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s. D 3
구마사제 베르길리우스 X 악마 단테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욥 10, 7-9
식사를 마치고 나니 벌써 저녁을 지나 밤의 초장이었다. 안그래도 식사를 시작한 시점이 꽤 늦어서인가 다이닝의 마지막 손님이 된 그들은 뒷정리를 맡기고 온 셰프 둘의 안내를 받아 복도를 지났다. 여전히 안온한 분위기였으나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어두웠다. 도시의 전경과 불빛에 흔들려 밤은 지독하게 밝았는데. 베르길리우스는 그것을 바라보다 차마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식사는 맛있었고 분위기는 좋았다. 맞은편에서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인 시계가 자신의 기척을 최대한 줄여 그가 식사에 집중하도록 도왔다는 것은 입에 넣자마자 사라지는 음식에 흐려졌다. 평소라면 그의 배려를 불편하게 여겼을텐데 그마저 사라지게 하는 정신적인 충격, 맛의 폭력성을 시험받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비싼 돈 들여 이런 경험까지 선사해준 상대에게 미안하게도-전혀 그런 기분은 아니었지만-자리에서 일어나 다이닝을 나설 때까지 그 감정을 유지할 순 없었다. 맛은 잠시 정신을 흐리게 만들었지만 딱 그 뿐이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다시금 차분한 시선으로 복도를 걸어가며 앞선 시계를 바라보았다.
옅게 째깍이는 소리에 맞춰 수셰프라던 소년이 열심히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말소리가 어찌나 밝고 길었는지 상대적으로 짧은 복도가 길게 이어질 정도였다. 제게는 그냥 째깍이는 소리로만 들리는 저 초침소리가 그에게는 말로 들리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말소리는 옅게 울렸는데 바닥이 카펫이라서 그런지 복도에 울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단테님, 하고 변성기가 기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청명한 소리는 차에서 들었던 소년합창단의 노래를 떠올리게 했다.
째깍. 소리를 듣다보니 대화의 흐름이 점차 헤드 셰프에 대한 불만으로 향했다. 그 헤드 셰프가 베르길리우스의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을 잊은 것처럼 말이다. 저절로 그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그녀는 묶었던 머리를 풀고 금방이라도 담배 한 개비 물 것 같은 표정으로 입술을 물고 있었다. 눈 앞에서 불평을 쏟아내는 부하직원을 보고서도 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소년도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냥 속마음을 털어놓을 상대가 몇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애는…… 의체 테러 사건의 피해자야.]
의체 테러 사건. 베르길리우스도 익히 알고 있는 사건이었다. 못과 망치라는 테러 단체는 의체가 보급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단체였으나 최근들어 과격한 테러단체가 되었다. 그저 시위 정도로 그치던 이들이 깡통을 뒤집어쓰고 의체를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전 시대의 전쟁에서 봤을법한 꼬치형은 그들을 더욱 위험하고 끔찍한 단체로 만들었다. 아. 21세기여. SNS에서 공유되는 사진과 영상. 여러 이야기로 모두가 공간을 초월해 그들의 메시지를 보았다. 실제로 의체를 만드는 기업의 주식이 떨어졌다고 했었나. 덴버가 우는 소리를 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런 불안감과 불온함은 SNS에 쏱아지는 여러 사건으로 금방 사라졌다. 아. 21세기여! 하루에도 수백건 살인사건이 쏱아진다. 수천개의 분란이 만들어진다. 고작 학살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기는 어려웠다. 핵전쟁의 시대에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안전불감증에 익숙해졌다.
그저 매일 아침 신문을 보고, 매일 밤 뉴스를 바라보며 운이 나빴네. 라고 생각하고 말 뿐이다.
그래. 운이 나빴다.
나도 저 애도. 운이 나빴을 뿐이다.
운이 나빠서 부모와 가족과 친구와 아이를 잃는다. 그게 당연한 사회의 시선에서 떨어져나온다. 점차 고립되는 것을 느낀다. 베르길리우스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분명히 유난떤다, 라는 말도 있었다. 그냥 잊어버려. 평생 그렇게 살아갈 순 없잖아. 다시 타인과의 연을 이어서 살아가. 불행하게 끊어진 연 같은 건 가슴에 뭍고 말이야. 다시 사회로 복귀할 거잖아? 그게 당연한 일이지.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니까.
베르길리우스는 눈 앞의 소년을 바라본다. 그린듯이 사회가 정한 흐름에 따른 이를. 다시금 사람을 믿고 의지하며 타인과의 관계를 구축하고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가지고. 그렇게 살아가다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삶을 꾸려갈 사람을. 바르게 트라우마를 극복한 사람을.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을 만한 사람을…
“눈. 깔.”
툭, 공상이 깨진다. 복도를 다 지나 웨이터가 문을 여는 시점이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의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저 지루하다는 듯이. 담배 하나 물고 싶다는 표정을 하던 여인이 미간을 좁히고 번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감정은 분명한 분노였다.
“네?! 료슈 씨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눈 깔라고 했다.”
네?!? 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잽싸게 달려온 소년이 허리를 숙였다. 한쪽 팔로는 헤드 셰프의 팔을 잡아 당겼다. 죄송합니다 저희 셰프가… 그런 말을 하며 허리를 숙이자 쯧, 혀를 찬 여인이 목덜미를 잡아 세웠다. 꽤 힘이 강한 모양인지 소년이 맥없이 세워졌다. 공상이 깨진 그대로 멈춰있던 베르길리우스의 뒤에 툭, 손이 닿았다. 감촉에 허리를 세우자 등 뒤에서 째깍이는 소리가 났다.
옅게 흐르는 째깍임은 꼭 말처럼 들렸다. 금방이라도 그를 베어버릴 듯한 분노를 숨기지 않던 여인의 눈빛이 점차 흐릿해졌다. 시계소리를 듣는 것 처럼.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이라는 얼굴이었다. 여전히 짜증을 숨기진 않았지만 번득이던 눈동자는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구겨진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그딴 시선으로는 내 식당에 다시는 못 들어올 줄 알아라.”
