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의 달 27일

벨스즈

리틀 가든 by 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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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위대한 벨 단장의 14번째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 된다. 이 날이 되기에 앞서 최근 몇 주간 수십통의 편지 다발이 우체통에서 쏟아졌다. 지금 벨벳이 훑고 있는 건 변경백 프랑시스 경이 써내린 편지 한 통에 대해서다. 어린 나이 벌써 일 만 평 언저리의 거대한 극장을 뮤제에 짓기로 한 결정에 대해 화려한 수식언으로 마구 칭찬해내리고 있는 편지를 스즈카가 타와 준 오렌지 페코 홍차와 함께 흘려내린다. 벨벳이 읽기에 그건 좀 지겨웠다. 자신이 그 누구도 이루어내지 못한 위업을 치르고 있다는 건 어느 누가 입에 담지 않아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감히 예술을 접해보지도 않았고 돈을 쥐는 것만 관심사일 이들이 판타 뮤지카를 제아무리 칭찬해보았자 그 말이 어디로 튀겠는가. 그저 어찌 그런 사업을 성공할 수 있었냐는 말 뿐, 정작 그걸 위해 극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최고로 나아갈 수 있게 보살핀 건 알아주고 있지 않다. 벨벳은 바로 옆 소파에 걸터앉은 스즈카에게 편지를 던졌다.

“네가 답장을 써.”

“그런 건 네가 좀 해라…… 각본 말고 이런 뒤치닥거리도 해줘야 해?”

“난 바빠. 이런 건 알아서 했어야지. 그러라고 준 게 내 이름이 새겨진 나비 각인 도장일텐데.”

확실히 그랬다. 나비 문양이 수놓아진 도장은 이 나라에 단 한 명 뿐인 판타 뮤지카의 단장 벨벳을 상징하는 것이어서. 그걸 쓸 수 있는 건 벨벳, 그게 아니라면 그를 후견하고 있는 스즈카 뿐. 도장 가게에 세공을 맡길 때 두 개를 지시할 때부터 스즈카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가족이기에 네 몫도 준다 생각하기엔 돌보는 아이는 호락호락한 자식이 아니었다. 또 다른 공문서를 떠맡기겠군 싶었지만 그게 이름난 귀족들에게 아부하는 일이라곤 생각을 못 했지. 하지만 도장이 그 누구도 아닌 자신만 사용할 수 있는 이상 하청이 내려온 일에 대해 한 번 더 하청을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스즈카는 이제는 익숙해진 나리들 말투로 편지 쓰는 걸 이어나갔다. 마음 속 깊이 감사합니다, 프랑시스 경. 받는 이는 내가 써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프랑시스인지 프랑스인지 하는 놈아. 넌 직접 무대를 본 것도 아니면서 편지를 보냈다는 시점에서 이미 뻥 차였을 걸. 그 무대를 보고 싶다고 애원하는 귀족 영애들의 편지도 수두룩하지만 벨벳은 그 모든 부탁을 거절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사교계의 여왕이라는 그 마티외 부인의 것도 말이다! 그 여자가 처음 공연을 봐 아가씨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다면 일 만 평 뒤 벌써 절반 규모로 더 증축을 했을 거다. 스즈카가 아쉬워 죽겠다는 볼멘소리를 낼 때 벨벳은 미동도 없었다. 벨벳 왈, 이렇게 한 번 받아주면 같은 요구가 끝도 없이 들이닥치게 돼. 그러면 티켓으로 파는 자리보다 지정석이 더 많아지게 될 걸. 스즈카, 너도 이 나라에서 연극을 즐기는 사람들이 누가 더 많은진 알고 있지. 전부 귀족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판타 뮤지카의 티켓 판매는 극장 앞에서 줄을 서는 걸로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여기까지 듣고 스즈카는 알았어, 알았다고! 하며 손사래를 쳤다. 벨벳은 큭큭거리며 웃었다.

뭐가 됐던 생일이다. 벨벳은 특별히 주문한 아마빛 원단의 실크 셔츠를 두르고 방을 한 바퀴 빙글 돌아보였다. 어울려? 스즈카는 깃펜을 끼적이다 마지못해 끄덕인다. 실제로 어울리기도 했고. 곧 시계 바늘이 절반을 돈다. 이른 아침은 저택의 준비를 해야하니 점심 식사를 할 때가 되어서 오세요라고 전해두었기에 모여들고 있을 때, 지금 쯤이면 파티를 위해 사용인들이 입구에서 시중을 들고 안내하고 있으리라. 그러니 모이는 사람을 위해 꼬박 머리를 숙여주러 가야한다.

사실 벨벳은 그런 걸 좋아하진 않았다. 다만 익숙할 뿐. 그런데도 매 생일 때마다 성대하게 치르는 까닭은 그저 하나였다. 아버지는 굉장히 팔불출이라 자신보다 벨벳의 생일에 더 공을 들이곤 했다. 예로, 파티에 참석하는 모두에게 세련되게 수공된 쪽지가 든 금장식 계란을 나눠줘 거기 안 벨벳이 뽑는 숫자에 맞춰 사람을 호명하는 놀이를 한다거나. 거기에 드는 돈만 일반인 월급의 수백 배가 넘었을 게 틀림 없다. 그러니 참석하는 귀빈객들에게 벨벳이 장례를 치른 후엔 성대한 행사가 어떻게 될지도 소소한 화제가 됐다. 그렇게나 속닥댄 데에는 자신의 아들딸들에게 왜 자신은 이렇게 해주지 않냐는 투정을 팔 년 내도록 들었던 어른들의 심술에서도 있다. 그러니 벨벳은 결코 지고싶지 않았다. 자신을 불쌍해진 아이로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아홉 살 생일, 그 날은 이제까지 중 가장 화려한 생일이 됐다. 은단으로 수놓아진 하늘을 볼 수 있을 거라 누가 감히 생각했겠는가! 그러니 그 다음 생일은 좀 더, 그 다음 생일은 좀 더…… 그렇게 관성적으로 달려온 탓에 오늘까지 이르렀다. 이제 판타 뮤지카가 있으니 아무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진 않겠지. 오늘을 마지막으로 하고 매듭을 지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다 벨벳은 발을 뻗어 계단을 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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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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