬 쉬어지기 때문에. 다만 그렇다기에 이 식당은 프라이빗한 분위기가 적었고, 룸으로 안내받기는 했지만 정치게 인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들리는 식당인 게 뻔히 보였다. 우와, 예비 총리다. 하고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놀라움과 호기심이 가득 묻어나왔다. 사진까지 찍으려고 들었으나 그 시도는 오티스 상원의원에 의해 단번에 수포로 돌아갔다. 이 때 베르길리우스는 솔직히 조금 편리하다고 느꼈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타기 직전, 단테가 패드에 글을 적었다. 토독,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이제 데려다줄게. 가야하지?]

혼자갈 수 있습니다, 라던가. 괜찮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으나 단테는 이미 그의 사무실 위치를 알고 있었다. 물론 그걸 타인에게 보이거나 알린다면 극도의 거부감 이전에 저 수면 밑바닥에 잠겨 늘 그와 함께하는 분노. 그 화가 문득 뛰쳐나왔겠지만… 저기 차 운전석에 앉아 그들이 타는 것을 기다리는 오티스 상원의원이라면 이미 그의 사무실 위치를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이리 단시간에 베르길리우스의 사무소를 알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고. 단테의 위치를 추적하며 자연히 알게 됐을테지. 베르길리우스는 결국 그의 안식처를 멋대로 알려버린 시계를 바라보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벌어진 일에 후회하거나 화를 낼 수는 없으니. 물론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베르길리우스는 엎질러진 물을 바라보는 편에 가까웠다. 물컵을 엎지른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결국 그걸 막지 못한 자신에게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지 않은가. 그는 어쩔 수 없다는 티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테는 차를 타자마자 [베르길리우스의 사무실로 가줘.]라고 말했는데, 그의 예상처럼 오티스는 주소도 묻지 않고 차 시동을 걸었다.

가로수를 지나 사거리를 두 번. 식당은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이었는지 얼마 달리지 않아 그가 아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퇴마 일정이 아니라면 대중교통 보다는 직접 걷는 걸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가 아는 길과 강변, 건물을 지나 차는 한적한 거리에 들어섰다. 베르길리우스가 사무실 건물을 계약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인적이 드물 것이었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웠다. 가끔 사무소 인원들은 배달이 안 된다며 툴툴 거리기는 해도 무엇보다 보안이 중요한 걸 알고 있는 탓일까 순순히 그의 선택에 동의했다. 아니, 따지자면 그의 말에 반기를 든 게 손에 꼽힐 정도인 것 같다….

베르길리우스가 그런 상념에 빠져있을 즈음, 차는 그의 사무실 앞에 멈춰섰다. 베르길리우스는 가볍게 몸을 움직여 차에서 내렸는데. 그 맞은편에 단테도 서 있었다. 음? 그가 입을 열었다.

“수고 많았습니다. 식사도 괜찮았고….”

[끌고 다닌 건 나인데 뭘.]

베르길리우스는 미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치미는 불안감에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들어가십—”

“우와~ 대표!”

드르륵,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베르길리우스는 기어이 그가 예상한 상황이 왔다는 것에 한숨을 푹 내쉬면서 가볍게 이마를 짚었다. 차르륵 발이 올라가는 소리와 함께 창문 너머 얼굴 셋이 빼꼼 나와있었다. 째깍, 고개들어 가만 지켜보던 단테가 베르길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하는 몸짓. 그가 설명 이전에 빨리 단테를 차 안에 밀어넣기도 전에 먹이를 기다리는 새처럼 고개를 내맨 이들이 한 마디씩 했다.

“대표. 말도 안 하고 외박이라뇨.” 이건 리카코.

“신문 봤어요? 대표가 대문짝하게 나와 있던데.” 이건 덴버.

“신문 뿐인가. 긴급 속보로 나오는 건 첨 봤데이.” 이건 란 옌이다.

베르길리우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돌렸다. 들어가, 그런 뜻으로 손짓하다 영 아쉽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셋이 슬쩍 뒤로 물러나나 싶더니 기어이 그 말을 뱉고 말았다.

“대표. 데려오면 안 돼요?”