그딴 시선이란 건 뭘까. 베르길리우스는 되물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서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를 이끌기라도 하는 듯 시계가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당겼다. 베르길리우스는 별다른 반항 않고 그의 손길에 이끌려 문가에 섰다. 이미 차는 문 앞에 있었다. 발렛 서비스가 꽤 좋은 편인지. 이 시계라서 인지는 모르겠다. 단테는 째깍 소리를 내더니 그만 보이도록 패드를 내밀었다.
[먼저 타. 이야기 하고 들어갈게.]
가볍게 손짓하는 모습게 베르길리우스는 별 말 없이 혼자 계단을 내려갔다. 차 앞에는 발레파킹을 맡겼던 직원이 서 있었다. 깍득하게 허리를 숙이며 차 문까지 열어주려고 하기에 고개를 내저었다. 이 비싼 식당 특유의 지나칠 정도의 친절이 그에게는 버거웠다. 차라리 방금처럼 그에게 욕을 내뱉던 여인이 친숙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딱 그정도의 대우가 어울렸다. 구마를 성공하든 실패하든 욕을 얻어먹던 지난 시절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아무리 그라도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다. 사제가 되기 전 부제 시절에는 꽤 친구도 있었다. 그들이 각자 흩어지고, 그가 성흔을 받기 전 까지는…
베르길리우스가 조수석에 앉아있다가 양손을 꾹 쥐었다. 그래, 이 성흔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가 사제로 서품받던 그 날. 수많은 친구이자 동료가 될 이들과 줄지어 서 있었다. 흰 예복을 입고 주교의 서품식을 기다리며 자신의 머리 위로 안수받기를 기다렸다. 하나 둘씩. 그의 옆에 있던 친우들이 머리 위에 올려진 손에 눈을 감고 진정 사제로 거듭나는 날. 그 순간. 베르길리우스의 머리 위에도 손이 올려졌다. 그렇게 사제가 되어야 했다. 아무 탈 없이 서품식은 이어져야 했다.
그의 머리에서 피의 가시관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될 터였다.
성흔, 예수 주 그리스도의 고난 이후로 신실한 사제. 수녀. 혹은 성인에게 나타나는 징표. 예수가 양손 양발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갔기에 양손, 혹은 양 발에 구멍이 뚫리는 것. 옆구리에 창이 찔려 돌아가심을 확인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옆구리의 창상.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돌아가셨기에 생기는 머리의 구멍. 보통 성흔은 자해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교구청에서 인정하는 성흔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 뿐이었다. 보통 이런 성흔은 모두의 앞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혼자 남겨진 상황에서 환시를 보고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달랐다. 꼭 그가 서품받기를 기다렸다는 것 마냥. 그가 자신의 손길에 닿기를 기다렸다는 것 마냥. 사제로 서품되는 바로 그 순간. 그의 머리에 가시관이 나타났다. 피로 된 가시관이 그의 머리에 박혀 피가 흘러내렸다. 고개를 들자 턱 끝으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좌중은 조용해졌고 그를 안주하던 주교마저 두걸음 뒤로 물러섰다. 당황한 얼굴이었고 베르길리우스 또한 몸이 굳었다. 그의 어깨 붉은 망토가 둘러질 때까지. 피로 된 망토가 어깨에 걸쳐져 바닥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자, 베르길리우스가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좌중을 돌아보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높게 솟은 대성당의 천장에 그려진 성화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그날을 회상하며, 자신이 신을 보았으리라. 하느님을 보았으리라 수군거렸으나. 베르길리우스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저 천장에 그려진 성화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달칵.
차 문이 열리고 시계가 운전석에 앉았다. 그 소리에 다시금 공상에서 깨어난 베르길리우스가 쥐었던 손을 펼쳤다. 무의식적으로 힘을 주고 있었는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남아있었다. 그의 옆에 앉은 시계가 살짝 고개를 틀었다. 무릎 위에 올려둔 패드를 조작하고선 그에게 보여줬다. 뭐라 답하기도 전에 운전대를 잡았고, 천천히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래 기다렸어?]
이건 답해야하는 질문인가. 고개를 들어 제 옆에 앉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밤이 되어버린 도로를 스쳐지나가며 검지로 툭, 손잡이를 두드리고 있었다. 이런 습관은 보통 사람이 집중하거나, 불만이 있을 때. 베르길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딱히. 어디 가는 겁니까?”
그 답은 한참 뒤에야 나왔다. 안그래도 차도 없는 시간. 신호등 하나 걸리지 않고 차는 도심을 지나 으슥한 곳으로 들어섰다. 베르길리우스도 오가는 길을 외우기는 했다만 하도 돌아다닌 탓에 여기가 어디인지. 여기서부터 제 사무실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이 시계가 데려다주겠지 어림 짐작만 하며 유독 포근한 차 시트에 등을 기댈 뿐이었다. 주욱 가로등을 지나가던 차가 신호등에 멈춰섰다. 주위는 여전히 건물이었으나 도심 최심부보다는 낮은 빌딩이었다. 톡, 시계가 패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집.]
뭐?
당장 내리겠다는 베르길리우스의 말에 들은채도 하지 않고 차는 계속 달려나갔다. 아무리 그라도 달리는 차의 문짝을 잡아뜯고 내릴 수는 없었다. 가로등은 점차 줄어들었고 신호에 멈추는 일도 없었다. 물론 멈춰선다고 해도 억지로 차를 고장낼 용기는 없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마세라티의 수리비를 물어주느니 시계의 수리비를 물어주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 수리비면 사무실 사람들과의 회식을 몇 번을 더 할 수 있는지 생각하며 인내했다. 그런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계는 단 한 번도 그를 바라보지 않고, 가끔 손가락으로 손잡이를 툭, 두드리며 점차 속도를 올렸다.
