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
민화인X비소
비소가 죽었다.
뭐, 예상 못한 일은 아니지.
민화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시야를 내리면 눈을 감고 있는 그가 보인다. 한참 전에 식은 육신은 아직도 온기를 머금고만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언제고 그랬듯.
언제나 했던 실험처럼.
그 창백함을 뚫고 다시 눈을 떠 자신의 멱을 잡아 줄 것만 같았다.
아니다.
아니지.
죽은 사람을 두고 쓸데없는 상념이다.
민화인은 다시 생각을 고쳐 잡았다.
고개를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주변엔 수많은 시체들과 수많은 복잡한 진이 그려져 있었다.
민화인은 비소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하나, 아쉬울 건 없었다.
그가 언제 그의 말을 그리도 잘 들었다고.
슬퍼할 이유 따윈.
그럴 여유 따윈 없었다.
살리지 못 했다면,
내 손으로 죽이지 못 했다면.
다시 살려내면 그만 아닌가?
당신은 죽었던 것이 아니면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의 정인이여.
빈 공간에는 허무로 들어찬 이의 목소리만 아득히 울려 퍼진다.
“독마, 민화인.”
한참 전부터 울리던 작은 발소리가 어느새 민화인의 뒤로 다가와 있었다.
그의 목에 날이 선 차디찬 검을 올리고는 내려다 본다.
민화인의 주변의 참혹한 광경을 도저히 눈에 담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서는 이 자리를 만들어낸 자를 혐오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민화인이 손을 들어 목에 들어온 검날을 잡았다.
“...!”
검게 물든 민화인의 왼손의 검날을 무디게 녹인다.
상대가 검을 뒤로 당겨 민화인은 검날을 놓았다.
민화인은 비소의 몸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도 없는 비어있는 얼굴이 죽은 자 같이 서늘했다.
“방해하지…마시죠.”
그의 왼손을 타고 세침이 적대하는 자를 향해 날아간다.
기혈이 막히고 근맥이 엉망진창 갈렸으나 여전히 완벽한 기수식을 가진 동작이었다.
민화인의 손 끝엔 적이 아닌 그의 검은 손이 눈에 들어왔다.
곱게 정리되어있던 밝은 손은 어디로 갔는가.
임을 따라 저편으로 떠나갔는가?
내 손을 떠났던 비수들은 나의 적이 아닌.
결국 나의 정인을,
나를 향하고 말았습니다.
나의 손날에 스치는 적의 검날은 뜨겁고, 찬란하군요.
한데 나는 왜 이리.
나는 당신과 있음에도 어이하여 이리 비참합니까?
이어지던 검격은 결국엔 민화인의 팔을 스쳤다.
흩날리는 선혈이 시야를 가리고 민화인은 마침내 적과 거리를 두었다.
왼팔엔 내력을 담을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왼팔을 사용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옆에 눈을 감은 이를 위한 애도인가, 무력감에 좌절한 이의 죄책감인가.
아니면,
언젠가 함께 하늘 아래서 비수를 잡았던 이에 대한 그리움인가.
아아.
나의 임이여.
나에게 어찌 그대를 잊지 말라 하셨습니까.
어이하여 나에게 죄를 안기고 떠나셨습니까.
검날과 부딪히는 세침이 서글픈 소리를 터뜨린다.
검로를 붙잡힌 적이 민화인에게 말한다.
“가서, 죄에 대한 대가를 받으십시오.”
가만히 상대의 빛나는 눈을 보단 민화인은 웃음을 뱉었다.
“대가? 내가 대가를 받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는 것 같은데요.”
“이 광경을 두고도 그런 뻔뻔한 말이 잘도 나오는구나.”
아.
민화인은 짧은 탄식을 내었다.
고작 이딴 목숨들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라는 말인가?
민화인은 몹시도 불쾌했다.
“이건 올바른 대가의 결과입니다. 일영화검께서 말을 얹을 자격은 없는 것 같군요.”
“그건 당신이 바라는 결과지, 올바른 결과가 아닙니다.”
민화인의 말에도 상대는 흔들림 없는 눈을 보였다.
아, 고리타분한 도련님께는 그러시겠죠.
민화인은 대화를 포기했다.
이해가 닿지 않는 이와의 대화보다 차라리 무력 다짐이 더 의미 있을 것이다.
이 곳에 죽어있는 자들 모두, 민화인에게 화를 갖고 있던 자들이다.
언제고 그를 노리려 들었으며,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도 있다.
그래, 그 끔찍했던 그날 그 시에 있던 자들이었다!
자신을 공격하고 그의 정인을 공격하려 들었던, 찢어 죽여도 모자랄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저지른 일을.
그들 스스로 대가를 치를 수 있게 했을 뿐인데, 왜 자신은 죄인이라며 타박받고 있어야 하는가?
모두 그를 증오했으며.
모두 그가 죽기를 바랬고.
모두 그가 고통스러워하길 바랬다.
그리고 고통에 빠뜨리길 성공했다.
하지만 결국 고통스럽게 죽어간 이는 누구인가?
결국 살려달라 빈 이는 누구인가?
“아, 비소.”
내가 당신을 죽였습니다.
당신은 나의 말을 부정캤지만.
내가 당신을 죽인 겁니다.
언제고 내가 당신을 죽이기를 바랬는데,
정말로 내가 당신을 죽였습니다.
내가, 나 때문에 당신이 죽었습니다.
왜 눈을 뜨지 않습니까.
내가 당신을 위해 수십의 목을 바쳤거늘.
당신이 바란대로 내가 당신을 죽였는데,
어찌 나를 위해 웃어주지 않습니까.
상대의 등을 뒤로 열의 무인이 검을 들고 들어와 그를 포위한다.
몇몇은 주변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하-, 하하.”
민화인은 울음을 터뜨렸다.
울리는 소리 사이로 영원히 눈을 뜨지 않을 희게 보존 된 시체 한 구만이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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