심지어 리카코였다. 아예 작당을 한 모양이지. 셋이서 속닥거리는 걸 보며 진땀 뺐을 난슬이가 절로 눈에 그려졌다. 덴버나 란 옌이 말해봤자 거절할게 뻔했으니 그나마 말이 먹힐 인물을 골랐을 테고. 사무실 안은 이미 주요 서류를 숨겨둔 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당연하지 않나. 몰래 글로만 살펴보던 감시대상이 냉큼 안까지 와준다는데. 심지어 그 의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떻게 째깍이는지 유독 궁금해 하던 애들이었다. 단순히 상원의원을 만난다는 기대감이 아닌, 따지자면 연구원이 실험체는 보는 눈빛이랄까.

이렇게되면 베르길리우스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사무소 인원들이 베르길리우스의 선택에 대부분 무조건 찬성하는 것처럼, 베르길리우스 또한 사무소 애들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가능한 들어주고 싶었다. 결국 그는 다시금 닫히는 창문을 바라보다 단테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깐 있다 가겠습니까. 애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애들. 단테가 째깍 소리를 내더니 패드에 글을 적었다.

[응. 보고 싶어.]

이내 그의 장갑낀 손으로 그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손길을 가만 바라보다 고쳐쥔 다음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 안은 그가 예상한 것처럼 꽤 멀끔히 꾸며져 있었다. 축! 하고 폭죽이라도 안 터트린 게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단테는 연신 고개를 돌려대며 신기한 티를 냈다. 그가 주로 휴식을 취하는 소파 위에 널린 담요라던가, 문가에 있는 정수기와 탑처럼 쌓인 종이컵. 평소보다야 깨끗하지만 여전히 서류가 잔뜩 쌓여있는 테이블을 지나면 화이트 보드가 있었다. 단테는 여기저기 붙여있는 서류라던가 신문이 신기한 것처럼 고개를 돌리다가 덴버와 리카코에게 둘러쌓였다.

이거 돌아가?

아냐. 역시 안 돌아가네. 잠깐 만져도 됩니까?

안 부술게.

그럼. 안 부수지.

째깍째깍. 살려달라는 듯 연신 시계소리를 높여 가는 단테를 힐끔 쳐다본 베르길리우스가 어느새 그들 옆에 서서 당장이라도 단테를 구출하고자 하는 오티스를 바라보았다. 다만, 안타깝게도 이쪽은 란 옌이 느물느물 다가가 말을 건네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거 놓으라던 오티스는 어느새 얼굴을 굳힌채 란 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베르길리우스는 점차 분위기가 무거워지가 시작한 두 사람을 멀리하고 그 주변에서 뻘쭘하게 서있는 난슬이에게 다가갔다.

“잘 있었나.”

“아, 네!”

그제야 긴장이 살짝 풀렸는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가장 늦게 들어와서 그럴까. 아니람 남은 선배들이 각자 개성이 강해서 그런가. 난슬이는 유독 뻣뻣했다. 낯을 가린다던가 그런 말과는 다르게 말 그대로 몸이 굳었다. 긴장을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언제 한 번, 리카코가 난슬이에게 너는 생각이 너무 많다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가 입힌 정장 상의를 벗고선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하도 많은 일이 지나가서 그런가, 안전한 공간에 도착했다고 느낀 순간부터 몸에 피로감이 훅 쏱아졌다. 아니, 안정감일지도 모른다. 금방이라도 눈을 감기우는 감각이 아닌 어깨에 따듯한 수건이 걸쳐지는 감각이었으니 말이다. 베르길리우스는 난슬이 건내주는 인스턴트 커피를 들이켰다. 적당한 온기에 기분이 나아졌다. 이내 쉬지않고 째깍거리며 살려달라는 듯 그를 바라보는 단테를 마주봤다. 자신을 이곳저곳 끌고다닌 복수 겸 이대로 시계태를 붙들고 시계바늘을 툭 건드리며 제 호기심을 양껏 채우는 두 사람에게 던져줄까… 하는 못된 생각이 들었으나. 베르길리우스는 실천에 옮기지 않은 채 가볍게 걸음을 옮겨 단테의 팔을 잡아챘다.

