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인

백세 (3)

민화인X비소 NO.16AU

비소는 들려오는 안내 방송에 멍해졌다.

도저히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이 기록은 과거의 것이 아닌가? 그저 우연의 타이밍인가?

비소의 앞에 놓인 녹음테이프에선 계속해서 노이즈와 녹음 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뭘 그리 넋을 놓고 있습니까? 정신 차리세요.“

그것은 마치 비소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아니 확실히 말을 걸었다.

그것은 녹음된 목소리가 아니었다.

“정신 차리시죠. 당신도 공격에 당했습니까?”

“너…”

새하얀 것이 긴 뿔인지 머리카락인지 모를 것을 길게 늘어뜨린 채 고고한 무표정으로 걸어들어온다.

“가시죠. 상월은 제거 대상입니다. 연구원들을 향해 공격성을 띄기 시작했거든요. 나는 연구진들의 안전한 대피를 인솔할 수 있는 책임을 받았습니다.”

비소는 이질감 강한 눈앞의 흰 사내를 바라보았다.

“...왜, 무슨 문제 있습니까?”

민화인은 붉은 분홍빛의 눈동자를 굴렸다.

그의 시선이 비소 옆의 테이프로 향한다.

“...어디서 났습니까? 재미없는 연구 기록을 듣고 있군요. ……어떻게 생각합니까?”

“...뭘.”

“나의 연구 말입니다. 내 발상에서 벗어난 이론을 세울 수 있습니까?”

비소는 답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그가 들은 녹음 기록만으로는 민화인이 바라는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목표 지점은 무엇인가.

그가 존재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

그건 막연한 목표지 그 목표하는 것에 대해 대한 명확한 해결점을 제시하지 못한다.

비소를 바라보던 민화인은 이내 몸을 돌렸다.

“별로 기대는 안 했습니다. 이런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 명확한 가설을 세워내는 사람은 그다지 없거든요. 어서 가죠. 그러다 난폭해진 상월에게 습격당합니다.”

*

민화인은 비소를 한 빈 연구 공간으로 안내했다.

"뭐야, 아무것도 없는데?"

"당연하죠. 당신이 첫 번째니까요. 나머지도 데려올 테니까 여기 계세요. 쓸데없는 짓 말고요."

"아무것도 없어서 할 것도 없거든?"

민화인은 뒤돌아 다시 연구실 문으로 향했다.

"아."

밖으로 향하던 그는 무언가 떠오른 듯 멈추어 섰다.

"누가 불러도 대꾸하지 마세요."

"응?"

"대꾸하지 말라고요. 알겠습니까?"

민화인은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곤 훌쩍 가버렸다.

"뭐야…?"

홀로 남은 비소는 제법 심심할 법도 했지만, 생각과 달리 그러진 않았다.

"비소."

도망치세요.

작은 목소리가 비소의 귀를 간질였다.

뒤돌아 확인한 목소리의 주인은 방금 제 일을 마저 하러 간다고 떠난이였다.

방금까지도 작은 모습으로 있던 그가 왜 굳이 모습을 바꾸고 나타났는지 의아했으나, 처음부터 이해의 영역에 있었던 그가 아니었기에 그러려니 넘긴 비소였다.

"..? 뭐야? 사람들 대피 시킨다며?"

"심심해서요."

비소의 뒤로 불쑥 나타난 커다란 민화인의 두 눈동자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허? 심심할 게 뭐가 있어? 사람들은 어쩌고?"

"심심할 이유야, 아주 많지요."

민화인이 제 특유의 기분 나쁜 미소를 슬쩍 지어본다.

"그나저나, 말을 참 안 듣는 사람입니다."

"뭐가."

"내가 대꾸하지 말라고 그랬을 거 같은데."

"...너도 해당하는 거였어?"

민화인이 말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여전히 참 기분 나쁜 녀석이었다.

"당신이 내 이야기를 재밌게 듣는 것 같아서 제가 친절히 가져왔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심심하지 않겠지요? 라며 답지 않게 싱글거리는 그였다.

