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손가락

단테+오티스 / 단테+로쟈

창고 by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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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관리자님, 그들을 정말 믿고 계십니까?”

시작은 이 작은 질문이었다. 언제나 발화는 전혀 관련이 없을 법한 곳에서, 문제는 이렇게 시작된다. PDA를 바라보던 단테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집무실의 뒤쪽에서는 제법 아늑한 분위기를 가꾸기 위해 노력한 모습이 엿보였는데. 창 하나 보이지도 않으면서도 은은한 오렌지 빛을 띄는 집무실의 분위기가 그 답이 될법 했다. 물론, 현 내담자가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 뒤편에는 작은 인형들과 안기 좋은 베개도 있었다. 원한다면 따듯한 차와 다과를 내어줄 수도 있었고. 약간의 쪽잠도 단테의 허용범위 안에 있었다. 그가 시작한 이 면담은 점차 더 부드러운 분위기로 이어지고 있었으며, 업무의 일환보다는 정말 심리상담 같은 느낌이었으면 좋겠다. 단테는 그렇게 바랐다.

그러니 한순간에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드는 그 발화에도. 단테는 별다른 동요 없이 천천히 눈 앞의 내담자를 바라보았다. 오티스는 이 방에 들어왔을 때와 같이, 여전히 정제되고 딱딱한 자세로 그를 바라보았다. 늘상 각이 져 있는 그 모습이 제 앞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익숙해져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라니?>

“관리자님의 아래에 있는 인원, 아. 물론 저는 제외하셔도 좋습니다. 관리자님. 하지만 정의하자면 운전수와 길잡이를 포함한 이 버스의 인원을 모두 칭할 수 있겠군요.”

가끔 오티스의 말과 행동은 조금 과장스러워진다. 평범한 말과 행동으로는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처럼. 꼭, 이렇게 말에 강세를 두어야만 한다는 것처럼. 단테는 이 의문을 그레고르에게 물었고, 쉽게 그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전쟁이라는 거지. 나야 전방에서 그저 팔을 휘두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고, 그것으로 충분했지만. 그 양반은 지휘계통에 있었을 테지. 자신의 말 한마디로 수십명이 죽는다는 건 별 문제가 안 돼. 솔직히 말하자면 제 목숨이 달린 것도 아닌 걸. 하지만… 관리자 양반. 그 지휘를, 계획을 들은 사람들이. 제 목숨이 파리목숨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걸 모를 것 같아? 그저 기물로. 맥없이 죽을 뿐인 지휘… 그걸 따르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사람을 선동하고 내면의 광기를 부추겨 불 속으로 뛰어들 수 있게 하는 사람만이… 그 전쟁에서 지휘관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어. 그게 도시의 전쟁이라는 거야. 그런 게…….

그러니 단테는 이해한다. 그가 자신에게 말하는 것은 정말로 충언일 것이다. 이 사람들은, 그리고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를 지표삼아 현실을 이해한다. 이스마엘이 그녀의 경험을 통해 배를 이끌었던 것처럼. 그리고 찾아올 고래를 기다리며 작살을 갈았던 것처럼 말이다.

오티스 또한 찾아올 미래를 위해 그녀의 작살을 갈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믿는다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믿고 있냐고 묻는다면, 그래. 믿고 있어. 오티스를 포함하서 모두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한다. 눈이 없다곤 하지만 바라본다는 염원을 담으면, 상대방에게도 꽤 전해지는 모양이다. 딱딱하게 굳은 자세로 단테를 들여다보던 오티스가 서서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해한다는 듯이. 그녀는 그렇게 인자한 표정을 짓곤 했는데.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이라기엔 기만스러웠고, 후임을 바라보는 지휘관의 모습이라기엔 다정했다.

“관리자님, 진정으로 믿는다는 것은. 사람의 모든 것을 헤쳐두고 난 뒤에도 신중해야합니다. 이 버스에 타고 있는다고 해서, 계약 관계가 얽혀있다고 해서 정말 이들이 관리자님의 믿음을 받을 가치가 있겠습니까?”

