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주

마지막 주周 1

숙청

원고 by 인간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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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어미는 소림이 있는 하남성 출신이었다. 주의 황제에 의해 성리학을 접할 수 있었던 운 좋은 학생이기도 했다. 어미는 동기들 중에서도 특출난 성적을 가지고 있었고, 운 좋게 황제의 눈에 들어 수도에서 좀 더 공부할 수 있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어미는 관에서 사직하고 하남성에 돌아왔다. 황제의 좌가 혁명으로 성이 바뀐 지 일 년만에 아이가 태어났다. 어미도 검은 머리였고 아비 노릇을 하던 이도 검은 머리였는데 어째선지 아이는 단풍처럼 붉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이의 부모는 상냥한 성정이었다. 그들은 성리학을 배웠으므로 약자를 보살피고 도와줄 줄 알았다. 붉은 머리가 드물긴 해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둘은 혹시 몰라 거처를 외진 곳으로 옮기고 간간히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부모 양쪽이 학자였기 때문에 아이는 남들보다 이르게 말과 글을 떼었다. 성리학이라는 학문을 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글을 몰랐다면 그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붉은 머리는 드물지 않았다. 주의 황제 이래 난색 계열의 밝은 머리라곤 혁명의 공신인 하곡 정제두뿐이었다. 일부 과격파는 그를 암살해 하늘 아래 태양은 황제 한 명뿐이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온건파는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과격파를 진정시키는 역할이었으나 황제의 붉은 머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에는 찬성했다. 사람의 형태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그것은 종교가 된다. 황제가 신처럼 군림했으니 그 아랫사람들이 광신도처럼 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소림은 주나라 당시 가장 탄압 받은 종교집단 중 하나였다. 비밀결사처럼 돌아다니는 묵가, 종적 하나 잡기도 어려운 도가와 달리 숭산에 사찰을 세우고 주나라보다 더 오래 존속되었기 때문에 그랬다. 탄압이 한창 극렬했던 시기엔 황제가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과격파들이 사찰을 불태우고 불상을 녹여 만든 장신구를 황제에게 진상했다. 황제가 금관을 쓰고 나타난 적은 없었지만 신을 모시는 이들의 눈엔 뵈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 소림과 붉은 머리가 광기에 불을 붙이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일원과 이원이 처형당한 이상 황실복권파에겐 잃을 것이 없었다. 그들은 늘 그랬듯 산에 불을 질렀고…. 도적 떼로 위장해 사찰 두어 개를 습격했다. 소림승들과 근처 마을 사람들이 도적 떼를 피해 도망가느라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작은 오두막을 급습했다. 살생의 개념을 모르는 어린아이의 눈앞에서 피가 낭자했다.

한 남자가 피에 흠뻑 젖은 가면을 쓴 채로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만 가실 시간입니다, 폐하." 폐하? 아이는 억지로 손이 이끌리면서도 여전히 잠들어 있는 제 부모를 바라봤다. 엄마, 엄마…. 칭얼거림을 들은 남자가 미간을 좁혔다. "이상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대비마마께서는 2차 난세 전에 타계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이는 덜컥 겁을 먹은 채 손을 내치려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그런 것이 통할 상대였으면 산에 불을 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주희는 그것을 아주 오래 뒤에 깨달았다.

생과 죽음의 관계도 모르는 아이에게 무거운 면류관이 덜컥 올라왔다. 황제의 옷은 무겁고 너무 길어 바닥에 질질 끌렸다. 남자가 웃었다. 금방 자라실 겁니다. 그때만큼 키가 크시려면 잘 먹고 잘 주무셔야겠네요. 아이가 눈을 깜박였다. 엄마-, … 어머니, 아버지는? 그러나 아이는 이 남자가 그런 것엔 대답해 주지 않는 것을 알았다.

장원 안에서 아이- 이제 모두가 그를 주희라고 불렀다. 주희는 어디든 갈 수 있었지만 갈 수 없었다. 남자가 회의를 연다는 방이 있는 복도에 들어서면 안 들어도 된다며 쫓겨났고 정원에서 새나 꽃 따위를 구경하면 걸치고 있는 옷을 구기지 말라며 누군가가 옮겼다. 주희가 갈 수 있는 곳이라곤 침실, 그가 앉아있는 알현실 -그도 대부분 그 남자만 들어올 뿐이었으나- , 공부를 위해 이동하는 작은 방을 제외하곤 없었다. 장원은 어린 주희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컸으나 그는 그 넓은 곳에 갇혀있었다.

