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의 경우

인어는 무대 위 남자를 본다

붉은 군락 by 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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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요카는 문득 잠에서 깼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때문에 눈이 감길 수가 없는데 이상한 일이다, 요새 유독 피곤했나.. 주변은 곧 자유 시간인 탓에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아이들의 입에서 시덥잖은 소리가 들렸다. 뭐 하러 갈거야, 오늘 연극부에서 뭐 한다고 하지 않았어? 키요카는 부스스한 머리를 흔들어 잠기운을 몰아냈다. 평소였다면 작은 파도 소리 하나에도 흠칫거렸을 테지만, 이상하게 오늘은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물소리가 두렵지 않다니, 아마 주변의 말소리 때문이겠지.

하는 일은 크게 없었지만 본인의 동아리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책이나 붙잡고 벌벌 떨 것이 뻔했으니까. 도서실이 바다와 가까운 것은 아니었지만 창문이 있는 공간에는 늘 바다소리가 딸려왔다. 스즈레 고등학교는 연극부가 유명했고ㅡ그마저도 연극부장의 위세에 기댄것이다ㅡ 시설이 좋았다. 거진 대학로 소극장 같은 시설이라고. 사실 교내 소문을 모르는 키요카도 그는 알고 있었다. 겐죠 토키사다. 그 유명한 ‘겐죠’다. 저녁 드라마를 보는 할머니가 몇번 말했던 배우. 또 겐죠네. 아들내미도 어릴 때 티비에 몇 번 나오더만… 그러니까 키요카는, 언젠가 방송에서 흘러나온 이름을 듣고 할머니가 말했던 배우가 제 학교에 있다는 걸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 상관이 없는데… 하필 연극부로 향하는 길이 같은 무리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었다.

-근데 무슨 연극인데?

-인어공주.

-남자 주인공이 누군데, 보나마나 겐죠겠지.

-당연하지, 솔직히 연극부에 왕자에 맞는 얼굴이 겐죠밖에 없음.

따위의 가십마저 완전히 천상 연예인이 따로 없다. 키요카는 연극을 보러 가기 전에도 피로해졌다. 앞서 걷던 아이들은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솔직히 걔 성격은 별론데 연기는 진짜 잘 해, 신동 소리 들을만 하대. 진짜? 다른 연극부인 애는 부장 비위 맞추느라 피곤해 죽겠다고 하던데.. 알 필요 없는 이야기에 키요카의 눈이 가라앉았다. 마침내 극장 문을 열고 키요카는 일부러 그 무리들을 피해 좌석에 앉았다. 시설이 좋다고 했던 건 빈말이 아닌지 극장 문이 닫히자마자 학교 어디에서든지 따라왔던 물소리가 사라졌다. 조명이 꺼지고 무대 위에 빛이 올랐다.

무대 위에 파란 수면이 일렁이는 효과와 뽀글거리는 음향 효과가 붙어 고요하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키요카는 귀를 틀어막았다. 무대 위에서는 인어의 역할을 맡은 배우가 순진하게 눈을 빛내며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마 바다 안이 지루하다는 대사 따위를 읆고 있었을 것이다. 손으로 있는 힘껏 귀를 틀어막아도 하필 음향 시설까지 좋아서 키요카는 귀를 틀어막아도 그대로 흘러들어오는 물소리에 체념했다. 반쯤 죽은 얼굴로 지루하게 무대를 응시하고 있자 다음 장면이 지나갔다. 수면 위의 폭죽을 보고 인어는 바다 위로 올라간다.

수면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켜진다. 키요카는 순간 허우적대는 남자를 보곤 귀를 막던 손을 놓곤 입을 쩍 벌렸다. 무대 위에서는 분명 물 속인데, 키요카는 그 왕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까 흘려들었던 가십이 다시 생각났다. 솔직히 왕자에 맞는 얼굴이 겐죠밖에 없음. 저 사람이 겐죠 토키사다구나, 키요카는 직감했다. 남자의 얼굴이 흰 조명을 받아 창백하게 빛났다. 물에 빠진 것을 연출하기 위함이었는지 앞머리가 젖어 있었는데, 잔머리가 식은땀에 젖어 붙어있는 얼굴의 턱선이며, 길게 내려앉은 흰 속눈썹 아래가 붉게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물 위에 있는 다급함에 황망해진 붉은 눈. 마침내 정신을 잃은 ‘왕자’를 인어가 붙잡고 눈을 감고 쓰러질 때 까지 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인어는 왕자의 팔을 붙잡고 커다란 바위 위에 그를 눕힌다. 물에 빠져 혼절한 왕자를 보며 인어는 홀린 듯 중얼거린다.