민화인이 넘긴 것은 녹음테이프였다.

"같이 들을래요?"

왠지 모르게 살갑게 묻는 민화인이었다.

비소는 이전과 미묘하게 다른 태도를 가진 그에게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가 경고하는 것만 같은 불쾌감이 온다.

제발.

도망쳐.

하지만 비소는 이 기분을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다.

그저 불편한 감각에 불과하지 않은가. 민화인, 이 이상한 박사는 한순간도 기분 나쁘지 않았던 적이 없다.

하지만 그런데도,

"나중에."

비소는 거절했다.

순간적으로 표정이 지워진 민화인이었다.

이는 비소의 경계를 더 끌어올리기만 했다.

"아쉽네요. 경험 공유는 유대감에 중요한 열쇠 중 하나죠."

"......"

"괜찮습니다. 금방 다시 보고 싶어질 테니까."

민화인은 그대로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비소는 빈 공간에 다시 홀로 남겨졌다.

"사람들 데려온다더니 한가롭기도 하지. 대체 뭐야?"

이해되지 않는 행보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한가롭게 의문점에 대해 고개를 기울이기엔 열린 문 너머로 얼굴이 잔뜩 질려 황급히 뛰어가는 연구진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뭐야? 대피 장소는 여기라고 했…"

"비소!"

연구원들이 뛰어온 방향에서 다급히 걸어오는 민화인이 보였다.

"! 너…! 뭐야? 무슨 일이야? 다들 겁에 질려서는…"

"생각보다 규모가 더 거대합니다. C 섹터로 옮겨가세요."

민화인은 느긋하던 방금과 다르게 무척이나 긴장되어있었다.

이전에 만난 그가 전혀 다른이라고 해도 될 만큼, 그는 뛰어왔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식은 땀을 흘렸다.

"나오세요.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민화인은 비소의 손목을 붙잡고 통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무슨 상황인지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었지만, 고요했기에 비소는 더 불안감을 느꼈다.

긴 통로를 뛸 수록 민화인은 지쳤는지 비소보다 뒤처지기 시작했다.

답지않다 느낀 비소가 민화인의 상태를 물었다.

"너 괜찮아?"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옆으로 아른거리는 검은 빛에 비소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왜 검은 빛이지?

언제부터였는지 비소의 귀에 민화인의 선명했던 발굽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지?

"...젠장."

멈춰선 민화인이 숨을 골랐다.

검은 머리칼이 덮인 숙인 고개 아래로 자신의 앞을 움켜쥔 손에 붉은 선혈이 쥐여있었다.

민화인이 손에서 갈래로 뻗어 나오는 붉은 것은 민화인과 비소가 지나온 길을 선명하게 그리고 있었다.

"잠깐… 왜? 아니, 언제부터?"

왜 몰랐을까?

기분 나쁜 미소가 비소 자신을 덮어 가리는 것만 같았다.

이곳에서 웃고 있는 자는 어디에도 없었음에도 불과하고 말이다.

오묘한 빛이 도는 검은 머리에 알이 작은 안경. 특이한 뿔과 발굽도 없는. 인간과도 같은 모습의 민화인. 비소가 서류상으로 본 '연구원 민화인'의 모습이었다.

왜 지금에서야 다른 이들이 보는 '연구원 민화인'으로 그의 모습이 보이는지 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에도 태연할 거 같은 그가 상해를 입고 점점 비틀거리고 있다는 것이 이런 사소한 점은 신경 쓰이게 하지 못했다.

민화인 그는 보이는 것에 변칙을 줄 수 있는 자였다.

때문에 비소는 이 또한 그가 장난을 지어내는 것이라 믿고 싶었다.

"...비소."

하지만 점점 선명해지는 비릿함과 자신을 잡은 손에서 따듯한 선혈의 따듯함 사이로 느껴지는 꺼져가는 생의 온기가 끔찍하게도 생생했다.

"도 망…치세요."

민화인은 비틀거리다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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