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의 경우

당신은 난제를 던진다

붉은 군락 by 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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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ㅡ

키요카는 파도의 잔물결 소리에 흠칫, 잠이 깼다. 5교시, 점심시간이 막 지나고 한 시가 조금 넘어가는 동아리 시간이었다. 이제 막 가물가물한 시야에 가득 들어차는 햇빛이 눈부셨다. 이상하다, 여기 그렇게 채광이 좋았나... 따위의 생각을 하자마자 지금 저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 사람임을 본다. 눈 앞에 햇살같은 머리칼이 창문 틈의 바람으로 흔들린다. 빛 부스러기같은 시야가 자꾸 이리저리 흔들려, 키요카의 푸른 머리칼이 자꾸 흔들렸다. 키요카는 자기도 모르게 싫은 소리를 냈다. 저기, 잠깐만... 자신을 흔들던 미약한 진동이 멈춘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그제야 자신을 깨우던 사람의 얼굴을 본다. 햇살을 받으면 더욱 하얘지는 백금발, 네 시 즈음 창문으로 살며시 비치는 햇볕같은 눈. 자주 본 적은 없지만 꼭, 봄날의 햇살 같이 생겨선, 이름이...

-나츠사키 씨?

-응, 나카이, 이제 깬 거야? 어쩐지 너무 이상한 자세로 자고 있길래 깨웠어.

키요카는 아직 덜 깬 잠을 깨우려 몇 번 눈을 깜빡였다. 분명 책을 들고 있던 채로 잠들었던 것 같은데.. 키요카는 얼결에 들고있던 책을 덮었다. 들고 있던 책이 무엇인지도 잊고 있었는데, 자신을 깨운 사람이 옆에서 아, 하고 아는 체를 했다. 키요카도 그제야 책의 제목을 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였다. 아, 이 사람 추리소설을 좋아한댔나, 자신은 아무 생각 없이 귀 가리개 용으로 집어들었던 것 같은데, 옆의 사람은 제법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키요카는 한 페이지를 읽다 말곤 또 창문 틈새로 들려오는 파도 소리 따위에 몸을 떨고는 동아리 시간 끝날 적까지 책 한권을 다 읽어본 적이 없다. 자신은 떠느라, 제 옆의 사람은 눈 앞의 진상을 밝혀내는 데에 집중하느라.. ..참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유네, 물론 도서부원으로써의 태도로만 따지만 본인은 완전히 실격이지만. 아직 몽롱한 정신을 가다듬고 넋을 놓은 채 눈 앞의 사람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상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카이도 이 책 알아? 추리 소설에 입문할 마음이 든 거야?

-음, 아뇨,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여기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밀실 소설! 이라는 문구에 끌려서 집은 것 뿐이에요.

두껍기도 하고. 책 곁표지에 상표처럼 붙어 있는 문구를 툭툭 가리키고는 키요카가 머쓱한지 웃었다. 마주 웃으며 화답하는 얼굴이 어쩐지 낯익다. ...왜일까? 말마따나 자신은 떠느라 바쁘고, 눈 앞에 있는 상대는 추리 소설에 집중하느라 바빠서, 같은 부원이라는 인식 이외에는 점접이 거의 없을 터인데.. 꼭 저 웃음만은 어디서 본 적 있는 잔상처럼 망막에 남는다. 키요카는 나츠사키의 눈빛과 창틀로 끼쳐들어오는 햇살 탓에, 나츠사키와 같은 눈을 하게 된 것도 모른채 가만히 눈 앞에 있는 상대를 응시했다. 평소보다 다른 태도, 왜인지 집요한 시선에 이제는 눈 앞의 상대가 어색해졌는지 아까 꺼낸 화두를 다시 가져왔다.

-그 책, 나중에 또 읽을 거야? 끝까지 읽을 거면 예의로 스포일러는 자중할게.

-..네? 아, 아뇨. 아니에요. 저.. 매번 덮고 떠는 책이 달라요. 오늘은 까무룩 잠들어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오늘 읽지 않을 것인가. ..키요카는 가만히 손에 든 책을 응시했다. 한 페이지를 채 읽다 만 채로 잠들었으니 제 취향과는 요원할 것이 뻔한데, 옆 사람의 기대하는 눈망울 때문인지, 아니면 이 도서관 안에서 잠든 것이 처음이기 때문인지.. 키요카는 문득 이 소설의 '결말' 이 궁금해졌다. 그 결심은 순간 창문에서 다시금 들려온 파도소리를 잊을 만한 것이어서, 키요카는 눈 앞의 상대에게 다시 질문했다.

-..이거 재밌어요?

-음, 글쎄? 클래식엔 이유가 있으니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밀실 사건 소설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건가. 추리소설의 견본, 교과서 같은 느낌이라 이거지.. 그렇다면 단순히 사건을 나열한 것은 아닐테다. 그러고 보니 눈앞의 이 사람은 도서부 면접을 어떻게 봤더라, 분명 자신이 좋아하는 책과 좋아하는 이유를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이 남자가 어떤 책을 이야기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같은 추리 소설이었을 텐데, 그 소설에서 무엇을 증명했기에 그 책을 이야기했던 걸까? 키요카는 입을 연다, 있잖아요, 나츠사키 씨..

-혹시 면접 때 말씀하신 좋아하신 책이 이거였나요?

남자의 표정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키요카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남자의 눈이 가느다랗게 접힌다. 눈매는 완전히 호선이 되어,

-아니, 그 책은 아니었어. ....왜 그래, 나카이? 오늘따라 말이 많네. 나랑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든 거야?

눈매는 여전히 접혀 있어 남자가 웃고 있는지는 보인다, 그러나 그 눈동자는 호선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선에 가려져, 그래,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저 남자 특유의 경고일까,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요카의 고개는 가만히 끄덕여진다. 이전에도 비슷한 얼굴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으니까. ..이전? ..아, 면접때 본인의 차례일 때였던가.

키요카는 면접 때도 똑같이 사방에 들려오는 물소리 때문에 덜덜 떨고 있었지만 제가 했던 대답은 기억한다. 저는 인어 공주가 좋아요. 좋은 이유는? ..인어가 멍청해서요. 인어는 물 위에서 살 수 없는데 육지를 동경해서 자기 다리를 잃어버렸잖아요. 그건 어쩌면, 인어가 인어를 잃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과정이 아닐까 싶어서... 횡설수설 말을 이어가던 도중 어쩌다 눈이 마주쳤던가. 그러다 당신이 지금과 같은 표정을 지었던가.

그때나 지금이나, 키요카는 그 표정을 보고는, 그것의 당신이라는 작가가 던지는 일종의 암시임을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 같다. 그러니 망연히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을 보고 당신이 얼빠진 표정을 지어도 별 수 없겠다 싶다. 작가가 던진 난제를 덥썩 풀어버리는 독자가 되어버리는 꼴이니.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제게 새로운 난제를 주기 위해 움직일까? 마침 눈 앞의 남자가 호선을 그리던 눈을 떴다. 여전히 웃는 얼굴.

-..나카이, 보충수업 신청했어? 지금은 무리고, 그 때 더 친해지자, 우리.

..새로운 난제일까. 아니면 관계에 대한 기약일까. 키요카는 어쩐지 웃고 싶어져서, 물빛 눈을 마주 누그러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그땐 알려주셔야 해요. 키요카가 가볍게 웃는 목소리 끝이 파도소리에 밀려 창 밖으로 사그라들었다.

보충수업까지 일주일 남은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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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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