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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
미국의 겨울은 한국에서의 겨울과 사뭇 다릅니다. 아니, 내가 지내던 곳들만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두꺼운 담요를 두른 채 마루에 앉아 있던 시절을 떠올립니다. 어린 다리의 무릎까지 눈이 차오를 동안 나다니는 사람도, 들짐승도 없어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으면 차가운 기운을 머금어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소복소복 눈송이가 쌓여가는 소리만이 들립니다. 새하얀 하늘 위에서 그림자가 져 검게 보이는 눈은 그칠 줄 모르고 떨어지덥니다. 이따금 나무에 쌓인 눈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뒷마당을 쳐다봅니다. 백설에 파묻혀 있던 붉은 동백과 눈이 마주칩니다.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어 가며 바라보고 있자면, 십까지 열 번, 그렇게 열 번을 두 번 더 셀 즈음에는 엷게 눈이 쌓여 다시 새하얀 눈꽃이 됩니다. 그럼 나는 다시 앞마당으로 주의를 돌립니다.
방에는 난로를 두어 따뜻했지만, 방보다는 마루에 앉아 있는 시간이 더 길었습니다. 그 덕분에 많은 것을 잊어버렸어도 작은 앞마당만큼은 여전히 눈에 아른거립니다. 심심한 마음에 마당을 세 바퀴 돌고, 새하얀 돌하르방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고 있자면 그제야 멀리서부터 사박사박, 두 사람분의 발걸음 소리가 들립니다. 재빨리 마당으로 올라가 눈을 털고 방으로 들어갑니다. 얼어버린 손을 난로에 다급히 녹이고, 발간 뺨에 열이 오르도록 몇 번 찰박이고, 이불에 폭 들어갑니다. 우리 아가, 나를 부르는 고운 목소리가 들려야 쪼르르 달려 나가 방에서 따뜻하게 자고 있었노라고 말하는 것이 나의 첫 번째 거짓말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거짓말이라기에는 참 엉성했습니다. 차갑게 식은 몸을 안아 주시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반면, 이곳의 겨울은 창문을 열기 전부터 벌써 소란스럽습니다. 눈이 쌓이는 소리 같은 건 밝은 낮은 물론이고 새카만 밤에도 활기찬 동네를 이기지 못합니다. 두꺼운 코트 깃을 올리고 시트러스 향을 머금은 손뜨개 목도리를 목에 칭칭 두른 채 집 밖을 나섭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밟아 납작해진 눈 위를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조심 걷고 있노라면, 뒤에서 바보 행세를 하는 바보 하나가 나의 주의를 끌기 위해 몇 차례 기침을 합니다. 조용히 있고 싶은 마음에는 맞춰 주려 하면서도 심심한가 봅니다. 그럼, 잠시 멈추어 내 목도리를 둘러준 후 다시 걸음을 옮깁니다.
혹시라도 남아있을 열매를 찾아 돌아다니는 까마귀 대신 저급한 농담을 주고받는 동네 친구와 인사를 하고, 아무도 걷지 않은 새하얀 도화지 눈길 대신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이 발길에 납작해진 얼음길을 지나면 도시의 열기에 점차 눈이 녹아내리는 거리가 나타납니다. 고급스러운 동네는 제설도 빠릅니다. 눈보다는 그 흔적이 남아 발을 구르면 질척한 물이 찰박거립니다. 바짓단을 적시며 일터에 들어와, 얼어 죽을 뻔했다는 너스레를 떱니다. 어릴 적의 거짓말과는 비교도 안 되지요.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곳의 겨울은 외롭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지도 않고, 나의 관심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머리를 내밀면 쓰다듬어주는 사람, 팔을 벌리면 안아주는 사람, 같이 뛰어놀 사람, 같이 농담해 주는 사람, 조용해지면 말을 걸어주는 사람, 눈을 같이 봐 주는 사람들이 잔뜩입니다. 기다림을 의미했던 눈은 더 이상 나를 쓸쓸하게 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계신 곳에도 눈이 내리나요? 지금의 나처럼 따스한가요, 아니면 옛날의 나처럼 적막한가요? 적어도 두 분께서 함께 계신다면 외롭지는 않겠습니다. 혹시 그래서 나를 찾아오지 않으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당신께서 외롭기를 바랍니다. 외로워하던 나를 떠올려 눈밭을 헤치고 찾아오시도록. 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동생이 두 분을 궁금해하거든요. 나는 설명하기 싫으니 직접 오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곳은 눈이 쉽게 얼어붙으니 걸음 조심하세요.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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