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M0ca
총 13개의 포스트
먹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끼니만큼은 챙겨 먹어야 한다고, 그래야 나쁜 놈 잡는다고. 그래서 필은 도진이 세상을 떠난 날도, 순복이 살해당한 날도 입 안에 무언가를 밀어 넣었다. 오늘은 호개의 발인식이었다. 성치 않은 제 몸을 걱정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괜찮다며 웃어 보인 필은 아픈 내색 하나 없이 호개의 관을 들어 올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방
"태원소방서 화재진압대, 봉도진 대원. 출동 완료하고 영원히 복귀합니다." 10월 17일. 네가 타오르는 불 속에서 죽은 날.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양초를 우득우득 씹어삼키던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먼 발치에서 오열하는 사람들을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다 결국 고개를 돌렸다. 도진이 이 세상을 살다 간 시간도 짧았지만, 한 줌의 재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
당신은 한여름 붉은 벽돌 담장 위의 흐드러진 능소화를 닮았습니다. 달콤한 향에 이끌린 여느 개미들처럼 나 역시 당신의 곁을 맴돌고 또 맴돌았었습니다. 그대는 알까요, 수없이 망설이던 나의 손길을. 향하다가도 돌아서던 나의 발길을. 당신이 떠난 후에도 그 담장 위의 능소화는 따스한 햇살에 흐드러지게 피어올랐습니다. 명예, 영광, 그리움, 기다림. 능소화의
나쁜 일은 평범한 날 닥쳐온다. 대비할 틈도 없이, 갑자기. 무럭무럭 자라 누군가를 향해 겨누어진 악의는 결코 눈을 감지 않고, 잠들지 않는다. 이것이 선생님께 첫 번째로 배운 것이었다. 선생님께선 돈을 좋아하신다. 선생님을 잘 알지 못했던 때의 나는 선생님의 그런 면이 싫었다. 세상은 돈이 많은 종교인을 싫어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 돈은 우리
눈 앞에 떠다니는 습기가 손에 채일 정도로 우중충한 날이었다. 가문들끼리의 친목회를 꼭 이런 날에 잡아야 했나, 라고 불평하며 집을 나서는 아버지의 팔 위로 손을 올리신 어머니는 당신이 참아요, 오늘은 팔자크를 사람들에게 소개시키는 날이잖아요. 라고 말했다. 조용히 부모님의 뒤를 따르던 나는 말 없이 발 끝에 걸린 것을 힘을 주어 옆으로 찼다. 뭉친 흙더
꿈을 꾼다. 꿈속의 콜사는 저를 향해 웃어주고 있었다. 마주 보고 웃어주며 손을 흔들어보려 하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목소리는 낼 수 있어서 있는 힘껏 저 편의 콜사에게 있는 힘껏 소리쳐보고, 불러보고, 갈망한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닿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시작된 꿈이었다. 온통 뭉실거리는 색으로 가득 찬 공간은 어디까지가 하
BGM - https://www.youtube.com/watch?v=9lBfaE8GCjM 가장 어두운 시간대는 언제인가. 많은 사람들이 자정을 꼽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둠이 제일 짙은 시간은 해가 뜨기 바로 직전이다. 떠오르는 태양이 강렬한 만큼 어둠 역시 짙어지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는 빛과 어둠이 만나는 이 시간을 '개와 늑대의 시
"더 이상 자크 씨의 도움, 필요하지 않아. 나 혼자서도 충분해." 리그의 사천왕 대기실. 갑자기 일이 있다고 찾아온 콜사의 입에서 나온 첫 대화였다. 생각하지도 못했고 하려고도 해본 적 없는 주제에 당황한 나머지 손안에서 들고 있던 종이컵을 놓치자, 바닥에 툭 떨어진 커피가 구두코에 작은 얼룩을 만들었다. "저... 뭐라구요...?" "자크 씨의
사랑하는 콜사씨에게. 매일 얼굴을 마주보고 사는데 편지라니, 분명 콜사씨라면 웃었겠지요? 전하지 않을 편지를 쓰는 것에 사람들은 무슨 의미가 있냐고 입을 모아 말하겠지만 저는 분명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건망증이나 치매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의사에게 들었거든요. 무언가를 쓴다면 기억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하길래 병원에서 오는 길에 딜리버드 파우
처음은 사소한 것을 잊어버렸다. 잠시 후 퇴근할 자크씨를 위해 저녁으로 샌드위치를 사러 간 날. 평소였다면 망설임 없이 주문했겠지만 어째서인지 그 날은 한참을 망설이다 주문할 수 밖에 없었다. 뭘 좋아했더라? 싫어하는 채소가 뭐였지? 그저 며칠간 밤을 세워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가보다, 그 생각은 하지 말 걸 그랬다. 그것조차 며칠 후 잊어버리고 말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