화가 난 건가. 그렇다고 제 집에 데려간다니. 뭔가 앞뒤가 안 맞았다. 베르길리우스는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싫다고 느낀다면 절대로 그의 집에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알려주지도 않고 들이지도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집이라는 건 마음을 안정시키고 그를 정신적으로 쉴 수 있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알 안에 들어있는 아기새처럼 따듯하고 부드러운 공간이어야 했다. 그의 악몽을 쫒아내고, 아무 걱정 없이 잠들 수 있게하는 공간.
사무실을 만들고 난 뒤에, 그는 많은 것이 변했다. 무엇보다 잠들 수 있어서 짜증이 줄었다. 다시금 의지하는 공간이 생기고,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생겼다. 문득, 베르길리우스는 그 식당에서 노란머리 소년을 보고 떠올렸던 생각을 되감았다.
그 소년과 본인이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을. 그 또한 이렇게, 결국 사람의 체온을 찾아 연을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자신의 트라우마가 치료되었던가? 그저 허술하게 뚫려있는 관계의 그물에 겨우 걸쳐서서 숨 쉬고 있을 뿐이다. 베르길리우스처럼 죽상을 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밝아보여도 사실 사회가 바라는 방향이라던가. 바른 인생이라던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잊어버려야만 그 조건에 충족할 수 있다면. 그는 그러지 않아도 좋았다. 그냥 비틀어진 채로, 이렇게 살아도 좋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 방법을 도무지 찾을 수 없으니, 극복이라던가 망각이라던가. 그런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어 그저 숨쉬고 살아갈 뿐이다. 바른 인생에, 그 궤도에 올라타고 싶다는 갈증을 가지고. 흐름에…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그러니 그의 모난 시선. 멋대로 소년을 판단하고 단정한 다음 그를 질투하듯, 혹은 사회의 스며든 그 모습을 경멸하듯 내비친 눈길에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오래 일을 하며 곁에 둔 사람을, 겨우 생을 쥔 그 모습을 이해하지도 않은 채로. 자기방어만 내세우며 한참 여린 제 사람을 바라보던 그 못된 눈초리에.
베르길리우스는 당장이라도 차를 돌려 사과하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이는 정말로 드문 감정이라.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난 뒤에 잠시 몸이 멈췄다. 옆자리의 사람을 의식해서 그리 티가 나지는 않았겠지만 눈이 살짝 커졌고 팔은 부자연스럽게 굳었다. 사과. 사죄. 베르길리우스에게 있어 이 단어는 속죄와도 같은 의미였다.
그가 지은 죄가 원죄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주께서 처음 빚은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신이자 그의 어버이인 하나님을 속이고 선악과를 훔쳐먹어 자신들의 수치를 알게 되었을 때부터. 그들이 감히 ‘신과 같이’ 되었을 때부터. 그들의 후손인 인류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말이 꼭 태어난 것이 죄라는 것처럼 들렸다. 살아있는 것이 죄라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 그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그 아이들은 고아가 됐고. 그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죽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어른이 되어 사회의 일원으로 건실하게 살아나갔을 아이들. 보석의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 그 이름대로 찬란히 빛났을 아이들이.
그의 잘못된 선택으로. 그의 삶 그 자체로 처참히 찢겨 죽었다.
그러니 평생을 속죄하고 살아도 모자라지 않은가? 그가 용서를 빌 상대는 이미 죽었고, 유일한 생존자는 실종됐다.
그는 가끔 꿈을 꾸었다. 회색 모래가 가득한 사막에 꿇어앉아 손을 모은채 계속, 사죄하는 꿈을.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 피의 망토를 두른 채로, 끝없이 흐르는 피눈물을 느꼈다. 한참을 그러고 있노라면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다. 부드럽고 작은 손. 어리고 미약한 온기… 잠에서 깨어나면 눈가가 젖어있었다. 그것이 환시였는지, 계시였는지, 미래였는지, 아니면 그저 그의 갈망이었는지… 베르길리우스는 알 수 없었다.
그런 꿈을 꾸고 난 뒤에는 유독 집착적으로 굴게 됐다. 똑같은 자료를 몇 십번이나 찾아보고, 같은 사진을 몇 번이고 망막에 새기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그리워했다.
그 순간에 잠식해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이야말로 도망이라는 것을 알았다. 회피하는 것이다. 그의 죄와 책임에서. 베르길리우스는 정말이고 이렇게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의 고행이자 속죄라고 느꼈다. 고난을 받으면 오히려 기꺼웠으며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 아이들을 떠나보낸 뒤로 이렇게 괴로워야만 한다고 느꼈다.
<그게 당신의 믿음이구나.>
째깍.
시계가 감기는 소리가 들렸다. 베르길리우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운전대를 잡고 앞을 보고 있어야 할 시계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차는 멈춰있었다. 언제부터? 도로에 가만히 서있는 차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그저 그를 바라보던 단테가 패드에 글을 적었다.
[불행한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래야한다고. 그런게 죗값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행복할 자격조차 없다고.]
“…뭐하는 거지?”
[혼자 너무 생각하길래 생각 좀 엿봤어.]
뭐? 우둑, 무의식적으로 쥐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근육이 팽창하고 울렁거린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단테가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농담. 농담.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런 것까진 못해. 그냥 혼자 너무 조용하길래 농담한 거야.]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을 거두지 않은 채로 손에 힘을 풀자 입도 없는 저 시계 사이로 안도의 숨소리가 들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베르길리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은 채로 도로 한 가운데 선 차 안에서 말이다.
“안 갑니까? 이러다 뒤에 차라도 오면.”
[괜찮아. 여기서부터는 사유지거든.]
어쩐지 아무도 안 오나 싶었다. 다른 도로와 다를바 없었다만, 주위를 둘러보니 섬셰하게 조형된 나무와 가로등이 보였다. 사유지라. 베르길리우스는 알리에기리 가문이 꽤 유서깊은 집안이라는 걸 떠올렸다. 여전히 사회계급이 존재하는 영국에서 왕족 바로 아래의 명문가. 유독 알아주는 정치가와 배우를 배출하면서도 집안 내부의 사생활은 일절 언론에 노출되지 않는 가문.