아, 물론 이 오티스는 믿어도 괜찮습니다. 관리자님. 저는 진정으로, 진심으로 관리자님을 위하고 있습니다.

오티스는 천천히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눈은 빛나고 자세는 비굴한 것 같으면서도 어조는 신중했다.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 말이 관리자의, 단테의 심기를 거스를 것이라는 걸 말이다. 단테는 허리를 살짝 뒤로 물렸다. 신임을 충분히 얻었다고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미움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뱉는 충언을. 그 심리를 알 수 없었다. 그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마저 그녀에게 해서는 안되는 짓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 무례를 저지르는 것 같았다. 단테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살짝 뒤로 했다. 오티스는 단테가 말을 전하기 전에, 그래. 그 머리를 잠시 흔들고 다시금 정신을 차려 째깍 소리를 내기 전에 말을 이었다.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관리자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희 중에서…”

반드시 배신자가 생기리라는 것을.

…틱.

톡.

단테는 그 엉망이었던 면담을 다시금 회상한다. 그 뒤에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네 말이 틀렸다던가, 다른 수감자들을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정말 그녀의 말은 틀렸던 걸까? 오티스라고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살아왔던 삶이, 전쟁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숱한 사람들을 의심하고, 권력자의 앞에서 허황된 아부를 떨며 자신을 기억하도록, 그래. 위험 상황에서 눈길 한 번이라도 더 주도록 말이다. 제게 의지하고 조언을 구하도록….

그 전제는 반드시 단테의 위험이 따른다. 사람은 반드시, 배신한다. 라는 대전제. 정말 자신의 속을 다 내보여도, 가족과 아이를 인질로 잡아도 안전하지 않다는 불신이 짙게 베어나온 충언이자 조언이었다. 그러니 너무 믿지 말고, 속을 보여주지 말고. 진정으로 대하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그걸 티 내서는 안 된다고. 그들이 제 말 한 마디에 껌뻑 죽게 만들면서도, 자신을 의지하고 믿게 만들면서도 절대로. 결코.

관리자님은 그들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아, 하지만. 오티스.

그건 너무 괴로운 삶 같아.

단테는 조심스럽게 패드를 두드렸다. 그녀의 불안을 이해한다. 이스마엘의 광기와도 같았던 집착과 작살의 날카로움을 이해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단테는 그저 이해할 뿐이었다. 불안을 옮길 필요는 없었다. 그는 누구보다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제가 상대의 불안에 휩싸인다면 일이 어떻게 어그러지는지 배웠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저 수감자들의 감정과 불안에 휩쓸린다면 크게 다칠 뿐이었다. 그건 자신뿐만 아니라 수감자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꼭 죽고, 아프고, 다쳐야 아픈 건 아니야. 마음이 깊게 다쳐버리면, 나는 그걸 다시 돌릴 수 없어.

그것만큼은 모든 시간을 묶어도 되돌릴 수 없어….


그 면담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났을까. 단테는 다시금 오티스를 불러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오티스는 별다른 말 없이 방긋 웃으며, “괜찮습니다. 관리자님. 언젠가는 이 오티스의 말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라고 말했다. 단테는 그 티없이 맑은 미소를 띈 얼굴을 바라보며 심리적으로 한걸음 더 물러선 오티스를 느낄 수 있었다. 가면을 쓴 것처럼 점차 얼굴이 흐려진다. 정말로, 진심으로 그녀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점차 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단테는, 그게 조금 두려웠다.

이상의 차례가 지나고 나서, 결국 모두가 제 고향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의 허물을 마주해야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스마엘은 그 대호수를 건너기 위한 안내서를 만들었고, 히스클리프는 의복을 갖춰 저택으로 향했다.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라도 견뎌야 했다.

오티스, 언젠가는 너도… 속내가 헤쳐지는 날이 올 거야.

