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수면

겐카이

붉은 군락 by 썸
7
0
0

인생을 따라다녔던 환청에 키요카는 짐짓 얼굴을 찌푸렸다. 물 먹은 듯한 무거운 몸, 심해 한 가운데에서는 귀를 막아도 귀 사이로 물이 쏟아들어온다. 꺼떡이는 숨,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무저갱... 빛 따위 들지 않을 것이라며 어둠 속에서도 손짓하는 물살, 일생을 따라다니는 제 존재의 부정 같은 거대한 자연. 또 가만히 있노라면 희게 질리는 숨보다 차츰 물 안에 적응해가는 자기 자신이 가장 싫게 된 것이다. 물이 무서워요, 싫어요. 그것은 다름 아닌 본인을 부정하는 말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본인도 안다. 웅웅거리며 귓가에 이는 물소리가 제가 이 바닥없는 심해 안에 영원히 잠겨 죽어갈 운명이라는 것이라고 비웃는 것 같다. 침묵은 아무 소리가 없기에 포악하다. 삼키고 난 후의 바다는 늘 잔잔하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그 잔잔함을 짐짓 평온으로 착각하기도 해서ㅡ몸을 던진다. 키요카는 물에 사는 동안 그런 사람들을 여럿 보아왔다. 그러나 속삭이는 모든 물은 거짓을 말하고, 이미 삼켜진 자는 물 안에서 언어를 잃는다. 그러니 물인 자신은 그 바다의 포악함을 안다. 빠지지 않아도 깊음을 안다. 그러니 두려워하고 매번 겁에 질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뿌리 없는 불안은 간단히 끌어올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안에 빛이 들면 나아가기야 하겠지만, 제 자력으로는 육지로 올라갈 수 없다 ..... 바닥 없는 밑으로 키요카는 한없이 가라앉았다. 침잠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역시 바다 안에서는 땅이 없구나, 키요카는 가만히 몸을 흔들며 자조했다. 제가 만든 진동이 온 바다에 퍼지기 시작했다. 물살 안에서 키요카의 몸이 거세게 흔들린다. 쿵, 쿵, 물 안에서 나오라는 듯 한 큰 진동에 키요카는 꿈 안에서 발버둥쳤다. 켜켜히 어둠이 쌓인 심해에는 여전히 빛 들 틈이 없다. 그러나 키요카는 한 번, 앞으로 나아간 적이 있다. 몸은 여전히 흔들리는데도 박동은 제 지척에 있었다. 키요카는 몸부림치며 위로 올라간다. 육지도 모른 채, 막연히 위로 올라가기만 한다면 빛이 있을 거라는 기이한 확신. 바다가 뒤집힐 듯한 박동에 키요카는 팔을 뻗는다.