어쩌면 알리기에리 가문보다 영국 왕실 속사정을 알기 쉽다는 말이 괜히 나왔을까. 베르길리우스는 철저하게 통제된 그 가문의 외동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왜? 라고 묻듯 시계가 틱 소리를 냈다.
글쎄다. 보안. 통제… 그런 단어랑 어울리지는 않는데. 오히려 덤벙댄다고 할까. 약간은 비굴하고, 제멋대로에다가, 멋대로 그를 끌고다니고…
[나 뭐 묻었어?]
좀 바보같은데. 여전히 맹하게 째깍이는 소리를 들으며, 베르길리우스가 고개를 살짝 뒤로 물렸다.
언덕길을 지나 차는 한참 달려나갔다. 도로의 끝이 보일 것 같으면 문이었고, 그 문을 지나면 다시 도로였다. 처음에야 그러련히 싶었던 베르길리우스도 문을 세 개째 지나가자 시트에 몸을 기대며, “집이 얼마나 큰 겁니까?” 라고 물을 정도였다. 40만평 정도 될 걸. 단테가 엑셀을 밟으며 손 끝으로 패드를 두드렸다. 40만평. 약 축구장 180개의 크기… 얼마나 큰 건지 어림잡기도 어려운 크기였다. 무엇보다 도심 옆에 이런 크기의 땅을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건가. 베르길리우스는 이곳이 어디고, 어느정도고, 어떤 도시와 가까운지 어림짐작하려다가 아연해지는 기분에 그냥 시트에 기대서 앞을 바라보기로 했다. 마침 눈 앞에 다섯번째 문이 보였다.
이제껏 다른 문들과는 다르게 다섯번째 문에는 문지기가 서 있었다. 차 기종과 번호를 확인하고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던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단테가 문 앞에 멈춰선 채로 창문을 내리자 단정한 의복을 갖춘 문지기가 와서 신원을 파악했다. 심지어 문은 자동이 아닌 수동으로 열렸다. 단순히 이런 전통을 고집하기 위해서 사람을 두명 더 쓰는 겁니까? 라는 물음에 단테가 패드를 두드렸다. [돈이 썩어난다는데 이런 식으로라도 일자리 창출하면 좋지.] 이상한 말인데 딱히 틀린 건 아니려나 싶어 베르길리우스가 입을 닫았다. 그래도 왕실 근위대 소속이라는 소리도 패드에서 흘러나왔으나 그냥 그들의 세상인가 싶었다.
세상에는 사회적인 계급을 중시하는 사람들도 많고, 아직 신분제인 영국에서 그 경향은 꽤 크게 드러나곤 했다. 베르길리우스는 자의든 타의든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악마가 국경을 신경쓰겠는가, 인종을 따지겠는가? 영어 하나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잦았다. 특히 중국을 돌아다닐 때가 제일 힘들었는데. 베르길리우스는 사제복도 입지 못하고 몰래 공안의 눈을 피해 돌아다녔던 기억이 생생했다. 하도 그의 얼굴이 이국적이다보니 가면을 쓰고 움직이곤 했는데. 정말 그런 생고생이 따로 없었다. 그런 일을 겪고 난 뒤에 한국으로, 일본으로 원정을 다녀온 뒤에 다시 영국에 도착하니 이들이 말하는 계급이라느니. 영국 귀족식 발음이라는 게 전부 웃음거리로 여겨졌다. 결국 세상은 변화한다. 나중에는 계급이니 뭐니, 와해되는 날이 오겠지. 왕실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되는 나라들도 정말 그 계급을 존중한다기 보다는 눈요기에, 오락에 가까운 개념이 됐다. 너희 나라에는 여왕 없지? 우리는 있다? 신기하지. 요즘 아이들에게는 이런 개념에 가깝지 않을까.
베르길리우스는 고개를 들어 옆의 악마를 바라봤다. 차는 정원을 지나 한 저택 앞을 지나갔다. 크기로는 궁을 능가할 것 같은데 생각보다 신식 디자인이 감미된 저택이었다. 여긴 본관이고 제 방은 서관에 있다며, 단테는 장미정원을 지나 서쪽으로 차를 돌렸다. 얼마 안 가서 차를 세운 그가 내리자며 손짓했다. 베르길리우스는 차문을 열고 내렸다.
서관은 본관보다 더 오래된 디자인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치형의 건축 방식. 고딕의 느낌이 생경하게 느껴졌으며 무엇보다 건물이 무채색이 아니었다. 화려한 미감에 오랜 장인의 터치가 엿보였다. 꽤 의외의 건물에 베르길리우스가 단테를 뒤따라 건물을 오르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차가 드나드는 길은 흰색 돌로 꾸며져 있었고, 그 앞에는 분수대와 정원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문득 베르길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당신 취향입니까?”
물론, 그냥 원래부터 이런 모습인 서관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베르길리우스는 이 정교하게 꾸며진 공간에 단테의 시선이 닿았다고 생각했다. 본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를 몰래 조사하며 악마임을 의심하던 기간까지 합친다면 꽤 되는 기간이었다. 그동안 그는 단테를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여기? 응. 내가 좀 손봤지. 근데 따지자면 지어질 때 부터 내가 디자인 한 거야.]
“지어질 때? 상당히 오래된 것 같습니다만.”
단순히 오르고 있는 계단부터, 이런 텍스쳐를 의도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면 꽤 오래전에 건축된 건물처럼 보였다. 다시 단테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정문이 열렸다. 긴 메이드복을 입은 버틀러가 주인을 마중하고 있었다.
[18세기 말 즈음 지었을 걸. 그때는 바로크가 유행이었는데 내가 이쪽은 옛날 식으로 해달라고 우겼어. 내가 살 곳이니까. 그때만 해도 21세기 까지 살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그래도 튼튼하고 보기에도 예뻐서 좋지 않아?]