너는 그 날을 위해서, 뭘 대비하고 있는 거야?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단테만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면담 이후 단테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수감자들은 이전과 달라진 집무실에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렇게 크게 바뀌지는 않았지만,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졌다. 뭐랄까 조금 더 포곤포곤 해졌다고 할까. 정말 그런 향이 나는 건 아니었지만 집무실에서 막 구워진 빵 냄새가 난다던가. 킁킁, 로쟈가 눈을 감고 조금 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 이거 진짜로 나는 것 같은데. 이렇게 단 냄새가… 땅콩버터?

<정답. 이리 와서 앉아. 오늘은 간식 못 먹었지? 일이 많아서 챙겨주질 못했네.>

“어머~ 단테. 나 입 밖으로 말했어? 아웅 뭘 이런 걸 다.”

눈을 번쩍 뜨자 눈 앞에는 따끈하게 구운 식빵에 땅콩버터가 발려있었다. 빵의 열기로 버터가 살짝 녹은게 보이는 데, 간식 들어갈 시간인 줄도 몰랐는데 토스트를 보자마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로쟈가 머쓱하게 머리를 두어번 긁적이다가 의자에 앉았다. 하트모양 베개를 품에 끼고 한 손에 하나씩 토스트를 들어 와암, 베어물었다. 와삭 하는 소리와 함께 달콤하고 녹진한 땅콩버터가 혀끝을 감돌았다.

“으음~!”

<괜찮아? 여기서 만들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서 걱정했는데.>

“최고야. 단테.”

심플 이즈 베스트. 로쟈가 말을 덧붙였다. 집무실 안쪽 작게 탕비실처럼 마련된 공간에 용캐 들어간 냉장고. 그 안에서 우유를 꺼내오던 단테가 짧게 웃음을 흘렸다. 틱 하는 소리와 함께. 귀여운 곰돌이가 그려진 머그잔을 들고 와 로쟈의 앞에 두었다. 우유는 병우유로 자주 사 두는 편은 아니었다. 일단은 이 집무실에 있는 모든 다과와 음료가 그를 위한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정기적으로 면담을 하지 않았으면 사둘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유제품은 금방 상해버리고, 단테는 그걸 알 수가 없으니 먹는 수감자들만 고역을 치뤄야 했을 테니까.

제대로, 그리고 꾸준히 장을 보기 시작한 건 정말 얼마 안 된 것 같다. 겨우 몇 달 지났을까? 식사는 도시락을 외부에서 시킨다고 해도 간단한 간식이나 야참이 필요한 시점이었던 것이다. 잠들지 못하는 새벽에는 달콤한 코코아가 필요했고, 전투가 드물에 없는 날에는 간단한 토스트나 과자를 구비해둘 장소가 필요했다. 그건 정말로 필요로 되었던 것이다. 버스 안쪽에 작게 탕비실 같은 공간이 생겨났고, 달에 두어번 정도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곤 했다. 물론 식사는 여전히 배급되는 도시락이었지만 말이다. 식사 당번을 돌아가면서 하는 건 어떻냐는 의견은 지나온 헬스키친 선에서 정리됐다. 단테는 정말로 식중독으로 인해 시계를 돌리고 싶지 않았다.

<여기 우유. 많이 배고팠어?>

“딱히 배고프진 않았는데 먹으니까 들어가네.”

와구. 토스트 두 개를 금새 먹어치운 로쟈가 입가에 부스러기를 털지도 않고 다음 토스트를 집어들었다. 단테는 머그잔을 그 앞에 올려두고 몸을 살짝 숙여 장갑낀 손으로 입가를 가볍게 털어줬다. 칠칠 맞긴. 가볍게 중얼거리자 로쟈가 방긋 웃었다.

“요즘 따라 느끼는 건데, 단테는 엄마 같아~”

<엄마? 세상에나.>

“다들 알음알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늘 뒤치다꺼리를 해주니까… 이런 거 말고도 일적으로도 말이야.”

