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기점

어떤 미래

붉은 군락 by 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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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는 단 한번도 인어공주를 사랑한 적 없거든, 그때도, 지금도 쉬워.

그렇다면 정말로 왕자는 본인을 물에서 건져낸 인어를 미워했을까요?

인어는 바닥으로 끝없이 유영한다. 왕자의 허무마저 끌어안고 물에 빠진 인어는 결국 물거품이 된다. 시야가 서서히 부서지며 몸 안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폐부를 틀어막는 익숙한 감각에 인어는 그 수면같은 눈을 한번도 감지 않고 오롯이 제 얼굴도 비춰주지 못하는 물 안을 본다. 희게 질려오는 숨, 흐려지는 시야, 점차 몽롱해지는 머리 사이로.. 떨어질땐 언제고 지금 스치는 주마등, 언젠간 그 왕자의 목을 쥘 때도 그랬던가. 제게 줄 수 있는 것이 당신의 맥동 뿐이라고. 키요카는 그때 망설였다. 왕자의 팔을 붙잡고 제게 아주 빠트릴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 아래에서 붙잡을 수 있는 가장 무거운 것, 제가 발을 딛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그러나 당신의 목에 손을 올릴 적, 이전에 당신이 제게 주었던 맥박을 느꼈다. 물 위로 올라오라는 고동을. 그렇구나, 저는 이 왕자를 영원히 물 속에 끌어들일 수 없다. 인어는 물 위에 올라온 왕자를 보았을 때 부터 그에게 심장을 주었으니까. 그가 눈을 떠 사랑을 속삭이는 순간을 보고 오래도록 육지에 묶이게 되었으니까. 그렇다면 정말로, 어쩌면 왕자는 인어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렇지만 인어는, 제가 물에 건져올려 숨을 불어넣는 순간 영혼마저 전부 그의 것이 되었으니, 어쩌면 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왕자에게 물거품이 되어 열상을 남기는 것은, 본인이 육지에 있었던 흔적을 땅 위에서 가장 굳건할 것에게 남기는 것이었다고…

물 안에서 육지의 언어는 무용했으니 키요카는 입을 열어 물거품이나 뻐끔거렸다. 그래, 전부 끝이지, 제 이름의 운명대로 바다에 빠졌으니. 다음에는 정말 누레온나로 태어날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당신은 제가 남긴 마지막 열상을 가지고 있을까? 키요카는 자조했다. 미친 놈, 죽으려면 곱게 죽어… 부릅뜬 눈, 물 안에서도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힘없이 바닥을 향한 다리가, 어릴 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물에 빠졌을 때 처럼 세차게 움직였다. 어떠한 진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포말처럼 사라지는 운명을 가지고 돌아간다며, 수면 위로 향한 시선은 떨어트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하, 제 운명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모순 투성이, 역시 난 인어도 사람도 하물며 줄리엣도 될 수 없는 욕심투성이 괴물이다. 그런데 순간, 제가 끊임없이 응시하던 수면 위로 빛이 들었다.

ㅡ키요카는 다시, 물에 가라앉는 소리를 듣는다.

인어는 빛을 보고는 홀린 듯 나아간다. 이미 꺼져가는 의식, 속으로 왕자의 앞에서 처음 이야기했던 제 염원을 되뇌인다. 육지에 가고 싶어요, 육지에 가고 싶어요… 너절한 상처가 나 있는 손목을 겐죠가 붙잡고, 키요카는 마침내 수면 위로 끌어올려진다. 갑작스레 막힌 숨이 뚫리자 키요카는 몸을 거칠게 흔들며 물을 뱉은 기침을 하다가, 제 어깨를 꽉 붙들고 있는 남자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본다. 지척에서 울리는 고동이 거세다. 마침내, 땅이다. 제 너른 육지다. 물 빛 눈에 비치는 빛에 키요카는 눈을 찌푸렸다. 물거품이 될 인어를 왕자가 다시 건져올렸다. 왕자가 너를 사랑하지 않으면 너는 물거품이 되고 말 거야. 그러나 지금, 왕자와 인어는 손을 붙잡고 지상으로 나아간다.