ㅡ키요카는 고개를 든다, 억눌린 호흡 사이로 질린 숨을 뱉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넘겼다. 귓가에 제 육지가 있다. 쿵, 쿵, 쿵... 일정한 박동, 오르내리는 가슴팍, 고요한 숨소리... ..고요가 정말로 평온이라면 이것이리라ㅡ 가두어진 품 안에서 키요카는 눈만 감은 채 겐죠의 품에 기댔다. 열린 창 틈 사이로 쏴아아, 하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겐죠는 새벽촬영을 하고 들어와 잠이 갈급해 보였다. 밖에선 철인같은 얼굴을 하고 집 안에 들어올 때는 또 허물어져서, 주말에는 별다른 일정을 잡지 않고 집에서 보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마 오전 열두시 즈음까지는 깨어있던 것 같은데, 소파에서 그대로 잠들어버린 자신을 침실까지 옮긴 모양이었다. 잠들기 전까지 키요카는 소파에서 마냥 라인을 확인하다가, 티비에 겐죠가 나오는 드라마를 틀어놓고 까무룩 잠이 들어버린 것 같다. 뭐랬더라, 그 나이 또래가 겪는 청춘에 관한 고찰, 어긋난 남녀가 겪는 청춘 멜로 드라마... 겐죠는 거기서 밴드 보컬을 맡는 남자 주인공으로 나왔다. 지금 유튜브에서 나도는 클립은 겐죠가 직접 연주하고 노래한 남자주인공의 무대영상 일부분들이지만 키요카는 단연 가장 강렬했던 첫 장면을 이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했다. 남자 주인공의 첫 등장씬. 꽃다발을 얼굴에 얻어맞고 실연당하는 장면이었다. 꽃다발을 얼굴에 철퍽 소리나게 던지는 건 작중 남자주인공이 오디션을 나가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는 조연이었는데, 정황상 남자주인공이 고백하고 건넨 꽃다발을 그 조연이 얼굴에 직격으로 던진 것 같았다. 장미꽃으로 한가득 채워진 제 마음을 얼굴에 얻어맞고, 얼굴 위에서 꽃다발이 떨어지자마자 눈가에 가득 고인 눈물, 답지 않게 큰 덩치가 빚어내는, 저 얼굴로 나오는 미련함.. 얼굴에 얻어맞고 나오는 표정 연출에 느리게 화면이 맞춰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당장 겐죠가 얻어맞았다는 생각보다 그 뒤의 얼굴에 앞 장면을 이미 잊어먹고도 남았을 테지만, 어쩌다 집에서 겐죠와 본방을 보던 키요카는 얼굴에 꽃다발이 던져진 시점에서 웃음이 터졌으므로 그 뒤의 장면은 오히려 키요카가 기억하기 어려웠다. 겐죠의 옆에 앉아 배를 잡고 들썩이면서, 하다하다 꽃으로 맞네... 겐죠가, 그 겐죠 토키사다가... 안 아팠어요? 눈물을 제 손으로 훔쳐대며 묻자 뚱해진 겐죠가 말한다. 왜, 자네도 꽃으로 때리고 싶나보지? 불만스러운지 팔짱을 낀 채 화면을 응시하며 키요카 쪽에는 시선도 두지 않은 채 겐죠가 답했다. 눈물을 마저 닦아내고 언제 웃었냐는 듯 겐죠의 어깨에 다시 기댄 여자는 아직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뇨, 전 꽃으로도 안 때릴 건데요. 미남은 원래 꽃으로도 때리면 안 돼요. 그제야 겐죠가 시선을 튼다. 다시 키요카 쪽으로 틀어진 시선이 점차 가까워진다. 물끄러미 남자의 눈을 본 여자가 속삭인다. 비켜 봐요, 안 보이잖아요. 이마가 맞닿고 남자가 속삭인다. 주인공이 눈 앞에 있는데 왜.

거실 안은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연인들의 시덥잖은 다툼 소리로 메워졌다.