-육지엔 너같이 빛나는 것들만 있니?

아니, 육지에는 저렇게 빛나는 것이 없다. 인어도 빛이 귀한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수면 위 터지는 폭죽을 보고 올라온 것 아니야. 인어의 대사를 따라가면서 키요카는 속으로 인어를 비웃었다. 눈을 감은 왕자는 인어의 속삭임을 듣지 못한 채 계속해서 누워있다. 인어도 아마 그의 얼굴을 보고 알았겠지? 저것은 귀한 것이라고, 육지에조차 몇 없는 빛나는 것이라고.. 그러니 사방에 터지는 빛은 간단히 무시하고 왕자를 건져올린 것이겠지. 인어공주의 결말이야 제가 가장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던 책이었다. 그리고 매번 같은 부분에서 인어를 비웃게 된다. 마침 왕자를 바위 위에 눕힌 인어는 조용히 본인의 물 아래로 돌아갔으니. 그래, 인어가 자신이었다면 그 팔을 붙잡고 그대로 왕자를 물 안으로 데려갔을 텐데. 빛이라면 닿지 않는 곳이고 물 아래에서도 빛은 귀하니 바다 아래에서 왕자를 오래도록 바라보았을 텐데.

다시, 왕자가 있던 바위에 인어는 앉아 있다. 인어는 왕자의 팔을 붙잡고 기어이 육지 위 까지 끌어다 놓았다. …왜 몇 번이고 그를 바다에 끌어들이지 않았을까? 인어는 쓰러져있는 왕자에게 이웃나라 공주가 다가오는 것을 망연히 본다. 공주는 그의 육체를 제 품에 안고 몇 번인가 뺨을 두드렸다. 아, 마침내 눈을 뜬 왕자의 눈이 열린다. 물이 맺힌 눈가, 점차 돌아오는 호흡과 홍옥 같은 눈가에 돌아가는 안광마저. 저를 품에 안은 여인을 보고 창백한 입가에 맺힌 미소, 얼굴에 점차 돌아오는 혈색이.. 왕자는 이웃나라 공주의 어깨를 꽉 붙들고 속삭인다.

-당신이 저를 구해준 은인인가요?

빛은 왕자에게 향해 있었으므로, 왕자가 환희의 찬 대사를 하는 동안의 인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키요카는 무대 아래에 있었는데도 인어의 표정이 제 얼굴과 별 반 다를 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소극장 바닥이 순간 바다로 보이는 환영에 키요카는 몸을 잠깐 떨었다.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걸까. 저 왕자가 희대의 천재라서? 그것도 아니면, 물 밑에 고여있는 저와는 다르게 아주 빛나는 사람이어서? 앞 쪽이면 차라리 납득이라도 갔지만 그래도 뒷맛이 나빴다. 언젠가 느낀 적이 있는 기분인데, 왜 하필 저 사람을 보고. 키요카는 숨을 죽였다. 왕자는 다시 자신을 구해주었다고 생각하는 이웃나라 공주를 붙잡고, 추위에 벌벌 떨리는 손으로 공주를 끌어안곤 절박한 듯 속삭였다.

-당신이 제게 숨을 돌려주었으니 그대를 위해 살아가겠습니다.

이웃나라 공주는 제게 매달리는 왕자를 마주 끌어안는다. 거짓된 구원이고 착각인 사랑이다. 그렇다면 저 왕자를 도로 물로 끌고 들어왔어야지, 그저 망연히 바라보지 말았어야지. …키요카는 여전히 가만히 왕자를 바라보고 있는 인어를 원망했지만, 제게 속삭인 것도 아닌 사랑 고백이 하염없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래, 물에서 건진 남자가, 육지에서 숨을 쉬며 사랑을 속삭이는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었니. 그 얼굴이 눈을 감고 있는 얼굴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니. …왜 하필 저 얼굴을 가장 밝게 보여주었을까? 쏴아, 하고 지긋지긋한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인어는 수면 아래로 내려가 마녀에게 본인을 인간으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인어는 아주 사랑에 빠진 표정이었다. 두 손을 모아쥐고 꼼지락거리며 잔뜩 홍조로 어른거리는 얼굴이 계속해서 그 날의 왕자를 이야기한다. ..그래 뭐 꿈에 나올 얼굴이기는 하겠지. 키요카는 떨떠름하게 인정했다. 앞날에 대한 불안감 따위는 전혀 없는 멍청한 얼굴이라니, 물 위에 대한 동경 뿐이라니. 물론 왕자가 규격외였지만 지금 인어를 연기하는 배우도 욕이 나올만큼 연기를 잘 했다. 순진해빠졌다는 감상이 목께까지 울렁거렸으니. 마녀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말하자 인어는 또 다시 사랑에 빠진 얼굴로 덥썩 고개를 끄덕인다. 땅 위를 걷는 감각에 대해 조금도 알지도 못하며 제 몸을 두른 단단한 비늘 같은 살점을 떼어 버리겠다는 말을 그렇게나 쉽게. 인어는 다시 말한다.