땅이 막 발에 닿기도 전에 남자는 여자를 번쩍 들어올린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흰 맨발이 허공에서 달랑인다. 밀착되어 있는 살결에서 울리는 고동이, 머릿 속에 잘게 남아있던 파도소리마저 지워버렸다. 키요카는 남자의 어깨를 꼭 붙들고 허공에 매달려 있다. 마치 막 다리가 생긴 인어처럼, 걷는 방법을 아주 잊은 것 처럼. 남자의 젖은 머리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하얀 속눈썹을 적신다. 휘영청 걸린 달빛에 비친 모습은ㅡ여전히 짓누른 눈가와 멍으로 부어오른 모습을 하고 있었음에도ㅡ아름다워서, 키요카는 물에 빠진 사실도 잊고 남자의 얼굴을 망연히 바라만 보았다. 겐죠는 제 로퍼를 벗어 키요카를 내려주어 신발을 신겨 준다. 거의 손가락 반 뼘 정도의 큰 신발 안으로 키요카의 발이 안착한다. 자신을 꽉 붙든 손길이 멀어지고 신발을 신은 발에 무게감이 느껴진다. ..아, 다시 육지였다. 건져올려지고 나서 호통이라도 칠 줄 알았건만, 꼭 제가 빠진 듯 한 저 침잠한 시선이라니. 물 아래 가라앉았던 건 자신이건만 꼭 제가 빠진 것 처럼… 겐죠는 말 없이 가쿠란 상의를 키요카에겐 둘러주고 담담히 말했다. 비쳐. 망연히 가쿠란을 뒤집어 쓴 채로, 키요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축 늘어트려져 있는 키요카의 흉터 난 손목을 꽉 붙들고 두 소년 소녀는 불타고 있는 학교로 돌아간다.


바다에서 살아 돌아온 인어는 이번에는 정말로 사람이 되고 싶었기에 이 지긋지긋한 물 위를 떠나고 싶었다. 학교는 불탔으니 제 학창시절에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다. 졸업 사진조차. 그렇지만 이제 물의 깊이를 알았고, 물이 지긋하기는 했어도 두렵지는 않았다. 키요카는 집에 돌아와 창을 죄 막고 있던 검은 시트지를 모조리 떼어 냈다. 어둑어둑하던 방 안에 파도 위로 산란하는 빛이 끼쳐들었다. 키요카는 눈살을 찌푸리고도 온 몸으로 그 빛을 맞았다. 시트지로 얼룩덜룩해진 창문 위에 후, 하고 입김을 불어 창문을 닦아내며 제 아버지와의 대화를 가만히 회상했다.

-저 도쿄로 올라가고 싶어요. 물은 이제, 싫어요.

-왜? 자리 잡고 싶어해서 부러 섬 마을로 온 걸.

키요카는 제 눈 앞에 있는 낯짝을 뭉게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제 속이 폭풍을 만난 파도처럼 세차게 일렁이는 것을 고요함으로 잡아 누른다.

-..자리 잡을 학교가..없어졌잖아요. 올라가게 해 주세요. 걱정 끼치지는 않을 테니까.

-너는 내 딸이면서도 참, 별나. 니 아빠는 바다 위에서 잘만 있는데. 엄마를 닮은 건지 원. 알겠다. 준비되면 올라가.

물살로 가족을 전부 떠나보낸 남자는 귀찮다는 듯 제 앞에서 손을 휘휘 내어졌다. 거의 반평생을 바쳐온 방황이 이토록 허무하게 끝났다. 물에 빠져 뒈져버려. 키요카는 속으로 악담을 하곤 뒤로 돌았었던가.. 키요카는 창문을 닦고 있던 천을 바닥에 내팽겨치고 침대 위로 벌렁 누워버렸다. 갑작스레 맞은 자유는 물 위에서 건져올려진 만큼이나 벅차서, 키요카는 창문을 닦다 말고 한참을 쪼그린 자세로 누워 흐느꼈다. 이제야 발을 딛은 육지는 맨 다리로 밟기에는 너무나 아팠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 있자 휴대폰이 화면이 켜지며 진동했다. 키요카는 손으로 눈물을 문질러 닦고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겐죠 토키사다]

킁, 하고 코먹은 소리를 내곤 키요카는 망연히 화면에 뜬 이름을 바라보았다.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받는다.

-..네, 나카이에요.

목에서 갈라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눈물을 겨우 그쳤는데..

-어디야?

-집이죠.

-할 거 없으면 잠깐 보지. 학교 부지 앞으로 와.

뚝 끊기는 전화. 제 목소리에 대한 아무런 언질도 없다. ..아니 보통 목소리가 이러면 울었냐는 질문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나 이것마저 겐죠다워서 키요카는 원망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낮게 한숨을 쉬곤 키요카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창 밖으로 노을이 번져, 바다를 반쯤 붉게 적시고 있었다. 키요카는 곁눈질로 그 풍경을 잠깐 바라보고는 방 밖을 나섰다.