방금 막 물에서 건져낸 듯 거친 호흡을 몇 번 품 안에 기대 내쉬었다. 여전히 지척에 육지가 있었다. 겐죠는 키요카의 허리를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한참을 품에 기대 다시 눈을 감아봐도 잠이 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키요카는 겨우 몸을 움직여 남자의 자는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분명 새벽 2시까지 촬영하고 들어온다고 했는데, 피곤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고 곤히 숨소리를 내며 잠든 단정한 얼굴이 평소보다 풀어져 있다. 평소에는 저 눈썹을 거의 삐뚜름하게 세워놓고는 목에 핏대나 세운 채, 마음에 안 들면 슬레이트나 치고 있겠지. ..설마 촬영 현장에서도 그러겠어, ..라고 하기엔 며칠 전에 라인에서도 누구 욕을 했었던 것 같은데.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다. 남자는 제가 끼고도는 것을 끔찍이 아끼면서도 정작 마음을 내준 상대가 제게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것을 싫어했으니까. 세월이 지나도, 제 품 안에서는 여전히 ‘연극부장 겐죠 토키사다’ 인 이유가 있었다. 성인의 문턱을 넘은지 오 년은 지난 시점임에도, 요새 들어 제 곁에 있으면 꼭 그 때의 의기양양한 모습 그대로이니… 키요카는 곁에 잠든 제 왕자의 얼굴을 보았다. 남자의 잠든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키요카는 늘, 왕자를 죽이기 위해 숨죽인 인어의 모습이 된다. 물에서 제가 건져낸 왕자의 잠든 얼굴, 숨을 쉴 수 있는 존재에게서만 느끼는 고요에 묻은 평화 … 키요카는 가만히 잠든 왕자의 얼굴에 가까워진다. 흰 맨 얼굴, 미동조차 없이 내려앉은 희게 샌 긴 속눈썹이 점차 가까워질수록 제가 꼭 환상에 다가가는 것 같았다. 거대한 파도에 햇살이 부딪혀 잘게 튀는 빛무리 같은 것.. 키요카는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겐죠의 입술에 조용히 입맞추고 천천히 고개를 뗐다. 숨이 잠깐 멀어졌다. 겐죠의 흰 속눈썹이 잠시 떨렸다. 잠결에 깬 눈에 보이는 붉은빛 시야 위로 제 모습이 어른거렸다. 꼭 제가 일렁이는 것 같아 키요카는 가만히 속삭였다. 더 자요. 손을 뻗어 남자의 눈을 감기려고 했을때, 설핏 휘어진 남자의 눈매를 보곤 잠시 손을 머뭇거렸다. 응. 수마에 잠긴 목소리가 서서히 숨소리에 녹아들었다. 키요카는 얼굴에 가져다댔던 손을 떼어냈다. 다시 상처라고는 모를 남자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아까 꿈을 가만히 생각했다. 물 아래 있기에 아는 공포, 감각. 그러나 제게 주어진 육지라고는 제 곁에 누워있는 사람 하나뿐이다. 인어가 왕자에게 열상을 남기기 위해 물에 빠져들었다고… 키요카는 조용히 헛웃음을 삼켰다. 아니, 인어는 그 아픈 다리로 발 딛을 공간이 왕자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는 왕자 곁에서 인어는 끊임없이 제가 태어났던 곳의 물소리를 들었으리라. 왕자의 눈은 곧 태양이 되고, 인어는 물 위에 희뿌옇게 보이는 빛무리에도 맹목적으로 빛을 쫓게 되니. 그 왕자의 숨을 틀어쥐고 열상을 남기는 행동을 할 수 있을리가.. 그러니 왕자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거짓이다, 사람들이 평온을 목적으로 바다를 보러 가는 것 처럼. 물의 무게와 깊이는 오로지 물 아래 있는 것들만이 안다. 그러니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파도 위에 비친 당신의 잔상일지도 몰랐다. 물 안에서 인어를 건져올리다니 말이 안 되잖아, 키요카는 속으로 가만히 자조했다. 당신은 여전히 바다의 깊이를 모른다. 물 아래 잠긴 존재에게서 듣는 모든 속살거림을 듣지 않는다. 파도가 당신에게 손을 뻗으러 넘실거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여전히 굳건해진다. 어쩌다 튄 포말 하나에 눈살을 찌푸리고야 마는, 여전한 육지의 사람. 당신이 물에 발을 담구지도 않고 바다라 착각하고 사는 물의 면적은 고작 자신 뿐인 것이다.

키요카는 가만히 품 안에서 뒤척였다. 겐죠의 품에 귀를 댔던 몸을 옆으로 돌려세워 모로 누웠다. 다시 열린 창문 틈새로 으스스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분명 한여름인데도 오한이 느껴져 키요카는 얇은 이불을 더 가까이 끌어다 덮었다. 등 뒤에는 여전히, 낮은 숨소리가 울렸다. 키요카는 흘끗 시선을 보냈다. 몸 안이 여전히 울렁거렸다. 그러나 도로 몸을 돌려 눕지는 않았다.

바보 같아.

물에 잠긴 목소리가 조용히 사라졌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