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기점 :N

겐카이

붉은 군락 by 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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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에 막 상경한 키요카는 바빴다. 겐죠와 만난 이후로는 말할 틈도 없거니와, 새해를 맞이하고 나서도 바빴다. 겐죠가 바빠질 것이라는 것은 당연히 빈 말이 아니었기에.. 키요카는 1월 1일에 인사 차 보낸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문자의 답을 2월이 되고 나서야 받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너도. 이미 새해는 꼬박 지났네요.. 키요카는 그 답장을 보며 한숨처럼 답했다. 숨 쉴 여유도 없이 바빴더라면 좋았지만, 좋아하는 남자의 소식이 귀에 들어올 틈은 있을 만큼 바빴다. 키요카가 살면서 딱 한 번 만날 가장 잘난 남자는 도시에 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빛나기 시작했다. 겐죠 토키사다, 공백기 후 성공적 데뷔… 몇몇 기사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도쿄에서 지내기 시작한 이래부터 지금까지, 키요카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다시 도쿄로 돌아온 그 남자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갔다. 때로는 광고로, 때로는 누군가의 입으로, 때로는 본인이 찾아서. 처음에는 한시간 반 쯤 되는 영화로 공백기 이후 첫 작품을 올린 것 같은데.. 내용을 곱씹는 미간이 잠깐 찌푸려졌다.

도쿄에 같이 올라오고 나서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유튜브에 올라오는 15초짜리 영화 예고 pv부터 시작해, 긴 공백기를 깨고 돌아온 겐죠의 이전 연기 클립 같은 것들이 우르르 유튜브 알고리즘에 뜨기 시작했다. 이를 테면 그가 아역 시절에 연기했던 사극 남자 주인공의 아역 역할, 아마 역모에 휘말려 부모를 잃은.. 어린 나이인데도 몰입이 좋고 감정선을 잘 잡아, 어린 애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지 않고도 서러움을 잘 전달해 내 그때 당시 신내린 듯 한 재능과 겐죠의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져 꽤나 화재를 몰았었다. 하물며 그게 첫 데뷔였으니. 이후로 몇 년간 시트콤에서, 드라마에서, …열 살도 채 안 되는 나이에 드라마에서 주역을 맡기까지. 심지어 어릴 때 부터 배우였던 사람들의 징크스인 흑역사 짤조차 없는, 오점 없는 완벽한 연기 경력. 그러니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공백을 이해하지 못했고, 유튜브 댓글창은 어릴 때 부터 싹이 남달랐다, 따위의 댓글들을 달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은 저 연기를 하기까지의 과정이 어땠는지 안다. 말하는 공백기 따위는 없다는 것도, 그 남자는 삶의 전부가 ‘천재 배우’ 자체였다는 것도. 갈라진 목을 불안해하고, 연기를 거듭하면서도 어린 시절에 자전하고 있다는 것도, 그 과정을 겪고도 그 남자가 이 시절을 사랑했다는 것 즘은, 그 잘난 성격에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작은 휴대폰 화면 안에서 어린 시절의 겐죠가 말갛게 웃는다. 가상의 부모가 어린 시절 ‘겐죠‘의 머리를 쓰다듬는 장면이었다. 그래, 이때는.. 그렇게 웃었구나, 화면 너머에서 겐죠 토키사다가 웃으며 달려나간다. 키요카는 그 장면을 말 없이 보다 10초 후로 건너뛰었다. 겐죠 토키사다의 아역 시절 영상을 열 몇 편 쯤 보고 나자 나가기 전 유튜브의 메인화면이 겐죠 토키사다로 꽉 차 있었다. 키요카는 어쩐지 울화가 치밀어 올라 휴대폰 화면 그대로 침대에 던졌다.