학교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흉측한 형태로 불타 있었고 여전한 건 학교 주변을 감싸는 지긋지긋한 파도소리 뿐이었다. 학교 부지 앞에서 멀거니 서 있는 남자를 보고 키요카가 다가갔다. 오후 5시가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노을빛을 받은 남자의 검은 머리가 흰 금발처럼 보이는 착각이 든다. 황폐한 건물 앞에 서 있는데도 꼭 마지막 남은 왕국의 혈통 같은 저 근사한 모습을 보라.. 역시 저 남자에게 있어서는, 세상 발길 닿는 모든 곳이 무대다. 파란 머리가 바람에 노을빛을 받아 거세게 흔들린다. 머뭇거리며 남자의 앞에 선 키요카가 퉁명스럽게 묻는다. ..아직 목이 좀 갈라진 채였다.

-왜요?

-너, 스즈레 씨를 떠날 건가?

-당연하죠, 그게 제 염원이었어요, 아시잖아요. 스즈레 시에는 악감정이 없지만, 바다에는 아직 악감정이 남아 있거든요.

-그렇다면 바로 도쿄로 가?

-..그렇다고 하면요? 같이 가 줄 것도 아니면서,

-같이 가지.

남자의 마지막 말을 듣고 회색빛 눈이 잠깐 커졌다. 아직 눈물을 완전히 지워내지 못한 탓에 일렁이는 눈가로, 망연히 남자를 올려다보는 눈에 다시 붉은 빛 안광이 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이 남자는. ..아니면 혹시 원래 도쿄로 올라갈 예정이었나. 키요카는 잠시 해야할 말을 골랐다. 같이 가자는 말에 괜히 가슴이 한 차례 술렁였던 탓이다. 천재 배우란 문제야, 대사 하나도 고백처럼 들리니. 자기도 모르게 홧홧하게 열이 오른 얼굴을 부디 노을이 가려주길 바라며 잠시 시선을 피했다. 울렁이는 마음이, 이상하게도 제 고동 소리에 가만히 가라앉았다.

-도쿄로 이제 올라가시게요?

-그래, 슬슬 올라갈 때가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같이 가. 남자가 덤덤히 말한다. 대답을 하기도 전에 겐죠의 장갑 낀 손 끝이, 울음 탓에 발갛게 부어올라 있었던 키요카의 눈가 아래를 가만히 꾹 눌러온다. 얼마나 울었는지 가늠이라도 하듯. 키요카는 눈 아래를 누르는 손길에 눈을 살짝 내리감았다. 제 볼을 쓰는 손길을 붙잡듯, 키요카는 두 손으로 겐죠의 팔목을 두 손으로 꽉 붙들었다. 뺨을 지탱하듯 감싼 손 위로 가만히 볼을 비빈다. 얇은 천 아래로 느껴지는 온기가 이상하게도 눈 아래를 식혀주는 것 같아서, 키요카는 오래도록 겐죠의 손 안에 얼굴을 기댄 채 있었다.

겐죠의 손목을 꽉 붙들고 있었기에 느껴지는 미약한 맥박에 키요카는 내리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떠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제 뺨을 지탱하고 있던 손길이 문득 떨렸다. ..팔이 아픈가. 키요카는 천천히 겐죠의 손목을 붙들고 있단 손을 놓았다. 제 뺨을 감싸던 손이 느릿하게 멀어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키요카는 문득 올려다본 남자의 얼굴이, 평소보다 유난히 붉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노을이 남자의 등 뒤에 있어, 남자는 태양 빛을 뒤로 다 받고 있었기에.. 눈부시다는 감상 외에는 전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의 침묵 사이로 몇 번의 파도소리가 오고 갔다.

-다시 연락하지.

한참의 간극 후 입을 연 남자는 먼저 언덕을 내려갔다. 뒤에서 본 남자의 목께가 태양을 뒤로 받아서인지 홧홧했다. 키요카는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다 빠졌던 바다로 잠시 시선을 두었다. 바라본 바다 위는 이제 온통 벌겠다.


검은색 세단이 좁은 국도를 빠져나갔다. 스즈레 시를 빠져나오면서 몇 번이고 본 바다가 이제 없다. 키요카도 잦은 이사 탓에 여러 번 장거리 운전을 견뎌 보았지만 아무래도 섬마을에서 도쿄까지 가는 여정은 꽤 엉덩이가 베기는 일이었다. 이제는 수풀이 우거진 창문의 풍경을 힐끗 바라보곤 키요카는 가만히 질문했다.

-도쿄로 올라가면 바로 바빠지세요?

-아마 그렇겠지, 일정에 맞춰서 올라가는 거니까. ..왜, 같이 하고 싶은 거라도 있나?

-아뇨, 막상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바쁘니까 좀 심란해서요.

-어쩔 수 없잖아. 내가 얼마나 바쁜데.

-제가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인 줄 아세요, 지금?