“이제 그만.”

에이, 하고 실망한 소리가 들려왔다만 두 사람은 순순히 한 걸음 물러났다.

“얼마나 봤다구요.”

“이미 다 봤잖아.”

느릿하다만 분명히 온기가 묻어난 음성. 베르길리우스는 가볍게 핀잔하듯 말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옅은 미소를 띄웠다. 그 미미한 웃음를 바라보던 단테가 느리게 째깍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의 제질이나 구조 같은 것을 대강 파악했을 두사람을 바라보았다. 실제로 그 구조를 알기 위해선 저 합판을 떼어내야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니 이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한다는 얼굴이었다.

잡아챈 팔을 놓으려는 찰나, 베르길리우스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단테를 바라보았다. 굳어있었는데 긴장이라기 보다는 충격에 가까웠다.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그럽니까?”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주욱 바라봐도 단테는 남은 잔재를 털어내듯 패드에 글을 적었다. 사무실 안쪽에 있는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기 안쪽은 뭐야?]

베르길리우스는 그 손가락 끝을 가만 바라보았다. 창문 옆에 있는 화이트 보드를 지나 가장 안쪽 방. 크고 긴 창문이 하나 있다만 안에서 발이 쳐져 있어 보이지 않았다. 궁금합니까? 그가 가볍게 묻자 단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는 것 보다는 보여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제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제가 따로 쓰는 공간입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때나… 외부 인력과 미팅할 때 쓰곤 하죠.”

우와, 하는 탄성소리가 들릴 것 같이. 단테는 사무실의 불을 켜주자마자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창문을 가리던 발을 만져보기도 하고, 사무실 안에서 밖을 들여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가 좋아하는 원목 탁자 위에 올려진 지구본이라던가, 자주 사용하지 않아 굳어있는 깃펜과 잉크. 여러 서류와 신문을 지나 책장에 꽂힌 책들의 이름을 죽 읽어보는 듯 했다. 그렇게 신기한가. 자기도 사무실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을텐데. 매번 직원들을 집으로 부를 수는 없을테니 말이다.

단테는 책장을 지나 갈색 천으로 가려진 벽을 바라보았다. 째깍이며 패드를 두드리는 게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거 들쳐봐도 돼?]

베르길리우스는 대답 대신 직접 천을 거둬주었다. 최근엔 들여다볼 일도 없었고, 미팅할 일이 있어 가려두었던 것이지만 일주일 전만 해도 그는 의자에 앉아 계속해서 벽을 들여다보곤 했다. 단테는 틱, 하는 소리를 내더니 아주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그곳에는 꼭 수사보드처럼 이어진 방대한 사진과 지도, 신문이 붙여있는 벽이 있었다. 붉은 실로 연결한 핀만 있었다면 으레 부르는 형사의 정신나간 벽이라고 할 법했다. 그리고 단테는 그 수많은 글자사이 떡하니 정 중앙에 박혀있는 제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걸 장관이라고 해야할 지. 아니면 무섭다고 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감정 사이에 제 얼굴 옆에 붙어있는 사진, 정확히는 오래된 사진을 프린트한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있었다. 흑백이어서 잘 알아볼 순 없었지만, 분명히 나무에 올라가 있는 사람의 뒷모습. 금방이라도 고개를 돌릴 것 같은 그 애가.

[…라피스구나.]

분명 카론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같은 사람이었다. 단테는 가만히 그 사진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베르길리우스 또한 사진을 바라보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 거대한 벽 한쪽을 매운 수많은 사진과 글이 그의 미련이었다. 그의 집착이자 후회, 원망… 어쩌면 고해와도 같지 않은가. 단테는 그의 속을 헤쳐놓은 해부대 위를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괜찮습니까?”