교육도 이상했다. 주희가 생과 죽음의 관계를 받아들일 즈음에 시작된 사상 수업은 지나칠 정도로 억압적이었다. 주희가 아무리 갇혀 지낸다고 한들 담장을 넘는 바람까지 그들이 통제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성리학만이 유일하고 다른 것은 불필요하다는 설명을 들은 주희가 반론을 제시하면 교육을 맡은 이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닙니다, 폐하. 오래도록 속세에 계셔 잘 모르시겠지만, 성리학을 제외한 다른 것은 이단입니다. 그건 백성을 홀리고 사람의 마음에 있는 이를 일그러트리니까요. 주희는 그 모든 말이 거북했다. 속세라니, 황제가 언제부터 인세에 내려온 신이었던가? 불교가 과연 사람의 심성을 일그러트리는가? 그도 아니면…….

"폐하."

남자가 서늘한 목소리로 읊었다.

"이해를 못 하신 것 같군요."

주희는 그저 회피하기를 택했다. 귀를 닫고 마음을 닫으면 그나마 좀 편했다.

열다섯이 되었을 무렵 주희는 처음으로 장원을 나갔다. 복건성 바깥에선 황제의 추종자들이 모아온 사람들이 어린 황제의 앞에 꽃가루를 뿌리며 새로운 치세를 열어주기를 기대했다. 치세? 사람을 죽이고, 탄압하고, 자유 없이 제한하던 것이 치세던가? 성리학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을 죽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어찌 치세란 말인가……. 주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제 그는 면류관도 황제의 옷도 무겁지 않았지만 어깨 위로 쌓이는 비정상적인 충성은 여전히 버거웠다.

얼핏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주희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필시 저를 충성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충성을 받을 위인이 못 되었다.

 


주 원년, 15세의 나이로 주희가 황위에 오르다.

주 2년.

"… 이렇게까지 탄압할 필요는,"

없지 않나. 주희는 제 앞에 무릎 꿇려진 노승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그는 죽음을 각오했는지 담담한 낯이었고, 가면을 쓴 남자가 샐쭉 웃으며 몸을 숙여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국가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입니다."

"하."

저항 한 번 하지 않았다는 노승을 포박해 무릎 꿇려 처형하는 것이 필요한 일이라면, 그런 나라는 없어져도 좋지 않겠나. 주희는 대답하는 대신 손을 두어 번 내저어 사람을 물렸다. 남자는 저를 명분용으로 내세운 주제에 제 명령은 고분고분 들어 주희의 속을 뒤집어 놓곤 했다.

"사이가 좋지 않으신가 봅니다."

"… 대사께서는 두렵지 않으십니까?"

"설마요, 공포 없는 지성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저의 이치를 따라갈 뿐입니다. 이번 생에는 후회 없이 살았으니, 다음 생에는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겠지요."

"… 윤회설을, 믿으십니까?"

"예. 그러나 전생과 현생은 다르다고 믿습니다."

"어째서요?"

"인간이 죄를 지어 밟혀 죽는 개미로 환생한다면, 그 개미와 인간은 같을까요. 다음 생이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생의 나와 현생의 나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노승이 웃는다. 주희는 그저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노인의 지혜를 어린 주희가 따라가기에는 그것이 너무 넓은 바다를 닮아서 그랬다. 그런 주희를 아는지 모르는지 노승이 다시 온화하게 웃었다.

"법명을 지어드릴까요?"

"제가요."

"불법은 만민을 수용합니다. 황제도 예외는 아니지요."

"그렇습니까."

"저는 폐하의 부모님을 기억합니다. 성리학자가 이리 숭산에 올라와 참배를 드려도 되냐 물었더니, 하남성의 패자가 온화함을 알기에 이리 올 수 있었다고 했던가요. 폐하께서는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제게 축복도 받아 가셨습니다."

"……."

"폐하, 세상은 아름다운徽 법입니다. 폐하의 앞길을 막는 가시덤불이 괴롭고 힘드시겠지만, 언젠가는 저 하늘이 지독히 아름답다고 느끼실 때가 올 겁니다."