합. 말을 마치고 다시금 토스트를 베어문 로쟈가 베시시 웃었다. 그런가? 물론 초반에 비해 수감자들의 실수가 많이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업무상-혹은 불화가 있으면 그걸 처리하는 건 단테의 몫이였다. 최근에야 상담도 꾸준히 이어지고, 가장 문제였던 이스마엘과 히스클리프의 사이가 나쁘지 않으니 별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보고서를 확인하고 첨삭하는 정도? 단테는 이게 가장 놀라웠다. 자신도 학습을 한다고, 초반에 괴발개발이었던 보고서도 이제는 꽤 볼만 해졌다고 믿고 싶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엄마는 좀… 너무 사적이지 않나?>

“그러니까 다들 말은 안 하는 거라구~ 괜찮지 않아?”

<결혼도 안 했는데 애만 몇이나 딸려오는 거야?!>

“열 두명.”

<좀 봐주라…….>

농담. 헤헤, 이어지는 웃음소리에 단테도 의자에 몸을 기댔다. 가벼운 농담일 뿐이지만 글쎼다. 자신은 자식을 가져본 적이 없을테니… 아마도. 그저 관리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서 수감자들을 신경쓸 뿐이었는데, 이건 세간에 널리 있는 부모자식의 관계와 비슷했던 걸까. 그런 호기심을 담아 물어보려다가, 문득 단테가 멈췄다. 시계소리 없이 팔을 들어 제 시계태를 매만지고 있자 어느새 접시를 비운 로쟈가 고개를 기울였다.

“단테?”

<응?>

“뭔가 말하고 있지 않았어?”

<아무것도.>

단테가 시계태를 매만지던 손을 내렸다. 글쎄. 로쟈의 앞에서 부모의 사랑을 논한다라. 단테는 수감자들에 따라 민감할 수 있는 주제는 최대한 피하고자 했다. 가령, 료슈에게 있어서 자식이나 등 뒤에 들고 있는 검에 대해 묻는 것은 피해야 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지나온 얼음의 성에서 펼쳐진 그 순간, 단테는 어린 로쟈를 보았다. 부모의 손길보다는 친구의 손을 잡고 추운 밤거리를 돌아다니던 그녀를 보고 나서. 숨 소리 하나 내지 못한 채로 피로 물든 밤거리를 바라보던 그녀를 보고 나서, 차마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런가. 로쟈가 짧게 시선을 옮겼다. 분명 의심스러워하고 있는데도 그냥 넘겨버리는 거다. 단테는 굳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시금 능청스럽게 웃음을 흘리는 그녀를 바라본다. 그래, 오티스의 방어기제가 자신의 내면을 숨기고 숨겨 아무런 동요도 만들지 않는 것이라면. 로쟈의 방어기제는 상황을 흘려넘기는 것이다. 진지해지지 않는 것. 그저 웃어버리며 그런 건 잊어버리라고 말하고 다른 주제로 시선을 옮겨버린다. 꼭 그래야 한다는 것 처럼. 단테는 그녀의 심상을 떠올렸다. 얼어붙은 성 안에서 펼쳐진 고해소를 기억했다. 자신의 죄를 고하지 않고서는 나갈 수 없는 곳에 가서야 아주 조금의 조각을 내보였다.

“아. 마침 이야기 나와서 생각난 건데. 이상 씨가 있는 S사에는 이런 속담도 있더라고.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

그런 로쟈가, 단테에게 있어선.

<하지만 더 아픈 손가락은 분명 존재할 걸. 전부 같은 강도로 깨물어도… 유독 신경 쓰이는 손가락이 있을 테니까.>

아픈 손가락과 같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로쟈가 잠깐 멈췄다가 두어번 더 깜박였다. 그런 소리를 할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이내 다시금 이해한다는 얼굴을 했다. 눈을 살짝 휘고 입꼬리를 올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사람처럼 말이다. 단테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손을 뻗었다. 장갑 낀 손을 내어 로쟈의 손을 붙잡았다. 약간 손길에도 깜짝 놀란듯이 몸을 굳힌 게 퍽 쉽게 전해져왔다.

“…단테…?”