베르길리우스는 정작 이 벽을 만든 건 자신인데도 왜 저렇게 힘겨운 몸짓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충격적인가? 하지만 그 또한 자신을 조사하지 않았나. 이런 벽이 아니어도 비슷하게 자료를 모아뒀을텐데. 그는 뒷걸음질하는 단테의 등을 받히고 고개를 내리며 나지막히 말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아니면 아직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단테를 바라보다 그는 한 팔에 폭 들어온 등에 그대로 어깨를 꾹 쥐었다. 파득, 몸이 튀어올랐다. 이번엔 정신을 차린 게 확실히 보였다. 아니라면 그를 바라보던 시계를 슬그머니 돌리면서 몸을 뺴려고 할 리 없으니까. 베르길리우스는 최대한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의 팔에서 벗어나려는 단테를 바라보다 꾸욱, 조금 더 세게 눌렀다. 셔츠였으면 등의 흉터를 천 너머라도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붉어지는 목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단테가 패드로 그의 시선을 막았다. 패드를 꾹 쥔 검은 장갑 틈새로 손목이 드러났다. 목과 비슷하게 붉어진 그 피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단테가 아예 패드로 그의 얼굴을 꾹 눌렀다. 왜, 하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뒤로 물리자 그제야 글이 보였다.

[당신 어제부터 왜 그렇게 보는데?!]

“…그렇게?”

우물거리며 패드를 다시 돌린 단테가 재빠르게 글을 적어 다시 그의 낯에 거의 붙을 듯 내밀었다.

[벗겨보고 싶다는 얼굴이잖아!]

“뭐?”

뭐? 베르길리우스가 그대로 굳었다. 단테는 자신도 폭탄발언을 한 걸 알고 있는지 슬그머니 몸을 빼려다가 괜히 힘이 더 들어간 그의 손길에 아야야, 하고 맥없이 째깍 소리나 내야했다.

벗겨보고 싶다는 시선이라. 베르길리우스는 이 망측한 말에 뒷목이 얼얼한 충격을 느끼면서도 일부는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야 따지자면 어떤 성적인 감정 없이 그의 등에 새겨져있을 흉터를 확인하고 싶다는 욕망이었지만, 그 흉터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단테의 옷을 들추거나 벗겨야 한다는 건 사실이었다. 물론 베르길리우스는 단테가 숨기지 못하는 감정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차마 숨기지 못해 드러나는 손목 틈새와 목의 피부가 붉어지는 것. 그러니 따지자면 그는 착의 상태를 더 선호하는 것이 분명했으나 이제 막 피어오른 감정과 이끌림을 섬세하게 구분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단테에게 불행하게도, 베르길리우스는 막 단어를 습득한 아이처럼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그를 벗겨보고 싶어한다는 결론 하나를 더 추가했다. 지독히도 담백한 사고회로에서 온 매듭이었으나 실제로 말로 내뱉으니 미묘하게 실감이 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이조차 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원래 모든 감정은 뇌의 착각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쩔 겁니까?”

뭐? 하고, 이번에는 이쪽이 묻는 듯한 느린 째깍. 시간이 되감기는 듯한 소리. 베르길리우스는 그가 답하기 전에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을 벗겨보고 싶어한다면.”

어쩔 겁니까?

이번에는 시계소리마저 나지 않았다. 단테는 그 상태로 굳어있었고, 베르길리우스는 그의 팔을 움켜쥐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정장 상의를 지나 잘 느껴지지 않는 척추뼈를 훑고 내려갔다. 긴장한 몸이 느껴졌고 패드를 잡지 않은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은 단테가 티익, 작은 태엽소리를 냈다. 지나치게 뜨거운 몸. 그의 숨소리만 옅게 들려오는 밀실 속에서 베르길리우스가 정장 상의 안으로, 손을 넣었다. 흠칫 몸을 튀긴 단테가 그의 품에 조금 더 가까이 붙였다. 베르길리우스는 검지를 밀어 셔츠를 빼낸 뒤 천천히 맨 살결 위로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생각보다 매끄러운 피부가 느껴졌다. 움푹 들어간 척추뼈 위로, 조금 더 손을 밀어넣자 우둘투둘한 흉터가 만져졌다.