-육지에 가고 싶어요.

인어를 바라보는 수면같은 눈이 가만 일렁인다. 저 대사는 저렇게 쉽게 나올 수 없는데, 아마도 조금 더 절박하고, 육지가 아니면 안 된다는 듯 마녀에게 애걸복걸해야 하지 않는가, 저렇게 사랑에 씌인 것 처럼, 홀린 것 처럼 입에서 할 수 있는 대사가 아니었는데... 들이쉬는 숨에 물이 찼다. 키요카는 다시 귓가에 손을 갖다대었다. 인어는 목소리를 잃고 다리가 생기며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감각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쳤다. 아가미를 잃고 폐 하나로만 호흡하는 인간이 되어 물 위로 쫓겨난다. 제 터전을 두고 사랑 하나만을 믿은 채, 땅 위에 모든 것이 있는 왕자를 향해서.

다시 무대가 전환된다. 쓰러져 있는 인어를 왕자가 구출해낸다.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한 채 주저앉는 인어를 제 성까지 부축해주며 인어를 본인의 성으로 데려간다. 인어는 왕자를 보자마자 소리 없이 환호했다. 아픔도 다 잊은 것처럼. 아마도 잃은 목소리로 당신을 제가 구했어요, 하고 속삭인 것이라지만 인어는 물 위의 언어를 몰랐으니 왕자는 인어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다. 인어의 몸에서 나는 귀티를 보며 귀빈이라 생각하고 예의로 대한 것일 뿐. 상황은 일목요연하게 흘러가고 인어는 육지 위에서도 왕자의 등 뒤에 머물러 있다. 물을 그리워하는 인어에게 머리를 잘라 단검을 마련해 온 인어공주의 세 언니가 인어에게 말한다. 그를 죽이고 바다로 돌아와. 인어는 칼을 받아들고 한참을 고민한다.

인어는 왕자의 침실에 들어가 놓고도 한참을 왕자의 얼굴을 보고는 고민한다. 그래, 제가 건져올렸을 때와 같은 눈 감은 얼굴을 보고. 인어는 혈색이 없는 왕자를 보고도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니, 땅 위에서 숨을 쉬며 살아있는 잠든 왕자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인어는 단도를 버리곤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어 물거품이 된다.

왕자를 건져올린 순간부터 인어는 제 영혼을 왕자가 가져갔음이라고 직감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지 위에서 다른 이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것을 망연히 보고만 있었겠지. 왕자가 이야기하는 사랑이 너무나 기뻐 보여서. 마땅히 저를 붙잡아야 할 손길이 타인에게는 다급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자의 얼굴이 잔상처럼 어른거려서. 왕자를 찌르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다. 왕자를 죽이면 인어는 영원히 영혼을 잃게 될 것이다. 육지의 인간을 사랑하는 물의 인간이라니, 수지가 안 맞아서 볼 수가 없다. ..키요카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인어를 무감히 바라보았다. 엔딩의 절정 끝에, 축포처럼 터지는 물보라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연극은 성공적이었고 그 왕자라는 남자는 커튼콜에서도 당당히 빛났다. 관객을 보며 정중히 인사하고 있었지만 극장 안을 마지막으로 빠져나간 끝자락에 엄청난 성량의 호통 따위를 들었던 것 같다. …연극부장이 성격 안 좋다는 건 그냥 가십이 아니었구나. 그런데 어디서 본 적 있나.. 저런 빛나는 사람이랑? 키요카는 느껴지는 기시감을 머리를 흔들어 지워냈다. 같은 학교니까 제 운세가 1위였던 날에 한 번쯤은 마주쳤을 수도 있었겠지. 저런 사람이 학교에 있어서 다행이다.. 하고, 키요카는 다음 할 일을 생각해내며 무대에서 본 풍경을 머릿속에서 애써 몰아냈다.

보충수업 신청서를 제출하러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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