<로쟈. 내게 있어서 그 아픈 손가락은… 너일지도 모르겠어.>

“내가? 에이…”

<정말이야.>

째깍, 시계가 감기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단테가 몸을 조금 더 당겨 앉았다. 붙잡은 손 끝이 옅게 꿈틀, 움직였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니 로쟈가 고개를 살짝 틀었다. 아래로 숙였다가 크게 들썩인다. 시선을 제대로 두지 못하고 바닥을 향하다가 결심한 것 마냥 웃음기를 띈 낯을 하고 마주본 얼굴이, 다시금 굳는다. 굳게 다짐해 시선을 마주해 손을 꽉 붙자고 있으면, 당황한 그 낯을 차마 숨기지 못하고 얼어붙는다.

꾹, 붙잡은 손에서 차가운 냉기가 전해져온다는 사실을, 나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언제부터 모른 척 하고 있었을까.

<미안해. 하지만 꼭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갑작스럽지? 그래도 언젠간으로 넘겨버리면 안된다고 생각했어. 기회가 올 때 붙잡지 않으면 안되는 것도 있더라고.>

제대로 해쳐놓지 않으면 안되는 것도 있다고. 단테는 믿었다. 그것이 이 급작스러운 발화의 시작이었다. 어쩌면 시발점이 오티스의 그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단테는 T사를 지나온 그 순간부터, 이미 삐걱이기 시작한 로쟈의 소리를 들었다. K사에서 이상의 심부에 새겨진 깨진 조각을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시계부품이 삐걱이는 소리. 잘 굴러가던 태엽 하나가 얼어붙어 아주 조용히 전체적인 시간을 맞지 않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무시해도 된다. 고작 몇 초 맞지 않는 것으로 모든 것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걸 방치한다면, 분명 언젠가는 멈춰버리겠지. 잘 굴러가는 것 같던 부품이 더이상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그 부품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단테는 단언했다. 사람은 부품이 아니라지만… 하지만, 이 도시에서는 그렇게 여겨지는 것 같기도 해서. 유능함을 대신하는 말이 너를 대신할 사람이 없다는 말이라면…….

다시금 시선을 마주하면, 로쟈는 좀 전의 웃음이 환상인 것 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차디찬 무표정을 발견하고 난 뒤에야 알았다. 어떤 진실은 폭력이고, 어떤 상담은 고해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다고 멈출 수 없는 발화도 있다는 것을.

<로쟈. 실은 늘 신경쓰였어. 도박장은 반짝거리지. 빛과 소리로 사람을 혼란스럽게 해서 정작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어. 그리고 J사 만큼 무언가를 숨기기에 적합한 곳은 없었어. 그 잠시간의 혹한을 지나온 나마저 네 눈속임에 빠지고 말았으니까.>

그러니, 괜찮냐는 말은 묻지 않는다. 이것은 꼭 심문과 같았고. 어느 압박이었다. 그제야 표정 없던 얼굴이 서서히 움직였다.

“단테.”

<하지만… 그 도박장마저 영원히 반짝이는 건 아니야. 장소를 벗어나면 금방 깨닫게 돼. 그러니 잠깐 숨기는 것으로 하룻밤의 빛을 선택할 순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봐선 좋은 선택은 아니지.>

“단테. 왜 이러는 거야?”

째깍, 시계가 감겨드는 소리가 이어진다. 그것을 도무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로쟈가 몸을 뒤로 물렸다. 잡힌 손을 뒤로 빼려고, 털어내듯 팔을 당겼다. 눈은 조금 커졌고 목소리는 약간 더 높아졌다.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여전히 어그러진 미소를 띄기 위해 다분히 노력하고 있었다.

<로쟈….>

“지나왔잖아. 응? 다 보여줬고, 다른 사람들 처럼 말이야. 봤잖아, 단테.”

그 고해소를 지나왔잖아. 로쟈가 속삭였다. 그래, 분명 우리는 그 혹한에서 그녀의 과거를 봤다. 굶주림이 가득한 생애에 허기를 벗 삼고 고독을 씹어 삼키며 겨우 살아갔던 그 순간을 봤다. 찬란한 그녀의 긍지를 봤다. 가슴 아리도록 호소하던 그녀의 사상을 읽었다. 날아가는 도끼와 가족 같던 이웃의 죽음을 봤다. 그 피의 금요일에 숨죽여 떠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던 그녀를 보고. 그 죄책감을 읽고, 단단하게 얼어붙어 다시는 눈물 흘리지 못할 심장을 봤다.