그가 남긴 흉터다. 분명 제대로 확인하면 화상자국처럼 남아있을 것이다. 그의 피로 적셔 십자고상을 그린 상처. 베르길리우스가 검지와 중지 끝을 세워 천천히 문질렀다. 손길 하나하나에 숨을 죽이듯 그의 어꺠를 꾹 쥐는 단테의 떨림이 느껴졌다. 더, 만질 수 있을까. 조금 더 깊이. 뼈가 난 대로 손을 밀어 올린 뒤에 튀어나온 날개뼈를 매만지며 그 흉터 위로 입을 맞추고 싶은 욕망이 훅 치밀었다. 베르길리우스가 뻐근해진 몸을 세웠다. 차피 그의 사무실은 밀실이었다. 밖으로 난 창문도 없고, 굳이 있다면 사무실 안쪽으로 이어진 창문이 하나 있었지만 그는 대부분은 발을 쳐놓고 있어서.

……들어올 때, 단테가 발을 만지작거리지 않았던가?

베르길리우스가 재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단테는 무슨 일이지, 하고 상체를 돌린 그 순간 굳었다. 불행하게도, 두 사람은 슬며시 열린 발의 틈으로 얼굴을 붙인 채 그들을 바라보는 네 쌍의 눈을 마주했다.

차르르. 베르길리우스가 그의 등을 매만지던 손을 빼낸 뒤 저벅저벅 걸어가 발을 내렸다. 대표~! 하는 탄식이 들린 것 같았으나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숨을 내쉬었다. 표정 관리가 어려울 정도로 당황했으나 다행히 단테도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런가 째깍거리며 삐져나온 와이셔츠를 잡는 손이 헛돌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베르길리우스가 자괴감에 젖은 한숨을 푹 내쉬며 그에게 다가갔다. 비틀거리는 단테를 제대로 세우고 구겨진 정장 상의를 툭툭 털어주자 단테가 장갑낀 손으로 삐져나온 와이셔츠를 집어넣었다. 깔끔하진 않았다만 뭐 어쩌겠나. 여기서 셔츠가터를 다시 찰 수도 없고.

“…미안합니다.”

째깍. 단테가 패드를 쥐려다 이내 손가락으로 그의 손 위에 글을 적었다.

[아냐, …좋았어.]

이 시계가 뭐라는 거지? 베르길리우스의 시선이 향하기도 전에 단테가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어쨌든 문을 열어야하긴 했다. 두 사람은 마주친 네 쌍의 눈동자-난슬이를 제외한 전부, 심지어 오티스 상원의원도 있었다-를 생각하며 단전 깊은 곳에서 끌어나올 것 같은 한숨을 삼켰다.

달칵.

두 사람은 무슨 밀회라도 들킨 얼굴로, 아니. 따지자면 밀회는 맞았다. 후끈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천천히 사무실에서 나왔다. 베르길리우스는 저 ‘대표 제법인데요.’라는 얼굴을 피하기 위해 부러 조금 더 빨리 걸었다. 오티스 상원의원은 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참는다는 표정으로 단테를 바라보았다. 하아, 베르길리우스가 몇 번일지도 모를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손님 가신다.”

“들어가세요.”

“담에 또 오이소~.”

가볍게 고개를 꾸벅 숙인 리카코와 의자에 앉아 손을 흔드는 란 옌을 지나, 덴버가 꼬옥 오라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들어가세요….”

기가 쭉 빠진 것 같은 단테의 모습에 왠지 이해한다는 얼굴을 한 난슬이를 뒤고 하고, 베르길리우스가 사무실 문을 닫았다. 배웅하려는 건가. 단테가 패드에 글을 두드렸다.

[뭔가… 힘이 쭉 빠졌어.]

아마 그 중에서 베르길리우스의 탓이 8할이곘지만 말이다. 단테가 집요하게 쳐다보는 시선을 무시한 채, 베르길리우스가 차에 타려는 단테를 바라봤다. 오티스는 이미 운전석을 열고 앉기 직전이었다.

“이제 어디로 갑니까?”

단테가 톡, 패드를 두드렸다.

[집으로.]

“당신 집으로?”

시간을 보자니 고작 네 시를 지날 무렵이었다. 일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말이다. 베르길리우스가 부러 놀리듯 차 문을 잡고 그대로 문가에 기댔다.