“미감은 둘째치고, 18세기에? 당신 어떻게 살아있는 겁니까?”
[난 악마잖아.]
띡, 패드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베르길리우스가 주위를 둘러봤다. 충직한 버틀러가 주인을 안내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 처럼 굴었다. 하긴, 여기서 이런 농담같은 말에 긴장하는 건 베르길리우스 밖에 없을 거다. 진정 그가 악마라는 걸 알고 있는 자신만이.
“적어도 200년은 살아왔을 당신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살아있는지 묻는 겁니다.”
아. 하는 소리를 내듯 시계가 째깍, 소리를 냈다. 아무렇지 않게 버틀러의 시중을 받으며 코트를 벗던 단테를 보던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에게도 도움이 필요하냐는 듯 다가오는 버틀러들을 손짓으로 물렸다. 괜찮습니다. 말하자 굳이 건들지 않고 코트만 받은 채로 물러났다. 안내를 따라 제 방까지 들어간 단테가 나머지는 알아서 하겠다며 버틀러들을 물렸다. 그들은 시종이라기엔 과묵하고 딱 정해진 선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조용했는데. 이조차 다루는 주인의 성격이겠지 싶었다. 찌뿌둥한지 기지개를 쭈욱 핀 단테가 유독 큰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패드를 두드렸다.
[이야기가 좀 긴데. 짧은 걸로, 긴 걸로?]
“간략하게.”
베르길리우스는 주위를 둘러보다 손님용 보다는 단테가 앉아 짧은 업무를 처리할 것 처럼 보이는 작은 탁자 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았다. 엉덩이 부분의 쿠션이 조잡한 붉은 시계모양이었다. 뭐지? 싶어서 그냥 벽에 등이나 기댈까 햇는데 비어있는 벽마다 액자니 그림이니 잔뜩 달려 있어서 그냥 이 의자에 앉기로 했다.
[악마들도 제각각 다른 건 알지? 아니, 모르려나. 예수가 내쫒았던 문둥병 일으키는 악마, 눈 멀게하고 나병들게 하는 것들은 시대를 지나면서 발전해왔거든. 의학이 발전하면서 진짜 병과 악마들린 사람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해서 그래. 점차 하나하나 떨어져나가면서 각자가 다른 악마로 변모해왔어. 그 중에는 사람을 홀리고 유혹해 기운을 뺻는 것들, 손을 더럽혀 지옥으로 끌고가는 것들, 계약의 형식을 지켜 등가교환의 모습을 취하는 것들… 다양했지. 아마 당신이 처치하는 류의 악마는 예수가 쫒아낸 악마들과 가장 비슷해. 무턱대고 빙의해서 몸을 빼앗는 것들. 알지?]
베르길리우스는 이어지는 말을 가만 듣다가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가 구마를 한다는 것은, 주변에서 그 사람을 의심할 정도로 큰 이변이 있어야했다. 발작을 한다거나, 경기를 일으킨다거나. 생고기를 탐하고 현대 의학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괴기한 짓을 저지를 때. 그때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다. 악마가 들렸다고 생각해야만 그를 찾는다.
그러나 계약으로 인한 교환이라면, 혹은 꾀임에 넘어가 범죄를 일으킬 뿐이라면 주위에선 그를 마귀들린 이라 보지 않는다. 그저 법에 따라 처벌하거나, 평소와 같다고 생각하겠지. 단테가 말을 이어갔다.
[그 중에서도 나는 계약의 형식을 취하는 악마야. 활동은 꽤 열심히 했는데. 좀 매너리즘이 와서 18세기즈음에 몸을 댓가로 받았거든. 아기의 몸. 사람처럼 살아보고 싶어서 말이야. 나도 궁금했거든. 신이 그의 아들을 인간의 몸으로 내려보냈고, 실제로 메시아가 인간처럼 자라났잖아. 그게 어떤 느낌일까 싶었어.]
악마도 매너리즘이 오는 건가. 뭔가 더 말하려던 베르길리우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괜한 질문으로 이야기를 흐트러트리고 싶지 않았다. 그가 생각한 악마의 생태와는 다르기 때문에. 그렇기에 그가 구마해온 악마들과 다르다고 느꼈던 걸까 싶어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인간처럼 살았던 그 시기는 정말 재미있었어. 특히 예술의 호황이었거든. 여러 건축물을 보러다니고, 친구와 여행하고. 시를 짓고 희극을 쓰고, 편지를 나누고 놀았는데… 아무리 그래도 100년을 넘게 살 수는 없었지. 인간의 육체를 늙지 않게 하는 법은 쉬웠지만, 나한테는 그 몸으로 살아가며 맺어간 관계가 있으니까. 친구들에게 안녕을 고하고 실종 겸 죽음을 꾀한게 19세기 말. 그때부터 광야를 돌아다녔지. 카론… 그러니까 당신한테는 라피스랑 같이 있던 시기가 20세기 후반이었거든.]
움찔, 라피스의 이름이 들려오자 베르길리우스가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타자소리가 더 빨라졌다. 옅게 틱틱 거리는 소리가 났다.
[말했지? 카론에게 줄 사과를 사러 시장에 갔었다고. 그 때 엉겁결에 내 머리가 붉은 시계인 걸 들켜버렸다고 했잖아. 알리기에리 가문이 붉은 시계머리를 한 의체를 찾고 있었다고. 실은 내 오랜 친구 중 한명이 알리기에리 가문이었어. 의체 사업을 추진한 것도 그고, 머리 의체를 처음 시도한 것도 그야. 그때는 머리를 뗴고 기계를 붙인다는 일이 보편적인 말은 아니었어. 굳이 따지자면 이단이자 미친 과학자의 소리로 들렸지. 그는 성공사례가 필요했고, 그 말에 내가 마땅히 그를 돕겠다고 했어. 나야 목숨이 아깝지 않으니 그의 첫 실험이자 수술대에 올랐는데. 그는 그게 정말 고마웠던 모양이야. 나야 새로운 머리가 꽤 미학적인 시계라서 좋았는데… 믿음의 기적이라느니. 뭐니. 그땐 웃었는데.]