주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노승은 저를 위로하고 있었으나 그런 위로는 받아본 적이 없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모르는 쪽에 좀 더 가까웠다. 정말 법명이라도 지어줄 것처럼 고민하던 노승이 이내 입을 열었다.

"휘국徽國이라고 하지요."

"법명치고는 지나치게 세속적이군요."

"이런, 귀의하신다면 새 이름을 지어드리겠습니다."

"됐습니다."

"하하."

"…… 대사, 정말로."

"그만 말씀하시지요, 폐하. 어떨 땐 많은 말이 결정을 두렵게 합니다."

목소리 두 개가 겹쳐 울린다. 하나는 눈앞의 사람이고 하나는 장지문 너머의 것이다. 주희는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

"소림에… 합당한, 보상을 내리겠노라고 약속하겠습니다."

"이런, 이 노구의 걱정이 보였습니까?"

"당연한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하하, 그러면 되었습니다. 가보시지요, 폐하.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딱히 주희가 나갈 필요는 없었다. 가면을 쓴 남자는 장지문을 벌컥 열고 나타나 황제의 손목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주희는 맥없이 끌려가며 노쇠한 선사의 등을 돌아봤다. 방장은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끝내 마지막까지 주희는 방장의 표정이 어땠는지 알 수 없었다.

"사형까지 두 시진 남았습니다. 방식은 예정대로-"

"사약으로 해."

"예?"

"소림은 주나라 이전부터 중원의 북두라고 불렸네. 그런 자리의 방장을 함부로 대하는 건 예가 아니지 않나."

"그러나-"

"황명이다. 시신은 온전히 보존해 소림에게로 전달하도록 해. 강한 탄압은 반발만 일으킬 뿐이다."

"명 받들겠습니다."

어린 황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주희는 잡혀있던 손목을 내치곤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주 3년, 황제가 가신에게 휘국공의 칭호를 하사하다. 그해 중기 황제에게 배동이 붙었다.

축하드립니다, 어르신. 아, 이제 휘국공 전하라고 불러드려야겠군요!

하하하…. 별일 아닐세. 자네들이 큰일을 해냈지.

하오나 폐하를 되찾아 오자고 말씀하신 것은 휘국공 전하 아니십니까.

저항이 거세지 않아서 다행이었지. 결과는 바뀌지 않았겠지만.

자, 한 잔 받으시지요. 이제는 치세만이 저희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그래, 내 자네들에게 공신 작위를 내려주겠네. 건배하자고.

하하하하…….

 

 

배동이란다. 주희는 제 앞에 무릎 꿇어앉은 두 어린아이의 머리통을 가만히 바라봤다. 열여덟 살의 황제에게 붙이는 배동이라니, 저 치가 휘국공의 작위를 받더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아, 그래. 계획할 때부터 하늘이던 이에게 주희가 무슨 천장이 되겠는가? 주희는 시선을 올려 남자를 쳐다봤다. 기다렸다는 듯 그가 말을 이었다.

"폐하의 배동입니다."

"… 저 아이들이 내 학습 진도를 따라올 수는 있고?"

"그럼요. 영특한 아이들입니다. 시험을 친 아이들 중 가장 특출나기도 했고요."

"특출난……."

뒤집어 말하자면, 머리가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세뇌당해 황궁에 끌려온 것이 아닌가. 남자가 고개를 들라고 하자 아이들이 시선을 올렸다. 제 주인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어 그런지 눈빛에 경외감이나 황제를 배알한다는 기대감 따위는 없는 것이 볼만했다.

"언제부터?"

"내일부터 동석할 겁니다."

"그래."

주희는 안다. 저것이 내 눈과 입을 막겠구나.

경호와 숙헌이라고 했다. 저보다 한참 키 작은 이들이 병아리마냥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불안했지만 건장한 성인들이 따라다니는 것보단 훨 나았다. 배동을 붙인 순간부터 휘국공은 감시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으며 경호와 숙헌은 제 명령보단 휘국공의 명령을 우선으로 삼았다. 우스운 일이다. 권력을 잡길 바랐다면 저는 끌어내고 본인이 옥좌에 앉으면 되는 일을, 굳이 어렵게 돌아가고 있었다.