“꼭 알아야 해? 단테. 아무리 관리라고 해도, 이렇게 들 쑤실 필요는 없잖아….”

가늘게 스며나온 소리를 읽는다. 가엾다. 그래. 가여웠다… 그래서 더 멈출 수 없었다. 이렇게 가볍게 찔러버리고 물러선다면 더 단단해질 뿐이니까. 더 깊숙히 숨어 단단히 얼어붙을 뿐이니까.

<난 그저… 로쟈를 이루는 것이 뭔지 알고 싶을 뿐이야. 그리고 이건, 수감자 관리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해.>

붙잡은 손은 여전히 이상할 정도로 차다. 잠깐 녹았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던 걸까? 글쎄다. 단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믿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이 버스가, 그녀를 녹게 만들었다고 믿고 싶었다. 비록 다시금 얼어붙었지만…

“나를 이루는 것.”

숨을 들이쉬고 다시금 멈췄다. 로쟈는 이제 팔을 빼거나 손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인 얼굴로 잡힌 손을 바라볼 뿐이었다. 늘 웃고 있어서 안온해보였던 얼굴은 진정 웃음을 잃고 나서야 가슴에 스밀만큼 차가운 미인이라는 것을 알게 했다. 나를 이루는 것? 다시금 되묻는다.

유로지비.

설마! 소냐가 나와 다른 길을 걸을 때 부터, 그 애의 정의가 나와 다르다는 걸 안 순간부터 나는 그 이름을 버렸어. 한 번 버린 과거를 두번 못 버릴까? 물론 그 순간들이 싫었다는 건 아니야. 처음에는 다들 숭고한 의지를 가지고 임했어. 그래, 숭고했다고… 굶주린 이웃을 위해서.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서. 그 사람들 일생동안 다 쓰지도 못할 돈을, 그저 쌓아두고 관음할 금전을 가져와 진정 필요한 곳으로 나누는 거야. 통장에 늘어나는 숫자가 중요해? 눈 앞에 굶어 죽어가는 아이보다? 그런 저열한 만족감에 빠져 사는 게 네 삶이라면, 그렇담 너는 살아갈 이유가 없어…

25구의 이웃.

글쎄다. 이미 지나온 과거를 나는 덮어씌웠어. 누군가 내 출신을 물으면 가벼운 농담으로 넘기곤 했지. 내가 25구에 있었던 사실을 부정하고 싶다거나 수치스러운 게 아니야. 오히려 25구가 나를 수치스러워 하겠지. 나의 이웃들이 나를… 아, 단테. 꼭 이래야겠어? 고해성사의 의미는, 결국 한 번 용서한 죄를 다시는 묻지 않겠다는 의미야. 하하, 그래. 하지만… 누가 나를 용서하겠어.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르고서 25구의 이름을 말할 수 있곘어?

<…하지만 너는, 그 도끼를 휘두른 걸 후회하지 않잖아.>

정말, 숙녀의 이야기에 끼어드는 건 예의가 아닌데. 단테. …도망가지 않을테니까 이런 농담 정도는 봐줘. 익살을 섞지 않고선 말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는 법이잖아. 숨을 내뱉기도 힘들어서 거짓말로라도 넘기고 싶은 상황도 있을 수 있는 거잖아. 날 이해하잖아. 날 이해하지. 단테. 그런데 왜…

“이렇게 괴로운데…”

<미안해. 하지만 조금만 더 이야기 해줄래?>

당신이 뭘 원하는지 알아. 그래. 림버스 컴퍼니…

그리고 알고 있잖아. 미안해. 나를 이룬다던가, 내 삶의 이유라던가. 이 버스나 당신과 나를 옭아맨 사슬이 나의 이유가 될 수는 없어. 내가 사는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거야. 물론 잠깐 숨어가는 안식처라던가, 천둥이 치는 날 숨어들어가는 침구가 될 수는 있겠지. 폭풍이 오는 날에는 늘 날아갈 것 같아서 소냐와 한참을 껴안고 떨었는데… 그래, 그 애는 떨지 않았던 것 같아. 그래서 그런 거야. 단테. 이곳은 집이 될 수 없고, 당신이 억지로라도 나를 끌어 안아준다고 해도 내 떨림은 멈추지 않아.