째깍. 소리가 울리다가 멀어졌다. 이전을 생각하는 건지 툭, 패드를 두드리다 다시금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한다. 베르길리우스는 표정하나 없이 투명한 그 시계 앞판을 보다가 눈을 깜박였다.
[그때는 생각을 못 했는데. 사실 머리를 시계로 바꿔끼우면 수명이 좀 늘어나잖아? 그래서 내가 실종된 이후에도 계속 생각한 모양이야. 은인이니 꼭, 내가 죽은 뒤에라도 붉은 시계머리를 한 사람을 찾아라. 그리고 꼭 대접하라고… 참. 머리를 바꿨다고 해도 몸은 노화가 진행되니 죽었을텐데. 그 즈음 내가 악마라는 걸 짐작했을지도 모르지. 여튼,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영국으로 간 뒤에, 알리기에리 가문에서 친구의 손자를 봤어. 그들과 같이 지내다가 자식이 없어 후계를 곤란해하길래 입양돼서 지금 이 자리.]
짧게 설명하려고 했는데 좀 길었네. 단테가 느리게 웃는지 초침소리를 냈다. 그 말을 주욱 들어온 베르길리우스가 두어번 입을 열었다 닫았다. 질문을 고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아주 세심히 고르는 것처럼.
“좋아. 다 미뤄두고. 그래서 지금 친구의 손자를 돕고 있다는 뜻입니까? 오랜 우정의 값으로?”
단테는 의자에 앉아 그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했다.
[응. 계약에 의한 게 아니라. 그냥 순전히 내 의지야. 그러니까 구마할 사람은 없어. 애당초 그럴 수도 없을 걸…]
“왜지?”
베르길리우스가 물었다.
[그야 아무리 내 슈가보이라고 해도 알리기에리 당주를 묶고 소금뿌리고 성수뿌리면 큰일이 날 테니까?]
뭐. 베르길리우스가 말문이 막혔는지 허, 소리를 냈다. 아무리 엑소시즘 영화가 생겨나고 대부분의 구마의식이 침대에 팔 다리를 묶고 향치고 소금뿌리고 성경 외우고 성수뿌리는 걸로 고착되었다고 한들, 본인은 악마니까 아니라는 걸 알지 않나? 그런 얼굴로 빤히 바라보자 단테가 패드를 들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한 손으로 검은 장갑을 검지부터 주욱 잡아 당기고선 옅게 틱, 소리를 냈다. 베르길리우스는 이제 저게 웃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일단 씻고, 자자.]
피곤하지? 옅게 들려오는 말에 살짝 정신이 멀어졌다. 그게 방아쇠라도 된 것처럼 순식간에 피로감이 쏟아졌다. 차 안에서부터 말했던 제 사무실로 돌려놓으라는 둥.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항의는 어느새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의도한 짓인지 아닌지 교활하기가 짝이 없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렇다고 이제와 다시 주장하기에도 늦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결국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 시원하다.]
목에 수건을 걸친채 파자마를 입은 단테가 먼저 침대에 걸터앉았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와는 다른 욕실로 안내받았다. 별개로 커다란 목욕탕도 존재하는 모양이다만 첫만남부터 그러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시계의 농담을 뒤로하고 베르길리우스는 안내받은 욕실로 향했다. 복도를 타고 오른쪽으로 돌면 있는 첫번째 방이었는데. 침대가 없었으니 손님방은 아닌 것 같고, 별실인 것 같으나 도무지 용도를 알 수 없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천장에 그려진 성화를 바라보다가 방에 딸려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다행히 욕실은 현대식이었다. 넓은 공간에 꽤 큰 욕조가 들어가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지나치게 많고 향기로운 여러 욕실용품을 바라보다 비누로 벅벅 씻었다. 사실 샴푸인 것 같은 통을 죽 짜보긴 했는데 꽃향기가 너무 진해서 그냥 하수구로 흘려보냈다. 무엇보다 다 씻고 난 뒤에 그의 몸에서 이 용품들이 내는 향, 그러니까 진하게 향기롭거나 포근한 것들이 자신을 떠나지 않으면 힘드리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베르길리우스는 비누라도 남아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었다. 수건은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보기에는 복실복실한데 비단으로 문지르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두꺼워서 잘 마르는 듯 목 뒤를 타고 물방울이 두어방울 흐르다 말았다.
베르길리우스는 버틀러의 안내에 따라 목욕을 마쳤다는 의미로 문을 두 번 노크했다. 그러자 “침대 위에 잠옷을 준비해두었습니다. 착의를 마치신 뒤 문을 열어주시면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라는 정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후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한 번.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침대 위에는 속옷과 잠옷이 올려져 있었다. 그의 치수를 알리가 없을텐데 착의를 마친 뒤에 확인하니 가슴팍을 제외하고는 다 잘 맞았다. 안타깝게도 상의의 셔츠는 아슬아슬하게 두번째 단추를 잠굴 수 있었기에 옷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하지만 다른 치수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이 정도는 불편하지도 않았기에 베르길리우스는 문을 열어 버틀러의 안내를 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그럴 것 같긴 했지만 혹여나 손님방으로 안내해주려나 하는 생각을 가졌던 그는 걸어왔던 길을 반대로 되감으며 점차 울적한 표정이 됐다. 안그래도 온종일 끌려다니고, 정신적으로 과거를 반추하며 피로감이 짙었던 터라 악몽을 꿔도 깊게 잘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악마를 옆에 두고 잘 수 있을 리가.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의 문 앞에 서서 허리를 굽혀 그에게 인사하는 버틀러를 지나 문을 열었다. 막 욕실에서 나온 것 같이 따끈한 증기를 헤치고 나온 시계가 어깨에 올린 수건을 오른쪽으로 주욱 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패드를 잡은 채로 지금. 베르길리우스는 장갑도 하나 없이 패드를 두드리는 매끈한 손을 바라봤다. 그리고 기어이, 시야에 들어오는 탓에 질문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신, 여성이었습니까?”
