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족의 사정
기다려! 못 기다린다!! / 제이와 라임의_파판AU
잭은 날 때부터 배우지 않은 언어를 듣고 말할 수 있었다. 어렸을 적에야, 사람들이 신동이니 뭐니 칭찬해대기 일쑤였다만, 언젠가부터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말을 걸고 그것을 듣자 이상하다, 괴물이라며 손가락질해댔다. 그는 어린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언젠가는 이 마을을 나가겠다 다짐했다. 실제로 집에 잘 들어가지 않기도 했다. 애초에 집에 그 말고는 아무도 없었으니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그는 그 날도 마을 바깥으로 나돌았다. 재수없다 뭐다 시끄러운 걸 듣는 것 보다는 차라리 대화도 안되고 보이지도 않는 것들의 속삭임이 훨씬 편했다. 그러니 이렇게 나무에 기대어 낮잠을 청하는 거겠지. 익숙한 속삭임들을 들으며 달큰한 낮잠에 빠져들려는 찰나, 모든 속삭임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어느때보다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뭐야? 라고 되물으려는 것을 막기라도 하듯 다급한 속삭임이 매캐한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도망쳐!’
‘숨어, 숨어야 해! 숨소리도 내지 마…….’
웅성거릴 정도로 많은 속삭임이 그보고 도망치라고, 숨으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은 얼떨결에 일어나 숨을 곳을 찾았으나 이 울창한 숲에, 도대체 무엇에게서 숨으라는 지 알 수가 없었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젠장,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그가 당황에 물들어 외치자 그것에 화답하듯이 무언가의 충격과 함께 거대한 나무가 그가 있는 방향으로 쓰러졌다. 다행스럽게도 얇은 가지들이 있는 쪽에 위치해 있어서 그는 다치지 않고 그가 원한대로 숨을 곳까지 찾을 수 있었다. 뿌연 연기 너머로 느껴지는 인기척에 그는 잔뜩 긴장한 채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전부 죽이고 빼앗아!!'”
“훔치고 불을 질러라!! 두목의 명령이시다!!!”
환호에 가까운 목소리들이 각종 병장기 소리를 내며 달려든다. 부러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기도 하고, 저 멀리서 영창하며 불을 지르는 작자들도 있었다. 그는 공포에 몸을 덜덜 떨면서 만들어진 수풀 속에 숨어 그들이 지나가기를 빌었다. 주변에서 불길이 타오른다느니 흔들린다느니 물이 없다느니 각자 꺅꺅대고 떠들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만 그 목소리들에 무어라 말을 걸기에는 그의 상황도 그의 상태도 결코 정상적이지 않았다. 살려줘, 살고 싶어. 그렇게 한참을 벌벌 떨며 숨어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 어느새 떠드는 소리들은 풀벌레 소리에 스며들듯이 잠잠해졌다. 그는 그제서야 이불처럼 덮어진 풀숲에서 일어나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며 마을로 향했다. 마을은 온통 불에 탄 흔적과 피로 가득했다.
“누, 누구 없어요?”
고통에 찬 신음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다. 아침까지만해도 하하호호 모여 떠들던 사람들은 모두 도망치거나 죽고 없었다. 그는 문득 이 고요함이 너무나도 무섭게 느껴져 싸늘하게 식은 사람들을 흔들어 가며 산 사람들을 찾았다. 손에 덕지덕지 피가 묻고 두려움에 눈물이 배어나왔다. 그때였다.
“…파.”
어디선가 가냘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깜짝 놀라 주변을 살피다가 시체들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손가락을 발견하고 다급하게 무거운 몸뚱이들을 옆으로 밀쳤다. 아프다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한참을 찾아 헤매었을까, 마침내 그는 바닥에 피투성이로 깔려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그는 힘이 부쳐 떨리는 손으로 어찌할 바 몰라 허둥대다가 문득 한 장면을 떠올렸다. 도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나무 지팡이를 들고 사람들을 치유했던, 멀거니 바라봤던 모습이었다.
“제발……. 죽지 마……!”
부러져 바닥을 구르고 있는 나뭇가지를 들었다. 양손을 모아 기도하듯이 쥐고 아이에게 빌듯이 눈을 꼭 감았다. 나아라, 나아라, 제발 나아라! 거창한 마법 주문도 아니고 그저 간절한 기도였다. 하늘이 그들을 버리지 않았을까, 번쩍! 환한 빛이 주위를 밝히고 이내 남은 것은 시체들 사이에서 쓰러진 두 아이였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 단잠에 빠져있던 그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미쳤구나, 잭. 시체들 사이에서 잠이 오냐고? 그러나 눈을 뜬 곳은 부서졌지만 무너질 것 같진 않은 그런 건물 안이었다. 뭐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저 멀리서부터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 이제 일어났냐!”