미안해.

그리고 고맙지만, 다시 이런 대화가 반복된다면 나는 상담하지 않을 거야.

이건 상담이 아니라 고해일 뿐이니까. 아무도 용서하지 않을 죄를 계속 읊는다면 분명, 나는 정말로 얼어버릴지도 몰라. 내뱉는 죄에 가슴이 떨리지 않고, 죄책감이 나를 조이지 않고. 익숙해져서… 그저 과거일 뿐이라고 나를 합리화하며 그 죄를 내뱉는 것을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내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얼어붙은 나야.

“그러니까 단테, 날 내버려둬… 분명 이 버스는 따듯하고, 모두들 정말 좋아해. 하지만, 아직은 더 추위에 떨고 싶어.”

아, 이 혹한의 계절은 얼마나 더 이어져야 하는 걸까? 단테가 천천히 손을 놓았다. 온기는 전해지지 않았지만, 실은 그걸 기대한 건 아니었다. 단순히 말로, 이 가벼운 고해로 변질될 마음이라면. 사라질 죄책감이라면 그녀의 삶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거다. 여전히 사무치도록 추워 가슴이 시리지 않았을 거다. 알고 있었다. 다만 상기하고 싶을 뿐이었다.

<로쟈.>

네가 괜찮지 않을 걸 알아. 그래서 말하는 거야.

<함부로 네게 용서한다고 말하지 않을 거야. 맞아. 죄를 용서하는 건 신도 자신도 아니야. 멋대로 입을 놀려대는 자칭 메시아들도 아니지.>

쥐었던 손의 온도를 기억했다.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거다. 사슬이 끊어지는 날이 오더라도, 자신은 이 온도로 그녀를 기억할 것을 알고 있다. 단테가 장갑낀 손을 오무렸다.

<하지만, 용서를 구하는 건 오직 너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 로쟈. 나는 너를 꿰었어. 모두의 시간을 고정시켰고. 나는 이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일부 점유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 네 선택도. 과거의 있었던 죄도 같이 이고 가겠어. 멋대로라도 좋아. 싫다고 해도 안 놓을 거야. 그야, 우린 그런 관계잖아.>

알고 있다. 오티스의 물음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누구였는지. 자신을 배신하고 냉정하게 떨칠 수 있는 사람을 떠올리고 난 뒤에는. 옅은 죄책감과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찌르르한 통증이 나를 스쳐가곤 했다.

만약 누군가 나를 배신한다면.

열 두명 중 단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째깍, 단테가 말 없이 시계소리를 냈다. 지나온 길도 선택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지 못한다. 그러니 너희도 그랬으면 했다. 모두 정말로, 정말로 간절히 바라고 후회해서. 제 목숨을 내어서라도 바꾸고 싶은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그레고르에겐 그 실험이었고, 사과였으며. 싱클레어의 열쇠기도 했고, 이상의 거울이며, 이스마엘의 밧줄과도 같았고, 히스클리프의 방황이었다.

그리고 로쟈의 도끼. 그 심장에 박혀있는 단 한번의 휘두름.

모두 같은 경험을 공유하진 않지만, 각자의 방어기제를 가지고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버스에 올라, 적절한 관리를 통해 모두가 조금 더 나은 하루를, 호흡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이 그러지 못했으니까. 오히려 더 완벽하게, 첨예하게 자신을 감추고 숨을 삼키기 바빴으니까.

툭 튀어나와, 나를 괴롭게 할. 유독 아프고 아린 나의 손가락.

그래, 나의 아픈 손가락….

그러니 너를 이해해. 로쟈. 언젠간 내 가슴팍에 그 도끼를 꽂아넣는다고 해도.

나는 그제야 알게 되겠지. 네가 얼마나 오랫동안 추위에 떨고 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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