틱. 소리를 내던 시계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다 시선을 따라 제 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하, 하는 소리가 난 것 같았다. 베르길리우스는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슬립을 쳐다보았다. 몸의 굴곡을 크게 나타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굴곡을 지나 허벅지로 툭 시선이 떨어졌다. 별다른 의미는 없었기에 시선도 담백하리라 생각했다만, 단테가 글을 적는 속도가 빨라졌다.
[몰랐어? 신문에서도 다들 Ms, D. 라고 부르잖아.]
미즈, 디. 분명 여성에게 사용하는 호칭이긴 했으나… 악마도 성별이 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아까 앉았던 의자에 앉으려던 베르길리우스를 부르는 손길이 있었다. 팡, 단테가 제 옆의 침대를 손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좋게보면 사람을 부르는 손짓이고, 나쁘게 보면 개를 부르는 것 같은… 뭐. 곱게 자라온 아가씨가 할 법한 일이긴 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제스쳐를 무시할까 싶었다가 그냥 그 앞에 섰다. 더 귀찮아지기 싫었고, 그가 안 가면 이 시계가 오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앞에 서 가만 내려보자 시계 합판을 지나 상체와 허벅지 사이까지 옅게 그림자가 졌다. 이미 심야였고, 방안은 그리 어둡지는 않았으나 그가 바로 무드등을 등진 탓이었다.
“왜….”
[같이 자.]
허. 그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 시계가 뭐라는 거지. 당장이라도 몸을 돌린채로 이 방을 나서고 싶다는 생각이 훅 치솟았으나, 베르길리우스의 시선이 단테에게 향했다. 내려보고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그렇게 결벽적으로 몸을 감싼 옷이 한겹한겹 벗겨져서 그런가. 유독 몸이 작아보였다. 그래, 성전에서 그를 처음 짓누를 때와 정 반대였다. 그때는 옷 위로 아무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뒤에도, 오늘 낮을 지나 밤까지 그를 성인 남성이라고 생각했다. 애당초 굴곡이 드러나지 않았으나까. 언론에서 그렇게 떠들면서도 성별은 중요하지 않아서 그냥 넘겨버렸는데…
베르길리우스가 시선을 떨군다. 유독 작은 것 같은 발을 바라본다. 한 손으로도 감쌀 수 있을 것 같다. 그 시선을 느낀 건지 시계가 틱, 소리를 냈다. 그는 당장 몸을 돌려 헛소리를 무시하기보다, 그냥 설명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가 한숨을 쉬며 단테의 옆에 앉았다. 시트가 크게 출렁였다.
“단테. 내가 오늘 하루동안 당신의 변덕스런 이끌림에 따른 건 그게 내게 이득이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줄 정보에 비하면 싸지. 이런 퍼포먼스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총리가 되기 위해 이런 그림이 필요하다면 말이죠. 솔직히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알 거 아닙니까?.”
째깍. 단테가 시계태엽을 감는 소리를 냈다. 패드를 쥔 손은 움직이지 않았고, 고개는 살짝 들어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르길리우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카메라가 없는 공간에서까지 이러고 싶지는 않군요. 이해했습니까?”
악마와의 동침이라니. 오페라의 제목으로 쓰일법한 글귀였다. 베르길리우스의 말이 끝나자, 단테는 잠깐 고민하는 듯 하더니 패드를 두드렸다. 한 손으로는 그의 손목을 잡아채고, 한 손으로는 패드를 들어올렸다. 꾹, 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나는 오늘 하루동안 신문이나 가십지를 신경써서 당신을 데리고 다닌 게 아니야. 그냥 내가 그러고 싶어서 부른 거야. 같이 있고 싶어서 불렀어.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저녁을 산 거고, 조금이라도 오래 보고 싶어서 멋대로 집에 데려왔어. 그리고 지금은 같이 자고 싶어서 부르는 거야. 그 이외에 다른 의미는 없어.]
그러니까. 나는 카메라가 없는 공간에서도 이럴 거야. 단테가 마지막 문장까지 읽어낸 눈을 확인하고 패드를 침대 밖으로 던져버렸다. 베르길리우스는 유독 더 작아보이는 손을 타고 시선을 위로 당겨올렸다. 어쩜 이렇게 얼굴도 없는데 아집이 보이는지. 손목을 힘 주어 당기고 있었으나 베르길리우스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약한 힘으로 어쩌자는 거지… 생각했는데 몸을 보니 정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결국 그가 손길대로 팔을 내어주자. 단테가 손바닥을 검지로 주욱 긁었다. 느리게 글을 적었다.
[자자. 같이.]
같이. 베르길리우스는 모두 대문자로 적은 이 발칙한 문장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올렸다. 시계, 그리고 시계 아래에… 선명하게 남은 그의 손자국.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는 그 손길. 그가 성당에서 구마를 시도하며 압박한 흔적이었다. 뒷목을 쥐어 졸라서인지 정면에서는 파고든 손가락의 멍자국만 보였는데, 목 뒤에는 얼마나 멍이 들었을지. 심지어 피를 흘려 압박했으니 그의 등에 선명하게 십자가 모양의 화상이 남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문득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치밀었으나 그걸 실행으로 옮기진 않았다. 눈앞의 악마가 아무리 여성의 몸을 뒤집어 쓴 것 뿐이라고 해도…
레이디를 그렇게 다루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아닌 것 같아도 그도 이탈리아 남자였던 것이다…….