화를 풀어낼 곳이 없으니 주희는 한 달에 몇 번 없는 외출에 활을 쏘는 것으로 화를 달랬다. 명중이요! 하는 소리가 두세 번 울리고,

"이제 돌아가셔야 합니다, 폐하."

"… 아. 실수했군. 금위대장도 들어가 보게."

"걱정스러운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별일 아닐세. 금방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휘국공 전하의 일인가 보군요."

"금위대장은 겁이 없나?"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금위대장은 좌천직에 가깝습니다. 전하께서 여기까지 신경 쓰진 않을 테니 괜찮습니다."

"……."

주희는 눈을 깜박인다. 금위대장은 믿을만한가? 아니면, 이마저도 휘국공이 안배한 함정인가? 황궁 도처엔 온통 그가 깔아둔 덫이 있었다. 금위대장이 그의 덫이 아니란 보장이 없었으나, 주희는 제 목숨을 걸고 도박 한번 해 보기로 했다. 실패해도 죽기보다 더 하겠나? 붉은 머리의 주나라 황제가 필요한 이상 죽지는 않을 것이다. 빛 하나 안 드는 독방에 또 갇히는 것이면 몰라도.

"되었네. 이건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라."

"그렇습니까."

"나중에, 내 명령 하나만 들어주면 되었네. 자네에게 불이익이 가는 건 아니고."

"예."

"그래, 돌아가지."

금위대장이 그의 활을 받아들었다. 주희는 그에게 성금을 하사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일이 전부 끝났을 때 금위대장이 살아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주 6년.

공신을 불러들여라. 그건 경호에게 내려온 명령이었다.

금위대장에게 가서 이 칙서를 가져다주어라. 휘국공의 것이다. 이건 숙헌에게 내려온 명령이었다.

금위대장은 숙헌의 앞에서 칙서를 펼쳤다. 궁에서 일하는 하인들과 내시, 상궁이나 궁녀를 전부 물러내고 왕궁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숙헌에게 차와 다식을 내어주고 빠르게 명을 전달했다. 휘국공의 명이라는 말을 들은 궁인들은 일사불란했다. 황명이어도 이렇게 절도 있지는 않았을 터다.

"왜 잠가요?"

"… 연회를 크게 여신다는구나. 궁이 며칠 소란스러울 테니, 그동안 궁인들은 잠시 나가서 생활하라고 하셨다."

"저랑 경호도요?"

"아직 성년은 아니지 않나? 나랑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데."

"경호는 아직 안에 있어요."

"어서 가서 데리고 나오거라."

"네."

숙헌이 휘국공의 말은 잘 들어서 다행이었다. 나란히 손을 잡고 나오는 둘을 확인한 금위대장이 황실의 가장 남쪽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쿵, 하고 잠금쇠가 내려오는 소리가 심장을 쿵쿵 때렸다.

'저는 관성대제를 모시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폐하.'

'그래서?'

'옳지 못한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할 줄 알았기에 여기서 공신들의 시중을 들고 있지요.'

'금위대장은 후환이 두렵지 않나?'

'옳지 않은 것을 옳다 말하는 것이 더 두렵습니다.'

운이 좋았다. 주희는 각자 한 보따리씩 싸 온 선물을 안고 있는 공신들을 쳐다보았다. 공신이 어찌나 많은지 이 너른 알현실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다. 휘국공이 뇌물을 받고 작위를 내렸던지, 아니면 그날 하남성의 한 산을 불태운 이가 여기에 전부 모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생과 사의 경계는 종이 한 장보다도 더 얇은 선이었다.

"탄신을 축하드립니다, 폐하. 선물은 천천히 열어보시지요."

"난 자네의 선물이 궁금한데, 휘국공."

"아, 그럼요. 좋은 검을 준비했습니다. 장인이 칠주야를 밤새워 재련하고 달군 쇠에 세공을 더했고, 검자루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비취를 넣어 제조한 검입니다."

"음."

"무겁진 않으신가요?"

"무겁진 않냐고?"