이미 1분가량의 유튜브 영화 예고편에서의 조회수는 거의 백만에 임박하고 있었다. 버스의 전광판에, 지하철 광고판에, 주연들의 이름으로 크게 겐죠 토키사다가 써 붙어 있었다. 야쿠자와 경찰이 결합해 그 안의 더 큰 악인을 색출해 낸다는 느와르 장르의 한 시간 반 짜리 영화. 겐죠는 그 안에서 막 경찰대를 졸업하고 경찰이 된 의욕 넘치는 청년 경찰이었고, 젊은 패기와 특유의 정의감으로 최종 악역인 야쿠자에게 희생되는 가장 첫 번째 인물이 됨으로써 영화의 갈등의 시발점이 되는 인물이 된다. 가진 건 의욕과 정의 뿐이지만, 그 가치관이 영화 인물들 전반에게 영향을 끼쳐 회상 장면이 다른 인물의 입을 빌려 중간중간 꽤 자주 등장한다. 저희 이러려고 경찰 된 거 아니잖습니까, 저 진짜 나쁜 놈들 잡고 싶습니다. 예고 영상에 나온 겐죠가 같은 편인 경찰 경장에게, 경찰과 야쿠자들의 유착 장면을 목격하고 하는 대사. 경장의 두 손을 꽉 붙들고 절박한 듯 담담하게 말하는 목울대가 떨렸다. 식은땀으로 젖은 하얀 얼굴이, 경장을 올려다보는 붉은 시선에 평소 작열하던 태양같은 눈동자는 온데간데 없고, 그 경장을 꿰뚫어 보듯 투명하며 순박한 눈동자로 흔들리는 저 시선 처리까지.. 실제로 배우의 얼굴과 신체를 반영한 건지 작중에서도 겐죠가 맡은 역할더러 ‘저 친구는 순박하게 안 생겨선’ 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으니 영화관 안에서 직접 마주보는 저 장면은 얼마나 더 절박해 보이는지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작중에서 겐죠는 무리하게 접신 도중 발각되어 경찰 측의 인질로 사용되다가 끝내는 죽는다. 인질로 붙잡혀 고문당하는 장면에서 키요카는 귀를 좀 틀어막았다. 각목으로 뒷머리를 세게 강타당하고 배로 발이 날아들었다. 목구멍 안에서 신음을 억눌러 참고 있었는지 커컥, 하는 피 섞인 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과 발이 뒤로 묶여진 채 장신의 남자가 콘크리트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겐죠의 앞머리를 붙잡아 억지로 들어올리는 장면에서, 겐죠의 얼굴이 흰 조명등을 받아 파리하게 빛났다. 눈두덩이가 멍들어 터지고 이미 울긋불긋한 얼굴이 되어 피 섞인 침을 간신히 삼킨 목울대가 떨렸다. 상대가 대답을 종용하듯 겐죠의 양 뺨을 툭, 툭 쳤다. 끄윽, 하고 숨 넘어갈 듯 한 억누른 신음이 새어나올 뿐 겐죠는 말을 하지 않는다. 간신히 상대를 의식하는 붉은 눈동자에 빛이 죄 죽어 있다. 얇은 막이 쳐진 듯 희꺼덕 한 시선이 퍽, 하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뒤로 넘어간다. 겐죠의 얼굴 위로 몇 번 가래침을 뱉은 상대가 화면으로 다가오는 연출과 동시에 겐죠의 등장은 거기서 끝이 났다.

그 뒤로는 동료의 희생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그들이 보여주는 전우애와 희생된 동료의 정신을 이어받아 적을 일망타진한다는 흔한 느와르 장르의 결말이었지만, 연출 자체가 나쁘지 않았고ㅡ공백기를 깨고 돌아온, 이전의 아역 배우가 나온다는 것이 흥행 요소가 됐다. 어릴 때도 ‘국민 남동생’ 칭호를 받으며 곱상했던 얼굴 그대로, 그래, 그 빌어먹게 훤칠한 얼굴 그대로 잘 커 주었으니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추억삼아 입소문을 타 하나 둘 씩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키요카는 영화 상영 첫 날 일부러 무대인사를 하는 시간을 피해 아침 일찍 조조영화를 보고 그 날 저녁 인터넷에 올라온 리뷰를 보았다. 솔직히 중간중간 겐죠로 환기했다. ..따위의 코멘트들을 보고는, 그래, 솔직히 조금 웃었다. 성인이 된 이후의 첫 작품 치고는 아주 성공적이었고 겐죠는 그 첫 영화 이후 공백기가 있었냐는 듯 당당히 유명세를 탔다. 한시간 반 편짜리 영화 이후 그는 일 년간 짧은 호흡의 작품을 주로 찍는 듯 했다. 스즈레 고교에서 연극을 하던 것 처럼. 처음 느와르 장르에 나와서 순박한 경찰 역할을 하곤 바로 손바닥 뒤집듯 스릴러 장르의 연쇄 살인범으로 나와 다시 메스컴을 뜨겁게 달궜던가. 그 영화에 나오는 살인범은 흔적을 남기는 것에 강박을 가지고 있었고, 각도에 특히 집중했던 것 같다. 총 다섯 구의 시체에서 손가락 마디를 꺾는 형태로 시체에 흔적을 남겼었는데, 그 각도를 합친 것이 꼭 180도가 되게 했던 강박증 살인마. 교사시킨 시체를 무감히 내려다보며 소매를 쭉 내린 채 손가락 마디를 더듬으며 말 없이 손가락을 비틀곤 탁한 눈빛으로 웃는 장면이 유튜브 클립으로 나돌았고 키요카는 그 무렵 경영 학원을 다니면서 입 안으로 혼자 새우 튀김을 말 없이 우겨넣으며 모바일로 영화를 사 돌려보곤 했었다. 사방이 물인 곳에서 겨우 빠져나왔더니 이젠 내 사방을 본인으로 만들어, 키요카는 말 없이 보던 영화의 44분 48초에 북마크를 해 두곤 휴대폰 화면을 뒤집었다.