베르길리우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내어주지 않은 반대손으로 얼굴을 연신 쓸어내리다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좋은지 시계가 옅게 팅, 하는 소리를 냈다. 이건 또 어떻게 내는 건지. 그의 손을 붙잡고 침대 안쪽으로 먼저 자리를 잡는 단테의 손에 이끌려 베르길리우는 그가 평생 누운 침대는 침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포근한 시트에 누웠다.
연신 바스락 소리를 내던 단테는 흰 이불도 그에게 덮어주고, 하트모양의 인형도 품에 넣어주고, 보드라운 베개까지 머리 밑에 넣어줬다. 한 침대에서 한 이불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하도 침대가 커서 그런가 그렇게 붙어있다는 느낌은 안 든다고 베르길리우스가 생각할 무렵, 툭, 단테가 손을 뻗었다. 그를 끌어안으려는 듯, 아니. 그 품에 안기려는 것처럼 꾸욱 몸을 밀착해왔다. 무슨. 저기. 단테.
“이 악마가… 지금 어디에 손을 넣는 겁니까?”
[겨드랑이.]
베르길리우스가 질책하듯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방어막인 하트 인형으로 단테의 가슴팍을 밀어내는 와중 단테가 그의 팔 사이로 손을 밀어넣다 어깨에 글을 적었다. 그게 지금 말이라고. 그가 허리를 뒤로 물리며 조금 더 멀어지자 단테는 아예 어깨를 꾹 잡고 그를 끌어안았다.
“결혼도 안한 여자가… 안 놔?”
[째째해.]
“당신이 자꾸 선을 넘, 잠깐. 아.”
베르길리우스가 잠깐 시선을 돌린 순간 단테가 하트 인형을 빼앗아 침대 밖으로 던져버렸다. 자기가 줘놓고. 이로 인해 아무런 방어막도 존재하지 않은 베르길리우스의 가슴팍으로 단테가 꾸압 몸을 붙여왔다. 의기양양한 시계소리에 정신이 멀어진다. 베르길리우스의 한숨이 깊어지는 만큼 단테가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결국 밀어내는 걸 포기하고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연신 한숨을 내쉬자 단테가 고개를 들었다. 꾹, 가슴팍이 맞닿는다. 아, 이 사람이. 아니 악마가. 뭐하자는 거지? 아무리 굴곡이 없다지만 그 살덩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가 그리 금욕적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접촉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세간에서 유혹이라고 부르는…
이 악마. 베르길리우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알았어? 단테가 그 가슴팍에 터질 것 같은 세번째 단추 옆에 글을 적었다.
폭 안겨온 행위와는 전혀 다르게도, 베르길리우스는 그 작은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더 깊어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사람의 피부는 온도를 인식하는 걸까. 어째서 사람은 이렇게도 사회적인 동물이라, 저와 같거나 조금 더 높은 온도를 마주하고 있으면. 사람의 살, 그 온도와 감촉을 느끼면 불가항력으로 안심해버리는 걸까. 그는 가슴팍 한 구석에서 느껴지는 옅은 평온함을 애써 모른척 하려는 것처럼 양손으로 이마를 주욱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단테가 그의 목가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약한 찬 기운과 딱딱한 감촉에 정신이 돌아왔으나, 다시 그의 손등에 글을 적으며 올려보는 모습에 맥없이 시선을 떨궜다.
[이럴 줄 알았으면 머리를 그냥 뒀을텐데. 당신한테서 좋은 향이 날 것 같아.]
“별로. 비누로만 감았습니다.”
[왜? 일부로 귀한 것만 꺼내놨는데.]
“그래서. 귀한 거라.”
단테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의 쇄골에 옆태를 눌러붙였다. 여전히 오른 손으로는 어깨를 넘어 등까지 껴안고, 왼 손은 그의 가슴팍에 올려놓고 품을 꾹 안은 채였다. 베르길리우스가 그 모습을 내려보다 결국 손을 내려 그의 허리를 감싸 당겼다. 두어번 뒤척이자 자연스럽게 가장 편한 자세가 뭔지 알 수 있었다. 거의 반측면으로 돌아 베르길리우스의 몸에 반쯤 매달려 있는 단테가 슥 글자를 적었다.
[당신이 더 귀해. 이 집의 모든 것보다.]
당신보다? 그는 문득 치미는 질문을 삼킨 채로 느리게 속삭였다.
“그런 대접을 받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왜?]
전부 대문자로 적은 단어 위로, 단테가 슥슥 글귀를 적어나갔다. 베르길리우스는 상당히 관능적이라 부를 것 같은 분위기에도 별다른 두근거림 없이 안정만 느껴지는 이 상황을 가만 생각했다. 단테도 그런-성적인-의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 자신이 유독 이상한 것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대강 답할 무렵이었다. 졸음이 훅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예수, 세상에 내려온 메시아도 그를 가엾이 여기며 귀한 향유로 그의 발을 씻긴 여인을 용서하고 축복했어. 모든 선지자들 또한 고난의 길을 겪을 때도 있었지만 그들을 배불리 먹이고 따스히 마주하는 도시를 만나기도 했지.]
단테가 고개를 들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어둠속에 일렁이는 그 불꽃을 마주보았다. 연신 흔들리면서도, 타지 않는 불.
[하지만 너는, 오직 고난만을 느끼려 하는 구나.]
그 손이 뻗어와, 그의 뺨을 쥐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유독 찬 손길을 받아들이며 그의 입술 위로 떨어지는 단단한 감촉, 차가운 금속의 재질. 그리고 그 무엇보다 그의 속내를 아리게 찔러오는 피로감을 받아들였다. 완전히 어두워진 시야에 눈을 감고. 숨을 내쉰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너의 주께서 고난을 내어주지 않았는데. 이 오만한 자야. 스스로를 상처입히며 썩어가고 있구나…]
찰랑, 하고 사슬이 기어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베르길리우스가 눈을 감은 채로, 여전히 그의 뺨에 올라간 손길에 느리게 침음했다. 정신이 멀어지기 전, 뱉었던 말만이 선명했다.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니 내가 주의 명령을 받아, 너를 돌보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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