“하루 종일 탱자탱자 데이트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티익, 단테가 당황한 듯, 아니면 무슨 그런 말을 다 하냐는 듯 연신 머리 위의 불꽃을 짧게 튀기다가 패드를 돌렸다.

[생각해보니까 남은 일이 있어서 말이야. 이제 가야할 것 같아.]

그 정갈한 글 뒤에서 왜 미묘한 기시감이 드는 걸까? 베르길리우스는 두어번 눈을 깜박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다는 표정을 하고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차 문을 놓아주자 단테는 두어번 손을 흔들다가 문을 닫았다. 베르길리우스는 여전히 그를 노려보는 오티스의 시선을 느끼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차는 두어번 시동음이 걸리나 싶더니 금새 멀어졌다. 그 차 꽁무니를 바라보던 베르길리우스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벽걸이에 걸린 코트를 집어들고 말했다.

“위치 추적해.”


추적기는 단순한 보험이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따지자면 방금까지 살을 맞댄 사람을 의심하는 성격까지는 아니었다. 그정도로 강박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악마가 아닌가. 그는 이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란 옌이 오티스를 마크하는 와중 리카코와 덴버가 시계의 정장 목덜미에 위치추적기를 붙이는 걸 보았다. 이내 제 사무실 안에서 등을 매만지며 제대로 붙어있는 걸 확인했다. 물론 그 상처 확인은 단순히 그 이유가 아닌 자신의 사심이 있었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진다는 말인가?

단테가 말한대로 그의 집으로 향한다면 그 추척기는 얌전히 들켜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우리의 사이가 틀어지나? 아니, 애초에 자신이 무엇이기에? 그가 무엇이기에 우리가 틀어질 상태가 된다는 말인가. 배신감을 느끼려면 먼저 신뢰가 싹터야 하는 사이가 되어야 했다. 악마와 신부처럼 애당초 맞지 않는 톱니바퀴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사람 대 사람? 베르길리우스가 속으로 차오르는 비웃음을 삼킨다. 그걸 사람이라고 할 순 없었다.

단테 알리기에리는 악마였다. 그게 그를 설명하는 유일한 단어였다.

삑, 소리를 내며 화면에 붉은 빛이 깜박였다. 차는 한없이 달려나갔다. 베르길리우스가 알고 사람들이 익히 아는 알리기에리의 사유지와는 정 반대로.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코트를 입었다. 란 옌이 그의 한쪽 귀에 이어폰을 끼웠다. 이내 차키를 받은 베르길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세요. 이번에야말로 배웅을 받으며 그는 차고를 열었다.

배신감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진실되지 않은 것처럼 단테 또한 그에게 진실되지 않을 권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는 달리 서로의 비밀을 파해칠 권리 또한 가지고 있었으므로. 베르길리우스는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맞춰 차를 움직였다. 추적하는 걸 알 수 없도록 다른 도로를 타고 달려갔다. 이런 점에 있어서 란 옌은 탁월한 지시자였다. 베르길리우스는 처음 보는 경치를 바라보며 점차 더 빠르게 달려나갔다. 그가 간 적 없는 동네, 그가 본 적 없는 거리. 단테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어디로 가기에 그렇게 어색한 몸짓으로 그를 속이려고 했을까. 베르길리우스는 그저 사무실이였기를, 그에게 보여줄 수 없는 사적인 기밀을 다루는 곳이었기를 바라는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다. 그래,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던 건 진실이었다. 그러나 이 마음에 피어난 감정도 진실이었다. 그가 느끼고 있는 이 복합적인 마음은 그 혼자서는 도무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았다.

자신을 속이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그 이유가 그가 용서할 수 있는 것이었기를 바라는 마음. 이 마음은 사랑과 닮아있는 걸까. 이런 것을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부른다고?

만약 그렇다면, 베르길리우스는 도무지 사랑 하고 싶지 않았다.

매번 마음 졸이며 상대의 행동 하나하나에 매달려 살아가게 되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것은 애정보다는 불안에 가깝지 않은가.

그는 언젠가 보았던 그림을 기억했다. 라피스가 들여보던 책에 있던 사진, 클림프의 연인….

