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게리리 이상형

"리리아,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제발…"

"웃기지도 않네. 야, 너 나한테 걸린 횟수만 9번이야."

"제발 봐줘. 응? 리리아 나 너 없으면 안 돼…."

"혹시 봐달라는게 내 손에 들린 칼한테 하는 말이냐?"

"힉, 제, 제발…! 으, 흐아악!"

뒷처리를 끝내고서 터덜터덜 거리로 나오면 황망함에 휩싸였다. 나더러 너 없이 죽고는 못 산다던 제임스 칼린. 너 이 개자식아.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했는데. 내가 널 위해 매번 섹스하기 전에 혼자 뒤 풀어놓고 끝나면 직접 뒷처리하고 지 좋아죽는 오랄도 해주고… X발!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상대는 이미 한 줌의 재가 되었으니까. 그래도 좆 하난 제법이었는데. 기분 참 개같다. 이제 또 어디 가서 내 행복을 찾지….

"하아… 클럽 같은 데는 질리게 가봤자 질 좋은 녀석 안 걸린다고."

이놈의 갈발똥차컬렉터. 언제쯤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다정하고 나만 바라봐줄, 잘생긴 갈발온미남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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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자식이랑 원래는 12월 25일에 같이 놀이공원에 가기로 했었는데. 내가 그거 구한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한숨만 나왔다. 겨울이 이렇게 춥던가. 손에 묻은 피는 제법 따뜻했는데. 나는 왜 행복해질 수가 없는 걸까? 그지같은 내 팔자. 얼굴도 남녀노소 호불호 안 타고 좋아하는 미형에, 몸도 피부도 제대로 관리하고 있어서 비주얼 피지컬에는 문제가 없는데. 왜 내가 만나는 갈발은 꼭 나만큼 괜찮은 사람이 없는 걸까?

손에 묻은 피를 생각했다. 그간 묻혀온 피에는 그만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쏟아온 노력이 담겨 있었다. 어쩔 수 없었지. 갈발 쓰레기남들아. 한 순간이라도 미래를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난 그저 결혼해서 행복하고 싶었는데.

"…"

나도 좀 행복하고 싶다. 행복하고 싶다. 어릴 적, 보육원 창가 너머로 봤던 화목한 가정을 꿈꾸는 게 잘못됐을까? 나 역시 그런 가정을 가지고 싶을 뿐인데. 정말로 서로가 서로에게 최우선인 관계. 그러니까… 가족같은….

"괜찮으세요?"

아이씨. 누구야. 지금 안그래도 혼자 울고 있는데. 조용히 좀 지나갈 것이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곳에는 흐릿하지만 다정한 목소리에 걸맞는, 갈색 머리카락의 미남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 아프신 곳 있으세요?"

"아…"

뭐지? 잠깐만. 정말 잘생겼다…. 너무 놀라서 눈물이 멈춰버렸다.

"아, 제가 괜한 참견을… 한 걸까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냥, 별 일은 아니었어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해요."

다정하다. 이 사람, 길 가면서 생판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을 걸 정도로 활발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걱정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을 건 것이 틀림없다. 말을 걸면서도 자기가 괜히 한 건가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라지. 그래. 어쩌면 이번에는….

"아, 아무래도 발을 삐끗한 것 같아요."

"정말요? 그, 그러면 우선 병원으로…"

"괜찮다면… 제가 이 곳 지리를 몰라서 그런데 병원이 어디 있는지 안내해주실 수 있나요?"

나는 그를 향해 웃어보였다. 최대한 다정하고 순수해보이도록. 그는 자신이 괜한 짓을 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자 조금 다행이라는 듯 미소지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제가 안내할게요. 여기 워낙 오래 살아서 길을 잘 알아요."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내 완벽한 이상형, 유키나가 시게토와 만나게 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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