소녀가 손에 자루를 든 채 다가왔다. 건강해 보이는 모습에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네가 날 구해준 거야?”
“네가 먼저 날 구해줬잖냐! 번쩍— 한 거, 네 짓이지?”
과연 내가 한 게 맞을까? 그는 형용할 수 없었던 그 빛을 생각하다가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무튼……. 여긴 어디야?”
“몰라? 아무데나 들어왔다! 다른데는 다 타고 그래서 냄새나더만. 자!”
소녀는 들고 있던 낡은 자루에서 사과를 꺼내 그에게 건냈다. 잭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건?”
“뭐냐! 너 사과도 모르냐? 이거 순 바보구만. 이렇게 먹는거다!”
소녀는 시범을 보이듯 옷으로 사과를 벅벅 닦아 껍질채 베어물었다. 아삭, 소리가 나는 것이 꽤 신선해보였다.
“아니, 사과인지는 알지……. 너 나 몰라? 어른들이 피하라고 안해?”
“네놈이 누군데? 내가 알아야 하냐?”
“아니. 그건…….”
잭은 말이 턱 막혀서 말을 고르듯 한참을 침묵 속에 있었다. 추켜세우고 비난한 적은 있어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당황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그 침묵을 오래 두지 않았다.
“아— 거 더럽게 소심하네! 야! 네녀석이 뭐하던 놈인진 모르겠는데! 내가 데려왔으니까 넌 내 가족이다!”
“잠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가족이라고 해도 돼?!”
“알게 뭐냐! 내 마음인데! 그러니까…… 닥치고 쳐먹어라!”
소녀는 잭의 입에 냅다 사과를 욱여넣었다. 잠시 뒤, 어찌저찌 사과를 모두 먹은 두 사람은 어색하게 앉아있었다. 소녀는 그 침묵을 참기 어려웠는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다가 말했다.
“나는 라임이다! 너는 뭐냐?”
“…잭. 잭 재스퍼야.”
“그러면 나도 라임 재스퍼겠구만!”
평소였으면 무슨 억지냐고 했겠지만 잭은 눈 앞의 소녀, 라임을 이겨먹을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았기 때문에 슬그머니 고개를 든 말을 꾹꾹 눌러 담았다.
“돌아가. …너희 부모님이 걱정 안 해?”
퉁명스럽게 말하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던 착해빠진 놈들은 다 울거나 다시는 그렇게 굴지 않았다. 어딜 가도 괴물 취급 받을 거라면 차라리…….
“엄마랑 아빠? 뒈진지 한참 됐지.”
킥킥, 짧은 웃음소리가 퍼져나온다. 그게 웃을 일인가? 그는 어안이 벙벙해 눈만 끔뻑거리고 있다가 말했다.
“그럼 이제까지 어떻게… 지냈는데?”
“밭에 있는 것들을 훔쳐먹고, 나무에서 사과따서 먹었다만? 뭐, 불만있냐?”
“아니, 불만은 아니고…….”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자세를 바꿔 양반다리로 앉았다. 소녀는 그것을 보고 있다가 그 옆에 걸터앉고 그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종알종알 말하기 시작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난 네놈을 가족으로 삼을 거다! 혼자면 외롭잖아. 안 그러냐?”
“가족한테 네 놈은 아니지 않아?”
“그럼 뭐라고 부르냐! 이름만 불러주랴?”
“뭐……. 그래도 상관없고.”
“미적지근한 자식.”
“시끄러운 자식.“
“뭐 이 자식아?!”
금방 열이 올라 씩씩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쩐지 웃음이 나와서 그는 그대로 웃어버렸다. 아, 어차피 둘 다 세상에 나동그라진 거, 같이 바닥생활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가족이 됐다.
*
“오빠 다녀올테니까.”
“올때 맛있는 거 사와라!”
“네에, 네.”
잭은 익숙하니 환술봉을 등에 맨 채 여관 밖으로 향했다. 어렸을 적에야 무당벌레를 잡는다거나 과일을 따온다거나 하는 의뢰로 전전했지만 근래에는 보수가 꽤 짭짤한 의뢰도 받을 수 있었다. 뭐, 그만큼 위험하긴 했지만.
“오늘은… 중부삼림에서 마물토벌인가…….”
그래도 어쩌겠는가. 먹고 살려면 위험해도 해야지. 잭, 아니 이제 제이라고 불리는 그 모험가는 한숨을 내쉬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언젠가 제 동생이 자라서 한 사람분의 몫을 하게 되면 적당히 인적이 드문 곳에서 살아야지. 제이는 그런 희망을 품고 오늘도 발걸음을 옮긴다. 뭐, 그 때가 오려면 한참 남았다고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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