짧은 단편의 영화만 거듭해서 찍던 남자는 한 해가 지나도록 연락 한 번이 안 됐다. 새해가 넘어 이번에도 으레 인사를 보내는 것은 본인이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화면 속 남자는 답이 없다. ..이 남자의 영화를 보면서 거진 1년 내내 속을 앓았던 자신이 바보 같다. 그래, 그래, 늘 나만 당신에게 전전긍긍하고, 왕자만을 보고 육지로 올라온 인어는 결국엔 또, 맹목적으로 왕자를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거지. …과연 그런가, 키요카는 겨울 바람에 발개진 코를 가만히 장갑낀 손으로 문지르며 이전 장면을 회상했다. 바다 위 처럼 매서운 겨울 바람이 키요카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물거품이 된 인어를 건져 올리고 처음 마주한 남자의 그 물먹은 시선, 그것은 전혀 연기 따위가 아니었다. 지척에서 들리는 육지의 고동, 물 아래에 있기 이전에 남겨진 너절한 상흔을 보고 제가 열상이라도 남긴 듯한 흔들린 시선이 교차하던 순간을 키요카는 여전히 기억한다. 난 인어 공주가 왕자의 기억에 남기 위해서, 상흔을 남기기 위해 사라졌다고 생각한다만. ..남자의 목소리가 일순간 키요카의 귓가에 울렸다. 그 때의 당신은 분명 왕자는 인어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했던가. 그래, 사랑은 아니더라도 곁에 둔 것이 쐐기를 박고 물로 사라졌으니. 왕자는 인어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인어가 왕자의 닻이 되어 왕자가 인어를 붙잡아 건져올렸구나. 그렇구나, 무거운 것은 당신이 아니었구나… 키요카는 가만히 역 개찰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망연히 생각했다. 그렇다면 제가 정의내린 당신은 전제부터 완전히 틀렸던 건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 둘의 무게의 형평성은 어떻게 되는 거지. 물에서 건져올려진 제가 육지인 당신을 밟고 살아가고 있으니 제가 당신을 짓누르고 있다는 건가, 내가, 그 ‘겐죠’를? 절 보면서 숨기 좋은 너울 정도로 생각하는 주제에, 그래, 시선을 들어 먼저 당신을 본 건 자신이었다고 하더라도, 물 속의 모든 속살거림에 넘어가지 않은 남자가 당신이었으면서. 그렇지만..키요카는 역 개찰구에 표를 넣고 돌아올 열차를 기다릴 동안 계속해서 바닥을 본 채로 걷고 있었다. 인파에 휩쓸려 어깨를 부딪히고 나서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누군지도 모를 상대에게 물빛 머리를 잠깐 숙인 채 든 고개 앞에는 또 다시, 겐죠가 있다. 역에 크게 나 있는 광고의 전광판 안에서, 물빛 눈 안에 다시금 붉은 시선이 담긴다. 여전히 키요카의 눈 안에는 태양이 일렁인다. 키요카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누가 누굴 가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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