투덜거리듯 말한 키요카의 몸이 코너를 도는 탓에 겐죠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대로 겐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꼴이 되었지만, 키요카는 딱히 자세를 바로잡지 않았다. 겐죠의 눈이 무감히 어깨에 머리를 기댄 키요카를 보다가 , 민소매를 입고 있는 키요카의 손이 허벅지 위에 얹어져 있는 것을 본다. 이전의 그 긴 흉터가 나 있는 손. 겐죠는 손을 뻗어 그 손을 꽉 붙잡아 흉터를 가린다. 잠시 흠칫하던 키요카의 손가락이 겐죠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얽힌다. 기댄 어깨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박동에, 키요카의 눈이 점차 감긴다. 올라오는 잠기운 탓인지 입이 멋대로 움직인다.

-좀 적당히 바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좋았을 텐데.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거 처음부터 알았잖아.

-알아요, 안다니까요… 그런데 사랑하느라 또 바쁠 거잖아요, 그런 얼굴이어선.

제 얼굴 위에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나 키요카는 괜히 잡힌 손만 꼼질거렸다. 수마는 무의식에 눌러두고 있던 말을 묶어두지도 못하고 자제력을 잃은 입이 되게 만들었다. 후회하겠지, 키요카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생각했지만 아직 자신의 손을 잡은 겐죠의 손의 힘이 풀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연기는 좀 적당히.. 해요. ..아, 당신 적당히를 모르는구나.

-당연하지. 최고가 되지 않을 거라면 시작하지도 않아. 그리고 정확히 어떤 연기를 말하는 거지?

-그러니까 옛날에, 로미오 같은 거. ..솔직히 그때 이름이고 뭐고 다 던지고 싶었던 건, 나니까. …

아.. 잠기운 탓에 회색빛 눈이 자꾸 어른거렸다. 나무 사이로 때때로 스며드는 빛이 키요카의 눈가에 튄다. 눈가를 살짝 찌푸리자 큰 손이 키요카의 눈가를 부드럽게 가려준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서, 점차 무의식 아래로 가라앉는 몽롱한 정신 속에 어떤 속삭임을 듣는다. 그때 날 빠트린 건 너이지 않나. 대답을 해야 하는데 입술이 달싹여지지도 않았다. 키요카는 그렇게 겐죠의 어깨에 기대 잠들었다.


-키요카, 일어나.

몸이 부드럽게 흔들린다. 키요카는 부스스 고개를 든다. ..몸은 여전히 겐죠에게 기댄 채였다. 터져나오려는 하품을 꾹 눌러참고 키요카는 어둑해진 창 밖의 풍경을 본다. 온통 네온빛 조명으로 시야가 따갑다. 마침내 도쿄였다. 느슨하게 내린 시선 끝에 아직 제 손을 붙잡고 있는 겐죠를 보고 눈을 두 어번 깜빡였다.

-죄송해요, 불편하셨죠. 곧 시부야니까요, 이제 놔 주셔도 돼요.

겐죠가 붙잡고 있던 손을 느릿하게 놓았다. 키요카는 손목에 흉터가 남은 팔을 자연스럽게 팔 뒤로 숨겼다. 운전하는 내내 붙어있던 둘의 사이가 잠깐 멀어졌다. 장거리 운전에도 잠 한 번 자지 않은 얼굴을 키요카가 문득 , 생각해보니 바다가 아닌 도시에서 마주하는 남자의 얼굴이 새삼스러웠다. 그래, 도시 불빛 아래에서의 남자가 오히려 당연해야 하는데, 키요카는 이미 떠나온 스즈레 시에서의 남자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래, 그 지독한 파도가 넘실거리는 교실의 풍경. 눈에 불을 삼켜놓고도 제 앞에선 가끔 침잠하던 얼굴. 키요카는 그 때, 이 남자를 빠트리고 싶다고 생각했던가. 그때는 분명한 욕심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그것은 완전한 이기는 아니었다. 그것도 결국에는 삶에 타들어갈 당신에게, 제가 조금의 안배이기를 바란 기형의 애정이리라. ..못내 남에게 사랑을 속삭일 당신을 생각해보면, 물인 저도 속이 조금은 타들어가니까.

세단이 시부야의 시가지 앞에 멈췄다. 키요카는 차에서 내리기 전에 문득 겐죠에게 고개를 내밀곤 말했다.

-토키사다.

-왜?

-‘토키사다’는 남한테 사랑한다고 해 주면 안 돼요.

알겠죠, 키요카는 제 짐을 챙겨들곤 부끄러운지 차 문을 쾅, 하고 닫았다. 키요카는 가만히 떠나는 세단을 보며 잠깐 웃었다. 창문 너머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았으니까.

도시의 바람이 키요카의 파란 머리칼을 흔들며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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