글쎄. 검집에서 부드럽게 빠져나온 검이 촛불의 일렁임을 받아 반짝였다. 밖에선 악단이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고, 유명하다는 주루의 기생들도 불려 온 듯했고. 성리학의 나라를 표방하는 주제에 방탕하게 노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잘하는 치들이었다. 주희는 검을 꺼내든 채 비단이 깔린 길을 걸었다. 성리학, 성리학……. 지긋지긋한 것들. 각 성문을 지키는 이들에게 언질은 주었지만 제대로 된 대피가 될 것 같진 않았다. 어느 한 자리에 멈춰 서자 저를 봐줄까 기대한 공신이 선물을 내밀었다.

"그래, 자네는."

"거, 건강에 좋다는 산삼입니다! 그 외에는 오미자나 복분자를 준비했습니다."

"그런가."

복분자. 꼴에 후사는 필요한가. 주희는 시선을 내렸다. 술병을 감싼 것이 분명할 흰 천에서 붉은 기가 슬금슬금 배어 나왔다. 주희는 공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곧 깨달았다. 집에 불을 붙이고 밖으로 나가려는 아비의 심장을 꿰뚫은 치였다.

"안타깝게 되었어."

유려한 검로가 허공을 그었다.

"자네는 내 건강한 모습은 못 보겠군."

정변의 시작이었다.

주희는 칠주야 내내 검을 휘두르며 다녔다. 제 표정이 어땠는지는 확인할 겨를도 없었으나 어차피 피에 젖어 무슨 표정을 지어도 기괴하게 보일 것이 분명했다. 공신들은 살려달라 빌며 그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리다가 목이 떨어져 나갔다. 피분수가 황실 바닥에 깔린 청강석 틈새를 파고들었다. 주희는 창백한 낯 위로 피를 문질러 닦으며 걸음을 옮겼다. 동문에서 일곱, 북문에서 열셋을 참수하고 나니 검이 무뎌진 듯 스물두 번째 목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주희는 다른 공신이 바쳤던 검을 새로 꺼내 휘두르고 다녔다. 제식 검은 너무 쉽게 무뎌졌다. 주희는 군부의 창고를 열어 뭉툭한 도를 꺼냈다. 망나니가 쓰는 곡도가 대다수였으나 그즈음에 주희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새붉게 물들였다는 비단 위로 거무죽죽한 피가 튀었다.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비단이 질질 끌릴 때마다 시체가 끌려가듯 핏자국이 남았다. 어느 창고에 숨은 공신 넷은 바깥에 기름을 붓고 불을 던져 태워죽였으며 어느 곳에서는 서로 살아남으려고 죽이고 죽이다 남은 한 사람을 죽였다. 휘국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그를 발견한 건 칠주야의 마지막 밤이었다.

"어딜 가지, 휘국공."

"제, 제게 이러실 순 없습니다, 폐하! 제가 어떻게 그 자리에 당신을-"

"내 이름은 아나? 난 주씨가 아니야. 내 어머니도 아버지도 성씨가 있을 만큼 부유한 집안이 아니었거든."

"폐하!"

"내가 바라는 게 전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내 이름은 희希가 되었다. 자네는 영영 모르는 척했겠지만."

"폐하, 실수하시는 겁니다. 공신을 이리 다 죽이시면 앞으로의 국정 운영은 어찌하시려고요!"

"어찌하냐고?"

주가 비웃었다. 실성한 듯 높은 웃음소리가 이어지나 싶더니 뚝 끊겼다. 철벅거리는 발소리,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남자를 옥죄었다.

"글쎄, 그건 휘국공이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않나?"

남자의 기억은 그곳에서 끝이었다.

 

금위대장이 남문을 열었을 때는, 황궁 내부가 온통 전쟁터였다. 담장을 넘어 혈향이 느껴지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였다. 정변에 휘말렸던 악단이나 기생들은 전부 빠져나왔다지만 모였던 공신 중 생존자는 없는 것 같았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도 있었고 폭발이 일어난 곳도 있어 내부가 온통 혈향과 화약 냄새로 가득했다.

그 한가운데에 피로 온몸이 젖은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금위대장마저도 그것이 황제임을 알아보는 것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부복하자 주희가 입을 열었다.

"경호와 숙헌은."

"자고 있습니다. 아직 새벽이니까요."

"일어나거든 산둥성으로 보내 공림을 찾으라 하세요."

"폐하."

"'유'를 불러오라고 하십시오. 폭군을 끌어 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희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금위대장은 부복한 채 황제의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황궁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나이 21세 때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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