대표, 멈췄어요. 그 사거리에서 오른 쪽, 그리고 유턴 한 다음에 직진하면 바로 있어요.

그의 상념을 깨어내듯 이어폰에서 란 옌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시가지였다. 마당 있는 주택들이 늘어진 집. 사무실로 쓰기엔 어색하고 사택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았다. 베르길리우스는 멈춘 신호에 검지로 운전대를 계속 두드렸다. 그의 심장을 붙잡은 듯한 역한 압박감. 등 뒤를 치고 금방이라도 쏱아질 것 같은 불안에 눈을 질끈 감고 떴다. 도망치고 싶었다.

도망칠 수 없었다. 늘 그랬다. 베르길리우스는 속도를 더 높였다. 곡예와도 가까운 운전을 하면서도 마음 한 편에선 보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분명 있었다. 그 속내에 반발이라도 하듯 차의 속도는 더 높아졌다. 베르길리우스는 막 문이 열리기 시작한 단테의 차를 바라보았다. 스쳐지나가는 것 처럼 바로 그 옆의 집 앞에 차를 댔다. 심장 뛰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두근. 두근하고.

달칵, 문이 열리고 단테가 차에서 내렸다. 오티스는 내리지 않는 걸 보니 차를 다른 곳에 두고 올 셈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런 시가지에 저렇게 비싼 차가 있으면 이목을 끌 것이다. 단테는 차 문을 닫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내 그의 차가 출발해 정차한 베르길리우스의 차를 스쳐지나갔다.

단테는 흰 울타리가 쳐진 앞마당의 문을 열었다. 개가 나가지 않을 정도의 높이로 설치된 울타리라서 앞마당이 훤히 보였다. 전체적으로 희고 안온한 색으로 꾸며진 저택. 문 옆에 화분 몇 개가 놓여있었다. 아직 꽃피지 않은 줄기와 잎이 힘차게 흔들렸다. 어쩌면 꽃이 없는 풀일지도 모른다. 단테가 울타리 문을 닫았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아니면 차 소리를 들은 건지 문이 열렸다.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 문에 단테는 고개를 들고 팔을 벌렸다. 집 안의 사람이 누군지 아는 모습이었다. 아주 익숙하다는 듯, 금방이라도 뛰어들어올 상대를 위해 상체를 살짝 숙인 모습.

이제 가야할 것 같아.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의 말을 기억했다. 그가 본가에 들려서 찾지 못한 시간 동안 혼자 있었을 누군가를 위한 말이었겠지. 베르길리우스가 소리가 나지 않게 차문을 열었다. 살짝 멀리서 얼굴만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래,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

열린 문 사이로 희고 매끄러운 맨 발이 먼저, 열었던 문을 놓는 가느다란 팔이 그 뒤로 빠져나왔다.

구름 위를 겉는 것처럼 가벼운 발걸음을 하고, 언뜻 창백해보이는 피부를 가진 아이.

탁한 잿빛 머리칼을 가지고 순백의 눈동자를 가진 채로,

늘 무감한 듯 자신을 꿰뚫었던 그 시선을 가진 나의……

“라피스….”

베르길리우스는 열린 차 문을 닫지도 못한 채로 그 울타리 앞에 섰다. 호흡이 가빠졌다. 금방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기도 했고, 달려나가 저 애가 환상이 아닌지 끌어안을 것 같기도 했다. 시선이 떨려왔다. 귀에서 이어폰이 툭 떨어졌다. 당황한 시계의 소리도 들리지 않은 채 그는 온전한 침묵의 세상에 있었다. 그저,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이 순간을.

라피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처음 만났던 그 순간 처럼. 멀리서 시선을 마주쳤던 그 날. 분명히 서로를 알아보았던 그 때 처럼.

창백한 입술이 열렸다.

“아저씨.”


[공지]

본 소설은 12월 서울 코믹 월드에서 3개의 미공개 외전을 포함해 단행본으로 출간 될 예정입니다. 선입금 및 통판은 트위터 @il___love 계정 및 포스타입에 게시될 예정입니다. 본 소설을 읽어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얼마남지 않은 엔딩까지 함께해주시면 기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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